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조혈인 1~3
제1장
흑도치세(黑道治世) 백년(百年)
-흑도인(黑道人)!
야망에 불타는 자들! 야망을 위해서는 자신의 혈육마저도 가차없이 베어 버리는 냉혈의 인간들을 일컫어 세상은 흑
도인(黑道人)이라 한다.
무림 이천 년사를 통해 보면 천하제패의 끝없는 야욕을 불태우며 발호 했던 수많은 흑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처절한 패배와 깊고 깊은 좌절의 늪뿐이었다.
흑도(黑道)-
오직 강(强)과 패(覇)만을 숭상하며 타협을 모른 채 자신만을 위하는 배타적인 무리들이다. 그런 그들이 좌절의 늪에
서 헤어나와 전무후무한 대단결(大團結)을 이루었으니…
<묵성(墨城)!>
천하제패라는 대야망을 이루기 위해 전 흑도인들이 대동 단결하여 이룩한 거대한 결맹! 차라리 그것은 하나의 성
(城)이라기보다는 흑도무림의 하늘이라 칭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 검은 하늘은 아홉 개의 기둥 구천혈지(九天血地)와 사십사 개의 철벽 사사혈련(四四血聯)의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구천혈지(九天血地).
대륙 십팔만 리를 아홉 등분하여 다스리는 아홉 군데의 거대 마세, 그들을 일컬어 구천혈지라 칭한다.
-사사혈련(四四血聯).
묵성을 떠받들고 있는 사십사 개의 흑도문파의 대동맹을 일컫는 말이다.
구천혈지와 사사혈련을 거느린 채 묵성은 거대한 바람으로 떠올랐고, 그 바람은 끝내 강호무림을 완전히 덮어 버리
고 말았다.
흑도천하(黑道天下)-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때에도 이룩하지 못한 천하제패의 흑도천하가 이루어진 것이다.
흑도치세(黑道治世) 백 년(百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무려 열 번이나 거듭되었건만 묵성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아니 전보다
더욱 강성해졌다.
그것은 단 한 사람, 위대한 흑도무림의 하늘이라 칭해지는 절대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묵혈대제(墨血大帝) 철자강(鐵玆强)!
대륙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이 시대의 거인. 그는 백만 흑도인들이 하늘처럼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
시대의 절대자(絶代者)이다.
그의 일생에 패배란 없다.
백 년 전, 그에 의해서 흑도무림은 완벽한 결속을 이루었다. 전 대륙에 산재해 있는 흑도무림의 일통(一統)이란 전대
미문의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 창조의 힘은 곧 검은 폭풍이 되어 강호무림을 잠재워 버리더니 당금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되어 버렸다.
지난 백 년 동안 뜻있는 협의지사(俠義志士)들이 검은 하늘을 베기 위해 검을 들었건만 하늘은 벨 수 없었다.
도전을 용납하되, 힘도 없이 만용(蠻勇)으로 도전하는 것을 절대 용납치 않아 온 절대자.
묵혈대제 철자강!
그는 명실상부한 당금 무림의 하늘이었다.
나신.
불 꺼진 방안으로 스며드는 은빛 월광에 반사되는 여인의 알몸은 실로 아찔했다. 새하얗다 못해 손가락을 대면 하얀
분가루가 만져질 듯한 피부,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몸매였다.
촉촉한 검은 눈망울은 세상을 빨아들일 듯하고, 붉은 앵두를 함북 먹은 듯한 입술은 처절할 정도로 끈끈한 유혹을
뿌린다.
학처럼 긴 목과 둥근 달을 반으로 쪼갠 듯 둥그스름하니 자리한 어깨의 선 아래로 봉긋하니 솟은 두 개의 동산은
또 어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아 알맞게 토실토실 솟은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아늑한 고향의 품에 안긴 듯한 착각이 일 것만
같다.
파도가 출렁이듯 기묘한 떨림을 보이는 젖가슴 아래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한 매끄러운 복부와 그 아래의 미끈한 한
상의 옥주는 가히 조물주의 걸작이라할 만했다.
그리고 지금 그 매끄럽고 탐스런 여체 위에서는 탄력넘치는 건장한 사내의 육체가 부드러우나 강하게 움직이고 있
었다.
사내는 미끈하고 잘 생긴 얼굴에 기골이 훤칠한 미장부(美丈夫)였다. 나이도 힘 깨나 쓸 이십대 초반인 그자는 이
순간 여인의 육체를 정성을 다해 공략하고 있었다.
사내의 집요한 손길에 여인은 애절한 신음 소리를 토했다. 열기를 감당하기 힘든지 연신 뜨거운 신음을 흘리는 여인
의 비단같은 섬섬옥수가 사내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몸 속 깊은 곳을 태우며 번져오르는 뜨거운 본능의 불길에 여인은 학질이라도 걸린 듯 교구를 떨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내는 잔인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여인의 몸을 달구어 갔다. 그리고 여체는 그 손길에 길이 들여져 극도
의 황홀을 맘껏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인이 마침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사내는 그녀의 마지막 요구를 들어주었다.
사내의 입에서 절로 희열이 실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여인도 그 순간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었다. 내밀한 저 깊은 곳에서 모세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번지는 전율 같은 쾌
감에 여인은 교구를 떨며 허리를 활처럼 꺾었다.
사내가 진퇴를 거듭할 때마다 여인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녀의 손은 조일 듯 사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급기야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그녀는 사내의 어깨 죽지를 물어뜯으며 전율했다. 그녀의 손톱은 날카롭게 세워져
사내의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여인은 흥분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사지를 꼭꼭 조이며 사내를 포박하듯 달라붙었다. 사내의 몸이 파도를 칠 때마다
여인의 몸 역시 물결처럼 출렁인다.
사내는 눈빛을 붉게 이글거리며 온 정성을 다했다.
헌데 그런 그의 몸 밑에서 연신 꾸물거리는 여인, 몸은 뜨겁고, 붉은 입술을 비집고 연신 단 비음이 흘러나오지만
그녀의 이글거리는 욕화가 담긴 눈동자 저 밑으로는 새파란 독기(毒氣)가 출렁이고 있었으니…
그 눈빛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뱀(蛇)의 그것인 양 끈끈하고 섬칫했다.
열락의 향기가 가득한 정실(靜室) 밖 방문 앞에는 중 년의 부인이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지금 정실 안에서는 숨 넘어가는 듯 뜨겁고 끈끈한 교성이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후끈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문 밖에 시립해 있는 중 년부인의 얼굴엔 일말의 감정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마치
장님에 귀머거리인 양 그녀는 석상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중 년부인과 열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허리를 숙인 채 서 있는 시녀 차림의 한 소녀의 얼굴은 그와는
상반되었다.
고개를 숙였으나 시녀의 귀는 토끼 귀처럼 쫑긋 세워진 채 정실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락의 교성에 귀를 기울이
기 바빴다.
시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져 있었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고, 하체의 어딘가가
근질근질하고 짜릿한 전율로 달아올랐다.
만약 곁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중 년부인 빙화냉모(氷花冷母)가 없었다면 시녀는 벌써 사
내를 찾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시녀를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곳을 떠나면 안 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였다.
돌연 요요한 몸매를 흔들며 삼십대의 미부 하나가 회랑(回廊:복도)을 달려오듯 걸어왔다.
그 미부를 본 중 년부인 빙화냉모(氷花冷母)의 미간이 차갑게 좁혀졌다.
"수라염요 예미향! 저 계집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흑후(黑后)께서 미안공(美顔功)을 수련하고 계시고 있는 이때는 대
제(大帝)님조차 접근치 못한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이 순간 수라염요 예미향이라 불린 미부는 벌써 중 년부인 빙화냉모 앞에 당도해 있었다.
-수라염요(修羅艶妖) 예미향(藝美香).
아름다움 하나만으로 천하를 농락했던 희대의 마녀다. 겉으로 보기엔 삼십대로 보이지만 기실 그녀의 나이는 백 살
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는 어렸을 적에 복용한 주안실과(駐顔實果)와 섭정술(攝精術)로 사내의 정기를 흡취해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당금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묵성(墨城)의 아홉 기둥 구천혈지(九天血地) 중
환락교(歡樂敎)의 교주라는 점이다.
다가온 수라염요를 향해 시녀가 허리를 굽혔다.
"천녀가 환락교주님을 뵈옵니다."
그러자 미부, 수라염요 예미향은 그녀를 향해 요사하게 눈읏음을 치며 고개를 까닥였다.
"호호호, 앵란아! 눈가에 탕기가 자르르 하는 걸 보니 너도 이젠 제법 사내 맛을 아는가 보구나."
"…"
수라염요의 말에 시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시녀에세서 시선을 뗀 수라염요는 차가운 신색의 빙화냉모(氷花冷母)에게 가볍게 목례를 취해 보였다.
"호호호, 빙화냉모님, 그 동안 안색이 더 차가워졌군요? 겨울이 벌써 오려나?"
"예미향,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지금 네 년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아느냐?"
빙화냉모가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수라염요 예미향의 요염한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알지요, 왜 모르겠어요? 흑후께서는 지금 미안공을 연공하고 계시지 않나요? 흑후의 연공 때에는 그 누구도 얼씬치
못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어요? 허나…"
"허나…?"
"호호호, 사안이 워낙 중대한지라 이렇게 죽을 각오하고 왔으니 어서 흑후님께 기별이나 전해 줘요."
"이 년이…"
찰라 싸늘한 중 년부인의 얼굴에 얼음장같은 한막(寒幕)이 한 겹 더 깔렸다.
그러나 수라염요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아니었다.
수라염요의 그러한 기색에 중 년부인은 한 줄기 의아심을 느껴야만 했다.
(저 계집이 감히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중대한 일로 달려온 것이 분명하다.)
평소라면 수라염요는 중 년부인 앞에서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지 못한다. 수라염요가 천하에 산재되어 있는 묵성 막
하 구천혈지 중 환락교의 교주라지만 중 년부인의 위치는 그녀보다 한 단계 높기 때문이다.
-빙화냉모(氷花冷母).
그녀는 천하 흑도인들의 여왕(女王)으로 불리는 흑후(黑后)의 그림자같은 존재다. 게다가 그녀의 무공은 이미 화경에
달해 있어 묵성내의 서열 이십 위 안에 드는 초강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 앞에서 수라염요 예미향이 빳빳이 고개
를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을 빙화냉모는 상기한 것이다.
그러나 천성이 그러한 듯 빙화냉모는 싸늘한 어조로 수라염요를 쏘아 부쳤다.
"예미향, 흑후님의 연공을 방해할 수 없다. 나에게 말하면 연공이 끝나는 즉시 보고 올리겠다."
빙화냉모의 말에 수라염요는 그럴 수 없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데…"
그러면서 수라염요는 귀를 쫑긋 세우며 정실 안의 동태를 살폈다.
정실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이러다간 날이 새겠는데…"
수라염요는 어깨를 추스르며 서성였다.
이 때였다. 돌연 정실 안에서 목구멍으로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역하게 들려 왔다.
"끄르륵…꺼억!"
순간 석상 마냥 서 있던 빙화냉모가 시녀를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치워라!"
"예."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는 정실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잠시후, 시녀는 조금 전까지 여인의 몸 위에서 용을 쓰던 사내를 개 끌다시피 끌고 방 밖으로 나왔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시녀에 의해 끌려나온 사내의 몰골을 보라.
그는 본래 매끈한 동안(童顔)에 건장한 체구를 지녔었다.
그러나 지금은 폭삭 늙은 할아버지마냥 피부가 까실까실함은 물론 피골이 상접하지 않은가. 눈동자의 초점은 풀려
있었다. 탱탱하게 근육 잡힌 몸엔 검은 버짐이 버석마냥 피어 있었다. 단 한순간에 수십 년이 늙어 버린 노쇠현상이
있다면 바로 이러하리라.
사내를 힐끗 본 수라염요의 눈에 기광이 일렁였다.
"어머! 흑후님의 연공이 거의 칠성(七成) 수준에 달했군요."
빙화냉모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내를 끌고나온 시녀에게 싸늘한 어조로 명령했다.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도록 조심하라."
"예."
축 늘어진 사내를 질질 끌고 사라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보며 빙화냉모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위대하신 흑후님을 안았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이다."
이어 그녀는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흥! 제깐 년이 총단에 있다고 날 무시하지만 두고 보라지…언젠가는 빙화, 네 년은 물론 흑후까지 내 발밑에 둘 것
이다.)
내심 중얼거리며 표독스러운 빛을 발하는 수라염요 예미향은 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이때 빙화냉모가 다시 나오며 싸늘히 말했다.
"흑후께서 찾으신다."
"고마워요, 호호호…"
수라염요는 엉덩이를 살랑이며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빙화냉모의 눈에서 새파란 독광이 번뜩였다.
"미친 년…"
빙화냉모는 차가운 눈빛을 발하며 몸을 돌렸다. 회랑을 조용히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은 칙칙했다.
여인은 속이 훤히 비치는 나삼을 가볍게 걸친 채 커다란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다리를 쭉 곧게 뻗고 상
체를 세워 팔 하나로 고정시킨 채 끈끈한 땀이 자르르 흐르는 몸뚱이를 식히는 그 모습은 사내라면 절로 숨이 가빠
질 것이다.
더욱이 잘 익은 사과를 그것보다 더 붉고 윤기가 흐르는 붉은 입술을 벌려 하얀 치아로 한 잎 베어먹는 모습은 짙
은 유혹을 흩뿌렸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내 마음이 떨리다니, 흑후 앞에서는 수라염요라는 이름이 무색하구나.)
수라염요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요요로움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며 묘한 질투심을 받았다. 그것은 아름
다움을 추구하는 여인들만이 갖는 질투다.
본래 수라염요는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그 즉시 그녀의 얼굴을 망가뜨려 버리는 악녀다.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여인을 두 눈뜨고 보지 못하는 지독한 악녀가 그녀인 것이다.
그러나 수라염요는 감히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을 향해 살수를 전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이
땅을 지배하는 묵성의 여주인(女主人)이기 때문이다.
-흑후(黑后)!
본래 지난 백 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온 묵성의 성주 묵혈대제(墨血大帝) 철자강에게는 네 명의 부인이 있다.
그 중 가장 나중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앞선 세 명의 부인들보다 더욱 강성한 세력으로 묵성의 안방 주인 자리를 차
지한 여인이 바로 흑후다.
묵혈대제는 천하 경영에 있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흑후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녀의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따라 강호의 운명이 결정되어 온 것이다.
지금 수라염요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흑후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본교의 광주분타인 교향원(嬌香院)의 보고에 의하면 십오 년 전 실종된 장경욱(張慶旭)과 놈의 마누라인 진봉련(秦
鳳蓮)과 닮은 중 년 부부가 광주 인근 등해(藤海)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
사각사각…
흑후는 말없이 사과를 베어 물 뿐이다.
수라염요는 계속 말을 했다.
"속하는 그 보고를 받고 신중을 기하기 위해 분타에 장경욱과 진봉련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초상화와 함께 지령을
내렸습니다. 오늘 오전에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분명 원앙쌍백이 등해에 숨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
사각…사각…
흑후는 말없이 사과만 깨물어 먹었다.
수라염요는 등골에 식은땀이 자르르 흘렀다.
(흑후께서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는 것은 나의 대안을 물으시는 것이다. 어떻게 처리한다. 만약 내가 흑후라면…)
수라염요는 일시 주저하다가 입을 연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삭초제근(削草制根)! 비록 그가 십오 년 전 본성에 대항하다가 살황독존(薩荒毒尊)의 오행살독공
(五行殺毒功)에 격중되어 내공을 잃은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지혜는 하늘도 희롱할 정도로 깊고 높은지라 그가 살
아 있다는 것을 백도놈들이 안다면 제이(第二)의 무의맹(武義盟)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법, 그가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본성엔 큰 장벽이니 이 기회에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되옵니다."
"…"
사각…사각…
"또한 그를 죽임으로써 본성의 무서움을 강호인들에게 재인식시켜 감히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일벌백계(一罰
百戒)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수라염요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살(殺)! 추호의 망설임도 필요치 않는 죽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흑후가 돌연 깔깔 웃었다.
"호호호, 예미향,"
"예."
"지금 그 일 때문에 이곳에 왔느냐?"
"장경욱은 십오 년 전 반천세력(反天勢力)인 무의맹(武義盟)을 결성한 자입니다. 그런 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백도인
들이 알게 된다면…"
"호호호! 장경욱? 그가 그토록 무서운 강자였단 말이냐?"
"그게…"
"예미향, 장경욱과 무의맹은 십오 년 전 본성에 대항하다가 패했다. 일개 패장(敗將)을 두려워해서야 어디 천하를 다
스릴 수 있겠느냐."
흑후는 야릿한 눈길로 수라염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을 접한 수라염요는 일시 독아(毒牙)를 드러낸 채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毒蛇) 한 마리가 눈앞에
있는 듯한 전율을 받았다.
수라염요는 다급히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흑후는 반쯤 먹다 남은 사과를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몸을 반듯이 뉘였다.
"자야겠으니 물러가라."
"…!"
수라염요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릎걸음으로 뒤로 걸어갔다.
수라염요는 황망히 정실을 벗어났다.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아미를 찡그렸다.
"장경욱이라면 본 천의 척살자 명단에 올라 있는 자이거늘 어이해 흑후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본단 말인가? 혹시그
소문이 사실일까?"
불현듯 수라염요는 이십여 년 전, 강호에 떠돌았던 한 가지 소문을 뇌리에 떠올렸다.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감히 묵성의 흑도천하에 정면으로 맞서던 한 명의 젊은 협웅이 강호에 등장했다.
-비천검협(飛天劍俠) 장경욱(張慶旭).
그는 빼어난 용모와 화경에 달한 무공, 당대 제일의 석학이라는 청송대학사(靑松大學士)로부터 학문을 사사받아 그
지혜로움이 가히 대해와도 같은 청 년 고수였다.
그런 그가 정면으로 묵성(墨城)에 대항한 것이다.
그는 뜻이 맞는 지사들과 손을 잡고 무의맹(武義盟)을 창설했다. 최초의 시작은 미흡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
이처럼 무의맹의 세력은 불어만 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의맹은 존재는 묵성에 있어선 눈에 가시와도 같을 지경이었다.
묵성의 전위조직인 사사혈련의 전 고수들이 혈안이 되어 무의맹을 섬멸하려고 하였지만 장경욱의 신출귀몰하는 병
략과 전술에 번번이 패배만 거듭했다.
그 결과 장경욱은 강호인들로부터 비천무존(飛天武尊)이라는 영예로운 아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상한 소문이 강호에 퍼지기 시작했다.
-흑화(黑花) 섭미림(燮美林)!
묵성 사사혈련에 속해 있는 흑상문(黑象門)의 금지옥엽인 흑화 섭미림과 무의맹의 비천무존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염문(艶聞)이었다.
백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묵성의 흑화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는 소문은 강
호에 파다했었다.
실로 모순(矛盾)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비천검협 장경욱은 결코 그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고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해명치도 않았다. 그저 그
소문에 대해 물으면 그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하여 더더욱 그 소문은 사실로 강호 전역에 염병처럼 번져 갔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문이 거짓된 낭설이었음이 한 여인의 의해 밝혀졌다.
-옥봉선희(玉鳳善姬) 진봉련(秦鳳蓮)
옥봉선희는 아미(峨嵋)의 속자제자로 비천무존과 함께 무의맹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강호인들은 그들 두 사람을 원
앙쌍백(鴛鴦雙白)이라 불렀다.
그녀는 평소 흠모해 온 장경욱이 괴이한 소문으로 입장이 난처해지자 그 소문의 진원지를 은밀히 조사하고 다녔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그 소문이 흑화 섭미림 자신이 강호에 유포시킨 소문임을 알게 되었다.
소문이 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장경욱은 복우산(伏牛山)을 지나다가 신음하는 소녀를 구한 적이 있었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열여덟 가량의 그 소
녀는 전설 속에 나오는 날아다니는 뱀, 삼목비사(三目飛蛇)에 물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삼목비사는 맹독(猛毒)을 지니고 있었다. 이놈에게 물리게 되면 해독하는 길은 단 한 길밖에 없다. 삼목비사를 죽여
뇌(腦)속에 있는 내단(內丹)을 복용하는 길만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장경욱은 삼목비사를 죽여 어렵지 않게 내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즉시 신음하는 소녀에게 내단을 복용시키려
고 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곧 죽을 듯 신음하던 소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게 미혼향(迷魂香)을 흩뿌리는 것이 아닌가!
흠칫 놀라 숨을 막았지만 너무나 창졸지간에 일어난 기습인지라 장경욱은 미혼향에 중독되고 말았다.
미혼향엔 산공독(散功毒)과 춘독(春毒)이 섞여 있었다. 장경욱은 내공이 흩어지고, 욕정까지 치솟는 위기에 직면했다.
더욱이 소녀는 옷을 벗어 알몸으로 그에게 안겨 오기까지 했으니…
허나 장경욱은 초절정고수였다. 그는 흩어지는 내공을 가까스로 끌어 모아 육탄공격을 해 오는 소녀에게 일장을 발
출하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훗날 그 소녀가 흑상문의 흑화 섭미림이란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고 고소(苦笑)했었다.
헌데 그런 첫대면을 가진 그녀가 이번에는 엉뚱한 소문으로 그를 곤경에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흑화의 계략은 물
론 그를 백도무림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데에 있었다.
옥봉선희 진봉련은 음모의 전모를 알아내고는 흑화를 사로잡았다. 진봉련의 무공은 비천무존 장경욱과 비견해도 결
코 손색이 없을 정도로 초절정수준이다. 흑화 섭미림이 그녀에게 잡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헌데 흑화 섭미림이 무의맹에 압송되어 오던 바로 그날 밤의 일이다. 무의맹은 사사혈련의 대대적인 기습으로 인해
멸화를 당하고 만다.
흑화 섭미림은 일종의 미끼였다. 묵성에서 강호를 이잡듯이 뒤져도 알아내지 못한 무의맹의 총단을 찾아내기 위해
그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미끼로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쓴 것이다.
비천무존 장경욱은 살황독존의 독공에 당해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무의맹은 해체되었다.
하나 그 혈겁의 와중에서 진봉련은 구사일생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실책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물은 엎어진 뒤, 진봉련은 묵성으로 압송되어 가는 장경욱을 구출하기로 작
정했다. 그가 있어야지만 새롭게 무의맹을 다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몇몇 지사들의 도움으로 압송되어 가는 장경욱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장경욱과 진봉련은 강호에서 사라졌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무의맹이 해체된지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는 의혹이 있
었으니…
그것은 흑화 섭미림의 예기치 않은 행동 탓이다.
당시 그녀는 사사혈련 고수들이 비천무존을 죽이려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아울러 그를 묵성으로 압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나이가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흑화 섭미림의 계략 덕분에 무의맹을 섬멸할 수 있었고, 또한 흑상문(黑喪門)
이 그 공로로 구천혈지 중 한 곳이 되자 사사혈련의 고수들은 그녀의 말에 찬성을 했다.
어차피 살황독존의 오행살독공에 적중된 장경욱은 단전(丹田)이 파괴되어 무공을 영원히 상실한 폐인이 되었다. 그
런 그를 당장 죽이나, 묵성으로 압송해 간 후 공식 재판을 거쳐 죽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압송을 맡았던 흑상문 제자들이 너무나도 맥없이 진봉련 등에게 당해 장경욱을 빼앗긴 것이다.
흑화 섭미림은 설마하니 진봉련등이 그를 구출하려 했을 줄 몰랐다고 크게 어이없어 하고, 사사혈련 사람들에게 변
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사사혈련 고수들의 눈길을 왠지 미더웠다.
악마의 지혜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항간에는 그녀가 거짓이 아닌 진실로 장경욱의 영웅적인 기상에 반해 그를 사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
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진봉련이 구출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일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 사라졌다.
흑화 섭미림! 그녀가 묵혈대제 철자강의 네 번째 부인이 된 때문이다.
수라염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본 천의 척살자 명단에 올라 있는 장경욱과 진봉련에 대한 수색이 단 한 번도 있지 않
았다.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추적조가 있건만…그럼 소문대로 흑후의 마음 속에 아직도 장경욱에 대한 연심
(戀心)이 있단 말인가?"
그 때였다. 돌연 음침한 음성 하나가 그녀의 귓전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죽고 싶으냐? 예미향?"
무미건조하다 못해 말의 억양도, 높낮이도 전혀 없는 음성이었다.
"헉! 혈불(血佛)!"
수라염요는 혈불이란 말을 내뱉자마자 황급히 몸을 날려 회랑을 달려나갔다.
-혈불(血佛)!
그의 칼날은 절대 실수가 없었으며, 그는 묵성의 신비한 암살조직인 묵혈영(墨血影)의 대주(隊主)다.
검은 악마의 손(墨血魔手)-!
살인집행자(殺人執行者)-!
악마판관(惡魔判官)-!
이런 공포스런 악명으로 불려지는 묵혈영의 살수들은 묵성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들은 물론 내부의 인물일지라도 묵
성의 율법을 어긴 자의 목숨을 어김없이 끊어 내는 죽음의 판관들이다.
그들의 대장인 혈불(血佛)의 출현에 수라염요는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두려움을 지닌 채 회랑을 달렸다.
그저 목소리 하나만으로 구천혈지 중 한 곳을 담당하는 환락교주인 수라염요의 꼬랑지를 내리게 하는 공포적 존재,
그것이 바로 묵혈영인 것이다.
수라염요는 달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불이 왜 나타났지?)
그녀로서는 돌연한 혈불의 출현이 크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곧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잊어버리자. 난 보고를 했으니까 흑후님이 알아서 할 것이다. 난 그분의 명에만 따르면 된다.)
수라염요는 밤을 도와 몸을 날렸다.
이곳은 묵성 내의 흑성전(黑聖殿). 묵혈대제 철자강의 네 번째 부인인 흑후(黑后) 섭미림이란 희대의 요부가 머무는
곳이다.
제2장
거인(巨人)의 허무한 죽음
-등해(藤海).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광주(廣州) 인근의 바다다.
남쪽으로 멀리 끝없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긴 백사장과 파도에 씻겨 둥글둥글한 바위가 양쪽에 있는 등해에는
작은 어촌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영가촌(永家村)!
이 어촌에는 인가라고는 고작 스무 채 가량이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고깃배로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얀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모래사장에는 지금 한 명의 중년부인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아까부터 석상같이 서 있었다.
"…"
중년부인은 일신에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 평범한 어부(漁夫)의 아내같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중년부인은 어부의 아내로 보기에는 아까운 용모였다. 비록 눈가에 잔주름이 지고 바닷바람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살결이 매끄럽지는 못하지만 붓으로 그린 듯 가는 눈썹에 호수같이 맑은 눈동자, 오똑 솟은 콧날
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인이었다.
게다가 양미간 사이에 드리워진 그늘은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달이 보고 구름 속으로 숨고,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만치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는 중년부인은 수심(愁心)
이 잔뜩 드리워진 얼굴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열두어 살 가량된 소년이 백사장 저쪽에서 나타났다.
소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울며 아름다운 중년부인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엄마! 엄마!"
보아하니 소년은 중년부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소년의 외침 소리를 듣자 중년부인은 황급히 상념을 거두고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경(世經)아, 왜 그러느냐?"
소년은 웃옷을 홀랑 벗은 차림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온 몸 군데군데에 난 푸르스름한 반점을 가리키며 울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의 드러난 상체엔 보기
흉한 푸르스름한 반점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젖소였고, 점박이 바둑이였다.
"애들이 나더러 점박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엄마, 다른 애들은 몸이 하얗고 점이 없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몸이
푸르딩딩하며 점이 많아요? 이 점 좀 없애 주세요."
"…"
이 말에 중 년부인의 안색이 몹시 착잡하게 변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곧 몸을 숙여 소년을 껴안
았다.
"세경야, 너는 태어날 때부터 점이 많았단다. 한 번 생기면 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무 떼쓰지 말아라. 점이 많다고
창피하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다. 큰 돼지가 새끼를 날때 보렴. 돼지 새끼들의 털 색깔이 제각기 다르지 않니? 그것
처럼 사람도 점이 있는 사람과 점이 없는 사람이 있는 거란다."
"하지만 애들이 나만 보면 점박이라고 놀려대서 창피해 죽겠어요. 그러니 우리 다른 곳으로 이사가요. 예…"
중년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다. 네 뜻대로 해주마."
"아이 좋아라."
소년은 깡충깡충 뛰며 좋아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이번에 이사를 가면 헤엄을 칠 때에 절대 옷을 홀랑 벗지 말아야지…그러면 애들이 내가 점박이라는 것을 모르겠
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는 미약한 햇살을 받으며 모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 중년부인은 병약한 남편과 나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어촌을 떠났다. 중년부인의 병약한 남편은 오랜 병마
(病魔)에 시달린 듯 안색이 백짓장같이 창백했다.
그들이 밤을 도와 어촌을 떠나 널찍한 관도에 들어섰을 때다. 멀리서 네 필의 준마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말에 탄 사람들의 용모는 거리가 멀어 잘 알 수 없었으나 등위로 장검 자루가 삐죽이 솟아 나와 무림인들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중년부인은 무림인들 일행을 보자 안색이 해쓱해졌다.
(무림인들과 마주치면 좋지 않다. 일단 피하자.)
그녀는 황급히 병약한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근처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숲 속에 몸을 숨긴 채 지나가는 무림인들을 보며 눈에 신광을 번뜩거렸다.
두두두…
이윽고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네 필의 인마가 그들이 숨은 관도 옆 숲길을 스쳐 지나갔다. 중년부인의 얼굴에 안
도의 빛이 스쳐 지났다.
(다행히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중년부인은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다시 관도로 나왔다.
한데, 방금 관도 저편으로 사라졌던 무림인들의 준마가 방향을 돌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오는 것이 아닌
가?
중년부인은 당황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여보, 저들이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에요."
"그렇구려."
중년부인은 급히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말을 탄 무림인들은 이미 지척까지 달려왔다.
히이잉!
말을 탄 무림인 중 얼굴에 분(粉)을 바른 것같이 하얀 자가 말머리를 낚아채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눈 사이가 좁고
입술이 얇은 것으로 미루어 성격이 극히 음침한 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중년부인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그러는 그의 눈가엔 음침한 기운이 가득했다.
"부인은 아름답고 젊은데 어찌하여 저런 송장같은 자를 데리고 다니시오?"
이 말에 중년부인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잘났어도 내 남편이고, 못났어도 내 남편이니 귀하께서는 무례한 언동을 삼가해 주시오."
중년부인은 남편과 아들을 부축해 떠나려 했다.
"잠깐!"
얼굴이 하얀 사나이가 말을 몰아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인은 허름한 옷차림에 비해 말솜씨가 제법이구려. 흐흐흐…"
그와 동시에 그의 일행 중 텁석부리 사나이 하나가 마상(馬上)에서 몸을 번뜩였다.
휙-!
그는 날쌘 제비처럼 몸을 날려 병약한 중년인의 등덜미를 낚아챘다.
"흐윽!"
병마에 시달려 심신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년인은 덥석부리 사내의 손에 목덜미와 옷이 잡혀 개 끌려가듯 사
내 쪽으로 끌려갔다.
덥석부리 사내는 음흉한 웃음으로 얼굴이 하얀 자에게 말했다.
"흐흐흐…둘째야, 내가 이자를 끌고 한쪽에 피해 있겠으니, 그 고귀한 부인과 재미 좀 보렴."
이때, 점박이 소년이 자기 아버지의 등덜미를 낚아채고 있는 텁석부리 사나이에게 달려가며 앙칼지게 외쳤다.
"왜 우리 부모님을 못 살게 구는 거예요?"
소년은 다짜고짜 아버지를 낚아채고 있는 텁석부리 사나이의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찼다.
퍽!
"아얏!"
텁석부리 사나이는 불시에 급소가 차이자 절로 중 년인에게서 손을 떼며 자신의 급소를 만졌다.
"이런 발칙한 놈!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말 테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화가 치밀어 올라 안색이 새빨개졌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소년의 뺨을 후려쳐 왔다.
"힘만 세다고 으스대지 마세요!"
소년은 냉소를 날리며 허리를 굽히더니 텁석부리 사나이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그의 손길을 피했다. 미꾸라지처
럼 날쌘 행동이었다.
이때 뒤쪽에 서 있던 이마에 칼자국이 깊숙이 나 있는 사나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형님들, 어서 길을 떠납시다. 공연히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등해(藤海)에 숨어산다는 장가(張家)놈을 놓칠지
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듣자 중년 부부는 흠칫 놀라며 전신에 한차례 진동이 일었다.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는 빙긋이 웃었다.
"넷째는 너무 겁이 많아 탈이야. 그 녀석이 우리가 자기를 잡으러 이렇게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한단 말이
냐?"
그러다가 그는 돌연 중 년 부부가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며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보자 매우 의아해했다.
"헌데, 너희들은 왜 그리 몸을 부들부들 떠는 거냐?"
중년부인은 매우 당황해 하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칼자국이 있는 사나이는 중년 부부를 유심히 살펴보며 넘겨짚듯 물었다.
"혹시 너희들…등해에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소년이 얼른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는 등해에 살다가 애들이 나더러 점박이라고 골려 대는 바람에 이사가고 있는 중이에요."
이 말에 네 사나이는 모두 눈빛이 번쩍했다. 그들은 곧 중년 부부 일가를 포위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소년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세경(河世經)이에요."
"하세경?"
덥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에 곧 실망의 기색이 번졌다. 그들이 찾는 자는 장가(張家)였기 때문이다.
덥석부리 사나이는 재차 소년에게 물었다.
"그럼, 네가 살고 있던 등해에 무림인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
"아니오. 우리 동네에는 모두 어부들만 살고 있는 걸요."
"너는 줄곧 등해에서만 살았느냐?"
"아니에요. 애들이 내 몸에 나 있는 푸른 점 때문에 점박이라고 골리자 계속 이사를 다녔어요."
"너희 아버지도 고기잡이를 하느냐?"
"저희 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아무 일도 못해요. 엄마가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들을 팔아서 지금까지 생활했어요."
순진한 소년은 곧이곧대로 얘기했다.
여기까지 말을 들은 순간 텁석부리 사나이의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흐흐흐…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들이 여기 있었군."
그러더니 돌연 텁석부리 사나이는 안면에 야릇한 빛을 띄우더니 안색이 창백한 중 년인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바로 왕년의 무의맹주였던 장경욱이지?"
번쩍!
검광이 별빛을 받아 푸르스름하니 빛났다.
찰라지간 중년인의 얼굴에 수많은 감정의 빛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곧 중년인은 숨을 길게 들이키더니 비장한
각오를 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 본인이 바로 장경욱이다."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가 괴소를 터뜨렸다.
"꼴 좋구나. 왕년의 산천을 떨게 했던 무의맹주가 이 꼴이라니. 흐흐흐…"
실로 놀라운 일이다.
-비천무존(飛天武尊) 장경욱(張慶旭)!
무의맹(武義盟)을 결성하여 천하를 질타하며 묵성의 아성에 당당히 도전장을 던졌던 일대협걸(一代俠傑). 그런 그가
지금은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는 병자로 전락하여 있지 않은가?
십오 년 전 살황독존(薩荒毒尊)의 오행살독공(五行殺毒功)에 적중되어 무공을 잃더니만 이런 몰골이 되어 있을 줄은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하나 무공은커녕 부인 진봉련의 부축이 없으면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장경욱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 싸늘한 광채
가 번뜩거렸다.
"너희들은 대관절 누구냐?"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가 으스대며 말을 받았다.
"이 어르신네들은 남황사혈(南荒四血)이시다."
"핫핫핫! 남황사혈이라고…묵혈대제를 떨게 했던 나 장경욱의 최후를 고작 남황사혈 따위에게 맡겨야 한단 말인가,
핫핫핫!"
장경욱은 돌연 광소를 토해냈다. 그의 웃음은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절규(絶叫)였다. 흡사 산중지왕이
던 호랑이가 사냥꾼의 활에 맞아 사경에 헤맬 때 들개들이 으르렁거리며 호랑이를 노리자 평소 하찮게 여긴 들개들
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호랑이의 포호와 같이 장경욱의 웃음 또한 그러했다.
-남황사혈(南荒四血)!
사사혈련 중 남만(南灣)에 위치한 사혈갱(死血坑)의 인물들이다. 그들의 수준이 일류급이긴 하지만 어찌 비천무존 장
경욱 앞에서 호기를 부릴 수 있으랴,
하지만 지금의 장경욱은 호미조차 들 힘이 없는 폐인이었다.
이 무렵, 소년은 지금 자기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은 하가(河家)인데
어째서 아버지가 장가(張家)란 말인가?
또 아버지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손에서 바람이 일어나 나무를 뿌리째 뽑아 날아가게 하는 무림인이라니…
소년은 급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피어나 있는 비장한 기운
을 발견하고는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소년 역시 깨
달은 것이다.
이때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가 중년부인에게 음탕한 추파를 보내며 말을 씹어 뱉었다.
"네년이 옥봉선희 진봉련이냐?"
중년부인은 고운 얼굴에 살기를 드러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남황사혈, 너희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가야만 했다."
"호오…앙칼진 성격은 여전하군."
하얀 얼굴의 사나이는 비웃음을 입가에 드리우며 진봉련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진봉련, 꿈에서 깨어나라. 지금 너희 목숨은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다. 나 분면색낭(粉面色狼)의 눈은 그냥 달려 있
는 줄 아느냐! 네년도 장가놈처럼 무공을 상실한 것을 내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느냐? 흐흐흐…"
찰라지간 진봉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렇다! 기실 진봉련 역시 장경욱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상실한 폐인이었다.
남황사혈 중 둘째인 분면색랑은 강호의 일류 고수답게 첫눈에 그녀의 상태를 파악한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무공을 잃었는지 의아했으나 어찌되었건 눈앞에 벌어진 일대 위기를 벗어날 길이 막막했다.
바로 그 순간 남황사혈 중 첫째인 금사자(金獅子)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얘들아, 어서 저것들을 모조리 생포해라."
그러자 나머지 삼혈은 사방에서 장경욱 일가를 향해 덮쳐 왔다.
"흣흣흣, 계집, 넌 내 차지다."
츄류류륙…
색마로 소문이 난 분면색랑은 음침하게도 진봉련의 유근혈(乳根穴)을 노렸다.
"앗!"
진봉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돌렸다.
이 무렵 소년은 부모님들이 자기의 몇 마디로 인해 네 사나이의 공격을 받게 되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년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빠!"
허나 남황사혈은 순식간에 장경욱 일가를 사로잡았다. 장경욱과 진봉련은 무공이 폐지되었으니 강호에 악명이 높은
남황사혈이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카하하하!"
득의의 웃음을 토하며 금사자가 장경욱의 팔목을 쥐었다.
바로 그 순간 장경욱은 젖먹던 힘을 다해 금사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죽어랏!"
퍼억!
무공이 폐지된 그의 발길질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졸지에 복부를 걷어차인 금사자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
다.
"놈!"
금사자는 눈에 쌍심지를 켜며 성난 야수같이 달려들어 장경욱의 목과 다리를 낚아채고는 그의 등허리를 자신의 무
릎에 대고 꺾었다.
"뼈도 못 추리게 만들겠다!"
우두둑!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장경욱은 몸뚱이가 꺾여졌다.
"커헉!"
비천무존 장경욱. 쓰러진 정혼(正魂)을 일으키고, 강호를 뒤엎은 어둠의 장막을 거두기 위해 열혈의 혼을 다했던 정
의의 불꽃.
그는 눈알을 희번뜩 뒤집은 채 암울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는 파도치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정녕…이 어둠을 거둘 수 없단 말입니까?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이오니까?)
그러나 하늘은 대답이 없었다.
장경욱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죽은 것이다.
"아버지!"
"여보!"
진봉련과 소년은 비통함을 금치 못하여 장경욱의 시신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이 때였다.
삐리리리!
홀연 멀리서 맑은 퉁소 소리가 들려 왔다.
이어 한 명의 비렁뱅이 노인이 유성처럼 날아와 장중에 사뿐히 내려섰다. 남루한 폐포(幣袍)에 까치 둥지를 방불케
하는 봉두난발(蓬頭難髮)을 한 노인은 얼굴이 어린애같이 붉고 호랑이 눈을 지니고 있었다.
비렁뱅이 노인은 대뜸 소리쳤다.
"이런 고약한 것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살상한단 말이냐?"
비렁뱅이 노인이 나타나자 남황사혈은 대뜸 눈알을 부라렸다.
"왠 늙은이가 감히 묵성의 행사에 방해를 놓느냐?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묵성! 오냐, 내 묵성의 종자들이라면 절대 이 땅에 살려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휙! 휙!
비렁뱅이 노인은 다짜고짜 수중의 대나무 퉁소를 떨쳐냈다. 그러자 남황사혈은 맹렬한 경기에 휩싸여 한쪽으로 비켜
섰다.
"웬 개뼈다귀냐?"
비렁뱅이 노인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우뢰와 같이 호통쳤다.
"이런, 눈이 삔 녀석들을 보았나? 네 녀석은 개뼈다귀가 말을 하는 것을 보았느냐? 노부를 개뼈다귀라고 부르는 것
을 보니 네놈들이 개뼈다귀인 모양이구나."
남황사혈 중 셋째인 무영구혼(無影拘魂)은 상대방이 욕을 하자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발칙한 늙은이! 목을 확 비틀어 버리겠다."
무영구혼은 기합을 내지르며 비렁뱅이 노인에게 덮쳐 가며 다섯 자 가량의 철봉(鐵棒)을 휘둘렀다.
"얍!"
비렁뱅이 노인은 빙그레 웃더니 수중의 길이가 한 자 남짓 되는 대나무 퉁소를 떨쳐 내 상대방의 철봉을 막았다.
땅!
맑은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어이없게도 무영구혼의 철봉은 그의 대나무 퉁소에 의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 일
초의 대결로 두 사람의 공력차가 드러났다.
금사자는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즉시 외쳤다.
"셋째는 뒤로 물러나라! 내가 직접 나서겠다."
무영구혼은 반동강의 철봉을 움켜쥔 채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 금사자가 어깨를 번뜩이며 비렁뱅이 노인에게 덮쳐
가며 사자포효권(獅子咆哮拳)을 격출해냈다.
꽈르르릉…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권격(拳擊)이 무섭게 비렁뱅이 노인에게 쏘아져 갔다.
그러자 비렁뱅이 노인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너도 별 수 없을 테니 너희들 네 명이 함께 덤벼라! 하하하…"
찰라지간 남황사혈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늙은이, 죽어랏!"
"만리사영(萬里死影)!"
쐐애애액---
번쩍이는 검광과 신출귀몰한 신형, 귀청을 찢을 듯한 폭갈 등 삽시간에 장내는 싸움판으로 변했다.
이때 진봉련의 귓가에 전음술(傳音術)이 들려 왔다.
"부인, 내가 이자들과 맞서 싸울 테니 그 어린애를 데리고 어서 이곳을 피하시오."
진봉련은 비렁뱅이 노인이 한 말임을 알고 즉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지금은 지체할 겨를이 없소, 남황사혈만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묵성 사사혈련의 고수들이 혈안이 되어 부인
과 비천무존을 찾고 있소."
(앗! 그럼 우연히 놈들과 마주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우연히 놈들이 하는 말을 듣고 달려왔지만 한 발 늦어 일대거인이 너무나도 어이없어 죽음을 당해 노부는 마음이
아프오, 부인,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오, 일단 부인과 영식만이라도 살고 봐야 할 것이 아니오. 어서 피하시오. 놈
들이 더 몰려온다면 노부도 감당할 수 없소."
"하지만 은공(恩功)의 존함이라도…"
"이름이 뭐가 중요하단 말이오, 어서 피하시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어서!"
(고맙습니다. 은공…)
진봉련은 비렁뱅이 노인에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는 아들의 손을 잡은 채 내달렸다.
그들 모자가 도망치자 남황사혈은 비렁뱅이 노인이 꾀를 쓴 것을 알고 대노했다.
그들은 표적을 돌려 진봉련 모자를 추적하려고 했다.
금사자가 무영구혼에게 외쳤다.
"셋째, 년놈들을 잡아랏!"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비렁뱅이 노인이 막 움직이려는 무영구혼을 공격했다.
"핫핫핫…어딜 가려느냐? 나랑 놀자."
비렁뱅이 노인은 걸직하게 웃으며 남황사혈을 막아섰다.
노인의 수법은 귀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민첩하고 날카로워 남황사혈은 비렁뱅이 노인을 밀치고 진봉련 모자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진봉련과 소년은 이미 멀리 도망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진봉련과 소년은 날이 샐 무렵 어느 이름 모를 깊은 험산준령에 당도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겨우 한숨을 돌리며 쉴 수가 있었다.
진봉련은 비렁뱅이 노인의 도움으로 남황사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남편이 금사자의
손에 산산조각이 난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나 슬퍼만 할 수는 없다.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 복수를 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입술을 악물며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그들 모자는 산중에서 거의 쓰러져 가는 절(寺)을 발견하고 그곳에 가서 쉬기로 했다.
폐사(廢寺)는 오랫동안 인적이 끊겼는지 불당(佛堂)은 먼지가 한 치 가량이나 뽀얗게 쌓여 있었다.
진봉련은 먼지를 치우고 마른 풀잎을 주워 다가 푹신푹신하게 깔은 후 아들과 나란히 누웠다.
소년은 워낙 피곤했던지라 눕자마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추위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데 곁을 보니 어머님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피를 보러 가신 것일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소년은 다시 벌렁 누웠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랐다. 자신의 손목에 이상한 것이 묶여져 있
는 것을 느낀 것이다.
순간 소년은 왠지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손목을 바라보았다.
"앗!"
소년의 손목에는 어머니의 것이 분명한 찢겨진 하얀 치맛자락이 묶여져 있었다.
"설…설마…"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풀어 보았다. 찢겨진 하얀 치맛자락엔 피로 쓴 혈서(血書)가 적혀 있었다.
<내 아들 보아라. 이 어미는 널 떠나며 몇 자 적는다.
우선 너의 출신 내력(出身來歷)부터 가르쳐 주겠다. 너는 무의맹주였던 비천무존 장경욱의 유일한 혈육이다. 그리고
이 어미의 이름은 진봉련이다.
또한 너의 본명은 하세경이 아니라 장세경(張世經)이다.
네 아버지는 십오 년 전 강호 무림에 협명을 떨치셨던 무의맹주시다. 비천무존 장경욱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
지금까지 너에게는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십오 년 전 어느날 무의맹은 흑화 섭미림의 꾀임에 풍지 박살나고 네 아
버지는 살황독존의 오행살독공에 중독되어 무공을 잃었다.
천우신조로 묵성으로 압송되어 가던 아버지를 구한 어미는 묵성의 추적을 피해 산천을 떠도는 도망자가 되었다.
무공이 제거된 네 아버지는 그들과 대결할 힘이 없어 신분을 감추고 다른 이름을 사용하여 왔다.
어미는 네 아버지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일신의 내공을 이용한 삼매진화(三昧眞火)로 그 분의 체
내에 잠재해 있는 독(毒)을 태워 오길 수 년, 하나 오행살독공에 어려 있는 오행지독(五行之毒)은 너무나 독해 전부
없앨 수는 없었다. 고작 그 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더욱 이 어미를 가슴아프게 하는 것은 그 분을 치료하다가 이 어미 또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무공을 잃고 만
것이다.
우리는 하늘을 원망했다. 혀를 물고 죽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어미는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널 갖은 것
이다.
우리 부부는 우리가 이루지 못한 백도무림의 재건(再建)과 묵성섬멸(墨城殲滅)의 대업을 널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우리 부부를 저버렸다. 네가 태어나던 날, 우리 부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
다.
세경아, 네 몸에 난 점(點)들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그 점들이 오행지독(五行之毒)이란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네 아버지의 몸을 통해 오행지독의 독기가 이 어미의 몸 속으로 들어와 결국 태아(胎
兒)에게까지 전이(轉移)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더욱 그 독기로 인해 상승무공을 익히는 데 극히 필요한 기경팔맥(奇經八脈) 중 영기혈맥(瑛氣血脈)과 태음교맥(太
陰交脈)이 막혀 내공을 익힐 수 없는 너의 신체를 보고 우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희망을 잃은 우리 부부는 널 키우며 강호를 떠돌아 다녔다. 네가 아이들로부터 점박이란 놀림을 당할 때마다 이 어
미는 가슴이 메어졌단다.
이제 네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이 어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널 떠나는 것이 우리 모자의 마지막 길이란 것을
깨달았다.
묵성의 마졸들은 아직 너의 존재를 모른다. 그러나 이 어미를 알고 있는 자들은 천지에 깔려 있다.
무공을 잃은 이 어미와 함께 네가 같이 행동하다가는 결국 우리 두 모자도 아버지처럼 놈들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
이 뻔하다.
어미가 놈들의 시선을 유인하겠다. 놈들은 이 어미를 쫓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네 아버지와 어미의 목숨이
니까…
만약 어미가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여도 이 어미는 웃으며 죽을 수 있다. 바로 네가 있기 때문이다.
세경아, 삼 년 전 봉산(鳳山)에서 우연히 만나 우리 가족과 한 달 가량 함께 지낸 당숙부(唐叔父)를 기억하느냐?
당숙부의 이름은 팔비폭풍(八臂暴風) 당천풍(唐天風)이다. 그는 석년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문주로써 무의맹의 제팔
로 중 제사로대장(第四路隊長)이었다.
그는 사천당문의 문주답게 암기술(暗器術)과 용독술(用毒術)의 대가(大家)다. 그 역시 우리처럼 묵성의 추적을 받고
있는 몸이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는 형편인지라 봉산을 떠나올 때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팔비폭풍 당천풍은 떠날 때 이 어미에게 말했다. 오행지독이 극독이긴 하지만 세상엔 음(陰)이 있으면 양(陽)이 있듯
오행지독의 상극 또한 존재한다고.
그것은 모두 세 가지로 그 첫째가 만년금구(萬年金龜)의 타액(唾液:침)이다.
두 번째는 열양지기의 으뜸이라는 태양화리(太陽火鯉)의 내단(內丹)이요,
세 번째는 멀리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신비(神秘)라는 적엽초(赤葉草)란다.
그러나 만년금구와 태양화리는 전설상의 영물인지라 하늘의 은혜가 없는 한 결코 얻을 수 없는 선품(仙品)들이다.그
에 반해 적엽초는 탑리목분지에 자생하는 독초(毒草)다.
팔비폭풍은 봉산을 떠나 너와 네 아버지 몸 속에 어려 있는 오행지독을 해독할 수 있는 적엽초를 찾아 대막으로 향
했다. 이 어미는 천운(天運)을 바라며 남해로 온 것이다.
만년금구를 찾기 위해서 곳곳을 헤매었지만 돌아온 것은 우리 가족의 사별이로구나.
천운이 닿는다면 당숙부는 적엽초를 구했을 것이다.
세경아, 그 분을 찾아라.
그 길만이 너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오행지독을 없애는 길이며 스러진 무의맹을 다시 일으키는 길이니라.
끝으로 네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밝혀서는 안 된다.
둘째, 제아무리 원한이 뼈에 사무쳐도 묵혈대제를 찾아가 무모한 대결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피맺힌 원한을 풀 길은 오직 천문을 여는 길뿐이다. 매월 대보름 날 무산(巫山)에 있는 매화곡(梅花谷)으로
가거라.
매화곡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신선의 형상같이 생긴 동굴이 보일 것이다. 그 동굴 입구에서 자정을 기하여 옷을 모
두 벗고 정좌하여라.
세경아, 이 에미가 너에게 알려준 건곤심결(乾坤心訣)을 기억하고 있지?
신선동부 안에 들어가 정좌를 하고 건곤심결을 외우면 하늘의 문(天門)이 열릴 것이다.
천문은 네 아버지의 사문이다. 네 아버지는 천문의 유전(遺傳)을 얻어 석년 협명을 떨칠 수 있었다.
더욱이 네 아버지는 천문의 정화를 모두 깨우치지 못하셨다. 단 칠성(七成)의 수준을 얻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능히 묵성과 대항할 수 있었느니라.
천문의 정화를 모두 대성하는 날, 너로 인해 세상은 어둠이 거두어질 것이라 이 어미는 믿는다.
네 부친 비천무존(飛天武尊)의 아들답게 굳건히 살아다오.
군자(君子)는 눈으로 더러운 것을 보지 않고, 귀로 난잡한 말을 듣지 않으며, 입으로 악담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
고 사악한 무리들과 어울리지 않는 게 군자이니라.>
"어머님, 흑흑흑…"
얼마 동안 울음을 터뜨린 그는 뼈대있는 집 자손답게 슬픔을 딛고 일어섰다.
(어머님, 아버님. 소자, 분골쇄신되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두 분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는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낡은 절간을 떠나갔다.
제3장
설가촌(薛家村)의 야생소녀(野生少女)
장세경은 걸음 닿는 대로 발을 내딛었다.
아버님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와의 생이별은 어린 그에게는 커다란 시련(試鍊)이었다. 아직도 머리 속엔 아버지의 처
참한 마지막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방황하며 길을 걷다 보니 그만 장세경은 길을 잘못 들어 어느 원시림(原始林)이 잔뜩 우거진 숲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는 굶주림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산 속을 헤매다가 울창한 도화림(桃花林)에 들어섰다. 도화나무 숲에는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가 주
렁주렁 열려 있었다.
"아…복숭아다! 꾸울꺽!"
그는 배고픈 김에 복숭아를 따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복숭아는 꿀맛 같이 달고 맛
있었다.
그는 삽시간에 이십여 개의 복숭아를 먹어 치웠다.
포식을 한 그가 트림을 하며 입가를 쓱쓱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홀연 앙칼진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따먹다니 정말 고약한 사람이군!"
"엉?"
난데없이 들려 온 외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도화나무 숲 속에 한 명의 야인소녀(野人少女)가 서서 예리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야인 소녀는 벌거벗은 몸에 짐승 가죽을 이불같이 덮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야성미가 넘치는 다소 강인해 보
이는 열두 살 가량의 소녀였다.
장세경은 상대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소녀이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장세경은 멋쩍게 웃으며 황급히 사과를 했다.
"배가 고프던 참이라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어. 미안해. 꼬마 낭자."
야인 소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꼬마 낭자가 아니라 설여옥(薛如玉)이야.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남의 복숭아를 마구 따먹는 게 어딨어."
"미안해, 며칠을 굶었거든…"
"됐어, 이미 먹어 버린 걸 어떻해…헌데 넌 누구니?"
"난 장세경(張世經)이라고 해. 나이는
흑도치세(黑道治世) 백년(百年)
-흑도인(黑道人)!
야망에 불타는 자들! 야망을 위해서는 자신의 혈육마저도 가차없이 베어 버리는 냉혈의 인간들을 일컫어 세상은 흑
도인(黑道人)이라 한다.
무림 이천 년사를 통해 보면 천하제패의 끝없는 야욕을 불태우며 발호 했던 수많은 흑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처절한 패배와 깊고 깊은 좌절의 늪뿐이었다.
흑도(黑道)-
오직 강(强)과 패(覇)만을 숭상하며 타협을 모른 채 자신만을 위하는 배타적인 무리들이다. 그런 그들이 좌절의 늪에
서 헤어나와 전무후무한 대단결(大團結)을 이루었으니…
<묵성(墨城)!>
천하제패라는 대야망을 이루기 위해 전 흑도인들이 대동 단결하여 이룩한 거대한 결맹! 차라리 그것은 하나의 성
(城)이라기보다는 흑도무림의 하늘이라 칭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 검은 하늘은 아홉 개의 기둥 구천혈지(九天血地)와 사십사 개의 철벽 사사혈련(四四血聯)의 담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구천혈지(九天血地).
대륙 십팔만 리를 아홉 등분하여 다스리는 아홉 군데의 거대 마세, 그들을 일컬어 구천혈지라 칭한다.
-사사혈련(四四血聯).
묵성을 떠받들고 있는 사십사 개의 흑도문파의 대동맹을 일컫는 말이다.
구천혈지와 사사혈련을 거느린 채 묵성은 거대한 바람으로 떠올랐고, 그 바람은 끝내 강호무림을 완전히 덮어 버리
고 말았다.
흑도천하(黑道天下)-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떤 때에도 이룩하지 못한 천하제패의 흑도천하가 이루어진 것이다.
흑도치세(黑道治世) 백 년(百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무려 열 번이나 거듭되었건만 묵성의 기세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아니 전보다
더욱 강성해졌다.
그것은 단 한 사람, 위대한 흑도무림의 하늘이라 칭해지는 절대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묵혈대제(墨血大帝) 철자강(鐵玆强)!
대륙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이 시대의 거인. 그는 백만 흑도인들이 하늘처럼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
시대의 절대자(絶代者)이다.
그의 일생에 패배란 없다.
백 년 전, 그에 의해서 흑도무림은 완벽한 결속을 이루었다. 전 대륙에 산재해 있는 흑도무림의 일통(一統)이란 전대
미문의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그 창조의 힘은 곧 검은 폭풍이 되어 강호무림을 잠재워 버리더니 당금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되어 버렸다.
지난 백 년 동안 뜻있는 협의지사(俠義志士)들이 검은 하늘을 베기 위해 검을 들었건만 하늘은 벨 수 없었다.
도전을 용납하되, 힘도 없이 만용(蠻勇)으로 도전하는 것을 절대 용납치 않아 온 절대자.
묵혈대제 철자강!
그는 명실상부한 당금 무림의 하늘이었다.
나신.
불 꺼진 방안으로 스며드는 은빛 월광에 반사되는 여인의 알몸은 실로 아찔했다. 새하얗다 못해 손가락을 대면 하얀
분가루가 만져질 듯한 피부,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몸매였다.
촉촉한 검은 눈망울은 세상을 빨아들일 듯하고, 붉은 앵두를 함북 먹은 듯한 입술은 처절할 정도로 끈끈한 유혹을
뿌린다.
학처럼 긴 목과 둥근 달을 반으로 쪼갠 듯 둥그스름하니 자리한 어깨의 선 아래로 봉긋하니 솟은 두 개의 동산은
또 어떤가?
크지도 작지도 않아 알맞게 토실토실 솟은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아늑한 고향의 품에 안긴 듯한 착각이 일 것만
같다.
파도가 출렁이듯 기묘한 떨림을 보이는 젖가슴 아래 대리석을 깎아놓은 듯한 매끄러운 복부와 그 아래의 미끈한 한
상의 옥주는 가히 조물주의 걸작이라할 만했다.
그리고 지금 그 매끄럽고 탐스런 여체 위에서는 탄력넘치는 건장한 사내의 육체가 부드러우나 강하게 움직이고 있
었다.
사내는 미끈하고 잘 생긴 얼굴에 기골이 훤칠한 미장부(美丈夫)였다. 나이도 힘 깨나 쓸 이십대 초반인 그자는 이
순간 여인의 육체를 정성을 다해 공략하고 있었다.
사내의 집요한 손길에 여인은 애절한 신음 소리를 토했다. 열기를 감당하기 힘든지 연신 뜨거운 신음을 흘리는 여인
의 비단같은 섬섬옥수가 사내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몸 속 깊은 곳을 태우며 번져오르는 뜨거운 본능의 불길에 여인은 학질이라도 걸린 듯 교구를 떨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내는 잔인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여인의 몸을 달구어 갔다. 그리고 여체는 그 손길에 길이 들여져 극도
의 황홀을 맘껏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인이 마침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사내는 그녀의 마지막 요구를 들어주었다.
사내의 입에서 절로 희열이 실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여인도 그 순간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되었다. 내밀한 저 깊은 곳에서 모세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번지는 전율 같은 쾌
감에 여인은 교구를 떨며 허리를 활처럼 꺾었다.
사내가 진퇴를 거듭할 때마다 여인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그녀의 손은 조일 듯 사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급기야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그녀는 사내의 어깨 죽지를 물어뜯으며 전율했다. 그녀의 손톱은 날카롭게 세워져
사내의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여인은 흥분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사지를 꼭꼭 조이며 사내를 포박하듯 달라붙었다. 사내의 몸이 파도를 칠 때마다
여인의 몸 역시 물결처럼 출렁인다.
사내는 눈빛을 붉게 이글거리며 온 정성을 다했다.
헌데 그런 그의 몸 밑에서 연신 꾸물거리는 여인, 몸은 뜨겁고, 붉은 입술을 비집고 연신 단 비음이 흘러나오지만
그녀의 이글거리는 욕화가 담긴 눈동자 저 밑으로는 새파란 독기(毒氣)가 출렁이고 있었으니…
그 눈빛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뱀(蛇)의 그것인 양 끈끈하고 섬칫했다.
열락의 향기가 가득한 정실(靜室) 밖 방문 앞에는 중 년의 부인이 조용히 시립해 있었다.
지금 정실 안에서는 숨 넘어가는 듯 뜨겁고 끈끈한 교성이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후끈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문 밖에 시립해 있는 중 년부인의 얼굴엔 일말의 감정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마치
장님에 귀머거리인 양 그녀는 석상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중 년부인과 열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허리를 숙인 채 서 있는 시녀 차림의 한 소녀의 얼굴은 그와는
상반되었다.
고개를 숙였으나 시녀의 귀는 토끼 귀처럼 쫑긋 세워진 채 정실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락의 교성에 귀를 기울이
기 바빴다.
시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져 있었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었고, 하체의 어딘가가
근질근질하고 짜릿한 전율로 달아올랐다.
만약 곁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중 년부인 빙화냉모(氷花冷母)가 없었다면 시녀는 벌써 사
내를 찾아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시녀를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곳을 떠나면 안 될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였다.
돌연 요요한 몸매를 흔들며 삼십대의 미부 하나가 회랑(回廊:복도)을 달려오듯 걸어왔다.
그 미부를 본 중 년부인 빙화냉모(氷花冷母)의 미간이 차갑게 좁혀졌다.
"수라염요 예미향! 저 계집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흑후(黑后)께서 미안공(美顔功)을 수련하고 계시고 있는 이때는 대
제(大帝)님조차 접근치 못한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이 순간 수라염요 예미향이라 불린 미부는 벌써 중 년부인 빙화냉모 앞에 당도해 있었다.
-수라염요(修羅艶妖) 예미향(藝美香).
아름다움 하나만으로 천하를 농락했던 희대의 마녀다. 겉으로 보기엔 삼십대로 보이지만 기실 그녀의 나이는 백 살
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는 어렸을 적에 복용한 주안실과(駐顔實果)와 섭정술(攝精術)로 사내의 정기를 흡취해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당금 무림을 지배하고 있는 묵성(墨城)의 아홉 기둥 구천혈지(九天血地) 중
환락교(歡樂敎)의 교주라는 점이다.
다가온 수라염요를 향해 시녀가 허리를 굽혔다.
"천녀가 환락교주님을 뵈옵니다."
그러자 미부, 수라염요 예미향은 그녀를 향해 요사하게 눈읏음을 치며 고개를 까닥였다.
"호호호, 앵란아! 눈가에 탕기가 자르르 하는 걸 보니 너도 이젠 제법 사내 맛을 아는가 보구나."
"…"
수라염요의 말에 시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시녀에세서 시선을 뗀 수라염요는 차가운 신색의 빙화냉모(氷花冷母)에게 가볍게 목례를 취해 보였다.
"호호호, 빙화냉모님, 그 동안 안색이 더 차가워졌군요? 겨울이 벌써 오려나?"
"예미향,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지금 네 년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아느냐?"
빙화냉모가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수라염요 예미향의 요염한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알지요, 왜 모르겠어요? 흑후께서는 지금 미안공을 연공하고 계시지 않나요? 흑후의 연공 때에는 그 누구도 얼씬치
못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어요? 허나…"
"허나…?"
"호호호, 사안이 워낙 중대한지라 이렇게 죽을 각오하고 왔으니 어서 흑후님께 기별이나 전해 줘요."
"이 년이…"
찰라 싸늘한 중 년부인의 얼굴에 얼음장같은 한막(寒幕)이 한 겹 더 깔렸다.
그러나 수라염요는 전혀 두려운 기색이 아니었다.
수라염요의 그러한 기색에 중 년부인은 한 줄기 의아심을 느껴야만 했다.
(저 계집이 감히 내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중대한 일로 달려온 것이 분명하다.)
평소라면 수라염요는 중 년부인 앞에서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지 못한다. 수라염요가 천하에 산재되어 있는 묵성 막
하 구천혈지 중 환락교의 교주라지만 중 년부인의 위치는 그녀보다 한 단계 높기 때문이다.
-빙화냉모(氷花冷母).
그녀는 천하 흑도인들의 여왕(女王)으로 불리는 흑후(黑后)의 그림자같은 존재다. 게다가 그녀의 무공은 이미 화경에
달해 있어 묵성내의 서열 이십 위 안에 드는 초강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 앞에서 수라염요 예미향이 빳빳이 고개
를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을 빙화냉모는 상기한 것이다.
그러나 천성이 그러한 듯 빙화냉모는 싸늘한 어조로 수라염요를 쏘아 부쳤다.
"예미향, 흑후님의 연공을 방해할 수 없다. 나에게 말하면 연공이 끝나는 즉시 보고 올리겠다."
빙화냉모의 말에 수라염요는 그럴 수 없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데…"
그러면서 수라염요는 귀를 쫑긋 세우며 정실 안의 동태를 살폈다.
정실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이러다간 날이 새겠는데…"
수라염요는 어깨를 추스르며 서성였다.
이 때였다. 돌연 정실 안에서 목구멍으로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역하게 들려 왔다.
"끄르륵…꺼억!"
순간 석상 마냥 서 있던 빙화냉모가 시녀를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치워라!"
"예."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는 정실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잠시후, 시녀는 조금 전까지 여인의 몸 위에서 용을 쓰던 사내를 개 끌다시피 끌고 방 밖으로 나왔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시녀에 의해 끌려나온 사내의 몰골을 보라.
그는 본래 매끈한 동안(童顔)에 건장한 체구를 지녔었다.
그러나 지금은 폭삭 늙은 할아버지마냥 피부가 까실까실함은 물론 피골이 상접하지 않은가. 눈동자의 초점은 풀려
있었다. 탱탱하게 근육 잡힌 몸엔 검은 버짐이 버석마냥 피어 있었다. 단 한순간에 수십 년이 늙어 버린 노쇠현상이
있다면 바로 이러하리라.
사내를 힐끗 본 수라염요의 눈에 기광이 일렁였다.
"어머! 흑후님의 연공이 거의 칠성(七成) 수준에 달했군요."
빙화냉모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내를 끌고나온 시녀에게 싸늘한 어조로 명령했다.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도록 조심하라."
"예."
축 늘어진 사내를 질질 끌고 사라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보며 빙화냉모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위대하신 흑후님을 안았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이다."
이어 그녀는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흥! 제깐 년이 총단에 있다고 날 무시하지만 두고 보라지…언젠가는 빙화, 네 년은 물론 흑후까지 내 발밑에 둘 것
이다.)
내심 중얼거리며 표독스러운 빛을 발하는 수라염요 예미향은 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이때 빙화냉모가 다시 나오며 싸늘히 말했다.
"흑후께서 찾으신다."
"고마워요, 호호호…"
수라염요는 엉덩이를 살랑이며 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빙화냉모의 눈에서 새파란 독광이 번뜩였다.
"미친 년…"
빙화냉모는 차가운 눈빛을 발하며 몸을 돌렸다. 회랑을 조용히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은 칙칙했다.
여인은 속이 훤히 비치는 나삼을 가볍게 걸친 채 커다란 침상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다리를 쭉 곧게 뻗고 상
체를 세워 팔 하나로 고정시킨 채 끈끈한 땀이 자르르 흐르는 몸뚱이를 식히는 그 모습은 사내라면 절로 숨이 가빠
질 것이다.
더욱이 잘 익은 사과를 그것보다 더 붉고 윤기가 흐르는 붉은 입술을 벌려 하얀 치아로 한 잎 베어먹는 모습은 짙
은 유혹을 흩뿌렸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내 마음이 떨리다니, 흑후 앞에서는 수라염요라는 이름이 무색하구나.)
수라염요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요요로움이 초라해지는 것을 느끼며 묘한 질투심을 받았다. 그것은 아름
다움을 추구하는 여인들만이 갖는 질투다.
본래 수라염요는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그 즉시 그녀의 얼굴을 망가뜨려 버리는 악녀다.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여인을 두 눈뜨고 보지 못하는 지독한 악녀가 그녀인 것이다.
그러나 수라염요는 감히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을 향해 살수를 전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이
땅을 지배하는 묵성의 여주인(女主人)이기 때문이다.
-흑후(黑后)!
본래 지난 백 년 동안 이 땅을 지배해 온 묵성의 성주 묵혈대제(墨血大帝) 철자강에게는 네 명의 부인이 있다.
그 중 가장 나중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앞선 세 명의 부인들보다 더욱 강성한 세력으로 묵성의 안방 주인 자리를 차
지한 여인이 바로 흑후다.
묵혈대제는 천하 경영에 있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흑후가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녀의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따라 강호의 운명이 결정되어 온 것이다.
지금 수라염요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흑후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본교의 광주분타인 교향원(嬌香院)의 보고에 의하면 십오 년 전 실종된 장경욱(張慶旭)과 놈의 마누라인 진봉련(秦
鳳蓮)과 닮은 중 년 부부가 광주 인근 등해(藤海)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
사각사각…
흑후는 말없이 사과를 베어 물 뿐이다.
수라염요는 계속 말을 했다.
"속하는 그 보고를 받고 신중을 기하기 위해 분타에 장경욱과 진봉련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초상화와 함께 지령을
내렸습니다. 오늘 오전에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분명 원앙쌍백이 등해에 숨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
사각…사각…
흑후는 말없이 사과만 깨물어 먹었다.
수라염요는 등골에 식은땀이 자르르 흘렀다.
(흑후께서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는 것은 나의 대안을 물으시는 것이다. 어떻게 처리한다. 만약 내가 흑후라면…)
수라염요는 일시 주저하다가 입을 연다.
"속하의 생각으로는 삭초제근(削草制根)! 비록 그가 십오 년 전 본성에 대항하다가 살황독존(薩荒毒尊)의 오행살독공
(五行殺毒功)에 격중되어 내공을 잃은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지혜는 하늘도 희롱할 정도로 깊고 높은지라 그가 살
아 있다는 것을 백도놈들이 안다면 제이(第二)의 무의맹(武義盟)이 탄생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법, 그가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본성엔 큰 장벽이니 이 기회에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되옵니다."
"…"
사각…사각…
"또한 그를 죽임으로써 본성의 무서움을 강호인들에게 재인식시켜 감히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일벌백계(一罰
百戒)하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수라염요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살(殺)! 추호의 망설임도 필요치 않는 죽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흑후가 돌연 깔깔 웃었다.
"호호호, 예미향,"
"예."
"지금 그 일 때문에 이곳에 왔느냐?"
"장경욱은 십오 년 전 반천세력(反天勢力)인 무의맹(武義盟)을 결성한 자입니다. 그런 자가 살아있다는 것을 백도인
들이 알게 된다면…"
"호호호! 장경욱? 그가 그토록 무서운 강자였단 말이냐?"
"그게…"
"예미향, 장경욱과 무의맹은 십오 년 전 본성에 대항하다가 패했다. 일개 패장(敗將)을 두려워해서야 어디 천하를 다
스릴 수 있겠느냐."
흑후는 야릿한 눈길로 수라염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길을 접한 수라염요는 일시 독아(毒牙)를 드러낸 채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毒蛇) 한 마리가 눈앞에
있는 듯한 전율을 받았다.
수라염요는 다급히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속하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흑후는 반쯤 먹다 남은 사과를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몸을 반듯이 뉘였다.
"자야겠으니 물러가라."
"…!"
수라염요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릎걸음으로 뒤로 걸어갔다.
수라염요는 황망히 정실을 벗어났다. 그녀는 문을 닫자마자 아미를 찡그렸다.
"장경욱이라면 본 천의 척살자 명단에 올라 있는 자이거늘 어이해 흑후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본단 말인가? 혹시그
소문이 사실일까?"
불현듯 수라염요는 이십여 년 전, 강호에 떠돌았던 한 가지 소문을 뇌리에 떠올렸다.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감히 묵성의 흑도천하에 정면으로 맞서던 한 명의 젊은 협웅이 강호에 등장했다.
-비천검협(飛天劍俠) 장경욱(張慶旭).
그는 빼어난 용모와 화경에 달한 무공, 당대 제일의 석학이라는 청송대학사(靑松大學士)로부터 학문을 사사받아 그
지혜로움이 가히 대해와도 같은 청 년 고수였다.
그런 그가 정면으로 묵성(墨城)에 대항한 것이다.
그는 뜻이 맞는 지사들과 손을 잡고 무의맹(武義盟)을 창설했다. 최초의 시작은 미흡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
이처럼 무의맹의 세력은 불어만 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의맹은 존재는 묵성에 있어선 눈에 가시와도 같을 지경이었다.
묵성의 전위조직인 사사혈련의 전 고수들이 혈안이 되어 무의맹을 섬멸하려고 하였지만 장경욱의 신출귀몰하는 병
략과 전술에 번번이 패배만 거듭했다.
그 결과 장경욱은 강호인들로부터 비천무존(飛天武尊)이라는 영예로운 아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상한 소문이 강호에 퍼지기 시작했다.
-흑화(黑花) 섭미림(燮美林)!
묵성 사사혈련에 속해 있는 흑상문(黑象門)의 금지옥엽인 흑화 섭미림과 무의맹의 비천무존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염문(艶聞)이었다.
백도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묵성의 흑화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는 소문은 강
호에 파다했었다.
실로 모순(矛盾)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비천검협 장경욱은 결코 그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고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해명치도 않았다. 그저 그
소문에 대해 물으면 그저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하여 더더욱 그 소문은 사실로 강호 전역에 염병처럼 번져 갔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문이 거짓된 낭설이었음이 한 여인의 의해 밝혀졌다.
-옥봉선희(玉鳳善姬) 진봉련(秦鳳蓮)
옥봉선희는 아미(峨嵋)의 속자제자로 비천무존과 함께 무의맹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강호인들은 그들 두 사람을 원
앙쌍백(鴛鴦雙白)이라 불렀다.
그녀는 평소 흠모해 온 장경욱이 괴이한 소문으로 입장이 난처해지자 그 소문의 진원지를 은밀히 조사하고 다녔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그 소문이 흑화 섭미림 자신이 강호에 유포시킨 소문임을 알게 되었다.
소문이 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장경욱은 복우산(伏牛山)을 지나다가 신음하는 소녀를 구한 적이 있었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열여덟 가량의 그 소
녀는 전설 속에 나오는 날아다니는 뱀, 삼목비사(三目飛蛇)에 물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삼목비사는 맹독(猛毒)을 지니고 있었다. 이놈에게 물리게 되면 해독하는 길은 단 한 길밖에 없다. 삼목비사를 죽여
뇌(腦)속에 있는 내단(內丹)을 복용하는 길만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장경욱은 삼목비사를 죽여 어렵지 않게 내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즉시 신음하는 소녀에게 내단을 복용시키려
고 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곧 죽을 듯 신음하던 소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게 미혼향(迷魂香)을 흩뿌리는 것이 아닌가!
흠칫 놀라 숨을 막았지만 너무나 창졸지간에 일어난 기습인지라 장경욱은 미혼향에 중독되고 말았다.
미혼향엔 산공독(散功毒)과 춘독(春毒)이 섞여 있었다. 장경욱은 내공이 흩어지고, 욕정까지 치솟는 위기에 직면했다.
더욱이 소녀는 옷을 벗어 알몸으로 그에게 안겨 오기까지 했으니…
허나 장경욱은 초절정고수였다. 그는 흩어지는 내공을 가까스로 끌어 모아 육탄공격을 해 오는 소녀에게 일장을 발
출하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훗날 그 소녀가 흑상문의 흑화 섭미림이란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고 고소(苦笑)했었다.
헌데 그런 첫대면을 가진 그녀가 이번에는 엉뚱한 소문으로 그를 곤경에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흑화의 계략은 물
론 그를 백도무림으로부터 고립시키는 데에 있었다.
옥봉선희 진봉련은 음모의 전모를 알아내고는 흑화를 사로잡았다. 진봉련의 무공은 비천무존 장경욱과 비견해도 결
코 손색이 없을 정도로 초절정수준이다. 흑화 섭미림이 그녀에게 잡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헌데 흑화 섭미림이 무의맹에 압송되어 오던 바로 그날 밤의 일이다. 무의맹은 사사혈련의 대대적인 기습으로 인해
멸화를 당하고 만다.
흑화 섭미림은 일종의 미끼였다. 묵성에서 강호를 이잡듯이 뒤져도 알아내지 못한 무의맹의 총단을 찾아내기 위해
그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미끼로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쓴 것이다.
비천무존 장경욱은 살황독존의 독공에 당해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무의맹은 해체되었다.
하나 그 혈겁의 와중에서 진봉련은 구사일생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실책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물은 엎어진 뒤, 진봉련은 묵성으로 압송되어 가는 장경욱을 구출하기로 작
정했다. 그가 있어야지만 새롭게 무의맹을 다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몇몇 지사들의 도움으로 압송되어 가는 장경욱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장경욱과 진봉련은 강호에서 사라졌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무의맹이 해체된지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는 의혹이 있
었으니…
그것은 흑화 섭미림의 예기치 않은 행동 탓이다.
당시 그녀는 사사혈련 고수들이 비천무존을 죽이려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아울러 그를 묵성으로 압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나이가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흑화 섭미림의 계략 덕분에 무의맹을 섬멸할 수 있었고, 또한 흑상문(黑喪門)
이 그 공로로 구천혈지 중 한 곳이 되자 사사혈련의 고수들은 그녀의 말에 찬성을 했다.
어차피 살황독존의 오행살독공에 적중된 장경욱은 단전(丹田)이 파괴되어 무공을 영원히 상실한 폐인이 되었다. 그
런 그를 당장 죽이나, 묵성으로 압송해 간 후 공식 재판을 거쳐 죽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압송을 맡았던 흑상문 제자들이 너무나도 맥없이 진봉련 등에게 당해 장경욱을 빼앗긴 것이다.
흑화 섭미림은 설마하니 진봉련등이 그를 구출하려 했을 줄 몰랐다고 크게 어이없어 하고, 사사혈련 사람들에게 변
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사사혈련 고수들의 눈길을 왠지 미더웠다.
악마의 지혜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항간에는 그녀가 거짓이 아닌 진실로 장경욱의 영웅적인 기상에 반해 그를 사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
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진봉련이 구출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일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 사라졌다.
흑화 섭미림! 그녀가 묵혈대제 철자강의 네 번째 부인이 된 때문이다.
수라염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본 천의 척살자 명단에 올라 있는 장경욱과 진봉련에 대한 수색이 단 한 번도 있지 않
았다. 다른 자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추적조가 있건만…그럼 소문대로 흑후의 마음 속에 아직도 장경욱에 대한 연심
(戀心)이 있단 말인가?"
그 때였다. 돌연 음침한 음성 하나가 그녀의 귓전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죽고 싶으냐? 예미향?"
무미건조하다 못해 말의 억양도, 높낮이도 전혀 없는 음성이었다.
"헉! 혈불(血佛)!"
수라염요는 혈불이란 말을 내뱉자마자 황급히 몸을 날려 회랑을 달려나갔다.
-혈불(血佛)!
그의 칼날은 절대 실수가 없었으며, 그는 묵성의 신비한 암살조직인 묵혈영(墨血影)의 대주(隊主)다.
검은 악마의 손(墨血魔手)-!
살인집행자(殺人執行者)-!
악마판관(惡魔判官)-!
이런 공포스런 악명으로 불려지는 묵혈영의 살수들은 묵성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들은 물론 내부의 인물일지라도 묵
성의 율법을 어긴 자의 목숨을 어김없이 끊어 내는 죽음의 판관들이다.
그들의 대장인 혈불(血佛)의 출현에 수라염요는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두려움을 지닌 채 회랑을 달렸다.
그저 목소리 하나만으로 구천혈지 중 한 곳을 담당하는 환락교주인 수라염요의 꼬랑지를 내리게 하는 공포적 존재,
그것이 바로 묵혈영인 것이다.
수라염요는 달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불이 왜 나타났지?)
그녀로서는 돌연한 혈불의 출현이 크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곧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잊어버리자. 난 보고를 했으니까 흑후님이 알아서 할 것이다. 난 그분의 명에만 따르면 된다.)
수라염요는 밤을 도와 몸을 날렸다.
이곳은 묵성 내의 흑성전(黑聖殿). 묵혈대제 철자강의 네 번째 부인인 흑후(黑后) 섭미림이란 희대의 요부가 머무는
곳이다.
제2장
거인(巨人)의 허무한 죽음
-등해(藤海).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광주(廣州) 인근의 바다다.
남쪽으로 멀리 끝없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긴 백사장과 파도에 씻겨 둥글둥글한 바위가 양쪽에 있는 등해에는
작은 어촌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영가촌(永家村)!
이 어촌에는 인가라고는 고작 스무 채 가량이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고깃배로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얀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모래사장에는 지금 한 명의 중년부인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아까부터 석상같이 서 있었다.
"…"
중년부인은 일신에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 평범한 어부(漁夫)의 아내같이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중년부인은 어부의 아내로 보기에는 아까운 용모였다. 비록 눈가에 잔주름이 지고 바닷바람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살결이 매끄럽지는 못하지만 붓으로 그린 듯 가는 눈썹에 호수같이 맑은 눈동자, 오똑 솟은 콧날
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인이었다.
게다가 양미간 사이에 드리워진 그늘은 그녀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달이 보고 구름 속으로 숨고,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만치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는 중년부인은 수심(愁心)
이 잔뜩 드리워진 얼굴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열두어 살 가량된 소년이 백사장 저쪽에서 나타났다.
소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울며 아름다운 중년부인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엄마! 엄마!"
보아하니 소년은 중년부인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소년의 외침 소리를 듣자 중년부인은 황급히 상념을 거두고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경(世經)아, 왜 그러느냐?"
소년은 웃옷을 홀랑 벗은 차림이었다.
소년은 자신의 온 몸 군데군데에 난 푸르스름한 반점을 가리키며 울었다. 그러고 보니 소년의 드러난 상체엔 보기
흉한 푸르스름한 반점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젖소였고, 점박이 바둑이였다.
"애들이 나더러 점박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엄마, 다른 애들은 몸이 하얗고 점이 없는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몸이
푸르딩딩하며 점이 많아요? 이 점 좀 없애 주세요."
"…"
이 말에 중 년부인의 안색이 몹시 착잡하게 변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곧 몸을 숙여 소년을 껴안
았다.
"세경야, 너는 태어날 때부터 점이 많았단다. 한 번 생기면 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무 떼쓰지 말아라. 점이 많다고
창피하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다. 큰 돼지가 새끼를 날때 보렴. 돼지 새끼들의 털 색깔이 제각기 다르지 않니? 그것
처럼 사람도 점이 있는 사람과 점이 없는 사람이 있는 거란다."
"하지만 애들이 나만 보면 점박이라고 놀려대서 창피해 죽겠어요. 그러니 우리 다른 곳으로 이사가요. 예…"
중년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다. 네 뜻대로 해주마."
"아이 좋아라."
소년은 깡충깡충 뛰며 좋아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이번에 이사를 가면 헤엄을 칠 때에 절대 옷을 홀랑 벗지 말아야지…그러면 애들이 내가 점박이라는 것을 모르겠
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는 미약한 햇살을 받으며 모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날 밤, 중년부인은 병약한 남편과 나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어촌을 떠났다. 중년부인의 병약한 남편은 오랜 병마
(病魔)에 시달린 듯 안색이 백짓장같이 창백했다.
그들이 밤을 도와 어촌을 떠나 널찍한 관도에 들어섰을 때다. 멀리서 네 필의 준마가 질주해 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말에 탄 사람들의 용모는 거리가 멀어 잘 알 수 없었으나 등위로 장검 자루가 삐죽이 솟아 나와 무림인들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중년부인은 무림인들 일행을 보자 안색이 해쓱해졌다.
(무림인들과 마주치면 좋지 않다. 일단 피하자.)
그녀는 황급히 병약한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근처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숲 속에 몸을 숨긴 채 지나가는 무림인들을 보며 눈에 신광을 번뜩거렸다.
두두두…
이윽고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네 필의 인마가 그들이 숨은 관도 옆 숲길을 스쳐 지나갔다. 중년부인의 얼굴에 안
도의 빛이 스쳐 지났다.
(다행히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중년부인은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다시 관도로 나왔다.
한데, 방금 관도 저편으로 사라졌던 무림인들의 준마가 방향을 돌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달려오는 것이 아닌
가?
중년부인은 당황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여보, 저들이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에요."
"그렇구려."
중년부인은 급히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말을 탄 무림인들은 이미 지척까지 달려왔다.
히이잉!
말을 탄 무림인 중 얼굴에 분(粉)을 바른 것같이 하얀 자가 말머리를 낚아채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눈 사이가 좁고
입술이 얇은 것으로 미루어 성격이 극히 음침한 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중년부인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그러는 그의 눈가엔 음침한 기운이 가득했다.
"부인은 아름답고 젊은데 어찌하여 저런 송장같은 자를 데리고 다니시오?"
이 말에 중년부인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잘났어도 내 남편이고, 못났어도 내 남편이니 귀하께서는 무례한 언동을 삼가해 주시오."
중년부인은 남편과 아들을 부축해 떠나려 했다.
"잠깐!"
얼굴이 하얀 사나이가 말을 몰아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부인은 허름한 옷차림에 비해 말솜씨가 제법이구려. 흐흐흐…"
그와 동시에 그의 일행 중 텁석부리 사나이 하나가 마상(馬上)에서 몸을 번뜩였다.
휙-!
그는 날쌘 제비처럼 몸을 날려 병약한 중년인의 등덜미를 낚아챘다.
"흐윽!"
병마에 시달려 심신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중년인은 덥석부리 사내의 손에 목덜미와 옷이 잡혀 개 끌려가듯 사
내 쪽으로 끌려갔다.
덥석부리 사내는 음흉한 웃음으로 얼굴이 하얀 자에게 말했다.
"흐흐흐…둘째야, 내가 이자를 끌고 한쪽에 피해 있겠으니, 그 고귀한 부인과 재미 좀 보렴."
이때, 점박이 소년이 자기 아버지의 등덜미를 낚아채고 있는 텁석부리 사나이에게 달려가며 앙칼지게 외쳤다.
"왜 우리 부모님을 못 살게 구는 거예요?"
소년은 다짜고짜 아버지를 낚아채고 있는 텁석부리 사나이의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찼다.
퍽!
"아얏!"
텁석부리 사나이는 불시에 급소가 차이자 절로 중 년인에게서 손을 떼며 자신의 급소를 만졌다.
"이런 발칙한 놈!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말 테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화가 치밀어 올라 안색이 새빨개졌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소년의 뺨을 후려쳐 왔다.
"힘만 세다고 으스대지 마세요!"
소년은 냉소를 날리며 허리를 굽히더니 텁석부리 사나이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 그의 손길을 피했다. 미꾸라지처
럼 날쌘 행동이었다.
이때 뒤쪽에 서 있던 이마에 칼자국이 깊숙이 나 있는 사나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형님들, 어서 길을 떠납시다. 공연히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등해(藤海)에 숨어산다는 장가(張家)놈을 놓칠지
도 모릅니다."
이 말을 듣자 중년 부부는 흠칫 놀라며 전신에 한차례 진동이 일었다.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는 빙긋이 웃었다.
"넷째는 너무 겁이 많아 탈이야. 그 녀석이 우리가 자기를 잡으러 이렇게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한단 말이
냐?"
그러다가 그는 돌연 중 년 부부가 몸을 사시나무 떨 듯하며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보자 매우 의아해했다.
"헌데, 너희들은 왜 그리 몸을 부들부들 떠는 거냐?"
중년부인은 매우 당황해 하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칼자국이 있는 사나이는 중년 부부를 유심히 살펴보며 넘겨짚듯 물었다.
"혹시 너희들…등해에 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소년이 얼른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는 등해에 살다가 애들이 나더러 점박이라고 골려 대는 바람에 이사가고 있는 중이에요."
이 말에 네 사나이는 모두 눈빛이 번쩍했다. 그들은 곧 중년 부부 일가를 포위했다.
텁석부리 사나이는 소년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세경(河世經)이에요."
"하세경?"
덥석부리 사나이의 얼굴에 곧 실망의 기색이 번졌다. 그들이 찾는 자는 장가(張家)였기 때문이다.
덥석부리 사나이는 재차 소년에게 물었다.
"그럼, 네가 살고 있던 등해에 무림인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
"아니오. 우리 동네에는 모두 어부들만 살고 있는 걸요."
"너는 줄곧 등해에서만 살았느냐?"
"아니에요. 애들이 내 몸에 나 있는 푸른 점 때문에 점박이라고 골리자 계속 이사를 다녔어요."
"너희 아버지도 고기잡이를 하느냐?"
"저희 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아무 일도 못해요. 엄마가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들을 팔아서 지금까지 생활했어요."
순진한 소년은 곧이곧대로 얘기했다.
여기까지 말을 들은 순간 텁석부리 사나이의 입가에 징그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흐흐흐…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들이 여기 있었군."
그러더니 돌연 텁석부리 사나이는 안면에 야릇한 빛을 띄우더니 안색이 창백한 중 년인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바로 왕년의 무의맹주였던 장경욱이지?"
번쩍!
검광이 별빛을 받아 푸르스름하니 빛났다.
찰라지간 중년인의 얼굴에 수많은 감정의 빛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곧 중년인은 숨을 길게 들이키더니 비장한
각오를 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 본인이 바로 장경욱이다."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가 괴소를 터뜨렸다.
"꼴 좋구나. 왕년의 산천을 떨게 했던 무의맹주가 이 꼴이라니. 흐흐흐…"
실로 놀라운 일이다.
-비천무존(飛天武尊) 장경욱(張慶旭)!
무의맹(武義盟)을 결성하여 천하를 질타하며 묵성의 아성에 당당히 도전장을 던졌던 일대협걸(一代俠傑). 그런 그가
지금은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는 병자로 전락하여 있지 않은가?
십오 년 전 살황독존(薩荒毒尊)의 오행살독공(五行殺毒功)에 적중되어 무공을 잃더니만 이런 몰골이 되어 있을 줄은
아무도 상상치 못했다.
하나 무공은커녕 부인 진봉련의 부축이 없으면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장경욱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 싸늘한 광채
가 번뜩거렸다.
"너희들은 대관절 누구냐?"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가 으스대며 말을 받았다.
"이 어르신네들은 남황사혈(南荒四血)이시다."
"핫핫핫! 남황사혈이라고…묵혈대제를 떨게 했던 나 장경욱의 최후를 고작 남황사혈 따위에게 맡겨야 한단 말인가,
핫핫핫!"
장경욱은 돌연 광소를 토해냈다. 그의 웃음은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절규(絶叫)였다. 흡사 산중지왕이
던 호랑이가 사냥꾼의 활에 맞아 사경에 헤맬 때 들개들이 으르렁거리며 호랑이를 노리자 평소 하찮게 여긴 들개들
에게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호랑이의 포호와 같이 장경욱의 웃음 또한 그러했다.
-남황사혈(南荒四血)!
사사혈련 중 남만(南灣)에 위치한 사혈갱(死血坑)의 인물들이다. 그들의 수준이 일류급이긴 하지만 어찌 비천무존 장
경욱 앞에서 호기를 부릴 수 있으랴,
하지만 지금의 장경욱은 호미조차 들 힘이 없는 폐인이었다.
이 무렵, 소년은 지금 자기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은 하가(河家)인데
어째서 아버지가 장가(張家)란 말인가?
또 아버지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손에서 바람이 일어나 나무를 뿌리째 뽑아 날아가게 하는 무림인이라니…
소년은 급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피어나 있는 비장한 기운
을 발견하고는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소년 역시 깨
달은 것이다.
이때 얼굴 색이 하얀 사나이가 중년부인에게 음탕한 추파를 보내며 말을 씹어 뱉었다.
"네년이 옥봉선희 진봉련이냐?"
중년부인은 고운 얼굴에 살기를 드러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남황사혈, 너희들은 가던 길을 계속 가야만 했다."
"호오…앙칼진 성격은 여전하군."
하얀 얼굴의 사나이는 비웃음을 입가에 드리우며 진봉련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진봉련, 꿈에서 깨어나라. 지금 너희 목숨은 우리 손아귀에 들어 있다. 나 분면색낭(粉面色狼)의 눈은 그냥 달려 있
는 줄 아느냐! 네년도 장가놈처럼 무공을 상실한 것을 내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느냐? 흐흐흐…"
찰라지간 진봉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렇다! 기실 진봉련 역시 장경욱과 마찬가지로 무공을 상실한 폐인이었다.
남황사혈 중 둘째인 분면색랑은 강호의 일류 고수답게 첫눈에 그녀의 상태를 파악한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무공을 잃었는지 의아했으나 어찌되었건 눈앞에 벌어진 일대 위기를 벗어날 길이 막막했다.
바로 그 순간 남황사혈 중 첫째인 금사자(金獅子)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얘들아, 어서 저것들을 모조리 생포해라."
그러자 나머지 삼혈은 사방에서 장경욱 일가를 향해 덮쳐 왔다.
"흣흣흣, 계집, 넌 내 차지다."
츄류류륙…
색마로 소문이 난 분면색랑은 음침하게도 진봉련의 유근혈(乳根穴)을 노렸다.
"앗!"
진봉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돌렸다.
이 무렵 소년은 부모님들이 자기의 몇 마디로 인해 네 사나이의 공격을 받게 되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년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빠!"
허나 남황사혈은 순식간에 장경욱 일가를 사로잡았다. 장경욱과 진봉련은 무공이 폐지되었으니 강호에 악명이 높은
남황사혈이 이들을 제압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카하하하!"
득의의 웃음을 토하며 금사자가 장경욱의 팔목을 쥐었다.
바로 그 순간 장경욱은 젖먹던 힘을 다해 금사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죽어랏!"
퍼억!
무공이 폐지된 그의 발길질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졸지에 복부를 걷어차인 금사자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
다.
"놈!"
금사자는 눈에 쌍심지를 켜며 성난 야수같이 달려들어 장경욱의 목과 다리를 낚아채고는 그의 등허리를 자신의 무
릎에 대고 꺾었다.
"뼈도 못 추리게 만들겠다!"
우두둑!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장경욱은 몸뚱이가 꺾여졌다.
"커헉!"
비천무존 장경욱. 쓰러진 정혼(正魂)을 일으키고, 강호를 뒤엎은 어둠의 장막을 거두기 위해 열혈의 혼을 다했던 정
의의 불꽃.
그는 눈알을 희번뜩 뒤집은 채 암울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는 파도치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정녕…이 어둠을 거둘 수 없단 말입니까?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이오니까?)
그러나 하늘은 대답이 없었다.
장경욱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죽은 것이다.
"아버지!"
"여보!"
진봉련과 소년은 비통함을 금치 못하여 장경욱의 시신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이 때였다.
삐리리리!
홀연 멀리서 맑은 퉁소 소리가 들려 왔다.
이어 한 명의 비렁뱅이 노인이 유성처럼 날아와 장중에 사뿐히 내려섰다. 남루한 폐포(幣袍)에 까치 둥지를 방불케
하는 봉두난발(蓬頭難髮)을 한 노인은 얼굴이 어린애같이 붉고 호랑이 눈을 지니고 있었다.
비렁뱅이 노인은 대뜸 소리쳤다.
"이런 고약한 것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살상한단 말이냐?"
비렁뱅이 노인이 나타나자 남황사혈은 대뜸 눈알을 부라렸다.
"왠 늙은이가 감히 묵성의 행사에 방해를 놓느냐?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묵성! 오냐, 내 묵성의 종자들이라면 절대 이 땅에 살려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휙! 휙!
비렁뱅이 노인은 다짜고짜 수중의 대나무 퉁소를 떨쳐냈다. 그러자 남황사혈은 맹렬한 경기에 휩싸여 한쪽으로 비켜
섰다.
"웬 개뼈다귀냐?"
비렁뱅이 노인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우뢰와 같이 호통쳤다.
"이런, 눈이 삔 녀석들을 보았나? 네 녀석은 개뼈다귀가 말을 하는 것을 보았느냐? 노부를 개뼈다귀라고 부르는 것
을 보니 네놈들이 개뼈다귀인 모양이구나."
남황사혈 중 셋째인 무영구혼(無影拘魂)은 상대방이 욕을 하자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발칙한 늙은이! 목을 확 비틀어 버리겠다."
무영구혼은 기합을 내지르며 비렁뱅이 노인에게 덮쳐 가며 다섯 자 가량의 철봉(鐵棒)을 휘둘렀다.
"얍!"
비렁뱅이 노인은 빙그레 웃더니 수중의 길이가 한 자 남짓 되는 대나무 퉁소를 떨쳐 내 상대방의 철봉을 막았다.
땅!
맑은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어이없게도 무영구혼의 철봉은 그의 대나무 퉁소에 의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 일
초의 대결로 두 사람의 공력차가 드러났다.
금사자는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즉시 외쳤다.
"셋째는 뒤로 물러나라! 내가 직접 나서겠다."
무영구혼은 반동강의 철봉을 움켜쥔 채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 금사자가 어깨를 번뜩이며 비렁뱅이 노인에게 덮쳐
가며 사자포효권(獅子咆哮拳)을 격출해냈다.
꽈르르릉…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권격(拳擊)이 무섭게 비렁뱅이 노인에게 쏘아져 갔다.
그러자 비렁뱅이 노인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너도 별 수 없을 테니 너희들 네 명이 함께 덤벼라! 하하하…"
찰라지간 남황사혈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늙은이, 죽어랏!"
"만리사영(萬里死影)!"
쐐애애액---
번쩍이는 검광과 신출귀몰한 신형, 귀청을 찢을 듯한 폭갈 등 삽시간에 장내는 싸움판으로 변했다.
이때 진봉련의 귓가에 전음술(傳音術)이 들려 왔다.
"부인, 내가 이자들과 맞서 싸울 테니 그 어린애를 데리고 어서 이곳을 피하시오."
진봉련은 비렁뱅이 노인이 한 말임을 알고 즉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전음이 다시 들려 왔다.
"지금은 지체할 겨를이 없소, 남황사혈만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묵성 사사혈련의 고수들이 혈안이 되어 부인
과 비천무존을 찾고 있소."
(앗! 그럼 우연히 놈들과 마주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우연히 놈들이 하는 말을 듣고 달려왔지만 한 발 늦어 일대거인이 너무나도 어이없어 죽음을 당해 노부는 마음이
아프오, 부인,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오, 일단 부인과 영식만이라도 살고 봐야 할 것이 아니오. 어서 피하시오. 놈
들이 더 몰려온다면 노부도 감당할 수 없소."
"하지만 은공(恩功)의 존함이라도…"
"이름이 뭐가 중요하단 말이오, 어서 피하시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어서!"
(고맙습니다. 은공…)
진봉련은 비렁뱅이 노인에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는 아들의 손을 잡은 채 내달렸다.
그들 모자가 도망치자 남황사혈은 비렁뱅이 노인이 꾀를 쓴 것을 알고 대노했다.
그들은 표적을 돌려 진봉련 모자를 추적하려고 했다.
금사자가 무영구혼에게 외쳤다.
"셋째, 년놈들을 잡아랏!"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비렁뱅이 노인이 막 움직이려는 무영구혼을 공격했다.
"핫핫핫…어딜 가려느냐? 나랑 놀자."
비렁뱅이 노인은 걸직하게 웃으며 남황사혈을 막아섰다.
노인의 수법은 귀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민첩하고 날카로워 남황사혈은 비렁뱅이 노인을 밀치고 진봉련 모자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진봉련과 소년은 이미 멀리 도망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진봉련과 소년은 날이 샐 무렵 어느 이름 모를 깊은 험산준령에 당도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겨우 한숨을 돌리며 쉴 수가 있었다.
진봉련은 비렁뱅이 노인의 도움으로 남황사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남편이 금사자의
손에 산산조각이 난 것을 생각하니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나 슬퍼만 할 수는 없다.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 복수를 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입술을 악물며 길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그들 모자는 산중에서 거의 쓰러져 가는 절(寺)을 발견하고 그곳에 가서 쉬기로 했다.
폐사(廢寺)는 오랫동안 인적이 끊겼는지 불당(佛堂)은 먼지가 한 치 가량이나 뽀얗게 쌓여 있었다.
진봉련은 먼지를 치우고 마른 풀잎을 주워 다가 푹신푹신하게 깔은 후 아들과 나란히 누웠다.
소년은 워낙 피곤했던지라 눕자마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은 추위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한데 곁을 보니 어머님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피를 보러 가신 것일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소년은 다시 벌렁 누웠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랐다. 자신의 손목에 이상한 것이 묶여져 있
는 것을 느낀 것이다.
순간 소년은 왠지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손목을 바라보았다.
"앗!"
소년의 손목에는 어머니의 것이 분명한 찢겨진 하얀 치맛자락이 묶여져 있었다.
"설…설마…"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풀어 보았다. 찢겨진 하얀 치맛자락엔 피로 쓴 혈서(血書)가 적혀 있었다.
<내 아들 보아라. 이 어미는 널 떠나며 몇 자 적는다.
우선 너의 출신 내력(出身來歷)부터 가르쳐 주겠다. 너는 무의맹주였던 비천무존 장경욱의 유일한 혈육이다. 그리고
이 어미의 이름은 진봉련이다.
또한 너의 본명은 하세경이 아니라 장세경(張世經)이다.
네 아버지는 십오 년 전 강호 무림에 협명을 떨치셨던 무의맹주시다. 비천무존 장경욱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
지금까지 너에게는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십오 년 전 어느날 무의맹은 흑화 섭미림의 꾀임에 풍지 박살나고 네 아
버지는 살황독존의 오행살독공에 중독되어 무공을 잃었다.
천우신조로 묵성으로 압송되어 가던 아버지를 구한 어미는 묵성의 추적을 피해 산천을 떠도는 도망자가 되었다.
무공이 제거된 네 아버지는 그들과 대결할 힘이 없어 신분을 감추고 다른 이름을 사용하여 왔다.
어미는 네 아버지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일신의 내공을 이용한 삼매진화(三昧眞火)로 그 분의 체
내에 잠재해 있는 독(毒)을 태워 오길 수 년, 하나 오행살독공에 어려 있는 오행지독(五行之毒)은 너무나 독해 전부
없앨 수는 없었다. 고작 그 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더욱 이 어미를 가슴아프게 하는 것은 그 분을 치료하다가 이 어미 또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무공을 잃고 만
것이다.
우리는 하늘을 원망했다. 혀를 물고 죽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어미는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널 갖은 것
이다.
우리 부부는 우리가 이루지 못한 백도무림의 재건(再建)과 묵성섬멸(墨城殲滅)의 대업을 널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우리 부부를 저버렸다. 네가 태어나던 날, 우리 부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
다.
세경아, 네 몸에 난 점(點)들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그 점들이 오행지독(五行之毒)이란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네 아버지의 몸을 통해 오행지독의 독기가 이 어미의 몸 속으로 들어와 결국 태아(胎
兒)에게까지 전이(轉移)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더욱 그 독기로 인해 상승무공을 익히는 데 극히 필요한 기경팔맥(奇經八脈) 중 영기혈맥(瑛氣血脈)과 태음교맥(太
陰交脈)이 막혀 내공을 익힐 수 없는 너의 신체를 보고 우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희망을 잃은 우리 부부는 널 키우며 강호를 떠돌아 다녔다. 네가 아이들로부터 점박이란 놀림을 당할 때마다 이 어
미는 가슴이 메어졌단다.
이제 네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이 어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널 떠나는 것이 우리 모자의 마지막 길이란 것을
깨달았다.
묵성의 마졸들은 아직 너의 존재를 모른다. 그러나 이 어미를 알고 있는 자들은 천지에 깔려 있다.
무공을 잃은 이 어미와 함께 네가 같이 행동하다가는 결국 우리 두 모자도 아버지처럼 놈들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
이 뻔하다.
어미가 놈들의 시선을 유인하겠다. 놈들은 이 어미를 쫓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네 아버지와 어미의 목숨이
니까…
만약 어미가 놈들의 손에 죽는다 하여도 이 어미는 웃으며 죽을 수 있다. 바로 네가 있기 때문이다.
세경아, 삼 년 전 봉산(鳳山)에서 우연히 만나 우리 가족과 한 달 가량 함께 지낸 당숙부(唐叔父)를 기억하느냐?
당숙부의 이름은 팔비폭풍(八臂暴風) 당천풍(唐天風)이다. 그는 석년 사천당문(四川唐門)의 문주로써 무의맹의 제팔
로 중 제사로대장(第四路隊長)이었다.
그는 사천당문의 문주답게 암기술(暗器術)과 용독술(用毒術)의 대가(大家)다. 그 역시 우리처럼 묵성의 추적을 받고
있는 몸이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는 형편인지라 봉산을 떠나올 때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팔비폭풍 당천풍은 떠날 때 이 어미에게 말했다. 오행지독이 극독이긴 하지만 세상엔 음(陰)이 있으면 양(陽)이 있듯
오행지독의 상극 또한 존재한다고.
그것은 모두 세 가지로 그 첫째가 만년금구(萬年金龜)의 타액(唾液:침)이다.
두 번째는 열양지기의 으뜸이라는 태양화리(太陽火鯉)의 내단(內丹)이요,
세 번째는 멀리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신비(神秘)라는 적엽초(赤葉草)란다.
그러나 만년금구와 태양화리는 전설상의 영물인지라 하늘의 은혜가 없는 한 결코 얻을 수 없는 선품(仙品)들이다.그
에 반해 적엽초는 탑리목분지에 자생하는 독초(毒草)다.
팔비폭풍은 봉산을 떠나 너와 네 아버지 몸 속에 어려 있는 오행지독을 해독할 수 있는 적엽초를 찾아 대막으로 향
했다. 이 어미는 천운(天運)을 바라며 남해로 온 것이다.
만년금구를 찾기 위해서 곳곳을 헤매었지만 돌아온 것은 우리 가족의 사별이로구나.
천운이 닿는다면 당숙부는 적엽초를 구했을 것이다.
세경아, 그 분을 찾아라.
그 길만이 너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오행지독을 없애는 길이며 스러진 무의맹을 다시 일으키는 길이니라.
끝으로 네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밝혀서는 안 된다.
둘째, 제아무리 원한이 뼈에 사무쳐도 묵혈대제를 찾아가 무모한 대결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피맺힌 원한을 풀 길은 오직 천문을 여는 길뿐이다. 매월 대보름 날 무산(巫山)에 있는 매화곡(梅花谷)으로
가거라.
매화곡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신선의 형상같이 생긴 동굴이 보일 것이다. 그 동굴 입구에서 자정을 기하여 옷을 모
두 벗고 정좌하여라.
세경아, 이 에미가 너에게 알려준 건곤심결(乾坤心訣)을 기억하고 있지?
신선동부 안에 들어가 정좌를 하고 건곤심결을 외우면 하늘의 문(天門)이 열릴 것이다.
천문은 네 아버지의 사문이다. 네 아버지는 천문의 유전(遺傳)을 얻어 석년 협명을 떨칠 수 있었다.
더욱이 네 아버지는 천문의 정화를 모두 깨우치지 못하셨다. 단 칠성(七成)의 수준을 얻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능히 묵성과 대항할 수 있었느니라.
천문의 정화를 모두 대성하는 날, 너로 인해 세상은 어둠이 거두어질 것이라 이 어미는 믿는다.
네 부친 비천무존(飛天武尊)의 아들답게 굳건히 살아다오.
군자(君子)는 눈으로 더러운 것을 보지 않고, 귀로 난잡한 말을 듣지 않으며, 입으로 악담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리
고 사악한 무리들과 어울리지 않는 게 군자이니라.>
"어머님, 흑흑흑…"
얼마 동안 울음을 터뜨린 그는 뼈대있는 집 자손답게 슬픔을 딛고 일어섰다.
(어머님, 아버님. 소자, 분골쇄신되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두 분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는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낡은 절간을 떠나갔다.
제3장
설가촌(薛家村)의 야생소녀(野生少女)
장세경은 걸음 닿는 대로 발을 내딛었다.
아버님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와의 생이별은 어린 그에게는 커다란 시련(試鍊)이었다. 아직도 머리 속엔 아버지의 처
참한 마지막 모습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방황하며 길을 걷다 보니 그만 장세경은 길을 잘못 들어 어느 원시림(原始林)이 잔뜩 우거진 숲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는 굶주림에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먹을 것을 찾아 산 속을 헤매다가 울창한 도화림(桃花林)에 들어섰다. 도화나무 숲에는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가 주
렁주렁 열려 있었다.
"아…복숭아다! 꾸울꺽!"
그는 배고픈 김에 복숭아를 따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복숭아는 꿀맛 같이 달고 맛
있었다.
그는 삽시간에 이십여 개의 복숭아를 먹어 치웠다.
포식을 한 그가 트림을 하며 입가를 쓱쓱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홀연 앙칼진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따먹다니 정말 고약한 사람이군!"
"엉?"
난데없이 들려 온 외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도화나무 숲 속에 한 명의 야인소녀(野人少女)가 서서 예리한 시선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야인 소녀는 벌거벗은 몸에 짐승 가죽을 이불같이 덮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야성미가 넘치는 다소 강인해 보
이는 열두 살 가량의 소녀였다.
장세경은 상대가 자신과 같은 또래의 소녀이자 왠지 마음이 놓였다.
장세경은 멋쩍게 웃으며 황급히 사과를 했다.
"배가 고프던 참이라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어. 미안해. 꼬마 낭자."
야인 소녀는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꼬마 낭자가 아니라 설여옥(薛如玉)이야.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남의 복숭아를 마구 따먹는 게 어딨어."
"미안해, 며칠을 굶었거든…"
"됐어, 이미 먹어 버린 걸 어떻해…헌데 넌 누구니?"
"난 장세경(張世經)이라고 해. 나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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