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보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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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의 국제 극장에서 X등급 포르노 영화 두 편을 내리 감상하고 나온 동선은 블루세라숍을 찾아다녔다.
블루머(bloomers. 반바지식 여자용 속옷)와 세라복을 파는 가게. 일본의 여학생들이 학교 교복이며 브래지어, 팬티 같은 속옷을 파는 장소가 바로 블루세라숍이었다.
어렵게 찾아낸 블루세라숍 입구에는 팬티 자판기가 한 대 서 있었다. 물론 여학생들이 입었던 팬티를 파는 거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희한한 광고문안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막 벗어서 냄새가 나는 팬티!’
‘오래 사용해서 변색한 브래지어!’
‘동경 최고의 명문여고 교복 긴급 입하!’
‘품질 보증, 혈통 보증!’
진열된 상품들을 덤덤한 표정으로 훑어보며 스쳐가는 동선에게 주인이 속옷과 교복 한 세트를 소개했다.
『여고 2학년 기리꼬 양의 물건입니다. 혈통서를 보시죠. 참 예쁘고 성실한 학생입니다.』
그가 내민 혈통서에는 여릿한 여고생의 사진과 자필 소개서가 붙어 있었다.
친절한 설명에도 별 신통한 반응이 없자 주인은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관광객이신가요? 그러면 여길 한 번 들러 보세요 고갸르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이죠.』
『고갸르가 뭡니까?』
『어린이라는 뜻의 자(子)자와 영어 걸(Girl)을 합성한 신조어입니다. 아직 어리면서 어른처럼 행동하는 소녀들을 그렇게 부른답니다. 텔레쿠라에 가면 그녀들의 전화를 받을 수 있지요.』
『전화를 받은 다음에는?』
『데이트 약속을 하든 매춘 계약을 맺든 당신의 자유지요.』
『재미있는 곳이군요.』
『사실 당신 같은 외국인들은 이 곳 블루세라숍보다 텔레쿠라나 데이트 클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일부러 약도를 비치해 놓고 있습니다.』
『친절하시군요.』
『천만에요, 다 같은 체인점이거든요.』
동선은 주인에게서 약도가 새겨진 명함을 건네받고 밖으로 나왔다.
몇 푼의 용돈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의 성적 노리개를 자원하는 고갸르들. 물론 돈보다도 꽉 막힌 학교생활의 스트레스를 털어 버리기 위한 방책으로 그런 짓을 감행하는 애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텔레쿠라의 약도를 구겨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택시를 탔다.
내린 곳은 시부야 전철역.
동선은 파친코 게임장으로 들어가 적당히 시간을 때운 다음, 이미지 클럽을 수소문했다.
도박산업과 섹스산업은 한통속이었고, 그 배후엔 야쿠자들이 연계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우습게도 클럽은 파친코 가게 바로 위층에 있었다.
색정 왕국 일본의 섹스산업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지 클럽은 핑크산업의 극치를 유감없이 보여 주는 난장판이었다.
난교매춘이며 SM(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를 위한) 클럽. 치한을 위한 방. 목욕중인 여자를 덮칠 수 있는 방.
임산부를 학대할 수 있는 방.
스모 샅바를 찬 여성과 한판 승부를 펼칠 수 있는 방.
여자의 분뇨를 파는 곳.
성감 마사지 방.
간호사 차림의 여성을 희롱할 수 있는 진료실.
카섹스를 위한 승용차.
팩스와 복사기를 갖춘 사무실과 여비서.
그리고 전철처럼 꾸민 방…….
동선은 이미지 클럽의 모든 방을 구경만 하고 나왔다. 친절하게 안내해 준 여급에게는 만 엔을 쥐어 주었다.
그가 하루 종일 섹스숍을 누빈 데는 별다른 뜻이 없었다. 그냥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미지 클럽의 다양한 숍은 분명 충격적인 장면이었지만 동선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행위들을 돈을 줘 가면서 즐겨야 하는 일본 남성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그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실제 상황으로 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앞으로 10년 후면 한국도 이렇게 전염될까?
그는 생각했다.
일본 사회에 창궐하고 있는 섹스산업을 무조건 독버섯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생기는 거였고, 또 자유로운 매춘은 성범죄를 억제하는 순기능도 있는 법이었다.
차라리 병든 쪽은 한국인지도 몰랐다. 유교의 전통과 서구 문명의 어설픈 혼재, 거기서 발생하는 가치관의 이중성, 하얀 악과 검은 선의 갈등. 그 곳은 건너가고 싶지 않은 땅이었다.
개자식! 계속 놀던 대로 놀아 봐. 걸리기만 하면 ×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테니.
서울지검 강력부의 송창식 검사가 떠올랐다. 동선은 그 검사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연락하슈, 다른 건 몰라도 방중술 몇 가지쯤은 전수해 드릴 용의가 있으니까.
검찰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나는 길에 그는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충돌은 없었다. 동선이나 검사는 냉정함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밖에나 나가 바람 좀 쐬었다가 들어오십시오. 이럴 땐 일단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검찰이고 언론이고 할 것 없이 두 눈 벌겋게 뜨고 예의 주시할 겁니다.
막대한 수임료를 긁어간 변호사는 동선에게 그런 충고를 했다.
동선은 변호사도 혐오했다. 지옥 같던 검찰의 함정에서 구해 준 사람이 변호사였지만, 검사나 변호사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의 멤버들 같았다.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게 어찌 죄가 된단 말인가. 그 숫자가 좀 많았다 해도 그랬다. 정상적인 사내들이라면 평생 비슷비슷한 섹스 횟수를 기록할 것이다. 그 횟수를 마누라한테 퍼붓든 다른 여자들에게 퍼붓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맹세코 결백했다. 비록 수백 명의 여자와 관계했을지라도 그녀들을 이용하거나 상처 입힌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NHK방송국 건물이 보이는 길을 걸으며 동선은 시부야 거리의 정경이 참으로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태어났더라면 그야말로 맘 편했을 거였다. 섹스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낸 사회, 그렇게 열린 사회의 국가들은 대부분 선진국들이었다.
야트막한 언덕길 하나를 넘어섰을 때, 동선은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수은등의 파르스름한 불빛 속을 단정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보통 키에 기다란 생머리. 거리가 멀어 얼굴의 윤곽은 잡히지 않았지만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녀의 심성과 교양수준, 신체적 특성까지 감지할 수 있는 게 동선이었다.
여자는 NHK 출판부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도 천천히 서점의 다른 문으로 따라 들어갔다.
여자는 추리소설 코너에 서 있었다. 신작 추리소설을 속독하는 것으로 미루어 열렬한 추리광인 모양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영어였다.
『눈에 확 띄는 신간 있던가요?』
난데없는 영어에 그녀가 긴장했다. 그러나 곧 일본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유창한 영어로 응답해 왔다.
『지금 고르고 있는 중이에요. 어디서 오셨나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머, 추리를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긴 합니다만, 이제 초보자 수준이죠. 모리무라 세이지의 ‘증명’ 시리즈를 읽고 나서 반해 버렸습니다. 좋은 책 한 권 추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본어를 아세요?』
『모릅니다. 번역을 시켜서 읽으면 되지요.』
『정말 추리광이 되셨군요.』
자신을 쥰꼬로 소개한 여자는 백화점의 점원이었다. 긴자의 직장에서 매일 이 시간에 시부야의 집으로 퇴근하는데, NHK 서점에서 30분쯤 책을 읽다 가는 게 일과 중의 하나라고 했다.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가 공평하게 제3국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둘은 금세 친해졌다.
아무리 영어실력이 유창하다고 해도 머리가 생각하는 언어를 입이 완벽하게 따라갈 순 없는 것. 두 사람은 가급적 가장 명료한 단어만을 선택해서 짧은 문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커피숍에 들어가서는 직접 한자를 써 가면서 필담을 했다.
어설픈 대화였지만 둘의 표정은 진지했다. 서로의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 자체가 진솔한 친근미를 안겨 주는 거였다.
쥰꼬는 추리소설의 예찬론과 추리 작가의 계보, 사회파 추리의 매력에 관해 열변을 토했고, 동선은 인간의 악마성, 욕망의 본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놓고 동원 가능한 모든 한자를 열거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에 공감했다.
우연히 만나 우연히 헤어질 상대에게 낯을 가린다거나 내숭을 떨 이유는 없었다.
관상으로 미뤄 보건대, 다소 내성적이고 곱게 자랐을 것만 같은 쥰꼬였지만, 그녀는 의외로 대담했다. 섹스라는 명제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프리섹스를 주장했고, 일부일처제의 사회관습을 비난했으며, 동양 여자들의 궐기를 부르짖었다.
동선은 그녀의 솔직한 표현에 거듭 찬사를 건넸다.
아마 쥰꼬는 살아 오면서 그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 저 마음 깊숙한 곳의 밀어를 후련하게 털어놓고 있는 것이리라.
『쥰꼬, 당신처럼 담백한 여성은 처음입니다. 난 쥰꼬의 유난히 맑은 눈자위를 보고 첫눈에 알았죠. 세상의 모든 허위와 가식을 꿰뚫어보는 듯한 맑은 눈. 난 형편없이 사악한 인간이지만 당신 앞에선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습니다. 쥰꼬의 눈은 이 세상의 유리창입니다.』
동선의 신파조 고백에 쥰꼬는 얼굴을 붉혔다.
『과찬이에요, 전 예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여자라고요.』
『천만에요, 사람 보는 눈은 내가 더 정확할 겁니다. 때론 타인, 그것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의 판단이 예리할 수도 있지요.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동선은 계속 그녀의 매력을 추켜올렸고, 쥰꼬는 한사코 겸양의 미덕을 내보였다. 물론 싫지 않은 표정으로.
『시부야에 집이 있나요?』
『네.』
『좋은 곳에서 사는군요. 동경의 번화가에 집이 있다면 부자겠습니다.』
『임대주택인 걸요.』
『가족들과 함께 삽니까?』
『아뇨, 가족들은 다카마쓰에서 살지요. 혼자 자취하고 있어요.』
『퇴근하고 나서 저녁식사를 지으려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피곤하죠. 하지만 사먹을 수는 없어요. 아시다시피 동경의 물가는 살인적이니까요.』
『만약 뜻하지 않은 횡재로 목돈이 생겼다면 어떤 음식을 맛보고 싶습니까?』
『정통 사시미집에 가서 생선회를 원없이 먹고 싶어요. 부모님이 시코쿠의 다카마쓰에서 사시미 가게를 하고 있거든요. 집에 간 지가 벌써 반 년이 넘었어요.』
그녀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듯 입맛을 다셨다.
쥰꼬의 몸은 빈약했다.
중학생 무렵 발육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납작한 가슴, 그 민둥산에 민망할 정도로 부풀어오른 유두의 돌기, 툭 튀어나온 쇄골, 한 팔로도 감고 남을 정도의 연약한 허리. 그러나 엉뚱하게도 엉덩이와 허벅지는 살집이 좋았다.
동선은 그 불균형의 여체를 소중스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가 깔린 방에서 그녀는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동선의 입술이 골반 쪽으로 미끄러져 가자 그녀가 꿈틀했다. 골반의 계곡으로 진행하자 두 다리가 완강하게 꼬이면서 그의 입술을 밀쳐냈다.
경험이 많진 않구나, 쥰꼬.
그는 다시 배꼽 쪽으로 입술의 방향을 옮겼다. 그제야 하반신의 근육들이 스르르 이완됐다. 그는 다시 배꼽을 반환점으로 유턴해서 치골에 상륙했다. 마찬가지로 쥰꼬의 두 다리에 비상이 걸렸다.
동선은 다시 후퇴하며 기회를 노렸다. 끊임없이 여자의 꽃술을 노리며 허공을 활강하는 독수리의 눈빛으로.
거스르는 데 끊임없이 맞서는 것.
그것은 동선의 철칙이자 신조였다.
쥐도 뱀에 쫓겨 궁지에 몰리면 필사의 반항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힘이 빠지면 뱀의 눈빛에 현혹돼 공포를 잊어버린다. 어쩌면 뱀의 아가리에 처박히는 그 순간 쥐는 최대의 희열을 맛보는지도 모른다.
동선의 집요한 공세에 여자의 하반신은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는 얼핏 꽃잎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엉덩이를 구르며 애원했다.
『제발 그 곳만은……. 그만 하세요.』
울음 섞인 애원이지만 희미하게나마 응석의 빛이 섞여 있었다.
여자의 열락은 언제나 바리케이드 너머에 있었다. 장애물을 넘어서야만 쾌락의 화원으로 들어설 수 있는 법이었다. 그 장애물은 무형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이란 장애물은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이미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가 한순간 성문의 틈새를 노려 독수리처럼 활강했다. 성문도 그와 동시에 빗장을 걸었지만 독수리의 속력이 더 빨랐다.
독수리의 부리는 여지없이 꽃잎을 쪼았고, 놓칠 수 없다는 듯 좌우로 흔들어 댔다.
『아……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벌벌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항복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완강히 저항하던 두 다리의 맥이 풀리면서 벌어졌다.
경주는 끝이 났다. 이제 더 이상의 허물은 없었다.
그는 독수리에서 벌로 변신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꽃잎의 꽃술에 고인 꿀물을 길어 올렸다. 꽃은 계속 떨고만 있었다.
쥰꼬가 눈을 떴을 때, 유리창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개인신상을 이유로 하루 결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이라도 출발하면 한 시간쯤 지각할 터였지만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골반 전체가 뻐근했고, 특히 은밀한 그 곳이 뻐근했다.
한국인 사내는 새벽까지 그녀를 풀어 주지 않았다. 제발 살려 달라고 수없이 애원했건만 용서하질 않았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렬하게 그녀의 성문을 두드려 왔고 그녀의 우물에 고인 샘물을 깡그리 퍼올려 버렸다.
차라리 날 강간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끝까지 몸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밤부터 새벽까지 성벽과 성문의 외곽만 때리는 거였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모조리 허물어져 내렸고, 성 안의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어도 결코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새카맣게 타 들어갔을 때, 폐허로 스러져갈 때 진군의 나팔을 울리며 쳐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소생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고 실신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돌아섰을 때에야 쥰꼬는 다다미 위에 사내가 없음을 깨달았다.
사내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잠을 자지 않았구나.
쥰꼬는 온몸의 뼈가 해체되는 듯한 고통을 참고 몸을 세웠다.
『아침 지어 드릴까요?』
『글쎄, 쥰꼬 좋을 대로 해. 안 먹어도 참을 만해.』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젯밤 근사한 저녁을 대접 받았으니 신세를 갚아야죠.』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쌀을 씻었다. 오래도록 쌀을 씻으며 욕실의 남자를 생각했다.
혜성처럼 내 삶의 한 획을 그은 남자.
어제 그를 만난 것은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극찬했었다. 쌍꺼풀이 없어 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그녀로선 처음 들어 보는 찬미였다. 그리고 먹고 싶은 메뉴를 물어왔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생선회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당장 시부야의 일류 사시미집으로 데려가서 회를 주문했다.
미니어처로 제작된 소형 목선으로 하나 가득 생선회를 담은 메뉴, 만선(滿船)의 값은 자그마치 13만 엔. 그녀의 월급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의 음식만 보세요. 그리고 고향의 맛을 느끼는 겁니다.’
그는 부담스러워 하는 자신에게 괘념하지 말라며 설득했다.
‘세상에서 가장 내면이 맑은 여자, 가장 솔직담백한 여자에게 드리는 마음의 선물입니다.’
그의 말은 달콤했다. 딴엔 자신을 돌이켜보니 내면이 맑은 여자 같기도 했다. 그녀는 살아 오면서 그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영화 ‘프리티 우먼’에 나오는 줄리아 로버츠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주무세요?’
‘이제 찾아 봐야죠. 제국호텔이 가까운가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국호텔을 들먹거렸다. 하루 숙박료가 샐러리맨의 한 달 월급을 상회한다는 일본 초특급 호텔을.
‘몇 시간 자는데 제국 호텔을 잡는다는 건 낭비예요.’
‘그럼 어디 적당한 곳 아는 데 있습니까?’
‘잠만 주무실 거라면…….’
쥰꼬는 자기도 모르게 시부야의 자취방을 거론하고 말았다. 말을 하고 나서 곧장 후회했지만 이 사내에게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사내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과는 시각이 달랐다. 자신의 평범한 얼굴, 소박한 마음을 극찬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시부야의 8조 다다미방도 보여 줄 수 있었다.
누추하지만 저 사내는 내 생활 그대로의 모습에 감동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생각대로 그는 자취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찬탄을 금치 못했다. 둘은 차를 한 잔 나눠 마셨고, 음악을 들었다.
쥰꼬가 다다미방에 그의 침구를 깔았을 때, 그가 제지했다.
왜?
그녀가 그를 보았을 때,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자력(磁力)이 발생했다. 그리고 사내는 밤새 수십 번 그녀를 혼절시켰던 거였다.
그녀는 가스렌지 불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녀는 문득 고향 시코쿠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떠올렸다. 신혼 초야의 신부만을 훔쳐간다는 사랑의 화신에 관한 이야기를.
골프장의 가을은 찬란했다. 유난히 더웠고 가물었던 여름 뒤끝의 가을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중부 컨트리클럽 제18홀.
블루맥주의 최종명 사장은 황금빛 융단으로 변한 그린의 가장자리에서 아이언을 세웠다.
홀컵까지 거리는 8m 남짓.
이번에 집어넣으면 이글을 기록하면서 승리를 기록할 수 있다.
『후훗, 여기서 역전되는군. 어때, 역시 게임은 끝까지 해 봐야 아는 거라고! 자넨 내 집중력을 너무 무시했어.』
최종명은 그린의 비탈 아래쪽을 내려다보면서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지. 게임은 언제나 마지막까지 가 봐야 아는 거야.』
벙커 한가운데서 발 딛는 지점의 모래를 다지고 있던 이동선은 추호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동선은 손을 들어 보이고 나서 힘차게 어퍼 스윙을 했다.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솟구쳐 오른 공이 급격한 포물선을 그리며 그린 위에 떨어졌다가 역스핀을 먹고 굴렀다.
『나이스 샷!』
캐디들이 경탄하며 박수를 쳤다.
『거 참, 집요하네. 최후까지 물고 늘어지겠다 이거지?』
최종명은 공의 최종 위치를 살펴보고 나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홀컵과 거리는 6m의 거리.
상대는 벙커샷인데도 단순히 탈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글을 노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명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8m의 거리.
이 바닥에서 퍼팅의 귀재로 통하는 그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거리라면 성공률은 70%를 상회할 거였다. 또 설혹 실패한다손 치더라도 공은 홀컵에 바싹 붙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버디. 상대는 6m의 퍼팅에 성공해야 버디가 된다. 승리는 어쨌든 그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동점으로 무승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종명은 신중하게 두어 차례 헛스윙을 한 다음 퍼팅을 했다. 공은 정확하게 홀컵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한 뼘의 각도를 벗어나 멈췄다. 그 오차만 없었어도 명중했을 정확한 퍼팅이었다.
이제 승부는 상대의 6m 퍼팅에 달려 있었다. 성공하면 무승부, 실패하면 한 점 차이로 최종명의 승리였다.
『지랄 같군. 상대가 실수하기만을 바라는 상황이 말야.』
최종명은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무리 거액이 걸린 내기시합이어도 이렇게 이기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18홀을 돌면서 기량을 다해 쌓아 온 점수였지만 마지막 승부의 열쇠를 상대에게 맡긴다는 건 정말 불쾌한 거였다.
물론 마지막 1타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상대의 압박감은 막중할 것이었다. 하지만 최종명은 오히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걸 훨씬 더 좋아했다. 그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 라이벌과 벌이는 염력의 줄다리기, 그런 승부의 호흡이 짜릿했던 거였다.
동선은 대수롭지 않게 톡 공을 때렸다.
『아, 졌어!』
아직 공이 굴러가고 있는데도 동선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탄식처럼 공은 홀컵의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로 멈췄다.
『빌어먹을!』
최종명은 한 손으로 공을 밀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1타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역전승을 거뒀지만 기분이 씁쓸한 모양이었다.
『아부를 하려면 확실히 해! 사람 뒤집어 놓지 말고. 이게 뭐야!』
최종명이 동선의 공을 홱 집어던지며 인상을 썼다.
『눈치 빠르시군. 실수로 들어가면 어떡하나 간이 철렁했지 뭐야.』
『개새끼! 바라는 게 뭐야?』
그는 게임에 이겨 놓고도 패배한 사람처럼 요구조건을 물었다. 어차피 동선과의 골프는 한 수 배우는 게 목적이었다.
『밖에 나갔다 왔더니 사무실이 엉망이야.』
『오연화가 잘하잖아.』
『일부러 몸사리고 있었대.』
『왜, 잘나가는 사업을?』
『저번 검찰에 달려들어갔을 때 사무실은 수색당하지 않았거든. 근데 내 지갑에 들어 있던 수표를 조회해 본 모양이야.』
『웃기는 자식들이네. 죄도 없는 사람 데려가서 뭘 때려잡겠다고 자금추적을 하고 지랄이람!』
『꼬투리를 잡아 무슨 이유로라도 집어넣으려고 혈안이 된 거지. 연화가 미리 돈세탁을 안 했으면 골치 아팠을 거야.』
『연화, 정말 끝내주는 여자야. 네놈보다 훨씬 나아. 너 없는 동안 일 벌이지 않은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당연하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 동안 이상한 놈들이 자꾸 사무실 주변을 얼쩡거리더래.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서 개점휴업 상태로 여름을 보냈다는 거야.』
『주머니가 썰렁하겠군. 어떻게 도와 줄까? 새로 빌딩 올리는 데 있나 알아봐 줘?』
『여럿은 필요 없고 하나만.』
『하나 뜯어서 돈이 돼?』
『돈 만들려고 너 찾아온 거 아냐! 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
『조각가들?』
『내가 쉰 만큼 그치들도 망치를 놓았을 거야.』
『그러게 다다익선 아니냐고.』
『그러고 싶지 않아. 꼭 물건 줄 사람 하나가 있거든.』
『알았어. 사무실로 연락해 놓을게.』
클럽하우스까지 걸어오면서 두 사람은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캐디들은 두 사람의 비밀을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수고했어. 캘린더 시안이 올라왔는데, 보는 사람마다 술맛 당긴다고 극찬이야. 애초에 30만 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70만 부로 바꿨어. 도매점과 소매점, 고급업소와 대중업소를 구분해서 제작할 계획이야.』
『맘에 든다니까 다행이군. 다음부턴 그런 일 내게 맡기지 마!』
『아예 그쪽으로 나갈 생각 없어? 내가 확실하게 푸시해 줄게. 원한다면 블루그룹 산하에 영상 프로덕션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네놈 솜씨가 아까워서 그래.』
『아깝긴!』
『그까짓 조형연구소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잘나간다는 사진작가들 벌이가 얼마나 센 줄 알아?』
『그만해. 뉴질랜드 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내년에 한 번만 더 도와 줘. 캘린더 전쟁만큼은 기선을 잡고 싶어.』
『지금 나랑 거래 트자는 거야?』
동선이 흘겨보자, 최종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바꿨다.
『알았어. 그럼 오늘 저녁 얘기를 하자. 어쨌거나 게임의 승자는 나니까 대접 받을 권리가 있지?』
『장르만 선택해.』
『뭐가 좋을까? 역시 밤낚시가 운치 있지?』
『그렇게 하자고.』
청평호 선착장.
최종명은 차에서 내려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3분 전.
『누가 또 오기로 했나요?』
뒤따라 내린 여자가 물었다.
『친구가 올 거야.』
『근데 여긴 너무 어둡군요.』
여자가 호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팔짱을 꼈다. 쌀쌀한 공기 때문에 여자의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추우면 요트에 들어가 있어.』
최종명은 선착장에 묶여 있는 요트의 밧줄을 당겼다.
『어머, 배를 탈 계획이었나요?』
여자는 최종명의 손을 잡고 사뿐하게 요트의 선수에 올라탔다.
선실의 전면 유리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요트 내부의 분위기에 그녀는 또 한 번 ‘어머!’를 연발했다.
오늘 확실히 에이스 카드를 잡은 거 아닐까?
그녀는 서교동에서 친구들과 포켓볼을 치고 나오다 굴러오는 아카디아를 피했었다. 그런데 아카디아의 유리창이 스르르 열리면서 이 사내가 손가락 하나를 펴 자기를 지목하는 거였다.
나이가 좀 들어 뵈는 게 흠이었지만 그녀는 아카디아에 선뜻 올라탔다.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과 나이트를 갈 계획이었고 그 이후로는 뻔한 거였는데, 그런 요식행위를 거칠 필요 없이 교외로 훌쩍 빠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또 네 명의 친구들 중에서 자기를 지목한 사내의 안목이 맘에 든 거였다. 그런데 이 사내가 요트까지 소유하고 있는 봉이라니.
여자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요트 내부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 두 줄기가 호반을 훑으며 날아왔다.
급정거한 지프에서 한 쌍의 커플이 내려 선착장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최종명의 안내로 요트에 올랐고 잠시 후 배는 부드러운 기관음을 내며 호수의 중심으로 미끄러져 갔다.
조니워커 한 병이 바닥났을 때 최종명이 화투를 꺼내 왔다.
『시시하게 무슨 화투놀이예요, 카드라면 모를까.』
서교동에서 온 여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화투는 배우질 못했어. 그냥 돼지뽑기를 하는 거야.』
보고 있던 이동선이 피식 웃었다.
『벌칙은?』
『빨간 싸리 멧돼지를 잡은 쪽이 상대편 파트너의 옷을 하나씩 벗기는 게임.』
여자들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그는 화투짝을 섞었다. 그리고 첫 장을 뒤집었다. 그러자 그의 왼쪽에 앉아 있던 서교동의 여자가 다음 장을 깠다. 부지불식간에 이상한 게임을 승인하고 만 거였다.
그 다음은 동선과 동선이 데려온 여자 차례였다. 동선의 파트너 역시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서투르게 화투패를 집어들고 있었다.
몇 차례 돌다가 멧돼지가 출현했다. 서교동의 여자가 멧돼지 패를 뽑고 나서 괴성을 질렀다.
『저 친구 점퍼를 벗겨.』
최종명이 벌칙을 내리자 그녀는 냉큼 테이블을 돌아와 동선의 옷을 벗겼다.
다시 돼지뽑기가 계속됐다.
확률 1/48을 네 명으로 쪼개면 1/4. 이리 돌거나 저리 돌거나 몇 차례 돌면 네 명 모두 벌거숭이가 될 터였지만 맨 먼저 상체 누드를 드러내게 된 건 서교동의 여자였다.
모두 벌칙을 당하긴 했어도 그녀만 유독 밑천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단 두 번 탈의를 당했을 뿐인데 워낙에 걸친 옷이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 불공평해요. 자기들은 넥타이까지 메고 왔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두둑이 입고 오는 건데.』
서교동은 한 팔로 가슴을 가린 채 맹렬하게 화투짝을 까댔다.
멧돼지가 열대여섯 번 출몰했을 때 네 사람은 비로소 평등한 알몸이 되었다.
동선이 데려온 청바지의 여자가 마지막까지 하얀 삼각팬티를 걸친 채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끝내 멧돼지가 최종명의 손끝에 걸려 버린 거였다.
청바지의 여자는 차마 마지막 옷만큼은 벗을 수 없어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진작부터 나머지 세 사람이 전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특권을 누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불을 꺼 주세요.』
『안 돼, 이 배 안에서는 누구나 공평해야 하니까.』
최종명이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는 후들후들 떨면서 마지막 속옷을 밑으로 말아 내렸다.
그 뒤로도 게임은 계속됐다.
돼지의 행운을 잡은 사람이 상대편 파트너의 몸 어느 한 곳을 지목해 요리할 수 있는 벌칙이 내려졌다.
양념은 냉장고에 가득 있었다. 아이스크림, 토마토 케첩, 이탤리언 소스, 마요네즈, 고추기름, 초콜릿, 겨자, 참기름, 올리고당, 생강즙, 땅콩버터…….
동선은 돼지를 뽑고 나서 서교동의 귓불에 케첩을 발랐다. 그리고 한 입에 빨아들였다.
종명도 지지 않았다. 그의 차례가 오자 청바지의 목덜미에 시럽을 붓고 핥았다.
서교동은 동선의 가슴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뿌려 음미했고, 청바지도 종명의 턱에 마가린을 칠했다.
그 화끈한 요리 경연장에 수치심 같은 건 끼여들 여지도 없었다. 직접 요리를 하는 재미와 재료가 되어 요리를 당하는 아찔한 쾌감만 존재할 뿐이었다.
요리의 부위는 조금씩 하강하고 있었다.
배꼽 밑으로 내려왔을 때 갑자기 게임의 규칙이 깨져 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칙대상의 심벌에 가장 자극적인 소스를 골라 뿌렸고 탐하기 시작한 거였다.
테이블 위에서, 또 밑에서 두 쌍의 커플은 체인징 파트너로 성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식스나인(69)의 결투에서 힘의 우위는 의미가 없었다.
질펀한 게임이 끝나고 욕실로 들어간 네 사람은 그제야 자기 짝들을 되찾고 엉켰다. 비누거품 속에서.
블루머(bloomers. 반바지식 여자용 속옷)와 세라복을 파는 가게. 일본의 여학생들이 학교 교복이며 브래지어, 팬티 같은 속옷을 파는 장소가 바로 블루세라숍이었다.
어렵게 찾아낸 블루세라숍 입구에는 팬티 자판기가 한 대 서 있었다. 물론 여학생들이 입었던 팬티를 파는 거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희한한 광고문안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막 벗어서 냄새가 나는 팬티!’
‘오래 사용해서 변색한 브래지어!’
‘동경 최고의 명문여고 교복 긴급 입하!’
‘품질 보증, 혈통 보증!’
진열된 상품들을 덤덤한 표정으로 훑어보며 스쳐가는 동선에게 주인이 속옷과 교복 한 세트를 소개했다.
『여고 2학년 기리꼬 양의 물건입니다. 혈통서를 보시죠. 참 예쁘고 성실한 학생입니다.』
그가 내민 혈통서에는 여릿한 여고생의 사진과 자필 소개서가 붙어 있었다.
친절한 설명에도 별 신통한 반응이 없자 주인은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관광객이신가요? 그러면 여길 한 번 들러 보세요 고갸르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이죠.』
『고갸르가 뭡니까?』
『어린이라는 뜻의 자(子)자와 영어 걸(Girl)을 합성한 신조어입니다. 아직 어리면서 어른처럼 행동하는 소녀들을 그렇게 부른답니다. 텔레쿠라에 가면 그녀들의 전화를 받을 수 있지요.』
『전화를 받은 다음에는?』
『데이트 약속을 하든 매춘 계약을 맺든 당신의 자유지요.』
『재미있는 곳이군요.』
『사실 당신 같은 외국인들은 이 곳 블루세라숍보다 텔레쿠라나 데이트 클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일부러 약도를 비치해 놓고 있습니다.』
『친절하시군요.』
『천만에요, 다 같은 체인점이거든요.』
동선은 주인에게서 약도가 새겨진 명함을 건네받고 밖으로 나왔다.
몇 푼의 용돈을 구하기 위해 어른들의 성적 노리개를 자원하는 고갸르들. 물론 돈보다도 꽉 막힌 학교생활의 스트레스를 털어 버리기 위한 방책으로 그런 짓을 감행하는 애들도 많을 것이다.
그는 텔레쿠라의 약도를 구겨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택시를 탔다.
내린 곳은 시부야 전철역.
동선은 파친코 게임장으로 들어가 적당히 시간을 때운 다음, 이미지 클럽을 수소문했다.
도박산업과 섹스산업은 한통속이었고, 그 배후엔 야쿠자들이 연계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우습게도 클럽은 파친코 가게 바로 위층에 있었다.
색정 왕국 일본의 섹스산업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지 클럽은 핑크산업의 극치를 유감없이 보여 주는 난장판이었다.
난교매춘이며 SM(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를 위한) 클럽. 치한을 위한 방. 목욕중인 여자를 덮칠 수 있는 방.
임산부를 학대할 수 있는 방.
스모 샅바를 찬 여성과 한판 승부를 펼칠 수 있는 방.
여자의 분뇨를 파는 곳.
성감 마사지 방.
간호사 차림의 여성을 희롱할 수 있는 진료실.
카섹스를 위한 승용차.
팩스와 복사기를 갖춘 사무실과 여비서.
그리고 전철처럼 꾸민 방…….
동선은 이미지 클럽의 모든 방을 구경만 하고 나왔다. 친절하게 안내해 준 여급에게는 만 엔을 쥐어 주었다.
그가 하루 종일 섹스숍을 누빈 데는 별다른 뜻이 없었다. 그냥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미지 클럽의 다양한 숍은 분명 충격적인 장면이었지만 동선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행위들을 돈을 줘 가면서 즐겨야 하는 일본 남성들이 불쌍할 뿐이었다. 그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실제 상황으로 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앞으로 10년 후면 한국도 이렇게 전염될까?
그는 생각했다.
일본 사회에 창궐하고 있는 섹스산업을 무조건 독버섯으로 매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생기는 거였고, 또 자유로운 매춘은 성범죄를 억제하는 순기능도 있는 법이었다.
차라리 병든 쪽은 한국인지도 몰랐다. 유교의 전통과 서구 문명의 어설픈 혼재, 거기서 발생하는 가치관의 이중성, 하얀 악과 검은 선의 갈등. 그 곳은 건너가고 싶지 않은 땅이었다.
개자식! 계속 놀던 대로 놀아 봐. 걸리기만 하면 ×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테니.
서울지검 강력부의 송창식 검사가 떠올랐다. 동선은 그 검사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연락하슈, 다른 건 몰라도 방중술 몇 가지쯤은 전수해 드릴 용의가 있으니까.
검찰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나는 길에 그는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충돌은 없었다. 동선이나 검사는 냉정함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밖에나 나가 바람 좀 쐬었다가 들어오십시오. 이럴 땐 일단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검찰이고 언론이고 할 것 없이 두 눈 벌겋게 뜨고 예의 주시할 겁니다.
막대한 수임료를 긁어간 변호사는 동선에게 그런 충고를 했다.
동선은 변호사도 혐오했다. 지옥 같던 검찰의 함정에서 구해 준 사람이 변호사였지만, 검사나 변호사나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의 멤버들 같았다.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게 어찌 죄가 된단 말인가. 그 숫자가 좀 많았다 해도 그랬다. 정상적인 사내들이라면 평생 비슷비슷한 섹스 횟수를 기록할 것이다. 그 횟수를 마누라한테 퍼붓든 다른 여자들에게 퍼붓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맹세코 결백했다. 비록 수백 명의 여자와 관계했을지라도 그녀들을 이용하거나 상처 입힌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NHK방송국 건물이 보이는 길을 걸으며 동선은 시부야 거리의 정경이 참으로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태어났더라면 그야말로 맘 편했을 거였다. 섹스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낸 사회, 그렇게 열린 사회의 국가들은 대부분 선진국들이었다.
야트막한 언덕길 하나를 넘어섰을 때, 동선은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수은등의 파르스름한 불빛 속을 단정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보통 키에 기다란 생머리. 거리가 멀어 얼굴의 윤곽은 잡히지 않았지만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녀의 심성과 교양수준, 신체적 특성까지 감지할 수 있는 게 동선이었다.
여자는 NHK 출판부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도 천천히 서점의 다른 문으로 따라 들어갔다.
여자는 추리소설 코너에 서 있었다. 신작 추리소설을 속독하는 것으로 미루어 열렬한 추리광인 모양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영어였다.
『눈에 확 띄는 신간 있던가요?』
난데없는 영어에 그녀가 긴장했다. 그러나 곧 일본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유창한 영어로 응답해 왔다.
『지금 고르고 있는 중이에요. 어디서 오셨나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어머, 추리를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긴 합니다만, 이제 초보자 수준이죠. 모리무라 세이지의 ‘증명’ 시리즈를 읽고 나서 반해 버렸습니다. 좋은 책 한 권 추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본어를 아세요?』
『모릅니다. 번역을 시켜서 읽으면 되지요.』
『정말 추리광이 되셨군요.』
자신을 쥰꼬로 소개한 여자는 백화점의 점원이었다. 긴자의 직장에서 매일 이 시간에 시부야의 집으로 퇴근하는데, NHK 서점에서 30분쯤 책을 읽다 가는 게 일과 중의 하나라고 했다.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가 공평하게 제3국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둘은 금세 친해졌다.
아무리 영어실력이 유창하다고 해도 머리가 생각하는 언어를 입이 완벽하게 따라갈 순 없는 것. 두 사람은 가급적 가장 명료한 단어만을 선택해서 짧은 문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커피숍에 들어가서는 직접 한자를 써 가면서 필담을 했다.
어설픈 대화였지만 둘의 표정은 진지했다. 서로의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습 자체가 진솔한 친근미를 안겨 주는 거였다.
쥰꼬는 추리소설의 예찬론과 추리 작가의 계보, 사회파 추리의 매력에 관해 열변을 토했고, 동선은 인간의 악마성, 욕망의 본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놓고 동원 가능한 모든 한자를 열거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에 공감했다.
우연히 만나 우연히 헤어질 상대에게 낯을 가린다거나 내숭을 떨 이유는 없었다.
관상으로 미뤄 보건대, 다소 내성적이고 곱게 자랐을 것만 같은 쥰꼬였지만, 그녀는 의외로 대담했다. 섹스라는 명제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프리섹스를 주장했고, 일부일처제의 사회관습을 비난했으며, 동양 여자들의 궐기를 부르짖었다.
동선은 그녀의 솔직한 표현에 거듭 찬사를 건넸다.
아마 쥰꼬는 살아 오면서 그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 저 마음 깊숙한 곳의 밀어를 후련하게 털어놓고 있는 것이리라.
『쥰꼬, 당신처럼 담백한 여성은 처음입니다. 난 쥰꼬의 유난히 맑은 눈자위를 보고 첫눈에 알았죠. 세상의 모든 허위와 가식을 꿰뚫어보는 듯한 맑은 눈. 난 형편없이 사악한 인간이지만 당신 앞에선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습니다. 쥰꼬의 눈은 이 세상의 유리창입니다.』
동선의 신파조 고백에 쥰꼬는 얼굴을 붉혔다.
『과찬이에요, 전 예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여자라고요.』
『천만에요, 사람 보는 눈은 내가 더 정확할 겁니다. 때론 타인, 그것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의 판단이 예리할 수도 있지요.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동선은 계속 그녀의 매력을 추켜올렸고, 쥰꼬는 한사코 겸양의 미덕을 내보였다. 물론 싫지 않은 표정으로.
『시부야에 집이 있나요?』
『네.』
『좋은 곳에서 사는군요. 동경의 번화가에 집이 있다면 부자겠습니다.』
『임대주택인 걸요.』
『가족들과 함께 삽니까?』
『아뇨, 가족들은 다카마쓰에서 살지요. 혼자 자취하고 있어요.』
『퇴근하고 나서 저녁식사를 지으려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피곤하죠. 하지만 사먹을 수는 없어요. 아시다시피 동경의 물가는 살인적이니까요.』
『만약 뜻하지 않은 횡재로 목돈이 생겼다면 어떤 음식을 맛보고 싶습니까?』
『정통 사시미집에 가서 생선회를 원없이 먹고 싶어요. 부모님이 시코쿠의 다카마쓰에서 사시미 가게를 하고 있거든요. 집에 간 지가 벌써 반 년이 넘었어요.』
그녀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듯 입맛을 다셨다.
쥰꼬의 몸은 빈약했다.
중학생 무렵 발육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납작한 가슴, 그 민둥산에 민망할 정도로 부풀어오른 유두의 돌기, 툭 튀어나온 쇄골, 한 팔로도 감고 남을 정도의 연약한 허리. 그러나 엉뚱하게도 엉덩이와 허벅지는 살집이 좋았다.
동선은 그 불균형의 여체를 소중스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여섯 장의 다다미가 깔린 방에서 그녀는 가물가물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동선의 입술이 골반 쪽으로 미끄러져 가자 그녀가 꿈틀했다. 골반의 계곡으로 진행하자 두 다리가 완강하게 꼬이면서 그의 입술을 밀쳐냈다.
경험이 많진 않구나, 쥰꼬.
그는 다시 배꼽 쪽으로 입술의 방향을 옮겼다. 그제야 하반신의 근육들이 스르르 이완됐다. 그는 다시 배꼽을 반환점으로 유턴해서 치골에 상륙했다. 마찬가지로 쥰꼬의 두 다리에 비상이 걸렸다.
동선은 다시 후퇴하며 기회를 노렸다. 끊임없이 여자의 꽃술을 노리며 허공을 활강하는 독수리의 눈빛으로.
거스르는 데 끊임없이 맞서는 것.
그것은 동선의 철칙이자 신조였다.
쥐도 뱀에 쫓겨 궁지에 몰리면 필사의 반항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힘이 빠지면 뱀의 눈빛에 현혹돼 공포를 잊어버린다. 어쩌면 뱀의 아가리에 처박히는 그 순간 쥐는 최대의 희열을 맛보는지도 모른다.
동선의 집요한 공세에 여자의 하반신은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는 얼핏 꽃잎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엉덩이를 구르며 애원했다.
『제발 그 곳만은……. 그만 하세요.』
울음 섞인 애원이지만 희미하게나마 응석의 빛이 섞여 있었다.
여자의 열락은 언제나 바리케이드 너머에 있었다. 장애물을 넘어서야만 쾌락의 화원으로 들어설 수 있는 법이었다. 그 장애물은 무형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이란 장애물은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이미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가 한순간 성문의 틈새를 노려 독수리처럼 활강했다. 성문도 그와 동시에 빗장을 걸었지만 독수리의 속력이 더 빨랐다.
독수리의 부리는 여지없이 꽃잎을 쪼았고, 놓칠 수 없다는 듯 좌우로 흔들어 댔다.
『아…… 제발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벌벌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은 항복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완강히 저항하던 두 다리의 맥이 풀리면서 벌어졌다.
경주는 끝이 났다. 이제 더 이상의 허물은 없었다.
그는 독수리에서 벌로 변신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꽃잎의 꽃술에 고인 꿀물을 길어 올렸다. 꽃은 계속 떨고만 있었다.
쥰꼬가 눈을 떴을 때, 유리창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으로 전화를 걸었다.
개인신상을 이유로 하루 결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이라도 출발하면 한 시간쯤 지각할 터였지만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골반 전체가 뻐근했고, 특히 은밀한 그 곳이 뻐근했다.
한국인 사내는 새벽까지 그녀를 풀어 주지 않았다. 제발 살려 달라고 수없이 애원했건만 용서하질 않았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렬하게 그녀의 성문을 두드려 왔고 그녀의 우물에 고인 샘물을 깡그리 퍼올려 버렸다.
차라리 날 강간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끝까지 몸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밤부터 새벽까지 성벽과 성문의 외곽만 때리는 거였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이 모조리 허물어져 내렸고, 성 안의 모든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어도 결코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새카맣게 타 들어갔을 때, 폐허로 스러져갈 때 진군의 나팔을 울리며 쳐들어왔다. 그녀는 다시 소생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고 실신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돌아섰을 때에야 쥰꼬는 다다미 위에 사내가 없음을 깨달았다.
사내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잠을 자지 않았구나.
쥰꼬는 온몸의 뼈가 해체되는 듯한 고통을 참고 몸을 세웠다.
『아침 지어 드릴까요?』
『글쎄, 쥰꼬 좋을 대로 해. 안 먹어도 참을 만해.』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젯밤 근사한 저녁을 대접 받았으니 신세를 갚아야죠.』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쌀을 씻었다. 오래도록 쌀을 씻으며 욕실의 남자를 생각했다.
혜성처럼 내 삶의 한 획을 그은 남자.
어제 그를 만난 것은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극찬했었다. 쌍꺼풀이 없어 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그녀로선 처음 들어 보는 찬미였다. 그리고 먹고 싶은 메뉴를 물어왔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생선회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당장 시부야의 일류 사시미집으로 데려가서 회를 주문했다.
미니어처로 제작된 소형 목선으로 하나 가득 생선회를 담은 메뉴, 만선(滿船)의 값은 자그마치 13만 엔. 그녀의 월급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눈앞의 음식만 보세요. 그리고 고향의 맛을 느끼는 겁니다.’
그는 부담스러워 하는 자신에게 괘념하지 말라며 설득했다.
‘세상에서 가장 내면이 맑은 여자, 가장 솔직담백한 여자에게 드리는 마음의 선물입니다.’
그의 말은 달콤했다. 딴엔 자신을 돌이켜보니 내면이 맑은 여자 같기도 했다. 그녀는 살아 오면서 그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영화 ‘프리티 우먼’에 나오는 줄리아 로버츠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주무세요?’
‘이제 찾아 봐야죠. 제국호텔이 가까운가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국호텔을 들먹거렸다. 하루 숙박료가 샐러리맨의 한 달 월급을 상회한다는 일본 초특급 호텔을.
‘몇 시간 자는데 제국 호텔을 잡는다는 건 낭비예요.’
‘그럼 어디 적당한 곳 아는 데 있습니까?’
‘잠만 주무실 거라면…….’
쥰꼬는 자기도 모르게 시부야의 자취방을 거론하고 말았다. 말을 하고 나서 곧장 후회했지만 이 사내에게 거리낄 이유는 없었다.
사내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과는 시각이 달랐다. 자신의 평범한 얼굴, 소박한 마음을 극찬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시부야의 8조 다다미방도 보여 줄 수 있었다.
누추하지만 저 사내는 내 생활 그대로의 모습에 감동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생각대로 그는 자취방에 들어서면서부터 찬탄을 금치 못했다. 둘은 차를 한 잔 나눠 마셨고, 음악을 들었다.
쥰꼬가 다다미방에 그의 침구를 깔았을 때, 그가 제지했다.
왜?
그녀가 그를 보았을 때,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자력(磁力)이 발생했다. 그리고 사내는 밤새 수십 번 그녀를 혼절시켰던 거였다.
그녀는 가스렌지 불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그녀는 문득 고향 시코쿠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떠올렸다. 신혼 초야의 신부만을 훔쳐간다는 사랑의 화신에 관한 이야기를.
골프장의 가을은 찬란했다. 유난히 더웠고 가물었던 여름 뒤끝의 가을은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중부 컨트리클럽 제18홀.
블루맥주의 최종명 사장은 황금빛 융단으로 변한 그린의 가장자리에서 아이언을 세웠다.
홀컵까지 거리는 8m 남짓.
이번에 집어넣으면 이글을 기록하면서 승리를 기록할 수 있다.
『후훗, 여기서 역전되는군. 어때, 역시 게임은 끝까지 해 봐야 아는 거라고! 자넨 내 집중력을 너무 무시했어.』
최종명은 그린의 비탈 아래쪽을 내려다보면서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지. 게임은 언제나 마지막까지 가 봐야 아는 거야.』
벙커 한가운데서 발 딛는 지점의 모래를 다지고 있던 이동선은 추호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동선은 손을 들어 보이고 나서 힘차게 어퍼 스윙을 했다.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솟구쳐 오른 공이 급격한 포물선을 그리며 그린 위에 떨어졌다가 역스핀을 먹고 굴렀다.
『나이스 샷!』
캐디들이 경탄하며 박수를 쳤다.
『거 참, 집요하네. 최후까지 물고 늘어지겠다 이거지?』
최종명은 공의 최종 위치를 살펴보고 나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홀컵과 거리는 6m의 거리.
상대는 벙커샷인데도 단순히 탈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글을 노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명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8m의 거리.
이 바닥에서 퍼팅의 귀재로 통하는 그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거리라면 성공률은 70%를 상회할 거였다. 또 설혹 실패한다손 치더라도 공은 홀컵에 바싹 붙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버디. 상대는 6m의 퍼팅에 성공해야 버디가 된다. 승리는 어쨌든 그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최소한 동점으로 무승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종명은 신중하게 두어 차례 헛스윙을 한 다음 퍼팅을 했다. 공은 정확하게 홀컵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한 뼘의 각도를 벗어나 멈췄다. 그 오차만 없었어도 명중했을 정확한 퍼팅이었다.
이제 승부는 상대의 6m 퍼팅에 달려 있었다. 성공하면 무승부, 실패하면 한 점 차이로 최종명의 승리였다.
『지랄 같군. 상대가 실수하기만을 바라는 상황이 말야.』
최종명은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무리 거액이 걸린 내기시합이어도 이렇게 이기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18홀을 돌면서 기량을 다해 쌓아 온 점수였지만 마지막 승부의 열쇠를 상대에게 맡긴다는 건 정말 불쾌한 거였다.
물론 마지막 1타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상대의 압박감은 막중할 것이었다. 하지만 최종명은 오히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걸 훨씬 더 좋아했다. 그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 라이벌과 벌이는 염력의 줄다리기, 그런 승부의 호흡이 짜릿했던 거였다.
동선은 대수롭지 않게 톡 공을 때렸다.
『아, 졌어!』
아직 공이 굴러가고 있는데도 동선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탄식처럼 공은 홀컵의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로 멈췄다.
『빌어먹을!』
최종명은 한 손으로 공을 밀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1타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역전승을 거뒀지만 기분이 씁쓸한 모양이었다.
『아부를 하려면 확실히 해! 사람 뒤집어 놓지 말고. 이게 뭐야!』
최종명이 동선의 공을 홱 집어던지며 인상을 썼다.
『눈치 빠르시군. 실수로 들어가면 어떡하나 간이 철렁했지 뭐야.』
『개새끼! 바라는 게 뭐야?』
그는 게임에 이겨 놓고도 패배한 사람처럼 요구조건을 물었다. 어차피 동선과의 골프는 한 수 배우는 게 목적이었다.
『밖에 나갔다 왔더니 사무실이 엉망이야.』
『오연화가 잘하잖아.』
『일부러 몸사리고 있었대.』
『왜, 잘나가는 사업을?』
『저번 검찰에 달려들어갔을 때 사무실은 수색당하지 않았거든. 근데 내 지갑에 들어 있던 수표를 조회해 본 모양이야.』
『웃기는 자식들이네. 죄도 없는 사람 데려가서 뭘 때려잡겠다고 자금추적을 하고 지랄이람!』
『꼬투리를 잡아 무슨 이유로라도 집어넣으려고 혈안이 된 거지. 연화가 미리 돈세탁을 안 했으면 골치 아팠을 거야.』
『연화, 정말 끝내주는 여자야. 네놈보다 훨씬 나아. 너 없는 동안 일 벌이지 않은 것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당연하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 동안 이상한 놈들이 자꾸 사무실 주변을 얼쩡거리더래.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서 개점휴업 상태로 여름을 보냈다는 거야.』
『주머니가 썰렁하겠군. 어떻게 도와 줄까? 새로 빌딩 올리는 데 있나 알아봐 줘?』
『여럿은 필요 없고 하나만.』
『하나 뜯어서 돈이 돼?』
『돈 만들려고 너 찾아온 거 아냐! 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잖아.』
『조각가들?』
『내가 쉰 만큼 그치들도 망치를 놓았을 거야.』
『그러게 다다익선 아니냐고.』
『그러고 싶지 않아. 꼭 물건 줄 사람 하나가 있거든.』
『알았어. 사무실로 연락해 놓을게.』
클럽하우스까지 걸어오면서 두 사람은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캐디들은 두 사람의 비밀을 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수고했어. 캘린더 시안이 올라왔는데, 보는 사람마다 술맛 당긴다고 극찬이야. 애초에 30만 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70만 부로 바꿨어. 도매점과 소매점, 고급업소와 대중업소를 구분해서 제작할 계획이야.』
『맘에 든다니까 다행이군. 다음부턴 그런 일 내게 맡기지 마!』
『아예 그쪽으로 나갈 생각 없어? 내가 확실하게 푸시해 줄게. 원한다면 블루그룹 산하에 영상 프로덕션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네놈 솜씨가 아까워서 그래.』
『아깝긴!』
『그까짓 조형연구소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잘나간다는 사진작가들 벌이가 얼마나 센 줄 알아?』
『그만해. 뉴질랜드 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내년에 한 번만 더 도와 줘. 캘린더 전쟁만큼은 기선을 잡고 싶어.』
『지금 나랑 거래 트자는 거야?』
동선이 흘겨보자, 최종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바꿨다.
『알았어. 그럼 오늘 저녁 얘기를 하자. 어쨌거나 게임의 승자는 나니까 대접 받을 권리가 있지?』
『장르만 선택해.』
『뭐가 좋을까? 역시 밤낚시가 운치 있지?』
『그렇게 하자고.』
청평호 선착장.
최종명은 차에서 내려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3분 전.
『누가 또 오기로 했나요?』
뒤따라 내린 여자가 물었다.
『친구가 올 거야.』
『근데 여긴 너무 어둡군요.』
여자가 호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팔짱을 꼈다. 쌀쌀한 공기 때문에 여자의 입술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추우면 요트에 들어가 있어.』
최종명은 선착장에 묶여 있는 요트의 밧줄을 당겼다.
『어머, 배를 탈 계획이었나요?』
여자는 최종명의 손을 잡고 사뿐하게 요트의 선수에 올라탔다.
선실의 전면 유리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요트 내부의 분위기에 그녀는 또 한 번 ‘어머!’를 연발했다.
오늘 확실히 에이스 카드를 잡은 거 아닐까?
그녀는 서교동에서 친구들과 포켓볼을 치고 나오다 굴러오는 아카디아를 피했었다. 그런데 아카디아의 유리창이 스르르 열리면서 이 사내가 손가락 하나를 펴 자기를 지목하는 거였다.
나이가 좀 들어 뵈는 게 흠이었지만 그녀는 아카디아에 선뜻 올라탔다.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과 나이트를 갈 계획이었고 그 이후로는 뻔한 거였는데, 그런 요식행위를 거칠 필요 없이 교외로 훌쩍 빠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또 네 명의 친구들 중에서 자기를 지목한 사내의 안목이 맘에 든 거였다. 그런데 이 사내가 요트까지 소유하고 있는 봉이라니.
여자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요트 내부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 두 줄기가 호반을 훑으며 날아왔다.
급정거한 지프에서 한 쌍의 커플이 내려 선착장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최종명의 안내로 요트에 올랐고 잠시 후 배는 부드러운 기관음을 내며 호수의 중심으로 미끄러져 갔다.
조니워커 한 병이 바닥났을 때 최종명이 화투를 꺼내 왔다.
『시시하게 무슨 화투놀이예요, 카드라면 모를까.』
서교동에서 온 여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화투는 배우질 못했어. 그냥 돼지뽑기를 하는 거야.』
보고 있던 이동선이 피식 웃었다.
『벌칙은?』
『빨간 싸리 멧돼지를 잡은 쪽이 상대편 파트너의 옷을 하나씩 벗기는 게임.』
여자들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그는 화투짝을 섞었다. 그리고 첫 장을 뒤집었다. 그러자 그의 왼쪽에 앉아 있던 서교동의 여자가 다음 장을 깠다. 부지불식간에 이상한 게임을 승인하고 만 거였다.
그 다음은 동선과 동선이 데려온 여자 차례였다. 동선의 파트너 역시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지만 서투르게 화투패를 집어들고 있었다.
몇 차례 돌다가 멧돼지가 출현했다. 서교동의 여자가 멧돼지 패를 뽑고 나서 괴성을 질렀다.
『저 친구 점퍼를 벗겨.』
최종명이 벌칙을 내리자 그녀는 냉큼 테이블을 돌아와 동선의 옷을 벗겼다.
다시 돼지뽑기가 계속됐다.
확률 1/48을 네 명으로 쪼개면 1/4. 이리 돌거나 저리 돌거나 몇 차례 돌면 네 명 모두 벌거숭이가 될 터였지만 맨 먼저 상체 누드를 드러내게 된 건 서교동의 여자였다.
모두 벌칙을 당하긴 했어도 그녀만 유독 밑천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단 두 번 탈의를 당했을 뿐인데 워낙에 걸친 옷이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 불공평해요. 자기들은 넥타이까지 메고 왔으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두둑이 입고 오는 건데.』
서교동은 한 팔로 가슴을 가린 채 맹렬하게 화투짝을 까댔다.
멧돼지가 열대여섯 번 출몰했을 때 네 사람은 비로소 평등한 알몸이 되었다.
동선이 데려온 청바지의 여자가 마지막까지 하얀 삼각팬티를 걸친 채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끝내 멧돼지가 최종명의 손끝에 걸려 버린 거였다.
청바지의 여자는 차마 마지막 옷만큼은 벗을 수 없어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진작부터 나머지 세 사람이 전라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특권을 누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불을 꺼 주세요.』
『안 돼, 이 배 안에서는 누구나 공평해야 하니까.』
최종명이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는 후들후들 떨면서 마지막 속옷을 밑으로 말아 내렸다.
그 뒤로도 게임은 계속됐다.
돼지의 행운을 잡은 사람이 상대편 파트너의 몸 어느 한 곳을 지목해 요리할 수 있는 벌칙이 내려졌다.
양념은 냉장고에 가득 있었다. 아이스크림, 토마토 케첩, 이탤리언 소스, 마요네즈, 고추기름, 초콜릿, 겨자, 참기름, 올리고당, 생강즙, 땅콩버터…….
동선은 돼지를 뽑고 나서 서교동의 귓불에 케첩을 발랐다. 그리고 한 입에 빨아들였다.
종명도 지지 않았다. 그의 차례가 오자 청바지의 목덜미에 시럽을 붓고 핥았다.
서교동은 동선의 가슴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뿌려 음미했고, 청바지도 종명의 턱에 마가린을 칠했다.
그 화끈한 요리 경연장에 수치심 같은 건 끼여들 여지도 없었다. 직접 요리를 하는 재미와 재료가 되어 요리를 당하는 아찔한 쾌감만 존재할 뿐이었다.
요리의 부위는 조금씩 하강하고 있었다.
배꼽 밑으로 내려왔을 때 갑자기 게임의 규칙이 깨져 버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칙대상의 심벌에 가장 자극적인 소스를 골라 뿌렸고 탐하기 시작한 거였다.
테이블 위에서, 또 밑에서 두 쌍의 커플은 체인징 파트너로 성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식스나인(69)의 결투에서 힘의 우위는 의미가 없었다.
질펀한 게임이 끝나고 욕실로 들어간 네 사람은 그제야 자기 짝들을 되찾고 엉켰다. 비누거품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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