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면신협(17)
제25장
벽력뇌(霹靂雷) 궁(宮)의 비극(悲劇)
용사추의 마라천강도가 횡으로 그어졌다.
위____이잉!
"케____에엑!"
"크악.....도성(刀聖)이다!"
섬뜩한 피무지개가 허공에 퍼져 올랐다. 처절한 비명이 그 뒤를 잇달았고
네 개의 몸뚱이는 여덟 조각이 되어 나뒹굴었다.
그자들의 시신이 나뒹굴며 내밀하고 아늑해야할 여인의 침실은 갑자기 난
장판이 되고 말았다. 잘려진 내장과 흩뿌려진 선혈로 뒤덮인 규방은 피비린
내가 진동했다.
"헉!"
화천륭의 안면은 그만 썩은 돼지간 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즉시 뇌옥정의 몸에서 빠져
나왔다.
휙!
그 즉시 그는 방 한쪽에 기대어 놓은 방천화극(方天火戟)으로 몸을 날렸
다. 하지만 용사추가 가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벽섬....풍(霹閃風)!"
콰릉......!
그는 막 방천화극을 움켜쥐려는 화천륭을 향해 유령같이 다가서며 일도를
내쳤다. 군림대라마도결의 제 일식이 뇌전같은 속도로 작렬했다.
퍼____억!
"크악.....!"
화천룡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방천화극을 잡으려던 그의 오른
팔과 오른쪽 가슴이 용사추의 마라천강도에 싹둑 잘려나간 것이었다.
그의 팔은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고 가슴의 상처도 중상이었다. 폐를 다
칠 정도로 깊게 베어져 나간 그의 가슴은 보기에도 끔찍한 피투성이였다.
화천룡의 몸 주위로는 천근 화약의 폭발에도 능히 견뎌내는 벽력강벽이라
는 호신막이 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용사추의 마라천강도는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의 벽력강벽을
두부처럼 간단히 베어버린 것이었다. 화천룡의 안면은 처절한 고통과 공포
로 일그러졌다.
쿠......웅!
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고꾸라졌다
고 생각한 순간 그의 거구가 믿을 수 없게도 공같이 굴러 창문쪽으로 폭사
되어 나갔다. 거의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용사추는 눈썹을 꿈틀 치켜올렸다.
"교활한 놈!"
위_____잉!
그는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재차 마라천강도를 내쳤다.
콰쾅......!
그가 일으킨 도기는 그러나 애꿎게 창문과 벽만 박살냈을 뿐, 화천륭의
몸은 이미 침실 밖으로 달아나버린 후였다.
용사추는 굳은 안색으로 마라천강도를 거두어 들였다.
"어렵게 되는군. 곧 떼를 지어 몰려오겠지?"
그는 침중하게 독백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음교혜가 알려준대로 화왕곡으로 해서 벽력뇌강궁에 침입한 상태였
다. 그런데, 열화천작이라는 무기고를 찾기도 전에 이 화왕전에서 벌어지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것이 화근이 된 셈이었다. 그의 앞 길이 결코 순탄하지 못할 것은 자명
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삐____이익!
"적이다!"
"강적이 화왕전에 잠입하여 화모(火母)님을 능욕하고 있다!"
날카로운 호각소리에 이어 여기저기서 분분한 함성이 들려왔다. 삽시에
벽력뇌강궁은 대낮같이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그리고 수많은 그림자가 속
속 날아올라 화왕전을 열 겹 스무 겹으로 에워쌌다.
용사추는 문득 쓴입맛을 다셨다.
"쩝.... 교혜부인께 강자께나 당하겠군."
그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침상에 멍하니 누워있는 화모
뇌옥정에게로 다가섰다.
최강의 화공(火功)을 지닌 여종사. 그 존귀한 신분의 귀부인은 지금 사지
를 큰 대자로 벌려 묶인 채 보기에도 민망한 자태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방자하게 벌려진 하체에는 방금 전의 만행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
었다.
지금 그녀는 완전히 넋을 잃은 듯 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용사추가
다가서는 것을 보면서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봉목은 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그 아름다운 눈은 극도의
수치와 절망감으로 초점마저 잃고 있었다.
부끄럽게 벌려진 그녀의 알몸에는 격렬했던 폭풍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
었다. 사내들의 체액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그녀의 하체는 차마 눈뜨고 보
기 민망할 정도였다.
용사추는 화모 뇌옥정의 처참한 모습에 나직이 탄식했다.
"존체에 손대는 것을 용서하시오!"
파앗!
그는 침중한 어조로 말한 뒤 침상 모서리에 묶인 뇌옥정의 사지를 풀어주
었다. 이어 그녀의 나신을 요로 감싼 후 자신의 등에 질끈 동여맸다. 상처
받고 유린당한 여체는 비로소 부끄럽게 노출된 상태를 면했다.
용사추는 뇌옥정을 등에 업은 후 문쪽을 바라보았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아야 한다. 화모가 종사로서의 이성을 되찾기
전이면 누구라도 내가 화모를 겁탈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는 지금 영낙없이 뇌옥정을 범한 흉수로 지목받고 있었다. 어쨋든 지금
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볼 일이었다.
이윽고 염두를 굴린 용사추는 뇌옥정을 업은 채 화왕전 밖으로 걸어나갔
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무적신병 마라천강도가 굳게 들려 있었다. 그의 걸음
걸이는 묵중했으며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기도는 마치 태산과 같이 장엄
해 보였다.
거기에다, 등에 미녀까지 업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신과도 같이 느
껴졌다.
용사추가 밖으로 나서자 갑자기 주위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뒤덮였다. 화
왕전을 포위하고 있던 벽력뇌강궁도들은 용사추의 압도적인 기도에 질린 듯
일순 주춤주춤 물러섰다.
무언중에 용사추의 전신에서 풍기는 태산같은 위압감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바득! 무엇하느냐? 죽여랏! 본문을 우롱하고 너희 주모를 능욕한 놈이
바로 그놈이다!"
돌연,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 악에 바친 분노의 폭갈을 내질렀다. 그는 방
금 전 침실을 빠져 달아난 벽력대제 화천륭이었다.
주춤하던 중인들은 화천륭의 부채질에 다시금 노기충천했다.
"우우! 죽여랏!"
"캇! 감히 벽력일족의 주모님을 능욕하다니......!"
우르르......쐐액!
중인들은 저마다 분분한 음성으로 외치며 메뚜기떼같이 일제히 솟구쳐 올
라 용사추를 덮쳐왔다.
용사추는 그들의 무리를 냉혹한 눈으로 노려보다 문득 번쩍 신광을 발했
다.
(이놈들이다!)
그는 중인들의 무리 가운데를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떼를 지어 덮쳐드는 중인들의 무리. 그 중에는 주위를 선동하여 용사추는
물론, 그의 등에 업힌 뇌옥정마저 무시하고 덤벼드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벽력뇌강궁의 유력자들이었다. 그리고 한 차례 이상씩 화
모 뇌옥정을 범한 화천륭의 공범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지닌
양심이나 죄의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감히 넘겨다 볼 수도 없었던 고귀한 신분의 화모 뇌옥정. 화천륭은 그런
뇌옥정의 몸을 탐욕에 굶주린 무리들에게 즐기도록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자
신의 공범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이 아닐 수 없었
다.
하지만 화천륭은 그 만행을 눈 깜짝하지 않고 자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벽력뇌강궁의 파멸과 그들의 무적화기들을 노리고 외부에서 침투시킨
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번 뇌옥정의 몸을 즐긴 자들은 화천륭의 완벽한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
렸다. 화천륭은 그 대가로 그들이 정기적으로 뇌옥정을 안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용사추의 예리한 눈은 한눈에 그 모든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그의 가슴
은 분노로 뜨거워졌다.
(죽인다....! 인간같지도 않은 놈들....!)
그는 한 숭고한 여인을 희생물로 걸고 거래를 즐긴 자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살심을 느꼈다.
우우우......웅!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마라천강도는 벌써 삼엄한 울림을 토해냈다. 용
사추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장내를 노려보며 그대로 중인들 속으로 뛰어들
었다.
"군림.....마라도결!"
츠츠츳.......꽈릉.....!
마라천강도가 눈부시게 휘둘러지며 무서운 검기가 장내를 갈랐다. 용사추
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는 마치 양떼 속에 뛰어든 한 마리 맹호를 연상시켰
다. 그의 마라천강도가 한 번씩 휘둘러질 때 마다 십여 명의 장한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크아악.....!"
"아악!"
비명이 잇달아 터졌다.
용사추의 도는 마치 눈이 달린 듯 정확했다. 그것은 장내를 종횡으로 누
비며 정확히 흉적들을 골라 쓰러뜨렸다. 삽시에 장내는 피바람이 불었고 그
속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크으.....살....살성이다! 인간도 아니다!"
"케엑!"
공포의 비명이 피비린내속에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분노한 용사추의 마라천강도 아래 흉적들은 어김없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
었고 그들 외의 벽력전사들은 이 놀랍고도 충격적인 광경에 분분히 물러섰
다.
그들의 대부분은 막강한 위력의 화기(火器)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용사추에게 발출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주모인 화모 뇌옥정이 용사추의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
인을 향해 덤벼드는 무모한 행위를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삽시에 거의 모든 흉적들이 용사추의 마라천강
도 아래 도륙당했다.
이윽고, 용사추는 천천히 화천륭을 향해 다가섰다.
"으......!"
화천륭은 앞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온통 경악과 공포에 전신을 부들부
들 떨고 있었다. 그는 용사추가 태산같은 걸음걸이로 육박해 드는 것을 보
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각오하라! 악적!"
꽈르릉......!
용사추의 몸이 한순간 도기의 폭풍에 뒤덮인 채 그대로 화천륭을 향해 폭
사되어 갔다.
"허억....!"
화천륭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용사추의 도기를
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전신을 떨며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십대전신 중 일 인인 화천륭. 그가 전의를 상실한 모습은 초라하고 비참
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파파팍!
용사추의 마라천강도가 벼락같이 화천륭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화천륭은 그대로 몸이 두쪽으로 갈라질 판
국이었다. 그런데 이 때였다.
"노옴....!"
"멈춰랏!"
갑가지 하늘에서 무서운 악인들의 폭갈이 터져나왔다.
쐐___애액!
위이잉......!
그와 함께 여덟 줄기의 형언불가의 거창한 잠력이 용사추를 휩쓸어왔다.
그것은 일견하여 용사추가 겪어보았던 전황의 절대지력에 버금가는 막강한
것이었다.
용사추는 흠칫하며 눈을 부릅떴다.
"천붕멸(天崩滅)!"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폭갈을 내지르며 마라천강도를 그어냈다.
군림도결의 제 이식이었다.
맹렬히 몸을 휘돌리는 용사추의 눈에 여덟명의 신선같은 노인들이 무서운
기세로 자신을 찍어 눌러오는 것이 보였다.
용사추는 대경했다.
"벽력팔황?"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__벽력팔황(霹靂八皇).
벽력뇌강궁의 전설적인 초고수자들. 이미 백 년 이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자들로 벽력대제 화천륭에게 사조뻘되는 고인들이었다. 그들의 갑작스런 등
장은 용사추를 경악시켰다.
콰콰쾅.......!
천만근의 화약이 일시에 터지는 듯한 가공할 굉음이 용사추와 벽력팔황
사이에서 일어났다.
우드드득....!
용사추는 두 다리가 무릎까지 지면으로 박혀들었고 그의 의복과 모발은
강렬한 극양지기에 재로 부스러졌다.
하지만 벽력팔황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무서운 반탄지력에 각
기 여덟 방향으로 퉁겨졌다. 그들의 눈은 놀라움과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
다.
"무....무서운 아해로군!"
"갈! 정아를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그들은 용사추를 다시 팔방에서 포위해들며 노기등등한 고함을 내질렀다.
용사추는 벽력팔황을 마주보며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후손하나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한 노인장들에게 이 분을 내줄 수는 없
소!"
그의 태도는 확고하고 강경했다. 그는 말과 함께 두 눈을 형형하게 번득
이며 마라천강도를 고쳐잡았다.
(탄허파멸참을 펼쳐야겠군.)
위_____이잉!
그는 군림대마라도결의 마지막 일식의 도법을 준비했다. 천마에 의해 창
안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시전된 적이 없다는 악마의 도결. 그것이 처
음으로 용사추의 손에 의해 시전되려는 것이었다.
"........!"
".........!"
무서운 긴장감이 장내를 뒤덮었다. 팽팽한 살기와 숨막히는 압박감이 중
인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일대 팔! 단연 숫자면으로도 벽력팔황이 우세했다. 그 위명 또한 가히 신
화적인 존재들이건만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오히려 용사추 일인의 무섭고도
압도적인 기세에 서서히 위압당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흐윽.....그만둬요! 제발....!"
갑가지 활시위같이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을 깨며 처절한 여인의 울부짖음
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용사추의 등 뒤에서 들렸다.
화모 뇌옥정, 그녀가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뇌옥정의 두 눈에서는 비오
듯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용사추의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
으며 고통스러운 오열을 터뜨렸다.
"이제는 그만.....제발 그만 두세요! 모든 걸.....얘기하겠어요. 흐
흑.....!"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흐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당한 짐승만도 못한 모든 추행의 전모를 밝힐 작정을 한 것이다. 여인으로
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그 치욕스러운 밤의 일을.
용사추의 안면이 굳어졌다. 그는 뇌옥정이 어떤 결심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뇌화정은 자신이 화천륭에게 당
한 치욕을 모두 밝힌 뒤 자진하려 할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방치
해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밀은....나 혼자 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결심한 순간 그는 빠르게 뇌옥정의 수혈을 짚었다.
"으음....!"
뇌옥정은 입술을 깨물며 말하려다가 그만 힘없이 용사추의 어깨 위로 쓰
러졌다. 용사추는 자신의 등 뒤에 축 늘어진 뇌옥정의 무게가 마치 풀잎처
럼 가볍다고 느꼈다.그는 침중한 안색으로 벽력팔황을 바라보았다.
"나는....악마초인이요! 여덟 분은 본좌를 믿고 이 분을 본좌에게 맡겨주
시겠소?"
그의 음성에는 압도적인 위엄과 무게가 실려있었다.
"그....럴 수가....!"
"아!"
중인들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경악과 동요의 물결이 장내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이미 벽력대제 화천륭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
었다. 그는 용사추가 악마초인임을 알아본 순간 이미 어디론가 달아난 것이
었다.
경악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벽력팔황은 그 가운데도 냉
정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저 놈은 거인(巨人)이다.)
(악마초인이든 아수라든 상관없다. 저 아이는 전황 이상가는 아이다!)
(저 놈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내심 염두를 굴린 벽력팔황은 하나같이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
의 노안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그것은 승낙
의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용사추는 그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 그는 침중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화룡봉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공격은 무기한 연기하라고...!"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몸을 돌렸다. 그는 뇌옥정을 등에서 끌러 두 손으
로 안아들며 화왕전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중인들은 좌우로 물살같이 갈라지며 그에게
통로를 내주었다. 용사추는 더 이상 벽력뇌강궁의 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벽력뇌강궁의 친구이며 화모 뇌옥정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그가 악마초인임을 꺼림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
가 전황만큼 막강하다는 사실이 벽력전사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미움과 증오....그것은 늘 나타나는 것도 빠르지만 소멸되는 것은 더욱
빠른 법이다. 진정 오래 남는 것은....우정과 신의와, 그리고 사랑(愛)이었
다.
벽력뇌(霹靂雷) 궁(宮)의 비극(悲劇)
용사추의 마라천강도가 횡으로 그어졌다.
위____이잉!
"케____에엑!"
"크악.....도성(刀聖)이다!"
섬뜩한 피무지개가 허공에 퍼져 올랐다. 처절한 비명이 그 뒤를 잇달았고
네 개의 몸뚱이는 여덟 조각이 되어 나뒹굴었다.
그자들의 시신이 나뒹굴며 내밀하고 아늑해야할 여인의 침실은 갑자기 난
장판이 되고 말았다. 잘려진 내장과 흩뿌려진 선혈로 뒤덮인 규방은 피비린
내가 진동했다.
"헉!"
화천륭의 안면은 그만 썩은 돼지간 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즉시 뇌옥정의 몸에서 빠져
나왔다.
휙!
그 즉시 그는 방 한쪽에 기대어 놓은 방천화극(方天火戟)으로 몸을 날렸
다. 하지만 용사추가 가만 보고 있을 리 없었다.
"벽섬....풍(霹閃風)!"
콰릉......!
그는 막 방천화극을 움켜쥐려는 화천륭을 향해 유령같이 다가서며 일도를
내쳤다. 군림대라마도결의 제 일식이 뇌전같은 속도로 작렬했다.
퍼____억!
"크악.....!"
화천룡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방천화극을 잡으려던 그의 오른
팔과 오른쪽 가슴이 용사추의 마라천강도에 싹둑 잘려나간 것이었다.
그의 팔은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고 가슴의 상처도 중상이었다. 폐를 다
칠 정도로 깊게 베어져 나간 그의 가슴은 보기에도 끔찍한 피투성이였다.
화천룡의 몸 주위로는 천근 화약의 폭발에도 능히 견뎌내는 벽력강벽이라
는 호신막이 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용사추의 마라천강도는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의 벽력강벽을
두부처럼 간단히 베어버린 것이었다. 화천룡의 안면은 처절한 고통과 공포
로 일그러졌다.
쿠......웅!
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고꾸라졌다
고 생각한 순간 그의 거구가 믿을 수 없게도 공같이 굴러 창문쪽으로 폭사
되어 나갔다. 거의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용사추는 눈썹을 꿈틀 치켜올렸다.
"교활한 놈!"
위_____잉!
그는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재차 마라천강도를 내쳤다.
콰쾅......!
그가 일으킨 도기는 그러나 애꿎게 창문과 벽만 박살냈을 뿐, 화천륭의
몸은 이미 침실 밖으로 달아나버린 후였다.
용사추는 굳은 안색으로 마라천강도를 거두어 들였다.
"어렵게 되는군. 곧 떼를 지어 몰려오겠지?"
그는 침중하게 독백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음교혜가 알려준대로 화왕곡으로 해서 벽력뇌강궁에 침입한 상태였
다. 그런데, 열화천작이라는 무기고를 찾기도 전에 이 화왕전에서 벌어지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것이 화근이 된 셈이었다. 그의 앞 길이 결코 순탄하지 못할 것은 자명
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삐____이익!
"적이다!"
"강적이 화왕전에 잠입하여 화모(火母)님을 능욕하고 있다!"
날카로운 호각소리에 이어 여기저기서 분분한 함성이 들려왔다. 삽시에
벽력뇌강궁은 대낮같이 환하게 불이 밝혀졌다. 그리고 수많은 그림자가 속
속 날아올라 화왕전을 열 겹 스무 겹으로 에워쌌다.
용사추는 문득 쓴입맛을 다셨다.
"쩝.... 교혜부인께 강자께나 당하겠군."
그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침상에 멍하니 누워있는 화모
뇌옥정에게로 다가섰다.
최강의 화공(火功)을 지닌 여종사. 그 존귀한 신분의 귀부인은 지금 사지
를 큰 대자로 벌려 묶인 채 보기에도 민망한 자태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방자하게 벌려진 하체에는 방금 전의 만행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
었다.
지금 그녀는 완전히 넋을 잃은 듯 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용사추가
다가서는 것을 보면서도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봉목은 크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 그 아름다운 눈은 극도의
수치와 절망감으로 초점마저 잃고 있었다.
부끄럽게 벌려진 그녀의 알몸에는 격렬했던 폭풍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
었다. 사내들의 체액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그녀의 하체는 차마 눈뜨고 보
기 민망할 정도였다.
용사추는 화모 뇌옥정의 처참한 모습에 나직이 탄식했다.
"존체에 손대는 것을 용서하시오!"
파앗!
그는 침중한 어조로 말한 뒤 침상 모서리에 묶인 뇌옥정의 사지를 풀어주
었다. 이어 그녀의 나신을 요로 감싼 후 자신의 등에 질끈 동여맸다. 상처
받고 유린당한 여체는 비로소 부끄럽게 노출된 상태를 면했다.
용사추는 뇌옥정을 등에 업은 후 문쪽을 바라보았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아야 한다. 화모가 종사로서의 이성을 되찾기
전이면 누구라도 내가 화모를 겁탈했다고 여길 것이다.)
그는 지금 영낙없이 뇌옥정을 범한 흉수로 지목받고 있었다. 어쨋든 지금
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볼 일이었다.
이윽고 염두를 굴린 용사추는 뇌옥정을 업은 채 화왕전 밖으로 걸어나갔
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무적신병 마라천강도가 굳게 들려 있었다. 그의 걸음
걸이는 묵중했으며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기도는 마치 태산과 같이 장엄
해 보였다.
거기에다, 등에 미녀까지 업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신과도 같이 느
껴졌다.
용사추가 밖으로 나서자 갑자기 주위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뒤덮였다. 화
왕전을 포위하고 있던 벽력뇌강궁도들은 용사추의 압도적인 기도에 질린 듯
일순 주춤주춤 물러섰다.
무언중에 용사추의 전신에서 풍기는 태산같은 위압감에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바득! 무엇하느냐? 죽여랏! 본문을 우롱하고 너희 주모를 능욕한 놈이
바로 그놈이다!"
돌연,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 악에 바친 분노의 폭갈을 내질렀다. 그는 방
금 전 침실을 빠져 달아난 벽력대제 화천륭이었다.
주춤하던 중인들은 화천륭의 부채질에 다시금 노기충천했다.
"우우! 죽여랏!"
"캇! 감히 벽력일족의 주모님을 능욕하다니......!"
우르르......쐐액!
중인들은 저마다 분분한 음성으로 외치며 메뚜기떼같이 일제히 솟구쳐 올
라 용사추를 덮쳐왔다.
용사추는 그들의 무리를 냉혹한 눈으로 노려보다 문득 번쩍 신광을 발했
다.
(이놈들이다!)
그는 중인들의 무리 가운데를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떼를 지어 덮쳐드는 중인들의 무리. 그 중에는 주위를 선동하여 용사추는
물론, 그의 등에 업힌 뇌옥정마저 무시하고 덤벼드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벽력뇌강궁의 유력자들이었다. 그리고 한 차례 이상씩 화
모 뇌옥정을 범한 화천륭의 공범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지닌
양심이나 죄의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감히 넘겨다 볼 수도 없었던 고귀한 신분의 화모 뇌옥정. 화천륭은 그런
뇌옥정의 몸을 탐욕에 굶주린 무리들에게 즐기도록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자
신의 공범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이 아닐 수 없었
다.
하지만 화천륭은 그 만행을 눈 깜짝하지 않고 자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벽력뇌강궁의 파멸과 그들의 무적화기들을 노리고 외부에서 침투시킨
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번 뇌옥정의 몸을 즐긴 자들은 화천륭의 완벽한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
렸다. 화천륭은 그 대가로 그들이 정기적으로 뇌옥정을 안을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용사추의 예리한 눈은 한눈에 그 모든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그의 가슴
은 분노로 뜨거워졌다.
(죽인다....! 인간같지도 않은 놈들....!)
그는 한 숭고한 여인을 희생물로 걸고 거래를 즐긴 자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살심을 느꼈다.
우우우......웅!
주인의 마음을 알아차린 마라천강도는 벌써 삼엄한 울림을 토해냈다. 용
사추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장내를 노려보며 그대로 중인들 속으로 뛰어들
었다.
"군림.....마라도결!"
츠츠츳.......꽈릉.....!
마라천강도가 눈부시게 휘둘러지며 무서운 검기가 장내를 갈랐다. 용사추
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는 마치 양떼 속에 뛰어든 한 마리 맹호를 연상시켰
다. 그의 마라천강도가 한 번씩 휘둘러질 때 마다 십여 명의 장한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크아악.....!"
"아악!"
비명이 잇달아 터졌다.
용사추의 도는 마치 눈이 달린 듯 정확했다. 그것은 장내를 종횡으로 누
비며 정확히 흉적들을 골라 쓰러뜨렸다. 삽시에 장내는 피바람이 불었고 그
속에 수백 명이 쓰러졌다.
"크으.....살....살성이다! 인간도 아니다!"
"케엑!"
공포의 비명이 피비린내속에 연속적으로 터져나왔다.
분노한 용사추의 마라천강도 아래 흉적들은 어김없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
었고 그들 외의 벽력전사들은 이 놀랍고도 충격적인 광경에 분분히 물러섰
다.
그들의 대부분은 막강한 위력의 화기(火器)를 휴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용사추에게 발출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주모인 화모 뇌옥정이 용사추의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
인을 향해 덤벼드는 무모한 행위를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삽시에 거의 모든 흉적들이 용사추의 마라천강
도 아래 도륙당했다.
이윽고, 용사추는 천천히 화천륭을 향해 다가섰다.
"으......!"
화천륭은 앞 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온통 경악과 공포에 전신을 부들부
들 떨고 있었다. 그는 용사추가 태산같은 걸음걸이로 육박해 드는 것을 보
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각오하라! 악적!"
꽈르릉......!
용사추의 몸이 한순간 도기의 폭풍에 뒤덮인 채 그대로 화천륭을 향해 폭
사되어 갔다.
"허억....!"
화천륭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용사추의 도기를
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공포에 전신을 떨며 그저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십대전신 중 일 인인 화천륭. 그가 전의를 상실한 모습은 초라하고 비참
하기 이를 데 없었다.
파파팍!
용사추의 마라천강도가 벼락같이 화천륭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화천륭은 그대로 몸이 두쪽으로 갈라질 판
국이었다. 그런데 이 때였다.
"노옴....!"
"멈춰랏!"
갑가지 하늘에서 무서운 악인들의 폭갈이 터져나왔다.
쐐___애액!
위이잉......!
그와 함께 여덟 줄기의 형언불가의 거창한 잠력이 용사추를 휩쓸어왔다.
그것은 일견하여 용사추가 겪어보았던 전황의 절대지력에 버금가는 막강한
것이었다.
용사추는 흠칫하며 눈을 부릅떴다.
"천붕멸(天崩滅)!"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폭갈을 내지르며 마라천강도를 그어냈다.
군림도결의 제 이식이었다.
맹렬히 몸을 휘돌리는 용사추의 눈에 여덟명의 신선같은 노인들이 무서운
기세로 자신을 찍어 눌러오는 것이 보였다.
용사추는 대경했다.
"벽력팔황?"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__벽력팔황(霹靂八皇).
벽력뇌강궁의 전설적인 초고수자들. 이미 백 년 이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자들로 벽력대제 화천륭에게 사조뻘되는 고인들이었다. 그들의 갑작스런 등
장은 용사추를 경악시켰다.
콰콰쾅.......!
천만근의 화약이 일시에 터지는 듯한 가공할 굉음이 용사추와 벽력팔황
사이에서 일어났다.
우드드득....!
용사추는 두 다리가 무릎까지 지면으로 박혀들었고 그의 의복과 모발은
강렬한 극양지기에 재로 부스러졌다.
하지만 벽력팔황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무서운 반탄지력에 각
기 여덟 방향으로 퉁겨졌다. 그들의 눈은 놀라움과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
다.
"무....무서운 아해로군!"
"갈! 정아를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그들은 용사추를 다시 팔방에서 포위해들며 노기등등한 고함을 내질렀다.
용사추는 벽력팔황을 마주보며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후손하나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한 노인장들에게 이 분을 내줄 수는 없
소!"
그의 태도는 확고하고 강경했다. 그는 말과 함께 두 눈을 형형하게 번득
이며 마라천강도를 고쳐잡았다.
(탄허파멸참을 펼쳐야겠군.)
위_____이잉!
그는 군림대마라도결의 마지막 일식의 도법을 준비했다. 천마에 의해 창
안되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시전된 적이 없다는 악마의 도결. 그것이 처
음으로 용사추의 손에 의해 시전되려는 것이었다.
"........!"
".........!"
무서운 긴장감이 장내를 뒤덮었다. 팽팽한 살기와 숨막히는 압박감이 중
인들의 가슴을 짓눌렀다.
일대 팔! 단연 숫자면으로도 벽력팔황이 우세했다. 그 위명 또한 가히 신
화적인 존재들이건만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오히려 용사추 일인의 무섭고도
압도적인 기세에 서서히 위압당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흐윽.....그만둬요! 제발....!"
갑가지 활시위같이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을 깨며 처절한 여인의 울부짖음
이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용사추의 등 뒤에서 들렸다.
화모 뇌옥정, 그녀가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뇌옥정의 두 눈에서는 비오
듯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용사추의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
으며 고통스러운 오열을 터뜨렸다.
"이제는 그만.....제발 그만 두세요! 모든 걸.....얘기하겠어요. 흐
흑.....!"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흐느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당한 짐승만도 못한 모든 추행의 전모를 밝힐 작정을 한 것이다. 여인으로
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그 치욕스러운 밤의 일을.
용사추의 안면이 굳어졌다. 그는 뇌옥정이 어떤 결심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말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뇌화정은 자신이 화천륭에게 당
한 치욕을 모두 밝힌 뒤 자진하려 할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방치
해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밀은....나 혼자 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결심한 순간 그는 빠르게 뇌옥정의 수혈을 짚었다.
"으음....!"
뇌옥정은 입술을 깨물며 말하려다가 그만 힘없이 용사추의 어깨 위로 쓰
러졌다. 용사추는 자신의 등 뒤에 축 늘어진 뇌옥정의 무게가 마치 풀잎처
럼 가볍다고 느꼈다.그는 침중한 안색으로 벽력팔황을 바라보았다.
"나는....악마초인이요! 여덟 분은 본좌를 믿고 이 분을 본좌에게 맡겨주
시겠소?"
그의 음성에는 압도적인 위엄과 무게가 실려있었다.
"그....럴 수가....!"
"아!"
중인들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경악과 동요의 물결이 장내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 이미 벽력대제 화천륭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
었다. 그는 용사추가 악마초인임을 알아본 순간 이미 어디론가 달아난 것이
었다.
경악의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벽력팔황은 그 가운데도 냉
정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저 놈은 거인(巨人)이다.)
(악마초인이든 아수라든 상관없다. 저 아이는 전황 이상가는 아이다!)
(저 놈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내심 염두를 굴린 벽력팔황은 하나같이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
의 노안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 것은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그것은 승낙
의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용사추는 그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 그는 침중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화룡봉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공격은 무기한 연기하라고...!"
말을 마치자 마자 그는 몸을 돌렸다. 그는 뇌옥정을 등에서 끌러 두 손으
로 안아들며 화왕전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중인들은 좌우로 물살같이 갈라지며 그에게
통로를 내주었다. 용사추는 더 이상 벽력뇌강궁의 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벽력뇌강궁의 친구이며 화모 뇌옥정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그가 악마초인임을 꺼림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
가 전황만큼 막강하다는 사실이 벽력전사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미움과 증오....그것은 늘 나타나는 것도 빠르지만 소멸되는 것은 더욱
빠른 법이다. 진정 오래 남는 것은....우정과 신의와, 그리고 사랑(愛)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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