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보트-5
결혼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먼 사이로 만들어 버리는 의식이 아닐까?
상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결혼기념사진을 보았다. 스물네 살의 동갑내기 신랑과 신부는 천진스런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저 때만 해도 정말이지 그이와 함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너는 나의 바이오 리듬이야.
남편은 연애 시절 종종 기발한 어휘로 상미를 놀라게 했다.
너는 나의 생활방식이 돼 버렸어.
국문학도인 상미는 그의 메모나 전화 끝마디의 매력적인 어휘구사에 녹아 버렸다. 시쳇말로 뿅 가버린 거였다. 경제학도임에도 어쩜 그리 말을 잘 하는지 몰랐다.
디스코 클럽 안드로메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의 첫인상은 주변 친구들에 비해 별로 돋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파트너를 바꿔 가며 블루스를 추던 어느 순간에 그가 강하게 어필해 왔다.
『혹시 전생에서 저를 본 적 없나요?』
그녀는 무슨 얘긴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그는 테이블로 돌아와 윤회설을 들먹이며 우리의 만남이 운명적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엔 허튼 수작이거니 하고 피식 웃어 넘겨 버렸지만, 그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운명의 예감을 설명하는 거였다.
한번 속아 주는 셈치고 애프터에 응했는데 첫인상과 달리 굉장히 핸섬한 맛이 있었고, 두뇌회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수리감각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번득이는 계산능력을 그녀는 단순히 경제학을 전공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4학년 때 전국 대학생 모의 주식투자 대회에 참가해 정해진 기간 내에 126%의 수익률을 올려 챔피언이 된 천재였다.
그는 증권회사와 경제신문사로부터 받은 상금을 고스란히 들고와 상미에게 내밀었다.
이 상금으로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자유를 너와 누리고 싶어!
그 말에 상미는 그 잘난 남자와 결혼해야겠다 맘먹었다. 조건도 좋았다. 징집면제 판정을 받아 남들 다 가는 군대도 가지 않았고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증권회사 시험에 합격했으니 결혼상대로는 그만이었다.
그 역시 뭐가 그리 급했는지 결혼을 서둘렀다. 그래서 후닥닥 혼례를 치른 거였다.
그랬었는데…….
신혼 기분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부부의 틈새가 균열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주식딜러로 고액 연봉을 받았으나, 그녀는 정확한 수령액을 알지 못했다. 물론 생활비는 풍성한 편이어서 시시콜콜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갖다 주는 생활비 외의 비자금 사용내역을 알고 싶었다.
남편은 자상한 편이었지만 결코 자신의 영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녀가 넘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럴수록 상미는 남편의 지갑과 통장 속을 시원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정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상미는 남편 몰래 지갑을 열어 보고 말았다.
그건 곧 판도라의 상자였다.
지갑 속엔 예상대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한쪽엔 칼날처럼 빳빳한 수표 뭉치, 또 한쪽엔 역시 일련번호대로 줄서 있는 만원권 뭉치가 빼곡했다. 보통 월급쟁이들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이렇게 많은 돈을 소지하고 다니는 이유가 뭘까?
사실 남편은 새파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몇십 억씩 주무르는 큰손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지는 돈은 단순한 숫자에 불과했다. 전화와 컴퓨터를 통해 부르기만 하면 알아서 계산되는 숫자. 그래서 딜러들은 허수(虛數)의 승부사로 불린다.
그때부터 상미는 지갑 속의 화폐를 확인하고 수첩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수표와 지폐의 액수는 물론이고 앞뒷장의 일련번호도 꼼꼼히 적어 두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의 비자금 흐름이 한눈에 포착되었다. 지갑 속의 액수는 언제나 일정했지만 돈의 일련번호가 수시로 바뀌었다. 어떤 때는 단 하루만에도 몽땅 다른 번호로 바뀌어 있었다. 그 엄청난 돈이 분명히 어딘가로 유출되었고 그만큼 다시 보충했다는 증거였다.
돈 쓸 시간이 없다. 그래서 우린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야. 이십대 초반에 왕창 벌어 놓고 즐기면서 살자.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대통령 연봉을 능가한다는 주식딜러의 세계는 정말 피튀기는 승부의 연속이었다. 같은 딜러라도 남편의 스타일은 공격적이라고 했다. 치밀한 자료분석보다는 감각적인 배팅을 하는 성향이었고, 그런데도 분석파들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승부사라고 했다.
증권회사의 딜러들이 거의 20∼30대의 연령인 것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젊은이들의 용수철 같은 탄력과 적당한 무모함, 사행심, 승부근성 등등의 조건이 불꽃 튀기는 주식시장에서는 꼭 필요한 거였다. 안정을 희구하는 중년들은 거개가 투자도 안전위주 방식이었다. 안전한 만큼 폭리를 기대하긴 어려운 법! 그런 까닭에 증권가엔 무서운 20대들이 많았다.
언론에서는 그들을 ‘여의도 오렌지’라고 불렀다. 억대의 연봉에 외제 승용차, 퇴근 후엔 레게바나 나이트로 가 목을 축이고 주말여행을 가까운 외국으로 나갔다 오는 족속들.
상미는 남편이 여의도 오렌지족으로 불리는 걸 자랑으로 생각했다. 돈, 명예, 승부근성, 유머 감각, 패션 감각, 그 어떤 것 하나만 소유해도 남부럽지 않은데 그 전부를 갖춘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그러나 상미는 남편의 전부를 가진 게 아니었다. 오로지 밤 열두 시에서 새벽 여섯 시까지만 그를 소유할 수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들어와 허물어지는 남편. 그녀는 매미의 허물처럼 맥없이 푸석푸석한 남편의 발을 닦아 주었고 침대에 뉘는 일로 신혼을 보냈다. 그런 게 다 사랑인 줄로만 착각했었다.
개 같은 자식!
상미는 사진 속에서 웃는 남편을 보며 욕지기를 느꼈다. 그 뻔뻔한 얼굴은 이 세상에서 상미를 가장 소름끼치게 하는 자의 초상에 다름없었다.
상미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악보 없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멜로디를 그대로 건반에 옮길 수 있는 그녀였다.
염천교 건너 동네인 중림동 꼬방동네의 풍경은 아현동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일권은 만취한 상태에서도 달동네의 좁은 미로를 용케 헤쳐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
그는 담뱃가게 골목의 막다른 집에 이르러 대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각인데도 집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초로의 부인은 그에게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일권은 부인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많이 마셨구먼.』
『네, 마셨습니다. 오늘 다락방에서 자고 갈랍니다.』
그는 부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 마루로 올라갔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안방을 두어 걸음에 건너뛰고 다락문을 열자 부인이 황황히 따라 들어왔다.
『나 참, 그 정신에 거길 올라갈 수 있겠어?』
부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일권의 등을 받쳤다.
가슴 높이의 다락을 힘겹게 올라온 일권은 대자로 널브러져 눈을 감았다. 그러자 퀴퀴한 먼지 내음이 났다. 오래 된 책더미에서 곰팡이 내음도 풍겼다. 그리고 은비의 살내음도 느껴졌다.
일권은 곧 아래쪽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에 눈을 떴다. 다락 바로 아래는 부엌이었다.
그는 몸을 뒤채어 다락 바닥의 널빤지 틈을 엿보았다. 어렴풋이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연탄 화덕에 냄비 같은 걸 올리고 있었다. 꿀물이나 해장국을 끓이려는 모양이었다.
『됐어요, 어머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소리에 부인이 천장을 올려보았다.
일권은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목이 메었다. 그녀의 목은 유난히 부풀어 목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임파선에 혹이 생겨 벌써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는데 볼 때마다 악화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부인은 기어이 꿀물을 대접에 타 왔다. 그리고 그가 꿀물을 마시는 동안 쟁반을 든 채로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다.
은비 소식 못 들었지?
그녀의 눈빛엔 그런 말이 씌어 있었다.
일권은 그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벌써 6년 동안 반복되어 온 두 사람만의 선문답이었다.
은비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역촌동에서 살았었다. 집도 좋았었다. 예일여고를 내려다보는 언덕배기에 위세도 당당하게 들어선 2층집이었다.
은비가 가출하고 난 후, 그 집을 다시 찾았을 땐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확인해 보니 주소가 적선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러나 적선동을 찾아갔을 땐 또 중림동으로 떠난 뒤였다.
중림동의 월세방에서 만난 은비의 어머니는 임파선을 앓고 있었고 마지못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일권은 그제야 은비의 가출원인이 복합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제발 은비 좀 찾아 줘요. 걔 땜에 내가 맘놓고 눈감을 수도 없어.
은비의 모친은 다짜고짜 일권에게 매달렸다. 일권을 발견한 순간부터 삶의 이유를 하나 찾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아, 이 스산한 세상아!
어느 정도 취기가 가시자 그는 일어나 다락방에 앉았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는 은비의 유품(?)이 가득했다. 그녀의 책과 액세서리, 옷가지와 이불, 앨범, 레코드, 필기구, 모자, 전화기…….
그는 보자기 하나를 풀어 카시미론 솜이불과 침대 시트를 펼쳤다. 역촌동 시절 은비가 사용했던 침대의 침구류였다.
이불은 따뜻했다, 은비의 체취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다시 쓰러졌다. 한없이 포근한 이불에 파묻혀서 한없이 추억의 내음들을 맡고 싶었다. 그런데 야릇한 악취, 아니 향기로운 악취, 아니 뇌신경을 마비시키는 여자의 암내가 자꾸만 풍겨났다.
콧날을 압박하는 이불은 그녀의 은밀한 하복부. 아 이 불륜의 내음!
일권은 그날 오후에 가졌던 서오능 뒷산 벙커의 정사를 되살리고 있었다.
상미라는 여자는 어떻게 그 장소를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데서 섹스를 하고 싶었을까? 혹시 거기서 첫사랑의 상대와 처음 일을 치렀던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벙커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병사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는데, 휴가 나왔을 때 서오능에 데이트 왔다가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 격렬했던 첫 경험의 자극이 생각나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육체를 빌어 첫 애인의 감각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일권은 자신의 추리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육체를 빌리기만 한 여자.
그러나 그는 상미가 밉지 않았다. 그 역시 상미의 육체를 빌어 은비를 만났고 또 가질 수 있었으니까.
- 안녕, 민지예요. 지난번 안드로메다에서 만났는데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이번 주말에 용평에 갈 계획인데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제 삐삐번호 알고 계시죠?
- 용진 씨, 화란인데요. 왜 계속 삐삐를 쳐도 소식이 없죠? 저 오늘 종일 집에 있을 거예요. 전화 부탁해요.
- 용진 씨, 화란이한테 전화 한 번 넣어 보세요. 걔 요새 용진 씨 못 만나서 바싹 야윈 거 아세요? 전화하셔서 싫으면 싫다고 말하세요. 전 화란이 친구 영숙이예요.
- 저 화란이예요. 제발 연락 좀 해주세요. 부탁할게요.
- 용진아, 나 대성이다. 저번 볼링장에서 만났던 콜라 같은 애들 알지? 지금 걔들하고 한 게임 때리고 있으니까 올림픽 센터로 와라. 니가 와야 짝이 맞으니까, 삼대 삼으로 내기해서 주말 책임지기 어떠냐?
- 스케치 카페 미스 한이에요. 오늘 오실래요? 오시면 셔터 내릴게요.
무선호출기의 음성사서함에 녹음된 메시지는 그런 식으로 한이 없었다. 메시지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전화번호도 수두룩할 것이 뻔했다.
상미는 음성사서함에서 튀어나오는 여자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적었다.
민지, 화란, 영숙, 미스 한, 콜라 같다는 여자아이들…….
상미가 결정적으로 남편의 위선에 대해 꼬리를 잡은 것은 결혼 6개월 후의 일이었다. 남편 지갑을 훔쳐보며 그의 돈 씀씀이를 엿보고 있노라니 묘한 흥미가 솟았고 내킨 김에 더 많은 비밀을 엿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비밀번호를 그녀는 기어코 누르고 말았다. 그가 무선호출 확인을 위해 다이얼을 누를 때 눈짐작으로 기억해 두었던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유치하게도, 정말 치사하게도 남편은 총각 때나 다름없는, 아니 그보다 더 화려한 오렌지 행각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허탈했다. 분노 따위의 감정은 아예 일지도 않았다.
너는 나의 바이오 리듬이야.
그딴 식의 감언이설을 세상 모든 여자에게 되는 대로 뿌리고 다닐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니 차라리 연민의 감정이 솟았던 것이었다.
그럴 작정이었으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말지, 왜 결혼을 서둘렀을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살아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그가 왜 자기를 선택했고 거추장스런 가정을 만들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상미는 냉정해지기로 결심했다. 까짓 결혼 생활이야 아이도 만들지 않았는데 때려치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또 이혼해서 친정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눈총 받는 것도 끔찍했다.
잘못 선택한 자신에게도 죄가 있으므로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살아 주마!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신부의 자리를 지켰다. 대신 섹스를 제외하고 하고 싶은 모든 걸 마음껏 즐겼다.
남편의 지갑과 음성사서함을 엿보는 일이 그 중에서도 가장 스릴 넘치는 취미였다.
남편이 밤을 새고 들어와도 그녀는 바가지를 긁지 않았다. 그러면 남편은 저 혼자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엎어져 자곤 했다.
그녀는 남편의 알리바이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럴 때 일부러 그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보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등을 돌리는 거였다.
요즘 죽겠어. 주가가 1,000포인트를 넘어섰잖아. 매일 비상이라고. 이러다가 말라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러면 그녀는 남편의 등에다 실소를 터뜨렸다.
어쩌다 남편이 의무 방어전이라도 때울 요량으로 덤벼들면 상미는 오히려 히프를 뺐다. 요즘 냉이 흘러요. 옛날에 당신이 너무 거칠게 다뤄서 그런 거예요.
그래? 그럼 병원엘 가 봐.
남편은 짐짓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또 아쉽다는 눈빛으로 떨어져나가곤 했다.
냉이 흐른다는 변명을 듣고 난 이후로 남편의 외박은 부쩍 잦아졌다.
결혼 초엔 못 느꼈는데 당신 정말 문제 있는 여자야. 무슨 여자가 몇 달 동안 섹스 한 번 안 하고도 그리 태평할 수 있담? 병원 좀 가 보라니까. 내가 다 죽을 지경이라고.
그는 능청맞게 연기도 잘 했다.
천만에, 내가 얼마나 센시티브한 여자인데 태평하겠어. 밤마다 잠을 못 자는데.
사실 그녀도 이따금 못 이기는 척하고 남편과 관계를 맺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얄밉기 짝이 없는 남편이라 하더라도 그의 남성에 자극 받기라도 한다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상미는 남편이 출근한 낮에 스스로 욕정을 해소했다. 비디오테이프와 은밀한 루트를 통해 구입한 바이브레이터가 연인이 된 셈이었다.
그가 돌아온 시간은 월요일 새벽 두 시께였다. 토요일 아침에 출근했으니 꼬박 이틀, 무려 마흔네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그 황금 같은 주말을.
남편은 핼쓱한 얼굴로 상미의 볼에 키스를 하면서 구두를 벗었다.
『혼자 심심했지? 주말에 혹사당하긴 했지만 소득이 컸어. 거 왜 요즘 잘 나가는 세영 컴퓨터랜드라는 회사 있지? 그 회사 이사들하고 용평에 갔다왔어. 이틀 동안 54홀을 돌았어. 걔네들이 곧 주식시장에 상장할 계획이거든.』
상미는 그의 윗옷을 받아들며 대꾸했다.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젊다고 닥치는 대로 뛰어다녔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축나고 말 거예요.』
『고마워. 역시 당신이 최고야.』
고맙다고? 요 녀석아, 아무 계집애들하고나 뒹굴지 말라는 얘기야.
상미는 욕실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에 냉소를 던졌다.
용평을 갔다면 상대는 민지라는 여자였을 것이다.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상미는 피아노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두 겹으로 잠그고 비디오를 켰다. 실로 위험한 행위일 터였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민지라는 여자가 용평의 콘도에서 나눴을 정사를 생각하니 느닷없이 몸의 중심에서 열기가 솟구쳐 오르는 거였다.
그녀는 완전연소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며칠 전 서오능 뒷산의 벙커에서 겪었던 야성의 섹스가 지나치게 강렬했던 탓일까? 남자가 없이 혼자서 절정에 오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상미는 제풀에 지쳐 비디오를 껐다. 그리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희수, 희수가 몇 번이더라?
『아직 안 자고 있었니?』
『어, 상미구나. 웬일이야, 이 밤중에?』
『너 작업하고 있을 거 같아서 걸어 봤어.』
『피이, 빨리 결론부터 말해.』
희수는 쓰던 만년필을 닫고 허리를 폈다. 뉴질랜드 가기 전에 만난 이후로 상미와는 계속 연락을 나누지 못했었다. 갔다왔다는 인사라도 전할까 싶었지만 섹스 파트너를 소개한 것이 어색해서 잠자코 상미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본론만 말할게. 그 남자 있지, 아현동 어디에서 카페를 한다고 했지?』
『왜 갑자기?』
『너도 꼬치꼬치 묻지 말고 대답만 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그래? 굴레방다리에서 이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육교 하나 있잖아. 그 왼쪽으로 드레스 대여점들 즐비하게 서 있는 곳.』
『알아.』
『그 육교에서 내리면 시장 입구가 나오고 약국이 보일 거야. 약국 바로 다음 건물 이층을 올려다보면 간판이 보일 거야. 해우소라는.』
『카페 이름이 해우소니?』
『응, 근심을 덜어 주는 장소라는 뜻이야.』
『그 사람은 항상 거기서 먹고 자고 하는 거야?』
『응, 집이 없으니까.』
『그럼 지금도 있겠네?』
『있겠지, 뭐! 이 시간이면 그 사람도 소설을 쓰고 있을 거야. 우리야 선천적으로 부엉이 체질이니까.』
『고맙다, 희수야.』
『근데 급한 일이 뭐니?』
『응, 섹스.』
『뭐라고?』
『다시 연락할게. 끊는다.』
단절음을 내는 수화기를 들여다보며 희수는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원래 솔직담백한 상미의 성격은 유명했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였다.
얘가 너무 막가는 건 아닐까?
희수는 상미의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일권과의 섹스미팅 자체도 사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래도 계율을 정해 횟수를 조절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 희수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 모두 불륜의 해일에 상처 입지만 않는다면 권장할 것까지는 없어도 만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야의 다급한 전화라니, 이건 문제가 있었다. 원칙이라는 것은 한 번 무시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상미야 워낙 강한 친구라 어찌 돼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낼 거였지만 일권이 걱정이었다. 전선 위에 앉아 비 맞는 참새들을 보고도 마음아파하는 그 유리창 같은 형이 걱정이었다.
세 시 반.
일권은 냄비에 시금치와 햄을 썰어 넣으면서 위장을 달래고 있었다.
불규칙한 일상으로 인해 늘 이때쯤이면 속이 쓰렸다. 술손님들과 잔을 돌리면서 이것 저것 많이 먹은 뒤였어도 한밤중엔 꼭 위장의 채근이 심했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습관적인 공복감이었는데, 그럴 때면 원하는 대로 라면 한 사발 끓여 넣어 주는 게 상책이었다.
똑똑!
드디어 카페 해우소의 별미로 통하는 영양라면과 신김치를 테이블에 차려 놓고 막 젓가락을 겨누는 순간 출입구 쪽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일권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라면은 몇 분만 지나도 제맛을 내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투덜거리며 출입문을 열던 일권은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얼어붙었다.
『여길…… 어떻게?』
『들어가도 되죠?』
그녀는 언제나 묻는 걸로 끝이었다. 대답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일권의 겨드랑이 틈으로 바람처럼 들어왔다.
『야식 드시려는 참이었군요.』
일권은 후닥닥 뛰어들어와 그녀에게 빈 자리의 의자를 골라 권했다.
『괜찮아요, 일권 씨 앞자리에 앉을게요. 어서 들어요.』
『귀신에 홀린 기분입니다. 어떻게 여길 알고.』
『어서 드시라니까요. 라면은 식으면 못 먹어요.』
『아, 알았습니다.』
일권은 머쓱해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상미는 바로 앞에 팔을 괴고 앉아 라면 먹는 남자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국물을 후루룩 소리내며 들이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예고 없이 쳐들어와서 미안하군요.』
『천만에요.』
『세상에 태어난 후로 라면을 이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보통 라면하고는 칼로리부터 우선 다르죠. 하나 끓여 드릴까요?』
『네, 먹고 싶어요. 하지만 조금 더 배를 고프게 만들었다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쏘아보자 일권이 당황했다. 그는 그녀의 저런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라면 국물의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입술로 그녀의 욕구에 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 역시 일권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상관없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녀가 일어나며 실내등의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걸어와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계약 위반에 대해서는 할말 없어요. 일권 씨가 벌을 내리시면 받겠어요, 어떤 벌이든.』
그녀가 매달린 채로 그의 입술을 훔쳤다. 그는 민망해서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나 그녀의 강렬한 흡인력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직까지 남아 있던 라면 국물의 느끼한 기름맛이 그와 그녀의 입 안으로 넘나들며 뒤섞였고 타액과 함께 턱으로 넘쳐흘렀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바꿔 그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치마를 들어올렸고 양 다리를 벌려 완전한 기마자세로 그의 하반신에 올라탄 거였다.
상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벽에 걸린 결혼기념사진을 보았다. 스물네 살의 동갑내기 신랑과 신부는 천진스런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저 때만 해도 정말이지 그이와 함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너는 나의 바이오 리듬이야.
남편은 연애 시절 종종 기발한 어휘로 상미를 놀라게 했다.
너는 나의 생활방식이 돼 버렸어.
국문학도인 상미는 그의 메모나 전화 끝마디의 매력적인 어휘구사에 녹아 버렸다. 시쳇말로 뿅 가버린 거였다. 경제학도임에도 어쩜 그리 말을 잘 하는지 몰랐다.
디스코 클럽 안드로메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의 첫인상은 주변 친구들에 비해 별로 돋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파트너를 바꿔 가며 블루스를 추던 어느 순간에 그가 강하게 어필해 왔다.
『혹시 전생에서 저를 본 적 없나요?』
그녀는 무슨 얘긴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그는 테이블로 돌아와 윤회설을 들먹이며 우리의 만남이 운명적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엔 허튼 수작이거니 하고 피식 웃어 넘겨 버렸지만, 그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운명의 예감을 설명하는 거였다.
한번 속아 주는 셈치고 애프터에 응했는데 첫인상과 달리 굉장히 핸섬한 맛이 있었고, 두뇌회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수리감각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번득이는 계산능력을 그녀는 단순히 경제학을 전공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4학년 때 전국 대학생 모의 주식투자 대회에 참가해 정해진 기간 내에 126%의 수익률을 올려 챔피언이 된 천재였다.
그는 증권회사와 경제신문사로부터 받은 상금을 고스란히 들고와 상미에게 내밀었다.
이 상금으로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자유를 너와 누리고 싶어!
그 말에 상미는 그 잘난 남자와 결혼해야겠다 맘먹었다. 조건도 좋았다. 징집면제 판정을 받아 남들 다 가는 군대도 가지 않았고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증권회사 시험에 합격했으니 결혼상대로는 그만이었다.
그 역시 뭐가 그리 급했는지 결혼을 서둘렀다. 그래서 후닥닥 혼례를 치른 거였다.
그랬었는데…….
신혼 기분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부부의 틈새가 균열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주식딜러로 고액 연봉을 받았으나, 그녀는 정확한 수령액을 알지 못했다. 물론 생활비는 풍성한 편이어서 시시콜콜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갖다 주는 생활비 외의 비자금 사용내역을 알고 싶었다.
남편은 자상한 편이었지만 결코 자신의 영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녀가 넘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럴수록 상미는 남편의 지갑과 통장 속을 시원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정말 다른 뜻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급기야 상미는 남편 몰래 지갑을 열어 보고 말았다.
그건 곧 판도라의 상자였다.
지갑 속엔 예상대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한쪽엔 칼날처럼 빳빳한 수표 뭉치, 또 한쪽엔 역시 일련번호대로 줄서 있는 만원권 뭉치가 빼곡했다. 보통 월급쟁이들의 몇 달치 월급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이렇게 많은 돈을 소지하고 다니는 이유가 뭘까?
사실 남편은 새파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몇십 억씩 주무르는 큰손이었다. 그러나 그가 만지는 돈은 단순한 숫자에 불과했다. 전화와 컴퓨터를 통해 부르기만 하면 알아서 계산되는 숫자. 그래서 딜러들은 허수(虛數)의 승부사로 불린다.
그때부터 상미는 지갑 속의 화폐를 확인하고 수첩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수표와 지폐의 액수는 물론이고 앞뒷장의 일련번호도 꼼꼼히 적어 두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의 비자금 흐름이 한눈에 포착되었다. 지갑 속의 액수는 언제나 일정했지만 돈의 일련번호가 수시로 바뀌었다. 어떤 때는 단 하루만에도 몽땅 다른 번호로 바뀌어 있었다. 그 엄청난 돈이 분명히 어딘가로 유출되었고 그만큼 다시 보충했다는 증거였다.
돈 쓸 시간이 없다. 그래서 우린 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야. 이십대 초반에 왕창 벌어 놓고 즐기면서 살자.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대통령 연봉을 능가한다는 주식딜러의 세계는 정말 피튀기는 승부의 연속이었다. 같은 딜러라도 남편의 스타일은 공격적이라고 했다. 치밀한 자료분석보다는 감각적인 배팅을 하는 성향이었고, 그런데도 분석파들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 승부사라고 했다.
증권회사의 딜러들이 거의 20∼30대의 연령인 것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젊은이들의 용수철 같은 탄력과 적당한 무모함, 사행심, 승부근성 등등의 조건이 불꽃 튀기는 주식시장에서는 꼭 필요한 거였다. 안정을 희구하는 중년들은 거개가 투자도 안전위주 방식이었다. 안전한 만큼 폭리를 기대하긴 어려운 법! 그런 까닭에 증권가엔 무서운 20대들이 많았다.
언론에서는 그들을 ‘여의도 오렌지’라고 불렀다. 억대의 연봉에 외제 승용차, 퇴근 후엔 레게바나 나이트로 가 목을 축이고 주말여행을 가까운 외국으로 나갔다 오는 족속들.
상미는 남편이 여의도 오렌지족으로 불리는 걸 자랑으로 생각했다. 돈, 명예, 승부근성, 유머 감각, 패션 감각, 그 어떤 것 하나만 소유해도 남부럽지 않은데 그 전부를 갖춘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그러나 상미는 남편의 전부를 가진 게 아니었다. 오로지 밤 열두 시에서 새벽 여섯 시까지만 그를 소유할 수 있었다. 자정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들어와 허물어지는 남편. 그녀는 매미의 허물처럼 맥없이 푸석푸석한 남편의 발을 닦아 주었고 침대에 뉘는 일로 신혼을 보냈다. 그런 게 다 사랑인 줄로만 착각했었다.
개 같은 자식!
상미는 사진 속에서 웃는 남편을 보며 욕지기를 느꼈다. 그 뻔뻔한 얼굴은 이 세상에서 상미를 가장 소름끼치게 하는 자의 초상에 다름없었다.
상미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악보 없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멜로디를 그대로 건반에 옮길 수 있는 그녀였다.
염천교 건너 동네인 중림동 꼬방동네의 풍경은 아현동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일권은 만취한 상태에서도 달동네의 좁은 미로를 용케 헤쳐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
그는 담뱃가게 골목의 막다른 집에 이르러 대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각인데도 집 안쪽에서 걸어나오는 초로의 부인은 그에게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문이 열리자, 일권은 부인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많이 마셨구먼.』
『네, 마셨습니다. 오늘 다락방에서 자고 갈랍니다.』
그는 부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 마루로 올라갔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안방을 두어 걸음에 건너뛰고 다락문을 열자 부인이 황황히 따라 들어왔다.
『나 참, 그 정신에 거길 올라갈 수 있겠어?』
부인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일권의 등을 받쳤다.
가슴 높이의 다락을 힘겹게 올라온 일권은 대자로 널브러져 눈을 감았다. 그러자 퀴퀴한 먼지 내음이 났다. 오래 된 책더미에서 곰팡이 내음도 풍겼다. 그리고 은비의 살내음도 느껴졌다.
일권은 곧 아래쪽에서 들리는 달그락 소리에 눈을 떴다. 다락 바로 아래는 부엌이었다.
그는 몸을 뒤채어 다락 바닥의 널빤지 틈을 엿보았다. 어렴풋이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연탄 화덕에 냄비 같은 걸 올리고 있었다. 꿀물이나 해장국을 끓이려는 모양이었다.
『됐어요, 어머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소리에 부인이 천장을 올려보았다.
일권은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목이 메었다. 그녀의 목은 유난히 부풀어 목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임파선에 혹이 생겨 벌써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는데 볼 때마다 악화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부인은 기어이 꿀물을 대접에 타 왔다. 그리고 그가 꿀물을 마시는 동안 쟁반을 든 채로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다.
은비 소식 못 들었지?
그녀의 눈빛엔 그런 말이 씌어 있었다.
일권은 그 눈빛에 고개를 돌렸다. 벌써 6년 동안 반복되어 온 두 사람만의 선문답이었다.
은비가 대학생이었을 때는 역촌동에서 살았었다. 집도 좋았었다. 예일여고를 내려다보는 언덕배기에 위세도 당당하게 들어선 2층집이었다.
은비가 가출하고 난 후, 그 집을 다시 찾았을 땐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동사무소에 가서 확인해 보니 주소가 적선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러나 적선동을 찾아갔을 땐 또 중림동으로 떠난 뒤였다.
중림동의 월세방에서 만난 은비의 어머니는 임파선을 앓고 있었고 마지못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일권은 그제야 은비의 가출원인이 복합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제발 은비 좀 찾아 줘요. 걔 땜에 내가 맘놓고 눈감을 수도 없어.
은비의 모친은 다짜고짜 일권에게 매달렸다. 일권을 발견한 순간부터 삶의 이유를 하나 찾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아, 이 스산한 세상아!
어느 정도 취기가 가시자 그는 일어나 다락방에 앉았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는 은비의 유품(?)이 가득했다. 그녀의 책과 액세서리, 옷가지와 이불, 앨범, 레코드, 필기구, 모자, 전화기…….
그는 보자기 하나를 풀어 카시미론 솜이불과 침대 시트를 펼쳤다. 역촌동 시절 은비가 사용했던 침대의 침구류였다.
이불은 따뜻했다, 은비의 체취와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다시 쓰러졌다. 한없이 포근한 이불에 파묻혀서 한없이 추억의 내음들을 맡고 싶었다. 그런데 야릇한 악취, 아니 향기로운 악취, 아니 뇌신경을 마비시키는 여자의 암내가 자꾸만 풍겨났다.
콧날을 압박하는 이불은 그녀의 은밀한 하복부. 아 이 불륜의 내음!
일권은 그날 오후에 가졌던 서오능 뒷산 벙커의 정사를 되살리고 있었다.
상미라는 여자는 어떻게 그 장소를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데서 섹스를 하고 싶었을까? 혹시 거기서 첫사랑의 상대와 처음 일을 치렀던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 벙커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병사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는데, 휴가 나왔을 때 서오능에 데이트 왔다가 거기까지 올라간 것이다. 그 격렬했던 첫 경험의 자극이 생각나 나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육체를 빌어 첫 애인의 감각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일권은 자신의 추리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육체를 빌리기만 한 여자.
그러나 그는 상미가 밉지 않았다. 그 역시 상미의 육체를 빌어 은비를 만났고 또 가질 수 있었으니까.
- 안녕, 민지예요. 지난번 안드로메다에서 만났는데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이번 주말에 용평에 갈 계획인데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제 삐삐번호 알고 계시죠?
- 용진 씨, 화란인데요. 왜 계속 삐삐를 쳐도 소식이 없죠? 저 오늘 종일 집에 있을 거예요. 전화 부탁해요.
- 용진 씨, 화란이한테 전화 한 번 넣어 보세요. 걔 요새 용진 씨 못 만나서 바싹 야윈 거 아세요? 전화하셔서 싫으면 싫다고 말하세요. 전 화란이 친구 영숙이예요.
- 저 화란이예요. 제발 연락 좀 해주세요. 부탁할게요.
- 용진아, 나 대성이다. 저번 볼링장에서 만났던 콜라 같은 애들 알지? 지금 걔들하고 한 게임 때리고 있으니까 올림픽 센터로 와라. 니가 와야 짝이 맞으니까, 삼대 삼으로 내기해서 주말 책임지기 어떠냐?
- 스케치 카페 미스 한이에요. 오늘 오실래요? 오시면 셔터 내릴게요.
무선호출기의 음성사서함에 녹음된 메시지는 그런 식으로 한이 없었다. 메시지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전화번호도 수두룩할 것이 뻔했다.
상미는 음성사서함에서 튀어나오는 여자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적었다.
민지, 화란, 영숙, 미스 한, 콜라 같다는 여자아이들…….
상미가 결정적으로 남편의 위선에 대해 꼬리를 잡은 것은 결혼 6개월 후의 일이었다. 남편 지갑을 훔쳐보며 그의 돈 씀씀이를 엿보고 있노라니 묘한 흥미가 솟았고 내킨 김에 더 많은 비밀을 엿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비밀번호를 그녀는 기어코 누르고 말았다. 그가 무선호출 확인을 위해 다이얼을 누를 때 눈짐작으로 기억해 두었던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유치하게도, 정말 치사하게도 남편은 총각 때나 다름없는, 아니 그보다 더 화려한 오렌지 행각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허탈했다. 분노 따위의 감정은 아예 일지도 않았다.
너는 나의 바이오 리듬이야.
그딴 식의 감언이설을 세상 모든 여자에게 되는 대로 뿌리고 다닐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니 차라리 연민의 감정이 솟았던 것이었다.
그럴 작정이었으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말지, 왜 결혼을 서둘렀을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살아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그가 왜 자기를 선택했고 거추장스런 가정을 만들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상미는 냉정해지기로 결심했다. 까짓 결혼 생활이야 아이도 만들지 않았는데 때려치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또 이혼해서 친정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눈총 받는 것도 끔찍했다.
잘못 선택한 자신에게도 죄가 있으므로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살아 주마!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신부의 자리를 지켰다. 대신 섹스를 제외하고 하고 싶은 모든 걸 마음껏 즐겼다.
남편의 지갑과 음성사서함을 엿보는 일이 그 중에서도 가장 스릴 넘치는 취미였다.
남편이 밤을 새고 들어와도 그녀는 바가지를 긁지 않았다. 그러면 남편은 저 혼자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엎어져 자곤 했다.
그녀는 남편의 알리바이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럴 때 일부러 그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보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등을 돌리는 거였다.
요즘 죽겠어. 주가가 1,000포인트를 넘어섰잖아. 매일 비상이라고. 이러다가 말라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그러면 그녀는 남편의 등에다 실소를 터뜨렸다.
어쩌다 남편이 의무 방어전이라도 때울 요량으로 덤벼들면 상미는 오히려 히프를 뺐다. 요즘 냉이 흘러요. 옛날에 당신이 너무 거칠게 다뤄서 그런 거예요.
그래? 그럼 병원엘 가 봐.
남편은 짐짓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또 아쉽다는 눈빛으로 떨어져나가곤 했다.
냉이 흐른다는 변명을 듣고 난 이후로 남편의 외박은 부쩍 잦아졌다.
결혼 초엔 못 느꼈는데 당신 정말 문제 있는 여자야. 무슨 여자가 몇 달 동안 섹스 한 번 안 하고도 그리 태평할 수 있담? 병원 좀 가 보라니까. 내가 다 죽을 지경이라고.
그는 능청맞게 연기도 잘 했다.
천만에, 내가 얼마나 센시티브한 여자인데 태평하겠어. 밤마다 잠을 못 자는데.
사실 그녀도 이따금 못 이기는 척하고 남편과 관계를 맺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얄밉기 짝이 없는 남편이라 하더라도 그의 남성에 자극 받기라도 한다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상미는 남편이 출근한 낮에 스스로 욕정을 해소했다. 비디오테이프와 은밀한 루트를 통해 구입한 바이브레이터가 연인이 된 셈이었다.
그가 돌아온 시간은 월요일 새벽 두 시께였다. 토요일 아침에 출근했으니 꼬박 이틀, 무려 마흔네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그 황금 같은 주말을.
남편은 핼쓱한 얼굴로 상미의 볼에 키스를 하면서 구두를 벗었다.
『혼자 심심했지? 주말에 혹사당하긴 했지만 소득이 컸어. 거 왜 요즘 잘 나가는 세영 컴퓨터랜드라는 회사 있지? 그 회사 이사들하고 용평에 갔다왔어. 이틀 동안 54홀을 돌았어. 걔네들이 곧 주식시장에 상장할 계획이거든.』
상미는 그의 윗옷을 받아들며 대꾸했다.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젊다고 닥치는 대로 뛰어다녔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축나고 말 거예요.』
『고마워. 역시 당신이 최고야.』
고맙다고? 요 녀석아, 아무 계집애들하고나 뒹굴지 말라는 얘기야.
상미는 욕실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에 냉소를 던졌다.
용평을 갔다면 상대는 민지라는 여자였을 것이다.
남편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상미는 피아노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두 겹으로 잠그고 비디오를 켰다. 실로 위험한 행위일 터였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남편과 민지라는 여자가 용평의 콘도에서 나눴을 정사를 생각하니 느닷없이 몸의 중심에서 열기가 솟구쳐 오르는 거였다.
그녀는 완전연소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며칠 전 서오능 뒷산의 벙커에서 겪었던 야성의 섹스가 지나치게 강렬했던 탓일까? 남자가 없이 혼자서 절정에 오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상미는 제풀에 지쳐 비디오를 껐다. 그리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희수, 희수가 몇 번이더라?
『아직 안 자고 있었니?』
『어, 상미구나. 웬일이야, 이 밤중에?』
『너 작업하고 있을 거 같아서 걸어 봤어.』
『피이, 빨리 결론부터 말해.』
희수는 쓰던 만년필을 닫고 허리를 폈다. 뉴질랜드 가기 전에 만난 이후로 상미와는 계속 연락을 나누지 못했었다. 갔다왔다는 인사라도 전할까 싶었지만 섹스 파트너를 소개한 것이 어색해서 잠자코 상미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본론만 말할게. 그 남자 있지, 아현동 어디에서 카페를 한다고 했지?』
『왜 갑자기?』
『너도 꼬치꼬치 묻지 말고 대답만 해.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그래? 굴레방다리에서 이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육교 하나 있잖아. 그 왼쪽으로 드레스 대여점들 즐비하게 서 있는 곳.』
『알아.』
『그 육교에서 내리면 시장 입구가 나오고 약국이 보일 거야. 약국 바로 다음 건물 이층을 올려다보면 간판이 보일 거야. 해우소라는.』
『카페 이름이 해우소니?』
『응, 근심을 덜어 주는 장소라는 뜻이야.』
『그 사람은 항상 거기서 먹고 자고 하는 거야?』
『응, 집이 없으니까.』
『그럼 지금도 있겠네?』
『있겠지, 뭐! 이 시간이면 그 사람도 소설을 쓰고 있을 거야. 우리야 선천적으로 부엉이 체질이니까.』
『고맙다, 희수야.』
『근데 급한 일이 뭐니?』
『응, 섹스.』
『뭐라고?』
『다시 연락할게. 끊는다.』
단절음을 내는 수화기를 들여다보며 희수는 기가 막혀 웃고 말았다.
원래 솔직담백한 상미의 성격은 유명했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였다.
얘가 너무 막가는 건 아닐까?
희수는 상미의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일권과의 섹스미팅 자체도 사실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래도 계율을 정해 횟수를 조절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 희수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두 사람 모두 불륜의 해일에 상처 입지만 않는다면 권장할 것까지는 없어도 만류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야의 다급한 전화라니, 이건 문제가 있었다. 원칙이라는 것은 한 번 무시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상미야 워낙 강한 친구라 어찌 돼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낼 거였지만 일권이 걱정이었다. 전선 위에 앉아 비 맞는 참새들을 보고도 마음아파하는 그 유리창 같은 형이 걱정이었다.
세 시 반.
일권은 냄비에 시금치와 햄을 썰어 넣으면서 위장을 달래고 있었다.
불규칙한 일상으로 인해 늘 이때쯤이면 속이 쓰렸다. 술손님들과 잔을 돌리면서 이것 저것 많이 먹은 뒤였어도 한밤중엔 꼭 위장의 채근이 심했다.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습관적인 공복감이었는데, 그럴 때면 원하는 대로 라면 한 사발 끓여 넣어 주는 게 상책이었다.
똑똑!
드디어 카페 해우소의 별미로 통하는 영양라면과 신김치를 테이블에 차려 놓고 막 젓가락을 겨누는 순간 출입구 쪽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일권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라면은 몇 분만 지나도 제맛을 내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투덜거리며 출입문을 열던 일권은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얼어붙었다.
『여길…… 어떻게?』
『들어가도 되죠?』
그녀는 언제나 묻는 걸로 끝이었다. 대답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일권의 겨드랑이 틈으로 바람처럼 들어왔다.
『야식 드시려는 참이었군요.』
일권은 후닥닥 뛰어들어와 그녀에게 빈 자리의 의자를 골라 권했다.
『괜찮아요, 일권 씨 앞자리에 앉을게요. 어서 들어요.』
『귀신에 홀린 기분입니다. 어떻게 여길 알고.』
『어서 드시라니까요. 라면은 식으면 못 먹어요.』
『아, 알았습니다.』
일권은 머쓱해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상미는 바로 앞에 팔을 괴고 앉아 라면 먹는 남자를 빤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국물을 후루룩 소리내며 들이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예고 없이 쳐들어와서 미안하군요.』
『천만에요.』
『세상에 태어난 후로 라면을 이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보통 라면하고는 칼로리부터 우선 다르죠. 하나 끓여 드릴까요?』
『네, 먹고 싶어요. 하지만 조금 더 배를 고프게 만들었다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쏘아보자 일권이 당황했다. 그는 그녀의 저런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라면 국물의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입술로 그녀의 욕구에 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 역시 일권의 표정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상관없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녀가 일어나며 실내등의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걸어와 그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계약 위반에 대해서는 할말 없어요. 일권 씨가 벌을 내리시면 받겠어요, 어떤 벌이든.』
그녀가 매달린 채로 그의 입술을 훔쳤다. 그는 민망해서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나 그녀의 강렬한 흡인력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직까지 남아 있던 라면 국물의 느끼한 기름맛이 그와 그녀의 입 안으로 넘나들며 뒤섞였고 타액과 함께 턱으로 넘쳐흘렀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바꿔 그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치마를 들어올렸고 양 다리를 벌려 완전한 기마자세로 그의 하반신에 올라탄 거였다.
추천66 비추천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