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보트-9
잘난 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잘 풀리게 마련인가.
일권은 맥주잔을 기울이며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삭혔다.
L호텔의 사파이어 룸. 이봉영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는 대성황이었다. ‘ㄷ’자로 차려 놓은 뷔페 테이블엔 접시를 든 하객들이 줄지어 돌았고, 홀을 가득 메운 인파 때문에 출입문을 활짝 열어 둘 정도였다.
시인은 홀 중앙에 앉아 사인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카메라 두 대가 서로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서로 각각 다른 매력을 위하여>.
상당히 긴 제목을 붙인 이봉영의 신작 시집은 출간되기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스포츠 신문에 매일 한 편씩 연재되어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아 온 작품집이기 때문이었다.
신문사의 지원사격도 요란했다. 오래 전부터 출판 예고기사를 집중적으로 실어 왔고, 초특급 호텔을 잡아 출판기념회까지 열어 준 거였다.
짧은 연륜의 30대 시인에게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은 신문사측의 속셈은 뻔했다. 출판기념회 자체도 하나의 광고 플레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봉영 시인은 어쨌든 출판불황의 시대에 몇 안 되는 베스트셀러 시인이었다. 시작업뿐만 아니라 감칠맛 나는 대중가요의 가사까지 발표하여 히트곡 메이커로도 유명했다. 전국의 노래방에서 들어오는 저작권료만 해도 한 달에 수백만 원이 넘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시를 써서 밥을 먹고 가사를 써서 돈을 버는 재주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사파이어 룸엔 낯익은 대학 동문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회포를 풀고 있었다. 교수들부터 재학생에 이르기까지 문창과 출신의 내로라하는 동문들이 모여 파티의 풍성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 학교 출신 글쟁이(?)들이 이처럼 호사스런 마당에 모여 보기는 처음 있는 일일 것이었다. 그래서 이봉영의 존재는 한층 빛이 나는 거였다.
일권은 차례를 기다렸다가 이봉영의 앞에 우뚝 섰다. 남들처럼 축하봉투를 내밀지는 못했지만 시인의 사인이 담긴 시집은 꼭 받아야겠다는 자세로 서 있었다.
사인에만 열중하던 이봉영이 비로소 일권을 보고 고개를 쳐들었다.
『와 줘서 고맙군.』
그는 그 한마디로 일권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묵묵히 사인을 했다.
김일권 님에게…….
사인을 지켜보던 일권이 말했다.
『한 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은비 걸루.』
순간 시인의 눈두덩이에서 경련이 일었다.
『은비를 찾았나?』
『아뇨, 하지만 언젠가는 찾게 될 겁니다.』
이봉영은 잠깐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순순히 사인을 해서 넘겨주었다.
『고맙습니다. 은비도 좋아할 거예요.』
일권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봉영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밀려오는 하객들에게 사인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권은 먼발치에서도 그의 흔들림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이봉영에게 복수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의 행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잔인한 음모가 싹트는 거였다.
일권의 첫사랑, 아니 문창과 동기들 모두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은비를 망가뜨린 사내. 그렇게 맑은 영혼의 후배를 건드려 놓고 아픈 사랑의 체험을 했노라 떠벌리는 사기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권의 동기들이 이봉영의 출판기념회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이봉영 타도의 선봉에 나섰던 김일권이 일부러 이 곳에 나타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혹시나 은비의 소식을 귀띔해 줄 은비의 여자친구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권은 여자들에게 은비의 이름을 대고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러나 파티가 막을 내릴 때까지도 은비의 소식을 알고 있는 여자는 찾을 수 없었다.
씁쓸하게 파티장을 빠져나오던 일권의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이봉영이었다.
『얘기 좀 할까?』
그는 일권을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갔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나?』
『…….』
『나한테도 변명할 기회는 줘야지.』
『변명할 건덕지라도 있습니까?』
『말 조심해, 건덕지라니! 난 어찌됐건 자네의 선배야.』
『선배 대접은 받고 싶은 모양이죠?』
『또 몇 대 얻어터지지 말고 내 말이나 끝까지 들어.』
이봉영이 정색하며 협박을 했다.
또 몇 대라?
김일권은 그 말에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가 또 몇 대를 들먹이는 건 은비가 실종된 직후의 주먹다짐을 떠올리라는 경고였다.
그때 일권은 은비에게 상처 입힌 그를 찾아갔고 술기운을 빌려 냅다 한 방 갈겨 버렸었다. 그런데 이봉영은 맞고만 있지 않았다. 불같이 일어서더니 달려들었던 것이다.
일권은 옳거니 잘됐다 싶었다. 이미 뒤집힌 눈인데 인정사정 가릴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일권은 이봉영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터졌다.
사랑 타령이나 할 줄 아는 시인으로만 생각했는데 매서운 발길질이며 급소만 골라 때리는 주먹 씀씀이가 보통 강력한 게 아니었다. 일권은 나중에야 그가 해병대 출신에 태권도 유단자란 사실을 들었다.
그 처참한 사건 이후로 일권은 칼을 갈았다. 언젠가 똑같은 방법으로 맞은 매를 되갚아 주기 위해 치졸하지만 합기도장을 다녔던 것이다.
『이 좋은 날 재 뿌릴 생각은 없시다. 하지만 이 선배,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고 삽시다. 아무리 막가는 세상이라고 그러면 못써요. 아직 시집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제목부터 기분 나쁘지 않냐구요.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서로 각각 다른 매력을 위하여’라니, 이런 거지 같은 제목이 어딨수?』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면 시집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 난 은비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은비?』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히 말하지. 한때 은비와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어. 결혼까지도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은비랑 맺어지기에는 장애물이 많았어. 무엇보다도 성격 차이가 심했고…….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은비와의 관계에서 가장 많이 멍든 사람은 바로 나야. 걔랑 헤어져서 아팠고, 걔가 없어져서 아팠고, 지금까지도 속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나란 말이다. 시시하게 사랑 같은 단어를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사랑은 사랑하는 당사자끼리 부족한 걸 채워 주는 상호보완의 관계 아닐까?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거래라고도 할 수 있겠지. 거래가 깨진 책임도 당사자 둘만의 몫이야. 그런데 뭘 안다고 제삼자인 자네가 끼여드는지 모르겠어.』
『제삼자라구? 웃기는 소리 작작 하쇼. 이 선배한텐 은비가 거래 대상이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가장 소중한 친구였소. 은비가 사라지기 직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바다에 빠져죽은 다음, 귀신으로 뛰쳐나와 두고두고 당신을 괴롭히고 싶댔어.』
『꽉 막힌 놈이군. 그래 은비가 그렇게 자네한테 소중한 사람이었다 치자. 그럼 은비한테도 자네란 존재가 소중했을까?』
『……?』
『어쩌다 걔가 자네한테도 마음을 줬는지 모르겠지만 걘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결하거나 고귀한 여자는 아니었어. 자네도 알겠지만 걔 배꼽 밑에 팥알만한 반점이 있다는 거 나말고도 아는 사람 수두룩해.』
『이런 거지 같은 새끼!』
일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너무 사전 동작이 컸던 탓에 목표를 가격하지 못했다.
이봉영은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아 꺾고 말했다.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은비도 그렇고 너 같은 놈 본다는 자체가 역겨우니까 말이다.』
이봉영은 일권의 팔을 비틀어 홱 밀쳐 버리며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도의 재떨이 박스에 처박힌 일권은 활어처럼 푸르르 몸을 떨고 일어섰다.
그때 허리춤에 찬 무선호출기가 진동했다.
상미의 긴급 호출이었다.
그는 버튼을 누르고 나서 마음을 추슬렀다. 생각 같아서는 파티장으로 난입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봉영을 패대기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 행동의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닌가.
그는 바닥에 떨어진 시집 두 권을 집어들고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갔다. 상미의 호출이 결정적일 때 그를 구한 건지도 몰랐다.
방송 출연 사흘째 되는 날.
희수가 스튜디오에서 나오자 교환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받아 보세요. 남자예요.』
희수는 갸우뚱하며 수화기를 받았다.
누굴까? 스튜디오로 전화 걸 사람이 없는데…….
『전화 바꿨습니다.』
『목소리 반갑습니다.』
『혹시 뉴질랜드에서……?』
희수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떨었다.
『알아들으시는군요, 우린 참 특별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라디오를 들으셨나요?』
『네, 이틀 전인가요, 낚시터에서 우연히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리더군요. 무척 반가워서 다이얼을 눌렀습니다.』
희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교환대 주변을 서성거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낚시를 하시나 봐요?』
『서울 근교지요, 오늘 저녁에도 계획이 있는데…… 낚시터 부근으로 와서 그때처럼 길을 잃고 헤매실 의향 없으십니까?』
『서울 근교 지리가 어두우니까 당연히 헤매겠죠. 어딘데요?』
『방송중이라 이 전화 계속 쓰기가 눈치보일 텐데 팩스번호를 불러 주십시오.』
희수는 그제야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과연 수화기를 뺏긴 교환의 입술이 한 치나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녀는 팩스번호를 불러 주고 편성국으로 내려갔다.
이른 시간의 편성국은 텅 비어 있었다. 빈 책상마다 즐비하게 쌓인 조간신문들이 상쾌한 휘발유 내음을 풍겼다. 그녀는 팩시밀리와 복사기가 배치되어 있는 OA룸 앞에서 발을 구르며 기다렸다.
쓱쓱쓱…….
팩시밀리가 감광지를 토해 냈다. 9시 프로그램의 작가가 보낸 원고였다. 그 다음엔 교통 상황실에서 보낸 러시아워의 교통정보, 기상청의 일기예보, 청취자의 모니터 등등 팩시밀리는 아침부터 과로하고 있었다.
희수는 괜시리 불안했다.
보낼 때마다 통화중이면 짜증날 텐데. 차라리 교환의 눈칫밥을 먹더라도 전화로 약속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용케도 그가 보낸 약도는 10분 후쯤 빗발치는 원고 틈바구니를 뚫고 팩스의 출구로 기어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희수는 팩시밀리 용지를 들여다보았다.
수인선이 지나는 염전 둑길.
약도는 비교적 상세했다. 서울에서 부천으로 간 다음 시흥시 포동 쪽으로 빠지면 소래포구 못 미쳐서 왼쪽으로 커다란 염전이 있노라는 해설까지 곁들여 있었다.
약속시간은 오후 여섯 시 반.
그 무렵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가 아름다울 거란 메모도 추신으로 적혀 있었다.
희수는 침대에 누워 소래포구를 상상했다. 장난감 같은 협궤 열차가 지나는 바닷가, 개펄 위에 드러누운 목선들, 황혼의 염전과 갈대밭, 그리고 그 남자.
잠이 올래야 올 수 없는 화면이었다. 그녀는 꼬박 점심때까지 뒤척뒤척 상념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뉴질랜드 여행 후로 그녀는 늘 수면부족으로 여름과 가을을 비틀거렸다. 점액질처럼 끈적끈적한 상념들이 불면의 원인이었다.
그 남자에게 들키면 창피하겠지만 희수가 약속장소에 도착한 시각은 네 시 반이었다. 무려 두 시간이나 일찍 나와 소래염전의 둑길을 서성이고 있었던 거였다.
서울에서 안달이 나 뒤척거리는 쪽보다 아예 빨리 도착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편안할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시간 동안 무던히도 걸었다. 염전의 바둑판 같은 둑길 위로, 녹슨 수인선으로, 바다를 향해 뻗은 강물 주변의 갈대밭길로 아무렇게나 걸었다. 뻐근한 피로감이 아서스패스의 황혼을 생각나게 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그때처럼 침묵으로 황혼을, 어둠을 지새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 온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갈 사람인가? 그는 내 인생에 있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모호한 대상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낸단 말인가?
그녀는 그에게 줄 오프닝 멘트를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그를 만나는 순간 충동적으로 터져나올 애드립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여섯 시 반.
그는 갈대숲 기슭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희수는 그의 손짓을 발견하고 둑길에서 갈숲으로 내려왔다.
그는 강의 지류를 막은 갑문 시멘트 바닥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제가 다 돌아다녔었는데.』
『꽤 됐습니다. 어, 그때 입었던 그 옷이군요.』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희수는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대꾸했다.
『그래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앉으시죠.』
그가 간이의자를 내밀었다. 둘은 나란히 앉아 강물을 보았다.
강물은 역류하고 있었다. 서해의 밀물이 갈대숲 심장까지 깊숙이 기어들어오는 중이었다.
『수면을 보세요. 뭔가 튀고 있죠? 소래포구의 명물 망둥이입니다.』
『여기서 망둥이를 잡나요?』
『황혼에 오면 양동이로 잡을 수 있는 포인트가 바로 우리가 앉은 수문이에요.』
『그렇게 많이 잡아서 뭐 하는데요?』
『회로도 먹고, 매운탕으로도 별미죠.』
『그런 걸 좋아하시나 보죠?』
『별로.』
『근데 왜 잡죠?』
『그냥 내 앞에 그놈들이 있으니까요.』
둘은 똑같이 피식 웃었다.
그가 한참 강물을 응시하다 말했다.
『희수 씨라고 했죠? 희수 씨와 함께 앉아 있으니까 쓸쓸하지 않아서 좋군요. 희수 씨도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나와앉아 있으니까 괜찮죠?』
『네, 뉴질랜드보다 훨씬 운치있는 곳인데요. 근데 제 이름을 아셨으니까 그쪽 이름도 소개하실 차례 아닌가요?』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동선이라고 합니다.』
희수는 그의 이름 석 자를 가슴 깊숙이 묻어 두었다.
첫인상, 첫 만남 때와 달리 그는 따뜻했다. 마치 오래 된 친구처럼.
『우리,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앉아 있을까요? 낚싯줄의 찌를 주시하는 것도 재미있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으로 굳어 버렸다. 그 이전의 대화가 없었으면 영락없이 첫인상 그대로일 거였다. 희수도 말을 잃은 채 묵묵히 찌만 보고 있었다.
청둥오리 몇 마리가 파드득 강물을 박차고 비상했다. 노을이 스러져가는 하늘에 별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수채화 같은 풍경 앞에서 희수는 자꾸 콧날이 시큰했다.
『왜 많다던 망둥이가 소식이 없죠?』
그녀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아, 망둥이를 기다리고 있었던가요?』
『……?』
그가 깜박 잊었다는 듯이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낚싯줄에는 납덩어리의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낚싯대를 휘저어 뿌렸다.
핑…….
낚싯줄이 허공에 현악기 소리를 냈다.
그가 가느다란 담배를 빼물고 말했다.
『참 오랜만이죠?』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왜 자꾸 우연이 겹칠까요?』
『세상에 우연은 없다잖아요. 갈망이라는 것이 우연을 연출할 때가 있죠.』
『그렇다면 동선 씨는 저와 다시 만나길 갈망했나요?』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이 삭막한 가을 개펄에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의 말에 희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듣고 싶은 얘기를 그가 지금 전해 준 거였다.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동선 씨는…….』
희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그냥 보냈죠?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 순간, 그의 손이 희수의 손 위로 포개졌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해체시켰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눈물 줄기를 닦았다. 이내 그녀는 수문의 시멘트 바닥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의외로 바닥은 따뜻했다. 황혼의 열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오래도록 눈꺼풀과 속눈썹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가 있을 때에야 그녀는 어렴풋이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때 그의 손이 허리띠를 풀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어올려 그의 동작을 도왔다.
역류하는 조수처럼 그가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밤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엔 별들이 무수했다. 희수는 이 땅에 살면서 저토록 찬란한 성좌의 지도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조금만 참아요!』
상미가 다리를 꼬면서 핸들을 굳게 움켜쥐었다.
두 남녀가 탄 뉴그랜저는 행주대교 김포 쪽 고수부지 위를 비틀거리며 서행하고 있었다. 일권은 아까부터 그녀의 두 다리 위에 얼굴을 묻고 집요하게 각선미의 촉감을 탐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스타킹은 두루루 말려 하이힐에 걸려 있었다.
그는 무릎 아래쪽부터 허벅지까지 야금야금 핥다가 덥석 베어 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상미는 움찔움찔 엉덩이를 들썩였고 다리를 꼬았다.
운전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결국 허허벌판 위에서 차는 푸르릉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들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벨트를 풀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다시 벨트를 걸어잠갔다. 대신 시트조절 손잡이를 당겨 수평으로 쓰러뜨렸다. 그러자 그녀는 등받이 시트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안전벨트가 길게 늘어지며 허공에 빗금을 그었다.
그는 결박된 그녀의 스커트를 걷어올렸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히프를 들어 주었다. 이빨로 팬티를 물어 찢어 버린 후 적나라하게 노출된 성역에 일권은 입술을 들이댔다. 그리고 요들송을 불렀다.
순간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부자연스러운 자세였지만 일권은 가공할 투지로 그녀를 가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둘은 동시에 절정을 맛보았다. 축 늘어진 그의 체중을 감미롭게 인내하던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굉장했어요. 난 또 혹시 이대로 죽이는 게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고요.』
『그래요, 오늘은 같이 갈 데까지 가 보는 겁니다.』
그가 다시 끄응 상체를 세우더니 그녀의 삐져나온 젖가슴을 공격했다. 그녀가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가슴의 돌기는 순식간에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벨트를 풀어 줘요.』
그녀가 부탁했다.
벨트가 풀려 한결 자유로워진 그녀의 사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양 거칠게 그녀의 사지를 제압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나 두번째 결합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자세도 어색했고 남녀의 신체를 얽어매야 할 그의 고리가 신통치 않았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한없이 오르고 떨어지는 고행을 반복했다. 진땀이 그녀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여건이 열악해서 안 되는 걸 거예요.』
그녀가 그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미친 듯이 부딪쳐 왔다.
『그만 하세요, 아파요.』
그녀가 울음 섞인 비명을 지르자, 비로소 그의 몸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녀는 위로하듯 그를 감싸안았다. 그 역시 어린애처럼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온몸이 흠뻑 땀에 절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여자의 후각은 예리한 거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완벽하게 느끼고 싶었어요.』
『감추지 마세요, 일권 씨! 오늘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아요.』
『…….』
『호텔로 가서 씻고 푹 쉴래요?』
상미가 조심스럽게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시트를 세웠다. 그는 여전히 조수석에 누워 있었다.
『어떡할까요?』
『해우소로 데려다 줘요.』
그가 맥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상미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시동을 걸었다.
서울로 오는 길에 그녀는 착잡했다. 그는 코고는 소리까지 내면서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잠든 사내의 얼굴은 아름답지 않았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두 사람은 아무 때나 만나 섹스를 교환했다. 상미는 그에게 무선호출기를 선사했고, 생각날 때면 언제나 호출을 했다. 삐삐는 그를 움켜쥘 수 있는 고삐와도 같았다.
남편의 삐삐와 이 남자의 삐삐. 그녀는 수시로 두 남자의 고유번호를 넘나들며 줄타기를 해왔다. 남편의 고유번호는 타인들에게 열려 있지만 그녀에겐 꼭 닫혀 있는 거였고, 일권의 번호는 오직 그녀만을 위한 거였다.
일권은 나름대로 그녀에게 충실했다. 그녀가 부르면 달려왔고, 있으라면 그 자리에 대기했다. 사랑이라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그녀는 그와 얼마든지 육체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사내와 어디까지 동행할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오늘 문득 그런 의문을 품었다. 잠든 사내의 얼굴에서 그런 비감의 의문을 느끼게 된 거였다.
일권은 맥주잔을 기울이며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삭혔다.
L호텔의 사파이어 룸. 이봉영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는 대성황이었다. ‘ㄷ’자로 차려 놓은 뷔페 테이블엔 접시를 든 하객들이 줄지어 돌았고, 홀을 가득 메운 인파 때문에 출입문을 활짝 열어 둘 정도였다.
시인은 홀 중앙에 앉아 사인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카메라 두 대가 서로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서로 각각 다른 매력을 위하여>.
상당히 긴 제목을 붙인 이봉영의 신작 시집은 출간되기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스포츠 신문에 매일 한 편씩 연재되어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아 온 작품집이기 때문이었다.
신문사의 지원사격도 요란했다. 오래 전부터 출판 예고기사를 집중적으로 실어 왔고, 초특급 호텔을 잡아 출판기념회까지 열어 준 거였다.
짧은 연륜의 30대 시인에게 전폭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은 신문사측의 속셈은 뻔했다. 출판기념회 자체도 하나의 광고 플레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봉영 시인은 어쨌든 출판불황의 시대에 몇 안 되는 베스트셀러 시인이었다. 시작업뿐만 아니라 감칠맛 나는 대중가요의 가사까지 발표하여 히트곡 메이커로도 유명했다. 전국의 노래방에서 들어오는 저작권료만 해도 한 달에 수백만 원이 넘는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시를 써서 밥을 먹고 가사를 써서 돈을 버는 재주는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사파이어 룸엔 낯익은 대학 동문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 회포를 풀고 있었다. 교수들부터 재학생에 이르기까지 문창과 출신의 내로라하는 동문들이 모여 파티의 풍성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 학교 출신 글쟁이(?)들이 이처럼 호사스런 마당에 모여 보기는 처음 있는 일일 것이었다. 그래서 이봉영의 존재는 한층 빛이 나는 거였다.
일권은 차례를 기다렸다가 이봉영의 앞에 우뚝 섰다. 남들처럼 축하봉투를 내밀지는 못했지만 시인의 사인이 담긴 시집은 꼭 받아야겠다는 자세로 서 있었다.
사인에만 열중하던 이봉영이 비로소 일권을 보고 고개를 쳐들었다.
『와 줘서 고맙군.』
그는 그 한마디로 일권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묵묵히 사인을 했다.
김일권 님에게…….
사인을 지켜보던 일권이 말했다.
『한 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은비 걸루.』
순간 시인의 눈두덩이에서 경련이 일었다.
『은비를 찾았나?』
『아뇨, 하지만 언젠가는 찾게 될 겁니다.』
이봉영은 잠깐 이맛살을 찌푸렸다가 순순히 사인을 해서 넘겨주었다.
『고맙습니다. 은비도 좋아할 거예요.』
일권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봉영은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밀려오는 하객들에게 사인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권은 먼발치에서도 그의 흔들림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방법으로 이봉영에게 복수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의 행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잔인한 음모가 싹트는 거였다.
일권의 첫사랑, 아니 문창과 동기들 모두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은비를 망가뜨린 사내. 그렇게 맑은 영혼의 후배를 건드려 놓고 아픈 사랑의 체험을 했노라 떠벌리는 사기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권의 동기들이 이봉영의 출판기념회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이봉영 타도의 선봉에 나섰던 김일권이 일부러 이 곳에 나타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혹시나 은비의 소식을 귀띔해 줄 은비의 여자친구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권은 여자들에게 은비의 이름을 대고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러나 파티가 막을 내릴 때까지도 은비의 소식을 알고 있는 여자는 찾을 수 없었다.
씁쓸하게 파티장을 빠져나오던 일권의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이봉영이었다.
『얘기 좀 할까?』
그는 일권을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갔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나?』
『…….』
『나한테도 변명할 기회는 줘야지.』
『변명할 건덕지라도 있습니까?』
『말 조심해, 건덕지라니! 난 어찌됐건 자네의 선배야.』
『선배 대접은 받고 싶은 모양이죠?』
『또 몇 대 얻어터지지 말고 내 말이나 끝까지 들어.』
이봉영이 정색하며 협박을 했다.
또 몇 대라?
김일권은 그 말에 전의를 가다듬었다. 그가 또 몇 대를 들먹이는 건 은비가 실종된 직후의 주먹다짐을 떠올리라는 경고였다.
그때 일권은 은비에게 상처 입힌 그를 찾아갔고 술기운을 빌려 냅다 한 방 갈겨 버렸었다. 그런데 이봉영은 맞고만 있지 않았다. 불같이 일어서더니 달려들었던 것이다.
일권은 옳거니 잘됐다 싶었다. 이미 뒤집힌 눈인데 인정사정 가릴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일권은 이봉영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터졌다.
사랑 타령이나 할 줄 아는 시인으로만 생각했는데 매서운 발길질이며 급소만 골라 때리는 주먹 씀씀이가 보통 강력한 게 아니었다. 일권은 나중에야 그가 해병대 출신에 태권도 유단자란 사실을 들었다.
그 처참한 사건 이후로 일권은 칼을 갈았다. 언젠가 똑같은 방법으로 맞은 매를 되갚아 주기 위해 치졸하지만 합기도장을 다녔던 것이다.
『이 좋은 날 재 뿌릴 생각은 없시다. 하지만 이 선배,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고 삽시다. 아무리 막가는 세상이라고 그러면 못써요. 아직 시집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제목부터 기분 나쁘지 않냐구요.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서로 각각 다른 매력을 위하여’라니, 이런 거지 같은 제목이 어딨수?』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면 시집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 난 은비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은비?』
『시간이 없으니까 간단히 말하지. 한때 은비와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어. 결혼까지도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은비랑 맺어지기에는 장애물이 많았어. 무엇보다도 성격 차이가 심했고…….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은비와의 관계에서 가장 많이 멍든 사람은 바로 나야. 걔랑 헤어져서 아팠고, 걔가 없어져서 아팠고, 지금까지도 속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나란 말이다. 시시하게 사랑 같은 단어를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사랑은 사랑하는 당사자끼리 부족한 걸 채워 주는 상호보완의 관계 아닐까?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거래라고도 할 수 있겠지. 거래가 깨진 책임도 당사자 둘만의 몫이야. 그런데 뭘 안다고 제삼자인 자네가 끼여드는지 모르겠어.』
『제삼자라구? 웃기는 소리 작작 하쇼. 이 선배한텐 은비가 거래 대상이었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가장 소중한 친구였소. 은비가 사라지기 직전에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바다에 빠져죽은 다음, 귀신으로 뛰쳐나와 두고두고 당신을 괴롭히고 싶댔어.』
『꽉 막힌 놈이군. 그래 은비가 그렇게 자네한테 소중한 사람이었다 치자. 그럼 은비한테도 자네란 존재가 소중했을까?』
『……?』
『어쩌다 걔가 자네한테도 마음을 줬는지 모르겠지만 걘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결하거나 고귀한 여자는 아니었어. 자네도 알겠지만 걔 배꼽 밑에 팥알만한 반점이 있다는 거 나말고도 아는 사람 수두룩해.』
『이런 거지 같은 새끼!』
일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너무 사전 동작이 컸던 탓에 목표를 가격하지 못했다.
이봉영은 가볍게 그의 손목을 잡아 꺾고 말했다.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은비도 그렇고 너 같은 놈 본다는 자체가 역겨우니까 말이다.』
이봉영은 일권의 팔을 비틀어 홱 밀쳐 버리며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도의 재떨이 박스에 처박힌 일권은 활어처럼 푸르르 몸을 떨고 일어섰다.
그때 허리춤에 찬 무선호출기가 진동했다.
상미의 긴급 호출이었다.
그는 버튼을 누르고 나서 마음을 추슬렀다. 생각 같아서는 파티장으로 난입해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봉영을 패대기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 행동의 결과는 뻔한 것이 아닌가.
그는 바닥에 떨어진 시집 두 권을 집어들고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갔다. 상미의 호출이 결정적일 때 그를 구한 건지도 몰랐다.
방송 출연 사흘째 되는 날.
희수가 스튜디오에서 나오자 교환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받아 보세요. 남자예요.』
희수는 갸우뚱하며 수화기를 받았다.
누굴까? 스튜디오로 전화 걸 사람이 없는데…….
『전화 바꿨습니다.』
『목소리 반갑습니다.』
『혹시 뉴질랜드에서……?』
희수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떨었다.
『알아들으시는군요, 우린 참 특별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라디오를 들으셨나요?』
『네, 이틀 전인가요, 낚시터에서 우연히 귀에 익은 음성이 들리더군요. 무척 반가워서 다이얼을 눌렀습니다.』
희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교환대 주변을 서성거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낚시를 하시나 봐요?』
『서울 근교지요, 오늘 저녁에도 계획이 있는데…… 낚시터 부근으로 와서 그때처럼 길을 잃고 헤매실 의향 없으십니까?』
『서울 근교 지리가 어두우니까 당연히 헤매겠죠. 어딘데요?』
『방송중이라 이 전화 계속 쓰기가 눈치보일 텐데 팩스번호를 불러 주십시오.』
희수는 그제야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과연 수화기를 뺏긴 교환의 입술이 한 치나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녀는 팩스번호를 불러 주고 편성국으로 내려갔다.
이른 시간의 편성국은 텅 비어 있었다. 빈 책상마다 즐비하게 쌓인 조간신문들이 상쾌한 휘발유 내음을 풍겼다. 그녀는 팩시밀리와 복사기가 배치되어 있는 OA룸 앞에서 발을 구르며 기다렸다.
쓱쓱쓱…….
팩시밀리가 감광지를 토해 냈다. 9시 프로그램의 작가가 보낸 원고였다. 그 다음엔 교통 상황실에서 보낸 러시아워의 교통정보, 기상청의 일기예보, 청취자의 모니터 등등 팩시밀리는 아침부터 과로하고 있었다.
희수는 괜시리 불안했다.
보낼 때마다 통화중이면 짜증날 텐데. 차라리 교환의 눈칫밥을 먹더라도 전화로 약속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용케도 그가 보낸 약도는 10분 후쯤 빗발치는 원고 틈바구니를 뚫고 팩스의 출구로 기어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희수는 팩시밀리 용지를 들여다보았다.
수인선이 지나는 염전 둑길.
약도는 비교적 상세했다. 서울에서 부천으로 간 다음 시흥시 포동 쪽으로 빠지면 소래포구 못 미쳐서 왼쪽으로 커다란 염전이 있노라는 해설까지 곁들여 있었다.
약속시간은 오후 여섯 시 반.
그 무렵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가 아름다울 거란 메모도 추신으로 적혀 있었다.
희수는 침대에 누워 소래포구를 상상했다. 장난감 같은 협궤 열차가 지나는 바닷가, 개펄 위에 드러누운 목선들, 황혼의 염전과 갈대밭, 그리고 그 남자.
잠이 올래야 올 수 없는 화면이었다. 그녀는 꼬박 점심때까지 뒤척뒤척 상념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뉴질랜드 여행 후로 그녀는 늘 수면부족으로 여름과 가을을 비틀거렸다. 점액질처럼 끈적끈적한 상념들이 불면의 원인이었다.
그 남자에게 들키면 창피하겠지만 희수가 약속장소에 도착한 시각은 네 시 반이었다. 무려 두 시간이나 일찍 나와 소래염전의 둑길을 서성이고 있었던 거였다.
서울에서 안달이 나 뒤척거리는 쪽보다 아예 빨리 도착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편안할 것 같았다.
그녀는 두 시간 동안 무던히도 걸었다. 염전의 바둑판 같은 둑길 위로, 녹슨 수인선으로, 바다를 향해 뻗은 강물 주변의 갈대밭길로 아무렇게나 걸었다. 뻐근한 피로감이 아서스패스의 황혼을 생각나게 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그때처럼 침묵으로 황혼을, 어둠을 지새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 온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갈 사람인가? 그는 내 인생에 있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모호한 대상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낸단 말인가?
그녀는 그에게 줄 오프닝 멘트를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그를 만나는 순간 충동적으로 터져나올 애드립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여섯 시 반.
그는 갈대숲 기슭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희수는 그의 손짓을 발견하고 둑길에서 갈숲으로 내려왔다.
그는 강의 지류를 막은 갑문 시멘트 바닥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제가 다 돌아다녔었는데.』
『꽤 됐습니다. 어, 그때 입었던 그 옷이군요.』
그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희수는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대꾸했다.
『그래야 쉽게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앉으시죠.』
그가 간이의자를 내밀었다. 둘은 나란히 앉아 강물을 보았다.
강물은 역류하고 있었다. 서해의 밀물이 갈대숲 심장까지 깊숙이 기어들어오는 중이었다.
『수면을 보세요. 뭔가 튀고 있죠? 소래포구의 명물 망둥이입니다.』
『여기서 망둥이를 잡나요?』
『황혼에 오면 양동이로 잡을 수 있는 포인트가 바로 우리가 앉은 수문이에요.』
『그렇게 많이 잡아서 뭐 하는데요?』
『회로도 먹고, 매운탕으로도 별미죠.』
『그런 걸 좋아하시나 보죠?』
『별로.』
『근데 왜 잡죠?』
『그냥 내 앞에 그놈들이 있으니까요.』
둘은 똑같이 피식 웃었다.
그가 한참 강물을 응시하다 말했다.
『희수 씨라고 했죠? 희수 씨와 함께 앉아 있으니까 쓸쓸하지 않아서 좋군요. 희수 씨도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나와앉아 있으니까 괜찮죠?』
『네, 뉴질랜드보다 훨씬 운치있는 곳인데요. 근데 제 이름을 아셨으니까 그쪽 이름도 소개하실 차례 아닌가요?』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동선이라고 합니다.』
희수는 그의 이름 석 자를 가슴 깊숙이 묻어 두었다.
첫인상, 첫 만남 때와 달리 그는 따뜻했다. 마치 오래 된 친구처럼.
『우리,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앉아 있을까요? 낚싯줄의 찌를 주시하는 것도 재미있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으로 굳어 버렸다. 그 이전의 대화가 없었으면 영락없이 첫인상 그대로일 거였다. 희수도 말을 잃은 채 묵묵히 찌만 보고 있었다.
청둥오리 몇 마리가 파드득 강물을 박차고 비상했다. 노을이 스러져가는 하늘에 별이 명멸하기 시작했다. 수채화 같은 풍경 앞에서 희수는 자꾸 콧날이 시큰했다.
『왜 많다던 망둥이가 소식이 없죠?』
그녀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아, 망둥이를 기다리고 있었던가요?』
『……?』
그가 깜박 잊었다는 듯이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낚싯줄에는 납덩어리의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낚싯대를 휘저어 뿌렸다.
핑…….
낚싯줄이 허공에 현악기 소리를 냈다.
그가 가느다란 담배를 빼물고 말했다.
『참 오랜만이죠?』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왜 자꾸 우연이 겹칠까요?』
『세상에 우연은 없다잖아요. 갈망이라는 것이 우연을 연출할 때가 있죠.』
『그렇다면 동선 씨는 저와 다시 만나길 갈망했나요?』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 이 삭막한 가을 개펄에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의 말에 희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듣고 싶은 얘기를 그가 지금 전해 준 거였다.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동선 씨는…….』
희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그냥 보냈죠? 아무런 언질도 없이.』
그 순간, 그의 손이 희수의 손 위로 포개졌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해체시켰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눈물 줄기를 닦았다. 이내 그녀는 수문의 시멘트 바닥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의외로 바닥은 따뜻했다. 황혼의 열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의 입술이 오래도록 눈꺼풀과 속눈썹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술이 목덜미로 내려가 있을 때에야 그녀는 어렴풋이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때 그의 손이 허리띠를 풀었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어올려 그의 동작을 도왔다.
역류하는 조수처럼 그가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밤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엔 별들이 무수했다. 희수는 이 땅에 살면서 저토록 찬란한 성좌의 지도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조금만 참아요!』
상미가 다리를 꼬면서 핸들을 굳게 움켜쥐었다.
두 남녀가 탄 뉴그랜저는 행주대교 김포 쪽 고수부지 위를 비틀거리며 서행하고 있었다. 일권은 아까부터 그녀의 두 다리 위에 얼굴을 묻고 집요하게 각선미의 촉감을 탐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스타킹은 두루루 말려 하이힐에 걸려 있었다.
그는 무릎 아래쪽부터 허벅지까지 야금야금 핥다가 덥석 베어 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상미는 움찔움찔 엉덩이를 들썩였고 다리를 꼬았다.
운전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결국 허허벌판 위에서 차는 푸르릉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들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벨트를 풀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다시 벨트를 걸어잠갔다. 대신 시트조절 손잡이를 당겨 수평으로 쓰러뜨렸다. 그러자 그녀는 등받이 시트와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안전벨트가 길게 늘어지며 허공에 빗금을 그었다.
그는 결박된 그녀의 스커트를 걷어올렸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히프를 들어 주었다. 이빨로 팬티를 물어 찢어 버린 후 적나라하게 노출된 성역에 일권은 입술을 들이댔다. 그리고 요들송을 불렀다.
순간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부자연스러운 자세였지만 일권은 가공할 투지로 그녀를 가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둘은 동시에 절정을 맛보았다. 축 늘어진 그의 체중을 감미롭게 인내하던 그녀가 심호흡을 했다.
『굉장했어요. 난 또 혹시 이대로 죽이는 게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고요.』
『그래요, 오늘은 같이 갈 데까지 가 보는 겁니다.』
그가 다시 끄응 상체를 세우더니 그녀의 삐져나온 젖가슴을 공격했다. 그녀가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가슴의 돌기는 순식간에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벨트를 풀어 줘요.』
그녀가 부탁했다.
벨트가 풀려 한결 자유로워진 그녀의 사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양 거칠게 그녀의 사지를 제압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나 두번째 결합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자세도 어색했고 남녀의 신체를 얽어매야 할 그의 고리가 신통치 않았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한없이 오르고 떨어지는 고행을 반복했다. 진땀이 그녀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아요, 여건이 열악해서 안 되는 걸 거예요.』
그녀가 그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미친 듯이 부딪쳐 왔다.
『그만 하세요, 아파요.』
그녀가 울음 섞인 비명을 지르자, 비로소 그의 몸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녀는 위로하듯 그를 감싸안았다. 그 역시 어린애처럼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온몸이 흠뻑 땀에 절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여자의 후각은 예리한 거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완벽하게 느끼고 싶었어요.』
『감추지 마세요, 일권 씨! 오늘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아요.』
『…….』
『호텔로 가서 씻고 푹 쉴래요?』
상미가 조심스럽게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시트를 세웠다. 그는 여전히 조수석에 누워 있었다.
『어떡할까요?』
『해우소로 데려다 줘요.』
그가 맥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상미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시동을 걸었다.
서울로 오는 길에 그녀는 착잡했다. 그는 코고는 소리까지 내면서 깊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잠든 사내의 얼굴은 아름답지 않았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두 사람은 아무 때나 만나 섹스를 교환했다. 상미는 그에게 무선호출기를 선사했고, 생각날 때면 언제나 호출을 했다. 삐삐는 그를 움켜쥘 수 있는 고삐와도 같았다.
남편의 삐삐와 이 남자의 삐삐. 그녀는 수시로 두 남자의 고유번호를 넘나들며 줄타기를 해왔다. 남편의 고유번호는 타인들에게 열려 있지만 그녀에겐 꼭 닫혀 있는 거였고, 일권의 번호는 오직 그녀만을 위한 거였다.
일권은 나름대로 그녀에게 충실했다. 그녀가 부르면 달려왔고, 있으라면 그 자리에 대기했다. 사랑이라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그녀는 그와 얼마든지 육체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사내와 어디까지 동행할 것인가.
그러나 그녀는 오늘 문득 그런 의문을 품었다. 잠든 사내의 얼굴에서 그런 비감의 의문을 느끼게 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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