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룡왕-15
제21장
천년검혼(千年劒魂)을 지닌 여인(女人)
천군봉!
태산제일봉의 이름이었다.
화르르…!
하늘과 가장 가까운 대지를 밟고 서 있는 인물이 있었다.
긴 흑발을 휘날리며,
새하얀 백미를 꿈틀거리고 있는 절대의 미장부,
그의 전신은 육중한 철갑의로 감싸여져 있었고,
새어나와 있는 여인의 피부같이 새하얀 손,
그의 손톱은 피칠을 한 듯 붉었다.
아울러, 그의 우수 중지에는 투명한 유리환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
파라라락!
일 장 길이의 철봉에,
삼 척에 달하는 거대한 깃발이 산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검은 기폭에는 <무적철혈(無敵鐵血)> 네 글자가 웅휘롭게 수놓여져 있었다.
묵광이 번뜩이는 육중한 묵철뇌린갑을 받쳐 입고 있고, 가지런히 흑건으로 묶어 뒤로 넘긴 머릿결이 흩날린다.
그 모습은 그대로 전쟁을 관장하는 전신이었다.
화룡왕 하후미린!
바로 그였다.
"이제… 간다!"
문득, 하후미린은 오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츠으으…!
그런 그의 시선으로 가공할 뇌강이 폭사되고 있었다.
"이제 완전한 힘을 얻었다!"
꽈악!
하후미린은 무적철혈풍을 움켜 쥐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전설과 신화를 부수리라! 오직… 철혈무적신화만이 천추군림하리라!"
쩌--르르르릉!
용의 제왕!
그 철사무적사왕의 포효에 태산 전역이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한데,
"…!"
하후미린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감히 철혈의 권역에서 피를 흘리다니…"
그는 스산한 살기를 폭출시켰다.
그와 함께,
파라락!
그의 우수가 허공을 가르며 기폭이 그대로 빨려들 듯 철봉으로 스며들었다.
스스스…!
줄어들고 있었다.
거대한 무적철혈풍이 삽시간에 일 척의 단봉으로 화해 하후미린의 손 안에 잡힐 정도였다.
이어,
둥실…!
하후미린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쐐애액!
그의 신형은 빛줄기로 화해 산하로 쏘아져 갔다.
차차창!
"아--악!"
"크아--아악!"
도검의 충돌!
허공에 난무하는 검광!
파팟!
휘--익!
선혈이 허공에 무지개를 긋는가 하면, 사지가 잘려져 사방으로 퉁겨나갔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아수라지옥도의 연출!
그것은 아득한 세외선경의 계곡을 혈풍으로 몰아치는 광경이었다.
장원,
그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별원으로, 평소 같으면 세외은사들이 유유자적할 만한 평화가 깃든 곳이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허물어져 나간 담장 사이로 보이는 내부의 상황은 예의 처참경이었으니!
더구나,
그것은 치열한 공방전이 아닌 일방적인 도살극임에랴!
보라!
일단의 혈포몽면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베어져 넘어가는 가냘픈 여인들의 교구!
츠파팟!
"아악!"
섬뜩한 혈광이 공중에 뿌려졌다.
동시에,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녀의 젖무덤이 처참하게 양단되었다.
쿵!
소녀가 나뒹구는 지면,
그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여인들이 떼죽음을 당해 있었다.
목이 반쯤 갈라진 여인,
정수리가 쪼개져 허연 뇌수를 흘리는 여인,
허리가 끊어진 여인,
완전히 양단된 채 반인이 된 여인 등,
아!
그 처참함은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었다.
여인들의 죽음,
그것도 너무도 처참한 죽음,
그것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가벼운 백의경장 차림에,
결코,
그녀들의 검세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그녀들이 지닌 검은 바위도 가를 수 있는 신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상대하는 적은 도검마저도 뚫지 못하는 마마금강신이었으니,
혈포몽면인들!
그들은 완전히 피에 굶주린 살인귀들이었다.
"크크녠…"
"캘캘… 숫처녀들의 피냄새는 신선해서 좋구나!"
콰르릉!
번---쩍!
그들의 잔악무도한 손속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 악!"
"악!"
살아남은 삼십여 명의 소녀들이 한 명 한 명씩 난자당해 죽어갔다.
무려 백여 명의 혈포인들이 그녀들을 포위하고 있는 터,
"으…!"
"아아!"
동료들의 죽음에 살아남은 소녀들은 절망의 빛에 젖어 들었다.
그들은 뻔히 알고 있었다.
곧 자신도 동료와 같은 운명이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러했다.
"아악!"
절망은 곧 비명으로 화하고 피를 뿌리며 소녀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데,
그들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곳,
그곳에 일남일녀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
대략 삼십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 한 곳 흠잡을 데 없는 용모에 물이 오를대로 오른 몸매,
그녀는 가히 뇌살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더구나,
몸에 꼭 맞는 백색궁장은 그녀에게 우아한 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 네놈이… 비겁하게 암수를…!"
여인은 어떤 암계에 걸린 듯 휘청거리며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백색궁장녀의 앞에는 영준하게 생긴 혈포청년이 있었다.
혈포미청년,
그는 매우 준미한 데다 체격 또한 당당했다.
허나,
미간이 거무스름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매우 음탕하고 영악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흐흐… 단리혜혜! 본 소종사는 사부님으로부터 그대를 취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소."
과연,
외양에서 풍기는 인상과 같이 그의 눈빛은 색마의 그것이었다.
한데, 이 여인.
검모 단리혜혜!
바로 그녀가 아닌가?
천 년의 검혼을 내재한 여인,
천병신비가의 마지막 남은 혈육!
귀수옹 단리황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그녀는 천병신비가를 지키던 백팔검신녀를 이끌고 태산으로 향했다.
허나, 막 태산의 근역에 접어들어 한 채의 폐장원에서 노욕을 풀고 있을 때 저 피에 굶주린 악마의 이리떼들이 덮친 것이었다.
백팔검신녀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태반 이상이 죽은 후였고, 그녀 역시 옥사검왕 혁천위에게 암격을 당한 것이었다.
"으… 네놈을 죽이지 않으면 성을 갈리라!"
단리혜혜는 원독에 찬 음성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혁천위는 도리어 코웃음쳤다.
"하핫… 조심하시오. 환락춘음산(歡樂春淫散)의 묘약은 매우 신통한 성질을 지녔으니."
"으으…!"
단리혜혜는 치를 떨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천하에서 가장 강한 최음제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환락춘음산!
여인,
그것도 정숙함을 생명 이상으로 여기는 여인들에게는 가장 저주스러운 것이 바로 환락춘음산이었다.
한 번 그것에 중독된다면,
천하에 다시 없을 성녀일지라도 최대의 요부로 화하는 극악스런 춘약이 그것이었던 것이었다.
탐화랑군들에겐 무가의 보물!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흡입한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한데,
이 고결한 백의궁장미녀가 바로 그 전율적인 음약에 중독되었으니,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말짱허나 이미 서서히 달구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오직, 그녀만이 지닌 신비잠력에 의해 억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이미 그 뜨거운 열류를 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극강한 내공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 그녀는 점차 음약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절망이다! 원수를 갚기는커녕 원수에게 몸을 더럽히게 될 판이니!)
그녀는 내심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갔다.
반면, 혁천위는 여인의 표정 변화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터였다.
"순순히 본 소종사에게 안기는 것이 어떻소?"
그의 말투는 몹시 능글맞기 짝이 없었다.
"으으…!"
단리혜혜는 분노와 수치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원한 서린 시선은 와중에도 여러 차례 주변을 훑어갔다.
주변에는 자신의 수하이던 여인들의 시체가 자꾸 쌓여갔다.
"아악!"
"으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허나, 지금의 그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공력을 쓴다면 그녀는 음약의 기운에 휩싸여 버리고 말 판국이었다.
(천년제왕검을 펼칠 수만 있다면…)
일촉즉발의 순간에서 그녀는 내심 탄식을 토했다.
그 때,
"흐흐흐…!"
혁천위가 드디어 음침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들었다.
그것을 보자 단리혜혜는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악물었다.
(좋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최후의 방법을…!)
일순,
"으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휘청거렸다.
기어코 음약의 효력이 발동한 것이었다.
"흐흐. 때가 되었군."
혁천위는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흐흐… 천하절색이로군. 이렇게 가까이 보니 더욱 아름다운걸?"
혁천위의 손은 거침없이 여인의 허리를 감아갔다.
세류요,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가 그의 한 팔에 조여질 찰나,
여인은 날카롭게 교갈했다.
"죽어랏! 천수참!"
순간,
여인의 섬섬옥수는 그대로 수도가 되어 혁천위를 찔러갔다.
파파팟--!
허나,
"영악한… 이럴 줄 알았지!"
스스슥…!
갑자기 혁천위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흐려졌다.
"앗!"
여인은 대경했다.
그러나,
이미 혁천위의 모습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이… 이젠 틀렸… 으흡…!"
그녀는 자제력을 상실한 채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
여인은 이성조차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아… 아…!"
치밀어 오르는 욕정!
그것은 여인을 뜨겁게 달구어 대고 있었다.
"아아… 나를… 좀…!"
찌--익!
찍!
여인은 미친 듯 몸을 비틀며 자신의 백색궁장을 마구 찢었다.
갈가리 찢겨나가는 틈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뽀얀 나신,
희고도 투명한 속살이 진한 육향을 발산하고 있으니!
"흐흐흐…!"
혁천위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그녀를 보며 욕화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와락!
두 남녀는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허나,
그것은 여인쪽에서 사내에게 일방적으로 급격히 안겨든 것이었다.
"아아… 어서 좀… 어떻게… 아…"
여인은 사내에게 매달려 몸부림쳤다.
"흐흣… 천념검혼을 지닌 검모… 결국은 내 손에 들어왔구나!"
혁천위는 그대로 여인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도살을 벌이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끝내도록 해라!"
그 말에 혈포인들은 알아 들었다는 듯 크게 대꾸했다.
"헤헤… 소종야님! 걱정 마시고 재미나 보십시오!"
"핫하! 수고해라!"
혁천위는 득의만만한 채 여인을 안고는 전각안으로 사라져 갔다.
"아가씨!"
시녀들은 사라져가는 혁천위와 단리혜혜를 보며 비통하게 외쳤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허나,
그 시녀들의 운명이라고 단리혜혜보다 나을 바는 전혀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처참한 죽음과 그 외에,
"헤헤… 제일 몸뚱이가 훌륭한 계집 허나면 즐기기에 충분하다! 나머지 계집들을 빨리 해치우자!"
"낄낄… 좋지!"
변태라고밖엔 할 수 없는 무리들,
그들의 잔혹한 손 속에 다시 불이 붙었다.
번--쩍!
슈--악!
검광의 난무가 개기되었다.
"아--악!"
"아--아--악!"
구천을 울릴 듯 처절한 비명 속에 피보라가 천지를 뒤덮었다.
가냘픈 여인의 죽음은 계속 이어져 갔다.
그리고 잠시 후,
피바다 속에 나뒹구는 시체들 가운데 홀로 남은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십칠 세 정도쯤 되어 보이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
꽃봉오리를 보듯 그녀는 앳되면서도 탐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그 소녀는 두려움과 분노에 가련할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으으… 악마들… 다가오지 마라!"
그녀는 턱을 덜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허나,
혈포인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낄낄… 고 계집 그냥 삼켜도 비린내 하나 안 나겠군!"
"흐흐… 어린 계집이나 천하제이미는 되겠다!"
그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음탕한 말을 주고받으며 소녀를 낚아챘다.
드디어,
찌직!
찌---익!
순식간에 소녀는 의복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말았다.
"아--악! 개만도 못한 놈들!"
그녀는 기를 쓰며 반항하려 했다.
그러나,
"에… 익! 못 참겠다!"
혈포인 중 한 명이 그대로 왈칵 소녀를 덮쳤다.
"크크… 순서를 지켜라!"
"와아! 순서는 무슨 개뼉다귀 같은…!"
"와… 좀 비켜라! 나도 좀 한몫 끼자!"
"아--악!"
굶주린 혈포인들의 아우성과 처절한 비명이 허공 중에 어우러져 메아리쳤다.
한 명의 소녀 위에 한꺼번에 덮치려는 수십 명의 혈포인들,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어이없이 짓밟히려는 순간,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천인공로할 놈들!"
우르르…!
실로 거창한 일갈이 천지를 진동시킨 것은!
과연,
소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또한,
천년검혼을 지닌 검모 단리혜혜!
그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혈포인들은 뇌리가 세차게 울리는 충격에 대경했다.
"어느 놈이냐?"
그들은 즉각 급급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 때,
화르르!
허공으로부터 한 줄기 묵영이 선풍같이 날아 내렸다.
태산 같은 기도!
(강적이다!)
혈의인들은 대뜸 삼엄한 긴장에 휩싸였다.
비록,
음랄하기는 허나 그들 역시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묵영은 그들을 향해 분노의 외침을 발했다.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놈들! 죽이리라!"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슈--우---웅!
콰르릉---!
콰콰쾅!
무시무시한 강기의 폭풍이 혈의인들을 휩쓸어 갔다.
"헉!"
"강적이다! 협공하자!"
혈의인들은 예상 밖의 공세에 일시에 장을 내뻗었다.
츠츠츠!
콰르르릉---!
일 대 삼십의 공격은 허공중에 대격돌을 일으켰다.
콰쾅---!
콰--앙!
"케--액!"
"크--악-!"
"크악!"
허공 중에 피보라가 튀었다.
또한,
단번에 이십여 명이 낙엽처럼 튕겨 나가 즉사를 하고 있었다.
아!
단 한 명에 의해 이십여 명이 그대로 이승을 하직한 것이었다.
"전… 전신이다!"
"이럴 수가!"
의혹과 경악이 어우러진 채 남은 혈의인들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화르르!
묵영은 그 사이에 자리를 옮겨 소녀의 앞으로 내려섰다.
그제야 묵기는 걷히고 그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임풍옥수,
너무도 수려하고 준미한 모습,
그는 바로 하후미린이었다.
"악독한 놈들!"
하후미린은 주위를 쓸어 보며 대노했다.
동시에,
그는 재차 손을 들어 남은 혈의인들을 내치려 했다.
그 순간,
"대협! 우선 아가씨부터요! 아가씨가 위험해요!"
소녀가 다급히 외쳤다.
하후미린은 손을 거두며 그녀에게 물었다.
"소저의 아가씨가 계시었소?"
소녀는 그의 시선을 대하자 고개를 푹 떨구며 자신의 나신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고개짓을 하여 한 곳을 가리켰다.
"저쪽 전각에…!"
"알겠소!"
하후미린은 홱 돌아섰다.
"으으!"
"으…!"
혈포인들은 그가 자시들을 향하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예 사색이 되어 비틀거리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인 양,
하후미린은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후후! 일권을 피하면 살 수 있으리라!"
이어,
스--윽!
그의 쌍수가 허공을 가르고…
"철혈--천붕권--!"
콰르르르르…!
하늘마저 부서뜨릴 듯 엄청난 권강풍이 폭출되고…
"피… 피해… 크--악!"
"캐--애---액!"
"크흑!"
피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대해일을 어찌 편주가 피할 수 있겠는가?
천붕권(天崩拳)!
전신일백강결 중 최극강의 권식이 펼쳐진 것이었다.
빠--가각!
허공중에 피가 튀며 비명이 난무했다.
그 사이, 하후미린은 뒤도 안 돌아 보고 소녀가 가리킨 전각으로 폭사되어 갔다.
하후미린의 동작은 쾌속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두가 한 순간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때마침, 전각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뛰어 나왔다.
그의 뒤로 열려진 방문 사이로 침상에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후미린은 이미 전각 앞에 당도해 있었다.
츠팟!
으스스한 한기가 배인 싸늘한 시선,
그는 혁천위를 노려보았다.
혁천위는 그 눈길을 대하자 흠칫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음탕한 놈! 용서치 않으리라!"
하후미린은 대답대신 즉각 일수를 내뱉았다.
파파파팟---!
마치 낙뢰가 치듯,
가공할 속도의 강기가 곧장 혈포청년을 짓쳐갔다.
"어헉!"
혁천위는 질겁을 하여 몸을 흔들었다.
순간,
그의 신형은 수십 개로 갈라지며 공격을 피해 내려 했다.
허나,
콰릉---!
"크--윽!"
그는 그대로 피를 뿌리며 튕겨졌다.
사실,
혁천위의 보법은 기이하고도 빨랐다.
허나,
그것은 하후미린의 철혈무적수를 앞지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자!)
살심!
하후미린은 그야말로 살심을 가지고 튕겨지는 혈포청년의 뒤를 쫓았다.
화르르---!
동시에,
콰릉--!
파파팍---!
동경철벽이라도 부술만한 강맹한 기류가 혈포청년을 후려쳤다.
철혈무적수(鐵血無敵手)!
그것은 음탕한 자의 최후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초식이었다.
허나, 그 순간,
"으헉!"
경황중에 혁천위는 황망히 우수를 흔들었다.
파파팟!
우우우웅!
갑자기 대기가 요동치며 일순 거대한 아수라형상이 혈포청년을 휩쌌다.
그러나,
콰황!
"크---윽!"
혁천위는 다시 핏줄기를 뿜어내며 나뒹굴었다.
마침내,
"크…! 두고 보자!"
쐐액!
한 무더기의 혈전(血箭) 뒤로 쏘아내며 혁천위는 몸을 날려 도주했다.
"헉!"
전혀 예상 밖으로 면전에 날아든 혈전!
그러나, 하후미린은 가볍게 이를 피하며 지면에 내려섰다.
그 사이, 혁천위는 엄청난 속도로 그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후미린은 혁천위를 뒤쫓기보다는 경악에 차 부르짖었다.
"저 자가 쓴 수법은 바로 전설 속의 천마일겁수(天魔一劫手)와 흡사하지 않은가?"
그는 놀라움에 굳은 듯 꿈쩍 않고 잠시 망연해졌다.
천마일겁수!
그것은 우주오대초인의 제일이며, 영원한 암흑마도의 조종인 마야 나후천의 무공이 아닌가?
마야 나후천!
그에게는 전설적인 지옥십대마공(地獄十大魔功)이 있었다.
지옥십대마공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세의 마공임이 천하에 알려진 터였다.
천마일겁수라 하면 바로 그 지옥십대마공 중 일곱 번째였던 것이다.
하후미린은 그 사실을 철혈전후로부터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헌데, 그것이 어찌 혈포청년의 손에서 시전되었단 말인가?
"…!"
하후미린은 전혀 짚이는 바 없이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한데, 그 때였다.
"대협!"
예의 시녀인 소녀가 찢어진 옷가지로 겨우 몸을 가린 채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녀의 안색은 겁에 질린 채 몹시도 창백해 있었다.
또한, 극심한 공포로 그녀는 전신을 오들오들 떨었다.
"이제 물러갔으니 안심하시오."
하후미린은 돌아서서 그런 소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보다 우선 방 안에 들어가서 소저의 상세를 보아 주시도록 하시오."
"아참!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소녀는 그제야 생각난 듯 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었다.
혼자 남게 되자 하후미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자는 누구일까? 달려오며 천리좌시지청술(千里坐視地聽術)로 듣기는 스스로 소종사라 하였는데…)
그는 두 눈을 빛내며 검미를 모았다.
(더구나 전설적인 마공인 천마일겁수까지 일신에 익히고 있는 것을 보면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한데 일순,
"아가씨!"
다급한 교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어,
"대… 대협! 아가씨가…!"
소녀가 다급히 뛰쳐 나왔다.
"무슨 일이오?"
하후미린이 묻자 소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흑흑. 아가씨가… 이상해요. 저를 막 끌어안고…"
그 말을 듣자 하후미린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그는 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 안,
하후미린에게 확 와닿은 것은 여인의 살냄새였다.
침상 위,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데,
"아으음… 학학. 어서… 어서요… 으음…!"
여인은 마구 몸을 비틀며 침상을 쥐어 뜯는 것이 아닌가?
전신이 욕정으로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채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여인,
일견하기에도, 그녀는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미모의 여인이었다.
"지독한 최음제에 당했군."
하후미린은 안색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최. 최음제…? 그럼 어떡해야 하지요?"
소녀는 순진한 두 눈을 빛내며 하후미린에게 물었다.
하후미린은 다소 어색함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최음제라면… 두 가지가 있소. 일시적으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 그 하나요. 또한 다른 종류는 일단 중독되면… 풀 방법이 단 한 가지…"
하후미린은 말 끝을 흐렸다.
소녀는 남녀의 일에는 문외한이나 대충 그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아… 아가씨는 어느 쪽인가요?"
"잠깐 기다려 보시오."
하후미린은 조심스럽게 여인의 팔목을 잡고 살폈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홱 일그러졌다.
(큰일이군! 지독한 최음제다. 이대로 두면 반각이 못 되어 심맥이 터져 죽는다!)
그의 굳어진 안색에 소녀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설… 설마… 아가씨가 당한 것이 두 번째… 종류의…!"
하후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지만 이제 달리 방도가 없을 듯하오."
그는 말을 마치자 곧 방을 나서려 했다.
순간,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협!"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가렸던 옷가지가 흘러내림도 잊은 채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그것은 실로 간절한 호소였다.
허나,
하후미린은 난색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만 그건 안 될 말씀이오. 최음제를 해독시키려면 그대 주인의 청백함을 깨뜨려야 하거늘…"
"…!"
소녀의 안색이 일순 핼쓱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대… 대협께선 부인이 있으신지요?"
"그… 글쎄…"
하후미린은 말을 더듬거렸다.
허나, 소녀는 그런 하후미린을 보며 수줍어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으니…
소녀는 못박듯이 강경하게 말했다.
"그럼 되었어요. 아가씨도 아직 미혼이에요."
그녀는 하후미린이 더 이상 무어라 하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 나갔다.
"소저! 이러면 아니되오!"
하후미린은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다.
그러나,
쾅!
소녀는 방문을 세차게 닫았다.
그리고는,
문을 밖에서 등지고 선 채 애원했다.
"흑! 제발… 소녀가 죄는 모두 빌 테니 주인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휴!"
하후미린은 그만 말이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걸려들었군…!)
그는 내심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넓적한 침상 위,
"아아… 헉헉…!"
나녀의 몸부림은 격렬했다.
그녀의 욕정은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인명이 소중하니 일단은…)
하후미린은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활활 타오르는 여인의 두 눈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흑… 흐윽…! 제… 제발… 어서 안아 줘요. 아…!"
그녀는 애원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하후미린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용서하시오. 소저."
그는 묵린철갑의를 벗고는 침상으로 올라갔다.
"아아…!"
순간,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그대로 휘감았다.
하후미린은 자신도 모르게 불끈 열기가 치솟음을 느꼈다.
본능,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후미린 역시 젊고 건강한 남자가 아닌가?
더구나,
영웅은 호색이라 하거늘…
허나,
하후미린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순간에조차 떠오르는 얼굴,
아!
그것은 바로 철혈전후 철비연이었다.
"누님… 용서하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젊은 육체는 타오르고 있었다.
정염의 화신인 양,
"헉… 헉…!"
그는 뜨거운 열풍으로 여인을 휘몰아 갔다.
여인,
그녀의 육체는 사내의 거친 손길에 맡겨진 채 몹시 허우적거렸다.
"아… 아…!"
사내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육체는 경련했다.
희열에 의한 몸부림은 끈끈하고도 격렬했다.
바야흐로 두 남녀의 육체는 뜨겁고도 진한 정사에 몰입해 갔다.
"흑흑…!"
방 밖에서는 한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옷가지도 잃은 채 소녀는 뽀얀 두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자신의 주인을 생판 모르는 사내에게 안겨준 시녀,
소녀는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아픔을 맛보고 있었다.
"하악… 흐응…!"
"헉!"
거친 남녀의 숨소리는 귀를 아무리 틀어 막아도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일순,
"아--악! 아으윽----!"
"허… 억!"
자지러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과 절정을 의미하는 사내의 숨가쁜 신음이 들렸다.
"아! 아씨…! 흐흐흑…!"
소녀는 바르르 경련하며 흐느꼈다.
그것은--!
분명 또 허나의 인연을 만드는 소리였다.
허나,
처녀지신이 깨어지는 소리임에랴…
한데,
천년검혼(千年劒魂)을 지닌 여인(女人)
천군봉!
태산제일봉의 이름이었다.
화르르…!
하늘과 가장 가까운 대지를 밟고 서 있는 인물이 있었다.
긴 흑발을 휘날리며,
새하얀 백미를 꿈틀거리고 있는 절대의 미장부,
그의 전신은 육중한 철갑의로 감싸여져 있었고,
새어나와 있는 여인의 피부같이 새하얀 손,
그의 손톱은 피칠을 한 듯 붉었다.
아울러, 그의 우수 중지에는 투명한 유리환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
파라라락!
일 장 길이의 철봉에,
삼 척에 달하는 거대한 깃발이 산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검은 기폭에는 <무적철혈(無敵鐵血)> 네 글자가 웅휘롭게 수놓여져 있었다.
묵광이 번뜩이는 육중한 묵철뇌린갑을 받쳐 입고 있고, 가지런히 흑건으로 묶어 뒤로 넘긴 머릿결이 흩날린다.
그 모습은 그대로 전쟁을 관장하는 전신이었다.
화룡왕 하후미린!
바로 그였다.
"이제… 간다!"
문득, 하후미린은 오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츠으으…!
그런 그의 시선으로 가공할 뇌강이 폭사되고 있었다.
"이제 완전한 힘을 얻었다!"
꽈악!
하후미린은 무적철혈풍을 움켜 쥐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전설과 신화를 부수리라! 오직… 철혈무적신화만이 천추군림하리라!"
쩌--르르르릉!
용의 제왕!
그 철사무적사왕의 포효에 태산 전역이 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렸다.
한데,
"…!"
하후미린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감히 철혈의 권역에서 피를 흘리다니…"
그는 스산한 살기를 폭출시켰다.
그와 함께,
파라락!
그의 우수가 허공을 가르며 기폭이 그대로 빨려들 듯 철봉으로 스며들었다.
스스스…!
줄어들고 있었다.
거대한 무적철혈풍이 삽시간에 일 척의 단봉으로 화해 하후미린의 손 안에 잡힐 정도였다.
이어,
둥실…!
하후미린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쐐애액!
그의 신형은 빛줄기로 화해 산하로 쏘아져 갔다.
차차창!
"아--악!"
"크아--아악!"
도검의 충돌!
허공에 난무하는 검광!
파팟!
휘--익!
선혈이 허공에 무지개를 긋는가 하면, 사지가 잘려져 사방으로 퉁겨나갔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아수라지옥도의 연출!
그것은 아득한 세외선경의 계곡을 혈풍으로 몰아치는 광경이었다.
장원,
그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별원으로, 평소 같으면 세외은사들이 유유자적할 만한 평화가 깃든 곳이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허물어져 나간 담장 사이로 보이는 내부의 상황은 예의 처참경이었으니!
더구나,
그것은 치열한 공방전이 아닌 일방적인 도살극임에랴!
보라!
일단의 혈포몽면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베어져 넘어가는 가냘픈 여인들의 교구!
츠파팟!
"아악!"
섬뜩한 혈광이 공중에 뿌려졌다.
동시에,
앳되어 보이는 한 소녀의 젖무덤이 처참하게 양단되었다.
쿵!
소녀가 나뒹구는 지면,
그곳에는 이미 수십 명의 여인들이 떼죽음을 당해 있었다.
목이 반쯤 갈라진 여인,
정수리가 쪼개져 허연 뇌수를 흘리는 여인,
허리가 끊어진 여인,
완전히 양단된 채 반인이 된 여인 등,
아!
그 처참함은 이루 형용할 수조차 없었다.
여인들의 죽음,
그것도 너무도 처참한 죽음,
그것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가벼운 백의경장 차림에,
결코,
그녀들의 검세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그녀들이 지닌 검은 바위도 가를 수 있는 신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상대하는 적은 도검마저도 뚫지 못하는 마마금강신이었으니,
혈포몽면인들!
그들은 완전히 피에 굶주린 살인귀들이었다.
"크크녠…"
"캘캘… 숫처녀들의 피냄새는 신선해서 좋구나!"
콰르릉!
번---쩍!
그들의 잔악무도한 손속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 악!"
"악!"
살아남은 삼십여 명의 소녀들이 한 명 한 명씩 난자당해 죽어갔다.
무려 백여 명의 혈포인들이 그녀들을 포위하고 있는 터,
"으…!"
"아아!"
동료들의 죽음에 살아남은 소녀들은 절망의 빛에 젖어 들었다.
그들은 뻔히 알고 있었다.
곧 자신도 동료와 같은 운명이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러했다.
"아악!"
절망은 곧 비명으로 화하고 피를 뿌리며 소녀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한데,
그들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곳,
그곳에 일남일녀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
대략 삼십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 한 곳 흠잡을 데 없는 용모에 물이 오를대로 오른 몸매,
그녀는 가히 뇌살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더구나,
몸에 꼭 맞는 백색궁장은 그녀에게 우아한 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 네놈이… 비겁하게 암수를…!"
여인은 어떤 암계에 걸린 듯 휘청거리며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백색궁장녀의 앞에는 영준하게 생긴 혈포청년이 있었다.
혈포미청년,
그는 매우 준미한 데다 체격 또한 당당했다.
허나,
미간이 거무스름한 것으로 보아,
그는 분명 매우 음탕하고 영악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흐흐… 단리혜혜! 본 소종사는 사부님으로부터 그대를 취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소."
과연,
외양에서 풍기는 인상과 같이 그의 눈빛은 색마의 그것이었다.
한데, 이 여인.
검모 단리혜혜!
바로 그녀가 아닌가?
천 년의 검혼을 내재한 여인,
천병신비가의 마지막 남은 혈육!
귀수옹 단리황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그녀는 천병신비가를 지키던 백팔검신녀를 이끌고 태산으로 향했다.
허나, 막 태산의 근역에 접어들어 한 채의 폐장원에서 노욕을 풀고 있을 때 저 피에 굶주린 악마의 이리떼들이 덮친 것이었다.
백팔검신녀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태반 이상이 죽은 후였고, 그녀 역시 옥사검왕 혁천위에게 암격을 당한 것이었다.
"으… 네놈을 죽이지 않으면 성을 갈리라!"
단리혜혜는 원독에 찬 음성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혁천위는 도리어 코웃음쳤다.
"하핫… 조심하시오. 환락춘음산(歡樂春淫散)의 묘약은 매우 신통한 성질을 지녔으니."
"으으…!"
단리혜혜는 치를 떨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천하에서 가장 강한 최음제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환락춘음산!
여인,
그것도 정숙함을 생명 이상으로 여기는 여인들에게는 가장 저주스러운 것이 바로 환락춘음산이었다.
한 번 그것에 중독된다면,
천하에 다시 없을 성녀일지라도 최대의 요부로 화하는 극악스런 춘약이 그것이었던 것이었다.
탐화랑군들에겐 무가의 보물!
무공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흡입한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한데,
이 고결한 백의궁장미녀가 바로 그 전율적인 음약에 중독되었으니,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말짱허나 이미 서서히 달구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오직, 그녀만이 지닌 신비잠력에 의해 억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이미 그 뜨거운 열류를 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극강한 내공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 그녀는 점차 음약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절망이다! 원수를 갚기는커녕 원수에게 몸을 더럽히게 될 판이니!)
그녀는 내심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갔다.
반면, 혁천위는 여인의 표정 변화에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터였다.
"순순히 본 소종사에게 안기는 것이 어떻소?"
그의 말투는 몹시 능글맞기 짝이 없었다.
"으으…!"
단리혜혜는 분노와 수치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원한 서린 시선은 와중에도 여러 차례 주변을 훑어갔다.
주변에는 자신의 수하이던 여인들의 시체가 자꾸 쌓여갔다.
"아악!"
"으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그녀는 몸서리를 쳤다.
허나, 지금의 그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공력을 쓴다면 그녀는 음약의 기운에 휩싸여 버리고 말 판국이었다.
(천년제왕검을 펼칠 수만 있다면…)
일촉즉발의 순간에서 그녀는 내심 탄식을 토했다.
그 때,
"흐흐흐…!"
혁천위가 드디어 음침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들었다.
그것을 보자 단리혜혜는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악물었다.
(좋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최후의 방법을…!)
일순,
"으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휘청거렸다.
기어코 음약의 효력이 발동한 것이었다.
"흐흐. 때가 되었군."
혁천위는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흐흐… 천하절색이로군. 이렇게 가까이 보니 더욱 아름다운걸?"
혁천위의 손은 거침없이 여인의 허리를 감아갔다.
세류요,
여인의 가느다란 허리가 그의 한 팔에 조여질 찰나,
여인은 날카롭게 교갈했다.
"죽어랏! 천수참!"
순간,
여인의 섬섬옥수는 그대로 수도가 되어 혁천위를 찔러갔다.
파파팟--!
허나,
"영악한… 이럴 줄 알았지!"
스스슥…!
갑자기 혁천위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흐려졌다.
"앗!"
여인은 대경했다.
그러나,
이미 혁천위의 모습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이… 이젠 틀렸… 으흡…!"
그녀는 자제력을 상실한 채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
여인은 이성조차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아… 아…!"
치밀어 오르는 욕정!
그것은 여인을 뜨겁게 달구어 대고 있었다.
"아아… 나를… 좀…!"
찌--익!
찍!
여인은 미친 듯 몸을 비틀며 자신의 백색궁장을 마구 찢었다.
갈가리 찢겨나가는 틈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뽀얀 나신,
희고도 투명한 속살이 진한 육향을 발산하고 있으니!
"흐흐흐…!"
혁천위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그녀를 보며 욕화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와락!
두 남녀는 격렬하게 끌어안았다.
허나,
그것은 여인쪽에서 사내에게 일방적으로 급격히 안겨든 것이었다.
"아아… 어서 좀… 어떻게… 아…"
여인은 사내에게 매달려 몸부림쳤다.
"흐흣… 천념검혼을 지닌 검모… 결국은 내 손에 들어왔구나!"
혁천위는 그대로 여인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도살을 벌이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끝내도록 해라!"
그 말에 혈포인들은 알아 들었다는 듯 크게 대꾸했다.
"헤헤… 소종야님! 걱정 마시고 재미나 보십시오!"
"핫하! 수고해라!"
혁천위는 득의만만한 채 여인을 안고는 전각안으로 사라져 갔다.
"아가씨!"
시녀들은 사라져가는 혁천위와 단리혜혜를 보며 비통하게 외쳤다.
"제발 정신 차리세요!"
"아가씨!"
허나,
그 시녀들의 운명이라고 단리혜혜보다 나을 바는 전혀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처참한 죽음과 그 외에,
"헤헤… 제일 몸뚱이가 훌륭한 계집 허나면 즐기기에 충분하다! 나머지 계집들을 빨리 해치우자!"
"낄낄… 좋지!"
변태라고밖엔 할 수 없는 무리들,
그들의 잔혹한 손 속에 다시 불이 붙었다.
번--쩍!
슈--악!
검광의 난무가 개기되었다.
"아--악!"
"아--아--악!"
구천을 울릴 듯 처절한 비명 속에 피보라가 천지를 뒤덮었다.
가냘픈 여인의 죽음은 계속 이어져 갔다.
그리고 잠시 후,
피바다 속에 나뒹구는 시체들 가운데 홀로 남은 소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십칠 세 정도쯤 되어 보이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소녀,
꽃봉오리를 보듯 그녀는 앳되면서도 탐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그 소녀는 두려움과 분노에 가련할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으으… 악마들… 다가오지 마라!"
그녀는 턱을 덜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허나,
혈포인들은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낄낄… 고 계집 그냥 삼켜도 비린내 하나 안 나겠군!"
"흐흐… 어린 계집이나 천하제이미는 되겠다!"
그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음탕한 말을 주고받으며 소녀를 낚아챘다.
드디어,
찌직!
찌---익!
순식간에 소녀는 의복이 갈가리 찢겨나가고 말았다.
"아--악! 개만도 못한 놈들!"
그녀는 기를 쓰며 반항하려 했다.
그러나,
"에… 익! 못 참겠다!"
혈포인 중 한 명이 그대로 왈칵 소녀를 덮쳤다.
"크크… 순서를 지켜라!"
"와아! 순서는 무슨 개뼉다귀 같은…!"
"와… 좀 비켜라! 나도 좀 한몫 끼자!"
"아--악!"
굶주린 혈포인들의 아우성과 처절한 비명이 허공 중에 어우러져 메아리쳤다.
한 명의 소녀 위에 한꺼번에 덮치려는 수십 명의 혈포인들,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어이없이 짓밟히려는 순간,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천인공로할 놈들!"
우르르…!
실로 거창한 일갈이 천지를 진동시킨 것은!
과연,
소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또한,
천년검혼을 지닌 검모 단리혜혜!
그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혈포인들은 뇌리가 세차게 울리는 충격에 대경했다.
"어느 놈이냐?"
그들은 즉각 급급히 일어나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 때,
화르르!
허공으로부터 한 줄기 묵영이 선풍같이 날아 내렸다.
태산 같은 기도!
(강적이다!)
혈의인들은 대뜸 삼엄한 긴장에 휩싸였다.
비록,
음랄하기는 허나 그들 역시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묵영은 그들을 향해 분노의 외침을 발했다.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놈들! 죽이리라!"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슈--우---웅!
콰르릉---!
콰콰쾅!
무시무시한 강기의 폭풍이 혈의인들을 휩쓸어 갔다.
"헉!"
"강적이다! 협공하자!"
혈의인들은 예상 밖의 공세에 일시에 장을 내뻗었다.
츠츠츠!
콰르르릉---!
일 대 삼십의 공격은 허공중에 대격돌을 일으켰다.
콰쾅---!
콰--앙!
"케--액!"
"크--악-!"
"크악!"
허공 중에 피보라가 튀었다.
또한,
단번에 이십여 명이 낙엽처럼 튕겨 나가 즉사를 하고 있었다.
아!
단 한 명에 의해 이십여 명이 그대로 이승을 하직한 것이었다.
"전… 전신이다!"
"이럴 수가!"
의혹과 경악이 어우러진 채 남은 혈의인들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화르르!
묵영은 그 사이에 자리를 옮겨 소녀의 앞으로 내려섰다.
그제야 묵기는 걷히고 그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임풍옥수,
너무도 수려하고 준미한 모습,
그는 바로 하후미린이었다.
"악독한 놈들!"
하후미린은 주위를 쓸어 보며 대노했다.
동시에,
그는 재차 손을 들어 남은 혈의인들을 내치려 했다.
그 순간,
"대협! 우선 아가씨부터요! 아가씨가 위험해요!"
소녀가 다급히 외쳤다.
하후미린은 손을 거두며 그녀에게 물었다.
"소저의 아가씨가 계시었소?"
소녀는 그의 시선을 대하자 고개를 푹 떨구며 자신의 나신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는 고개짓을 하여 한 곳을 가리켰다.
"저쪽 전각에…!"
"알겠소!"
하후미린은 홱 돌아섰다.
"으으!"
"으…!"
혈포인들은 그가 자시들을 향하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예 사색이 되어 비틀거리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인 양,
하후미린은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후후! 일권을 피하면 살 수 있으리라!"
이어,
스--윽!
그의 쌍수가 허공을 가르고…
"철혈--천붕권--!"
콰르르르르…!
하늘마저 부서뜨릴 듯 엄청난 권강풍이 폭출되고…
"피… 피해… 크--악!"
"캐--애---액!"
"크흑!"
피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대해일을 어찌 편주가 피할 수 있겠는가?
천붕권(天崩拳)!
전신일백강결 중 최극강의 권식이 펼쳐진 것이었다.
빠--가각!
허공중에 피가 튀며 비명이 난무했다.
그 사이, 하후미린은 뒤도 안 돌아 보고 소녀가 가리킨 전각으로 폭사되어 갔다.
하후미린의 동작은 쾌속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두가 한 순간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냐?"
때마침, 전각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뛰어 나왔다.
그의 뒤로 열려진 방문 사이로 침상에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후미린은 이미 전각 앞에 당도해 있었다.
츠팟!
으스스한 한기가 배인 싸늘한 시선,
그는 혁천위를 노려보았다.
혁천위는 그 눈길을 대하자 흠칫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음탕한 놈! 용서치 않으리라!"
하후미린은 대답대신 즉각 일수를 내뱉았다.
파파파팟---!
마치 낙뢰가 치듯,
가공할 속도의 강기가 곧장 혈포청년을 짓쳐갔다.
"어헉!"
혁천위는 질겁을 하여 몸을 흔들었다.
순간,
그의 신형은 수십 개로 갈라지며 공격을 피해 내려 했다.
허나,
콰릉---!
"크--윽!"
그는 그대로 피를 뿌리며 튕겨졌다.
사실,
혁천위의 보법은 기이하고도 빨랐다.
허나,
그것은 하후미린의 철혈무적수를 앞지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자!)
살심!
하후미린은 그야말로 살심을 가지고 튕겨지는 혈포청년의 뒤를 쫓았다.
화르르---!
동시에,
콰릉--!
파파팍---!
동경철벽이라도 부술만한 강맹한 기류가 혈포청년을 후려쳤다.
철혈무적수(鐵血無敵手)!
그것은 음탕한 자의 최후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초식이었다.
허나, 그 순간,
"으헉!"
경황중에 혁천위는 황망히 우수를 흔들었다.
파파팟!
우우우웅!
갑자기 대기가 요동치며 일순 거대한 아수라형상이 혈포청년을 휩쌌다.
그러나,
콰황!
"크---윽!"
혁천위는 다시 핏줄기를 뿜어내며 나뒹굴었다.
마침내,
"크…! 두고 보자!"
쐐액!
한 무더기의 혈전(血箭) 뒤로 쏘아내며 혁천위는 몸을 날려 도주했다.
"헉!"
전혀 예상 밖으로 면전에 날아든 혈전!
그러나, 하후미린은 가볍게 이를 피하며 지면에 내려섰다.
그 사이, 혁천위는 엄청난 속도로 그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하후미린은 혁천위를 뒤쫓기보다는 경악에 차 부르짖었다.
"저 자가 쓴 수법은 바로 전설 속의 천마일겁수(天魔一劫手)와 흡사하지 않은가?"
그는 놀라움에 굳은 듯 꿈쩍 않고 잠시 망연해졌다.
천마일겁수!
그것은 우주오대초인의 제일이며, 영원한 암흑마도의 조종인 마야 나후천의 무공이 아닌가?
마야 나후천!
그에게는 전설적인 지옥십대마공(地獄十大魔功)이 있었다.
지옥십대마공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세의 마공임이 천하에 알려진 터였다.
천마일겁수라 하면 바로 그 지옥십대마공 중 일곱 번째였던 것이다.
하후미린은 그 사실을 철혈전후로부터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헌데, 그것이 어찌 혈포청년의 손에서 시전되었단 말인가?
"…!"
하후미린은 전혀 짚이는 바 없이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한데, 그 때였다.
"대협!"
예의 시녀인 소녀가 찢어진 옷가지로 겨우 몸을 가린 채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녀의 안색은 겁에 질린 채 몹시도 창백해 있었다.
또한, 극심한 공포로 그녀는 전신을 오들오들 떨었다.
"이제 물러갔으니 안심하시오."
하후미린은 돌아서서 그런 소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보다 우선 방 안에 들어가서 소저의 상세를 보아 주시도록 하시오."
"아참! 그렇지, 내 정신 좀 봐."
소녀는 그제야 생각난 듯 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었다.
혼자 남게 되자 하후미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자는 누구일까? 달려오며 천리좌시지청술(千里坐視地聽術)로 듣기는 스스로 소종사라 하였는데…)
그는 두 눈을 빛내며 검미를 모았다.
(더구나 전설적인 마공인 천마일겁수까지 일신에 익히고 있는 것을 보면 범상한 인물은 아니다…!)
한데 일순,
"아가씨!"
다급한 교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어,
"대… 대협! 아가씨가…!"
소녀가 다급히 뛰쳐 나왔다.
"무슨 일이오?"
하후미린이 묻자 소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흑흑. 아가씨가… 이상해요. 저를 막 끌어안고…"
그 말을 듣자 하후미린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그는 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방 안,
하후미린에게 확 와닿은 것은 여인의 살냄새였다.
침상 위,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한데,
"아으음… 학학. 어서… 어서요… 으음…!"
여인은 마구 몸을 비틀며 침상을 쥐어 뜯는 것이 아닌가?
전신이 욕정으로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채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여인,
일견하기에도, 그녀는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미모의 여인이었다.
"지독한 최음제에 당했군."
하후미린은 안색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최. 최음제…? 그럼 어떡해야 하지요?"
소녀는 순진한 두 눈을 빛내며 하후미린에게 물었다.
하후미린은 다소 어색함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최음제라면… 두 가지가 있소. 일시적으로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 그 하나요. 또한 다른 종류는 일단 중독되면… 풀 방법이 단 한 가지…"
하후미린은 말 끝을 흐렸다.
소녀는 남녀의 일에는 문외한이나 대충 그의 말뜻을 눈치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아… 아가씨는 어느 쪽인가요?"
"잠깐 기다려 보시오."
하후미린은 조심스럽게 여인의 팔목을 잡고 살폈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홱 일그러졌다.
(큰일이군! 지독한 최음제다. 이대로 두면 반각이 못 되어 심맥이 터져 죽는다!)
그의 굳어진 안색에 소녀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설… 설마… 아가씨가 당한 것이 두 번째… 종류의…!"
하후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감이지만 이제 달리 방도가 없을 듯하오."
그는 말을 마치자 곧 방을 나서려 했다.
순간,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협!"
그녀는 자신의 알몸을 가렸던 옷가지가 흘러내림도 잊은 채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그것은 실로 간절한 호소였다.
허나,
하후미린은 난색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만 그건 안 될 말씀이오. 최음제를 해독시키려면 그대 주인의 청백함을 깨뜨려야 하거늘…"
"…!"
소녀의 안색이 일순 핼쓱해졌다.
그러나,
곧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대… 대협께선 부인이 있으신지요?"
"그… 글쎄…"
하후미린은 말을 더듬거렸다.
허나, 소녀는 그런 하후미린을 보며 수줍어하는 것으로 착각을 했으니…
소녀는 못박듯이 강경하게 말했다.
"그럼 되었어요. 아가씨도 아직 미혼이에요."
그녀는 하후미린이 더 이상 무어라 하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 나갔다.
"소저! 이러면 아니되오!"
하후미린은 다급히 그녀를 불러 세우려 했다.
그러나,
쾅!
소녀는 방문을 세차게 닫았다.
그리고는,
문을 밖에서 등지고 선 채 애원했다.
"흑! 제발… 소녀가 죄는 모두 빌 테니 주인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휴!"
하후미린은 그만 말이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걸려들었군…!)
그는 내심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넓적한 침상 위,
"아아… 헉헉…!"
나녀의 몸부림은 격렬했다.
그녀의 욕정은 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인명이 소중하니 일단은…)
하후미린은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활활 타오르는 여인의 두 눈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흑… 흐윽…! 제… 제발… 어서 안아 줘요. 아…!"
그녀는 애원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하후미린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용서하시오. 소저."
그는 묵린철갑의를 벗고는 침상으로 올라갔다.
"아아…!"
순간,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그대로 휘감았다.
하후미린은 자신도 모르게 불끈 열기가 치솟음을 느꼈다.
본능,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후미린 역시 젊고 건강한 남자가 아닌가?
더구나,
영웅은 호색이라 하거늘…
허나,
하후미린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순간에조차 떠오르는 얼굴,
아!
그것은 바로 철혈전후 철비연이었다.
"누님… 용서하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젊은 육체는 타오르고 있었다.
정염의 화신인 양,
"헉… 헉…!"
그는 뜨거운 열풍으로 여인을 휘몰아 갔다.
여인,
그녀의 육체는 사내의 거친 손길에 맡겨진 채 몹시 허우적거렸다.
"아… 아…!"
사내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육체는 경련했다.
희열에 의한 몸부림은 끈끈하고도 격렬했다.
바야흐로 두 남녀의 육체는 뜨겁고도 진한 정사에 몰입해 갔다.
"흑흑…!"
방 밖에서는 한 소녀가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옷가지도 잃은 채 소녀는 뽀얀 두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자신의 주인을 생판 모르는 사내에게 안겨준 시녀,
소녀는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아픔을 맛보고 있었다.
"하악… 흐응…!"
"헉!"
거친 남녀의 숨소리는 귀를 아무리 틀어 막아도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일순,
"아--악! 아으윽----!"
"허… 억!"
자지러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과 절정을 의미하는 사내의 숨가쁜 신음이 들렸다.
"아! 아씨…! 흐흐흑…!"
소녀는 바르르 경련하며 흐느꼈다.
그것은--!
분명 또 허나의 인연을 만드는 소리였다.
허나,
처녀지신이 깨어지는 소리임에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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