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면신협(7)
제14장
금마갱(禁魔坑)의 거마(巨魔)들
용사추의 등장에 흑의여인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사라벽뢰어검풍(邪羅碧雷馭劍風)? 북해마궁의 북해구무종 중에 드
는.....?"
그녀의 입에서 경악에 찬 경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렇다.
용사추가 신검 거궐로 펼친 어검술, 그것은 바로 북해마궁 최강의 비예인
북해구무종에 드는 어검절기였다. 사라벽뢰어검풍에 맞설만한 절기는 손으
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직후 신검 거궐의 어기검강풍과 천마십예에 드는 무영맹룡권강풍이 서로
맹렬히 충돌하며 새파란 불꽃을 일으켰다.
꽈르릉........펑!
그 와중에 용사추와 신비의 흑의여인은 오 장을 격하고 내려섰다. 일견하
기에는 어느 쪽도 이득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면에 내려선 용사추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지다니....!)
그의 눈빛이 수라철면 안에서 충격으로 흔들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비의 흑의여인, 그녀는 최후의 순간 무영맹룡권강풍의 태반을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용사추의 안색은 그야말로 떫은 감을 씹은
듯 했다.
그는 실상 삼할 정도의 무영맹룡권강풍과 맞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으로 그는 흑의여인과 간신히 평수를 이루었다.
용사추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런 초강자가 있었다니.....전황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니다!)
그는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빠르게 뇌리를 회
전시키며 마주선 흑의여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용모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어지럽
게 흩어져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카락 사이로 한 쌍의 날카로운 눈길이 용사추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눈에는 적의가 없어
보였다. 적의는커녕 오히려 그 눈빛은 따스함을 담고 있지 않은가?
용사추는 흑의여인의 눈빛에 일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멍청한 자식!"
짜작....!
용사추의 물음에 여인은 대답 대신 느닷없이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녀
의 신형이 그야말로 유령같이 다가서며 용사추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억!"
용사추는 엉겁결에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그는 여인의 옥보가 움직이
는 것을 보고도 전혀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따귀를 얻어맞았다.
수라철면 위에 맞은지라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용사추의 놀라움
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전혀 피하지도 못하고 맞았다는 사실이 그
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네녀석은.... 사내녀석이 입이 너무 싸다!"
스슥!
여인은 용사추를 싸늘하게 흘겨보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어 그녀
는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런 여인의 태도는 흡사 용사추를 알고 있
는 듯한 어조였다.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다음에 만날 때도 오늘같이 멍청하다면 따귀 한
대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라!"
휘익___!
여인은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며 뒷걸음질로 순식간에 허공 저편으로 멀어
져 갔다.
".........!"
용사추는 그만 멍청해 지고 말았다. 대체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선 채 유령같이 사라져 가는 여인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지존....!"
그런 용사추가 걱정스러운 듯 옥수교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다가섰다.
그녀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용사추를 올려다 보았다.
최초의 패배. 그것으로 인한 용사추의 상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그
녀였다. 그녀의 주인은 너무도 어이없이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옥수교는 무슨 말로 용사추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첫 패배의
쓰라림을 안고 멍하니 서 있는 용사추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어쩔줄 몰라
했다. 그의 패배를 지켜본 그녀의 가슴은 왜 이렇듯 아픈 것일까?
패배를 모르도록 키워진 악마의 초인. 용사추가 전혀 엉뚱하게도 첫 패배
를 당한 것이다. 그 충격은 용사추를 한 동안 멍하게 만들었다.
"무영....환극섬(無影幻極閃).....!"
문득 망연한 표정으로 서있던 용사추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금....뭐라고 하셨죠?"
옥수교는 의아한 눈빛으로 용사추를 올려다 보았다.
용사추는 침중한 안색으로 앓는 듯한 신음성을 발했다.
"틀림없소. 그녀의 보법은.....막북무영종(漠北無影宗)의 둔신보법인 무
영환극섬이란 것이었소!"
그는 침음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무영잠룡 환극에게서 전이된 헝클어진
기억 속에서 방금 흑의여인이 펼친 보법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었다.
문득 그는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무영잠룡 환극.....아니, 내게는 무서운 누이가 한 명 있었던 것 같소!"
그 말에 곤혹스러워 진 것은 옥수교였다.
(있었던 것 같다고....?)
그녀는 용사추의 말뜻을 언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아주 모호
했기 때문이다.
용사추는 잔뜩 곤혹스러운 눈빛을 짓고 있는 옥수교를 바라보며 말을 이
었다.
"그녀의 이름은....막북의 검은 꽃, 지옥철화(地獄鐵花) 환우령(幻雨靈)
이라고 했소!"
"지옥철화 환우령.....!"
옥수교는 봉목을 크게 뜨며 놀라운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녀의 안색은
하얗게 변했다.
__지옥철화 환우령.
막북의 검은 꽃. 그녀의 존재는 가히 전설적인 것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대막의 제부족과 대막을 오고 가는 대상들 사이에서만 신비롭게 그
존재가 거론될 뿐이었다.
그녀는 대막 무림사상 최강자라고 알려졌었다. 그녀는 이미 십 년 전부터
막북무영종의 종사 무영제왕의 이름을 능가하고 있는 상태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환우령은 변황을 단신으로 떠돌며 변황무림의 강파
와 명숙들을 제압하여 하나의 거대한 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전해졌다.
대막의 고독한 암표범 지옥철화.
그녀가 느닷없이 중원에 나타난 것이었다.
옥수교가 안색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놀라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이 어지러운 난세(亂世)에 그 사나운 암표범까지 중원에 나타나다
니....!)
옥수교는 암담한 표정으로 소리없는 신음성을 발했다. 그녀의 가슴은 천
근 만 근인 듯 무거워만 졌다.
그런데 이 때였다.
펄.....럭!
문득 용사추가 들고 있던 신검 거궐의 끝에서 한 조각의 천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은 장포의 소맷자락이 찢어진 천이었다.
용사추의 거궐검은 그저 쉬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옥철화 환우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맷자락을 신검 거궐에 잘린
것이다.
용사추는 천천히 그 천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 천조각에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__구백구십구(九百九十九).
그것은 지존마맹의 일천마왕군의 귀면에 쓰여진 것과 똑같은 필체였다.
한편, 한 쌍의 커다란 봉목이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
지 주시하고 있었다.
주르르......
그 한 쌍의 크고 아름다운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은 뽀얀 수막에 덮인 채 정원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용사추의 뒷모습을 바
라보고 있었다.
더없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눈.....
그 눈의 주인은 초췌한 안색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웠
다. 슬픔에 잠긴 여위고 파리한 안색을 지녔으나 그 본연의 빼어난 아름다
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여인은 주세업의 침전이 내려다 보이는 고루의 창가에 기대어 서 있
었다.
난간을 쥔 그녀의 섬섬옥수에 피멍이 들고 있었다. 입술을 악물고 오열을
삼키는 그녀의 여윈 어깨가 연신 경련을 일으켰다. 고아한 귀품이 배인 여
인의 몸은 슬픔과 절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슬픈 귀인(貴人).....! 운명은 그녀에게 경옥군주(鏡玉君主)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십만대산(十萬大山)__
남방을 동서로 가르는 신산(神山). 십만대산은 당금 무림천하에 있어 가
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지였다.
그것은 십만대산에 하나의 거대한 결사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__철혈전막(鐵血戰幕)!
바로 저 환우최강의 전사동맹(戰士同盟)인 무적의 대정천(大正天)이 이곳
십만대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지난 삼년 간 혼세사패천(混世四覇天)의 발호를 침묵으로 방관해 와
천하무림의 원성을 사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철혈전막의 이름은 절대이고
무적이었다.
전사(戰士)의 동맹.....
무쇠와 피의 진리를 믿는 최강의 무사집단.
그 철혈전막이 바로 십만대산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충천봉(沖天峯)__
십만대산의 북방에 위치한 험봉.
휘___이잉!
".......!"
".......!"
삭풍에 옷깃을 펄럭이며 두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일남일
녀였다.
기린을 연상케 하는 비범한 신체의 청년과 얼굴을 면사로 가린 자의를 걸
친 미부였다. 바로 용사추와 다정관음 옥수교였다.
용사추는 지금 낭야왕 주세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양에 있어야 할 그들이 어떻게 이곳 십만대산에 와있는 것일
까?
용사추는 지금 한 장의 지편을 읽고 있었다. 문제의 지편이 바로 두 사람
을 이곳 십만대산까지 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닷새 전에 전서구로 낭야왕부에 닿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__대지급(大支急).
발신자(發信者): 제일마왕 개세혈황종(蓋世血皇宗).
수신자(受信者): 제십마왕 낭야왕 친전(親前).
하기(下記): 철혈전막에 접근했던 제삼마왕(第三魔王)이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도중 전황과 조우하여 생포되었음.
제십마왕은 팔대흉사(八大兇邪)의 엄호하에 제삼마왕을 구출해 낼 것. 상
황에 따라서 맹(盟)의 보완유지에 필요하다면 제삼마왕을 척살해도 무방하
나 제삼마왕이 철혈전막에서 취득한 기밀만은 반드시 취하도록!
군(君)의 활약을 기대하겠음.
__제일마왕 서(書).
"........!"
지편을 다시 한번 읽고난 용사추는 침중한 안색을 지었다. 낭야왕 주세업
으로 환신한 그로서는 그 명령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옥수교를 대동하고 급히 십만대산으로 이동해온 것이었다.
"누님께서는 이 지편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파스스.....!
용사추는 다 읽고 난 지편을 재로 만들어 버리며 문득 옥수교에게 물었
다.
옥수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지존마맹 내의 세력다툼의 일종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낮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낮은 음성속에는 확고하고도 단
정적인 뜻이 깃들어 있었다.
"세력다툼이라....!"
용사추는 남방을 주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환우최
강의 결사인 철혈전막이 있었다.
옥수교가 말을 이었다.
"본시 제삼마왕(第三魔王) 생사지존(生死至尊)은 야심이 큰 자예요. 그것
은 곧 그자가 남의 수하에 있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요."
".........!"
용사추는 옥수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옥수교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생사지존(生死至尊) 갈후명(葛候命).
그는 지존마맹 내 서열삼위의 절정마종이었다. 그는 마도최강의 호신기공
인 생사마라탄강(生死魔羅彈剛)을 완성한 전설적인 대마종이었다.
그의 생사마라탄강은 달리 생사탄벽(生死彈壁)이라고도 불린다. 멋모르고
그를 가격하면 열 개의 반탄지력이 반진되어 가격한 자를 박살내 버리기에
그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그의 생사탄벽은 가히 거세무적이며 그것을 깰 수 있는 자는 환우를 통틀
어 전황 북리황밖에 없다고 한다.
생사지존은 그렇듯 강한 자였다.
실상 지존마맹의 마왕들 중 서열 오위까지는 거의 비슷비슷한 실력을 지
니고 있었다. 제일마왕 개세혈황종이라 해도 나머지 사대마왕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히, 개세혈황종은 다른 사대마왕을 늘 주목해야만 했다.
특히 사대마왕 중 생사지존은 사사건건 개세혈황종과 대립하곤 했다. 그
것은 자신이 결코 개세혈황종의 하수가 아님에도 지존마맹 내의 서열이 개
세혈황종 보다 두 단계 아래임을 불만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사지존이 개세혈황종에게 눈의 가시같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옥수교의 말을 듣고있던 용사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개세혈황종이 생사지존을 일부러 사지인 철혈전막으로 보냈단 말이
구료?"
그의 물음에 옥수교는 지혜로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래요. 환우에서 생사지존을 제압할 수 있는 강자는 전황 북리황밖에
없으니까요!"
"........!"
"생사지존은 개세혈황종의 의도를 알면서도 철혈전막으로 잠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전황에게 제압당한 거예요."
"흠.....개세혈황종의 계략이 성공한 셈이군."
용사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 언뜻 스산한
신광이 스쳐 지나갔다.
(의외로 지존마맹을 쉽사리 와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옥수교는 그런 용사추를 바라보며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 그녀는 용사추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문득, 옥수교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임무는 확실하게 수행해야만 해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생사지존은 막중한 기밀을 취득한 것이 분명해요. 지존께서는 그 기밀을
반드시 손에 넣으셔야 해요."
그녀는 재차 용사추에게 당부했다.
용사추는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지존마맹이라는 벽을 무너뜨릴 무기로 말이오?"
그 말에 옥수교도 빙그레 웃음지었다.
"개세혈황종이 왜 저 막강한 사대마왕 등을 내버려 두고 서열 십위의 낭
야왕에게 생사지존의 구출을 명령했겠어요?"
용사추는 그녀의 물음에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야 생사지존이 철혈전막에서 얻은 기밀을 다른 경쟁자들에게 빼앗기기
싫어서겠지!"
"그래요! 그만큼 그 기밀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죠."
옥수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득, 용사추의 눈이 강렬한 신광을 번득였다.
"오는군!"
그는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슥.....!
과연 여덟 줄기의 인영이 북서쪽으로부터 기쾌하게 충천봉으로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그자들은 한결같이 허공을 밟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팔대흉사들이군요!"
옥수교는 다가서는 팔인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건만 그
들 팔 인은 하나같이 흉신악살같이 흉흉한 살기를 풍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
다.
-팔대흉사(八大兇邪)!
그들은 일천마왕군 중 서열 오십 위 전후의 흉사(兇邪)들이었다. 어떤 흉
악한 짓이라도 눈하나 깜박이지 않고 해치우는 인간 이하의 마귀들. 그들에
비하면 십대악인은 선인이라고 불려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팔대흉사는 공공연히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등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
들에게 있어 그런 것 정도는 매 끼니마다 밥을 먹는 것과 별다른 의미가 없
었다. 그 정도로는 너무나 무료하다고 느끼고 있는 팔대흉사였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잔인하고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을까를 연구
하는 작자들이었다.
그들 팔대흉사중 두 명만 손을 잡아도 개세혈황종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으니.....
그들의 무서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잔혹하고 무서운 자들이
팔대흉사였다.
"카앗! 낭야왕. 신색이 좋군 그래!"
"크녠.....영계 깨나 잡아먹은 모양이군!"
"크녠! 영계뿐이 아니고 오동통하게 살찐 암탉까지 끼고 다니는군!"
스슥....휙! 휙!
팔대흉사는 음악한 말들을 뱉아 내며 분분히 용사추와 옥수교의 옆으로
내려섰다. 그자들이 나타나자 일시에 주위는 흉흉한 살기로 뒤덮였다.
용사추의 눈빛은 음산하게 침잠된 채 미동도 없었다.
"오랫만이오, 팔흉!"
그는 음험한 어조로 말하며 팔대흉사를 한 명 한 명 노려보았다.
"........!"
".......!"
그런 그의 눈빛을 받은 팔대흉사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용사추의 눈에
서 심혼을 얼려버릴 듯한 사악한 요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요기
는 팔대흉사의 사악함을 모두 합친 것 만큼 강한 것이었다.
팔대흉사는 내심 은은한 경악을 느끼고 있었다.
(이 어린 놈은 갈수록 무서워진다.)
(기회를 보아 제거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이 어린 놈이 우리 머
리 위에 올라앉고 말 것이다!)
그들은 각기 내심 염두를 굴리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런 팔대흉사의 모습에 용사추는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일단 그들의
기선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윽고 용사추는 음산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분을 소개하지!"
그는 옥수교를 가리키며 말했다.
팔대흉사의 눈이 동시에 옥수교에게 향해졌다. 그자들의 시선은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뱀같이 징그럽게 옥수교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헤헤....고것참! 너무 익어 감칠 맛이 나겠는데....!"
"클클! 어린 계집보다 저렇게 탱탱하게 물오른 계집이.....억!"
짜작!
퍽!
음담을 늘어놓던 팔대흉사들의 볼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믿을 수 없
게도 옥수교의 교구가 유령같이 휘돌며 음탕한 말들을 서슴지 않는 팔대흉
사의 따귀를 후려친 것이었다.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조차 없이 팔대흉사는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쿵.....쿵!
그들은 볼에 시뻘건 손자국이 난 채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이내 그자들은
노기충천하여 옥수교를 덮치려 했다.
그러나 용사추가 그들을 제지했다.
"흐흣....조심들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분이 맛좋게 생긴 암탉인 것
은 사실이나 지독한 독을 지녔으니....!"
그는 짐짓 음산하게 웃으며 막 발작하려는 팔대흉사에게 손을 저어 보였
다.
옥수교는 그 말에 아미를 상큼 치켜떴다.
(암탉?)
그녀는 사나운 눈빛으로 용사추를 노려보았다. 아들같기만 하던 용사추가
그렇게 노골적인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용사추는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내심 찔금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치
않았다. 그는 옥수교의 눈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이 분은 바로 자금성의 후궁(後宮) 시위장(侍衛長)이신 절염앙녀(絶艶殃
女) 냉접(冷蝶)이란 분이오!"
그 말에 팔대흉사의 흉흉하던 기세가 한순간에 누그러지고 말았다.
"절염앙녀 냉접.....!"
"어이쿠....!"
그들은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절염앙녀(絶艶殃女) 냉접(冷蝶).
그녀의 이름은 곧 재앙(災殃)을 의미했다. 그녀는 자금성의 후궁을 지키
는 자의신녀위(紫衣神女衛)의 수반이며 동시에 황실제일고수였다.
그러나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지독
한 독심(毒心) 때문이었다. 그녀의 잔혹신랄함은 팔대흉사가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언젠가 한 명의 녹림대도가 실수로 자의신녀위의 여시위를 희롱한 적이
있었다. 그때 냉접은 그 자를 이 만 리나 추격하여 해외에서 생포해 왔다.
그리고는 사십구 일에 걸쳐서 그자를 죽였다고 한다.
사십구 일.....그 기간 동안 그 녹림대도는 지옥의 겁화가 차라리 행복하
다고 느낄 정도로 지독한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수법이 얼마
나 지독했는지 팔대흉사들조차 구토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꿈에 볼까 두려운 여앙신(女殃神)이 팔대흉사 자신들의 앞에
서 있지 않은가?
팔대흉사는 오금이 저렸다.
(죽....었다! 사신을 건드리다니....!)
(이 계집도 무섭지만 이 계집의 뒤에 있는 팔십만금군은 더 지독하
다.....어이구....!)
그들의 안색은 순식간에 돼지 간 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용사추는 절로 웃음이 치밀었다.
(이 정도면 수교누님이 이 자들을 다루는데 무리가 없겠지.)
그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이어 그는 다시 음산
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이 분 냉부인께서 그대들을 지휘할 것이오! 이의 있소?"
그는 음험한 눈빛을 번득이며 팔대흉사들을 둘러보았다.
"이의라니.....무....무슨 말씀이시오?"
용사추의 말이 떨의지기가 무섭게 팔대흉사는 펄쩍 뛰다시피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좋소....좋아!"
"물론....이의 없소!"
여덟명의 흉신악살들은 마치 착한 어린아이들처럼 순순히 용사추의 말에
대답했다.
용사추는 돌변한 그들의 태도에 웃음이 치밀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
한 듯 말했다.
"여러분들은 냉부인의 지휘에 따라 가능한 요란하게 소란을 피우시오! 철
혈전막의 이목이 그대들에게 집중되는 사이에 본좌는 철혈전막의 중지로 잠
입할 것이오!"
그 말이 떨어지자 팔대흉사는 다시 기세등등하여 나섰다.
"소란이라고?"
"켈켈.....그거야 우리들 전문이지!"
"크녠! 걱정은 비끄러매두시구료! 왕야가 철혈전막의 계집들과 마음껏 재
미를 봐도 충분할 정도로 시간을 벌어 줄 테니....!"
그들은 신바람이 난 듯 떠들어댔다.
천하에 손도 못댈 망나니들.
그러나 그들을 다루는 일은 용사추나 옥수교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
다. 약점을 이용하면 의외로 이들은 어린아이같이 순진해지니까.
이윽고, 용사추는 옥수교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럼.....부탁하오, 냉부인!"
그러자 옥수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그녀는 팔대흉사를
돌아보며 싸늘하게 교갈했다.
"따라와요, 망나니들!"
그녀는 냉랭한 눈빛으로 팔대흉사를 돌아보며 즉시 몸을 띄워 남쪽으로
날아갔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팔대흉사는 다시 주눅이 들었다.
"헤헤.....갑니다요!"
"아이고! 날아가는 모습도 아름답기도 하시지....!"
스슥.....휙! 휙!
그들은 간사한 아첨의 웃음을 흘리며 분분히 옥수교의 뒤를 따라 몸을 날
렸다. 그 모습은 흡사 어미 기러기를 쫓아가는 새끼 기러기들과 다를바 없
었다.
용사추는 그 광경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득 그의 귓전으로 가는 전음이 흘러들었다.
"오늘 밤 삼경이 되기 전까지.....일을 마치셔야 해요. 철혈전막 내의 내
응자가 지존을 도와줄 수 있는 시간이 그 때까지이니까요!"
물론 그것은 옥수교가 몸을 날리며 전한 것이었다.
"삼경이라.....!"
용사추는 힐끗 천색(天色)을 살폈다. 아직은 신시말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자, 팔대흉사와 수교누님이 십만대산을 발칵 뒤집어 놓을 때까지 조금
쉬어야겠군. 오늘 밤에는 한바탕 힘겨운 드잡이질을 해야 할 테니....!"
스슥!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동쪽으로 날아갔다.
칠흑같은 밤.
음울한 어둠의 장막이 십만대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깊고 암울한 어둠의 장막 속. 하나의 거대한 석성(石城)이 마치 거인(巨
人)이 드러누운 형상으로 벌려 있었다. 여섯 개의 산봉우리와 여덟 개의 분
지를 뒤덮고 벌려선 웅장한 석성!
__철혈전막!
이것이 바로 철혈전막이었다.
대정의 하늘(大正天)으로 불리는 환우제일지. 살아서의 치욕보다는 죽어
서의 명예를 얻기 바라는 열혈의 승부사들....철혈전막은 바로 그들의 하늘
로 군림하고 있었다.
<금마갱(禁魔坑)>
그것은 철혈막부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하 삼백 장의 갱도.....그
곳은 흡사 호리병과 같이 생겨 어떤 경공의 달인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지
였다.
금마갱을 출입하려면 천잠사로 만들어진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가능했다.
그 천잠사의 사다리만이 오직 금마갱을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
이다. 금마갱은 오래 전부터 무림을 어지럽힌 거효대마들의 뇌옥으로 사용
되고 있었다.
이십여년 전, 수많은 거마들이 금마갱에 던져졌다.
전황 북리황은 그들의 무공을 제압하거나 금제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결코 적을 두려워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십여년 동안 그 누구도 금마갱을 탈출하지 못했다. 아니, 탈출
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아예 탈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전황 북리황을 이기지 못하는 한 그들의 탈옥은 너무나 무모한 짓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불회(不廻)의 유형지.....금마갱. 그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
다.
스읏!
문득 하나의 인영이 형체없는 그림자같이 금마갱의 입구로 접근했다.
그는 은형만리추의 경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십대악인 중 은형도수의 절
정은둔보법.
그는 주세업으로 환신한 용사추였다.
(저곳이군. 금마갱이....!)
휙!
용사추는 울창한 관목의 그늘로 그림자를 파묻으며 몸을 멈추었다.
그의 오십 장 앞.
황량한 석상을 등지고 하나의 거대한 지하공동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직경 오십여 장의 지하공동.
암천을 향해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 지하공동은 흡사 거대한 괴
물의 입같이 무시무시해 보였다.
바로 이곳이 금마갱의 입구였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나오지 못한
다는 불귀의 마역.....
"........!"
용사추는 어둠속에서 검미를 찌푸렸다. 기이하게도 금마갱 주위에는 사람
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금마갱 같은 중지에 경계 하나 없는 것도 기이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다정관음 옥수교가 철혈전막에 심어 놓았다는 내응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용사추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조력자가 없으면 금마갱
에 접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였다.
"나를.....찾는가?"
문득 한소리 싸늘한 음성이 용사추의 뒤에서 들려왔다.
"........!"
용사추의 몸이 석상같이 굳어졌다.
(바로 뒤에까지 접근하도록 몰랐다니....!)
그의 등줄기로 서늘한 오한이 스쳤다.
나타난 자는 놀랍게도 용사추가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바로 그의
뒤에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슥....!
용사추는 뒤로 빙글 돌아섰다.
그런 그의 삼장 뒤. 한 명의 인물이 어둠 속에 우뚝 선 채 용사추를 노려
보고 있었다.
"네가....옥(玉)가의 계집이 보낸 놈이냐?"
그자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마치 야수의 그것같이 새파랗게 번뜩이고 있
었다.
용사추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이 자가 수교누님의 간세란 말인가?)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눈앞의 인물을 주시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자. 그는 당당한 체구의 청포노인이었다.
나이는 육십 전후로 보였으며 전신의 피부가 마치 청동으로 빚은 듯 새파
란 청색을 띠고 있엇다. 또한 두 눈에서도 청색의 신광이 번갯불같이 번뜩
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 인물이 익힌 한 가지 패도기공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__청강명옥신공(天 冥玉神功).
이것이 그 기공의 이름이었다. 현문정종(玄門正宗)의 가장 극강한 패도기
공.
그것은 정파 십대기공 중 서열 육 위에 드는 호신강기 파해전문의 파천신
공(破天神功)이었다.
청포노인은 놀랍게도 그 전설적인 현문기공을 극치까지 완성한 인물이었
다.
용사추는 신음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놀랍군. 그대가 옥마(玉魔)의 간세였다니.....대라천강수(大羅天剛手)!"
그는 경악의 눈으로 청포노인을 주시했다.
-대라천강수(大羅天剛手) 고균(高均)!
청포노인은 대라천강수라는 별호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저 정파
최고의 강자들인 십대전신 중의 일 인이었다.
십대전신의 일 인.....
그는 옥수교의 환우일천군영보의 분류상 특류품에 드는 자였다. 또한, 저
철혈전막의 최강전사대 철혈삼십육천강의 수뇌가 바로 그였다.
놀랍게도 그 자가 바로 옥수교가 철혈전막에 심어 놓은 간세였던 것이다.
대라천강수 고균__
그는 여색(女色)에 덤덤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영웅호색이란 말이 그
에게만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 년 전 어느날이었다.
무산(巫山) 근역을 지나던 고균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그는 하나의
산동으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그 산동에는 한 명의 어린 소녀가 먼저 들어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소녀
의 나이는 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였다.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있어 소
녀의 풋풋한 몸매가 뇌살적으로 드러나 보였다.
그것을 보자 고균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갑자기 그는 사악한 욕념에
휘말리고 말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그는 눈 앞의
여체를 소유하고픈 욕념밖에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야수로 돌변하고 말았다. 그는 울며불며 저항하는 소녀를 무
자비하게 찍어누르고 범했다.
한바탕 정신없이 소녀를 유린하고 난 뒤에야 고균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
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는 아연실색했다.
그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일을 이미 벌여 놓은 후였다. 상대는 그의 손
녀뻘밖에 되지 않는 어린 소녀였다.
만일 이 사실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어찌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고균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상실하고 완전히 매장
당하고 말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른 고균은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쌀은 이미 밥이 되어 버렸으니 어
찌하겠는가?
고균은 생각 끝에 한 가지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그 소녀를 은밀한 장원으로 데려가서 그곳에 안주시켰다. 그 후에도
그는 여자가 그리워질 때마다 그 소녀를 찾아가 욕정을 풀었다.
이렇게 되자 점차 그 소녀도 고균을 지아비같이 섬기게 되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그만의 비밀.
그런데 어느날 옥수교의 천수천안(千手千眼)에 그 사실이 포착되었다. 그
때부터 대라천강수 고균의 불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야 했다. 대부분의 정파명숙들이 그러하
듯이 그에게 있어 명예는 목숨보다도 귀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십대전신 중의 일인이 아닌가?
고균은 자신의 명예를 보전하기 위해 옥수교의 천개의 손 중에 하나가 되
어야만 했던 것이다.
"옥가(玉家) 계집......아니, 천수령주와의 약속은 지킨다!"
슥....!
대라천강수 고균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소매에서 무엇인가글 꺼내었다.
그것은 한 뭉치의 실타래였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실타래가 아니었다. 바로 천잠사를 꼬아만든 실타
래였다. 그것은 사다리 모양으로 엮어져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금마갱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도구였다. 감겨진 것
은 손아귀에 들 정도로 작으나 그것이 풀리면 족히 삼백 장의 길이가 된다.
이윽고, 고균은 천잠사를 들고 금마갱으로 다가갔다.
용사추도 소리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노부가 너를 엄호해 주는 것은 삼경까지일 뿐이다."
고균은 걸음을 옮기며 냉랭한 음성으로 못을 박았다.
"삼경?"
"그렇다. 노부가 이곳 금마갱을 경계하도록 배정된 시간이 그 때까지다!"
"아!"
용사추는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그는 옥수교
가 왜 삼경까지 모든 일을 끝내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삼경이 지나면....노부는 네게 일체의 책임도 없다!"
고균은 싸늘하게 웃으며 천잠사를 금마갱으로 풀어넣었다.
스르르.....
보일 듯 말 듯 가늘기 그지없는 천잠사의 실타래가 빨려들 듯이 금마갱의
음침한 공동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경고해 두건데, 조심하는 것이 좋다!"
고균은 새파란 눈빛을 번득이며 용사추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에는 인간도 아닌 악귀들이 천 명 이상 있다. 자칫하면 너는 그
들의 손에 형체도 찾을 수 없도록 찢겨 죽을 수도 있다!"
그 말에 용사추는 싱긋 웃었다.
"걱정해 주어서 고맙소. 그보다도....!"
그는 천잠사의 사다리를 쥐며 말했다.
"하하.....행여 마음이 변하여 줄을 놓는다든지 그런 일이나 마시구료!"
그는 낭랑하게 웃으며 빠르게 금마갱 안으로 사라져 갔다.
"........!"
고균은 금마갱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용사추를 새파란 눈으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실컷 좋아해라. 언젠가는....내 손에 죽을 테니.....네놈 낭야왕은 물론
옥가의 계집도....!"
그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은 어둠속에서 섬뜩하리만치 새파
랗게 번득이고 있었다.
칠흑의 어둠....
그 속에 용사추는 서 있었다. 그의 전신은 팽팽한 긴장으로 뒤덮여 있었
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지하 삼백 장의 공동.....
그 암흑속에서 수많은 눈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흡사 창날로 찔러대는 듯한 살기가 그 눈빛에 담겨 있었다.
암흑 속에는 용사추가 이제껏 상대해 본 그 어떤 강적보다 강한 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금마수인(禁魔囚人).
그들은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마도의 강자들이었
다. 오직 전황 북리황만이 제압할 수 있었던 절정의 마종들.
너무나 강했기에 악인성으로 도피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진정한 마
웅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츠으.....휘......이이잉!
한점 바람도 없는데 용사추의 장포가 폭풍에 휘말린 듯이 무섭게 펄럭였
다. 그는 지금 극도의 긴장감으로 팽배해 있었다.
흡사 거미줄같은 무형의 살기가 천가닥 만가닥으로 그의 전신을 얽어매
오고 있었으며 그에 대항하여 일어난 용사추의 호신강벽이 서로 충돌하여
무서운 경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용사추의 안색은 무겁게 굳어졌다.
(이자들은....나를 시험하고 있다!)
그의 이미로 문득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극도의 긴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천의 금마수인들.
전황 북리황은 어쩐 일인지 그들을 가두어 두기만 했을 뿐 무공을 폐지하
지는 않았다. 자연히, 금마수인들은 이를 갈며 무공연마에 박차를 가했다.
자신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전황 북리황을 쓰러뜨리기 위해.
더군다나, 금마갱의 험악한 환경은 그들에게 오로지 무공연마에만 박차를
가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덕분에 금마수인들의 마공절기는 비약적으로 강대
해졌다.
그들은 사실상 천하최강의 단일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황 북리황, 그는 왜 자신의 품속에 독사의 무리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사신....파천황(四神破天皇)....풍(風), 운(雲), 뇌(雷), 우(雨)....!)
용사추는 내심 나직이 중얼거리며 쌍장을 엇갈려 내쳤다.
쿠쿠쿵.....!
무서운 파천지력이 일며 순간적으로 용사추를 얽어매어 오던 천가닥의 살
기가 산산이 끊어지고 바스러졌다.
사신파천황....
마교십가에 비전되어 오는 천마십예 중의 절정마예. 그것은 순간적으로
용사추의 주위에 있는 모든 금제를 바스러뜨렸다.
"으음....사신마전(四神魔殿)의 후예냐?"
그 직후 용사추의 전면에서 경악성이 담긴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덧 어둠에 익숙해진 용사추의 눈에 한 명의 노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한쪽 팔과 한 다리가 없는 불구 노인.
거기다가 그는 얼굴 전체가 무참하게 부서진 끔찍한 형상이었다.
그 노인을 본 용사추는 흠칫했다.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런데....노인장께서는 천잔마종(天殘魔宗) 살극소
(薩極蘇)가 아니신지요?"
그는 어둠속에 우뚝 선 채 형형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은 금마
갱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형형했다.
(이놈은 예삿놈이 아니다....!)
괴노인의 찌그러진 독안(獨眼)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이어 그는 괴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노부가 환우일잔(還宇一殘) 천잔마종 살극소다! 이 금마갱의 형
식적인 총수지!"
(역시....!)
용사추는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천잔마종(天殘魔宗) 살극소(薩極蘇)!
그 이름은 이미 이십 년 전에 사라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강자들이라면 그 이름을 결코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전황 북리황의 이전시대를 풍미했던 환우제일인이었
기 때문이었다.
환우일잔으로 불리는 그의 별호가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 이름은
백 년 내내 환우최강자와 대륙제일마종을 의미했다.
그는 그 옛날 마교의 융성시 마교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천잔일맥의 후
예였다. 그가 활동했을 때에는 십대악인도, 십대전신도 그와 만날까봐 전전
긍긍할 정도였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천잔마종 살극소는 한 명의 무서운 신예와
충돌하여 사흘 밤낮의 대격전 끝에 최초의 패배를 당하게 된다.
그가 바로 전황 북리황이었다. 그것이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낭야왕 주세업이라 하오! 한 분 선배를 뵙기 위하여 왔소!"
용사추는 살극소를 마주보며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하의 천잔마종 살극소. 그 앞에서 이같이 당당할 수 있는 자는 전황 북
리황 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다.
살극소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놈은....제 이의 전황이 될 놈이다!)
츠읏....!
그와 함께 그의 눈빛이 더욱 형형해졌다.
전대의 환우제일인! 그의 노련한 눈은 용사추의 감춰진 실체를 한눈에 파
악해 내고 있었다.
(역시 환우일잔이다....!)
용사추 역시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살극소의 외눈. 그것은 용사추가 본 어떤 눈보다도 강하고 지혜롭다고 느
꼈기 때문이다.
"생사....지존을 찾으러 왔겠지?"
살극소가 먼저 물었다.
용사추는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나는.....그를 데려가야만 하오."
그는 대답과 함께 힐끗 위를 바라보았다. 시커먼 암천이 손바닥만하게 보
였다.
"그를 데리고 나가지는 못한다!"
살극소가 외발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째서요?"
용사추는 살극소의 뒤를 따라가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죽어가고 있다."
이것이 살극소의 대답이었다.
제15장
철혈일지(鐵血日誌)의 비밀
금마갱의 가장 깊은 곳.
하나의 건조한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서인가 생긴 야명주로 그나
마 흐릿하게 빛이 들어오는 석실.
그 석실 안에 한 명의 인물이 석벽을 마주본 채 단좌해 있었다.
당당한 체구에 새하얀 백발을 허리 아래까지 드리운 적포노인이었다. 그
는 등을 돌리고 있어 용모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포노인의 뒷모습에
서는 흡사 태산같은 기도가 느껴졌다.
용사추는 석실의 입구에 우뚝 선 채 몸이 굳어졌다.
(이 사람이....제삼마왕 생사지존이군!)
그는 적포노인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석상같이 굳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뒷모습만으로도 적포노인이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 알아볼 수 있었던 것
이다.
적포노인의 기세는 천잔마종 살극소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무서움을 내포하
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제삼마왕 생사지존이었다.
"몸을 움직이면....그는 즉시 죽는다!"
살극소가 용사추의 옆에 외발로 선 채 침중하게 말햇다. 그가 평칭을 쓰
는 인물은 금마갱 내에서 생사지존밖에 없었다.
"전황의 철혈수(鐵血手)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었습니까? 천하의 생사지
존을 죽어가게 만들 정도로?"
용사추는 생사지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중하게 물었다.
살극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전황의 철혈수는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문득 갈후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살극소의 눈빛이 아주 강해졌다.
"그러나 그를 죽이고 있는 것은 철혈수가 아니라 독(毒)이다!"
"독....1"
용사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경악하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렇다. 지금 갈후명은 무서운 만성극독에 전신 심맥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 그는 전황 북리황과 충돌하기 이전에 이미 중독된 상태였다."
"그럴 수가....!"
용사추는 아연하며 경악성을 발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갈후명을
주시했다.
생사지존 갈후명은 오래전에 암산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암산한 독
은 제왕지독(帝王之毒)이라는 것으로 해독이 전혀 불가능한 치명적인 극독
이었다.
그것은 달리 무영지독이라 불리며 환우간에 단 한 사람만이 그 독을 취급
할 수 있는 독중지독이었다.
그 일인은 바로 조화독종이었다. 저 십대악인의 수반인.....
"제왕지독은 그의 막강한 생사마라탄강에 눌려 잠복해 있었다. 그러다가
전황의 철혈수가 생사탄강을 바스러뜨리자 발작한 것이다."
"음....!"
용사추는 살극소의 설명을 들으며 안색이 거듭 변했다. 그는 침중한 신음
을 발하며 물었다.
"치료할 방법이나 독성의 발작을 저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다!"
살극소는 단정적으로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이 때였다.
쩌___어엉!
돌연 석실 안에 강렬한 빛줄기가 작렬했다.
생사지존 갈후명, 그가 눈을 뜬 것이다.
그는 여전히 벽면을 마주본 채 입을 열었다.
"너는....누구냐?"
갈후명은 천천히, 한자 한자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것은 흡사 무간지옥
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산하고 공허한 음성이었다.
"소제의 음성을 잊으셨소이까? 제십마왕이외다!"
용사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십마왕?"
갈후명의 목소리가 의혹의 여운을 끌었다.
(무서운데....? 목소리 만으로도 탄로가 난 것이 아닐까?)
용사추는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갈후명이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갈후명은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살형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오!"
그것은 살극소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알겠소!"
살극소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후 석실에서 물러났다.
석실에는 용사추와 갈후명만이 남게 되었다.
"너는....누구냐?"
갈후명은 재차 똑같은 질문을 했다.
용사추는 그 물음에 지체없이 대답했다.
"악마....십호!"
"........!"
갈후명의 뒷모습에 순간 격렬한 파문이 스쳐 지나갔다.
"악마초인이란 말이냐?"
그는 재차 확인하듯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어조에는 많은
비밀과 복잡한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은 갈후명이 악마초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지
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갈후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제서야 용사추는 갈후명의 모습을 볼 수
가 있었다. 강팍하고 냉혹했다. 갈후명의 모습은 그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늘고 차갑게 찢어진 눈매, 매부리코에 얄팍한 입술은 그의 성품이 잔혹
한고 심기가 깊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갈후명의 안면은 기이하게도 섬뜩한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것은 제왕지독이 이미 그의 심장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초극강의 고수자, 생사지존. 제왕지독은 그런 그
마저 죽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십....마왕 주세업은....?"
갈후명이 으르렁 거리듯 다시 입을 열었다.
"죽었소!"
용사추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죽어?"
츠읏!
갈후명의 가는 눈에서 무서운 한광이 쏟아졌다. 그것은 범인이라면 능히
그 눈빛만으로도 질식해 죽을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용사추는 달랐다.
그는 여전히 담담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나는....악마의 초인으로 길러진 놈이오!"
그는 여유있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그것을 잊었군."
갈후명이 앓는 듯한 음성으로 탄식했다. 그와 함께 그의 강렬하던 눈빛이
문득 허무하게 스러졌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용사추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도록
길러진 악마의 종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악마초인에게 주세업을 왜 죽였느냐는 따위의 질문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누가...너를 보냈느냐?"
갈후명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누 은
강렬하기 이를데 없었다.
"제일....마왕이 보냈느냐? 아니면....지존마야가....나의 목숨을 끊어놓
으라고 보냈느냐?"
맹호는 다 죽어가는 지경에 처해도 역시 맹호였다. 갈후명의 일신에서 일
어나는 기도는 마치 태산과도 같이 막중했다.
(지존마야?)
용사추는 갈후명의 입에서 지존마야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내심 흠칫했
다.
(지존마야가 왜 생사지존 갈후명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심의 의혹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나는 내 의지로 왔을 뿐이오!"
그는 묵중한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했다.
"........!"
갈후명의 눈빛이 한 차례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죽어가는 눈에는 여
러 가지 표정이 스쳐갔다.
그러다 문득 그는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크녠....그렇군! 악마의 종자를 누가 감히 부리겠는가?"
말을 하는 그의 눈에 한 가닥 결의의 빛이 스쳐갔다. 문득 그는 기이한
눈으로 용사추를 바라보았다.
"악마....초인! 거래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갈후명의 눈빛에는 용사추가 자신의 제의에 응할
것이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용사추는 예상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천하의 생사지존과라면 나 악마초인의 거래 상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
겠지요."
"좋아, 악마초인!"
갈후명도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음산하게 웃고 있었으나 그의
웃음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인간다운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본좌는 네가 원하는 전황 북리황의 기밀을 주겠다. 그 대가로....너는
한 명의 효웅을 나 대신 죽여다오!"
"개세혈황종이겠지요?"
"소식이 빠르군."
갈후명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그를 제거하려 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의 말에 용사추는 의아한 기색을 지었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고요?"
"그렇다. 그는 교(敎)를 배신한 배덕자다! 그래서 ......죽여야 한다!"
"교...?"
용사추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제서야 생사지존 갈후명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체념의 표정이 되었다.
용사추가 결코 변명 따위에 속아 넘어갈 인물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
다.
갈후명은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악마초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 개세....혈황종과 본좌는 바로 마교(魔敎)의 후예다!"
그는 숨김없이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마....교!"
용사추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그의 전신에 격렬한 놀라움의 파
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그는 본능적으로 소매 속에 있는 마교지존
의 신물 천마지존환을 어루만졌다.
-마...교(魔敎)!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상고의 무림을 제패했던 전설 속의 초거대강파. 수천 년의 무림사를 통틀
어 과연 마교의 성세에 맞설만한 조직이 존재했던가?
놀랍게도 혼세사패천 중 지존마맹의 수뇌부가 바로 그 마교의 후예들이었
던 것이다.
"제일마왕 개세혈황종과 본좌 등은 바로 마교십가(魔敎十家)중 혈전백마
궁(血戰百魔宮)의 후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용사추의 귓전에 갈후명의 음성이 이어졌다.
__혈전백마궁!
그들은 바로 마교를 이루던 주역 마교십가 중의 일가였다.
총인원은 일백 명. 하지감 그 개개인이 절정에 이른 마종들로 결성되어
있었으며 마교 내에서 천년마후성과 철혈마가에 이어 서열 삼위에 올라있는
강파였다.
개세혈황종 도천극.
그는 바로 그 혈전백마궁의 백인마종 중 제일마종이었다. 그것은 실로 놀
라운 일이었다.
천년 그 이전에 지상에서 소멸되었다고 알려진 마교! 그 후예들의 종적이
혼세사패천 중에서 발견되다니.....
"지존마맹은 바로 우리 혈전백마궁의 변신이다!"
갈후명의 입에서는 계속 놀라운 말들이 흘러 나왔다.
용사추는 거듭되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낭야왕 주세업은 바로 혈전백마궁의 백마 중 일 인이었군. 그래서 그토
록 강했던 것이고....!)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침음성을 발했다.
낭야왕 주세업은 바로 백마 중의 일 인이었던 것이다.
문득 갈후명의 입가로 한 줄기 조소가 어렸다.
"맹의 주역은 분명 우리 혈전백마궁이나....맹을 지배하는 것은 본 궁이
아니었다."
용사추는 그 말에 언뜻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지존....마야!"
갈후명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바로 그 지존마야가 지존마맹의 실질적인 지배자다! 얼마 전에
노부는 우연히 그 지존마야의 원래 신분을 알게 되었다."
말을 하는 그의 두 눈이 살기로 이글거렸다. 그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자의 신분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바로 그 옛날 본 마교를 멸
망으로 이끈 번뇌마가(煩惱魔家)의 후예였다."
"번뇌마가...!"
용사추의 눈가로 의혹의 그늘이 떠올랐다.
번뇌마가....
그들 역시 마교십가 중의 일가였다. 그들의 특기는 모략과 음모라고 알려
졌다. 세 치 혀로 천하를 망칠 수도 있다는 마교의 꾀주머니가 바로 번뇌마
가였다.
그런데, 그 번뇌마가가 마교의 멸망을 초래한 주범이었다니.....
용사추의 뇌리로는 수많은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겉으
로 내색하지 않앗다.
갈후명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번뇌마가는 마교의 제일역적이다. 무릇 마교의 후예는 마교를 파멸로 이
끈 번뇌와 철혈을 척살함을 제일사명으로 알아야 한다!"
그는 살기띤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용사추는 검미를 찌푸렸다.
(철혈(鐵血).....? 마교십가 중의 철혈마가 역시 그 옛날 마교의 멸망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의 의혹은 천 겹 만 겹으로 쌓여만 갔다.
"그런데....!"
문득 갈후명의 어조가 아주 삼엄해졌다.
츠읏......
그의 눈빛은 천 개 만 개의 뇌전이 작렬하듯 휘황해졌다.
"제일마종 개세혈황종! 그는 지존마야가 번뇌마가의 출신이란 것을 알면
서도 그 자의 야심을 이루는데 조력하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그는 죽어야만 한다! 교의 율법에 맹세코....!"
용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 속의 절대마종. 그는 갈후명이 자신의 정체를 알았음을 탐지했고 그
래서 그는 갈후명을 제거하도록 개세혈황종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생사지존 갈후명을 죽인 것은 개세혈황종도 전황 북리황도 아닌 것이다.
그는 바로 지존마야였다.
"본좌가 전황에게서 빼낸 기밀이란 것은....바로 그의 일지(日誌)였다."
"일지? 전황 북리황의 일지....?"
용사추는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두 눈에 신광을 번득였다.
갈후명은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후훗! 일지라고는 하나 그 중에는 엄청난 비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전무림을 파멸시키에 충분한 막중한 기밀이 된다."
"아!"
용사추는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흘렸다.
전황의 일지....그것은 절대자의 고독한 기록이며 그 안에는 수십만 명을
파멸시키기에 충분한 엄청난 비밀들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
의 가치는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지존마야와 개세혈황종.
그들은 갈후명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로 그 절대자의 일지를 이용
한 것이다.
갈후명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노부는.... 전황일지를 철혈막부에서 반출해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
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한 곳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
다."
그의 입가로 득의의 미소가 흘렀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용사추는 긴장하며 물었다.
"그곳은.... 바로 전황의 침실이다?"
"아!"
용사추의 입이 그만 딱 벌어졌다.
갈후명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노부는 전황의 일지를 그의 침실의 벽속에 내공으로 박아넣었다. 후
훗.....아무리 전황이라고 해도 설마 노부가 그것을 자신의 침실에 숨긴 줄
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
용사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등하불명이랄까?
아무리 전황이라 해도 설마 자신이 잃어버린 일지도 자신의 침실에 숨겨
져 있음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전황의 일지는 네것이다. 너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
다!"
문득 갈후명은 형형한 눈으로 용사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개세혈황종을 죽여라! 마교의 율법에 따라....!"
용사추는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지존마야를 척살하라고는 하지 않으실 작정이오?"
그러나 갈후명은 그 말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것까지는 청부하지 않아도 된다. 후후....왜냐하면 지존마야는 네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운명의 적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적....!"
용사추는 입 안으로 나직이 그 말을 되뇌었다.
갈후명은 그것을 바라보며 기소를 흘렸다.
"후훗....그렇다! 지존마야는 자신의 운명의 적이 전황일줄 알고 있으나
실상 그를 파멸시킬 운명의 적은 바로 너 악마초인이다!"
그의 음성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죽음에 직면해서일까? 그의 태도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듯 의연해 보였
다.
문득, 갈후명의 깡마른 손이 용사추의 정수리를 신쾌하게 움켜쥐었다.
파악!
".......!"
용사추는 움직이지 않고 갈후명이 자신의 정수리를 쥐도록 내버려 두었
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우르르......
무서운 잠력이 그의 정수리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갈후명은 개정대법으로 용사추에게 자신의 전 내공을 쏟아부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오갑자의 생사마라탄강을 네게 넣어 주마. 그것으로....개세혈황종 도천
극을 죽여라!"
".......!"
웅.....웅!
갈후명의 웅혼한 음성이 용사추의 귓전에 우뢰같이 들려왔다. 용사추는
눈을 감고 좌정한 채 갈후명의 생사마라탄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내 그는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갈후명의 괴
악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마야....! 그대는 실수한 것이오. 후훗.....그대는 그대가 키운 마룡의
손에 파멸당하게 될것이오....!"
우르르르.....!
갈후명의 생사마라탄강은 마치 봇물 터지듯이 용사추의 내부로 쏟아져 들
어왔다.
그것은 생사지존 갈후명의 혼(魂)이 깃든 것이었다.
그는 죽는 것이 아니었다.
마교의 진정한 용사 생사지존 갈후명! 그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바
로 용사추의 몸을 빌어서.....
__은황각(隱皇閣).
그것은 철혈막부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울울창창한 청죽림
에 뒤덮인 고아한 전각.
은황각은 바로 전황 북리황의 침전이었다.
삼경 말.
스.....읏!
하나의 흐릿한 인영이 은황각을 둘러싼 청죽림으로 안개와 같이 스며들었
다. 유령인 듯이 흐릿한 형태의 인영.
그는 바로 용사추였다.
".......!"
그는 은형도수의 절정 잠입술로 전황 북리황의 침전으로 잠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정관음 옥수교와 팔대흉사가 어지간히 소란을 부린 탓인지 철혈막부 내
금마갱(禁魔坑)의 거마(巨魔)들
용사추의 등장에 흑의여인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사라벽뢰어검풍(邪羅碧雷馭劍風)? 북해마궁의 북해구무종 중에 드
는.....?"
그녀의 입에서 경악에 찬 경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렇다.
용사추가 신검 거궐로 펼친 어검술, 그것은 바로 북해마궁 최강의 비예인
북해구무종에 드는 어검절기였다. 사라벽뢰어검풍에 맞설만한 절기는 손으
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직후 신검 거궐의 어기검강풍과 천마십예에 드는 무영맹룡권강풍이 서로
맹렬히 충돌하며 새파란 불꽃을 일으켰다.
꽈르릉........펑!
그 와중에 용사추와 신비의 흑의여인은 오 장을 격하고 내려섰다. 일견하
기에는 어느 쪽도 이득을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면에 내려선 용사추는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지다니....!)
그의 눈빛이 수라철면 안에서 충격으로 흔들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비의 흑의여인, 그녀는 최후의 순간 무영맹룡권강풍의 태반을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용사추의 안색은 그야말로 떫은 감을 씹은
듯 했다.
그는 실상 삼할 정도의 무영맹룡권강풍과 맞섰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으로 그는 흑의여인과 간신히 평수를 이루었다.
용사추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런 초강자가 있었다니.....전황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니다!)
그는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안색이 굳어졌다. 그는 빠르게 뇌리를 회
전시키며 마주선 흑의여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여인은 용모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어지럽
게 흩어져 여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카락 사이로 한 쌍의 날카로운 눈길이 용사추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눈에는 적의가 없어
보였다. 적의는커녕 오히려 그 눈빛은 따스함을 담고 있지 않은가?
용사추는 흑의여인의 눈빛에 일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멍청한 자식!"
짜작....!
용사추의 물음에 여인은 대답 대신 느닷없이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녀
의 신형이 그야말로 유령같이 다가서며 용사추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억!"
용사추는 엉겁결에 고스란히 당하고 말았다. 그는 여인의 옥보가 움직이
는 것을 보고도 전혀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따귀를 얻어맞았다.
수라철면 위에 맞은지라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용사추의 놀라움
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전혀 피하지도 못하고 맞았다는 사실이 그
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네녀석은.... 사내녀석이 입이 너무 싸다!"
스슥!
여인은 용사추를 싸늘하게 흘겨보며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어 그녀
는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런 여인의 태도는 흡사 용사추를 알고 있
는 듯한 어조였다.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 다음에 만날 때도 오늘같이 멍청하다면 따귀 한
대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라!"
휘익___!
여인은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며 뒷걸음질로 순식간에 허공 저편으로 멀어
져 갔다.
".........!"
용사추는 그만 멍청해 지고 말았다. 대체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선 채 유령같이 사라져 가는 여인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지존....!"
그런 용사추가 걱정스러운 듯 옥수교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로 다가섰다.
그녀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용사추를 올려다 보았다.
최초의 패배. 그것으로 인한 용사추의 상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그
녀였다. 그녀의 주인은 너무도 어이없이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옥수교는 무슨 말로 용사추를 위로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첫 패배의
쓰라림을 안고 멍하니 서 있는 용사추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에 어쩔줄 몰라
했다. 그의 패배를 지켜본 그녀의 가슴은 왜 이렇듯 아픈 것일까?
패배를 모르도록 키워진 악마의 초인. 용사추가 전혀 엉뚱하게도 첫 패배
를 당한 것이다. 그 충격은 용사추를 한 동안 멍하게 만들었다.
"무영....환극섬(無影幻極閃).....!"
문득 망연한 표정으로 서있던 용사추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지금....뭐라고 하셨죠?"
옥수교는 의아한 눈빛으로 용사추를 올려다 보았다.
용사추는 침중한 안색으로 앓는 듯한 신음성을 발했다.
"틀림없소. 그녀의 보법은.....막북무영종(漠北無影宗)의 둔신보법인 무
영환극섬이란 것이었소!"
그는 침음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무영잠룡 환극에게서 전이된 헝클어진
기억 속에서 방금 흑의여인이 펼친 보법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었다.
문득 그는 입술을 실룩이며 말했다.
"무영잠룡 환극.....아니, 내게는 무서운 누이가 한 명 있었던 것 같소!"
그 말에 곤혹스러워 진 것은 옥수교였다.
(있었던 것 같다고....?)
그녀는 용사추의 말뜻을 언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아주 모호
했기 때문이다.
용사추는 잔뜩 곤혹스러운 눈빛을 짓고 있는 옥수교를 바라보며 말을 이
었다.
"그녀의 이름은....막북의 검은 꽃, 지옥철화(地獄鐵花) 환우령(幻雨靈)
이라고 했소!"
"지옥철화 환우령.....!"
옥수교는 봉목을 크게 뜨며 놀라운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녀의 안색은
하얗게 변했다.
__지옥철화 환우령.
막북의 검은 꽃. 그녀의 존재는 가히 전설적인 것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대막의 제부족과 대막을 오고 가는 대상들 사이에서만 신비롭게 그
존재가 거론될 뿐이었다.
그녀는 대막 무림사상 최강자라고 알려졌었다. 그녀는 이미 십 년 전부터
막북무영종의 종사 무영제왕의 이름을 능가하고 있는 상태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환우령은 변황을 단신으로 떠돌며 변황무림의 강파
와 명숙들을 제압하여 하나의 거대한 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전해졌다.
대막의 고독한 암표범 지옥철화.
그녀가 느닷없이 중원에 나타난 것이었다.
옥수교가 안색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놀라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이 어지러운 난세(亂世)에 그 사나운 암표범까지 중원에 나타나다
니....!)
옥수교는 암담한 표정으로 소리없는 신음성을 발했다. 그녀의 가슴은 천
근 만 근인 듯 무거워만 졌다.
그런데 이 때였다.
펄.....럭!
문득 용사추가 들고 있던 신검 거궐의 끝에서 한 조각의 천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은 장포의 소맷자락이 찢어진 천이었다.
용사추의 거궐검은 그저 쉬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옥철화 환우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맷자락을 신검 거궐에 잘린
것이다.
용사추는 천천히 그 천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 천조각에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__구백구십구(九百九十九).
그것은 지존마맹의 일천마왕군의 귀면에 쓰여진 것과 똑같은 필체였다.
한편, 한 쌍의 커다란 봉목이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
지 주시하고 있었다.
주르르......
그 한 쌍의 크고 아름다운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은 뽀얀 수막에 덮인 채 정원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용사추의 뒷모습을 바
라보고 있었다.
더없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눈.....
그 눈의 주인은 초췌한 안색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다웠
다. 슬픔에 잠긴 여위고 파리한 안색을 지녔으나 그 본연의 빼어난 아름다
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 여인은 주세업의 침전이 내려다 보이는 고루의 창가에 기대어 서 있
었다.
난간을 쥔 그녀의 섬섬옥수에 피멍이 들고 있었다. 입술을 악물고 오열을
삼키는 그녀의 여윈 어깨가 연신 경련을 일으켰다. 고아한 귀품이 배인 여
인의 몸은 슬픔과 절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슬픈 귀인(貴人).....! 운명은 그녀에게 경옥군주(鏡玉君主)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십만대산(十萬大山)__
남방을 동서로 가르는 신산(神山). 십만대산은 당금 무림천하에 있어 가
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지였다.
그것은 십만대산에 하나의 거대한 결사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__철혈전막(鐵血戰幕)!
바로 저 환우최강의 전사동맹(戰士同盟)인 무적의 대정천(大正天)이 이곳
십만대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지난 삼년 간 혼세사패천(混世四覇天)의 발호를 침묵으로 방관해 와
천하무림의 원성을 사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철혈전막의 이름은 절대이고
무적이었다.
전사(戰士)의 동맹.....
무쇠와 피의 진리를 믿는 최강의 무사집단.
그 철혈전막이 바로 십만대산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충천봉(沖天峯)__
십만대산의 북방에 위치한 험봉.
휘___이잉!
".......!"
".......!"
삭풍에 옷깃을 펄럭이며 두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일남일
녀였다.
기린을 연상케 하는 비범한 신체의 청년과 얼굴을 면사로 가린 자의를 걸
친 미부였다. 바로 용사추와 다정관음 옥수교였다.
용사추는 지금 낭야왕 주세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양에 있어야 할 그들이 어떻게 이곳 십만대산에 와있는 것일
까?
용사추는 지금 한 장의 지편을 읽고 있었다. 문제의 지편이 바로 두 사람
을 이곳 십만대산까지 오게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닷새 전에 전서구로 낭야왕부에 닿았다.
내용은 이러했다.
__대지급(大支急).
발신자(發信者): 제일마왕 개세혈황종(蓋世血皇宗).
수신자(受信者): 제십마왕 낭야왕 친전(親前).
하기(下記): 철혈전막에 접근했던 제삼마왕(第三魔王)이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도중 전황과 조우하여 생포되었음.
제십마왕은 팔대흉사(八大兇邪)의 엄호하에 제삼마왕을 구출해 낼 것. 상
황에 따라서 맹(盟)의 보완유지에 필요하다면 제삼마왕을 척살해도 무방하
나 제삼마왕이 철혈전막에서 취득한 기밀만은 반드시 취하도록!
군(君)의 활약을 기대하겠음.
__제일마왕 서(書).
"........!"
지편을 다시 한번 읽고난 용사추는 침중한 안색을 지었다. 낭야왕 주세업
으로 환신한 그로서는 그 명령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옥수교를 대동하고 급히 십만대산으로 이동해온 것이었다.
"누님께서는 이 지편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파스스.....!
용사추는 다 읽고 난 지편을 재로 만들어 버리며 문득 옥수교에게 물었
다.
옥수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것은....지존마맹 내의 세력다툼의 일종이에요."
그녀의 음성은 낮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낮은 음성속에는 확고하고도 단
정적인 뜻이 깃들어 있었다.
"세력다툼이라....!"
용사추는 남방을 주시하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환우최
강의 결사인 철혈전막이 있었다.
옥수교가 말을 이었다.
"본시 제삼마왕(第三魔王) 생사지존(生死至尊)은 야심이 큰 자예요. 그것
은 곧 그자가 남의 수하에 있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요."
".........!"
용사추는 옥수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옥수교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생사지존(生死至尊) 갈후명(葛候命).
그는 지존마맹 내 서열삼위의 절정마종이었다. 그는 마도최강의 호신기공
인 생사마라탄강(生死魔羅彈剛)을 완성한 전설적인 대마종이었다.
그의 생사마라탄강은 달리 생사탄벽(生死彈壁)이라고도 불린다. 멋모르고
그를 가격하면 열 개의 반탄지력이 반진되어 가격한 자를 박살내 버리기에
그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그의 생사탄벽은 가히 거세무적이며 그것을 깰 수 있는 자는 환우를 통틀
어 전황 북리황밖에 없다고 한다.
생사지존은 그렇듯 강한 자였다.
실상 지존마맹의 마왕들 중 서열 오위까지는 거의 비슷비슷한 실력을 지
니고 있었다. 제일마왕 개세혈황종이라 해도 나머지 사대마왕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연히, 개세혈황종은 다른 사대마왕을 늘 주목해야만 했다.
특히 사대마왕 중 생사지존은 사사건건 개세혈황종과 대립하곤 했다. 그
것은 자신이 결코 개세혈황종의 하수가 아님에도 지존마맹 내의 서열이 개
세혈황종 보다 두 단계 아래임을 불만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사지존이 개세혈황종에게 눈의 가시같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옥수교의 말을 듣고있던 용사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개세혈황종이 생사지존을 일부러 사지인 철혈전막으로 보냈단 말이
구료?"
그의 물음에 옥수교는 지혜로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래요. 환우에서 생사지존을 제압할 수 있는 강자는 전황 북리황밖에
없으니까요!"
"........!"
"생사지존은 개세혈황종의 의도를 알면서도 철혈전막으로 잠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전황에게 제압당한 거예요."
"흠.....개세혈황종의 계략이 성공한 셈이군."
용사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 언뜻 스산한
신광이 스쳐 지나갔다.
(의외로 지존마맹을 쉽사리 와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옥수교는 그런 용사추를 바라보며 신비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 그녀는 용사추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문득, 옥수교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임무는 확실하게 수행해야만 해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생사지존은 막중한 기밀을 취득한 것이 분명해요. 지존께서는 그 기밀을
반드시 손에 넣으셔야 해요."
그녀는 재차 용사추에게 당부했다.
용사추는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지존마맹이라는 벽을 무너뜨릴 무기로 말이오?"
그 말에 옥수교도 빙그레 웃음지었다.
"개세혈황종이 왜 저 막강한 사대마왕 등을 내버려 두고 서열 십위의 낭
야왕에게 생사지존의 구출을 명령했겠어요?"
용사추는 그녀의 물음에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야 생사지존이 철혈전막에서 얻은 기밀을 다른 경쟁자들에게 빼앗기기
싫어서겠지!"
"그래요! 그만큼 그 기밀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죠."
옥수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득, 용사추의 눈이 강렬한 신광을 번득였다.
"오는군!"
그는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슥.....!
과연 여덟 줄기의 인영이 북서쪽으로부터 기쾌하게 충천봉으로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그자들은 한결같이 허공을 밟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팔대흉사들이군요!"
옥수교는 다가서는 팔인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멀리 떨어져 있건만 그
들 팔 인은 하나같이 흉신악살같이 흉흉한 살기를 풍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
다.
-팔대흉사(八大兇邪)!
그들은 일천마왕군 중 서열 오십 위 전후의 흉사(兇邪)들이었다. 어떤 흉
악한 짓이라도 눈하나 깜박이지 않고 해치우는 인간 이하의 마귀들. 그들에
비하면 십대악인은 선인이라고 불려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팔대흉사는 공공연히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등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
들에게 있어 그런 것 정도는 매 끼니마다 밥을 먹는 것과 별다른 의미가 없
었다. 그 정도로는 너무나 무료하다고 느끼고 있는 팔대흉사였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잔인하고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을까를 연구
하는 작자들이었다.
그들 팔대흉사중 두 명만 손을 잡아도 개세혈황종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으니.....
그들의 무서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잔혹하고 무서운 자들이
팔대흉사였다.
"카앗! 낭야왕. 신색이 좋군 그래!"
"크녠.....영계 깨나 잡아먹은 모양이군!"
"크녠! 영계뿐이 아니고 오동통하게 살찐 암탉까지 끼고 다니는군!"
스슥....휙! 휙!
팔대흉사는 음악한 말들을 뱉아 내며 분분히 용사추와 옥수교의 옆으로
내려섰다. 그자들이 나타나자 일시에 주위는 흉흉한 살기로 뒤덮였다.
용사추의 눈빛은 음산하게 침잠된 채 미동도 없었다.
"오랫만이오, 팔흉!"
그는 음험한 어조로 말하며 팔대흉사를 한 명 한 명 노려보았다.
"........!"
".......!"
그런 그의 눈빛을 받은 팔대흉사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용사추의 눈에
서 심혼을 얼려버릴 듯한 사악한 요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요기
는 팔대흉사의 사악함을 모두 합친 것 만큼 강한 것이었다.
팔대흉사는 내심 은은한 경악을 느끼고 있었다.
(이 어린 놈은 갈수록 무서워진다.)
(기회를 보아 제거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이 어린 놈이 우리 머
리 위에 올라앉고 말 것이다!)
그들은 각기 내심 염두를 굴리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런 팔대흉사의 모습에 용사추는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일단 그들의
기선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윽고 용사추는 음산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분을 소개하지!"
그는 옥수교를 가리키며 말했다.
팔대흉사의 눈이 동시에 옥수교에게 향해졌다. 그자들의 시선은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뱀같이 징그럽게 옥수교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헤헤....고것참! 너무 익어 감칠 맛이 나겠는데....!"
"클클! 어린 계집보다 저렇게 탱탱하게 물오른 계집이.....억!"
짜작!
퍽!
음담을 늘어놓던 팔대흉사들의 볼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믿을 수 없
게도 옥수교의 교구가 유령같이 휘돌며 음탕한 말들을 서슴지 않는 팔대흉
사의 따귀를 후려친 것이었다.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할 틈조차 없이 팔대흉사는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쿵.....쿵!
그들은 볼에 시뻘건 손자국이 난 채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이내 그자들은
노기충천하여 옥수교를 덮치려 했다.
그러나 용사추가 그들을 제지했다.
"흐흣....조심들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분이 맛좋게 생긴 암탉인 것
은 사실이나 지독한 독을 지녔으니....!"
그는 짐짓 음산하게 웃으며 막 발작하려는 팔대흉사에게 손을 저어 보였
다.
옥수교는 그 말에 아미를 상큼 치켜떴다.
(암탉?)
그녀는 사나운 눈빛으로 용사추를 노려보았다. 아들같기만 하던 용사추가
그렇게 노골적인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용사추는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내심 찔금했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치
않았다. 그는 옥수교의 눈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이 분은 바로 자금성의 후궁(後宮) 시위장(侍衛長)이신 절염앙녀(絶艶殃
女) 냉접(冷蝶)이란 분이오!"
그 말에 팔대흉사의 흉흉하던 기세가 한순간에 누그러지고 말았다.
"절염앙녀 냉접.....!"
"어이쿠....!"
그들은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절염앙녀(絶艶殃女) 냉접(冷蝶).
그녀의 이름은 곧 재앙(災殃)을 의미했다. 그녀는 자금성의 후궁을 지키
는 자의신녀위(紫衣神女衛)의 수반이며 동시에 황실제일고수였다.
그러나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지독
한 독심(毒心) 때문이었다. 그녀의 잔혹신랄함은 팔대흉사가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언젠가 한 명의 녹림대도가 실수로 자의신녀위의 여시위를 희롱한 적이
있었다. 그때 냉접은 그 자를 이 만 리나 추격하여 해외에서 생포해 왔다.
그리고는 사십구 일에 걸쳐서 그자를 죽였다고 한다.
사십구 일.....그 기간 동안 그 녹림대도는 지옥의 겁화가 차라리 행복하
다고 느낄 정도로 지독한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수법이 얼마
나 지독했는지 팔대흉사들조차 구토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꿈에 볼까 두려운 여앙신(女殃神)이 팔대흉사 자신들의 앞에
서 있지 않은가?
팔대흉사는 오금이 저렸다.
(죽....었다! 사신을 건드리다니....!)
(이 계집도 무섭지만 이 계집의 뒤에 있는 팔십만금군은 더 지독하
다.....어이구....!)
그들의 안색은 순식간에 돼지 간 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용사추는 절로 웃음이 치밀었다.
(이 정도면 수교누님이 이 자들을 다루는데 무리가 없겠지.)
그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으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이어 그는 다시 음산
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이 분 냉부인께서 그대들을 지휘할 것이오! 이의 있소?"
그는 음험한 눈빛을 번득이며 팔대흉사들을 둘러보았다.
"이의라니.....무....무슨 말씀이시오?"
용사추의 말이 떨의지기가 무섭게 팔대흉사는 펄쩍 뛰다시피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좋소....좋아!"
"물론....이의 없소!"
여덟명의 흉신악살들은 마치 착한 어린아이들처럼 순순히 용사추의 말에
대답했다.
용사추는 돌변한 그들의 태도에 웃음이 치밀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
한 듯 말했다.
"여러분들은 냉부인의 지휘에 따라 가능한 요란하게 소란을 피우시오! 철
혈전막의 이목이 그대들에게 집중되는 사이에 본좌는 철혈전막의 중지로 잠
입할 것이오!"
그 말이 떨어지자 팔대흉사는 다시 기세등등하여 나섰다.
"소란이라고?"
"켈켈.....그거야 우리들 전문이지!"
"크녠! 걱정은 비끄러매두시구료! 왕야가 철혈전막의 계집들과 마음껏 재
미를 봐도 충분할 정도로 시간을 벌어 줄 테니....!"
그들은 신바람이 난 듯 떠들어댔다.
천하에 손도 못댈 망나니들.
그러나 그들을 다루는 일은 용사추나 옥수교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
다. 약점을 이용하면 의외로 이들은 어린아이같이 순진해지니까.
이윽고, 용사추는 옥수교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럼.....부탁하오, 냉부인!"
그러자 옥수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어 그녀는 팔대흉사를
돌아보며 싸늘하게 교갈했다.
"따라와요, 망나니들!"
그녀는 냉랭한 눈빛으로 팔대흉사를 돌아보며 즉시 몸을 띄워 남쪽으로
날아갔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팔대흉사는 다시 주눅이 들었다.
"헤헤.....갑니다요!"
"아이고! 날아가는 모습도 아름답기도 하시지....!"
스슥.....휙! 휙!
그들은 간사한 아첨의 웃음을 흘리며 분분히 옥수교의 뒤를 따라 몸을 날
렸다. 그 모습은 흡사 어미 기러기를 쫓아가는 새끼 기러기들과 다를바 없
었다.
용사추는 그 광경에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득 그의 귓전으로 가는 전음이 흘러들었다.
"오늘 밤 삼경이 되기 전까지.....일을 마치셔야 해요. 철혈전막 내의 내
응자가 지존을 도와줄 수 있는 시간이 그 때까지이니까요!"
물론 그것은 옥수교가 몸을 날리며 전한 것이었다.
"삼경이라.....!"
용사추는 힐끗 천색(天色)을 살폈다. 아직은 신시말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자, 팔대흉사와 수교누님이 십만대산을 발칵 뒤집어 놓을 때까지 조금
쉬어야겠군. 오늘 밤에는 한바탕 힘겨운 드잡이질을 해야 할 테니....!"
스슥!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동쪽으로 날아갔다.
칠흑같은 밤.
음울한 어둠의 장막이 십만대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깊고 암울한 어둠의 장막 속. 하나의 거대한 석성(石城)이 마치 거인(巨
人)이 드러누운 형상으로 벌려 있었다. 여섯 개의 산봉우리와 여덟 개의 분
지를 뒤덮고 벌려선 웅장한 석성!
__철혈전막!
이것이 바로 철혈전막이었다.
대정의 하늘(大正天)으로 불리는 환우제일지. 살아서의 치욕보다는 죽어
서의 명예를 얻기 바라는 열혈의 승부사들....철혈전막은 바로 그들의 하늘
로 군림하고 있었다.
<금마갱(禁魔坑)>
그것은 철혈막부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하 삼백 장의 갱도.....그
곳은 흡사 호리병과 같이 생겨 어떤 경공의 달인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지
였다.
금마갱을 출입하려면 천잠사로 만들어진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가능했다.
그 천잠사의 사다리만이 오직 금마갱을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
이다. 금마갱은 오래 전부터 무림을 어지럽힌 거효대마들의 뇌옥으로 사용
되고 있었다.
이십여년 전, 수많은 거마들이 금마갱에 던져졌다.
전황 북리황은 그들의 무공을 제압하거나 금제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결코 적을 두려워하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십여년 동안 그 누구도 금마갱을 탈출하지 못했다. 아니, 탈출
하지 못한 것이 아니고 아예 탈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전황 북리황을 이기지 못하는 한 그들의 탈옥은 너무나 무모한 짓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불회(不廻)의 유형지.....금마갱. 그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
다.
스읏!
문득 하나의 인영이 형체없는 그림자같이 금마갱의 입구로 접근했다.
그는 은형만리추의 경공을 사용하고 있었다. 십대악인 중 은형도수의 절
정은둔보법.
그는 주세업으로 환신한 용사추였다.
(저곳이군. 금마갱이....!)
휙!
용사추는 울창한 관목의 그늘로 그림자를 파묻으며 몸을 멈추었다.
그의 오십 장 앞.
황량한 석상을 등지고 하나의 거대한 지하공동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직경 오십여 장의 지하공동.
암천을 향해 시커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 지하공동은 흡사 거대한 괴
물의 입같이 무시무시해 보였다.
바로 이곳이 금마갱의 입구였다.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나오지 못한
다는 불귀의 마역.....
"........!"
용사추는 어둠속에서 검미를 찌푸렸다. 기이하게도 금마갱 주위에는 사람
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금마갱 같은 중지에 경계 하나 없는 것도 기이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다정관음 옥수교가 철혈전막에 심어 놓았다는 내응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용사추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조력자가 없으면 금마갱
에 접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였다.
"나를.....찾는가?"
문득 한소리 싸늘한 음성이 용사추의 뒤에서 들려왔다.
"........!"
용사추의 몸이 석상같이 굳어졌다.
(바로 뒤에까지 접근하도록 몰랐다니....!)
그의 등줄기로 서늘한 오한이 스쳤다.
나타난 자는 놀랍게도 용사추가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바로 그의
뒤에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슥....!
용사추는 뒤로 빙글 돌아섰다.
그런 그의 삼장 뒤. 한 명의 인물이 어둠 속에 우뚝 선 채 용사추를 노려
보고 있었다.
"네가....옥(玉)가의 계집이 보낸 놈이냐?"
그자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마치 야수의 그것같이 새파랗게 번뜩이고 있
었다.
용사추의 눈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이 자가 수교누님의 간세란 말인가?)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눈앞의 인물을 주시했다.
그의 앞에 나타난 자. 그는 당당한 체구의 청포노인이었다.
나이는 육십 전후로 보였으며 전신의 피부가 마치 청동으로 빚은 듯 새파
란 청색을 띠고 있엇다. 또한 두 눈에서도 청색의 신광이 번갯불같이 번뜩
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 인물이 익힌 한 가지 패도기공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__청강명옥신공(天 冥玉神功).
이것이 그 기공의 이름이었다. 현문정종(玄門正宗)의 가장 극강한 패도기
공.
그것은 정파 십대기공 중 서열 육 위에 드는 호신강기 파해전문의 파천신
공(破天神功)이었다.
청포노인은 놀랍게도 그 전설적인 현문기공을 극치까지 완성한 인물이었
다.
용사추는 신음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놀랍군. 그대가 옥마(玉魔)의 간세였다니.....대라천강수(大羅天剛手)!"
그는 경악의 눈으로 청포노인을 주시했다.
-대라천강수(大羅天剛手) 고균(高均)!
청포노인은 대라천강수라는 별호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바로 저 정파
최고의 강자들인 십대전신 중의 일 인이었다.
십대전신의 일 인.....
그는 옥수교의 환우일천군영보의 분류상 특류품에 드는 자였다. 또한, 저
철혈전막의 최강전사대 철혈삼십육천강의 수뇌가 바로 그였다.
놀랍게도 그 자가 바로 옥수교가 철혈전막에 심어 놓은 간세였던 것이다.
대라천강수 고균__
그는 여색(女色)에 덤덤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영웅호색이란 말이 그
에게만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 년 전 어느날이었다.
무산(巫山) 근역을 지나던 고균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그는 하나의
산동으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
그 산동에는 한 명의 어린 소녀가 먼저 들어와 비를 피하고 있었다. 소녀
의 나이는 십오륙 세 정도 되어 보였다.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있어 소
녀의 풋풋한 몸매가 뇌살적으로 드러나 보였다.
그것을 보자 고균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갑자기 그는 사악한 욕념에
휘말리고 말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그는 눈 앞의
여체를 소유하고픈 욕념밖에는 없었다.
마침내 그는 야수로 돌변하고 말았다. 그는 울며불며 저항하는 소녀를 무
자비하게 찍어누르고 범했다.
한바탕 정신없이 소녀를 유린하고 난 뒤에야 고균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
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는 아연실색했다.
그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일을 이미 벌여 놓은 후였다. 상대는 그의 손
녀뻘밖에 되지 않는 어린 소녀였다.
만일 이 사실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어찌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고균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상실하고 완전히 매장
당하고 말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른 고균은 자신의 발등을 찍고 싶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쌀은 이미 밥이 되어 버렸으니 어
찌하겠는가?
고균은 생각 끝에 한 가지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는 그 소녀를 은밀한 장원으로 데려가서 그곳에 안주시켰다. 그 후에도
그는 여자가 그리워질 때마다 그 소녀를 찾아가 욕정을 풀었다.
이렇게 되자 점차 그 소녀도 고균을 지아비같이 섬기게 되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그만의 비밀.
그런데 어느날 옥수교의 천수천안(千手千眼)에 그 사실이 포착되었다. 그
때부터 대라천강수 고균의 불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야 했다. 대부분의 정파명숙들이 그러하
듯이 그에게 있어 명예는 목숨보다도 귀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십대전신 중의 일인이 아닌가?
고균은 자신의 명예를 보전하기 위해 옥수교의 천개의 손 중에 하나가 되
어야만 했던 것이다.
"옥가(玉家) 계집......아니, 천수령주와의 약속은 지킨다!"
슥....!
대라천강수 고균은 싸늘하게 중얼거리며 소매에서 무엇인가글 꺼내었다.
그것은 한 뭉치의 실타래였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실타래가 아니었다. 바로 천잠사를 꼬아만든 실타
래였다. 그것은 사다리 모양으로 엮어져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금마갱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도구였다. 감겨진 것
은 손아귀에 들 정도로 작으나 그것이 풀리면 족히 삼백 장의 길이가 된다.
이윽고, 고균은 천잠사를 들고 금마갱으로 다가갔다.
용사추도 소리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노부가 너를 엄호해 주는 것은 삼경까지일 뿐이다."
고균은 걸음을 옮기며 냉랭한 음성으로 못을 박았다.
"삼경?"
"그렇다. 노부가 이곳 금마갱을 경계하도록 배정된 시간이 그 때까지다!"
"아!"
용사추는 나직한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그는 옥수교
가 왜 삼경까지 모든 일을 끝내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삼경이 지나면....노부는 네게 일체의 책임도 없다!"
고균은 싸늘하게 웃으며 천잠사를 금마갱으로 풀어넣었다.
스르르.....
보일 듯 말 듯 가늘기 그지없는 천잠사의 실타래가 빨려들 듯이 금마갱의
음침한 공동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경고해 두건데, 조심하는 것이 좋다!"
고균은 새파란 눈빛을 번득이며 용사추를 바라보았다.
"저 아래에는 인간도 아닌 악귀들이 천 명 이상 있다. 자칫하면 너는 그
들의 손에 형체도 찾을 수 없도록 찢겨 죽을 수도 있다!"
그 말에 용사추는 싱긋 웃었다.
"걱정해 주어서 고맙소. 그보다도....!"
그는 천잠사의 사다리를 쥐며 말했다.
"하하.....행여 마음이 변하여 줄을 놓는다든지 그런 일이나 마시구료!"
그는 낭랑하게 웃으며 빠르게 금마갱 안으로 사라져 갔다.
"........!"
고균은 금마갱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용사추를 새파란 눈으로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실컷 좋아해라. 언젠가는....내 손에 죽을 테니.....네놈 낭야왕은 물론
옥가의 계집도....!"
그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은 어둠속에서 섬뜩하리만치 새파
랗게 번득이고 있었다.
칠흑의 어둠....
그 속에 용사추는 서 있었다. 그의 전신은 팽팽한 긴장으로 뒤덮여 있었
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지하 삼백 장의 공동.....
그 암흑속에서 수많은 눈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흡사 창날로 찔러대는 듯한 살기가 그 눈빛에 담겨 있었다.
암흑 속에는 용사추가 이제껏 상대해 본 그 어떤 강적보다 강한 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금마수인(禁魔囚人).
그들은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마도의 강자들이었
다. 오직 전황 북리황만이 제압할 수 있었던 절정의 마종들.
너무나 강했기에 악인성으로 도피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진정한 마
웅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츠으.....휘......이이잉!
한점 바람도 없는데 용사추의 장포가 폭풍에 휘말린 듯이 무섭게 펄럭였
다. 그는 지금 극도의 긴장감으로 팽배해 있었다.
흡사 거미줄같은 무형의 살기가 천가닥 만가닥으로 그의 전신을 얽어매
오고 있었으며 그에 대항하여 일어난 용사추의 호신강벽이 서로 충돌하여
무서운 경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용사추의 안색은 무겁게 굳어졌다.
(이자들은....나를 시험하고 있다!)
그의 이미로 문득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극도의 긴장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천의 금마수인들.
전황 북리황은 어쩐 일인지 그들을 가두어 두기만 했을 뿐 무공을 폐지하
지는 않았다. 자연히, 금마수인들은 이를 갈며 무공연마에 박차를 가했다.
자신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전황 북리황을 쓰러뜨리기 위해.
더군다나, 금마갱의 험악한 환경은 그들에게 오로지 무공연마에만 박차를
가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덕분에 금마수인들의 마공절기는 비약적으로 강대
해졌다.
그들은 사실상 천하최강의 단일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황 북리황, 그는 왜 자신의 품속에 독사의 무리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었다.
(사신....파천황(四神破天皇)....풍(風), 운(雲), 뇌(雷), 우(雨)....!)
용사추는 내심 나직이 중얼거리며 쌍장을 엇갈려 내쳤다.
쿠쿠쿵.....!
무서운 파천지력이 일며 순간적으로 용사추를 얽어매어 오던 천가닥의 살
기가 산산이 끊어지고 바스러졌다.
사신파천황....
마교십가에 비전되어 오는 천마십예 중의 절정마예. 그것은 순간적으로
용사추의 주위에 있는 모든 금제를 바스러뜨렸다.
"으음....사신마전(四神魔殿)의 후예냐?"
그 직후 용사추의 전면에서 경악성이 담긴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덧 어둠에 익숙해진 용사추의 눈에 한 명의 노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한쪽 팔과 한 다리가 없는 불구 노인.
거기다가 그는 얼굴 전체가 무참하게 부서진 끔찍한 형상이었다.
그 노인을 본 용사추는 흠칫했다.
"그렇다고 해둡시다. 그런데....노인장께서는 천잔마종(天殘魔宗) 살극소
(薩極蘇)가 아니신지요?"
그는 어둠속에 우뚝 선 채 형형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은 금마
갱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형형했다.
(이놈은 예삿놈이 아니다....!)
괴노인의 찌그러진 독안(獨眼)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이어 그는 괴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 노부가 환우일잔(還宇一殘) 천잔마종 살극소다! 이 금마갱의 형
식적인 총수지!"
(역시....!)
용사추는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천잔마종(天殘魔宗) 살극소(薩極蘇)!
그 이름은 이미 이십 년 전에 사라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강자들이라면 그 이름을 결코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전황 북리황의 이전시대를 풍미했던 환우제일인이었
기 때문이었다.
환우일잔으로 불리는 그의 별호가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 이름은
백 년 내내 환우최강자와 대륙제일마종을 의미했다.
그는 그 옛날 마교의 융성시 마교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천잔일맥의 후
예였다. 그가 활동했을 때에는 십대악인도, 십대전신도 그와 만날까봐 전전
긍긍할 정도였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천잔마종 살극소는 한 명의 무서운 신예와
충돌하여 사흘 밤낮의 대격전 끝에 최초의 패배를 당하게 된다.
그가 바로 전황 북리황이었다. 그것이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낭야왕 주세업이라 하오! 한 분 선배를 뵙기 위하여 왔소!"
용사추는 살극소를 마주보며 당당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하의 천잔마종 살극소. 그 앞에서 이같이 당당할 수 있는 자는 전황 북
리황 외에는 달리 없을 것이다.
살극소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놈은....제 이의 전황이 될 놈이다!)
츠읏....!
그와 함께 그의 눈빛이 더욱 형형해졌다.
전대의 환우제일인! 그의 노련한 눈은 용사추의 감춰진 실체를 한눈에 파
악해 내고 있었다.
(역시 환우일잔이다....!)
용사추 역시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살극소의 외눈. 그것은 용사추가 본 어떤 눈보다도 강하고 지혜롭다고 느
꼈기 때문이다.
"생사....지존을 찾으러 왔겠지?"
살극소가 먼저 물었다.
용사추는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나는.....그를 데려가야만 하오."
그는 대답과 함께 힐끗 위를 바라보았다. 시커먼 암천이 손바닥만하게 보
였다.
"그를 데리고 나가지는 못한다!"
살극소가 외발로 돌아서며 말했다.
"어째서요?"
용사추는 살극소의 뒤를 따라가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죽어가고 있다."
이것이 살극소의 대답이었다.
제15장
철혈일지(鐵血日誌)의 비밀
금마갱의 가장 깊은 곳.
하나의 건조한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서인가 생긴 야명주로 그나
마 흐릿하게 빛이 들어오는 석실.
그 석실 안에 한 명의 인물이 석벽을 마주본 채 단좌해 있었다.
당당한 체구에 새하얀 백발을 허리 아래까지 드리운 적포노인이었다. 그
는 등을 돌리고 있어 용모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포노인의 뒷모습에
서는 흡사 태산같은 기도가 느껴졌다.
용사추는 석실의 입구에 우뚝 선 채 몸이 굳어졌다.
(이 사람이....제삼마왕 생사지존이군!)
그는 적포노인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석상같이 굳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뒷모습만으로도 적포노인이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 알아볼 수 있었던 것
이다.
적포노인의 기세는 천잔마종 살극소의 그것과는 또 다른 무서움을 내포하
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제삼마왕 생사지존이었다.
"몸을 움직이면....그는 즉시 죽는다!"
살극소가 용사추의 옆에 외발로 선 채 침중하게 말햇다. 그가 평칭을 쓰
는 인물은 금마갱 내에서 생사지존밖에 없었다.
"전황의 철혈수(鐵血手)가 그렇게 치명적인 것이었습니까? 천하의 생사지
존을 죽어가게 만들 정도로?"
용사추는 생사지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침중하게 물었다.
살극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전황의 철혈수는 치명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문득 갈후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살극소의 눈빛이 아주 강해졌다.
"그러나 그를 죽이고 있는 것은 철혈수가 아니라 독(毒)이다!"
"독....1"
용사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경악하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렇다. 지금 갈후명은 무서운 만성극독에 전신 심맥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 그는 전황 북리황과 충돌하기 이전에 이미 중독된 상태였다."
"그럴 수가....!"
용사추는 아연하며 경악성을 발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갈후명을
주시했다.
생사지존 갈후명은 오래전에 암산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암산한 독
은 제왕지독(帝王之毒)이라는 것으로 해독이 전혀 불가능한 치명적인 극독
이었다.
그것은 달리 무영지독이라 불리며 환우간에 단 한 사람만이 그 독을 취급
할 수 있는 독중지독이었다.
그 일인은 바로 조화독종이었다. 저 십대악인의 수반인.....
"제왕지독은 그의 막강한 생사마라탄강에 눌려 잠복해 있었다. 그러다가
전황의 철혈수가 생사탄강을 바스러뜨리자 발작한 것이다."
"음....!"
용사추는 살극소의 설명을 들으며 안색이 거듭 변했다. 그는 침중한 신음
을 발하며 물었다.
"치료할 방법이나 독성의 발작을 저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다!"
살극소는 단정적으로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이 때였다.
쩌___어엉!
돌연 석실 안에 강렬한 빛줄기가 작렬했다.
생사지존 갈후명, 그가 눈을 뜬 것이다.
그는 여전히 벽면을 마주본 채 입을 열었다.
"너는....누구냐?"
갈후명은 천천히, 한자 한자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것은 흡사 무간지옥
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음산하고 공허한 음성이었다.
"소제의 음성을 잊으셨소이까? 제십마왕이외다!"
용사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십마왕?"
갈후명의 목소리가 의혹의 여운을 끌었다.
(무서운데....? 목소리 만으로도 탄로가 난 것이 아닐까?)
용사추는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갈후명이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갈후명은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살형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오!"
그것은 살극소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알겠소!"
살극소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후 석실에서 물러났다.
석실에는 용사추와 갈후명만이 남게 되었다.
"너는....누구냐?"
갈후명은 재차 똑같은 질문을 했다.
용사추는 그 물음에 지체없이 대답했다.
"악마....십호!"
"........!"
갈후명의 뒷모습에 순간 격렬한 파문이 스쳐 지나갔다.
"악마초인이란 말이냐?"
그는 재차 확인하듯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어조에는 많은
비밀과 복잡한 감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은 갈후명이 악마초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지
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갈후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제서야 용사추는 갈후명의 모습을 볼 수
가 있었다. 강팍하고 냉혹했다. 갈후명의 모습은 그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늘고 차갑게 찢어진 눈매, 매부리코에 얄팍한 입술은 그의 성품이 잔혹
한고 심기가 깊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갈후명의 안면은 기이하게도 섬뜩한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것은 제왕지독이 이미 그의 심장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초극강의 고수자, 생사지존. 제왕지독은 그런 그
마저 죽어가게 만들고 있었다.
"십....마왕 주세업은....?"
갈후명이 으르렁 거리듯 다시 입을 열었다.
"죽었소!"
용사추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죽어?"
츠읏!
갈후명의 가는 눈에서 무서운 한광이 쏟아졌다. 그것은 범인이라면 능히
그 눈빛만으로도 질식해 죽을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용사추는 달랐다.
그는 여전히 담담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나는....악마의 초인으로 길러진 놈이오!"
그는 여유있게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그것을 잊었군."
갈후명이 앓는 듯한 음성으로 탄식했다. 그와 함께 그의 강렬하던 눈빛이
문득 허무하게 스러졌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용사추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도록
길러진 악마의 종자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악마초인에게 주세업을 왜 죽였느냐는 따위의 질문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누가...너를 보냈느냐?"
갈후명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약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누 은
강렬하기 이를데 없었다.
"제일....마왕이 보냈느냐? 아니면....지존마야가....나의 목숨을 끊어놓
으라고 보냈느냐?"
맹호는 다 죽어가는 지경에 처해도 역시 맹호였다. 갈후명의 일신에서 일
어나는 기도는 마치 태산과도 같이 막중했다.
(지존마야?)
용사추는 갈후명의 입에서 지존마야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내심 흠칫했
다.
(지존마야가 왜 생사지존 갈후명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심의 의혹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나는 내 의지로 왔을 뿐이오!"
그는 묵중한 음성으로 분명하게 말했다.
"........!"
갈후명의 눈빛이 한 차례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죽어가는 눈에는 여
러 가지 표정이 스쳐갔다.
그러다 문득 그는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크녠....그렇군! 악마의 종자를 누가 감히 부리겠는가?"
말을 하는 그의 눈에 한 가닥 결의의 빛이 스쳐갔다. 문득 그는 기이한
눈으로 용사추를 바라보았다.
"악마....초인! 거래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갈후명의 눈빛에는 용사추가 자신의 제의에 응할
것이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용사추는 예상했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천하의 생사지존과라면 나 악마초인의 거래 상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
겠지요."
"좋아, 악마초인!"
갈후명도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음산하게 웃고 있었으나 그의
웃음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인간다운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본좌는 네가 원하는 전황 북리황의 기밀을 주겠다. 그 대가로....너는
한 명의 효웅을 나 대신 죽여다오!"
"개세혈황종이겠지요?"
"소식이 빠르군."
갈후명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그를 제거하려 한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그의 말에 용사추는 의아한 기색을 지었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고요?"
"그렇다. 그는 교(敎)를 배신한 배덕자다! 그래서 ......죽여야 한다!"
"교...?"
용사추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제서야 생사지존 갈후명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체념의 표정이 되었다.
용사추가 결코 변명 따위에 속아 넘어갈 인물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
다.
갈후명은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악마초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 개세....혈황종과 본좌는 바로 마교(魔敎)의 후예다!"
그는 숨김없이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마....교!"
용사추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그의 전신에 격렬한 놀라움의 파
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그는 본능적으로 소매 속에 있는 마교지존
의 신물 천마지존환을 어루만졌다.
-마...교(魔敎)!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상고의 무림을 제패했던 전설 속의 초거대강파. 수천 년의 무림사를 통틀
어 과연 마교의 성세에 맞설만한 조직이 존재했던가?
놀랍게도 혼세사패천 중 지존마맹의 수뇌부가 바로 그 마교의 후예들이었
던 것이다.
"제일마왕 개세혈황종과 본좌 등은 바로 마교십가(魔敎十家)중 혈전백마
궁(血戰百魔宮)의 후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용사추의 귓전에 갈후명의 음성이 이어졌다.
__혈전백마궁!
그들은 바로 마교를 이루던 주역 마교십가 중의 일가였다.
총인원은 일백 명. 하지감 그 개개인이 절정에 이른 마종들로 결성되어
있었으며 마교 내에서 천년마후성과 철혈마가에 이어 서열 삼위에 올라있는
강파였다.
개세혈황종 도천극.
그는 바로 그 혈전백마궁의 백인마종 중 제일마종이었다. 그것은 실로 놀
라운 일이었다.
천년 그 이전에 지상에서 소멸되었다고 알려진 마교! 그 후예들의 종적이
혼세사패천 중에서 발견되다니.....
"지존마맹은 바로 우리 혈전백마궁의 변신이다!"
갈후명의 입에서는 계속 놀라운 말들이 흘러 나왔다.
용사추는 거듭되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낭야왕 주세업은 바로 혈전백마궁의 백마 중 일 인이었군. 그래서 그토
록 강했던 것이고....!)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침음성을 발했다.
낭야왕 주세업은 바로 백마 중의 일 인이었던 것이다.
문득 갈후명의 입가로 한 줄기 조소가 어렸다.
"맹의 주역은 분명 우리 혈전백마궁이나....맹을 지배하는 것은 본 궁이
아니었다."
용사추는 그 말에 언뜻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지존....마야!"
갈후명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바로 그 지존마야가 지존마맹의 실질적인 지배자다! 얼마 전에
노부는 우연히 그 지존마야의 원래 신분을 알게 되었다."
말을 하는 그의 두 눈이 살기로 이글거렸다. 그는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자의 신분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바로 그 옛날 본 마교를 멸
망으로 이끈 번뇌마가(煩惱魔家)의 후예였다."
"번뇌마가...!"
용사추의 눈가로 의혹의 그늘이 떠올랐다.
번뇌마가....
그들 역시 마교십가 중의 일가였다. 그들의 특기는 모략과 음모라고 알려
졌다. 세 치 혀로 천하를 망칠 수도 있다는 마교의 꾀주머니가 바로 번뇌마
가였다.
그런데, 그 번뇌마가가 마교의 멸망을 초래한 주범이었다니.....
용사추의 뇌리로는 수많은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겉으
로 내색하지 않앗다.
갈후명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번뇌마가는 마교의 제일역적이다. 무릇 마교의 후예는 마교를 파멸로 이
끈 번뇌와 철혈을 척살함을 제일사명으로 알아야 한다!"
그는 살기띤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용사추는 검미를 찌푸렸다.
(철혈(鐵血).....? 마교십가 중의 철혈마가 역시 그 옛날 마교의 멸망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의 의혹은 천 겹 만 겹으로 쌓여만 갔다.
"그런데....!"
문득 갈후명의 어조가 아주 삼엄해졌다.
츠읏......
그의 눈빛은 천 개 만 개의 뇌전이 작렬하듯 휘황해졌다.
"제일마종 개세혈황종! 그는 지존마야가 번뇌마가의 출신이란 것을 알면
서도 그 자의 야심을 이루는데 조력하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그는 죽어야만 한다! 교의 율법에 맹세코....!"
용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 속의 절대마종. 그는 갈후명이 자신의 정체를 알았음을 탐지했고 그
래서 그는 갈후명을 제거하도록 개세혈황종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생사지존 갈후명을 죽인 것은 개세혈황종도 전황 북리황도 아닌 것이다.
그는 바로 지존마야였다.
"본좌가 전황에게서 빼낸 기밀이란 것은....바로 그의 일지(日誌)였다."
"일지? 전황 북리황의 일지....?"
용사추는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두 눈에 신광을 번득였다.
갈후명은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후훗! 일지라고는 하나 그 중에는 엄청난 비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전무림을 파멸시키에 충분한 막중한 기밀이 된다."
"아!"
용사추는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흘렸다.
전황의 일지....그것은 절대자의 고독한 기록이며 그 안에는 수십만 명을
파멸시키기에 충분한 엄청난 비밀들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
의 가치는 경중을 따질 수 없는 것이었다.
지존마야와 개세혈황종.
그들은 갈후명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로 그 절대자의 일지를 이용
한 것이다.
갈후명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노부는.... 전황일지를 철혈막부에서 반출해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
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것을 한 곳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
다."
그의 입가로 득의의 미소가 흘렀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용사추는 긴장하며 물었다.
"그곳은.... 바로 전황의 침실이다?"
"아!"
용사추의 입이 그만 딱 벌어졌다.
갈후명은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노부는 전황의 일지를 그의 침실의 벽속에 내공으로 박아넣었다. 후
훗.....아무리 전황이라고 해도 설마 노부가 그것을 자신의 침실에 숨긴 줄
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
용사추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등하불명이랄까?
아무리 전황이라 해도 설마 자신이 잃어버린 일지도 자신의 침실에 숨겨
져 있음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전황의 일지는 네것이다. 너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
다!"
문득 갈후명은 형형한 눈으로 용사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개세혈황종을 죽여라! 마교의 율법에 따라....!"
용사추는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지존마야를 척살하라고는 하지 않으실 작정이오?"
그러나 갈후명은 그 말에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것까지는 청부하지 않아도 된다. 후후....왜냐하면 지존마야는 네가
쓰러뜨려야만 하는 운명의 적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적....!"
용사추는 입 안으로 나직이 그 말을 되뇌었다.
갈후명은 그것을 바라보며 기소를 흘렸다.
"후훗....그렇다! 지존마야는 자신의 운명의 적이 전황일줄 알고 있으나
실상 그를 파멸시킬 운명의 적은 바로 너 악마초인이다!"
그의 음성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죽음에 직면해서일까? 그의 태도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듯 의연해 보였
다.
문득, 갈후명의 깡마른 손이 용사추의 정수리를 신쾌하게 움켜쥐었다.
파악!
".......!"
용사추는 움직이지 않고 갈후명이 자신의 정수리를 쥐도록 내버려 두었
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우르르......
무서운 잠력이 그의 정수리를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갈후명은 개정대법으로 용사추에게 자신의 전 내공을 쏟아부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오갑자의 생사마라탄강을 네게 넣어 주마. 그것으로....개세혈황종 도천
극을 죽여라!"
".......!"
웅.....웅!
갈후명의 웅혼한 음성이 용사추의 귓전에 우뢰같이 들려왔다. 용사추는
눈을 감고 좌정한 채 갈후명의 생사마라탄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내 그는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갈후명의 괴
악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마야....! 그대는 실수한 것이오. 후훗.....그대는 그대가 키운 마룡의
손에 파멸당하게 될것이오....!"
우르르르.....!
갈후명의 생사마라탄강은 마치 봇물 터지듯이 용사추의 내부로 쏟아져 들
어왔다.
그것은 생사지존 갈후명의 혼(魂)이 깃든 것이었다.
그는 죽는 것이 아니었다.
마교의 진정한 용사 생사지존 갈후명! 그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바
로 용사추의 몸을 빌어서.....
__은황각(隱皇閣).
그것은 철혈막부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울울창창한 청죽림
에 뒤덮인 고아한 전각.
은황각은 바로 전황 북리황의 침전이었다.
삼경 말.
스.....읏!
하나의 흐릿한 인영이 은황각을 둘러싼 청죽림으로 안개와 같이 스며들었
다. 유령인 듯이 흐릿한 형태의 인영.
그는 바로 용사추였다.
".......!"
그는 은형도수의 절정 잠입술로 전황 북리황의 침전으로 잠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정관음 옥수교와 팔대흉사가 어지간히 소란을 부린 탓인지 철혈막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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