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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검귀령 011~015

먼저 이글은 펌글임을 알려드립니다
작가님께 메일을 드렸으나 네이버3의 특성상 어디로 퍼가는 지는 말씀드릴수
없기에 대충 둘러대고 퍼옵니다 만약 이글이 문제가 된다면 제가 자진
삭제 할테니 게시지기님께서는 봉사명령 같은건 내리지 마시길 ㅡㅡ;
그리고 추가로 검귀령은 현재 2권까지 출간이 됏으나 작가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는 이유리 첫화부터 인터넷 연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출판된책이라고 머라고 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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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령 The Ghost Blade - 011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1



intro
남자의 굵은 팔은 생명을 쓰러뜨리고
여자의 가는 팔은 생명을 품에 안는다.
―시엘 페어리스타


“남은 인원은 이것뿐인가?”

귀밑까지 자른 붉은 머리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푸른 눈의 여자.
자이센의 황제 리카론의 근위 여단 직할인 여성 특수 부대 페어리스타
자매련의 서열 1위인 시엘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직할 부대인 흑련(黑蓮)
소대는 비스툰 성의 복도에서 아론 이스트반을 필두로 한 검우 기사단과
대치 중이었다. 불과 몇 번의 검성(劍聲)으로 붉게 물든 상앗빛 벽 앞에
검은색의 하프 아머(Half Armor)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무척이나 언밸런스한 느낌의 시엘이 입을 열었다.

“넷, 지금 이 자리에 남은 여덟 명이 전부입니다.”

사브르를 빼어 든 앳된 모습의 루미낙이 긴장감에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시엘은 루미낙이 이 암살 작전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론이라는 존재는 페어리스타의 초년병인 루미낙이 감당하기에는
불가항력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예상대로의 출혈이군. 어쨌거나….”

싸늘히 식어 가는 부하들의 시체를 돌아보던 시엘의 시선이 아론에게
고정되었다.

“다시 돌아올 순 없습니까? 아론 경. 폐하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론은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아론을 호위하던 스무 명 정도의 검우 기사단 역시 절반 이상이
페어리스타와의 전투로 인해 시체로 변해 버렸다. 병력상의 손실이라면
동률에 가까웠지만 연약한 이미지의 여전사들과 대륙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점에서는 사뭇 의미가 달랐다.

“황제는 변했다. 너도 그걸 알고 있지 않은가.”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아래로 비스듬히 날을 뉜 브로드소드를 아론은 가벼이 발끝으로 차
올렸다. 검날을 따라 흐르던 피가 탁 튀며 날이 바로 섰다.

“인간은 고집스러워야 한다. 신념이나 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런 고집조차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불릴 의미가 없다.
나는 아들을 독살해 버린 자를 군주로 섬길 수는 없다.”

“어쩔 수 없군요.”

아론의 눈에 또렷하게 떠오른 신념을 재확인한 시엘이 고개를 저으며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발럭 나이프(Ballock Knife)를 꺼내 들었다.

“공평하지 못한 조건이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아론이 입을 열었다.

“뭐가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의 시엘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장소 때문이라면 옮겨 주겠다. 너의 무기는 원래 장창이 아닌가?”

“검을 잡기 시작할 때부터 뭔가 공평한 조건을 기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그런 칼을 사용하는 것인가?”

감정이 배제된 아론의 나지막한 말에 시엘은 속마음을 들킨 듯
가볍게 웃었다. 시엘이 아론을 직접 본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마치 잠들어 있는 흑룡과 같았다.

“이곳은 브로드소드를 휘두르기에도 그리 너그러운 공간은 아닙니다.
서로가 바쁜 처지니 어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요.”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길.”

“당신의 신념, 기꺼이 받겠습니다.”

순간 시엘의 푸른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 붉게 바뀌었다.

............

“자, 그럼 모두 기도합시다.”

갈색 로브를 입은 수도사의 목소리에 루미낙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또 언니 꿈이야. 요즘 들어 부쩍 많이 꾸게 되는….’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신께 감사드리며 그의 영광이
대륙을 휘감고 모든 제국의 약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루미낙은 흘끗 시선을 던져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 눈을 감은 이노를
바라보았다.

‘이노가 정말 아론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시엘 언니를
누구보다 존경한 주제에 그런 그와 같이 있어도 되는 것일까. 나는….’

낮게 읊조리는 수도사의 기도문 속에서도 루미낙의 머리 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또, 검은 빵이야.”

이노와 아란에게는 다를 게 없는, 굳이 말하자면 평소보다 조금
빈약한 정도의 식탁이었지만 최근 들어 멀기만 하던 평민의 생활을 접해
보게 된 큐이는 서글픈 현실에 말을 잊었다. 이것저것 투정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이노의 마지막 말에 희망을 얻어 기운찬 행군을 거듭하여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의 머리 속엔 푹신한 침대와 푸짐한 만찬,
따스한 목욕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불행은 언제나 되풀이된다’라고 했던가? 군데군데 기워 놓은
구호소 천막은 큐이의 가슴속을 산산이 찢어 놓고 말았다.

“자, 그럼 평안한 휴식을… 이노님, 식사 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럼….”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젊은 수도사의 미소에 이노 역시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루미낙은
포크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검은 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묵묵히 빵을 씹어 삼키던 큐이와 뮤세트는 생각에 빠진 루미낙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왜 안 먹어요?”

긴장이 풀어진 멍한 얼굴로 방심하고 있는 루미낙을 빤히 바라보던
아란이 입을 열었다.

“너나 많이 먹으렴.”

이미 자기 몫의 빵을 해치워 버린 아란을 향해 빵과 수프를 밀어
놓으며 루미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미낙님 어디 가십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큐이가 입을 열었다.

“잠깐 바람이나 쐬려고. 금방 돌아올게.”

............

“황제폐하 입장이시오!”

경기장 전체로 퍼져 나가는 웅장한 나팔 소리와 함께 투기장 안에
빼곡이 들어찬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했다. 철혈대제(鐵血大帝)라고
불릴 만큼 무력의 상징처럼 대륙에 알려져 있는 자이센 왕국의 황제
리카론은 가문의 상징이 새겨진 황금색 망토에 보석이 촘촘히 박힌
왕관을 쓰고 입장했다. 머리가 둘 달린 검은 사자가 세밀하게 수놓인
망토 아래 나이에 걸맞지 않은 바윗덩이 같은 근육을 숨긴 채 오만한
시선으로 경기장을 굽어보았다. 5년 전 자신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아들 리카론 2세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려는 반란 세력에 대한
잔인한 학살(당시 반란 세력으로 규정되어 학살당한 인원은 10만 명,
제국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아들 리카론 2세는 왕비와 함께 독살됨)로 인해 자이센뿐만 아니라
주변 제국에까지 공포의 대명사로 군림해 온 이 시대 최악 혹은
최고의 사나이가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짐의 국민들과 먼 걸음을 한 주변 왕국의 귀빈들께
일단 감사를 드리오. 더구나 지금 이 시간에도 제국의 영광을
위해 전쟁터 곳곳에서 값진 땀을 흘리고 있는 젊은 병사들에게야말로
깊은 존경을 표하오!”

집음기(일종의 확성기)를 건네기 위해 황급히 달려오던 근위여단
소속의 기사는 투기장을 메아리치는 굵다란 목소리에 못박힌 듯
자리에 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격투 시합과 같은 제국의 정기적인
행사 때마다 금으로 정교히 세공된 집음기를 사용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리카론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짐승에 가까운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투기장을 꾸며 만들어 낸 사상 최고의 크기인 5만 명 규모의 경기장에
리카론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강철의 피가 흐른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군요.
가슴이 찌릿찌릿할 정도예요.”

투기장의 맨 가장자리, 녹색의 단아한 의상을 입은 귀부인이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위로 틀어 올려 고정시킨 금발과 귓불에 앙증맞게
부착된 금색의 귀고리가 그녀의 미모를 더욱 빛내 주고 있었다.

“우리가 저 야수를 쓰러뜨릴 수 있겠소, 부인?”

“글쎄요. 야수를 잡는 데 꼭 사냥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지금은 적당한 독과 정교한 덫이 더욱 필요한 시기 같군요.
가끔은 창보다는 독 묻은 바늘이 어울릴 때가 있는 법이죠.”

감정이 배제된 가늘고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갈색 로브 사이로
잔뜩 주름진 사내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나저나 정말 굉장한 일이네요. 내전 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륙 최고의 행사를 태연하게 치르는 저 뱃심이라니.
리카론이 아니면 누가 해낼 수 있는 일일까요? 더구나 적대국인
교황파의 인사들이 곳곳에 자리를 채운 것도 무척이나 눈에 밟히는
일일 텐데. 사자좌의 수호를 받는 짐승들의 왕답군요.”

여자의 입에서 가벼운 경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빌어먹을 점성술 이야기로군.’

여자의 옆얼굴에 슬쩍 시선을 던진 사내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감상적인 말씀을 하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륙 최고의 예언자이신 레이디 위버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저 같은 늙은이의 허리를 더욱 굽어지게 만드시는 겁니다.”

엄살에 찬 목소리로 론폴트가 입을 열었다.

“사람은 나이만큼의 지혜를 몸에 새겨 간다고 합니다.
귀공의 얼굴을 뒤덮은 수많은 세월의 물결들이 지혜가 아닌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론폴트 공.”

“목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로브의 그늘에 가려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여유가 넘치던
사내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곤두섰다.

“대륙 전체에서 신성한 무녀로 칭송받고 계신 위버님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저처럼 보잘것없는 자야 목숨을 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어느새 다가온 론폴트의 두터운 손이 슬그머니 위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타락 성직자의 추파에 미소를 머금은 위버의 분홍색
입술이 살며시 움직였다.

“확실히 모험이기는 하지만… 공을 둘러싼 이 용맹스러운 기사들이라면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극강의 실력을
지니신 분들이 아닙니까?”

론폴트의 손목을 슬그머니 풀어 낸 위버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론폴트와 같은 차림인 갈색 로브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3년 전의 사고로 인해 사물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게 손상되어 버린
위버의 눈에는 어슴푸레한 실루엣만 들어왔다. 갑옷도 칼도 없었지만
이들은 교황파 최고의 전사들인 검우 기사단의 일원들이었다.

“맹수는 이빨과 발톱이 뽑힌다고 해도 여전히 맹수인 것이겠지요.
조련사가 사라진 요즘 와서는 더욱 사나워진 것 같습니다만.”

일반인들 틈에 뒤섞여 있지만 장대한 기골과 뿜어져 나오는 강인한
기운은 쉽게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5만 명이 넘게 운집한 인파
속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구원인 셈이었다.

‘조련사.’

론폴트는 무표정한 위버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말한 조련사란 묵계의 사신이라 불리던 아론 이스트반을
지칭한 것이다. 교활한 음모의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수십 년을 걸어온
론폴트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름.
그것을 저 위버가 별안간 끄집어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의 경기는 역사에 남을 만한 공명정대하고 한 치의 오점도 없는
시합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다가올 내일의 영광이 아닌 오늘의
축제를 마음껏 즐기시오! 투사들의 두 팔에게 영광 있으라!”

리카론의 말이 끝나고 그의 손이 허공을 향해 번쩍 치켜 들려지자
경기장 안에는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황제과 마찬가지로
황금색 망토를 어깨에 걸친 500명가량의 제국 군악대원들이 황제의
자리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목에 돋아난 굵은 힘줄이 점점
선명해지며 웅장한 분위기의 진군가가 울려퍼지자 투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박수 소리와 함성이 하나가 되어 천지를 진동시켰다.

“전쟁이란 말이로군요. 칼이 아닌 라켓을 든.”

경기를 앞두고 연주된 음악이 평소와 같은 행진곡이 아닌 전장에서
울려퍼지는 진군가라는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감겨 있던 위버의 잿빛 눈동자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

“이노 형제님. 요즘 들어서 대륙의 정세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텁수룩한 턱수염과 짧은 금색의 머리칼, 움푹 팬 갈색의 눈동자에서
발산되는 강인한 눈빛이 인상적인 갈색 로브 차림의 수도사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우리와 같은 수도사들보다는 이노님처럼 이곳저곳 전장을
떠돌아다니시는 분들이 더욱 예민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제의 햇볕이 오늘도 똑같이 내리쬐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약속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사내의 얼굴을 담담히 바라보던 이노가 입을 열었다.

“내놔!”

“아, 아니. 뭘… 말씀이십니까?”

“백수로 있을 땐 시체놀이에 재미 들려 있더니 이젠 사제놀이냐?
어서 내놔.”

순간, 온화한 빅토르의 표정에 망설이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생각하듯 비스듬히 몸을 돌린 빅토르의 오른손이 이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느릿한 손놀림으로 갈색의 로브 자락을 헤치고
허리춤으로 다가갈 때였다.

“손을 빼라. 몸이 두 동강 나기 싫다면.”

무섭게 치켜뜬 이노의 눈이 반쯤 몸을 돌린 빅토르를 쏘아보았다.
그의 검 란크레샤 역시 거대한 검신을 검집에서 반쯤 꺼내 놓은 채였다.

“이노님… 이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처럼 빅토르의 표정엔 당혹감이 드러났다.

“제기랄,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갈색 로브의 수도사 ‘세인트 빅토르’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 자식! 사제복을 얼마 동안 입고 있더니 진짜 사제가 된 줄 아나?
대륙 최대의 장물애비 주제에!”

찬사와 비난이 뒤섞인 말과 함께 이노의 검이 빅토르의 로브
앞자락에 와 닿았다.

“그래도 너만큼이겠냐? 교황파와 제국의 여기사를 양 옆구리에 끼고
유람을 다니시는 양아치 양반."

방금 전까지의 당혹스런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탈바꿈한 빅토르는 절반쯤 꺼낸 단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래그래. 알았어. 쳇!”

“하나 더!”

체념했다는 표정을 짓는 빅토르를 향해 이노의 목소리가 매섭게
내뱉어졌다.

“여전하군.”

느릿하게 왼손을 뻗어 허리춤의 단도 하나를 바닥에 떨구자 그제야
이노 역시 검을 갈무리했다.

“근데 느닷없이 웬 수도승 짓거리냐?”

“그런 네놈은 웬일로 팔도 유람이냐? 거기다가 교황파 탈주 기사
커플에 페어리스타의 탕녀까지 동반하고.”

어느새 품안에서 꺼낸 얇은 시가를 질끈 씹으며 빅토르가 되물었다.
물론 이노의 험악한 표정에 황급히 품안에서 꺼내 든 참나무 상자를
건넨 후였다.

“드디어 손에 들어왔군. 대륙 최고의 시가가!”

상자의 뚜껑에 짙게 음각된 ‘Regalia’라는 글씨를 확인한 이노는
뚜껑을 열어 갈색의 두터운 시가에 코를 벌름거리며 음미하듯 냄새를
확인했다.

“나도 모르겠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그나저나 사이비 교주
노릇은 잘되는 거냐? 황제파가 순순히 허락해 줬을 리도 없을 텐데.”

“어디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던가?”

길게 연기를 내뿜은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게다가 교황파의 선교사들이 황제파 구역까지 들어와 포교 활동을
나선 터라 황제파의 개들도 관대하더군. 그런데 저 핑크 머리의 탕녀는
무슨 깡으로 여기에 기어 들어온 거냐? 지 언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뒤를 밟고 있는 모양인데. 가뜩이나 명예에 목숨 건 마녀 집단의
탈주자라면 결국 남는 것은 죽음뿐일 텐데.
이 기회에 저년을 제국에 넘기고 한몫 챙기는 것이 어때?”

‘저런 때려 죽일 놈들이….’

시엘에 대한 상념을 떨치기 위해 천막 주변을 거닐던 루미낙은
우연히 천막 뒤편에서 들리는 말소리를 따라왔다가 방금 전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이미 드레스 안에 숨겨 놓은 사브르를 빼어 든 루미낙이
금세라도 달려 나갈 듯 몸의 근육을 긴장하는 순간. 무서운 기세로
빅토르의 멱살을 움켜쥔 이노가 서슬 퍼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빅토르, 나는 루미낙에게 받아 내야 할 빚이 있다.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죽게 만들 수 없다.”

갑작스런 이노의 행동에 놀란 것은 빅토르만이 아니었다.
금세라도 달려들 것처럼 눈을 치켜뜬 루미낙조차 의외의 장면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 알았어.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해… 켁!”

얼굴에 내뿜은 시가의 독한 연기에 캑캑거리며 빅토르는 힘겹게
이노의 손을 풀어 냈다. 그때 이노의 머리 속은 다음과 같았다.

‘절대로 죽게 만들 수 없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내 스위트 홈을
보상받을 때까지는 노예처럼 부려 먹어 줄 테다! 망할 놈의 핑크 머리
여자!’

분노에 찬 이노의 표정에 빅토르는 기가 죽은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할 거야?”

“먼저 크리켓 시합에 대해 궁금한 게 좀 있어서 말이야.
능구렁이 같은 헤르초크가 내전 중에 결승전을 연다는 게 무슨
개깡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참, 혹시 이걸 본 적 있나?”

이노의 품속에서 꼬깃꼬깃 접힌 한 장의 문서가 나왔다.

“시구라도 외우고 다니는 고귀한 취미라도 생기셨나? 이건 웬… 음?!”

목을 어루만지며 원망스럽게 이노를 바라보던 빅토르는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문서를 바라보다 숨을 멈췄다.

“드, 들은 적이 있다. 이 문서에 대해서. 그렇지만, 도대체 어째서?
너? 그럼 혹시 여기에 온 이유가!”

“딩동댕!”

“에라, 이 미친놈아!”

“어제 오늘 얘긴가?”

“난 몰라! 이번 일은 도저히 안 돼! 알아서 하셔!”

“빼지 말고 좀 도와주라 이 새꺄!”

“몰라몰라! 야, 이거 놔! 아악!”

거친 팔로 빅토르의 목을 죄며 간절히 부탁(?)하는 이노와
그를 떨쳐 내기 위해 힘겨운 몸싸움을 벌이는 빅토르의 모습을
바라보던 루미낙의 표정에 석연치 않은 의문이 번졌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무슨 빚을 졌다는 거지?’

사브르를 드레스 안에 갈무리한 루미낙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녀 역시 자신이 준 민폐에 대해서는
너무도 빨리 잊어버리는 두뇌 구조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검귀령 The Ghost Blade - 012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2


“흠, 별 탈 없이 귀환하기는 했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행사가 있지 않았나? 투기장에서 들리는 함성이 마을
입구까지 전해지는군.”

군데군데 로브 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며 오키드가 입을
열었다. 헤이스트(Haste)를 사용한 덕분에 상식적으로는 통용되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리카로니아에 도착했지만 일행의 얼굴에는
가벼운 피로가 배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제국 경비대의
병사들이 예기치 않은 오키드의 등장에 바짝 긴장한 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오늘은 한 달 동안 진행되던 대륙간 크리켓 대회의 결승전이
벌어지는 날입니다. 더구나 사상 최초로 제국 팀이 결승에 진출한
모양입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쳐 내며 타이샤가 입을 열었다.

“흐응, 그래? 귀염둥이 루미낙이 결승전이라도 보러 온 것인가?”

심드렁한 표정의 오키드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짐짓 루미낙의 이름을 내뱉은 그녀였지만 무엇보다도 머리 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것은 아론 이스트반의 마검 란크레샤와 그 검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는 정체 불명의 낭인이었다.

‘뭐, 여기까지 따라잡았으니 놓칠 리는 없겠지.
루미낙이야 다섯째가 더 열성적으로 쫓고 있으니… 전서구의 전갈을
받았다면 이미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난 아론 이스트반의 행방만 알아내면 될 뿐이니까.
그런데 그 낭인이란 자가 설마 란크레샤를 휘두른다는 건 아니겠지?
아론이 아닌 그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자매련 내부의 첩보이니 확실하기는 하겠지만,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어.’

오키드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영상, 그것은 자매련의 큰언니였던
시엘의 비참한 죽음이었다. 대륙 내에서 적수가 없다고 믿었던
벽혈창(璧血創) 시엘이 아론의 검에 세상을 떠난 것이 어느새 5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의 느꼈던 소름 끼치는 살기와 분노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머리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생각해 보니 루미낙 그 애도 거기에 함께 있었지.’

“페어리스타 자매련이다!”

“난화마녀(亂花魔女) 오키드님이다!”

문득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오키드는 자신을 둘러싼 열광적인
환호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정예 부대이자 그 맹위를
대륙 곳곳에 떨치고 있는 페어리스타 자매련이었지만 그 특수성
때문인지 일반 대중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간혹 있다곤 해도 자매련 문장이 새겨진 금속제 가면을
쓴 채 등장하는 것이 전부인 상황에서 봤을 때, 맨얼굴의 오키드가
수도 한복판을 종횡하는 것은 파격적인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미 포화 상태가 된 투기장에 진입하지 못해 울상이 된 얼굴로
마을 곳곳을 배회하던 국민들에게 있어 이것은 대륙컵보다 훨씬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타이샤, 다섯째에게 보낸 전서구는 아직인가?”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일행을 먼발치에서 일행들을
따라오는 국민들을 슬쩍 돌아보며 오키드가 입을 열었다.

“나타샤님을 바람의 숲 근처에서 보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람의 숲이라. 그 아이는 도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만족을
하게 될는지.”

“그리고 루미낙님도 이곳에 도착하신 것 같습니다.
자매련 제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틀림없다고 합니다. 노예들과의
조우 이후에 ‘그레이 섀도우’에 추적을 의뢰하여 받아 낸 정보입니다.”

“대륙의 사냥꾼 길드 내에서도 가장 발이 빠른 자들이니
틀림없겠지. 그나저나 반나절도 안 된 시간에 무척이나 빠른
결과로군.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에서 보면….”

무언가를 생각하던 오키드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로군. 들어온 입구를 제외한다면 도망쳐
나갈 곳은 황궁 뒤편의 통나무 다리뿐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오키드님. 그곳은….”

“그래. 남은 것은 ‘다리의 유령’이 매듭을 짓겠지.
굳이 우리가 손에 피를 묻힐 필요 없이. 어쨌건 남은 일은 막내를
몰아넣는 것 인데.”

“하지만….”

‘다리의 유령’이란 말이 오키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일행의
얼굴엔 가벼운 긴장감이 서렸다. 대륙의 어떤 이도 진실을 알지
못하는 절대 영역, 과거 여러 번에 걸친 이종족의 침략에도 절대
함락되지 않았던 제국의 최대 방어선이 바로 그곳이었다.
마력이 주입되어 황금빛을 발산하는 이 통나무 다리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 불리는 풍술사 마란 12세의 지휘 아래 건설되었다고 한다.
제국의 적이라면 죽지 않고는 넘을 수 없다는 전설로만 전해지는
다리.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다리의 유령’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수호신에 대한 소문이었다.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불멸의 용기사라는
소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제국의 상징인 쌍두 사자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라고도 했다.
불확실한 여러가지 말 중에서 그나마 일치하는 한 가지 사실은
유령의 얼굴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불과 한 달 전에 오우거 수십 마리의 시체가 접경 지역을 순찰하던
근위여단에 의해 발견되었던 것처럼.

“비겁자의 무덤으로는 적당하지 않겠는가?”

무덤덤한 어투로 말을 마친 오키드는 초록색의 머리칼을 하나로
갈무리해 묶었다. 아무런 억양도 들어 있지 않은 그녀의 말에
일행은 섬뜩함을 느꼈다.

............

“자, 제군들 준비는 되었나?!”

얇은 시가를 피워 문 이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천막 안의 나무 기둥 주변에서 깜빡 단잠을 자던
큐이와 루미낙이 갑작스런 이노의 등장에 자세를 고치며 힘겹게
잠을 쫓았다.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 위로 무거운 피로가 쌓여 있었다.

“무슨 준비 말이야? 이노 형?”

“아, 그건….”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이노가 미소를 지었다.

“여기 계신 세인트 빅토르님께서 설명을 해주실 거다. 자, 형제님!”

이노에게 떠밀려 앞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갈색 로브의 온화한
수도승 빅토르였다.

“망할… 친구라고 하나 있는 게 이런 날강도 같은 인간이라니.
카악~ 퉷!”

이노에게 떠밀리듯 일행들 앞에 등장한 빅토르는 거칠게
가래침을 내뱉으며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장식했다. 무엇보다도
당황한 것은 교황파 기사였던 큐이와 뮤세트였다. 성직자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 왔던 그들에게 있어 이런
날벼락 같은 대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벙!한 표정의 일행 중에 루미낙만이 고개를 내리깐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뭐 어쨌껀… 이야기를 합시다.
어이, 오늘 장사 끝났어! 천막 닫고 이리들 와.”

테이블 위에서 열심히 성경을 필사하고 있던 작은 체구의
수도승은 빅터의 말을 듣고 천막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길가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푸른 눈의 깡마른
사나이와 함께 들어왔다. 천막 입구는 가죽끈으로 단단하게 묶여있었다.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전 타티로니아 교파의 수도사인
세인트 빅토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언제나 온화한 빅토르’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쨌건….”

떨떠름한 표정을 씻어 내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
내린 빅토르가 말을 이었다.

“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는 몸이지만 과거의 인연 때문에
이런 일이 되풀이 되는군요. 안타깝습니다.”


“지랄하지 말고 빨리 본론부터 말해!”

품안에서 새 담배를 꺼내 물며 이노가 입을 열었다.

“우라질… 어쨌건, 나 세인트 빅토르는 나의 오랜 친구 이노
세리에가 꾸민 이번 프로젝트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도둑질도 프로젝트라고 하나?”

자칫했으면 빅토르의 꿍꿍이에 의해 지금쯤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루미낙이 빈정거리며 입을 열었다. 예상치도 않은 이노의
의리덕에 곤경을 벗어나게 되었지만 사브르를 뽑아 들 만큼의
강렬한 적대감이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별안간 떠맡게 된 골치 아픈 짐들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던
빅토르는 생각지도 않게 루미낙이 딴지를 걸어 대자 매섭게 그녀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건 이번 일은 대륙의 발전과 평화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사제의 신분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번 행동에 보탬이 되어 신의 뜻을 이루도록 합시다. 그걸 가져와라.”

갑작스럽게 돌변한 상황에 뻘쭘한 표정으로 이노 일행의 뒤편에
서 있던 대머리 사제가 방금 전까지 부지런히 손을 놀리던 서류를
들고 나왔다. 아란과 비슷하거나 약간 작을 정도의 키에 어른의
얼굴을 한 언밸런스한 남자는 빅토르의 손에 양피지를 쥐여 주고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바로 헤르초크 공의 자택 설계 도면입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의아해하는 일행의 표정을 보며 이노가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여기 빅토르 형제님은 사실 대륙 최대의 정보통이거던.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네.”

일행의 놀란 시선에 빅토르가 가볍게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제 알겠냐?’라는 흐뭇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훗, 신의 이름을 빌려 도둑질 궁리나 하고 있다니.
놀라도 보통 놀랄일이 아니로군.”

여세를 몰아 빅토르의 자존심을 산산이 깨 버린 루미낙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노의 시가를 뺏어 물었다.

“…일단 일의 진행은 이렇게 합시다. 우리 쪽 형제들을 포함한
여덟 명이 두 조로 나뉘어 행동을 개시합니다. 일단 첫 번째 조는
이노를 중심으로 소란을 피우는 역할이고, 그리고 두번째 조는
나와 우리 사제들을 포함해 헤르초크의 집에 침입하는 것입니다.
콜록콜록… 썅! 정말 성질나서 못해 먹겠네.”

한쪽 손을 허리에 받친 채 도발적인 태도로 시가 연기를 얼굴에
내뿜는 루미낙의 행동에 빅토르의 분노가 폭발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냉정을 지키고 있던 ‘언제나 온화한 빅토르’는 루미낙의
악명을 익히 아는지라 감히 달려들 엄두까지는 내지 못한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품속에서 꺼낸 시가를 피워 물었다.

“이노 형의 친구들은 다 똑같네. 휴우….”

아란의 말을 듣고 있던 큐이와 뮤세트의 입에서는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멋대로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이노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려 온 상황에서 오랜만에 만만한 상대를 만난
루미낙의 표정에는 짓궂은 미소가 피어 올라 있었다.
일행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두 명의 수도승이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타티로니아 교파의 기도문을 나직이 읊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상황 속에서 성질 고약한 세 사람이
뿜어 대는 매캐한 시가 연기가 천막 안에 빼곡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또 핫트릭이군요.”

“세 번째 핫트릭이죠.”

열광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론폴트와 위버가 입을 열었다.
54대 0, 결승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스코어로 경기는 진행되고
있었다. 경기에 초대된 교황파 귀빈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황제파의
침묵이 어우러진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황제석에 앉아 있는
리카론은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어제 별이 말해 준 대로….’

있을 수 없는 결과가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며 위버는 경기장을 훑어보았다. 누구도 느끼지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위협이 서서히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계십니까?”

문득 위버의 얼굴을 바라보던 론폴트가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아. 혈관을 타고 무언가가 몸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야.’

‘부우우우우웅~.’

굵은 나팔 소리가 경기장 안에 휘몰아치며 전반전 경기가 끝났음을
알려 주었다.

“필리페~ 필리페~.”

혼자서 절반 이상의 득점을 올린 무어 공국 출신의 필리페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갈색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관객들의 환호에 호응했다.
조각상과 같이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아가씨들을 열광시키는 매력적인 갈색 눈동자가 앞날이 보장된
젊은 예비 백작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다.

“대륙에서 가장 유망한 백작 후계자라는 젊은이가 바로 저 사람이었군요.”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속단은 금물일 것 같습니다.
언제라도 더럽혀질 수 있는 것이 명예니까요.”

위버의 말에 론폴트가 묘한 뉘앙스의 웃음을 지었다.

............

“빅토르님을 뵙습니다.”

매캐한 시가 연기 속에서 신음하던 큐이와 뮤세트가 천막 아래로
고개를 빼내어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두꺼운 가죽 구두를 신은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멘 검은 활과 가죽으로 무두질한 활통 속에는
붉은 깃의 화살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레이 섀도우.”

큐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

뮤세트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무성한 소문과는 달리 실제로 만나보기는 처음인 탓이었다.
대륙 최고의 정보 집단이자 사냥꾼 길드의 핵심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그레이 섀도우. 이미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항상 보아 왔던
큐이는 뮤세트와는 달리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냐?”

잔뜩 상기된 얼굴로 천막을 열고 나오는 빅토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그레이 섀도우의 전령은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빅토르에게 예를 표했다.

“페어리스타 자매련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4서열인 오키드 페어리스타 분대입니다.”

전령의 말이 끝나자 빅토르가 천막 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기세 등등하던 루미낙의 표정이 일순 경직되는가 했더니
밝은 미소가 얼굴에 피어 올랐다.

“넷째… 어, 언니가? 어쩜, 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나겠네.
아이… 조… 좋아라~.”

방금 전까지도 빅토르를 비아냥거리던 표독스런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웃음이 천막 안에 울려퍼졌다.

“나 참, 어린애구만. 언니가 목을 조르러 온다는 것도 모르고
저렇게 기뻐하다니. 그나저나 이마에 식은땀이나 좀 닦으면서
좋아하지 그래?”

이노의 비아냥에 속마음을 들킨 루미낙이 이마의 땀을 훔쳐 내며
성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뭐가 시… 식은땀이야? 어쨌거나 언니를 만나면 걱정해야
할 건 너야! 아론과 바야르가 쓰러뜨린 언니들의 수가 몇 명인지 알아?!”

“아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렁 시작하자고. 너희 언니 오기
전에 헤르초크의 계약서를 훔쳐서 도망치면 될 것 아냐?”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황궁 뒤편에 있는 다리지.”

“멍청아! 거기 뭐가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물론!”

웃음까지 머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노가 말했다.

“다리의 유령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분을 참지 못한 루미낙이 소리를 질렀다.

“물론, 아주 잘 알고 있지.”

“이노, 다리를 건넌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오우거의 숲’이
남아 있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이노의 똥배짱에 불안한 듯 빅토르마저 루미낙을 거들었다.

“후후.”

여유로운 웃음으로 담배를 피워 무는 이노를 큐이와 뮤세트는
질린 듯 바라보았다.

“여유도 좀 적당히 부리란 말야!”

이노의 입에 물린 담배를 나꿔채며 루미낙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품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낸 이노가 불을 붙여 물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한 친구가 있다. 무척이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야.”

“나 참, 친구가 많기도 하네. 그 친구도 빅토르 같은 친구야?”

순간 루미낙을 거들던 빅토르가 부릅뜬 눈으로 루미낙을 쏘아보았다.

“지금은 오우거의 숲 어디엔가 은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우리에게 무척이나 큰 힘이 되어 줄 거다.”

이노의 얼굴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넷째 언니가 아무리 자상하다고는 해도 용서받을 수는 없을 거야.
그래, 처음 자매련을 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어.’

“누나, 담배가 거꾸로네?”

“응? 앗 뜨~~~!!!”

생각에 빠져 있던 루미낙이 입술을 뜨겁게 달구는 담배를 황급히
내뱉었다.

“푸하핫!”

루미낙의 모습을 바라보던 빅토르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역습을
날렸다.

“담배나 제대로 피울 줄 아는거야? 꼬마 아가씨?”

“이 자식!”

언제나처럼 사브르를 빼든 루미낙의 앞을 가로막은건 큐이와
뮤세트였다.

“힘들어요.”

“제발….”

피로에 지친 커플의 얼굴에 루미낙은 슬그머니 검을 검집에 갖다
대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보자고. 이 자식. 아악!!”

빅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사브르를 갈무리하던 루미낙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검집에 찔러 넣으려던 사브르를 흥분한
나머지 허벅지에 꽂아 버린 것이었다.

“상당히… 당황하고 있군.”

“저거 군인 맞아?”

루미낙을 놀려 대던 빅토르의 얼굴은 어이없음으로 질려 있었다.

검귀령 The Ghost Blade - 013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3


“앞으로 한 시간, 성의 뒤편에서 만나자.”

요란한 한바탕의 소동이 끝난 후, 빅토르와 성직자들을 포함한
여덟명의 일행은 두 패로 나뉘었다. 이노와 아란, 그리고 두 명의
성직자로 이루어진‘경기장조’와 루미낙과 빅토르, 큐이와 뮤세트
커플의‘헤르초크조’였다. 목표가 정해지기 전까진 허둥대며 치고
받던 일행이었지만 지금은 잔뜩 날이 선 모습이다.

“이노!”

몇 발짝 먼저 뒤돌아가던 이노가 발걸음을 멈췄다.

“죽지 마라.”

사제복 대신 검은 강습복으로 갈아입은 일행의 선두에 선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복면 밖으로 빠끔히 드러낸 날카로운 두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죽고 싶어도….”

오른쪽 입꼬리에 매달린 짧은 시가가 애처롭게 연기를 토해
내고 있는 가운데 걸음을 멈춘 이노가 말을 받았다.

“남은 담배가 너무 많아.”

이노의 대답에 안심한 듯 빅토르의 눈이 가늘게 웃었다.

“신의 가호를!”

“오케이, 졸라 가호를!”

서로를 등지고 멀어져 가는 이노와 빅토르를 따라 일행은 무거운
발자국을 찍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봐,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뭐였지?”

“제 이름은….”

“아아, 됐네. 자주 만날 사이도 아닌데 그냥 넘어가지.”

이노가 싱글거리는 얼굴로 나란히 걷고 있는 사나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뭐 이런 별종이 다 있어?’

느닷없이 이노의 일행이 되어 버린 그레이 섀도우의 전령은 속을
알 수 없는 이노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런데… 제가 왜 이노님과 함께 동행해야 하는… 웁!”

“자, 한 대 찌~인하게 빨고 마음을 좀 진정시키라고.
오래 끌 일도 아니니까.”

“저, 이노님. 무슨 일을 벌일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노가 물려준 담배를 슬그머니 내뱉으며 사내는 입을 열었다.

“저는 동행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도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그레이 섀도우는 전투 병과가 아니라 정보 계열이라
전투가 벌어지거나 한다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도리질치며 이노가 말을 막았다.

“그냥 자리만 지켜 주면 된다네. 모든 것은 내가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아란, 그리고 거기 빡빡머리 두 명 모두!”

빅토르와 같이 검은 강습복 차림을 한 두 명의 수도사들은
체념한 듯 묵묵히 기도문을 외우며 일행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양 명랑하게 이노의 뒤를 따르는
아란의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여전히 입에는 시가를 문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이노의 눈에 저 멀리, 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거대한 원형의 투기장이 들어왔다.

“란크레샤를 가지고 있는 자다. 오키드님께 알려라!”

어두운 골목에서 이노 일행을 지켜보던 붉은 로브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오키드의 수행원인 타이샤였다.

............

“하악… 하악… 지금쯤… 슬슬 후반전이 시작되었겠군.”

땀으로 흠뻑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젖히며 코라존이 입을 열었다.
땀과 피가 뒤섞여 흥건히 젖은 가죽 채찍 아래엔 온몸에 붉은 선이
그어진 레이피어 같은 몸매의 소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집사! 이제 의사를 불러 아이들을 치료해라.
그리고 식사는 절반으로 줄여! 알겠나?”

방 한쪽 구석에서 코라존의 광기를 묵묵히 지켜보던 집사가
꾸벅하며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어쨌건 헤르초크님의 계획도 슬슬 마무리되었을 테고,
이제 남은 것은 말썽쟁이 계집년들뿐인가? 뭐, 그것도 그리 골치
아픈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이마에 흐르는 땀을 갈무리하며 코라존은 중얼거렸다.

............

“필리페! 필리페!”

황제파 관객들의 떨떠름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은 필리페와
무어 공국을 열광하는 교황파 관객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후반전 시작과 함께 경기장에 먼저 입장한 것은 실크 소재의 푸른색
유니폼으로 몸을 감싼 무어 공국 선수단이었다. 팔을 절반쯤 가린
셔츠 아래로 절반쯤 모습을 드러낸 탄탄한 근육질의 팔을 치켜들어
관객의 환호에 보답하는 필리페의 얼굴엔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감
넘치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에 비해 황금빛 유니폼의 자이센
선수들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권태로운 동작으로 뒤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승부는 이미 결정났다는 듯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깐 황제파 관객들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엘란드 백작이군요.”

굵은 루비 반지가 끼워진 두툼한 손으로 론폴트가 가리킨 곳에는
아들을 향해 환히 웃음을 짓고 있는 초로의 노인이 있었다.

“대를 이은 크리켓 영웅이라니, 확실히 대륙을 들끓게 할 만하군요.”

론폴트의 말에 위버는 젊은 날의 엘란드를 떠올렸다.
아들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의 엘란드 역시, 가는 곳마다 미열에
들뜬 아가씨들을 몰고 다니며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검을 치켜든 같은 나이 또래의 기사들이 살점과 피를 튀겨 가며
하루하루 아수라장 속에서 자기의 이름을 높였던 것과 달리 푸른
잔디가 깔려진 초원 위에서 칼 대신 라켓을 들고 그 누구도 상처를
입히지 않으며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명성을 쌓아 나갔다.
5년 전, 자이센의 국기(國技)였던 크리켓이 리카론의 황제 등극과
더불어 조금씩 세력이 약화되어 가자 무어 공국으로 망명한 엘란드와
그의 아들 필리페는 5년 만에 조국의 경기장을 밟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나저나, 후반전은 전반과는 확실히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군요.”

말을 마친 론폴트의 눈에 반대편 황제석으로 다가오는 헤르초크가
들어왔다.

‘그래, 그렇게 얼굴엔 웃음을 띠어야지. 상대의 등에 칼날을 꽂으려면….’

로브 밖으로 나온 론폴트의 입가가 묘한 웃음으로 뒤틀렸다.

“후반전 경기를 시작하겠소.”

주심인 글로쎄의 외침이 경기장에 울려퍼지자 5만 명의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환호성을 쏟아 냈다. 천지를 진동할 듯 웅장한 나팔
소리가 일시에 울려퍼지자 경기장 밖에서 발을 구르던 국민들은 더욱
조급한 마음이 되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심정으로 경기장을 에워싼
수만의 군중, 그 물결을 헤치고 경기장의 입구로 다가오는
검은 로브 일행의 선두엔 허리를 반쯤 굽힌 채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오는 등이 솟은 꼽추가 있었다.

“누구냐? 멈춰라!”

경기장 입구를 등진 채, 날카로운 장창으로 전방을 겨누고 있던
수백 명의 병사들이 군중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앞으로 튀어나온 꼽추
일행을 향해 일제히 창을 겨눴다.

“어리석은 자여 목소리를 낮춰라!”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가 선두에 있는 꼽추에게서 흘러나오자
병사들의 창날이 일순 머뭇거렸다.

“우리는 헤르초크 공에게 메시지를 갖고 온 자들이다. 이후의 일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의 자가 이곳에 있다면 우린 돌아가겠다.”

“잠깐.”

비대한 몸집에 강철 도리깨를 든, 갈색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기사가 병사들을 밀치고 등장했다.

“헤르초크 공께 보낼 메시지를 보여 주시오.”

“닥쳐라!”

꼽추의 입에서 날카로운 일갈이 쏟아져 나왔다.

“일개 경비대장에게 보여도 좋을 메시지라면 차라리 전서구를
이용했을 것이다.”

“귀… 귀공은 어디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꼽추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경비대장이 입을 열었다.
슬그머니 꼽추가 몸을 뒤로 빼자 뒤에 있던 사내가 로브를 벗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 섀도우의 전령이다! 북부 전장의 지휘관께서 보낸 급령을
가지고 왔으니 어서 길을 비켜라!”

어느새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낸 전령이 지휘관의 인장을 가리키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길을 트고 성문을 올려라!”

경비대장의 고함에 병사들의 창 끝이 내려가며 은색 갑옷의 진열이
썰물처럼 입구를 터 주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군중들을 등지고
검은 로브의 일행은 느긋하게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과 나무로 이루어진 성문이 내려지는 소리와 함께 왼쪽 모퉁이로
돌아가던 일행의 선두에 있던 꼽추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게 뻗은 통로 내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놈의 칼은 검두(劍頭)가 무지막지하게 커서… 어이구 허리야.”

겨드랑이로 죄고 있던 란크레샤의 검신을 손으로 옮겨 잡는 것은
다름 아닌 이노였다. 다른 일행들 역시 로브를 벗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노 형 연기 한번 대단하던데?”

감탄하는 아론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이노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정말 대단한 건 여기에 있는 이 친구야. 헤르초크에게 전한다는
그 전서는 도대체 뭐였나? 연기 한번 정말 끝내 주더군. 으하핫!”

이노의 말에 일행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 올랐다.
초반부터 이런 상황을 위해 동행을 요구한 전령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이 너무나 쉽게 풀려 버린 탓에 오히려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그 전서는 진짜입니다.”

순간 일행의 웃음이 멈췄다.

“아까 말한 대로 북쪽 전장의 지휘관인 크랭크 경에게서 받은
친서거던요. 오늘 헤르초크 공이 경기를 관람한다는 소리를 듣고
같은 경로에 있던 빅토르님께 들렀던 겁니다. 빅토르님을 만나지
않았다고 해도 저는 어차피 이곳에 와야만 했을 겁니다.”

“이리 줘 봐!”

순간 진지한 얼굴을 한 이노가 전령의 손에 들린 전서를 빼앗았다.

“안 됩니다! 의뢰인의 의뢰 내용을 누설한다는 것은 저희에겐
목숨을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의….”

“아, 알았다니까. 조용히 좀 해. 지금 읽고 줄 테니까.”

달려드는 전령을 란크레샤의 검신으로 밀쳐 낸 이노가 친서를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헤르초크 국공 귀하. 북쪽 전장의 상황은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뜻밖의 기습에 허둥대는 바우스 왕국령의 마을 세 곳에 대한 파괴와
약탈을… 중얼중얼… 근위여단 제1야전군 사령관 크랭크 프랑켄
슈타이너. 그럼 그렇지. 역시 헤르초크다운 머리로구먼.”

“비켜라!”

순간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통로를 질주하는 여러 명의
인영(人影)이 눈에 들어왔다.

“멈춰라!”

란크레샤를 가로로 들고 복도를 통로를 막아서는 이노의 기세에
달려오던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급히 자리에 멈췄다.

“길을 비켜라. 급한 전갈을 가지고 왔다.”

“안 봐도 쓰리 고 로구만.”

몸을 틀어 길을 내준 이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영광의 뒷골목엔 온통 신음뿐이로구만…
그럼 슬슬 난리를 피우러 가 볼까?”

검귀령 The Ghost Blade - 014

검귀령(劍鬼靈)
The Ghost Blade
#014


“알았지? 헤르초크의 저택은 여러 가지 장치들로 도배된 곳이다.
섣불리 개인 행동을 하다간 전체가 개죽음당할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

“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얘기하는 거지?”

황금빛 쌍두 사자가 양각된 철문 앞에서 빅토르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힘을 모으는 데에는 찬성했지만 조금전의 원한을 잊지
못한 듯 루미낙이 입을 열었다.

“이 두 분 기사님은 너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지 않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이 자식!”

머리에 쓰고 있던 검은 복면을 벗으며 루미낙이 앙칼지게 외쳤다.

“루미낙님! 제발….”

사브르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던 그녀였지만 양팔을 붙드는
큐이와 뮤세트의 애처로운 눈빛에는 애써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헤르초크는 지금 결승전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가 있다.
집 안에 남은 것이라곤 집사와 시종 등 모두 비전투 인력이니
불필요한 살생은 금하도록. 쓸데없는 것에 손을 대거나 건드리지
말고 지도에 있는 금고에 접근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루미낙.”

침착하게 말을 마친 빅토르가 루미낙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는 내가 지휘관이다. 너 하나 때문에 전체가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면 난 부득이 널 벨 수밖에 없다. 알겠나?!”

낮지만 단호한 빅토르의 기세에 루미낙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빅토르님. 어떻게 해서 헤르초크의 저택을 낱낱이 알고
계시는 거죠?”

검은 복면을 한 뮤세트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이야기할 때가 있을 거요. 궁금증은 나중으로 미룹시다.
자, 그럼!”

날렵한 몸짓으로 담을 뛰어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빅토르의
뒤를 일행들 역시 묵묵히 따랐다.

“모든 것이 3분 안에 끝나야 한다. 가자!”

저택의 오른쪽 벽으로 달려간 일행 앞에서 빅토르가 배수관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람 지휘관의 경험이 있어. 게다가 묵보법(?步法)이나 침입술
등은 일류 암살자들 이상의 스킬이야….’

빅토르의 뒤를 따라 배수관을 오르며 루미낙은 방금 전의 상황들을
되짚어 보았다. 금고가 있다는 3층 집무실은 복도가 온갖 장치들로
이루어졌다는 곳이었다. 배수관을 타고 오른다고 해도 라운지의
유리를 깨고 들어가야 한다는 난관이 따르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비교해 보아도 부득이한 살생을 하지 않으려면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저택에 경비병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유리문은 어떻게 할 셈이야?”

라운지에 내려선 루미낙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빅토르의 기세에
압도당한 탓인지 조금은 기가 죽은 목소리였다.

“깬다!”

“응?”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빅토르의 오른발이 집무실로 통하는
유리문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엄청난 각력(脚力)!’

침입자를 의식해서인지 두터운 유리로 이루어진 출입문은 빅토르의
발차기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빠르게 집무실로 뛰어든 빅토르를
따라 당황한 일행 역시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여기 금고가….”

“손대지 마!”

금고로 다가가는 뮤세트를 향해 빅토르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걸 만졌다간 모든 게 끝이다. 엄청난 양의 폭약이 들어 있다.”

놀란 뮤세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품에서 꺼낸 쇠꼬챙이로
능숙하게 벽장의 문을 딴 빅토르가 즐비하게 걸린 헤르초크의 옷들을
빠르게 살폈다. 황금 사자가 등에 그려진 제국의 정장을 발견한
빅토르가 옷의 내피를 더듬기 시작했다.

“이거다!”

“옷이잖아?”

“나중에 설명한다 우선 나가….”

옷을 움켜쥔 빅토르가 몸을 돌려 창가로 향할 때였다.
잠긴 문의 중앙이 부서지며 거대한 짐승의 손이 그의 왼팔을 붙잡았다.

“루미낙, 베라!”

순간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루미낙은 사브르를 뽑아 짐승의 팔을
내리쳤다. 요란한 비명과 함께 팔을 움켜잡은 짐승의 팔이 잘라졌다.

“가자!”

빅토르의 말에 따라 일행은 라운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배수관을 타고 일행이 미끄러지듯 바닥에 내려섰을 때, 수십 마리의
거대한 라이칸슬로프가 앞을 막아섰다.

“도대체 이것들이 어디서….”

“멈추지 마라! 베면서 뚫는다!”

당황한 큐이의 말을 자르며 빅토르의 날카로운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검을 빼어 든 일행은 본능적으로 빅토르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이렇듯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뚫어야 한담?”

경기장을 둘러싼 군중들의 끄트머리에서 오키드가 입을 열었다.
이노의 일행과 그 뒤를 이어 급하게 달려 들어간 전령들의 모습에
군중들은 이미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키드님. 목표는 루미낙님을 쫓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오키드의 수행원 타이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일행이라면 다시 만나게 마련이다. 어쩌면 루미낙이
제 발로 달려올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우리 철부지 막내가 일행의
리더일 리는 없으니까. 어쨌건 무엇보다 현재로서는 란크레샤를 갖고
있다는 그 낭인을 잡는 것이 우선이다.”

오키드의 말에 붉은 로브의 수하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귀찮게 됐어. 모처럼 ‘목소리’를 사용하게 됐으니.
집음기도 없이 이걸 어쩐담.”

가벼운 한숨을 내쉰 오키드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두서너 번의 가벼운 숨쉬기가 끝나자 오키드의 입에서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고음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사가 없는 가벼운 허밍이 시작되자 어디서부터인가 군중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더니 경기장 입구에서 부터 길 밖으로
서서히 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여유롭게 걷는 오키드를
따라, 귀를 막은 붉은 로브의 수행원들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홀린 듯 들고 있던 창까지 떨어뜨리며 철문을 막고 있던 병사들도
하나 둘씩 길을 열기 시작했다. 머리 부분에 울퉁불퉁한 강철이
돌출된 도리깨를 들고 있는 경비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격자가 올라가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간 오키드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지다가 사라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길옆으로 비껴 선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하기 시작했다.

‘이런 수고를 한 만큼 기대를 깨진 말아 줘. 마검의 낭인 아저씨.’
관람석 계단을 오르며 오키드가 중얼거렸다.

............

“이상하군요.”

“뭐가 말입니까?”

관중들의 열광 속에서 위버는 경기장에 시선을 못박은 채 입을
열었다.

“제국의 선수들이 모두 움직이지 않네요.”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야유와 환호가 뒤섞인 관객들의 목소리 속에서 론폴트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시간이 됐군.’

거듭되는 득점 속에서 문득 심상치 않음을 느낀 교황파 선수들이
동작을 멈췄다. 게임이 진행 될수록 황제파 선수들이 한 명씩 점점
동작을 멈추더니 몸을 웅크린 채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고 교황파의
주장인 필리페가 심판인 글로쎄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항의하자
관람석의 고함은 더욱 커져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태를 방관하던
글로쎄는 필리페의 항의에 자리에 주저앉은 황제파의 주장에게
다가갔다. 필리페를 등진 채 무릎을 굽힌 글로쎄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숙인 황제파의 선수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죽여라.”

순간 글로쎄의 깡마른 몸을 거칠게 젖혀 내며 튀어 오르듯 몸을
날린 황제파 선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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