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보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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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출신의 미녀 크리스티가 전라로 증기선 갑판 위에서 포즈를 취하자 니콘 F4의 셔터 위에 올려져 있던 손가락이 바짝 긴장했다.
뉴질랜드 퀸즈타운에서 모든 사물의 윤곽은 또렷해진다. 햇빛에 노출된 찬란한 원색의 양지와 유달리 짙게 느껴지는 그늘. 투명한 와카티푸 호수와 양치식물의 이파리들. 하얀 페인트를 칠한 증기선과 붉은 굴뚝. 사람의 때가 묻어 오히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갑판 위에 직각으로 곧추서 대칭미를 뿜어내는 북구 미녀의 팔등신.
그 모든 광경은 빛의 마법이었다.
『뮤직!』
카메라를 겨냥한 채로 이동선은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곧 감미로운 클래식의 선율이 증기선을 감싸고 와카티푸 호수로 번져 나갔다. 갑판의 난간에 기대 있던 크리스티의 팔등신도 부드럽게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동선은 시가지 전투의 저격수처럼 때론 서서, 때론 포복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깃으로 움직이는 크리스티의 행동반경은 제한이 없었다. 마스트에 매달리건, 증기선 굴뚝을 끌어안건, 호수로 다이빙을 하건, 화장실로 들어가건 전적으로 그녀의 자유였다. 적어도 음악이 끝날 때까지는.
모델 아르바이트가 처음인 이 신출내기의 움직임은 럭비공처럼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스태프들을 긴장시켰다. 특히 반사판을 든 조명기사가 불안스런 얼굴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크리스티는 선무당처럼 갑판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는 그녀를 쫓아다니느라 스태프들은 관음의 묘미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자연의 일부였다. 겨드랑이 그늘과 하복부를 장식하고 있는 블론디색 체모가 선연히 드러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크리스티가 선실 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두어 발짝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사진을 찍어 대던 동선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음악이 정지됐고 검은 모자를 쓴 스태프가 타월로 된 가운을 가져와 크리스티의 나신을 가려 주었다.
한 롤의 필름이 벌써 바닥난 거였다.
동선은 스태프들에게 카메라를 넘기며 콧등의 땀을 훔쳤다.
『엑설런트!』
그가 엄지를 세우며 찬사를 던지자 크리스티는 윙크로 감사를 표시했다. 슬라이드 필름을 장착한 카메라가 넘어오자 다시 촬영이 진행되었다. 크리스티는 2층 복도와 맨 위층 선장실까지 누비다가 끝내는 기다란 금발을 휘날리며 호수로 뛰어들었다.
『쟤, 왜 저래!』
스태프들 틈에서 촬영작업을 지켜보던 블루 맥주회사의 광고판촉과장 김윤곤이 신경질적인 고함을 질렀다.
동선은 그때까지도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이미 피사체가 앵글 밖으로 빠져나갔고 물 속에서 첨벙거리며 헤엄쳐 오고 있는 중인데도 그는 크리스티가 그려낸 포물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포착됐을까?
그는 자신이 그 포물선의 궤적을 제대로 추적했었는지, 그리고 셔터를 눌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의외였지만 그녀의 도약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난간 위로 올라설 때 발산됐던 그 아슬아슬한 선정성, 난간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았을 때의 불안한 구도, 도약하는 순간 전신에 꿈틀거렸던 근육의 움직임.
아, 그것은 백만 달러짜리 육체였다. 이 곳 퀸즈타운의 대자연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상의 조화요, 압권이었다.
『크리스티! 누가 멋대로 다이빙을 하라고 그랬어!』
김윤곤 과장이 난간 쪽으로 달려가서 배에 오르는 크리스티의 손을 잡아 주며 호통쳤다. 크리스티는 알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팔을 벌리고 으쓱했다.
김 과장은 힐끔 그녀의 가슴을 훔쳐보며 타일렀다.
『포즈는 좋았어. 하지만 지시에 따라야지. 곧 해가 저물 시간이야. 어두워져서 촬영이 연기되면 내일 다시 찍어야 하잖아. 그럼 크리스티도 피곤하고 진행비도 엄청나게 든다고.』
그의 말에 크리스티는 녹색 눈동자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러시아 처녀가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므로 그의 충고는 그녀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 벌써 3주째 뉴질랜드 남섬에 머물며 촬영 스케줄을 늘리고 있는 제작진들을 향한 외침이었다.
『어, 촬영 다 끝났어?』
김 과장이 돌아섰을 때 스태프들은 짐을 꾸리고 있었다.
『네, 감독님이 오케이 사인을 내셨습니다.』
김 과장이 후닥닥 2층 갑판으로 뛰어왔다. 그 곳에서도 스태프들이 카메라에서 렌즈를 분리하고 트라이포드를 접고 있었다.
『이 감독, 어떻게 된 거죠? 몇 롤 찍지도 않았는데 철수라뇨?』
『많이 찍는다고 좋은 컷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크리스티가 워낙 잘해 줘서 잡을 건 다 잡았으니 걱정 말아요. 촬영일수 절약하면 과장님이 더 좋을 텐데 뭘 그러십니까?』
동선은 김 과장의 항의를 무시하고 1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마스트의 밧줄더미에서 타월로 몸을 감싼 채 앉아 있던 크리스티는 불안한 눈빛으로 동선을 보았다.
『아주 잘했어, 크리스티. 오늘 밤에 선물을 줄게.』
동선은 그녀의 젖은 머릿결을 쓰다듬으면서 영어로 속삭였다. 그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크리스티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선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맞춤을 퍼부었다.
타월이 벗겨지면서 다시 노출된 그녀의 몸을 동선이 부드럽게 안았다. 한기로 수축되어 더욱 단단해진 그녀의 몸은 고무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난 말이죠, 이 감독이 크리스티의 하이힐을 왜 벗겼는지 이해가 안 가요. 누드 사진의 필수품 아닙니까?』
김윤곤 과장은 술이 얼큰해지자 동선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자, 다 끝난 일인데 잊어버립시다.』
동선은 그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시비의 창끝을 피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한 박스 싣고 온 종이팩 진로소주였다.
『당신 그러는 게 아냐. 클라이언트의 의견도 존중해야지, 그렇게 꼴리는 대로 막 가면 어떡하냐구?』
김 과장의 혀끝은 말려 있었다. 취중진담이라고 그는 술의 힘을 빌려 그 동안 참아 왔던 분노를 터뜨릴 기세였다. 사실 김윤곤 과장은 뉴질랜드 촬영기간 동안 무던히도 참아 왔었다. 맥주회사 광고판촉과 생활 15년에 이런 대접을 받아 보긴 처음이었다.
어디 맥주 회사의 광고 건수가 껌값인가. 광고물량을 발주 맡은 프로덕션이나 스튜디오 담당자들은 과장 알기를 하늘로 여겼다. 그의 비위를 맞춰서 손해볼 건 없었다. 1년에 한 건만 따내도 맥주 광고작업은 제법 짭짤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뉴질랜드에서의 캘린더 촬영은 출발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사진에 관한 작업은 김 과장 책임이었고 그와 밀접한 프로덕션이 도맡아 처리해 왔었는데, 상부로부터 아예 사진작가가 지명돼 내려왔던 것이었다.
그는 이동선이라는 사진작가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과장이 모르는 작가는 A급 작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낙하산이 떨어진 이상 그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과장은 이를 갈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비밀계좌에 10%의 커미션이 들어와 있을 텐데, 그 달콤한 숫자를 훔쳐가 버린 이동선을 벼르고 별렀다.
헌데, 이동선이라는 작자는 그런 과장의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촬영기간 내내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였다. 스케줄도 자기 맘대로였고, 현장의 총책임자인 과장 보기를 구경꾼 알듯 취급하는 거였다.
과장은 번번이 당하면서도 꾹 참아 왔었다. 일단은 촬영을 끝내야 상부의 질책을 모면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모든 촬영이 끝난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모든 스태프들이 보는 앞에서 광고판촉과장의 파워를 확실하게 입증시켜 줘야만 했다. 『나도 사진 잘 알아. 당신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어. 왜 하이힐을 신기지 않았지?』
『하이힐 없이도 아름다우니까 벗겼겠죠. 이제 그만 하세요, 과장님.』
보다못한 코디네이터 미스 최가 과장의 어깨에 매달리며 애교를 떨었다.
『벗겨도 아름답겠지. 크리스티 각선미는 최고니까. 내가 걔를 어떻게 뽑았는데. 러시아 출장 가서 오백 명의 미녀들을 공개적으로 오디션해서 뽑은 애가 크리스티란 말야. 난 크리스티를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었어. 오로라의 여왕이 땅에 내려온 줄 알았다고.』
하이힐의 본론은 어느 새 까먹어 버리고 크리스티 예찬론으로 빠져드는 과장의 횡설수설에 스태프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참 뒤끝이 어수선한 쫑파티였다.
동선이 일어설 때에야 분위기를 깨달은 과장이 미스 최의 팔짱을 털어냈다.
『어디 가시나, 이 감독? 당신은 아무데도 못 가. 나랑 끝장을 봐야 된다고. 다시 앉아!』
『끝장을 보자고?』
동선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선 채로 과장을 쏘아보았다.
『그럼, 끝장을 봐야겠어. 왜 하이힐을 벗겼어? 크리스티 다리 예쁜 거야 알지만 거기다 하이힐을 신겼으면 더 폼나는 거 아니냔 말이야. 중국 여자들이 왜 전족을 했는지 알아? 서양 여자들이 왜 불편한 하이힐을 만들어 신었는지 아냐구? 그게 다 이유가 있어. 정말 프로페셔널이라면 그런 것쯤은 알아야지.』
그러나 그의 장황한 설교가 끝났을 땐 이미 동선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개자식! 임마, 넌 이제 끝장이야!』
과장은 동선이 사라진 방향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스태프들이 말리면 말릴수록 그의 분노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거였다.
『과장님, 크리스티가 나가도 되냐고 물어 보라는데요.』
러시아어 통역을 맡고 있는 진행요원이 과장에게 물었다.
『가긴 어딜 가. 쫑파티중인데.』
『이 감독님을 따라가고 싶답니다.』
『뭐야? 어쭈, 이것들이 별 수작을 다 떨고 있네! 그래 촬영 다 끝났으니까 이제부터 볼일 보겠다 이거야?』
과장은 술이 확 깬다는 표정으로 정색하며 크리스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과장과 통역의 눈치를 살피면서 크리스티가 다가왔다.
『크리스티, 감독과 약속을 했나?』
통역의 설명을 듣고 난 크리스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선물을 주신다고 했어요.』
『선물? 과연 그가 어떤 선물을 줄까?』
과장이 야릇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크리스티도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
『선물은 나도 줄 수 있어, 크리스티. 우린 모스크바에서 여기까지 지구를 반 바퀴나 함께 날아온 친구잖아, 그렇지?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있는 거야.』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크리스티의 입장을 미스 최가 대변하며 끼여들었다.
『과장님, 많이 취하셨네요, 크리스티는 오늘 푹 쉬어야 해요, 제가 숙소로 데려갈 테니까 과장님도 그만 일어나세요.』
그녀가 부축해 오자 과장이 거칠게 뿌리쳤다.
『크리스티, 네 뜻대로 결정해. 하지만 한 가지 잘 알아 둬야 할게 있어. 여기 있는 내가 대장이라고! 캡틴, 보스, 오야붕, 리더, 두목, 왕초란 말야. 크리스티의 개런티도 내가 지급한다는 사실 명심해. 나한테 잘 보이면 블루맥주 전속모델로 픽업할 수도 있다고. 전속료가 얼만 줄이나 알아? 크리스티 고향에 돌아가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최고급 벤츠를 굴릴 수 있는 거액이란 말야. 알아듣겠어?』
통역의 다급한 설명을 듣고 난 크리스티가 울상을 지어 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돈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그녀가 고향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달려간 것도, 또 모스크바에서 서울을 경유하여 지구 반대쪽 뉴질랜드까지 날아온 것도, 낯선 동양인들 앞에서 속살을 드러낸 것도 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돈은 이번 일로 번 팔천 달러로도 만족해요. 그 정도면 모스크바에서 1년은 버틸 수 있으니까요. 자꾸 돈으로 크리스티를 모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크리스티는 아름다움은 팔 수 있어도 영혼은 팔지 않아요.』
그녀는 또박또박 웅변을 했다. 그 말을 모국어로 옮기는 통역의 음성도 어쩐지 힘이 넘쳤다.
크라이스트처치 썸너 해변의 별장. 크리스티는 물에서 갓 건져낸 것처럼 싱싱한 알몸으로 누운 채 꿈을 꾸고 있었다. 방 안은 온통 꽃향기였다. 수만 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향 바이칼 호수의 여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초원에서 이런 향기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크리스티에겐 어떤 게 어울릴까?』
동선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향수를 고르고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은빛 철제 케이스 안에는 여러 종류의 향수병이 들어 있었다.
『향수는 향료와 알코올의 혼합물질이야. 알코올에 대한 향료의 비율이 높을수록 향기가 짙어지지. 그러니까 요렇게 사이즈가 작은 것들이 진짜 향수라고 생각하면 돼, 값도 비싸고.』
그는 친절하게 영어로 향수를 설명했다. 크리스티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욕실에서 몸을 씻겨 줄 때도 향수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샤워코롱을 정성스럽게 발라 주면서 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향수의 기초야. 물에 씻겨도 은은하게 네 몸을 감싸지. 하지만 향료의 비율은 극히 미미해. 이건 조금 진한 오테코롱(Eau De Cologne)이야. 향료의 비율은 2∼3%. 산뜻한 느낌을 주는 향수라고 생각하면 돼. 오데토일렛(Eau De Toilette)은 3∼6% 혹은 7∼8%의 희석 향수야. 오데코롱은 향기가 두세 시간 정도 가는데 이건 다섯 시간은 지속되는 거야. 오리지널 향수는 15∼20%의 비율로 24시간 이상 향기를 발산해.』
크리스티는 욕실에서부터 이 사내의 최면에 걸려 똑바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촬영장에서는 침묵의 카리스마로 스태프들을 좌지우지하던 그가 별장에선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남자로 변해 그녀를 감동시켰던 거였다.
크리스티는 자신이 왜 이 별장까지 따라왔는지 알 수 없었다. 또 언제, 어느 순간에 이 사내 앞에서 옷을 벗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튼 자신은 알몸이었고, 사내가 그 나신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는 맨 처음 달걀과 마요네즈로 머리를 마사지해 주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서 건져낸 수건으로 한참 동안 머리를 감쌌다.
『네 부드러운 머릿결은 매일 잘 돌봐 줘야 해. 이렇게 하면 단백질과 유분, 수분이 공급되어 한결 건강해지지. 마지막으로 파 잎사귀를 갈아서 감는 거야.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해 린스 효과를 얻을 수 있거든.』
그는 보석세공사처럼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럽게 그녀의 몸을 다뤘다. 목욕을 시켜 줄 때도 찬물과 더운물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다. 그럴 때마다 크리스티의 몸은 수축과 이완을 거듭했다. 그게 혈관을 자극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거였다.
목욕을 끝낸 후엔 드라이어까지 동원해 크리스티의 몸을 말렸고, 지금은 화학자가 되어 향수를 고르는 사내.
크리스티는 감격했다.
『그래, 시트러스(Citrus)가 어울리겠어.』
동선은 나폴레옹 꼬냑병을 1/100로 축소해 놓은 모양의 향수를 꺼내 들고 일어섰다.
『크리스티, 넌 어떤 게 네 몸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어떤 것들이 있죠? 난 향수를 써 본 적이 없어요.』
『하긴 향수보다도 네 체취가 더 달콤할 거야. 하지만 향수와 체취가 절묘하게 섞이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향기를 창조해 낼 수가 있어. 그 어디에도 없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향기를.』
『감독님이 고르신 게 제가 고르는 거예요.』
『그래? 그럼 시트러스로 하자. 플로럴 부케(Floral Bouquet)는 여러 가지 꽃의 향을 모은 거야. 로맨틱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지. 싱글 플로럴(Single Floral)은 백합이나 라일락 한 종류의 꽃향, 우아한 느낌을 주지. 스파이시(Spicy)나 애시딕(Acidic)은 색다른 맛을 주지만 크리스티에겐 새콤하고 산뜻한 시트러스가 제격이야. 오렌지, 레몬, 라임의 향수야.』
동선은 손끝에 향수를 묻혀 크리스티의 전신에 한 방울씩 선사했다. 맥박이 뛰는 곳을 찾아 바르면서 한없이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 한 방울의 향수가 떨어져 스며들자 크리스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 향기를 돌려 드릴게요.』
그러나 동선은 그녀의 금발에 키스를 해주면서 달랬다.
『아직은 안 돼. 라스팅 노트(Lasting Note)! 네 몸에서 향수의 알코올이 휘발된 후, 그 잔향과 네 체취가 반반씩 균형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 동안 차이코프스키를 들려 줄게.』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누웠다.
동선은 CD를 걸고 어두운 거실로 나와 휘네스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이제 침대 위의 여자는 그의 것이었다. 바이칼 호수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하게 성숙한 슬라브 족 처녀.
그는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시베리아 산이 최고 대접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교차와 일교차가 극심한 까닭에 결정체가 훨씬 견고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촬영팀의 해체식은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크리스티를 비롯한 네 명의 러시아 모델은 거기서 곧장 모스크바행 비행기로 떠날 계획이었고, 이동선은 필름 현상을 위해 동경에 남을 거라고 했다.
김윤곤 과장은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와 동선이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이 감독, 가능하면 최대한 서둘러서 사진을 뽑아 귀국해요. 사장님께서 학수고대하고 계시니까요.』
『현상하는 대로 DHL로 보내 드리죠.』
『아니, 그런 걸 우편으로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직접 가져와서 사장님께 브리핑을 올리고 가부의 결재를 맡는 게 도리 아닙니까?』
과장이 발끈해서 삿대질까지 했다.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 거였다. 가는 날까지 맘에 드는 구석 한 곳이 없는 저 무례한 작자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만약 당신 작품이 사장님 눈에 차지 않으면 그땐 알아서 해요. 지급한 작업료의 따불을 배상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죠?』
과장의 야비한 으름장에 스태프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동선은 유유자적이었다.
『나 참, 살다 보니까 별 사람 다 만나는구먼!』
잔뜩 흥분한 과장에게 다가온 동선이 씽긋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걔는 내 작품에 잔소리할 놈이 아니니까요.』
『지금 걔라고 했소? 누구를 지칭하는 소리요?』
『블루맥주 최종명 사장.』
『당신 제정신이오?』
『그럼 미친 사람으로 보이나요?』
『허어, 환장하겠네!』
『걔한테 가면 전해 줘요, 다시는 이런 일 부탁하지 말라고.』
『부탁……?』
얼이 빠진 과장을 뒤로 하고 동선은 러시아 미녀들 쪽으로 걸어갔다.
『수고 많았어, 먼저 나갈게.』
미녀들은 차례로 그에게 키스했다.
맨 마지막에 매달린 크리스티의 키스는 뜨거웠다. 거침없이 동선의 혀를 빨아들였고 자신의 혀를 헌납하는 거였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멈춰서서 빤하게 쳐다보았다. 국제공항 대합실에선 보기 드문 키스신이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크리스티.』
동선은 크리스티의 허리를 으스러지게 한 번 끌어안은 다음 가까스로 몸을 떼었다. 크리스티는 울고 있었다. 마스카라 자국이 범벅인데도 닦을 겨를이 없었다.
『내가 말했지, 크리스티? 어떠한 경우에도 시베리아 보석은 광채를 잃지 않는다고 말야.』
그가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돌아섰다.
출입구까지 나가는 길은 무척이나 길었는데, 그는 결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그가 꼭 한 번 돌아봐 주기를 기다리며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로부터 선사 받은 은빛 향수 케이스를 든 채로.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저도 처음 봤어요.』
『사진작가 맞아?』
『모른다니까요. 근데 촬영할 때 보니까 프로던데요. 작품을 뽑아 봐야 알겠지만 모델들을 다루는 솜씨가 일류더라구요. 과장님도 보셨잖아요. 연출을 하는 듯해도 현장 분위기가 얼마나 치열했어요?』
서울행 여객기 안에서 김윤곤 과장은 시종 찜찜한 얼굴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미스 최에게 가끔씩 말을 거는 품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사장님을 ‘걔’라고 부르다니……. 그럼 친구 사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최종명 사장의 나이가 32세, 그 작자와 비슷한 또래였다.
하지만 아무리 친구라 해도 그렇지 국내 30대 재벌의 한 사람인 블루맥주 총수를 ‘걔’라고 호칭하다니.
그 작자는 생각할수록 더 도지는 편두통 같은 존재였다.
그는 곰곰이 이번 작업의 배경을 뜯어 보기로 했다. 맥주, 소주, 막걸리 회사를 막론하고 요즘 캘린더는 주류회사의 얼굴이요, 한 해 농사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주류판매업소에서 연말이 되면 보다 야하고 보다 술맛 돋구는 캘린더를 요구해 왔다. 그 광고효과는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달력 속의 누드 미녀와 건배하며 자작하는 남성도 많았다. 아무래도 술광고는 여자와 함께여야 했고 무조건 벗기는 게 상책이었다.
주류회사들끼리 캘린더의 노출 경쟁이 치열해진 것은 시대의 요구였다. 또 고객들의 요구이기도 했다.
회사 이미지 때문에 노출을 조심한 어떤 회사의 캘린더는 업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 회사의 매출액이 다음 해 연초부터 격감한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화끈해야 벽에 걸린다.
화끈하되 품격까지 갖춘다면 업소들은 캘린더를 인테리어 소품으로까지 대접하는 판이었다.
김윤곤 과장이 러시아까지 파견된 것도 바로 노출과 품격을 충족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에서였다.
사장이 젊은 만큼 블루맥주의 주소비층은 신세대와 20∼30대 직장인들이었다. 기존 맥주 광고와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델이 새로워야 했다.
오디션에 참가한 러시아 미녀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참가자 전원을 모델로 기용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오디션의 기준은 얼굴이었다. 각선미는 볼 것도 없었다. 그녀들의 하체는 선천적으로 미끈하게 물려받은 거였다.
완벽한 모델을 뽑고 나서 로케이션은 뉴질랜드로 결정했다.
그렇구만!
김윤곤 과장은 그 대목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사장은 작가뿐만 아니라 뉴질랜드라는 장소까지 직접 선정해 지시했었다. 이동선은 이미 그 곳에 먼저 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과 이동선은 다른 채널로 교감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 대통령과 청소부 노인이 국민학교 동창일 수도 있는 법. 그러게 모든 대인관계에서 실수는 금물이었다.
스튜어디스가 음료를 서비스할 때 김 과장은 위스키를 청했다.
골치 아플 때는 취해 버리는 게 진통제였다.
뉴질랜드 퀸즈타운에서 모든 사물의 윤곽은 또렷해진다. 햇빛에 노출된 찬란한 원색의 양지와 유달리 짙게 느껴지는 그늘. 투명한 와카티푸 호수와 양치식물의 이파리들. 하얀 페인트를 칠한 증기선과 붉은 굴뚝. 사람의 때가 묻어 오히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갑판 위에 직각으로 곧추서 대칭미를 뿜어내는 북구 미녀의 팔등신.
그 모든 광경은 빛의 마법이었다.
『뮤직!』
카메라를 겨냥한 채로 이동선은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곧 감미로운 클래식의 선율이 증기선을 감싸고 와카티푸 호수로 번져 나갔다. 갑판의 난간에 기대 있던 크리스티의 팔등신도 부드럽게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동선은 시가지 전투의 저격수처럼 때론 서서, 때론 포복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깃으로 움직이는 크리스티의 행동반경은 제한이 없었다. 마스트에 매달리건, 증기선 굴뚝을 끌어안건, 호수로 다이빙을 하건, 화장실로 들어가건 전적으로 그녀의 자유였다. 적어도 음악이 끝날 때까지는.
모델 아르바이트가 처음인 이 신출내기의 움직임은 럭비공처럼 예측할 수 없는 것이어서 스태프들을 긴장시켰다. 특히 반사판을 든 조명기사가 불안스런 얼굴이었다.
아니나다를까 크리스티는 선무당처럼 갑판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는 그녀를 쫓아다니느라 스태프들은 관음의 묘미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자연의 일부였다. 겨드랑이 그늘과 하복부를 장식하고 있는 블론디색 체모가 선연히 드러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크리스티가 선실 계단을 오르는 도중에 두어 발짝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사진을 찍어 대던 동선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음악이 정지됐고 검은 모자를 쓴 스태프가 타월로 된 가운을 가져와 크리스티의 나신을 가려 주었다.
한 롤의 필름이 벌써 바닥난 거였다.
동선은 스태프들에게 카메라를 넘기며 콧등의 땀을 훔쳤다.
『엑설런트!』
그가 엄지를 세우며 찬사를 던지자 크리스티는 윙크로 감사를 표시했다. 슬라이드 필름을 장착한 카메라가 넘어오자 다시 촬영이 진행되었다. 크리스티는 2층 복도와 맨 위층 선장실까지 누비다가 끝내는 기다란 금발을 휘날리며 호수로 뛰어들었다.
『쟤, 왜 저래!』
스태프들 틈에서 촬영작업을 지켜보던 블루 맥주회사의 광고판촉과장 김윤곤이 신경질적인 고함을 질렀다.
동선은 그때까지도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이미 피사체가 앵글 밖으로 빠져나갔고 물 속에서 첨벙거리며 헤엄쳐 오고 있는 중인데도 그는 크리스티가 그려낸 포물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게 포착됐을까?
그는 자신이 그 포물선의 궤적을 제대로 추적했었는지, 그리고 셔터를 눌렀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의외였지만 그녀의 도약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난간 위로 올라설 때 발산됐던 그 아슬아슬한 선정성, 난간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았을 때의 불안한 구도, 도약하는 순간 전신에 꿈틀거렸던 근육의 움직임.
아, 그것은 백만 달러짜리 육체였다. 이 곳 퀸즈타운의 대자연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상의 조화요, 압권이었다.
『크리스티! 누가 멋대로 다이빙을 하라고 그랬어!』
김윤곤 과장이 난간 쪽으로 달려가서 배에 오르는 크리스티의 손을 잡아 주며 호통쳤다. 크리스티는 알몸을 가릴 생각도 없이 팔을 벌리고 으쓱했다.
김 과장은 힐끔 그녀의 가슴을 훔쳐보며 타일렀다.
『포즈는 좋았어. 하지만 지시에 따라야지. 곧 해가 저물 시간이야. 어두워져서 촬영이 연기되면 내일 다시 찍어야 하잖아. 그럼 크리스티도 피곤하고 진행비도 엄청나게 든다고.』
그의 말에 크리스티는 녹색 눈동자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러시아 처녀가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므로 그의 충고는 그녀를 목표로 한 게 아니었다. 벌써 3주째 뉴질랜드 남섬에 머물며 촬영 스케줄을 늘리고 있는 제작진들을 향한 외침이었다.
『어, 촬영 다 끝났어?』
김 과장이 돌아섰을 때 스태프들은 짐을 꾸리고 있었다.
『네, 감독님이 오케이 사인을 내셨습니다.』
김 과장이 후닥닥 2층 갑판으로 뛰어왔다. 그 곳에서도 스태프들이 카메라에서 렌즈를 분리하고 트라이포드를 접고 있었다.
『이 감독, 어떻게 된 거죠? 몇 롤 찍지도 않았는데 철수라뇨?』
『많이 찍는다고 좋은 컷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크리스티가 워낙 잘해 줘서 잡을 건 다 잡았으니 걱정 말아요. 촬영일수 절약하면 과장님이 더 좋을 텐데 뭘 그러십니까?』
동선은 김 과장의 항의를 무시하고 1층 갑판으로 내려갔다.
마스트의 밧줄더미에서 타월로 몸을 감싼 채 앉아 있던 크리스티는 불안한 눈빛으로 동선을 보았다.
『아주 잘했어, 크리스티. 오늘 밤에 선물을 줄게.』
동선은 그녀의 젖은 머릿결을 쓰다듬으면서 영어로 속삭였다. 그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크리스티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동선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맞춤을 퍼부었다.
타월이 벗겨지면서 다시 노출된 그녀의 몸을 동선이 부드럽게 안았다. 한기로 수축되어 더욱 단단해진 그녀의 몸은 고무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난 말이죠, 이 감독이 크리스티의 하이힐을 왜 벗겼는지 이해가 안 가요. 누드 사진의 필수품 아닙니까?』
김윤곤 과장은 술이 얼큰해지자 동선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자, 다 끝난 일인데 잊어버립시다.』
동선은 그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시비의 창끝을 피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한 박스 싣고 온 종이팩 진로소주였다.
『당신 그러는 게 아냐. 클라이언트의 의견도 존중해야지, 그렇게 꼴리는 대로 막 가면 어떡하냐구?』
김 과장의 혀끝은 말려 있었다. 취중진담이라고 그는 술의 힘을 빌려 그 동안 참아 왔던 분노를 터뜨릴 기세였다. 사실 김윤곤 과장은 뉴질랜드 촬영기간 동안 무던히도 참아 왔었다. 맥주회사 광고판촉과 생활 15년에 이런 대접을 받아 보긴 처음이었다.
어디 맥주 회사의 광고 건수가 껌값인가. 광고물량을 발주 맡은 프로덕션이나 스튜디오 담당자들은 과장 알기를 하늘로 여겼다. 그의 비위를 맞춰서 손해볼 건 없었다. 1년에 한 건만 따내도 맥주 광고작업은 제법 짭짤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뉴질랜드에서의 캘린더 촬영은 출발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사진에 관한 작업은 김 과장 책임이었고 그와 밀접한 프로덕션이 도맡아 처리해 왔었는데, 상부로부터 아예 사진작가가 지명돼 내려왔던 것이었다.
그는 이동선이라는 사진작가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과장이 모르는 작가는 A급 작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낙하산이 떨어진 이상 그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과장은 이를 갈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비밀계좌에 10%의 커미션이 들어와 있을 텐데, 그 달콤한 숫자를 훔쳐가 버린 이동선을 벼르고 별렀다.
헌데, 이동선이라는 작자는 그런 과장의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촬영기간 내내 제멋대로 행동하는 거였다. 스케줄도 자기 맘대로였고, 현장의 총책임자인 과장 보기를 구경꾼 알듯 취급하는 거였다.
과장은 번번이 당하면서도 꾹 참아 왔었다. 일단은 촬영을 끝내야 상부의 질책을 모면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모든 촬영이 끝난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모든 스태프들이 보는 앞에서 광고판촉과장의 파워를 확실하게 입증시켜 줘야만 했다. 『나도 사진 잘 알아. 당신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어. 왜 하이힐을 신기지 않았지?』
『하이힐 없이도 아름다우니까 벗겼겠죠. 이제 그만 하세요, 과장님.』
보다못한 코디네이터 미스 최가 과장의 어깨에 매달리며 애교를 떨었다.
『벗겨도 아름답겠지. 크리스티 각선미는 최고니까. 내가 걔를 어떻게 뽑았는데. 러시아 출장 가서 오백 명의 미녀들을 공개적으로 오디션해서 뽑은 애가 크리스티란 말야. 난 크리스티를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었어. 오로라의 여왕이 땅에 내려온 줄 알았다고.』
하이힐의 본론은 어느 새 까먹어 버리고 크리스티 예찬론으로 빠져드는 과장의 횡설수설에 스태프들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했다. 참 뒤끝이 어수선한 쫑파티였다.
동선이 일어설 때에야 분위기를 깨달은 과장이 미스 최의 팔짱을 털어냈다.
『어디 가시나, 이 감독? 당신은 아무데도 못 가. 나랑 끝장을 봐야 된다고. 다시 앉아!』
『끝장을 보자고?』
동선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선 채로 과장을 쏘아보았다.
『그럼, 끝장을 봐야겠어. 왜 하이힐을 벗겼어? 크리스티 다리 예쁜 거야 알지만 거기다 하이힐을 신겼으면 더 폼나는 거 아니냔 말이야. 중국 여자들이 왜 전족을 했는지 알아? 서양 여자들이 왜 불편한 하이힐을 만들어 신었는지 아냐구? 그게 다 이유가 있어. 정말 프로페셔널이라면 그런 것쯤은 알아야지.』
그러나 그의 장황한 설교가 끝났을 땐 이미 동선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개자식! 임마, 넌 이제 끝장이야!』
과장은 동선이 사라진 방향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스태프들이 말리면 말릴수록 그의 분노는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거였다.
『과장님, 크리스티가 나가도 되냐고 물어 보라는데요.』
러시아어 통역을 맡고 있는 진행요원이 과장에게 물었다.
『가긴 어딜 가. 쫑파티중인데.』
『이 감독님을 따라가고 싶답니다.』
『뭐야? 어쭈, 이것들이 별 수작을 다 떨고 있네! 그래 촬영 다 끝났으니까 이제부터 볼일 보겠다 이거야?』
과장은 술이 확 깬다는 표정으로 정색하며 크리스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과장과 통역의 눈치를 살피면서 크리스티가 다가왔다.
『크리스티, 감독과 약속을 했나?』
통역의 설명을 듣고 난 크리스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선물을 주신다고 했어요.』
『선물? 과연 그가 어떤 선물을 줄까?』
과장이 야릇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크리스티도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
『선물은 나도 줄 수 있어, 크리스티. 우린 모스크바에서 여기까지 지구를 반 바퀴나 함께 날아온 친구잖아, 그렇지?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있는 거야.』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크리스티의 입장을 미스 최가 대변하며 끼여들었다.
『과장님, 많이 취하셨네요, 크리스티는 오늘 푹 쉬어야 해요, 제가 숙소로 데려갈 테니까 과장님도 그만 일어나세요.』
그녀가 부축해 오자 과장이 거칠게 뿌리쳤다.
『크리스티, 네 뜻대로 결정해. 하지만 한 가지 잘 알아 둬야 할게 있어. 여기 있는 내가 대장이라고! 캡틴, 보스, 오야붕, 리더, 두목, 왕초란 말야. 크리스티의 개런티도 내가 지급한다는 사실 명심해. 나한테 잘 보이면 블루맥주 전속모델로 픽업할 수도 있다고. 전속료가 얼만 줄이나 알아? 크리스티 고향에 돌아가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최고급 벤츠를 굴릴 수 있는 거액이란 말야. 알아듣겠어?』
통역의 다급한 설명을 듣고 난 크리스티가 울상을 지어 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돈의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그녀가 고향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달려간 것도, 또 모스크바에서 서울을 경유하여 지구 반대쪽 뉴질랜드까지 날아온 것도, 낯선 동양인들 앞에서 속살을 드러낸 것도 다 돈을 벌겠다는 목적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돈은 이번 일로 번 팔천 달러로도 만족해요. 그 정도면 모스크바에서 1년은 버틸 수 있으니까요. 자꾸 돈으로 크리스티를 모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크리스티는 아름다움은 팔 수 있어도 영혼은 팔지 않아요.』
그녀는 또박또박 웅변을 했다. 그 말을 모국어로 옮기는 통역의 음성도 어쩐지 힘이 넘쳤다.
크라이스트처치 썸너 해변의 별장. 크리스티는 물에서 갓 건져낸 것처럼 싱싱한 알몸으로 누운 채 꿈을 꾸고 있었다. 방 안은 온통 꽃향기였다. 수만 가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원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향 바이칼 호수의 여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초원에서 이런 향기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크리스티에겐 어떤 게 어울릴까?』
동선은 창가 테이블에 앉아 향수를 고르고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은빛 철제 케이스 안에는 여러 종류의 향수병이 들어 있었다.
『향수는 향료와 알코올의 혼합물질이야. 알코올에 대한 향료의 비율이 높을수록 향기가 짙어지지. 그러니까 요렇게 사이즈가 작은 것들이 진짜 향수라고 생각하면 돼, 값도 비싸고.』
그는 친절하게 영어로 향수를 설명했다. 크리스티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욕실에서 몸을 씻겨 줄 때도 향수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샤워코롱을 정성스럽게 발라 주면서 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향수의 기초야. 물에 씻겨도 은은하게 네 몸을 감싸지. 하지만 향료의 비율은 극히 미미해. 이건 조금 진한 오테코롱(Eau De Cologne)이야. 향료의 비율은 2∼3%. 산뜻한 느낌을 주는 향수라고 생각하면 돼. 오데토일렛(Eau De Toilette)은 3∼6% 혹은 7∼8%의 희석 향수야. 오데코롱은 향기가 두세 시간 정도 가는데 이건 다섯 시간은 지속되는 거야. 오리지널 향수는 15∼20%의 비율로 24시간 이상 향기를 발산해.』
크리스티는 욕실에서부터 이 사내의 최면에 걸려 똑바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촬영장에서는 침묵의 카리스마로 스태프들을 좌지우지하던 그가 별장에선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남자로 변해 그녀를 감동시켰던 거였다.
크리스티는 자신이 왜 이 별장까지 따라왔는지 알 수 없었다. 또 언제, 어느 순간에 이 사내 앞에서 옷을 벗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튼 자신은 알몸이었고, 사내가 그 나신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는 맨 처음 달걀과 마요네즈로 머리를 마사지해 주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서 건져낸 수건으로 한참 동안 머리를 감쌌다.
『네 부드러운 머릿결은 매일 잘 돌봐 줘야 해. 이렇게 하면 단백질과 유분, 수분이 공급되어 한결 건강해지지. 마지막으로 파 잎사귀를 갈아서 감는 거야.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해 린스 효과를 얻을 수 있거든.』
그는 보석세공사처럼 조심스럽고도 정성스럽게 그녀의 몸을 다뤘다. 목욕을 시켜 줄 때도 찬물과 더운물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다. 그럴 때마다 크리스티의 몸은 수축과 이완을 거듭했다. 그게 혈관을 자극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거였다.
목욕을 끝낸 후엔 드라이어까지 동원해 크리스티의 몸을 말렸고, 지금은 화학자가 되어 향수를 고르는 사내.
크리스티는 감격했다.
『그래, 시트러스(Citrus)가 어울리겠어.』
동선은 나폴레옹 꼬냑병을 1/100로 축소해 놓은 모양의 향수를 꺼내 들고 일어섰다.
『크리스티, 넌 어떤 게 네 몸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어떤 것들이 있죠? 난 향수를 써 본 적이 없어요.』
『하긴 향수보다도 네 체취가 더 달콤할 거야. 하지만 향수와 체취가 절묘하게 섞이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향기를 창조해 낼 수가 있어. 그 어디에도 없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향기를.』
『감독님이 고르신 게 제가 고르는 거예요.』
『그래? 그럼 시트러스로 하자. 플로럴 부케(Floral Bouquet)는 여러 가지 꽃의 향을 모은 거야. 로맨틱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지. 싱글 플로럴(Single Floral)은 백합이나 라일락 한 종류의 꽃향, 우아한 느낌을 주지. 스파이시(Spicy)나 애시딕(Acidic)은 색다른 맛을 주지만 크리스티에겐 새콤하고 산뜻한 시트러스가 제격이야. 오렌지, 레몬, 라임의 향수야.』
동선은 손끝에 향수를 묻혀 크리스티의 전신에 한 방울씩 선사했다. 맥박이 뛰는 곳을 찾아 바르면서 한없이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발가락 사이에 한 방울의 향수가 떨어져 스며들자 크리스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제 향기를 돌려 드릴게요.』
그러나 동선은 그녀의 금발에 키스를 해주면서 달랬다.
『아직은 안 돼. 라스팅 노트(Lasting Note)! 네 몸에서 향수의 알코올이 휘발된 후, 그 잔향과 네 체취가 반반씩 균형을 이룰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 동안 차이코프스키를 들려 줄게.』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누웠다.
동선은 CD를 걸고 어두운 거실로 나와 휘네스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이제 침대 위의 여자는 그의 것이었다. 바이칼 호수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건강하게 성숙한 슬라브 족 처녀.
그는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시베리아 산이 최고 대접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교차와 일교차가 극심한 까닭에 결정체가 훨씬 견고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촬영팀의 해체식은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크리스티를 비롯한 네 명의 러시아 모델은 거기서 곧장 모스크바행 비행기로 떠날 계획이었고, 이동선은 필름 현상을 위해 동경에 남을 거라고 했다.
김윤곤 과장은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와 동선이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이 감독, 가능하면 최대한 서둘러서 사진을 뽑아 귀국해요. 사장님께서 학수고대하고 계시니까요.』
『현상하는 대로 DHL로 보내 드리죠.』
『아니, 그런 걸 우편으로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직접 가져와서 사장님께 브리핑을 올리고 가부의 결재를 맡는 게 도리 아닙니까?』
과장이 발끈해서 삿대질까지 했다.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 거였다. 가는 날까지 맘에 드는 구석 한 곳이 없는 저 무례한 작자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만약 당신 작품이 사장님 눈에 차지 않으면 그땐 알아서 해요. 지급한 작업료의 따불을 배상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죠?』
과장의 야비한 으름장에 스태프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동선은 유유자적이었다.
『나 참, 살다 보니까 별 사람 다 만나는구먼!』
잔뜩 흥분한 과장에게 다가온 동선이 씽긋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걔는 내 작품에 잔소리할 놈이 아니니까요.』
『지금 걔라고 했소? 누구를 지칭하는 소리요?』
『블루맥주 최종명 사장.』
『당신 제정신이오?』
『그럼 미친 사람으로 보이나요?』
『허어, 환장하겠네!』
『걔한테 가면 전해 줘요, 다시는 이런 일 부탁하지 말라고.』
『부탁……?』
얼이 빠진 과장을 뒤로 하고 동선은 러시아 미녀들 쪽으로 걸어갔다.
『수고 많았어, 먼저 나갈게.』
미녀들은 차례로 그에게 키스했다.
맨 마지막에 매달린 크리스티의 키스는 뜨거웠다. 거침없이 동선의 혀를 빨아들였고 자신의 혀를 헌납하는 거였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멈춰서서 빤하게 쳐다보았다. 국제공항 대합실에선 보기 드문 키스신이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크리스티.』
동선은 크리스티의 허리를 으스러지게 한 번 끌어안은 다음 가까스로 몸을 떼었다. 크리스티는 울고 있었다. 마스카라 자국이 범벅인데도 닦을 겨를이 없었다.
『내가 말했지, 크리스티? 어떠한 경우에도 시베리아 보석은 광채를 잃지 않는다고 말야.』
그가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돌아섰다.
출입구까지 나가는 길은 무척이나 길었는데, 그는 결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크리스티는 그가 꼭 한 번 돌아봐 주기를 기다리며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로부터 선사 받은 은빛 향수 케이스를 든 채로.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저도 처음 봤어요.』
『사진작가 맞아?』
『모른다니까요. 근데 촬영할 때 보니까 프로던데요. 작품을 뽑아 봐야 알겠지만 모델들을 다루는 솜씨가 일류더라구요. 과장님도 보셨잖아요. 연출을 하는 듯해도 현장 분위기가 얼마나 치열했어요?』
서울행 여객기 안에서 김윤곤 과장은 시종 찜찜한 얼굴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미스 최에게 가끔씩 말을 거는 품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사장님을 ‘걔’라고 부르다니……. 그럼 친구 사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최종명 사장의 나이가 32세, 그 작자와 비슷한 또래였다.
하지만 아무리 친구라 해도 그렇지 국내 30대 재벌의 한 사람인 블루맥주 총수를 ‘걔’라고 호칭하다니.
그 작자는 생각할수록 더 도지는 편두통 같은 존재였다.
그는 곰곰이 이번 작업의 배경을 뜯어 보기로 했다. 맥주, 소주, 막걸리 회사를 막론하고 요즘 캘린더는 주류회사의 얼굴이요, 한 해 농사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주류판매업소에서 연말이 되면 보다 야하고 보다 술맛 돋구는 캘린더를 요구해 왔다. 그 광고효과는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달력 속의 누드 미녀와 건배하며 자작하는 남성도 많았다. 아무래도 술광고는 여자와 함께여야 했고 무조건 벗기는 게 상책이었다.
주류회사들끼리 캘린더의 노출 경쟁이 치열해진 것은 시대의 요구였다. 또 고객들의 요구이기도 했다.
회사 이미지 때문에 노출을 조심한 어떤 회사의 캘린더는 업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 회사의 매출액이 다음 해 연초부터 격감한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화끈해야 벽에 걸린다.
화끈하되 품격까지 갖춘다면 업소들은 캘린더를 인테리어 소품으로까지 대접하는 판이었다.
김윤곤 과장이 러시아까지 파견된 것도 바로 노출과 품격을 충족시키기 위한 전략의 일환에서였다.
사장이 젊은 만큼 블루맥주의 주소비층은 신세대와 20∼30대 직장인들이었다. 기존 맥주 광고와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델이 새로워야 했다.
오디션에 참가한 러시아 미녀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참가자 전원을 모델로 기용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오디션의 기준은 얼굴이었다. 각선미는 볼 것도 없었다. 그녀들의 하체는 선천적으로 미끈하게 물려받은 거였다.
완벽한 모델을 뽑고 나서 로케이션은 뉴질랜드로 결정했다.
그렇구만!
김윤곤 과장은 그 대목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사장은 작가뿐만 아니라 뉴질랜드라는 장소까지 직접 선정해 지시했었다. 이동선은 이미 그 곳에 먼저 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과 이동선은 다른 채널로 교감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 대통령과 청소부 노인이 국민학교 동창일 수도 있는 법. 그러게 모든 대인관계에서 실수는 금물이었다.
스튜어디스가 음료를 서비스할 때 김 과장은 위스키를 청했다.
골치 아플 때는 취해 버리는 게 진통제였다.
추천71 비추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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