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보트-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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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호수는 온통 물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동선은 요트의 선미에 걸터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 주무셨어요?』
선실에서 나온 청바지의 여자가 다가와 그의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더 자지, 왜 일어났어?』
『저쪽 팀도 일어났어요.』
『벌써?』
『그 사람들 소리에 깼으니까요.』
『후후, 아직도 기력이 남았나 보군.』
동선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최종명이라는 친구는 꼭 새벽녘에 확인 사살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청바지가 두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고 망연한 눈빛을 던졌다.
동선도 다시 먼 수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바지는 간밤의 축제에 휩쓸린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 잔뜩 이슬이 고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훨씬 청순해 보였다.
그녀는 동선한테서 위로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지켰다. 위로는커녕 갑자기 입술을 닫고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거였다.
눈을 질끈 감아 무릎에 떨궈 버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동선을 보았다.
어떻게 저 사람을 따라 나서게 됐을까.
그녀는 어젯밤 청평 휴게소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현리의 남자친구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한 시간은 10분. 그녀는 화장실을 들렀고, 전망대로 나가 유원지를 내려다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주차장의 공백을 가로질러 오는 지프가 있었다.
『어딜 보고 있는 겁니까?』
『저 아래 유원지요.』
지프에서 내린 사내가 부드럽게 다가와 커피잔을 채갔다. 아니 그녀가 건네 줬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가 손을 내밀자 너무도 자연스럽게 커피잔을 건네 주고 만 거였다.
그는 그녀의 루즈 자국에 입술을 대고 바닥에 남은 커피를 마셨다.
『블랙을 마시는군요.』
그는 빈 잔을 거꾸로 뒤집으며 싱긋 웃었다.
『마음이 참 따뜻해요. 낯선 사람이 손을 내밀었는데 선뜻 잔을 건네다니.』
『그럼 어떻해요, 갑자기.』
그가 활짝 웃자 그녀도 웃었다. 맑은 웃음, 그 웃음 때문에 그녀는 취해 버렸다.
『전망대에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더군요. 청평의 가을만큼이나.』
『청평의 가을이 어떤데요?』
『쓸쓸하지 않아요?』
『그럼 제가 쓸쓸해 보였단 얘긴가요?』
『그렇게 보였으니까 분명히 댁은 쓸쓸할 겁니다.』
이 남자가 지금 수작을 거는 건가?
그녀는 경계심을 드러내며 슬쩍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야겠어요.』
『어디로 가는 버스죠?』
『상봉동 직행이에요.』
『지금부터 서울까지 가는 버스 속에서 아마 당신은 꼭 한 번 울음을 쏟을 거 같군요. 운다고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마음을 서울까지 가져가지 마십시오. 마음의 독은 여행지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죠?』
『느낌이에요.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내 차를 타세요. 버스보다는 한결 편할 테니까.』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의 엔진음에 놀라 한 걸음을 떼었지만 그의 말에 뒷덜미라도 잡힌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좋아요, 태워 주세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차에 올랐다.
까짓거 요즘 야타족도 많고 야타에 응하는 처녀들도 많다는데 겁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사내의 인상도 웬지 미더웠고 무엇보다도 그의 예감이라는 게 결정적이었다.
서울 가는 버스 속에서 울 것 같다니. 정말 놀라운 예지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현리에서 청평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고 눈물을 쏟으려다 꾹 참아 왔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줌마 때문에 맘 놓고 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감정 같으면 영락없이 한 번은 울 것 같았다.
그녀는 현리 기갑부대에 근무하는 애인이 있었다. 이제 일병이었다.
군대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실 애인이라기보다 친구라는 편이 어울리는 사이였는데, 영장이 나온 날 둘은 애인관계로 급속히 맺어져 버렸다. 남자친구가 마치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청승을 떨며 그녀의 모성을 자극하는 거였다. 그녀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골 초등학교 동창 사이였는데 중학교 때 헤어졌다가 재경 동문 모임에서 재회한 그 친구. 그녀는 여상을 나와 신용금고를 다니는 중이었고, 그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가끔 생각나면 그녀를 찾아와 어리광을 부리다 돌아가곤 했다. 아무래도 시골 출신 대학생보다 직장생활을 하는 그녀의 경제사정이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그녀는 늘 누나처럼 맛있는 음식을 사 주었고 용돈까지 챙겨 줘야 했다. 정말이지 이성의 감정은 느껴 보지 못했는데 영장이 나온 날, 그가 처음 이성으로 변해 함께 밤을 보내자고 억지를 부렸다.
물론 그녀는 남자 경험이 있었다. 신용금고의 직속 상사인 권 대리와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 오고 있었고, 권 대리 이전에도 몇 번의 경험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헤픈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면 꼭 끝장을 봐야 속이 풀리는 족속들이었다. 말로는 우정이라 해도 우정의 끝은 꼭 성관계였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심성이 착했다. 그래서 남자들의 집요한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요령을 몰랐다. 그녀는 결국 입대를 며칠 앞두고 그 친구와 밤을 보내고 말았다. 그것이 결코 연정(戀情)은 아니었다는 걸 그때도 알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입대하더니 매일 군사우편을 보내 왔다. 편지 내용도 버젓이 애인을 자처하고 있는 거였다. 6주의 훈련이 끝나 자대배치를 받고 나서는 간절하게 면회 요청을 보내 왔다. 그녀는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의 힘든 생활을 생각하면 그저 연민이 앞설 뿐이었다. 그래서 면회를 갔는데, 그는 만나자마자 현리의 외딴 숲 속으로 끌고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거였다.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으나 애당초 그녀의 면회일정에 그런 계획은 없었다.
그는 철부지처럼 매주 면회를 와 달라고 졸라 댔다.
그녀는 피곤했다.
내가 왜 주말마다 현리까지 달려가 저 친구의 욕망을 받아 줘야 하나?
그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주일 내내 격무에 시달렸으니 주말이면 좀 쉬어야 하는데 엉망으로 차가 밀리는 경춘 국도로 나가 헤매고 있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작심하고 편지를 썼다. 비록 육체관계는 맺었어도 사랑의 감정은 없었으니까 이만해서 정리하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거라고 썼다. 그리고 면회도 딱 끊었다.
그랬더니 당장 반응이 왔다. 편지와 전화가 빗발쳤다. 처음엔 애원과 사정조였지만 나중엔 협박까지 동원했다. 탈영과 자살까지 들먹거리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달라는 부탁에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현리를 찾은 거였다. 그리고 병사와 밤새워 대화했다.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무던히도 오래 다툰 거였다.
새벽에 병사가 항복하고 말았다. 싫다는 여자에게는 해결책이 있을 수 없는 거였다.
그리고 둘은 이별식을 나눴다. 그는 그녀의 아늑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래, 솔직히 너랑 결혼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어, 그냥 너의 이 따뜻한 가슴이 그리웠던 거야. 그리고 삭막한 병영생활에 아직도 적응을 못 했어. 그래서 너한테 의지하고 싶었어. 결혼 같은 말을 입에 올릴 자신은 없지만 나는 너를 미치도록 좋아한단다. 이런 게 뭐니? 개 같은 경우지. 앞으로는 너를 구속하지 않을게.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현리로 떠나오는 길이었다.
『이런 관계가 뭐죠?』
지프 안에서 그녀는 동선에게 물어 보았다. 현리에 얽힌 모든 사연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난 뒤에.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이 사내는 자신의 심리를 속속들이 꿰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마디로 연민이라고 해야겠지. 연민처럼 실속 없는 감정도 없어. 아가씨는 아직도 빛나는 청춘이야. 거기에 요즘 보기 드물게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고. 그러나 이제부턴 실속을 차려야 해. 젊음은 유한한 거니까.』
청평호수 입구에서 둘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막걸리와 파전, 막국수.
그 메뉴를 비웠을 때 그녀는 그의 신도로 변해 있었다.
동선은 계속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청바지의 여자는 물어 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의 옆얼굴만 보고 있어야 했다.
현리에서의 처연한 이별식과 요트에서의 난잡한 게임을 겪고 난 새벽은 몽환적이었다.
마음의 독은 여행지에 묻고 가.
그는 이런 말로 유혹했었다.
어젯밤은 정말 비몽사몽간에, 막걸리와 조니워커와 이 사내의 말에 취해 열심히 젊음을 발산해 버렸었다. 그게 마음의 독을 치유하는 살풀이가 될 거라고 자위했다. 그런데 여명이 밝아오는 이 새벽에 가슴 가득 무겁게 짓눌러 오는 이 무게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그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사내의 눈빛이 너무 슬펐다. 울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우수가 잔뜩 서린 눈빛이었다.
『출근해야지? 가자, 늦진 않을 거야! 어제 만났던 휴게소에서 해장국이라도 먹고.』
그가 한참 후에 부시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넌 이제부터 잘할 수 있을 거야. 새로 태어나는 기분으로 경춘선을 달리자고. 마음은 요사스런 것이어서 변덕이 심하지. 하지만 마음에 자꾸 쏠려다니지 마. 네 마음의 주인은 너일 수밖에 없어. 네가 마음을 만들고 조종하는 거지.』
경춘선을 달리면서 그녀는 그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자기최면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는 과연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녀의 교주였다.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나와요. 자신이 만든 여인의 조각상에 반해 버린 사나이죠. 그의 갸륵한 정성에 감복한 신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는 신화, 이 해피엔딩에서 유래된 말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예요. 원하는 대로 정신을 쏟으면 그 일이 이뤄진다는 심리적 효과를 일컫는 신조어죠.』
강남 힐탑호텔 맞은편 언덕길에서 하수지는 마냥 행복한 얼굴로 강남 일대의 전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이동선이 원통처럼 둘둘 만 조감도를 내밀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구상해 봐요.』
그녀는 조감도를 받고도 펼쳐 보지 않았다.
『이 언덕의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요. 저쪽 힐탑을 보세요. 이름만 그럴듯하지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은 전혀 없다고요. 난 이쪽에 보란 듯이 새로운 명소를 창조하고 말 거예요.』
하수지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파리에서 갈고 닦은 환경미술의 진수를 이 바닥에 선보이리라.
이 언덕에 새로 들어설 극장건물의 조경을 맡게 된 그녀의 머릿속에 벌써 아름다운 구상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극장 뒤켠의 축대는 40여 미터. 그 여백의 벽면에 걸작 영화들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새겨 놓으리라. 광장의 보도블럭 틈틈이 스타들의 손도장을 모자이크해 두고, 가로등도 바로크풍의 장식등으로 바꿔 세우고, 그 아래 빨간 벤치를 길게 놓으리라. 그 곳에 연인들이 모여들고 영화와 사랑을 이야기하겠지.
주차장 구석에도 역시 빨간 전화박스를 설치하리라. 그 옆쪽에 만남의 장소를 설정하고 새끼손가락이 얽힌 약속의 조각을 세워 두는 것도 산뜻하겠지.
『커피 어때요. 저기 페르시아의 원두 맛이 괜찮은데.』
동선이 부드럽게 하수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언덕의 내리막길로 인도했다.
커피숍 페르시아의 실내는 바깥이나 다를 바 없이 환했다. 천장이며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가을 햇빛이 무더기로 투과하고 있었다.
『이 커피숍도 명소가 될 거예요. 극장이 들어서면.』
하수지는 창쪽 자리에 앉자마자 페르시아의 실내장식을 둘러보며 말했다.
매사에 자신만만한 여자였다.
『한 가지 충고를 한다면, 첫 작품이니만큼 구상 이전에 제작비 규모를 냉정하게 잡아야 해요.』
『규모가 어떻게 되죠?』
『3억 5천.』
『많은 건가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직 돈에 대한 감각은 둔한 편이죠, 작업해 나가면서 균형을 맞추는 수밖에 없겠네요.』
동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철부지 예술가 앞에서 환경미술의 경제를 논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미술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이론과 실기를 완벽하게 갈고 닦아 마스터했다 해도 이 땅에서 성공하려면 그보다 우선하는 게 있었다. 바로 비즈니스였다.
이 땅에서 지어지는 모든 대형 건물은 건축비의 1%를 환경투자금으로 안배해야 한다. 서울시 조례에 그렇게 못박혀 있다.
미술 진흥을 위해 만들어진 강제규정이었다. 건축주는 설계할 때부터 조각가를 미리 선정해야 하고 건물의 환경을 위해 1%의 작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아무나 맡는 게 아니다. 건축주와 작가들 사이에 거래(?)를 만들어 주는 브로커들이 있다. 브로커들은 서울시에 새로 신축될 건물의 정보를 환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일을 맡길 만한 작가들의 명단을 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맥과 학맥의 고리를 이용해 거래를 성사시킨다. 거기서 묻어나는 떡고물이 그들의 몫이다.
예컨대 K백화점의 건축비는 525억. 그렇다면 미술진흥을 위한 조경비는 5억 2,500만원으로 책정된다. 브로커는 프로젝트 계약을 위해 그 액수의 20%를 건축주에게 리베이트로 상납한다. 계약이 체결되면 그들은 작가에게 전체액의 55% 정도만 작업료로 지급한다. 남은 25%가 브로커의 몫이다. 그러나 세무서에 신고되는 5억 2,500만원은 전액 작가의 수입으로 기록된다.
어디서나 존재하는 비리의 먹이사슬이지만 환경미술계의 경우는 좀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위가 크기 때문이었다. 허울만 좋은 세계, 예술의 이름으로 덤핑과 리베이트가 난무하는 이 바닥에서 작가들은 영혼을 저당잡히고 있는 것이었다.
이동선도 그 브로커 중의 하나였다. 신사동에 조형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조각가들을 좌지우지하는 큰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햇병아리 여류작가 앞에서 브로커가 아니었다. 그저 마음 넉넉한 스폰서였다.
『그러다 적자를 보면 앞으로 작업하기 힘들어지지 않겠어요?』
『그럼 선생님이 좀 지원해 주세요. 흑자를 보면 대신 선생님께 전부 돌려 드릴게요.』
여자는 당돌했다.
그는 그녀의 때묻지 않은 제의에 또 피식 웃고 말았다. 바로 그런 매력에 이끌려 하수지에게 이번 프로젝트를 맡겼던 그였다.
사실 신축 극장의 공사비는 백억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극장 자체가 문화시설이라는 이유로 환경기금을 3%로 끌어올린 거였다.
동선은 블루맥주 최종명 사장의 힘을 빌려 이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모두 하수지를 위한 비즈니스였다. 그는 그녀에게 완벽한 선물을 줄 작정이었다. 건축주에 대한 리베이트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자신의 몫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 통통 튀는 여류조각가에게 뛸 마당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다.
이 남자…….
하수지는 방금 날라온 원두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맞은편에 앉은 동선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을 등진 사내의 모습은 그림자에 가까웠다. 눈이 부셔 시선을 거두면서 그녀는 다시 커피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였다. 커피 속에서 사내를 음미하려는 듯.
그녀는 맞은편의 사내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프랑스 8년, 귀국해서 1년, 도합 9년 동안의 홀로서기를 하면서 꼭꼭 눌러 두었던 어리광의 본능. 그녀는 운명의 스폰서 앞에서 세살짜리 여자애처럼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파리에 있을 땐 정말 자신만만했어요. 내 손으로 만진 모든 사물이 작품으로 변하곤 했으니까요. 근데 귀국해서 절망했어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영혼은 주눅이 들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언젠가는 내 손가락을 사 줄 사람이 나타날 줄 알았어요. 피그말리온의 신화처럼.』
『오히려 내가 피그말리온 아닐까요? 난 하수지라는 조각을 빚었는데 신이 감동해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탄생한 그녀는 첫번째로 만난 내 앞에서 나신을 부끄러워하며 몸을 가린다.』
『우와, 멋진 비유예요!』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박수를 쳤다.
아아, 이 남자, 정말 내 운명을 조각하고 있는 사람!
『하지만 틀린 게 있어요. 내가 조각에서 사람으로 변해 선생님 앞에 서게 됐다면 몸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자기를 완벽하게 조각해 준 창조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우습지 않나요?』
그녀가 말을 끝내 놓고 또렷한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전적인 언사였지만 무한한 복종의 뜻이 담긴 말이었다.
가을비와 몸살.
새벽에 내리는 가을비는 회초리처럼 아팠다. 그 싸늘한 궤적에 은행잎들이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다.
방송국 스튜디오 앞 복도에서 희수는 신열에 떨고 있었다.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소녀처럼 떨어지는 은행잎이 아파 울고 있었다.
이렇게 몸살의 징후가 느껴지는 날이면 일찌감치 들어가 숙면을 취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녀는 원고를 마감해 놓고도 대기중이었다. 1부 프로그램 중간에 삽입될 배낭여행 코너의 출연자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1년 동안 지구촌을 누빈 여대생 송은주와의 만남 코너는 1부의 하이라이트였다. 시간대별 청취율을 봐도 그녀가 나오는 월, 화, 수 7:40∼7:50 시간대는 산맥처럼 고고하게 솟구쳐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직접 발로 뛰어 생생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체험담은 출근길 청취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었다.
야성적이고 진솔한 매력을 담뿍 소유하고 있는 송은주는 그만큼 희수가 맡은 아침 프로그램의 비밀 병기였지만, 딱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원체 시간관념이 희박해서 월, 화, 수 아침마다 스태프들을 비상대기시키곤 했던 것이다.
『햐, 돌아 버리겠네. 지금 송은주하고 통화했는데 말야, 홋카이도에 가 있대.』
스튜디오에서 뛰쳐나온 양동기 PD가 열받았다는 듯 신문으로 탁탁 부채질을 해대며 희수에게 말했다.
『어제 여기 나왔었잖아요.』
『어제 방송 끝내고 바로 출발했대. 홋카이도에 첫눈이 내릴 거란 소식을 들었대나 뭐라나.』
『화끈해서 맘에 든다니까요.』
『그나저나 그 시간을 뭘로 땜방하지?』
『날도 궂은데 가을비를 주제로 한 노래나 두어 곡 틀죠, 뭐! 브릿지 멘트 몇 개 쓸까요?』
『어, 정 작가도 이제 날씨에 민감해졌군. 난 말야, 이런 날이 정말 싫어. 이런 날 방송국에서 죽친다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 줄 알아? 그저 이런 날엔…….』
『낯선 곳으로 낯선 여인과 함께 떠나 낯선 사랑을 하고 싶다고요, 낯선 체위로?』
『캬, 역시 내 기분 알아 주는 사람은 정 작가밖에 없다니깐!』
『무드 그만 잡고 어서 결정하세요. 새드하고 블루한 노래로 갈 거예요?』
『아침부터 그건 너무 칙칙하잖아?』
『그럼 어떡해요?』
『정 작가, 얼마 전에 여행 다녀왔지? 호주야, 뉴질랜드야?』
『그런데요?』
『당신이 스튜디오에 들어가, 오늘 스페셜 게스트로!』
『제정신이세요?』
『MC하고 다 의논하고 나온 거니까 발뺌하지 말라고! 그냥 MC가 묻는 대로 갔다온 느낌을 털어놓으면 돼.』
『정말이에요?』
『빨리 준비해. 20분 전이야.』
양동기 PD가 제 할말만 쏟아 놓고 슬그머니 스튜디오로 들어가 버리자 희수는 난감했다. 황당한 경우였지만 이럴 때 도망치는 건 프로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판기로 가 커피를 뽑았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고 난 것처럼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체내의 교감신경이 작용하게 되면 인체의 모든 기관들이 전투태세로 전환되는 법.
희수는 잔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스튜디오의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의외로 스튜디오는 아늑했다. 생방송이라는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다 MC 전태식 아나운서의 노련한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희수는 그가 묻는 대로 뉴질랜드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나라의 첫인상과 교통수단, 돌아본 명소, 아서스패스에서 열차를 놓쳐 버린 낭패에 이르기까지.
MC들은 그런 대목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열차를 놓쳤을 때 심정은 어땠나요?』
『한마디로 암담했죠, 뭐.』
『그래서 어떻게 그 난국을 타개하셨습니까?』
『다음 정거장까지 무작정 걸었어요.』
『그 시간이 저녁이었다면서요?』
『네, 산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죠.』
MC는 집요하게 말끝을 물고 늘어졌다. 무섭지 않더냐, 누구 생각이 먼저 나더냐, 밤길에서 만난 사람은 없었느냐…… 등등 방송시간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희수는 하마터면 그의 질문에 휘말려 호숫가에서의 이상한 야영을 털어놓을 뻔했다. 그랬으면 MC는 그 사내와의 비밀에 관해서 셰퍼드처럼 물고 늘어졌을 것이었다.
그녀는 원래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처녀였다. 방송시간의 제약이 없었다면 그 사내와의 첫 경험까지도 수줍게 고백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유리창 밖에서 양동기 PD의 제지 사인이 들어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희수는 대충 좋은 사람 만나서 밤길의 공포에서 벗어났노라 얼버무리고 스튜디오를 나왔다. 양 PD는 센스 있게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민속음악을 틀고 있었다.
그 여자구나!
동선은 휘네스에 불을 당겨 첫 모금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서 헤어질 때, 그 여자는 출근시간에 라디오를 켜면 자기와 만날 수 있을 거란 말로 인사를 대신했었다.
아나운서일까?
그때 그는 가볍게 그녀의 직업을 추리해 보고는 넘어가고 말았었다.
왜 그런 암시를 남기고 싶었을까?
그는 그녀의 지적인 얼굴을 떠올렸다. 섹스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티를 감추려 했던 여자, 나를 무척이나 알고 싶어하면서도 이름 석 자를 못 물어 봤던 숫기 없는 여자.
동선은 그녀를 생각하면서 애틋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정희수, 방송작가.
그는 그녀의 이름을 또렷하게 뇌리에 각인시켜 두었다. FM라디오의 MC가 친절하게 그녀를 소개해 준 덕이었다.
아침 프로그램 1부의 클로징 시그널이 흐르자 동선은 라디오를 껐다. 그러자 물안개와 함께 적막이 번졌다. 그는 차의 도어를 닫고 간이의자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보통 저수지. 그는 밤새 그 곳에 앉아 있었다. 인근에 용주사와 융건릉, 수원 대학교와 그린피아 호텔 같은 명소가 즐비해 수도권에서는 제법 소문난 낚시터였다.
해가 솟아오르면서 수면 위의 물안개가 증발하자 동선은 낚시 도구를 챙겨 일어섰다. 물론 어망은 텅텅 빈 채였다.
저수지 주변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몇 구비를 돌던 그의 지프가 마당 넓은 이층집으로 들어섰다. 등나무와 포도줄기가 울타리를 뒤덮고 있는 마당 한구석에서 개가 짖었다. 그 집이 하수지의 작업실이었다.
동선이 2층으로 올라갔을 때 하수지는 비스듬히 전면으로 기운 책상 앞에서 열심히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쉬어 가면서 하지 그래!』
『어딜 다녀오신 거죠? 혹시 여기가 불편해서 그린피아 호텔에서 주무신 건 아니겠죠?』
『낚시하고 온댔잖아.』
『많이 잡으셨나요?』
『방생해 주고 왔지.』
『저를 격려하러 온 게 아니라 속셈은 딴데 있었던 거로군요?』
그녀는 계속 책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투정 어린 질문을 던졌다.
『재워 줄 생각이었나?』
『그럼 서울에서 여기까지 스폰서가 왕림하셨는데 아무렴 내쫓을 생각이었겠어요?』
『1층은 조각하는 작업장이고, 여긴 스케치룸, 잠은 어디서 자?』
『저거 안 보이세요?』
그녀가 동선 바로 옆의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에서?』
『시트를 젖히면 침대가 돼요. 파리에서 쓰던 건데 너무 정이 들어서 꾸려온 거예요.』
『하아, 요놈이 하수지와 함께 몇 년 동안 밤을 보냈다 이거지?』
그가 체크무늬 천으로 된 소파를 들어 펼치며 깜찍한 침대를 만들었다.
『피곤하군, 재워 줄 수 있겠어?』
『……?』
동선이 털썩 침대로 몸을 싣고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일어섰다.
『담요는 됐고, 수지의 무릎이 필요해.』
『무릎요?』
『난 여자의 무릎이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거든.』
『바람둥이로군요?』
『그렇다고 남자의 무릎을 베고 잘 순 없잖아?』
동선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 사람, 장난하는 게 아니구나. 사람의 무릎을 베어야 잠으로 떠날 수 있다는 건 무서운 얘기가 아닐까?
문득 그녀는 그의 말에서 바람 한 줄기를 느꼈다. 그녀는 그의 몸 위로 쓰러지며 속삭였다.
『저한테 모성을 기대하진 마세요.』
그녀가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자궁 속의 태아처럼 편안하게 웅크렸다. 그는 졸지에 팔베개를 내어 주고 멍청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피곤해요. 포옥 안아 주세요.』
그녀는 그의 턱밑까지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정연한 속눈썹을 들여다보며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우린 닮은 데가 많군.』
그는 그녀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이내 두 사람의 다리가 빈틈없이 교차하며 서로를 결박했다.
한남대교의 남단, 경부선이 시작되는 대로변에 정체불명의 사내 세 명이 하늘색 빌딩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당히 오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동작은 자연스레 은폐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연두색 점퍼 안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동화빌딩 전경과 간판은 충분히 찍었어. 이제부턴 소형 카메라로 처리해야겠지?』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턱짓으로 차도를 가리켰다. 그 곳엔 감색 승합차가 서 있었다.
연두색 점퍼가 행군하는 첨병처럼 경계를 하면서 승합차로 걸어갔다. 품속에 숨긴 카메라를 내려놓고 화장품 케이스만한 철제 박스에서 만년필 같은 기구를 꺼낸 후 전원을 켰다.
『조심하슈! 그거 아파트 한 채하고 맞먹는 값이라며?』
『성능 하난 죽여 주지.』
『일본 애들, 카메라는 정말 잘 만든단 말씀이야. 내가 봐도 구분이 안 가. 그거 정말 찍히는 거유?』
핸들을 잡고 있던 사내는 봐도봐도 신기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자, 출발하자고! 벌써 삼 개월을 죽쒔어. 오늘 꼬리를 못 잡으면 데스크에 할말이 없다고.』
선글라스의 사내도 승합차 안으로 들어와 점퍼를 벗었다. 그는 금세 회색 더블의 신사로 변했다.
『이걸 포켓에 꽂으세요. 이 끝이 렌즈니까 각도에 유의하셔야 해요.』
만년필 카메라를 조립한 사내가 굳은 얼굴로 사용법을 설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손으로 쥐고 포착하고 싶은 피사체를 겨냥해 주는 게 좋아요. 그래야 촬영이 제대로 되거든요.』
출동준비를 완료한 그들은 입술을 다물고 하이파이브를 교환했다.
3개월의 잠복, 특수 카메라까지 동원해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그들의 정체는 새로 개국한 케이블 TV 여성채널 W-net의 특집 취재팀이었다.
선글라스와 점퍼를 벗고 말쑥한 신사로 변신한 사람은 팀장 조재봉 PD. 조재봉은 기존 공중파 방송국에서 사회성 짙은 고발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은 후, 신설 W-net의 팀장으로 스카웃된 경력의 소유자였다.
3월, 케이블 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되면서 20여 개에 달하는 방송국들은 일제히 레이스를 시작했다. 특히 두 개의 채널로 인가된 여성 방송국끼리의 경쟁은 출발부터 치열했다. 중산층의 미시족들을 겨냥한 개국 특집 프로그램이 매주 제작되었고, 상대 방송국의 편성표에 대응해 수시로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할 정도였다.
목동과 상계동 APT 밀집지역에 시범적으로 케이블이 깔려 있었으므로 주시청자를 30대 주부로 설정한 건 당연했다. 당장은 수익성이 없어도 전력을 다해 그들의 시선을 끄는 게 양 방송국의 과제였다. 케이블 TV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때 그녀들의 반응이 곧장 CF단가와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패션 정보, 요리, 육아, 취미, 교양, 건강 등등 여성 방송국이 다룰 주제는 다양했지만 W-net의 고위층에서는 ‘성문제’를 가장 중요한 아이템으로 인식했다.
성에 관한 모든 것, 그러나 차마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비밀을 직설적으로 해부하는 것, 그것이 W-net 특별취재팀의 극비 프로젝트였다.
개국 특집으로 조재봉 팀은 ‘여대생들의 성에 관한 인식’을 주제로 앙케트 쇼를 기획했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이후 ‘성의 사회학’, ‘광고 속의 성’, ‘직장에서의 성희롱’ 등의 주제로 매달 히트를 날렸다.
세상의 모든 성문제에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원하고 있는 W-net의 취재팀의 정보망에 월척이 걸려든 건 7월 초였다. 수백 명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검찰에 입건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희대의 플레이보이. 이 현대판 돈환을 추적해라! W-net의 조재봉 팀은 편성제작국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그 플레이보이의 행방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W-net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들이 검찰의 결정 이후에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자 했지만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몰라 포기하고 말았었다.
그러나 조재봉은 남다른 수완이 있었다. 그는 공중파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검찰청 관계자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아 둔 노하우가 있었다. 더구나 플레이보이를 직접 수사한 송창식 검사는 조재봉의 선배였다.
송 검사는 조재봉에게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제공했다. 플레이보이의 거처와 사무실을 알려 준 거였다. 법치국가에서 피의자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한다는 건 위법이었지만 송 검사는 조재봉의 실력을 믿고 감히 위법을 감수한 거였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방송국 후배가 들쑤셔서 다시 사회문제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조재봉 PD는 송 검사에게 더 자세한 사건기록을 요구했지만 그 이상의 자료는 얻을 수 없었다.
그게 전부야. 물론 그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의 신상명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까지 내줄 순 없어. 그녀들이 신분 노출을 원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을 만난다 해도 얻을 게 없어. 오히려 조 PD 자네의 눈만 흐려질 거야. 박인수 사건 때 발표됐던 유명한 일화 알지?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말.
우리가 조사한 여자들 중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여자들이 이 시대에 카사노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니 그것만 갖고 처음부터 시작하게.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말야. 송 검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방송은 추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철저히 눈에 보이는 실체를 포착해야 작품이 되고 상품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조재봉 팀은 플레이보이의 주소 하나만 가지고 석 달 동안 소득 없는 잠복근무를 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동화빌딩 10층에 있는 동화조경연구소.
소장 오연화는 북쪽으로 난 창으로 한강을 조망하다 손님을 맞았다.
『실례합니다, 사장님 계십니까?』
숱이 드문 머리를 무스로 빗어넘기고 핸드폰을 든 채 인사한 사내는 조재봉이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소장인데요.』
오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맞았다.
조재봉은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의 인상을 재빠르게 훔쳐 읽었다.
서른 살 가량 됐을까? 유난히 날카로운 콧매와 그로 인해 뾰쪽하게 말려 올라간 윗입술, 베이지색 원피스 안에 감춰진 탄력 있는 몸매. 보통 농염한 여자가 아니었다.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왔습니다. 조경연구소 맞습니까?』
『맞습니다.』
『근데 겉보기와는 달리 사무실이 허전하군요.』
그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최신식 사무가구로 깔끔하게 세팅된 사무실이었지만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상근 직원은 없어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따라 프리랜서들이 앉는 자리예요.』
『그럼 잘 돌아가고 있는 회사임에 틀림없습니까?』
『뭘 알고 싶으신 건가요?』
그녀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낯선 손님의 얼굴에 고정시켜 놓은 눈초리에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아, 저는 조그만 무역회사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공항 가까운 등촌동에 사옥을 지을까 하는데 의논드릴 것이 있어서 온 거지요.』
『조경에 관해서요?』
『물론이죠. 원래 공장으로 사용하던 부지라 터가 무척 넓습니다. 그 특성을 어떻게 살리면 좋을까 고민중입니다.』
『예산은요?』
『그건 아직 결정을 못 했습니다. 생각만 하고 있는 중이지요.』
오연화가 뚫어지게 그를 보다가 씽긋 웃었다.
『연기가 서투르시군요.』
『네에?』
『진짜 알고 싶은 것만 물어 보세요. 각본에도 없는 즉흥대사로 스타일 구기시지 말고요.』
조재봉은 오연화의 정곡을 찌르는 기습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어설퍼 보입니까?』
『가뜩이나 할일 많은 세상에 왜들 술래잡기로 허송세월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 사무실을 일부러 찾아온 손님이신데 예의는 갖춰야겠죠? 처음부터 다시 인사할까요? 저는 동화조경연구소의 소장 오연화라고 해요.』
그녀가 응접 테이블의 명함꽂이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조재봉이 명함을 받고 엉거주춤하자 가차없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아주 직선적인 성격이에요. 손님께서도 직선적으로 자신을 밝힌다면 여기 찾아온 목적을 의외로 쉽게 달성할지도 몰라요.』
조재봉은 별수없이 지갑 속의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W-net의 특집반 조재봉입니다.』
『여성채널 프로듀서께서 웬일로 저희 사무실을 찾아오셨을까요? 설마 조경에 관한 취재거리 때문은 아닐 테고…….』
조재봉은 난감해서 천장을 올려보았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상 취재는 여기서 끝장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분 노출은 금물이었는데 그녀의 칼 같은 눈초리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 사무실의 진짜 오너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동선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조재봉은 속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무작정 외면할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입에서 이동선의 이름 석 자가 나올 줄이야.
『그분이 이 사무실의 실제 주인인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거의 출근은 하지 않아요.』
『그럼 오연화 소장께서 경영을 하시는 겁니까?』
『네, 제가 관리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여성채널 방송에서 그분을 찾아오셨는지 물어 봐도 될까요?』
『어찌 됐든 화제의 인물이니까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다면 당당하게 절차를 밟거나 취재의도를 밝히는 게 매너 아닌가요?』
『사안이 민감한 거라서 일단 임기응변을 발휘해 본 겁니다.』
『민감한 만큼 대범하셨어야죠. 그래 그분의 사생활을 취재해서 어떤 식으로 방송할 생각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너무 다그치지 마십시오. 진땀이 납니다.』
『그럼 제가 말해 드리죠, 그분은 아주 평범한 30대 초반의 사업가예요. 건축계와 미술계에 발이 넓어 이런 사무실을 운영하게 됐구요. 감성이 풍부한 페미니스트라서 여자들의 눈길을 받는 핸섬보이기도 하죠. 어떤 연유로 검찰에 불려가는 해프닝을 연출하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행여 단순한 센세이션을 노리고 그분을 취재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는 게 현명할 거예요.』
『페미니스트라……?』
『조재봉 PD님이라고 하셨죠? 조 PD께선 결혼하셨나요?』
『3년째입니다.』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성들과 사랑을 나눠 보신 적 있으신지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럼 조 PD님의 외도를 다른 방송국에서 취재해 폭로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
『제가 보기에도 그분의 애정행각이 남달리 복잡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분의 행적은 조 PD님보다 훨씬 정당할 수도 있어요. 적어도 그분은 외도를 한 적은 없으니까요. 아직 독신이거든요.』
이 빌딩에 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정말 뭔가 끝장을 보고 말리라 이를 악물었건만 의외의 강적을 만나 도리어 이상한 끝장을 당하고 있는 거였다.
『더 할말 남아 있나요? 솔직하게 말씀을 하세요. 사회정의를 위해서 희대의 색마를 고발하고 싶다든지, 이 시대에 만연한 인스턴트 섹스 풍속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든지 아니면 황색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올리고 싶다든지 진짜 속마음을 얘기하시는 거예요. 조 PD님의 얘기에 제가 설득당한다면 그분의 취재에 적극 협조하겠어요.』
『할말 없습니다. 낯이 뜨거워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은 마음밖에는.』
조재봉은 일어서면서 상의 포켓에 꽂힌 만년필 카메라의 스위치를 껐다. 취재는 그걸로 끝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는 참담했다. 그러나 그 참담함 속에서도 의구심의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동선과 오연화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 의구심은 결코 이동선에 대한 취재를 포기하게 할 수 없는 미련의 끈이었다.
565 - 0011(on-line 금융서비스)
11#(잔액조회) 22#(은행코드)
16008458438#(계좌번호), 1357#(암호코드)
수십 개의 숫자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암기하고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는 상미의 손가락은 노련했다.
-10월 25일 현재 귀하의 잔액은 구백오십팔만 이천육백삼십 원입
니다.
₩ 9,582,630.
상미는 음성정보서비스에서 흘러나오는 금액을 비밀수첩에 적었다.
어제 오후 은행 마감시간 직전에 확인한 금액은 ₩ 10,582,630. 그렇다면 오늘 오전에 남편은 백만 원을 인출한 게 분명했다.
그녀는 다시 전화버튼을 눌렀다. 남편의 무선호출번호와 사서함 코드 비밀번호와 확인코드를 연달아 누르는 동작은 차라리 예술의 경지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음성사서함에선 명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릴레이로 풀려 나왔다. 상미는 스피커폰을 눌러 소리를 증폭시켜 놓고서 여자들의 이름과 메시지를 수첩에 깨알같이 적었다.
오늘은 경마장이라는 특정 장소가 자주 튀어나왔다.
음성사서함에서 경마장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건 몇 주 전부터였다. 주말이면 한적한 교외로 나가 밀애를 즐기던 남편의 취미패턴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였다.
경마는 도박 중에서도 가장 중증의 환자들이 몰두하는 일종의 마약과 같은 것. 상미는 익히 소문을 들어 경마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경마 아니라 더 큰 도박판이라도 남편은 결코 가산을 탕진하지 않을 거였다. 까짓 경마에서 잃으면 얼마를 잃는단 말인가. 그는 매일 수억 대의 증권을 주무르는 승부사인데 말이다. 또 백만 원 정도를 인출해 갔다면 도박에 뜻이 있는 건 아닐 게 분명했다.
상미가 불쾌한 건 꼭 경마장에 어떤 여자와 동행한다는 점이었다. 음성사서함의 정보에 따르면 남편은 원경희라는 여자와 벌써 두번째 경마장행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첩에 적힌 원경희의 이름에 몇 번이고 밑줄을 그었다. 그 묘령의 여인을 질투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남편이라는 사람이 세상을 철저하게 자기 취미로만 사는 게 너무 희한할 뿐이었다.
다른 부부들도 다 이렇게 사는 걸까?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결혼생활의 본질에 의문을 품곤 했다.
이건 악몽이지 절대 결혼생활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혼 따위를 들먹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저급한 행사를 위해 행정절차를 밟고 가정법원의 담당자들 앞에서 상호 인신비방을 해야 한다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이미 둘 사이에는 마음의 이혼이 진행되고 있었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살아야 할 부부가 어느 한쪽에게 거짓말을 했을 땐 그 순간 상대를 속이는 것이며, 그 순간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 거짓말은 꼬리를 물게 마련이었다. 한 번 내뱉은 거짓말의 완전범죄를 위해서 끊임없이 거짓 알리바이와 거짓 표정으로 거짓의 장벽을 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아직 상미의 가정은 온전했다. 적어도 상미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부부생활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이웃들이 보기엔 남부럽지 않게 일찍 안정된 신혼부부였다.
멋대로 돈을 쓰고 바람을 피우지만 남편은 경제적으로 확실한 가장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궁핍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구입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시간도 넉넉했다. 읽고 싶은 책이며 보고 싶은 비디오테이프를 지겨워서 하품이 나올 때까지 즐길 수 있었다.
때론, 아주 드물게 평범한 이웃의 젊은 부부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박봉의 월급을 쪼개 살림을 꾸리고, 아기의 울음소리에 단잠을 설치고, 사소한 감정대립으로 티격태격 다투는 그들의 일상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보다도 자신의 삶이 훨씬 자유로운 건 사실이었다.
상미는 결코 결혼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결혼하라고 해도 지금의 남편을 택할지도 몰랐다. 위선자인 남편을 미워하자면 한이 없었지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을 뜯어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상미 자신으로서도 남편을 방치할수록 자유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이즈음의 세월을 즐기는 쪽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맘 편히 살 작정이었다.
그녀만 입 다물고 있으면 모든 게 지금까지 흘러 왔던 대로 흘러갈 것이다. 남편은 거짓말을 일삼은 대가로 더욱 헌신적인 표정을 지을 것이고, 그 위장된 부부관계는 자꾸자꾸 이력의 부피를 살찌우며 굴러가리라. 거짓말도 참말로 만들어 가면서.
비밀수첩을 문갑 구석에 은닉하고 나서 상미는 어디론가 삐삐를 쳤다.
『안 주무셨어요?』
선실에서 나온 청바지의 여자가 다가와 그의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더 자지, 왜 일어났어?』
『저쪽 팀도 일어났어요.』
『벌써?』
『그 사람들 소리에 깼으니까요.』
『후후, 아직도 기력이 남았나 보군.』
동선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최종명이라는 친구는 꼭 새벽녘에 확인 사살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청바지가 두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고 망연한 눈빛을 던졌다.
동선도 다시 먼 수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바지는 간밤의 축제에 휩쓸린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 잔뜩 이슬이 고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훨씬 청순해 보였다.
그녀는 동선한테서 위로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을 지켰다. 위로는커녕 갑자기 입술을 닫고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는 거였다.
눈을 질끈 감아 무릎에 떨궈 버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동선을 보았다.
어떻게 저 사람을 따라 나서게 됐을까.
그녀는 어젯밤 청평 휴게소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현리의 남자친구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한 시간은 10분. 그녀는 화장실을 들렀고, 전망대로 나가 유원지를 내려다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주차장의 공백을 가로질러 오는 지프가 있었다.
『어딜 보고 있는 겁니까?』
『저 아래 유원지요.』
지프에서 내린 사내가 부드럽게 다가와 커피잔을 채갔다. 아니 그녀가 건네 줬다는 표현이 옳았다. 그가 손을 내밀자 너무도 자연스럽게 커피잔을 건네 주고 만 거였다.
그는 그녀의 루즈 자국에 입술을 대고 바닥에 남은 커피를 마셨다.
『블랙을 마시는군요.』
그는 빈 잔을 거꾸로 뒤집으며 싱긋 웃었다.
『마음이 참 따뜻해요. 낯선 사람이 손을 내밀었는데 선뜻 잔을 건네다니.』
『그럼 어떻해요, 갑자기.』
그가 활짝 웃자 그녀도 웃었다. 맑은 웃음, 그 웃음 때문에 그녀는 취해 버렸다.
『전망대에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더군요. 청평의 가을만큼이나.』
『청평의 가을이 어떤데요?』
『쓸쓸하지 않아요?』
『그럼 제가 쓸쓸해 보였단 얘긴가요?』
『그렇게 보였으니까 분명히 댁은 쓸쓸할 겁니다.』
이 남자가 지금 수작을 거는 건가?
그녀는 경계심을 드러내며 슬쩍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야겠어요.』
『어디로 가는 버스죠?』
『상봉동 직행이에요.』
『지금부터 서울까지 가는 버스 속에서 아마 당신은 꼭 한 번 울음을 쏟을 거 같군요. 운다고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마음을 서울까지 가져가지 마십시오. 마음의 독은 여행지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죠?』
『느낌이에요.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내 차를 타세요. 버스보다는 한결 편할 테니까.』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버스의 엔진음에 놀라 한 걸음을 떼었지만 그의 말에 뒷덜미라도 잡힌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좋아요, 태워 주세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차에 올랐다.
까짓거 요즘 야타족도 많고 야타에 응하는 처녀들도 많다는데 겁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사내의 인상도 웬지 미더웠고 무엇보다도 그의 예감이라는 게 결정적이었다.
서울 가는 버스 속에서 울 것 같다니. 정말 놀라운 예지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현리에서 청평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고 눈물을 쏟으려다 꾹 참아 왔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줌마 때문에 맘 놓고 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감정 같으면 영락없이 한 번은 울 것 같았다.
그녀는 현리 기갑부대에 근무하는 애인이 있었다. 이제 일병이었다.
군대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실 애인이라기보다 친구라는 편이 어울리는 사이였는데, 영장이 나온 날 둘은 애인관계로 급속히 맺어져 버렸다. 남자친구가 마치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청승을 떨며 그녀의 모성을 자극하는 거였다. 그녀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골 초등학교 동창 사이였는데 중학교 때 헤어졌다가 재경 동문 모임에서 재회한 그 친구. 그녀는 여상을 나와 신용금고를 다니는 중이었고, 그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가끔 생각나면 그녀를 찾아와 어리광을 부리다 돌아가곤 했다. 아무래도 시골 출신 대학생보다 직장생활을 하는 그녀의 경제사정이 조금은 나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그녀는 늘 누나처럼 맛있는 음식을 사 주었고 용돈까지 챙겨 줘야 했다. 정말이지 이성의 감정은 느껴 보지 못했는데 영장이 나온 날, 그가 처음 이성으로 변해 함께 밤을 보내자고 억지를 부렸다.
물론 그녀는 남자 경험이 있었다. 신용금고의 직속 상사인 권 대리와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 오고 있었고, 권 대리 이전에도 몇 번의 경험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헤픈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면 꼭 끝장을 봐야 속이 풀리는 족속들이었다. 말로는 우정이라 해도 우정의 끝은 꼭 성관계였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심성이 착했다. 그래서 남자들의 집요한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요령을 몰랐다. 그녀는 결국 입대를 며칠 앞두고 그 친구와 밤을 보내고 말았다. 그것이 결코 연정(戀情)은 아니었다는 걸 그때도 알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입대하더니 매일 군사우편을 보내 왔다. 편지 내용도 버젓이 애인을 자처하고 있는 거였다. 6주의 훈련이 끝나 자대배치를 받고 나서는 간절하게 면회 요청을 보내 왔다. 그녀는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의 힘든 생활을 생각하면 그저 연민이 앞설 뿐이었다. 그래서 면회를 갔는데, 그는 만나자마자 현리의 외딴 숲 속으로 끌고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거였다.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으나 애당초 그녀의 면회일정에 그런 계획은 없었다.
그는 철부지처럼 매주 면회를 와 달라고 졸라 댔다.
그녀는 피곤했다.
내가 왜 주말마다 현리까지 달려가 저 친구의 욕망을 받아 줘야 하나?
그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일주일 내내 격무에 시달렸으니 주말이면 좀 쉬어야 하는데 엉망으로 차가 밀리는 경춘 국도로 나가 헤매고 있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작심하고 편지를 썼다. 비록 육체관계는 맺었어도 사랑의 감정은 없었으니까 이만해서 정리하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거라고 썼다. 그리고 면회도 딱 끊었다.
그랬더니 당장 반응이 왔다. 편지와 전화가 빗발쳤다. 처음엔 애원과 사정조였지만 나중엔 협박까지 동원했다. 탈영과 자살까지 들먹거리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달라는 부탁에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현리를 찾은 거였다. 그리고 병사와 밤새워 대화했다.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무던히도 오래 다툰 거였다.
새벽에 병사가 항복하고 말았다. 싫다는 여자에게는 해결책이 있을 수 없는 거였다.
그리고 둘은 이별식을 나눴다. 그는 그녀의 아늑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그래, 솔직히 너랑 결혼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어, 그냥 너의 이 따뜻한 가슴이 그리웠던 거야. 그리고 삭막한 병영생활에 아직도 적응을 못 했어. 그래서 너한테 의지하고 싶었어. 결혼 같은 말을 입에 올릴 자신은 없지만 나는 너를 미치도록 좋아한단다. 이런 게 뭐니? 개 같은 경우지. 앞으로는 너를 구속하지 않을게.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현리로 떠나오는 길이었다.
『이런 관계가 뭐죠?』
지프 안에서 그녀는 동선에게 물어 보았다. 현리에 얽힌 모든 사연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난 뒤에.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이 사내는 자신의 심리를 속속들이 꿰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마디로 연민이라고 해야겠지. 연민처럼 실속 없는 감정도 없어. 아가씨는 아직도 빛나는 청춘이야. 거기에 요즘 보기 드물게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고. 그러나 이제부턴 실속을 차려야 해. 젊음은 유한한 거니까.』
청평호수 입구에서 둘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막걸리와 파전, 막국수.
그 메뉴를 비웠을 때 그녀는 그의 신도로 변해 있었다.
동선은 계속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청바지의 여자는 물어 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의 옆얼굴만 보고 있어야 했다.
현리에서의 처연한 이별식과 요트에서의 난잡한 게임을 겪고 난 새벽은 몽환적이었다.
마음의 독은 여행지에 묻고 가.
그는 이런 말로 유혹했었다.
어젯밤은 정말 비몽사몽간에, 막걸리와 조니워커와 이 사내의 말에 취해 열심히 젊음을 발산해 버렸었다. 그게 마음의 독을 치유하는 살풀이가 될 거라고 자위했다. 그런데 여명이 밝아오는 이 새벽에 가슴 가득 무겁게 짓눌러 오는 이 무게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그걸 묻고 싶었다. 그런데 사내의 눈빛이 너무 슬펐다. 울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우수가 잔뜩 서린 눈빛이었다.
『출근해야지? 가자, 늦진 않을 거야! 어제 만났던 휴게소에서 해장국이라도 먹고.』
그가 한참 후에 부시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넌 이제부터 잘할 수 있을 거야. 새로 태어나는 기분으로 경춘선을 달리자고. 마음은 요사스런 것이어서 변덕이 심하지. 하지만 마음에 자꾸 쏠려다니지 마. 네 마음의 주인은 너일 수밖에 없어. 네가 마음을 만들고 조종하는 거지.』
경춘선을 달리면서 그녀는 그의 말을 염두에 두고 자기최면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는 과연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녀의 교주였다.
『그리스 신화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나와요. 자신이 만든 여인의 조각상에 반해 버린 사나이죠. 그의 갸륵한 정성에 감복한 신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는 신화, 이 해피엔딩에서 유래된 말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예요. 원하는 대로 정신을 쏟으면 그 일이 이뤄진다는 심리적 효과를 일컫는 신조어죠.』
강남 힐탑호텔 맞은편 언덕길에서 하수지는 마냥 행복한 얼굴로 강남 일대의 전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이동선이 원통처럼 둘둘 만 조감도를 내밀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구상해 봐요.』
그녀는 조감도를 받고도 펼쳐 보지 않았다.
『이 언덕의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요. 저쪽 힐탑을 보세요. 이름만 그럴듯하지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은 전혀 없다고요. 난 이쪽에 보란 듯이 새로운 명소를 창조하고 말 거예요.』
하수지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파리에서 갈고 닦은 환경미술의 진수를 이 바닥에 선보이리라.
이 언덕에 새로 들어설 극장건물의 조경을 맡게 된 그녀의 머릿속에 벌써 아름다운 구상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극장 뒤켠의 축대는 40여 미터. 그 여백의 벽면에 걸작 영화들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새겨 놓으리라. 광장의 보도블럭 틈틈이 스타들의 손도장을 모자이크해 두고, 가로등도 바로크풍의 장식등으로 바꿔 세우고, 그 아래 빨간 벤치를 길게 놓으리라. 그 곳에 연인들이 모여들고 영화와 사랑을 이야기하겠지.
주차장 구석에도 역시 빨간 전화박스를 설치하리라. 그 옆쪽에 만남의 장소를 설정하고 새끼손가락이 얽힌 약속의 조각을 세워 두는 것도 산뜻하겠지.
『커피 어때요. 저기 페르시아의 원두 맛이 괜찮은데.』
동선이 부드럽게 하수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언덕의 내리막길로 인도했다.
커피숍 페르시아의 실내는 바깥이나 다를 바 없이 환했다. 천장이며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가을 햇빛이 무더기로 투과하고 있었다.
『이 커피숍도 명소가 될 거예요. 극장이 들어서면.』
하수지는 창쪽 자리에 앉자마자 페르시아의 실내장식을 둘러보며 말했다.
매사에 자신만만한 여자였다.
『한 가지 충고를 한다면, 첫 작품이니만큼 구상 이전에 제작비 규모를 냉정하게 잡아야 해요.』
『규모가 어떻게 되죠?』
『3억 5천.』
『많은 건가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직 돈에 대한 감각은 둔한 편이죠, 작업해 나가면서 균형을 맞추는 수밖에 없겠네요.』
동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철부지 예술가 앞에서 환경미술의 경제를 논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미술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이론과 실기를 완벽하게 갈고 닦아 마스터했다 해도 이 땅에서 성공하려면 그보다 우선하는 게 있었다. 바로 비즈니스였다.
이 땅에서 지어지는 모든 대형 건물은 건축비의 1%를 환경투자금으로 안배해야 한다. 서울시 조례에 그렇게 못박혀 있다.
미술 진흥을 위해 만들어진 강제규정이었다. 건축주는 설계할 때부터 조각가를 미리 선정해야 하고 건물의 환경을 위해 1%의 작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아무나 맡는 게 아니다. 건축주와 작가들 사이에 거래(?)를 만들어 주는 브로커들이 있다. 브로커들은 서울시에 새로 신축될 건물의 정보를 환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일을 맡길 만한 작가들의 명단을 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맥과 학맥의 고리를 이용해 거래를 성사시킨다. 거기서 묻어나는 떡고물이 그들의 몫이다.
예컨대 K백화점의 건축비는 525억. 그렇다면 미술진흥을 위한 조경비는 5억 2,500만원으로 책정된다. 브로커는 프로젝트 계약을 위해 그 액수의 20%를 건축주에게 리베이트로 상납한다. 계약이 체결되면 그들은 작가에게 전체액의 55% 정도만 작업료로 지급한다. 남은 25%가 브로커의 몫이다. 그러나 세무서에 신고되는 5억 2,500만원은 전액 작가의 수입으로 기록된다.
어디서나 존재하는 비리의 먹이사슬이지만 환경미술계의 경우는 좀더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단위가 크기 때문이었다. 허울만 좋은 세계, 예술의 이름으로 덤핑과 리베이트가 난무하는 이 바닥에서 작가들은 영혼을 저당잡히고 있는 것이었다.
이동선도 그 브로커 중의 하나였다. 신사동에 조형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조각가들을 좌지우지하는 큰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햇병아리 여류작가 앞에서 브로커가 아니었다. 그저 마음 넉넉한 스폰서였다.
『그러다 적자를 보면 앞으로 작업하기 힘들어지지 않겠어요?』
『그럼 선생님이 좀 지원해 주세요. 흑자를 보면 대신 선생님께 전부 돌려 드릴게요.』
여자는 당돌했다.
그는 그녀의 때묻지 않은 제의에 또 피식 웃고 말았다. 바로 그런 매력에 이끌려 하수지에게 이번 프로젝트를 맡겼던 그였다.
사실 신축 극장의 공사비는 백억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극장 자체가 문화시설이라는 이유로 환경기금을 3%로 끌어올린 거였다.
동선은 블루맥주 최종명 사장의 힘을 빌려 이 계약을 따낼 수 있었다.
모두 하수지를 위한 비즈니스였다. 그는 그녀에게 완벽한 선물을 줄 작정이었다. 건축주에 대한 리베이트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자신의 몫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이 통통 튀는 여류조각가에게 뛸 마당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다.
이 남자…….
하수지는 방금 날라온 원두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맞은편에 앉은 동선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을 등진 사내의 모습은 그림자에 가까웠다. 눈이 부셔 시선을 거두면서 그녀는 다시 커피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였다. 커피 속에서 사내를 음미하려는 듯.
그녀는 맞은편의 사내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프랑스 8년, 귀국해서 1년, 도합 9년 동안의 홀로서기를 하면서 꼭꼭 눌러 두었던 어리광의 본능. 그녀는 운명의 스폰서 앞에서 세살짜리 여자애처럼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파리에 있을 땐 정말 자신만만했어요. 내 손으로 만진 모든 사물이 작품으로 변하곤 했으니까요. 근데 귀국해서 절망했어요.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내 영혼은 주눅이 들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언젠가는 내 손가락을 사 줄 사람이 나타날 줄 알았어요. 피그말리온의 신화처럼.』
『오히려 내가 피그말리온 아닐까요? 난 하수지라는 조각을 빚었는데 신이 감동해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으로 탄생한 그녀는 첫번째로 만난 내 앞에서 나신을 부끄러워하며 몸을 가린다.』
『우와, 멋진 비유예요!』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박수를 쳤다.
아아, 이 남자, 정말 내 운명을 조각하고 있는 사람!
『하지만 틀린 게 있어요. 내가 조각에서 사람으로 변해 선생님 앞에 서게 됐다면 몸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자기를 완벽하게 조각해 준 창조자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우습지 않나요?』
그녀가 말을 끝내 놓고 또렷한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전적인 언사였지만 무한한 복종의 뜻이 담긴 말이었다.
가을비와 몸살.
새벽에 내리는 가을비는 회초리처럼 아팠다. 그 싸늘한 궤적에 은행잎들이 견디지 못하고 떨어졌다.
방송국 스튜디오 앞 복도에서 희수는 신열에 떨고 있었다.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소녀처럼 떨어지는 은행잎이 아파 울고 있었다.
이렇게 몸살의 징후가 느껴지는 날이면 일찌감치 들어가 숙면을 취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녀는 원고를 마감해 놓고도 대기중이었다. 1부 프로그램 중간에 삽입될 배낭여행 코너의 출연자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1년 동안 지구촌을 누빈 여대생 송은주와의 만남 코너는 1부의 하이라이트였다. 시간대별 청취율을 봐도 그녀가 나오는 월, 화, 수 7:40∼7:50 시간대는 산맥처럼 고고하게 솟구쳐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직접 발로 뛰어 생생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체험담은 출근길 청취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었다.
야성적이고 진솔한 매력을 담뿍 소유하고 있는 송은주는 그만큼 희수가 맡은 아침 프로그램의 비밀 병기였지만, 딱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원체 시간관념이 희박해서 월, 화, 수 아침마다 스태프들을 비상대기시키곤 했던 것이다.
『햐, 돌아 버리겠네. 지금 송은주하고 통화했는데 말야, 홋카이도에 가 있대.』
스튜디오에서 뛰쳐나온 양동기 PD가 열받았다는 듯 신문으로 탁탁 부채질을 해대며 희수에게 말했다.
『어제 여기 나왔었잖아요.』
『어제 방송 끝내고 바로 출발했대. 홋카이도에 첫눈이 내릴 거란 소식을 들었대나 뭐라나.』
『화끈해서 맘에 든다니까요.』
『그나저나 그 시간을 뭘로 땜방하지?』
『날도 궂은데 가을비를 주제로 한 노래나 두어 곡 틀죠, 뭐! 브릿지 멘트 몇 개 쓸까요?』
『어, 정 작가도 이제 날씨에 민감해졌군. 난 말야, 이런 날이 정말 싫어. 이런 날 방송국에서 죽친다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 줄 알아? 그저 이런 날엔…….』
『낯선 곳으로 낯선 여인과 함께 떠나 낯선 사랑을 하고 싶다고요, 낯선 체위로?』
『캬, 역시 내 기분 알아 주는 사람은 정 작가밖에 없다니깐!』
『무드 그만 잡고 어서 결정하세요. 새드하고 블루한 노래로 갈 거예요?』
『아침부터 그건 너무 칙칙하잖아?』
『그럼 어떡해요?』
『정 작가, 얼마 전에 여행 다녀왔지? 호주야, 뉴질랜드야?』
『그런데요?』
『당신이 스튜디오에 들어가, 오늘 스페셜 게스트로!』
『제정신이세요?』
『MC하고 다 의논하고 나온 거니까 발뺌하지 말라고! 그냥 MC가 묻는 대로 갔다온 느낌을 털어놓으면 돼.』
『정말이에요?』
『빨리 준비해. 20분 전이야.』
양동기 PD가 제 할말만 쏟아 놓고 슬그머니 스튜디오로 들어가 버리자 희수는 난감했다. 황당한 경우였지만 이럴 때 도망치는 건 프로가 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판기로 가 커피를 뽑았다.
갑자기 찬물을 끼얹고 난 것처럼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체내의 교감신경이 작용하게 되면 인체의 모든 기관들이 전투태세로 전환되는 법.
희수는 잔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스튜디오의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의외로 스튜디오는 아늑했다. 생방송이라는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다 MC 전태식 아나운서의 노련한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희수는 그가 묻는 대로 뉴질랜드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나라의 첫인상과 교통수단, 돌아본 명소, 아서스패스에서 열차를 놓쳐 버린 낭패에 이르기까지.
MC들은 그런 대목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열차를 놓쳤을 때 심정은 어땠나요?』
『한마디로 암담했죠, 뭐.』
『그래서 어떻게 그 난국을 타개하셨습니까?』
『다음 정거장까지 무작정 걸었어요.』
『그 시간이 저녁이었다면서요?』
『네, 산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죠.』
MC는 집요하게 말끝을 물고 늘어졌다. 무섭지 않더냐, 누구 생각이 먼저 나더냐, 밤길에서 만난 사람은 없었느냐…… 등등 방송시간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희수는 하마터면 그의 질문에 휘말려 호숫가에서의 이상한 야영을 털어놓을 뻔했다. 그랬으면 MC는 그 사내와의 비밀에 관해서 셰퍼드처럼 물고 늘어졌을 것이었다.
그녀는 원래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처녀였다. 방송시간의 제약이 없었다면 그 사내와의 첫 경험까지도 수줍게 고백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유리창 밖에서 양동기 PD의 제지 사인이 들어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희수는 대충 좋은 사람 만나서 밤길의 공포에서 벗어났노라 얼버무리고 스튜디오를 나왔다. 양 PD는 센스 있게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민속음악을 틀고 있었다.
그 여자구나!
동선은 휘네스에 불을 당겨 첫 모금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서 헤어질 때, 그 여자는 출근시간에 라디오를 켜면 자기와 만날 수 있을 거란 말로 인사를 대신했었다.
아나운서일까?
그때 그는 가볍게 그녀의 직업을 추리해 보고는 넘어가고 말았었다.
왜 그런 암시를 남기고 싶었을까?
그는 그녀의 지적인 얼굴을 떠올렸다. 섹스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티를 감추려 했던 여자, 나를 무척이나 알고 싶어하면서도 이름 석 자를 못 물어 봤던 숫기 없는 여자.
동선은 그녀를 생각하면서 애틋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정희수, 방송작가.
그는 그녀의 이름을 또렷하게 뇌리에 각인시켜 두었다. FM라디오의 MC가 친절하게 그녀를 소개해 준 덕이었다.
아침 프로그램 1부의 클로징 시그널이 흐르자 동선은 라디오를 껐다. 그러자 물안개와 함께 적막이 번졌다. 그는 차의 도어를 닫고 간이의자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 보통 저수지. 그는 밤새 그 곳에 앉아 있었다. 인근에 용주사와 융건릉, 수원 대학교와 그린피아 호텔 같은 명소가 즐비해 수도권에서는 제법 소문난 낚시터였다.
해가 솟아오르면서 수면 위의 물안개가 증발하자 동선은 낚시 도구를 챙겨 일어섰다. 물론 어망은 텅텅 빈 채였다.
저수지 주변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몇 구비를 돌던 그의 지프가 마당 넓은 이층집으로 들어섰다. 등나무와 포도줄기가 울타리를 뒤덮고 있는 마당 한구석에서 개가 짖었다. 그 집이 하수지의 작업실이었다.
동선이 2층으로 올라갔을 때 하수지는 비스듬히 전면으로 기운 책상 앞에서 열심히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쉬어 가면서 하지 그래!』
『어딜 다녀오신 거죠? 혹시 여기가 불편해서 그린피아 호텔에서 주무신 건 아니겠죠?』
『낚시하고 온댔잖아.』
『많이 잡으셨나요?』
『방생해 주고 왔지.』
『저를 격려하러 온 게 아니라 속셈은 딴데 있었던 거로군요?』
그녀는 계속 책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투정 어린 질문을 던졌다.
『재워 줄 생각이었나?』
『그럼 서울에서 여기까지 스폰서가 왕림하셨는데 아무렴 내쫓을 생각이었겠어요?』
『1층은 조각하는 작업장이고, 여긴 스케치룸, 잠은 어디서 자?』
『저거 안 보이세요?』
그녀가 동선 바로 옆의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에서?』
『시트를 젖히면 침대가 돼요. 파리에서 쓰던 건데 너무 정이 들어서 꾸려온 거예요.』
『하아, 요놈이 하수지와 함께 몇 년 동안 밤을 보냈다 이거지?』
그가 체크무늬 천으로 된 소파를 들어 펼치며 깜찍한 침대를 만들었다.
『피곤하군, 재워 줄 수 있겠어?』
『……?』
동선이 털썩 침대로 몸을 싣고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일어섰다.
『담요는 됐고, 수지의 무릎이 필요해.』
『무릎요?』
『난 여자의 무릎이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거든.』
『바람둥이로군요?』
『그렇다고 남자의 무릎을 베고 잘 순 없잖아?』
동선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 사람, 장난하는 게 아니구나. 사람의 무릎을 베어야 잠으로 떠날 수 있다는 건 무서운 얘기가 아닐까?
문득 그녀는 그의 말에서 바람 한 줄기를 느꼈다. 그녀는 그의 몸 위로 쓰러지며 속삭였다.
『저한테 모성을 기대하진 마세요.』
그녀가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어 자궁 속의 태아처럼 편안하게 웅크렸다. 그는 졸지에 팔베개를 내어 주고 멍청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피곤해요. 포옥 안아 주세요.』
그녀는 그의 턱밑까지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정연한 속눈썹을 들여다보며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우린 닮은 데가 많군.』
그는 그녀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이내 두 사람의 다리가 빈틈없이 교차하며 서로를 결박했다.
한남대교의 남단, 경부선이 시작되는 대로변에 정체불명의 사내 세 명이 하늘색 빌딩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당히 오가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동작은 자연스레 은폐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연두색 점퍼 안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동화빌딩 전경과 간판은 충분히 찍었어. 이제부턴 소형 카메라로 처리해야겠지?』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턱짓으로 차도를 가리켰다. 그 곳엔 감색 승합차가 서 있었다.
연두색 점퍼가 행군하는 첨병처럼 경계를 하면서 승합차로 걸어갔다. 품속에 숨긴 카메라를 내려놓고 화장품 케이스만한 철제 박스에서 만년필 같은 기구를 꺼낸 후 전원을 켰다.
『조심하슈! 그거 아파트 한 채하고 맞먹는 값이라며?』
『성능 하난 죽여 주지.』
『일본 애들, 카메라는 정말 잘 만든단 말씀이야. 내가 봐도 구분이 안 가. 그거 정말 찍히는 거유?』
핸들을 잡고 있던 사내는 봐도봐도 신기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자, 출발하자고! 벌써 삼 개월을 죽쒔어. 오늘 꼬리를 못 잡으면 데스크에 할말이 없다고.』
선글라스의 사내도 승합차 안으로 들어와 점퍼를 벗었다. 그는 금세 회색 더블의 신사로 변했다.
『이걸 포켓에 꽂으세요. 이 끝이 렌즈니까 각도에 유의하셔야 해요.』
만년필 카메라를 조립한 사내가 굳은 얼굴로 사용법을 설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손으로 쥐고 포착하고 싶은 피사체를 겨냥해 주는 게 좋아요. 그래야 촬영이 제대로 되거든요.』
출동준비를 완료한 그들은 입술을 다물고 하이파이브를 교환했다.
3개월의 잠복, 특수 카메라까지 동원해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그들의 정체는 새로 개국한 케이블 TV 여성채널 W-net의 특집 취재팀이었다.
선글라스와 점퍼를 벗고 말쑥한 신사로 변신한 사람은 팀장 조재봉 PD. 조재봉은 기존 공중파 방송국에서 사회성 짙은 고발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은 후, 신설 W-net의 팀장으로 스카웃된 경력의 소유자였다.
3월, 케이블 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되면서 20여 개에 달하는 방송국들은 일제히 레이스를 시작했다. 특히 두 개의 채널로 인가된 여성 방송국끼리의 경쟁은 출발부터 치열했다. 중산층의 미시족들을 겨냥한 개국 특집 프로그램이 매주 제작되었고, 상대 방송국의 편성표에 대응해 수시로 프로그램 개편을 단행할 정도였다.
목동과 상계동 APT 밀집지역에 시범적으로 케이블이 깔려 있었으므로 주시청자를 30대 주부로 설정한 건 당연했다. 당장은 수익성이 없어도 전력을 다해 그들의 시선을 끄는 게 양 방송국의 과제였다. 케이블 TV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때 그녀들의 반응이 곧장 CF단가와 직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패션 정보, 요리, 육아, 취미, 교양, 건강 등등 여성 방송국이 다룰 주제는 다양했지만 W-net의 고위층에서는 ‘성문제’를 가장 중요한 아이템으로 인식했다.
성에 관한 모든 것, 그러나 차마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비밀을 직설적으로 해부하는 것, 그것이 W-net 특별취재팀의 극비 프로젝트였다.
개국 특집으로 조재봉 팀은 ‘여대생들의 성에 관한 인식’을 주제로 앙케트 쇼를 기획했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이후 ‘성의 사회학’, ‘광고 속의 성’, ‘직장에서의 성희롱’ 등의 주제로 매달 히트를 날렸다.
세상의 모든 성문제에 망원경과 현미경을 동원하고 있는 W-net의 취재팀의 정보망에 월척이 걸려든 건 7월 초였다. 수백 명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검찰에 입건됐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희대의 플레이보이. 이 현대판 돈환을 추적해라! W-net의 조재봉 팀은 편성제작국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그 플레이보이의 행방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W-net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들이 검찰의 결정 이후에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자 했지만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몰라 포기하고 말았었다.
그러나 조재봉은 남다른 수완이 있었다. 그는 공중파 고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검찰청 관계자들과 돈독한 친분을 쌓아 둔 노하우가 있었다. 더구나 플레이보이를 직접 수사한 송창식 검사는 조재봉의 선배였다.
송 검사는 조재봉에게 결정적인 단서 하나를 제공했다. 플레이보이의 거처와 사무실을 알려 준 거였다. 법치국가에서 피의자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한다는 건 위법이었지만 송 검사는 조재봉의 실력을 믿고 감히 위법을 감수한 거였다.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방송국 후배가 들쑤셔서 다시 사회문제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조재봉 PD는 송 검사에게 더 자세한 사건기록을 요구했지만 그 이상의 자료는 얻을 수 없었다.
그게 전부야. 물론 그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의 신상명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까지 내줄 순 없어. 그녀들이 신분 노출을 원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을 만난다 해도 얻을 게 없어. 오히려 조 PD 자네의 눈만 흐려질 거야. 박인수 사건 때 발표됐던 유명한 일화 알지?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말.
우리가 조사한 여자들 중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여자들이 이 시대에 카사노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러니 그것만 갖고 처음부터 시작하게.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말야. 송 검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방송은 추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철저히 눈에 보이는 실체를 포착해야 작품이 되고 상품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조재봉 팀은 플레이보이의 주소 하나만 가지고 석 달 동안 소득 없는 잠복근무를 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동화빌딩 10층에 있는 동화조경연구소.
소장 오연화는 북쪽으로 난 창으로 한강을 조망하다 손님을 맞았다.
『실례합니다, 사장님 계십니까?』
숱이 드문 머리를 무스로 빗어넘기고 핸드폰을 든 채 인사한 사내는 조재봉이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소장인데요.』
오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맞았다.
조재봉은 소파에 앉으면서 그녀의 인상을 재빠르게 훔쳐 읽었다.
서른 살 가량 됐을까? 유난히 날카로운 콧매와 그로 인해 뾰쪽하게 말려 올라간 윗입술, 베이지색 원피스 안에 감춰진 탄력 있는 몸매. 보통 농염한 여자가 아니었다.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왔습니다. 조경연구소 맞습니까?』
『맞습니다.』
『근데 겉보기와는 달리 사무실이 허전하군요.』
그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최신식 사무가구로 깔끔하게 세팅된 사무실이었지만 직원은 한 명도 없었다.
『상근 직원은 없어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따라 프리랜서들이 앉는 자리예요.』
『그럼 잘 돌아가고 있는 회사임에 틀림없습니까?』
『뭘 알고 싶으신 건가요?』
그녀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낯선 손님의 얼굴에 고정시켜 놓은 눈초리에 경계심이 묻어 있었다.
『아, 저는 조그만 무역회사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공항 가까운 등촌동에 사옥을 지을까 하는데 의논드릴 것이 있어서 온 거지요.』
『조경에 관해서요?』
『물론이죠. 원래 공장으로 사용하던 부지라 터가 무척 넓습니다. 그 특성을 어떻게 살리면 좋을까 고민중입니다.』
『예산은요?』
『그건 아직 결정을 못 했습니다. 생각만 하고 있는 중이지요.』
오연화가 뚫어지게 그를 보다가 씽긋 웃었다.
『연기가 서투르시군요.』
『네에?』
『진짜 알고 싶은 것만 물어 보세요. 각본에도 없는 즉흥대사로 스타일 구기시지 말고요.』
조재봉은 오연화의 정곡을 찌르는 기습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어설퍼 보입니까?』
『가뜩이나 할일 많은 세상에 왜들 술래잡기로 허송세월 하는지 모르겠어요. 제 사무실을 일부러 찾아온 손님이신데 예의는 갖춰야겠죠? 처음부터 다시 인사할까요? 저는 동화조경연구소의 소장 오연화라고 해요.』
그녀가 응접 테이블의 명함꽂이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조재봉이 명함을 받고 엉거주춤하자 가차없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아주 직선적인 성격이에요. 손님께서도 직선적으로 자신을 밝힌다면 여기 찾아온 목적을 의외로 쉽게 달성할지도 몰라요.』
조재봉은 별수없이 지갑 속의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W-net의 특집반 조재봉입니다.』
『여성채널 프로듀서께서 웬일로 저희 사무실을 찾아오셨을까요? 설마 조경에 관한 취재거리 때문은 아닐 테고…….』
조재봉은 난감해서 천장을 올려보았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상 취재는 여기서 끝장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분 노출은 금물이었는데 그녀의 칼 같은 눈초리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 사무실의 진짜 오너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동선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조재봉은 속으로 꿀꺽 침을 삼켰다. 무작정 외면할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입에서 이동선의 이름 석 자가 나올 줄이야.
『그분이 이 사무실의 실제 주인인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거의 출근은 하지 않아요.』
『그럼 오연화 소장께서 경영을 하시는 겁니까?』
『네, 제가 관리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여성채널 방송에서 그분을 찾아오셨는지 물어 봐도 될까요?』
『어찌 됐든 화제의 인물이니까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다면 당당하게 절차를 밟거나 취재의도를 밝히는 게 매너 아닌가요?』
『사안이 민감한 거라서 일단 임기응변을 발휘해 본 겁니다.』
『민감한 만큼 대범하셨어야죠. 그래 그분의 사생활을 취재해서 어떤 식으로 방송할 생각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너무 다그치지 마십시오. 진땀이 납니다.』
『그럼 제가 말해 드리죠, 그분은 아주 평범한 30대 초반의 사업가예요. 건축계와 미술계에 발이 넓어 이런 사무실을 운영하게 됐구요. 감성이 풍부한 페미니스트라서 여자들의 눈길을 받는 핸섬보이기도 하죠. 어떤 연유로 검찰에 불려가는 해프닝을 연출하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행여 단순한 센세이션을 노리고 그분을 취재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는 게 현명할 거예요.』
『페미니스트라……?』
『조재봉 PD님이라고 하셨죠? 조 PD께선 결혼하셨나요?』
『3년째입니다.』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성들과 사랑을 나눠 보신 적 있으신지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럼 조 PD님의 외도를 다른 방송국에서 취재해 폭로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
『제가 보기에도 그분의 애정행각이 남달리 복잡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분의 행적은 조 PD님보다 훨씬 정당할 수도 있어요. 적어도 그분은 외도를 한 적은 없으니까요. 아직 독신이거든요.』
이 빌딩에 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정말 뭔가 끝장을 보고 말리라 이를 악물었건만 의외의 강적을 만나 도리어 이상한 끝장을 당하고 있는 거였다.
『더 할말 남아 있나요? 솔직하게 말씀을 하세요. 사회정의를 위해서 희대의 색마를 고발하고 싶다든지, 이 시대에 만연한 인스턴트 섹스 풍속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든지 아니면 황색 저널리스트로서 명성을 올리고 싶다든지 진짜 속마음을 얘기하시는 거예요. 조 PD님의 얘기에 제가 설득당한다면 그분의 취재에 적극 협조하겠어요.』
『할말 없습니다. 낯이 뜨거워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은 마음밖에는.』
조재봉은 일어서면서 상의 포켓에 꽂힌 만년필 카메라의 스위치를 껐다. 취재는 그걸로 끝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는 참담했다. 그러나 그 참담함 속에서도 의구심의 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동선과 오연화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 의구심은 결코 이동선에 대한 취재를 포기하게 할 수 없는 미련의 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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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개의 숫자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암기하고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는 상미의 손가락은 노련했다.
-10월 25일 현재 귀하의 잔액은 구백오십팔만 이천육백삼십 원입
니다.
₩ 9,582,630.
상미는 음성정보서비스에서 흘러나오는 금액을 비밀수첩에 적었다.
어제 오후 은행 마감시간 직전에 확인한 금액은 ₩ 10,582,630. 그렇다면 오늘 오전에 남편은 백만 원을 인출한 게 분명했다.
그녀는 다시 전화버튼을 눌렀다. 남편의 무선호출번호와 사서함 코드 비밀번호와 확인코드를 연달아 누르는 동작은 차라리 예술의 경지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음성사서함에선 명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릴레이로 풀려 나왔다. 상미는 스피커폰을 눌러 소리를 증폭시켜 놓고서 여자들의 이름과 메시지를 수첩에 깨알같이 적었다.
오늘은 경마장이라는 특정 장소가 자주 튀어나왔다.
음성사서함에서 경마장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건 몇 주 전부터였다. 주말이면 한적한 교외로 나가 밀애를 즐기던 남편의 취미패턴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였다.
경마는 도박 중에서도 가장 중증의 환자들이 몰두하는 일종의 마약과 같은 것. 상미는 익히 소문을 들어 경마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경마 아니라 더 큰 도박판이라도 남편은 결코 가산을 탕진하지 않을 거였다. 까짓 경마에서 잃으면 얼마를 잃는단 말인가. 그는 매일 수억 대의 증권을 주무르는 승부사인데 말이다. 또 백만 원 정도를 인출해 갔다면 도박에 뜻이 있는 건 아닐 게 분명했다.
상미가 불쾌한 건 꼭 경마장에 어떤 여자와 동행한다는 점이었다. 음성사서함의 정보에 따르면 남편은 원경희라는 여자와 벌써 두번째 경마장행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첩에 적힌 원경희의 이름에 몇 번이고 밑줄을 그었다. 그 묘령의 여인을 질투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남편이라는 사람이 세상을 철저하게 자기 취미로만 사는 게 너무 희한할 뿐이었다.
다른 부부들도 다 이렇게 사는 걸까?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결혼생활의 본질에 의문을 품곤 했다.
이건 악몽이지 절대 결혼생활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혼 따위를 들먹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저급한 행사를 위해 행정절차를 밟고 가정법원의 담당자들 앞에서 상호 인신비방을 해야 한다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이미 둘 사이에는 마음의 이혼이 진행되고 있었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살아야 할 부부가 어느 한쪽에게 거짓말을 했을 땐 그 순간 상대를 속이는 것이며, 그 순간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 거짓말은 꼬리를 물게 마련이었다. 한 번 내뱉은 거짓말의 완전범죄를 위해서 끊임없이 거짓 알리바이와 거짓 표정으로 거짓의 장벽을 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아직 상미의 가정은 온전했다. 적어도 상미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부부생활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이웃들이 보기엔 남부럽지 않게 일찍 안정된 신혼부부였다.
멋대로 돈을 쓰고 바람을 피우지만 남편은 경제적으로 확실한 가장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궁핍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구입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시간도 넉넉했다. 읽고 싶은 책이며 보고 싶은 비디오테이프를 지겨워서 하품이 나올 때까지 즐길 수 있었다.
때론, 아주 드물게 평범한 이웃의 젊은 부부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박봉의 월급을 쪼개 살림을 꾸리고, 아기의 울음소리에 단잠을 설치고, 사소한 감정대립으로 티격태격 다투는 그들의 일상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보다도 자신의 삶이 훨씬 자유로운 건 사실이었다.
상미는 결코 결혼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결혼하라고 해도 지금의 남편을 택할지도 몰랐다. 위선자인 남편을 미워하자면 한이 없었지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을 뜯어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상미 자신으로서도 남편을 방치할수록 자유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이즈음의 세월을 즐기는 쪽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맘 편히 살 작정이었다.
그녀만 입 다물고 있으면 모든 게 지금까지 흘러 왔던 대로 흘러갈 것이다. 남편은 거짓말을 일삼은 대가로 더욱 헌신적인 표정을 지을 것이고, 그 위장된 부부관계는 자꾸자꾸 이력의 부피를 살찌우며 굴러가리라. 거짓말도 참말로 만들어 가면서.
비밀수첩을 문갑 구석에 은닉하고 나서 상미는 어디론가 삐삐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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