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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검귀령 016~020

먼저 이글은 펌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작가님께 메일을 드렸으나 네이버3의 특성상 어디로 퍼가는 지는 말씀드릴수
없기에 대충 둘러대고 퍼옵니다 만약 이글이 문제가 된다면 제가 자진
삭제 할테니 게시지기님께서는 봉사명령 같은건 내리지 마시길 ㅡㅡ;
그리고 추가로 검귀령은 현재 2권까지 출간이 됏으나 작가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는 이유리 첫화부터 인터넷 연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출판된책이라고 머라고 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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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령 The Ghost Blade - 016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6


“우라질! 뭐 이렇게 따라오는 것들이 많아?”

기역자로 꺾인 아란을 어깨에 메고 전력으로 질주하던 이노는
쉴 새 없이 고함을 지르며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추적자들을 돌아보며
혀를 내둘렀다. 평민 복장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무 명 남짓한
검우 기사단과 붉은 로브의 페어리스타 자매련, 그리고 경기장에 있던
제국의 중보병들까지. 갑옷이 부딪치는 쇳소리와 욕설,
자욱하게 땅에서 피어 오르는 먼지까지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마라톤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란, 담배를!”

허리가 꺾인 채 호주머니에서 가는 시가를 꺼낸 아란이 불을 붙여
이노의 입에 물려 주었다.

“우와, 형. 사람들이 구름처럼 쫓아와!”

이노의 고뇌와는 상관없이 난생처음 겪는 이외의 상황에 신이 난
아란이 즐거운 듯 입을 열었다.

‘정말 이렇게 좆빠지게 달려 보기도 오랜 만이군. 이게 무슨 팔자람,
제기랄.’

거칠게 시가를 빨아 대며 이노는 경기장에서 만났던 흑아 강습대의
부대장 갈렌의 얼굴을 떠올렸다. 붉은 사이스(Scythe)의 갈렌.
수많은 전장을 넘나들며 참으로 많은 적들을 함께 베어 왔던 자타가
공인하는 교황파 최고의 기사 중 한 명. 포트란트 전투 이후로 생사를
알 수 없던 예전의 수하를 만난 것에 적지 않게 놀랐지만 지금으로써
그를 향한 아론의 마음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아론의 전사 이후에 분명히 해체되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론폴트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건 아닐까?
아님 교황이 다시 예전의 멤버를 모은 것인가…
어쨌건 지금으로서는 아론의 기억도 이노의 기억도 확실하지 않으니
확인할 수가 없군.’

“아란! 시장을 통과한다. 꽉 붙들어!”

점차 간격이 좁혀지고 있는 추적자들과의 거리를 깨달은 이노는
성으로 통하는 최후의 관문인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

“자이센을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들 할 생각이지?”

반쯤 피운 시가를 바닥에 뱉으며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잠깐 동안의 휴식을 즐기던 큐이와 뮤세트는 빅토르의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자네 말이야, 카자크 가문의 도련님.”

“넷? 그걸 어떻게….”

느닷없이 정체를 들켜 버린 큐이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이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가 아니잖나. 카자크 후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곁에 있는 아가씨는 어쩔 셈인가? 교황파 추적자들을
어떻게 따돌릴 셈이냐고? 자네 자식까지 도망자로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빅토르님….”

계속되는 빅토르의 질책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는
큐이의 어깨를 뮤세트는 살포시 감쌌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앙다문 큐이의 입술 사이로 가늘지만 비통한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이노님과의 짧은 여행 속에서, 세상에는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강해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큐이….”

큐이의 등 뒤에서 큐이를 꽉 껴안은 뮤세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웬 신파….”

빅토르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미낙이
눈꼴사납다는 듯 라이칸슬로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노가 도착한다 해도 저것들을 처치하는 것이 문제가 되긴 하겠군.
아냐, 녀석은 검귀령이잖아.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

“검귀령….”

귀환하는 마차 안에서 론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론 이스트반의 생존과 검귀령이라는 수수께끼의 존재에 대한 그간의
소문에 코웃음을 치던 그였지만 방금 전 눈앞에 나타난 마검 란크레샤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란크레샤의 주인은 오직 한 사람, 아론 이스트반이 아니라면
그 마검의 폭주를 막을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방금 전의 낭인은
도대체… 정말 소문의 검귀령이 실존한다는 것인가?’

마차를 에워싼 채 힘차게 질주하는 검우 기사단의 모습을 바라보던
론폴트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 전 갈렌의 태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투였어.
어떻게 된 거지? 비밀을 아는 자는 헤르초크와 나뿐, 음모에 가담했던
인물들은 모두 암살한 지 오랜데. 게다가 마견들이 지키고 있는
금고에서 계약서를 훔쳐 달아났다는 도적들은 도대체….’

론폴트의 머리는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먼저 갈렌 녀석을 처치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교황의 신임이 두터운 녀석이니 증거를 남겨서는 안 되겠지.
그리고 교황도 문제야. 그리고 헤르초크 놈과 그 빌어먹을 머스킷도…
으윽….’

순간 현기증을 느낀 론폴트는 마차의 소파에 비틀거리며 몸을 뉘었다.
로브 안자락에 힘겹게 손을 넣은 론폴트는 작은 유리병에 담긴
하얀색 알약을 한 움큼 입 안에 털어 넣어 삼키며 가쁜 숨을 정리하려
애썼다. 평소보다 훨씬 큰 고통이 뒤통수를 부숴뜨릴 듯 엄습하는
가운데였다.

“왜들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느냐? 신의 뜻을 역행하는
우매한 자들아!”

분노와 고통으로 물든 얼굴에서 내뱉는 저주의 말과 함께
마차는 흙먼지를 날리며 리카로니아를 벗어나고 있었다.

............

“형, 이쁜 누나야!”

나무로 만든 과일 궤짝들을 뛰어넘으며 시장의 중심을 지날 무렵,
이노는 아란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노의 뒤에는 초록색 머리의
오키드가 맹렬한 속도로 따라붙고 있었다.

‘헤이스트!’

골목과 골목을 돌아 일부러 복잡한 동선을 택했음에도 페어리스타
자매련은 무서운 속도로 이노의 뒤를 쫓아왔다. 이미 검우 기사단이나
제국 병사들과의 거리도 상당히 이격(離隔)된 상태였다.

‘페어리스타의 마녀들답군. 그래도 루미낙보다는 훨씬 쓸 만한 것
같은데? 전장이 아니라 기방에서 만났다면 더 좋을 뻔했어, 아가씨.’

시장 출구를 막 빠져나갈 때쯤, 거리는 이미 서너 걸음 차이로
좁혀져 있었다.

‘무서운 놈이로군. 헤이스트를 시전해서도 따라잡기가 어려운
정도라니… 이 정도의 사나이가 어째서 낭인으로 남아 있을까?
근데 대체 이 독한 연기는… 콜록!’

날아오는 독한 시가의 연기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오키드가 이노의
뒷덜미를 잡으려 할 때였다.

“누나! 누나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방글거리는 얼굴로 아란이 입을 열었다.

“누나는 군인이란다. 꼬마야.”

“우왓! 누나같이 예쁜 군인은 지금까지 처음 봤어요!”

천진난만한 아란의 말에 오키드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도 아마 보기 어려울 거야. 꼬마야.”

“오키드님, 제발!”

어느새 오키드의 옆으로 따라붙은 타이샤가 이마에 연방 흐르는
땀을 훔쳐 내며 오키드를 말렸다. 하루에 두 번이나 시전하는
헤이스트에 대한 피로가 눈가에 두텁게 내려앉아 있음에도 긴박한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는 듯 아무런 불평 없이 오키드를 따르고 있었다.

“얘는 나하고 비슷한 또래 같은데… 동생인가요?”

“아니란다. 이 아이는….”

“그만 좀 하세요 오키드님. 지금 꼬마와 말장난 하실 때가 아닙니다.”

서서히 어둠이 도시를 물들여 가자 건물 곳곳에 불빛이 늘어 가고
있었다. 예상치 않았던 순수한 육체의 향연 속에서 이노도 추적자들도
모두 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아란, 담배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신경이 쓰이는지 이노가 아란을
채근했다.

“잠깐만 형!”

“오키드님, 뒤에서 공격해 다리를 잘라 버리죠.
이제 검이 닿을 만한 거리입니다.”

“타이샤!”

순간 싸늘하게 식은 오키드의 얼굴이 타이샤를 향했다.

“나 오키드 페어리스타는 정당한 승부를 원한다. 걷지도 못하는
상대를 베라는 말이냐?”

허리춤의 레이피어를 절반쯤 뽑고 있던 타이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매련 멤버 가운데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한 오키드의
서슬 퍼런 분노에 타이샤의 온몸에는 미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랄들 하고 있네. 입만 살아 가지고.”

아란이 물린 담배를 피워 문 이노는 짜증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요즘처럼 주변에 실속 없는 여자만 늘어나는 상황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비극이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달려야 하는 신세라니,
이런 경주마 같은 인생이 있나.

‘수다와 고집을 빼면 남는 것은 몸뚱이뿐인가?
참,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야. 여자들이란….’

내뿜어 대는 담배 연기 속에서 방금 전 경기장에서 보았던
위버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어. 그 여자… 이놈의 기억은 왜 여자들에
대한 것은 이렇게 희미한 거지? 우라질.’

............

마차에서 내린 위버가 저택으로 들어서자 론폴트의 집사가
미리 대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주머니를 전한 후 대기
중이던 마차에 올라탄 집사는 연방 고개를 굽실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이번과 같은 계략은 모두 누구의 머리에서 나오는 걸까?
헤르초크 공일까? 그렇지 않으면 리카론 황제?’

교황파와 황제파로 양분된 대륙의 상황 속에서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실질적인 대륙의 지배자 리카론 황제. 대륙컵이라는 커다란
축제로 눈과 귀를 속인 후, 배후에서 정적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는
이번과 같은 계략에 위버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부로 황금 사자의 깃발이 더 많은 성과 도시에 나부끼게
되겠구나. 그리고 그만큼의 한숨과 눈물도….’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체의 빛을 차단하는 두터운 검은 거튼과 붉은 양탄자가 깔린 방의
한가운데 놓인 낮은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자리잡은 머리 크기만한
투명한 수정구와 한 벌의 타로 카드. 그리고 자동 서기를 할 때 사용하는
아이보리색의 펜대까지 모든 것이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위버 자신에게 있었다. 지금껏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아론의 생존을 굳게 확신하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별들도, 많은 영혼들도 누구 하나 정확히 가르쳐 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어.”

단정히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어헤치며 위버는 옷장 속 깊숙이
감춰 두었던 손바닥만한 크기의 푸른색 상자를 꺼내 들었다.
빡빡한 상자의 경첩을 힘주어 들어 올리자 무서울 정도의 밝기로
푸른빛이 방 안에 폭사되었다.

“아, 역시. 그 사람은 아론이었어. 비록 모습은 달랐지만
이 목걸이가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어. 아침보다 수십 배나 밝은 빛으로.”

상자 안에는 마름모꼴로 날카롭게 세공된 펜던트가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었다.

............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늦네요. 혹시,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 건….”

짙게 깔리는 어둠 속에서 뮤세트가 입을 열었다.

“심심풀이 삼아 저 축생들이나 잡아 볼까?”

무료한 듯 기지개를 켜던 루미낙이 뮤세트의 이런 이야기에
별반 관심이 없는지 검집에서 사브르를 꺼내 푯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쓸데없는 힘 낭비는 하지 마라. 이곳을 통과하고 나서부터가
문제니까.”

바위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빅토르가 눈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통과하고 나서부터라니 난 자이센을 빠져나가면 다른 길을 가겠어.
오우거의 숲에 있다는 이노의 친구 따윈 만나고 싶지 않다고.
분명 이노와 똑같은 놈이겠지!”

루미낙은 등을 돌려 황금색 다리 너머로 펼쳐진 드넓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빨아 삼킬 듯 온통 검은색으로 채색된 숲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응?!”

빅토르의 시선을 따라가던 일행의 눈에 뿌연 먼지 구름을 몰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노? 그런데… 뒤에 달고 오는 건 도대체 뭐야.
유령 퇴치를 위한 증원군인가?”

“쫓기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은 뭐죠?”

“아란… 같은데. 아니, 근데 우리 수도사들은 어디로 간 거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은 일행만이 아니었다.
푯말 밖에서 일행을 노려보던 라이칸슬로프들 역시 지축을 울리며
돌진하는 이노와 추적자들을 보자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릉거리고 있었다.

“일단 다들 준비를 하고 있자고!”

점점 가까워지는 이노와 먼지 구름 앞에서 빅토르가 검은 날의
단도를 양손에 빼어 들었다.

“이봐, 그 팔은 좀 괜찮은 거야?”

무뚝뚝하게 안부를 물은 것은 사브르를 빼든 루미낙이었다.

“호오, 제법 여성스러운 면도 있다는 건가?”

“그게 아냐! 저 닭살 커플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퉁명스런 목소리의 루미낙이 가리킨 곳에는 포옹한 채 키스를 나누고
있는 큐이와 뮤세트가 있었다.

“여유를 갖는 것은 좋지만 달려오는 적 앞에서라면 실례야.”

미소를 띤 빅토르의 표정에 비장함까지 곁들인 초보 기사 커플은
잔뜩 굳은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자, 너도 준비하라고 루미낙. 어쩌면 저기 달려오는 일행 중에
너의 그리운 언니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와, 루미낙 누나의 언니란 말이에요?”

“그래.”

암벽을 깎아 만든 웅장한 성의 뒤편, 출입 금지 표지판이 멀리
보이자 이노는 남은 시가를 귀찮은 듯 뱉어 냈다. 하루 종일 달린 탓에
녹초가 되어 버린 다리도 다리였지만 어찔어찔한 머리 때문에 이노는
무척이나 짜증이 났다. 게다가 유람하는 듯 자신의 어깨 위에서
등 뒤의 오키드와 만담을 나누고 있는 아란이라니….

‘그나저나 제법인걸. 헤이스트를 시전 중이라고는 하지만
음성의 높낮이가 일정해.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언니라고
하더니 역시 루미낙보다는 몇 배나 실력이 위인 것 같군.
그나저나 목적지엔 다 온 셈인데. 뭐가 저렇게 많이 몰려 있지?
증원군이라도 데리고 왔나?’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사브르를 향해 주문을 시전하려는 루미낙을 향해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응?”

“다리의 유령은 도대체 언제 등장하는 거지?”

빅토르의 말에 일행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자매련에 입단한 후에도 이곳은 한 번도 와 보지 못했어.
자매련 내에서도 이곳을 출입한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금기시되는
곳이라….”

가장 당황한 것은 루미낙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느 정도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게 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남은 것은 오키드 언니뿐이군.’

“이런 상태라면 이노가 이곳을 통과하자마자 그대로 숲으로 달리면
되겠군. 뭐,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거였잖아. 다들 인상 좀 펴라고.”

잔뜩 긴장했던 얼굴 근육을 이완시키며 빅토르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멍청아, 우리 페어리스타 자매련이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그리고 지금 달려오는 자들을 따돌리는 것이 그렇게 수월할 것 같아?”

“아아, 일단 도착하고 나서 보자고.”

“빅토르!! 받아라!”

천둥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달려온 먼지 구름의 이노에게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웃!”

들고 있던 단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빅토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뒷걸음치며 감싸 받았다. 날아오던 가속 때문이었는지
빅토르의 몸이 휘청하며 뒤로 젖혀졌다.

“아란!”

가장 먼저 정체를 알아차린 것은 뮤세트였다.
빅토르의 품안에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아란이 절반으로 접힌 몸을
펴려고 애쓰고 있었다.

“빅토르! 준비해라. 페어리스타와 검우 기사단이다!
왕궁의 떨거지 병사들까지 합이 50명이다!”

“뭣!?”

아란을 바닥에 내려놓고 땅에 박힌 단검을 잡아 빼던 빅토르와
일행은 이노의 말에 대경실색했다.

“걱정 마라! 라이칸슬로프도 대여섯 마리쯤 준비해 놨으니,
천천히 뚫고 오라고. 빌어먹을 놈!”

“그건 또 뭐야, 이 멍청이 새꺄!”

“앞뒤 안 가리는 이 또라이 놈!”

긴박한 와중에도 이노와 빅토르는 거친 목소리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후, 좀 전에 키스를 하길 잘했군. 하마터면 키스도 못한 채
죽을 뻔했잖아.’

이름만으로도 대륙이 들썩일 정도의 거물들이 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정신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긴장한 뮤세트, 그리고 엉뚱한
만족감에 빠진 큐이. 그들 옆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불길에
휩싸인 사브르를 치켜세운 루미낙과 원치 않았던 짐을 무더기로
몰고 온 이노에 분노하는 빅토르.

“어흑… 이노 형… 내 허리….”

그들의 등 뒤로 바닥에 누운 아란이 기역자로 구부러진 허리를
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검귀령 The Ghost Blade - 017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7


“역시 일행이 있었군.”

어둠 속에 군데군데 보이는 인영들을 보며 오키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첩보에 의하면 일행 중에는 분명 루미낙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이자는 굉장히 이상한 성격인걸.
어깨에 메고 달리던 자신의 동료를 무슨 짐짝처럼 던져 버리질 않나,
혹시 미친놈 아냐?’

경고문이 적힌 푯말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이노의 뒷모습을 보며
오키드는 문득 묘한 느낌을 받았다.

“라이칸슬로프입니다. 오키드님.”

가쁜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는 타이샤가 어느새 로브 안에서 꺼낸
야광주(夜光珠)의 불빛으로 전방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달려오던 붉은 로브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오키드의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버릇없는 축생들이!”

느닷없이 달려드는 라이칸슬로프들의 굵은 발톱에 황급히 몸을 피한
이노가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순간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검집에서
뻗어 나온 란크레샤가 어둠 속에서 몇 차례 날렵한 궤적을 그리는가
싶더니 인간의 것이 아닌 소름 끼치는 비명이 주위의 적막을 깨며
메아리쳤다. 이제 막 자리에 멈춰 선 검우 기시단과 제국의 병사들은
흐르는 땀을 채 닦아 내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비명 소리에 황급히
전투 모드로 돌입했다. 적도 아군도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암흑 속에서
분주히 빼어 드는 검과 갑옷의 마찰음이 어지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빠르고 강해….’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떨어진 짐승들의 팔과 다리를 보며 오키드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휴, 이제 좀 기분이 풀리는구먼.
어라, 루미낙? 그 사브르는 횃불 대용이냐?”

‘언니야… 언니가 왔어.’

야광주의 불빛으로 오키드를 확인한 루미낙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사브르를 얼굴 앞으로 치켜들었다.

“제국의 병사들은 대형을 갖추라!”

오키드의 날카로운 명령 아래 열 명 남짓한 제국의 병사들이
야광주를 공중으로 치켜든 타이샤의 주위로 분주히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푯말 안으로 들어선 이노를 등진 오키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검우 기사단을 마주했다.

“비켜라! 페어리스타의 마녀! 우린 저 낭인과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대륙에 널리 퍼진 검우 기사단의 명성이란 것이 고작 말싸움
실력이었나?”

살짝 내리깐 두 눈 아래로 오키드의 핑크빛 입술이 비웃음으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개 같은 년!”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달려 나온 세 명의 거한이 오키드를
향해 일제히 짧은 검을 내리쳤다.

“감히!”

‘쨍’하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기세로 내리치던 검은 오키드의
앞을 막아선 타이샤의 두꺼운 원형 고리에 들러붙어 버렸다.
자신의 머리보다도 큰 은색 고리를 쥐고 있는 타이샤의 왼쪽 팔뚝에는
남자 세 사람 분의 힘만큼 굵은 심줄이 진하게 돋아났다.

“자석이로군.”

란크레샤에 묻은 검은 피를 닦아 내며 일행들에게 다가가던
이노가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페어리스타의 마녀들은 다른 대륙 출신이 많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군.”

이노 곁에 다가온 빅토르가 검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그의 머리 속에 과거 용병 시절에 겪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륙을 넘나들며 인간과 괴물 등 수많은 적들과의 싸움에서
보았던 다양한 형태의 무기들과 기술들이 머리 속에서 연속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링에 달라붙은 검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채 예상치도
못한 사태에 당황한 사나이들의 등 뒤에서 증원 병력이 가세하려고 할
때였다.

“소드 브레이커!”

힘겹게 왼쪽 팔뚝으로 버티고 있던 타이샤의 오른팔이 크게 반원을
그리며 손에 들고 있던 톱니가 달린 검으로 왼손에 쥔 링에 걸쳐 있는
세 자루의 검신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으로
잘린 검을 쥐고 있던 사나이들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검우 기사단은 이스트반을 제외하면 모두 허수아비라는 말이군.
한 명의 계집아이도 감당하지 못하는 실력이라면 나 혼자서 너희
전부를 감당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는데?”

“이런 발칙한 년이!”

“그런 변변찮은 실력이라면 내 동생을 먼저 상대하는 게 낫겠다.
루미낙!”

오키드의 매서운 목소리에 검우 기사단의 시선이 루미낙을 향했다.

‘제길….’

“이번 일에 따라서 너의 자매련 복귀가 어쩌면 가능해질지도 모르지.”

“오키드님!”

오키드를 바라보는 타이샤의 눈동자가 커졌다.
추방된 자매련의 멤버가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려면 자신보다
상급 서열의 멤버가 자매련을 탈퇴해야 한다는 규칙은 자매련의 후보인
타이샤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자매련의 단장이었던 시엘이 같은
방법으로 도망자 신세였던 오키드를 구하고 자매련을 탈퇴한 전례는
자매련 내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시엘이
아론 이스트반과의 대결에서 목숨을 잃기 전의 일이었다.

“언니….”

“그렇다면 저년을 먼저 없애고 너를 베어 주겠다.”

손도끼를 양손에 든 붉은 얼굴의 사내가 기세 좋게 입을 열었다.

“손님께 길을 비켜 드려라!”

오키드의 말에 길을 막아선 일행들이 분주히 양옆으로 비켜났다.

“뒤에서 협공할 생각이라면 아예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페어리스타의 마녀.”

오키드의 옆을 지나며 붉은 얼굴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죽는 것이 두려운가?”

“죽는 것이 두렵냐고?”

되묻는 사나이의 말에 강습대 일행이 일제히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순간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된 분위기가 툭 하고 끊어지며 삽시간에
요란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주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뭐야 저 녀석들? 화를 내다가 웃다가.”

빅토르가 황당한 듯 입을 열었다. 요란하게 이어졌던 웃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자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 모를 비장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이빨이다.”

이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친구의 시체를 넘어 여기까지 왔네. 어깨에는 칼 한 자루,
등을 떠미는 사신의 낫.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검우 기사단의 전투가다.”

삶과 죽음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낮게 읊조려지는
노래에 제국군과 페어리스타 자매련은 전율을 느꼈다. 애초에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듯한 비장함이 그들의 얼굴에 녹아
있었다. 푯말을 넘어 다가오는 검우 기사단의 모습에 루미낙은
마른침을 삼켰다.

............

“늦진 않았군.”

성의 뒤편으로 통하는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사내의 널따란
등 근육이 달빛을 받아 거칠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위를 뚫어 버릴
듯한 우악스러운 손과 깎아 놓은 듯 탄탄한 다리의 근육이 재빠르게
반복되며 암벽을 거슬러 내려가는 가운데 사내가 무덤덤하게 중얼
거렸다.

‘이제는 오우거들이 습격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지. 다리에 걸린 마력도 이젠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고...
대륙 곳곳에 퍼진 페어리스타 자매련들도 하나 둘씩 불러 모아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검귀령에 대한 소문이 꽤 신경쓰이는군.
아론 이스트반이 정말 살아 있다는 것인가?’

암벽 끝에 내리뻗은 바위 위에 내려선 사내가 가볍게 몸의 근육을
이완시키자 몸 곳곳에서 관절들이 요란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발치에 자리잡은 철문을 들어 올리자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널따란 공간이 모습을 나타냈다. 허리 높이의 공간으로 들어선 사내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정교한 문양이
아로새겨진 은색의 브레스트 플레이트(Breast Plate)였다.
널따란 사내의 가슴에 들러붙듯 갑옷이 자리를 잡자 뒤이어 같은
소재의 파트들이 하나 둘씩 사내의 몸에 감기기 시작했다.

“살이 좀 붙었나?”

은색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사내가 가볍게 허리를 돌리자 찰랑거리는
갑옷의 마찰음이 청량하게 울려퍼졌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이 갑옷도 벌써 10년 가까이 입는군.
처음 이 갑옷을 손에 넣었을 때가 벌써… 응?”

드래곤의 머리처럼 생긴 투구를 머리에 눌러쓰며 과거의 회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던 사내의 귓전에, 친숙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검은 이빨… 검우 기사단이 왜 여기에?”

바닥에 놓인 자기 키보다도 큰 랜스를 마지막으로 집어 든 사내는
갑옷을 입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날렵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뛰어올라 갑옷이 들어 있던 지하 창고를 빠져나왔다. 느긋한 걸음으로
통나무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사내의
눈이 무섭게 커졌다.

“이런 망할!”

푯말을 경계로 안과 밖에서 대치 중인 수십 명의 사람을 바라보는
사나이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미 바닥에 나뒹구는 정체 불명의
시체들을 통과하여 수십 명의 남자들이 푯말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놈들이 검우 기사단인가? 게다가 페어리스타 자매련? 멈춰라!”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 찬 사나이의 몸이 한차례 떨리는가 싶더니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위험하다!”

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검우 기사단의 모습에 뒷걸음치던 이노는
거대한 기운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해!”

이노의 외침과 동시에 상황을 깨달은 검우 기사단과 일행들은 일제히
몸을 던져 바닥에 내리꽂히는 커다란 기운을 피했다. 거대한 흙먼지가
가라앉자 땅에 내리꽂힌 거대한 랜스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이 랜스는 어디에서 날아온….”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암벽 쪽의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거대한 인영이 있었다.

‘우라질, 이놈의 랜스는 왜 이리 탄력이 좋아 가지고.’

투덜거리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사나이가 자리에 모인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용기사!”

“다리의 유령!”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다른 비명들이 내뱉어졌다.
황급히 무릎을 꿇고 정체 불명의 사나이에게 예를 갖추는 페어리스타
자매련과 제국군 일행, 그리고 얼이 빠진 듯 사나이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검우 기사단과 이노 일행의 상반된 시선이 교차했다.

“흑, 이노 형. 아… 아파….”

“응? 뭐 하는 거야, 아란.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는 용기사의 등장으로 또다시 허리가 꺾인 채, 이노의 어깨에
들린 아란이 비명을 내질렀다.

“너희들은 자이센 제국의 성역을 침범했다.”

일체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용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용의 머리를 따서 만든 투구와 갑옷을 타고 내려가는
용의 비늘과 같은 문양도 그러하였지만 손잡이 부분에 용머리가 두껍게
양각된, 키를 훌쩍 뛰어넘는 랜스가 소름 끼치는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전설의 주인공 앞에서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엄습하는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자이센의 평화를 깨는 자들은 내 손으로 처단….”

“리카론 황제?”

무거운 정적을 깨고 입을 연 것은 내던지듯 아란을 바닥에 내려놓은
이노였다.

검귀령 The Ghost Blade - 018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8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뭘 하고 계신 겁니까?”

느닷없이 자신의 말을 가로막은 너절한 행색의 낭인을 훑어본 용
기사가 뒷걸음질치며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리카론…이 아니다. 나는… 자이센의 수호자인 용기
사… 카론이다.”

“카론? 목소리가 리카론인데?”

지루하다는 듯 담배를 빼어 무는 이노의 말에 무거운 긴장이 깨
어지며 군데군데서 사람들의 웅성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
지기 시작했다.

“리카론?”

“그럼 다리의 유령의 정체가 리카론 황제?”

‘이런 우라질, 저놈은 대체 뭐야??!’

동요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당황한 리카론의 얼굴이 투구 안에
서 점점 상기되고 있었다.

“모두 닥쳐라! 감히 황제폐하를 모독하는….”

“오키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는 사태에서 벗어나기를 모색하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온 오키드는 순간 자신에게 모이는 수
십 쌍의 시선에 못박힌 듯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이어
용기사에게서 나온 ‘오키드’란 이름에 좌중의 시선이 다시 용
기사에게 향했다.

“정말 리카론인가 본데?”

“아니, 황제라는 작자가 왜 밤마다 용기사 흉내를?”

“혹시 변태 아냐?”

“에에에에잇! 시, 시끄럽다. 모조리 두 동강을 내주마!”

“후훗,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이걸 보시지.”

분노한 리카론의 모습에 이노는 여유롭게 담배를 꼬나물며 품에
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자이센을 분열시킨 3년 간의 내전이 모두 이 한 장의 문서에
들어 있다.”

“무슨 소리냐!”

리카론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제국의 국공인 헤르초크와 교황파의 추기경 론폴트의 서명이
들어 있는 ‘내전 유지 각서’다!”

“뭐라고?!”

순간 당황한 것은 리카론뿐만이 아니었다. 검우 기사단과 페어리
스타 자매련, 제국의 병사들까지. 이노의 일행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얼굴에 경악의 표정이 드러났다.

“믿지 못하겠다면 나머지 한 장의 각서도 마저 보여 주지. 위조
불가 마법까지 걸려 있는 문서이니 위조의 의심은 갖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빅토르!”

순식간에 급변한 상황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빅토르가 이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 문서는 방금 전 헤르초크의 저택에서 가져온 것이오. 이것
으로 기나긴 내전이 끝나길 빌겠소. 리카론 황제!”

품안에서 꺼낸 또 한 장의 문서를 빅토르가 이노에게 건넬 때였
다.

“우리도 그 내용을 봐야겠다!”

거친 목소리와 함께 일행을 둘러싼 이들이 분주히 이노에게 달려
들었다.

“자, 보아라 이 두 장의 문서가 바로. 아악!!!!”

순간 이노의 양손에 들린 두 장의 계약서가 화르륵 타오르기 시
작했다.

“우라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네가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란 게 그 조악한 불쇼인가?”

“아니 이런 망할! 이게 아니고!”

리카론의 차디찬 말 속에 이노는 당황한 듯 검게 그을린 손을 양
쪽으로 비벼 댔다.

‘제길, 자동 발화 주문이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루미낙은 자매련의 교육 과정 중에
들은 바 있던 마법 수업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동 발
화 주문이란 특정한 계약 관계에 있는 물체가 일정한 조건에 도
달했을 때 양측이 모두 불타 사라지는 파괴 주문이었다.
다리의 유령, 아니 다리의 유령으로 변신한 리카론이 어깨에 걸
친 랜스를 양손으로 모아 잡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애송이여. 방금 전에 저지른 거짓말까지 합하
여 지금 당장 차디찬 시체로 만들어 주마.”

분노와 당황이 뒤섞인 리카론의 목소리가 투구속에서 튀어나왔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이노는 바닥으로 늘어뜨렸던 란크레샤를 정면으로 치켜들었다.

“벌써 무덤 안에 누워 있었을 거야.”

‘란크레샤!’

리카론, 아니 카론의 눈동자가 크게 켜졌다

검귀령 The Ghost Blade - 019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9


저택에 도착한 헤르초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횃불을 손에 든 제국 병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지키고 있는 정문을
통과하자 정원 곳곳에는 핏자국과 함께, 떨어져 나간 짐승의 팔다리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도대체 누가… 아뿔싸!’

느닷없는 습격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였을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헤르초크의 깡마른 몸이 황급히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설마… 설마….’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의 기관 장치들을 민첩하게 피해가는
헤르초크의 머리 속은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인데… 설마….’

부서진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헤르초크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문턱에 기대어 휘청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킨 헤르초크는
열린 옷장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초점이 풀린 눈과
비 오듯이 흘러나오는 땀이 얼굴의 주름을 타고 흘러내렸다.

“론폴트… 론폴트를 만나야 한다.”

힘없이 중얼거린 헤르초크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한 마리의 전서구가 깨진 유리문을 통해 방 안으로 날아왔다.

“으음, 누가 보낸 것인가?”

양피지에 적힌 서명은 론폴트가 아닌 집사의 것이었다.
비상시에만 사용하기로 한 일종의 비상 연락이라는 의미였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음?”

‘쥐새끼가 치즈를 물어갔다. 남은 조각을 잘 간수 바람.’

순간 가뜩이나 찌푸려져 있던 얼굴의 헤르초크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론폴트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계약서를 도둑맞았다는 반갑지 않은 메시지였지만 헤르초크는
오랜 악몽에서 깨어난 듯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

“네놈이 아론 이스트반인가?”

본연으로 돌아간 리카론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메아리쳤다.

“역시….”

이미 경기장에서 리카론의 목소리를 들은 바 있는 검우 기사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그렇다면 네놈이 들고 있는 그 검이 아론 이스트반의 마검
란크레샤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

“마검 란크레샤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대륙을 통틀어 단 한 사람,
아론 이스트반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느냐?”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네놈은 아론 이스트반인가?”

“아니다.”

이제는 시가까지 피워 문 이노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에에잇, 그렇다면 네놈은 대체 누구냐?!”

분노에 찬 리카론의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목소리 하나는 정말 굉장하군.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나저나….’

이노의 입꼬리가 왼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랜스를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조심해야겠는걸?’

두 손을 모아 어깨에 걸치고 있던 란크레샤를 앞으로 모은 이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겠군. 네놈을 죽이고 란크레샤를 빼앗아
버리겠다. 하지만 그전에….”

랜스를 몸통과 손잡이를 가로로 모아 잡은 리카론이 입을 열었다.

“겁도 없이 여기에 모인 떨거지들을 모두 쓸어버려야겠다!”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2미터가 넘는 랜스가 절반으로 분리되며
양손에 나누어졌다. 그와 동시에 쌍검으로 탈바꿈한 랜스를 든
리카론의 신영(身影)은 유령처럼 사라져 버렸다.

“뭐야?!”

“으아악!”

이노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리카론의
모습을 찾고 있는 가운데 푯말의 경계에 서 있던 검우 기사단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수비 대형을 갖춰라! 당황하지 마라!”

양손에 손도끼를 치켜든 리더 격의 사내가 거센 호통을 내지르는
가운데서도 비명 소리는 하나 둘씩 늘어 가고 있었다.

‘뭐야? 이 빠른 스피드는?’

비록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이라고는 하지만 대륙의 최정예로
소문난 검우 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궤멸되어 버리는 상황에
일행들의 몸에는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등을 맞대고 모여라. 흩어지지 마라!”

계속되는 비명 속에서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 대던 손도끼의 사나이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등을 맞댈 동료들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 우으… 괴…물….”

일격에 숨이 끊어진 자들과 달리 팔다리를 잃은 채 피바다 속에
나뒹구는 소수의 자들이 내뱉는 신음이 피범벅이 된 아수라장에
울려퍼졌다.

“리… 리카론 황제….”

동료들의 주검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문득 머리
위에서 커다란 압력을 느끼고 양손의 도끼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어리석은 자에게 줄 선물은 죽음뿐이다.”

천둥과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만월을 등진 리카론의 몸이 무서운
기세로 사나이의 몸을 반쪽으로 갈라 버렸다.

‘역시 쌍검이었군. 예전과 변함없이….’

백지처럼 질려 있는 일행들을 등진 이노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오키드.”

피바다의 한가운데에서 리카론의 엄지손가락이 바닥을 향해 내려가자
리카론을 향했던 오키드의 시선이 어느새 등 뒤에 선 제국의 병사들을
향했다.

“그대들의 충성심은 잊지 않겠다.”

달빛에 비친 오키드의 뇌쇄적인 미소에 스무 명 남짓한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순간 하나 둘씩 옷을 벗기 시작하는
오키드의 모습에 병사들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갔다.

“고개를 돌리지 마라!”

타이샤의 매서운 고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병사들은 순백의
나신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껍질을 벗듯 한 꺼풀씩 벗어 내린 옷들이
발치에 쌓여 가자 은색의 눈부신 레이피어가 튀기듯 공중으로 떠올랐다.
달빛에 반사되는 레이피어의 검광에 병사들의 시선이 향했을 때,
믿어지지 않는 빠른 속도로 병사들의 이마에는 붉은 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을 확인한 오키드가 리카론을 향해 고개를 굽혀
예를 표했다.

“역시 극락검(極樂劍)의 오키드다. 예리함과 빠른 속도는 실로
눈이 부시군.”

피가 떨어지는 쌍검을 숨이 남아 있는 검우 기사단의 몸에 힘주어
내리꽂은 리카론이 이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진 신경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루미낙은 황제가
다가오자 사브르에 시전한 마력을 거두며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루미낙 페어리스타!”

“넷!”

“도망칠 수 있다면 아주 멀리 도망치도록 해라.”

아무런 억양 없는 리카론의 목소리에 루미낙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났다.

“살아 있었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장님.”

리카론이 내민 두터운 건틀렛을 가볍게 맞잡으며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대장?’

어느새 옷을 갖추어 입은 채 리카론의 뒤를 따르던 오키드의
머리 속이 빅토르의 한마디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리고 네놈!”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는 큐이와 뮤세트에게는 시선 한 번 던지지
않은 채 이노의 앞까지 다가간 리카론은 투구를 벗어 뒤를 따르는
오키드에게 건넸다.

“네놈은 대체 누구인가? 소문으로 도는 검귀령이 바로 네놈인가?”

건틀렛을 낀 오른손으로 투구에 눌린 백발을 뒤로 갈무리하자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흰색의 콧수염 끝에서 떨어졌다.
리카론의 얼굴과 그의 등 뒤로 깔린 시체를 번갈아 쳐다보던
이노는 순간 머리 속에 갑자기 번지는 어찔거림을 느꼈다.

‘이… 이 기분은 도대체 뭐지?’

이유 모를 분노로 속이 메슥거림을 느낀 이노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이노 형! 괜찮아? 아얏!”

이노의 뒤에서 리카론을 훔쳐보던 아란이 이노의 몸에 떠밀리며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겁을 먹었는가?”

이제는 고깃덩어리가 된 검우 기사단에 못박힌 듯 시선을 고정시킨
이노가 순간 란크레샤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노!”

“이노님!”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당황하던 일행은 앞뒤 가리지 않고 리카론의
앞을 급히 막아서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란크레샤를 바닥에서 뽑아
든 이노가 일행의 머리를 뛰어넘어 공중제비를 돌더니 리카론의
머리로 검을 내리찍었다.

“폐하!”

검을 뽑을 새도 없이 리카론의 앞을 막아서며 들고 있던 투구로
이노의 검을 받아 낸 오키드는 검의 압력에 밀려 어깨가 부러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 오키드에게 내리꽂히는 검을 리카론의 왼손
건틀렛이 움켜쥐자 번쩍거리는 스파크가 사방에 진동하며 이노와
리카론이 동시에 뒤로 나가떨어졌다.

“오키드님!”

정신을 잃은 오키드에게 달려오던 타이샤와 수행원들은 몸을
일으키는 리카론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되었다.

“의사에게 데리고 가라, 어서!”

칼날이 절반이나 내리꽂힌 투구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정신을
잃은 오키드를 업은 타이샤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붉은 로브들이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대가 말하던 무인의 기상이 고작 이런 것이었나? 리카론 대장!”

사자의 갈기처럼 뻗친 회색의 머리칼 아래 분노로 붉게 물든 이노의
눈이 리카론에게 못박혔다. 미스릴의 강력한 반탄력에 의해 내리치던
검의 탄력이 되돌아온 탓인지 란크레샤를 움켜쥔 양손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검귀령이다!”

빅토르의 입에서 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론 이스트반!”

한 발로 시체를 밟고 자신의 쌍검을 빼어 든 리카론이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이노에게 달려들었다. 뒷걸음치는 이노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리카론의 팔이 풍차처럼 휘둘러질 때마다 거칠게 튀기는 스파크에
일행은 얼굴을 가리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안 보여.”

일반인을 훨씬 뛰어넘는 체형의 이노와 이노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큰 리카론은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서로의 허점을 노리며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게를 담아 휘두르는 검의 위력
때문인지 어느새 높게 피어 오른 먼지 구름이 주위를 자욱이 감싸기
시작했다.

“저게… 이노 형 맞(아??)어…? 어?”

말을 꺼내던 아란은 코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손을 가져다 대었다.

“피…??”

순간 놀란 표정의 빅토르가 황급히 아란의 양쪽 귀를 손으로 틀어
막았다.

“다들 귀를 막아라!”

빅토르의 말을 마지막으로 일행의 귓속에서는‘웅웅’거리는
바람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귓속의 통증을 느낀 일행은
허리를 굽힌 채 귀를 틀어막았다.

‘말이 되는 거야? 검이 부딪치는 소리로 코피가 나다니.
미친 인간들….’

몰아치는 바람에 고개를 웅크린 루미낙의 머리 속에 며칠간
마주했던 괴물들이 하나 둘씩 스쳐 지나갔다. 식인룡 아르칸,
검귀령 이노, 단순한 장물애비라고 알고 있었던 빅토르와 가까이
섬기고 있었으면서도 지금껏 알지 못하던 황제인 리카론의 정체 등.
불과 며칠 전까지 품고 있던 자존심이 산산이 머리 속에서 쪼개지고
있었다.

검귀령 The Ghost Blade - 020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20


“빅토르, 여기다!”

등 뒤에 프랑시스카(Francisca)를 엑스자로 교차해 멘 수염투성이의
사내가 한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얼굴에 흐르는 피를 훔쳐 내며
거칠게 소리쳤다. 사나이의 외침에 황급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갈색
곱슬머리의 소년이었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의 손에는 칼 대신
가죽을 덧대어 만든 닳아 빠진 잡낭이 들려 있었다. 사나이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가방에서
붕대와 지혈초를 꺼내는 몸놀림은 본능처럼 재빨랐다.

“아론은 어디 있나?”

손잡이가 피범벅이 된 프랑시스카를 바닥에 내려놓은 사나이가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굽히고 있던 한쪽 무릎을 펴며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장님과 함께 수색을 하고 있어요.”

암석투성이의 바위산, 붉은 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이센
북쪽의 몬스터 출몰 지역이다. 바위로만 이루어진 급경사의 험한 지역과
더불어 벌써 몇 달째 불규칙하게 근처 마을을 습격 중인 만티코어
(Manticore)의 악명이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달 초, 자이센 제국의 근위여단이 퇴치를 위해 출정한 적이 있지만
오르기조차 버거운 험악한 지형에 혀를 내두르며 인근 마을의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자이센 국왕이 어떤 보상을 줄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희생이 커. 5년째 용병단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이렇게 큰 피해는
난생처음이군. 절반이 죽어 나갔다니. 제기랄.
그런데 빅토르 너 올해 몇 살이지?”

“열다섯이오.”

“아론과 같은 나이가 아니냐?”

“네….”

“하핫, 알 수 없구만. 한 녀석은 검을 들고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한 녀석은 붕대나 갈아 주는 신세라니.”

말을 마친 수염 투성이의 사내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붕대를 감고 있던 빅토르는 사내의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아 출신인 빅토르가 용병단에 들어온 것은 정확히 5년 전인 열 살
때였다. 맨 처음 같이 잔심부름을 하던 아론은 열두 살이 되던 해
검을 잡았고, 3년이 지난 지금은 용병단 내에서 누구도 꺾을 수 없을
만큼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친구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의
차이가 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퉷! 그 빌어먹을 마법사 새끼들을 믿다가 이렇게 희생이 커진 거야.
말만 뻔지르르한 개새끼들!”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 아래 몸의 일부가 날아가 버리거나 온몸에
무수히 박힌 바늘의 독에 몸이 푸르게 변한 채 죽어 있는 로브
차림의 시신들을 바라보며 사내가 가래침을 내뱉었다.
대륙 내에서 가장 용맹하며 또 강력한 존재로 통하는‘황금 사자단’은
150명의 정예들로 구성된 용병 집단이었다.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이미 용병들 사이에서‘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아론 이스트반과 같은 젊은 영웅들을 배출해
내며 대륙 각지의 내전과 몬스터 퇴치의 선봉에 나서는 명문 용병단이다.

“상처는 좀 어떤가?”

붕대를 감고 있는 빅토르의 등 뒤로 거구의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 이래 가지고 뭐 남는 게 있겠수?”

하얀색의 장발과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내는 양 손목에 동여맨
가죽끈을 풀어, 으깨져 버린 강철 버클러(Buckler)를 떼어 내고 있었다.

“남는 게 있긴 있지. 아론! 머리를 가져와라!”

바위 위에서 뛰어내린 소년, 검은 머리에 깎아 낸 듯한 수려한
얼굴과는 달리 가죽 갑옷 밖으로 드러난 굵은 팔뚝엔 단단한 근육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대장을 향해 치켜든 그의 손에는 사람의 다섯
배 정도 되는 커다란 머리가 들려 있었다. 사람과 닮았지만 사자처럼
갈색 갈기가 달린 노인의 얼굴이었다.

“저것 하나 때문에 동료들이 수도 없이 죽었수다.
실력 좋다던 마법사 놈들은 주문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채 초반에
모두 박살나 버렸고. 저놈이 뿜어 대는 독침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오? 두 번 다시 이런 괴물들과는 상대하고 싶지 않소.”

“남은 인원은 몇 명인가? 아론?”

사내의 불평을 다 듣고 난 남자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82명입니다.”

변성기를 채 지나지 않은 아론의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흘러나왔다.

“희생자들의 시체를 한데 모으고 남은 인원들은 진형을 편성해서
왕궁으로 귀환한다.”

“제기랄! 숨 돌릴 새도 없군. 리카론 대장 돌아가면 일주일 정도는
푹 쉽시다.”

빅토르가 치료를 마무리하자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수염
투성이의 사내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계집과 술이 필요하오. 대장!”

“웨스트 엔드로 바로 가자고. 왕궁은 뒤의 이야기야!”

어느새 주위에 모여든 상처투성이의 부하들을 둘러본 리카론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좋아. 이 빌어먹을 만티코어의 몸뚱이를 넘기고 나서 받을
보상금으로 신나게 놀아 보자!”

“좋았어! 그 약속 잊지 마슈!”

피투성이가 된 몸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용병들은 기쁨에
들떠 환호성을 질렀다.

“아론!”

분주히 주위를 정돈하는 부하들을 등지고 리카론이 입을 열었다.

“나는 황제가 되겠다.”

낮지만 단호한 사나이의 목소리에는 강한 신념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네가 꼭 나의 곁에 있어 줘야 한다.”

“따르겠습니다.”

“그 약속 잊지 마라!”

그로부터 5년 후, 자이센 제국의 수도를 단 5000명의 용병으로
장악하고 황금 사자의 깃발을 올린 이는 바로 아론 이스트반이었다.
20세의 나이에 대륙 최고의 검사로 떠오른 아론을 사람들은‘묵계의 사신’
이라 불렀다.

............

“그런데 어쩌다가 이놈과 친구가 되었는지….”

용병단 시절, 같은 나이였지만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 존재인
아론 이스트반의 기억을 떠올리며 빅토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용병단이 당시 왕국이었던 자이센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용병단을
탈퇴한 스무 살의 빅토르는 이후 그레이 섀도우라는 정보 조직을
만들어 조직의 우두머리로 활동했다. 일개 낭인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폭넓은 인지도를 얻어 사냥꾼 길드와 손을 잡기까지의
긴 여정 중에 빅토르는 낭인 시절의 이노 세리에를 사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노 세리에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 아론 이스트반과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한동안 빅토르를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사건이기도 했다.

“바로 네놈이었군, 검귀령의 정체가!”

검의 풍압으로 어지러이 날리는 백발을 쓸어 넘길 사이도 없이
매섭게 몰아치는 검귀령의 검에 리카론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웃어젖히고 있었다.

“아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나의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금 네놈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놈을 손아귀에
넣고 말 테다!”

“말이 많으시군요. 폐하.”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몰아치는 검과 검의 공세 속에 번쩍이는
스파크만이 밤하늘의 별처럼 땅 위에 수놓아지고 있었다.

“제길, 언제까지 칼부림을 할 참이야.”

귀를 틀어막은 빅토르가 몰아치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때였다. 커다란 섬광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승부다! 규칙은 알고 있겠지?”

란크레샤와의 충돌로 군데군데 갈라진 검을 허리에 갈무리하며
리카론이 입을 열었다.

“이쪽이다.”

황금빛의 통나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간 리카론은 다리를
고정시킨 굵은 강철 말뚝 근처로 다가갔다. 어른 다섯 명이
나란히 늘어선 넓이의 두터운 통나무 다리를 고정하고 있는
말뚝의 밑동에는 사슬로 연결된 황금색의 굵은 수갑 한 쌍이
매여 있었다. 아마도 특수한 마법력이 깃들어 있는지 다리와
같은 황금색의 빛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저것은… 설마.”

멈춰 버린 검성(劍聲)에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뗀 빅토르는
다리로 다가가는 리카론과 이노의 뒷모습을 쫓았다. 리카론이
손에 든 수갑의 의미를 빅토르는 알 수 있었다. 용병 시절,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조직을 배신한 자를 정당하게 처단하기
위해 리카론이 고안한 결투 방법. 바닥에 고정된 말뚝에
사슬로 연결된 수갑을 한쪽씩 차고 제한된 신체 조건으로
둘 중 한 명이 일어서지 못할 때까지 검을 겨루는 방법이었다.

“뭘 하려는 거야? 저 두 사람.”

특유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이 반죽음이 된 얼굴로
루미낙이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이것은 황궁의 마법사들이 마력을 주입한 황금 수갑이다.
물리적인 충격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파괴 불가 마법이
걸려 있다. 그리고 이번엔 어드벤티지를 부가하도록 하지.”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건틀렛을 벗은 왼쪽 손목에
황금색 수갑을 찬 리카론이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폐하!”

이 의외의 장면에 가장 당황한 건 루미낙이었다. 루미낙의
외침과 더불어 큐이와 뮤세트, 빅토르와 아란도 놀란 듯 이노에게
달려갔다.

“어서 오라! 검귀령! 소유할 수 없다면 죽일 수 밖에 없다.”

왼쪽 손목에 걸려 있는 황금빛 수갑에 온몸을 지탱한 리카론이
허리춤의 검을 빼들며 소리쳤다.

“이노, 아니… 검귀령!”

란크레샤를 검집에 넣은 채 수갑을 오른손에 든 이노의 주위로
일행들이 모여들었다.

“이노… 형.”

귀기 어린 매서운 이노의 표정에 감히 접근할 엄두는 내지
못한 채 주위를 둘러싼 일행들의 얼굴에는 걱정과 긴장이 잔뜩
서려 있었다.

“폐하….”

고개를 숙인 채 내뱉듯 리카론을 부른 아란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전히 바보로군.”

수갑을 땅에 떨군 아론이 성큼성큼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순간 굳은 듯 아론의 주위에 멈춰 섰던 일행들도 하나 둘씩
주춤거리며 아론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황금 다리에 매달린
리카론의 모습을 흘끔거리며 쳐다보던 루미낙도 결국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서둘러 일행의 뒤를 쫓았다.

“이놈 무슨 짓이냐?”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리카론의 절규가 밑을 알 수 없는 깊은
계곡에 메아리쳤다.

“검! 검귀령! 이노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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