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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드림보트-10

W-net 방송국 작가실.
희수는 편성제작국장 앞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작가실에는 희수말고도 요즘 잘 나가는 신진작가 네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제 슬슬 기지개를 켤 때가 왔잖아. 제발 빼지들 말고 한 프로씩만 맡아 줘. 특A급으로 대우해 줄 테니 말야. 원한다면 전속계약을 해줄 수도 있어. 그게 싫다면 다른 쪽 일 자유롭게 해도 개의치 않을 테니까, 자기들 하고 싶은 프로그램 하나씩만 선택해서 뛰어 달라고.』
국장의 제의는 그런 거였다.
갑자기 수십 개의 채널이 가동되면서 극심한 인력난이 발생하자 방송국들의 스카우트 경쟁은 불을 뿜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극심한 쪽이 연출진과 카메라맨 파트였지만, 괜찮은 작가를 영입하기 위한 물밑전쟁도 여간 치열한 게 아니었다.
국장은 기존 방송국에서 알고 지냈던 작가들을 무더기로 끌어올 심산이었다.
구체적인 조건은 아직 얘기하지 않았지만 거기 모인 작가들은 어렴풋이 W-net의 대우에 관해서 짐작하고 있었다. 아는 PD들이 미리 윤곽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스카우트를 한 만큼 기존 방송국에서 받은 수입 이상은 무조건 보장할 것이고, 향후 1년 이상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다는 정보였다.
작가들은 국장의 제의에 다분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궁금한 것은 계약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희수의 입장은 달랐다. 돈은 벌 만큼 벌고 있는 터여서 혹할 이유가 없었다. 여성채널이라는 점도 같은 여성인지라 마음 편한 데가 있었지만 대신 프로그램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 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방송 일을 정리하고 싶었다. 안식년제…… 방송 3년차의 겨울은 비워 두고 싶었다. 이번 겨울은 좀 특별할 것이기에.
『국장님께서 불러 주셨다는 것만 해도 너무 고맙고 영광스런 일이에요. 근데 올 겨울엔 스케줄이 있어요.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뭔데?』
『여행 스케줄요.』
『어이구, 팔자 좋으시네! 얼마 전에 라디오 출연했다더니 아예 기행 리포터로 발벗고 나선 거 아냐?』
『어, 그거 대외비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원고 쓰는 일 지겨워서 리포터로 전향할까 봐요.』
『좋다, 좋아! 그럼 리포터로 확실하게 키워 줄 테니까 이력서 한 장 써 와. 리포터를 하든 작가를 하든 정희수는 무조건 W-net식구야, 알아들었어?』
사람 좋아 보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서 국장은 일어났다.
『오늘 내가 제의한 내용 심사숙고해서 다음 주까지 확답을 줬으면 해요. 진짜 프로들하고 손잡고 일다운 일 해 보고 싶은 게 내 생각이에요.』
국장이 작가실을 나가기 무섭게 점퍼 차림의 PD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 고명하신 작가님들 다 모이셨네요. 바쁘시지 않다면 뭐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작가들은 저마다 일어서려다 말고 엉거주춤 다시 주저앉았다.
『전 특집반 조재봉입니다. 면식이 있는 분들도 계시고 초면인 분들도 몇 분 계신 것 같은데 잠깐 실례 좀 하겠습니다.』
조재봉은 국장이 앉았던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 특집팀은 개국 때부터 여성들의 성의식에 관한 프로그램을 준비해 왔어요. 그 동안 그럭저럭 몇 편 만들었는데 아이템이 영 달려 미치겠습니다. 뭐 좋은 소재들 없습니까?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시는 분께 후한 사례를 해 드리겠습니다.』
『후한 사례라니 회가 동하네요. 구체적으로 사례의 기준을 밝힐 순 없나요?』
『소재 채택료를 지급하겠습니다.』
『글쎄 그 채택료가 얼마인지 밝히시라니까요?』
단발머리에 당찬 인상의 작가 하나가 꼬치꼬치 말끝을 물고 늘어졌다.
『그걸 어떻게 말합니까. 소재만 좋다면 제 월급 전부라도 털어서 보답할 수 있다면 되겠습니까?』
그제서야 작가들은 정색하고 진지한 표정을 되찾았다.
희수는 메모지에 낙서를 하면서 의문점을 물었다.
『성이라는 게 워낙 미묘한 문제 아닐까요? 그 어떤 여성도 성에 관해서는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여론조사의 정확성도 믿을 게 못 되고, 화면구성도 방송윤리위원회의 규정을 생각하면 만만치 않을 텐데요.』
『맞아요.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실정으로 보면 우리 프로그램의 성공률은 장담할 수 없는 게 사실이죠. 일본의 심야 프로그램을 예로 든다면 성에 관한 프로그램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 해답이 나옵니다. 혹시 보신 분 있으세요?』
작가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일반 시민들이 스튜디오에 나와 대담한 주제를 내걸고 자유롭게 토론을 합니다. 가령 그날의 주제가 성감대라 친다면 패널은 물론이고 방청객들까지 진지하게 성감대의 본질을 놓고 난상토론을 하는 거죠. 사이사이에 반라의 미녀들이 나와 자신의 성감대가 어느 곳인지 구체적으로 실물을 보여 줍니다. 심한 경우는 MC가 그 곳을 애무해 보는 장난기 넘치는 동작도 허용됩니다. 물론 일본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우리와 판이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방송을 하려면 그 정도로 제약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게 원칙 아니겠습니까? 보다 확실하게 성문제를 다루려면 아예 포르노 채널 하나를 신설하든지 해야지, 여성채널로 접근한다는 건 무리가 많아요.』
『여성의 성을 조명하는데 남성 PD가 연출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아요.』
단발머리가 또 트집을 잡았다.
『그건 너무 편협한 발상 아닙니까?』 조재봉도 발끈했다. 아이디어를 얻으러 왔는데 연출권의 침해를 당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단발머리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남자는 절대 여자들의 성을 이해할 수 없어요, 생리적인 구조가 다른데 생각이 같을 수는 없는 거죠.』
『아, 우리 W-net 안에서는 성대결 논쟁은 하지 맙시다. 여긴 여성채널이니까 그대들이 주인공입니다. 어쨌거나 PD가 남성이라는 단점을 여러분이 좀 메워 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조재봉은 교묘하게 말을 돌려 그녀와의 설전을 회피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올해 유난히 성범죄 사건이 많이 발생했잖습니까? 모대학 교수가 여조교를 성희롱했다 해서 재판까지 붙었고, 신촌의 모대학 성악과를 다니는 음학도 하나는 전형적인 야타족으로 수십 명의 여자들을 꾀어 등을 쳐먹다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또 수백 명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제2의 박인수 사건도 있었죠? 사회가 풍요로워질수록 성범죄 발생률이 높아진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여성채널이 이런 사회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표현의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문제를 정면으로 파헤치는 노력은 보여 줘야죠.』
조재봉의 열변에 희수는 공감했다.
그녀 자신도 얼마 전에 플레이보이 사건을 접하고 원고화하려다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기에 그의 고충과 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중요한 문제지요. 프로이트 같은 사람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심리를 성이란 잣대로 규명했으니까요. 그런데 단순히 그런 사회적 현상을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메시지가 약하지 않을까요? 고발은 보도국 기자들의 몫으로 돌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뉴스 차원의 고발과는 당연히 차별화해야죠. 일단 방송시간과 형식의 차원이 다르니까.』
『얼마 전에 그 희대의 플레이보이 사건이 터졌을 때 아침방송 오프닝 멘트로 논평을 할까 했는데 도저히 적당한 논리를 못 찾겠더라구요. 대놓고 그 사람을 매도하자니 표현이 식상할 것 같고, 피해자인 여성들을 거론하자니 너무 한심하고, 무턱대고 사회 탓으로 돌리자니 초점이 흐려지는 것 같고, 아무튼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어요.』
희수가 진지하게 화제를 이끌어 가자 조재봉이 반색했다.
『아, 그 문제로 고민을 하신 적이 있었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사실은 우리 취재팀이 여름 내내 그 플레이보이를 추적했었죠, 3개월 동안 공을 들였습니다만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플레이보이의 사회학, 혹은 카사노바의 여성학, 타이틀만 생각해도 뭔가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할 것 같지 않습니까?』
『추적에 성공했다면 정말 특종감이었을 텐데 말예요. 그 남자의 사생활. 그의 의식, 여성관, 유혹술, 그가 만난 여자들, 그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면 완성도를 떠나서 폭발적인 시청률을 올렸을 거예요.』
『당연한 얘기죠, 우리들도 최악의 경우 몰래 카메라까지 설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쪽 방면에 베테랑이시잖아요, 조재봉 감독님은.』
『베테랑이면 뭐 합니까? 그쪽은 형체도 없는 물귀신인데.』
『용의주도한 사람인가 보죠?』
『그러니까 수백 명 섭렵하고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대지 않습니까. 조사해 보니까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요. 재력도 있고, 배경도 있고, 빠질 구멍도 있는 홍길동이더라구요.』
그때 단발머리가 다시 끼여들었다.
『그러게 여자 PD가 맡아야 해요. 그것도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자가.』
『아, 미인계를 쓰자는 아이디어인가요?』
『그렇죠, 그 바람둥이가 출몰하는 거리에 여자 PD가 섹시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거예요. 바람둥이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아야겠죠? 그리고 의심 받지 않게 적당히 끌려다니는 거예요. 바람둥이가 자신의 아파트로 안내해 준다면 그 이상 고마울 것도 없을 거예요. 거기 가서 결정적인 순간에 덜미를 잡는다! 어때요,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나요? 내가 지금 시나리오를 한 편 써 버린 거 같네?』
단발머리 작가가 말을 끝내 놓고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이 더 웃겨서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조재봉이 키들키들 웃음을 삭히고 나서 토를 달았다.
『그 시나리오도 문제가 있어요. 바람둥이의 실력을 너무 낮게 평가하면 안 돼죠. 여자 PD가 함정취재까진 성공했다 쳐도 아차하는 순간 그의 마수에 넘어가 버리면 어떡합니까?』
『그 자한테 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군요.』
『물론이죠, 당해도 그냥 당한 게 아니고 나체 사진까지 찍히고 달랑 쫓겨나면 그 책임을 누가 지느냐 이거죠.』
여자들은 그 어처구니없는 낭패에 처한 여자 PD의 모습을 연상하며 또 웃었다.
희수는 함께 웃으면서도 괴물과 같은 카사노바의 존재에 호기심이 동하고 있었다.

바겐세일이 한창인 백화점은 폐장시간 직전인데도 인파로 붐볐다.
특히 의류매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집중되고 있었다. 겨울을 앞두고 작년 겨울옷의 재고물량을 풀어 놓아 가격파괴 작전을 편 백화점의 기획이 멋지게 맞아떨어진 거였다.
동선은 방금 산 런던포그를 걸쳐 입고 상표를 떼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그다지 어색하진 않았다.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에스컬레이터를 탄 동선의 시야에 한 여성의 모습이 걸려들었다. 아래층 숙녀복 코너 모퉁이에서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동선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지척에 다가와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그녀는 글씨 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길다란 백지에 컬러 매직펜으로 여성의류의 상표 같은 걸 쓰고 있었다. 글씨를 쓴다기보다는 그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그녀의 손은 매끄럽게 백지 위를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슥슥 긋고 휘젓는데도 글자들은 일목요연한 질서와 미학을 내뿜으며 살아나는 거였다. 여성의류의 상표는 대부분 외국어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글씨의 느낌이 더 생동감 넘쳤다.
그녀는 글씨를 쓰고 나서 그림붓에 물감을 묻혀 밑줄을 넣거나 동그라미를 쳤고 때론 글자의 자모음 획 하나 하나에 음영을 새겨 넣곤 했다. 그러자 같은 글씨여도 붓칠 한 번에 전혀 다른 느낌의 포스터가 되는 것이었다. 차라리 마술이라고 해도 좋았다.
『폐장 시간이 다 됐는데 뭘 그리 열심히 쓰고 계십니까?』
동선이 묻자 그녀가 방긋 웃고 나서 대답했다.
『손님들이야 무심코 지나치겠지만 저희는 고객의 눈길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루 종일 글씨만 쓰나요?』
『네.』
『좋은 직업이군요. 그럼 백화점 홍보실 소속인가요?』
『판매기획 파트 POP(Point of Purchase)실이란 곳에 우리 같은 직원들이 여러 명 있어요.』
천성이 밝아 보이는 여직원은 인상답게 낯선 고객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선이 계속 지켜서서 글씨 쓰는 광경을 보고 있자 조금 부담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렇게 계속 보고 계세요? 괜히 손이 떨리잖아요.』
『우연히 지나가다 봤는데 정말 신기하군요. 마법의 손입니다.』
『후훗, 그게 제 별명인 걸요.』
『미대 나왔나요?』
『아뇨, 고졸이에요.』
『그럼 별도로 글씨 쓰는 법을 배우기라도 한 겁니까?』
『원래 잘 썼어요, 글씨만.』
『계속 쓰세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다 쓸 때까지 옆에서 그냥 보고만 있을 게요.』
동선이 벽에 등을 대고 팔짱을 꼈다.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할당된 양의 백지에 계속 글씨를 썼다.
마침내 그녀가 작업을 마치고 매직펜의 뚜껑을 닫았을 때 그가 말했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발견한 것 같군요. 그 손에 꼭 어울리는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갑작스런 제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선물인데요?』
『지금부터 골라 봐야죠.』
여자가 피식 웃었다.
『농담하지 마세요. 전 바빠요.』
『백화점 바로 옆에 커피숍이 있죠? 퇴근하는 길에 속는 셈치고 유리창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룸카페. "상류사회"의 스페셜 룸.
한 명의 사내와 세 명의 여자가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인상의 여자들은 난해한 신곡의 가사를 화면도 보지 않고 잘도 외워 불렀다.
그녀들이 노는 분위기와 테이블 위에 차려진 양주 메뉴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여자 하나가 갑자기 양수경의 노래를 선택해 부르자 술자리가 숙연해졌다. 앉아 있던 여자 한 명이 조명을 끄더니 다른 여자의 등을 떠밀었다.
등을 떠밀린 여자는 한사코 움추리며 좌석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내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둘은 한 평 남짓한 빈 공간으로 나가 블루스를 추었다. 마이크를 잡은 여자가 더욱 애절하게 노래를 불렀고 좌석에 남아 있던 여자는 꿈에라도 취한 것처럼 게슴츠레 눈을 뜨고 춤추는 커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쑥스러운 몸짓으로 사내의 리드를 힘겹게 따라가던 여자는 이제 어느 정도 스텝의 흐름을 감지한 듯 반주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사내와 밀착되는 것이 두려운 듯 히프를 뒤로 한껏 뺀 채로 블루스를 추는 그녀의 모습이 여간 풋풋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심은영.
G백화점 판매기획 파트의 귀염둥이로 통하는 그녀는 지금 구름 위에 올라탄 것처럼 황홀한 기분이었다. 함께 손을 맞잡고 서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바 없지만, 그 낯선 사내가 오늘 하루를 생애 최고의 날로 만들어 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업무를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은영은 자신도 모르게 허둥대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농담처럼 던진 이상한 사내의 한마디가 그녀의 침착성을 앗아가 버린 거였다.
그녀는 단짝 친구 둘을 데리고 백화점을 나왔다. 사내가 말한 커피숍으로 달랑 혼자 나간다는 건 웬지 자신이 없었던 거였다.
바바리코트의 사내는 정말 커피숍 안에서 바깥을 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의 배경을 믿고 선뜻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는 은영 일행을 보더니 자리를 옮기자고 했고 가까운 찰떡등심집으로 데려가 꿀맛 같은 등심을 사 줬다.
전라도 강진에서 약초를 먹이고 클래식을 들려 주며 게다가 매일 마사지까지 해서 사육한 특급 한우 고기를 구워 먹으며 그들은 금세 친해졌다.
모르는 사람의 환대에는 반드시 그 저의를 경계하는 것이 여자들의 공통된 심리였지만 사내는 별로 바라는 게 없었다. 그저 은영의 아름다운 손가락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 말에도 어떤 음모나 유혹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들은 쉽게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들 셋 모두 POP 아티스트로 그 일에 긍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쁜 글씨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 여고 시절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껏 받기도 했지만, 사회에서 그 능력은 사실 별볼일 없는 재주였다. 하루 종일 글씨를 그려 대는 일로 월급을 받는다는 건 단순한 육체노동일 뿐이었다. 발전도, 전망도 없는 아르바이트나 마찬가지였다.
관리 파트에서 근무하는 대졸 여사원들이나 미끈한 용모의 엘리베이터 걸들이 콧대를 세우고 앞을 지날 때면 괜스레 기가 죽곤 했었다. 똑같은 정식 사원이어도 그들이 더 백화점의 주인일 거라는 열등감이 들었다.
열등감은 상대적으로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었다. 그들은 똘똘 뭉쳐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는 백화점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이자, 분장사가 아니냐.
그런데 그들의 직업에 반하여 손가락에 매료된 사람이 나타났으니 싫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식당에서 열심히 떠들어 댔다.
우리가 쓰는 글씨가 백화점의 인상을 좌우한다는 것, 더 예쁜 글씨를 창조하기 위해 집에서도 도안집을 본다는 것, 모든 사물의 형태를 글씨를 이용하는 것, 등등 작업에 관한 노하우와 애환과 고충과 에피소드를 신나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얘기를 참으로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진정한 대중 예술가로 추앙했으며, 그들의 손가락을 사고 싶다는 찬사까지 전했다. 그리고 2차를 제의했다.
그들은 노는 법을 몰랐다. 늘 하던 대로 저녁 먹고 나면 노래방 가서 소화시키는 게 정석 아니냐고 대답했다.
그는 수준 높은 노래방을 알고 있다며 이 곳 "상류사회"로 데려온 거였다.
그들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들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매너 만점의 팬 앞에서 화끈하게 놀아 주리라 생각했다.
썸싱스페셜 한 잔씩을 건배하고 나서 그가 선물을 꺼내 은영에게 건넸다.
뭘까?
은영은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진주 반지다, 어쩜!』
자줏빛 보석케이스 안에 꽂혀 있는 반지를 확인하고 친구들이 감탄했다.
『진짜 진주일까?』
은영보다 친구들이 먼저 반지를 빼들고 감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석을 잘 몰랐다. 그러나 백화점 귀금속 코너의 보증서와 보석함 밑바닥에 붙은 가격 스티커만 보고도 그들 손에 든 물건이 무척 값진 선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진주를 물고 있는 링에도 18K 표시가 선명히 박혀 있었다.
은영은 차마 반지를 낄 수 없었다. 너무 비싼 선물이기도 했고 반지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때 그가 그녀의 손을 당겨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이 예쁜 손가락에 대한 경의라고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는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지와 손가락의 조화는 그녀 스스로 보아도 아름다웠다.
『진주는 다이아몬드만큼 광채를 발하진 않습니다. 루비처럼 강렬한 색채를 가진 것도 아니고요. 깊고 맑은 바닷속의 조개가 제 살의 상처로 오래오래 빚어낸 고통의 결정체가 바로 진주입니다. 그래서 은은하지만 내밀한 아름다움이 감도는 보석이지요. 은영 씨 손가락과 기막히게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 순간, 실내의 분위기가 묘하게 경색되었다.
친구들이 애써 선망의 눈빛을 감추더니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뽑아들었다. 그런 분위기가 끝내 둘의 블루스까지 연출하고 만 거였다.
노래가 끝나자 친구는 내처 임희숙의 곡을 불렀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블루스 한 곡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가려던 은영은 다시 그의 손에 이끌려 스텝을 밟아야 했다.
혼자서 좌석을 지키던 친구도 제 흥에 겨워 나오더니 열창하는 친구를 끌어안고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두번째 타임에서 은영은 조금더 대담해질 수 있었다. 일단 친구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운신이 자유로웠다. 그녀는 엉거주춤 뒤로 빼고 있던 히프를 원위치시켰다.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정면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앞가슴이 서로 슬쩍 닿았다. 스텝을 옮길 때 허벅지도 스쳤다.
그러나 사내는 끝까지 신사도를 지켰다. 은근히 신체 접촉을 즐기는 기색은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오직 그녀의 손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그시 잡은 양손에 가끔씩 힘을 전달하기도 하면서 행여 그 보석 같은 손이 다칠세라 신경을 기울이는 거였다. 그리고 계속 진주반지가 끼여 있는 그녀의 손만 주시했다.
블루스가 끝났을 때도 그는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은영은 자리에 앉으면서 동그랗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바닥에 웬 땀이 그리 촉촉이 배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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