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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추억 4권 - 4. 줄다리기

4.줄다리기

인간에겐 상황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면이 있다.
자신이 애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서로 즐겼을 경우 그것이 한 번 뿐이었을 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 번의 그 행위에 별로 비중을 두지 않고 단순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 버린다.
그러면서도 자기 애인이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괴로워하거나 질투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
헤어져 버리는 경우도 많다.
자신에겐 관대하지만 애인의 잘못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마사오에게 묘우미의 친구인 시루꼬와의 관계가 말하자면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그 뒤에도 집착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다시 시루꼬와 그런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그런 기회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별로 생기지 않았다.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다.
아마 시루꼬도 따로 애인이 있으므로 마사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여름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토요일, 마침 시루꼬의 생일이었다.
마사오는 시루꼬의 집에 묘우미와 함께 초대를 받았다.
마사오에게 시루꼬의 생일 축하는 구실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묘우미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어쩌면 묘우미가 모처럼 외박 허락을 얻어 시루꼬에게 마사오를 데려가겠다고 먼저 말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거의 시루꼬의 아파트에 다 왔을 때 묘우미가 마사오의 팔을 잡
고 매달렸다.
<열 시쯤에 나와서 여관으로 가요.>
마사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지 묘우미의 생각보다 한 시간 늦을 뿐이었다.
그 만큼 더 여유롭게 마음껏 즐길 수 있으므로 흔쾌히 승낙했다.
시루꼬는 전골 요리를 준비해 놓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시루꼬와의 일은 묘우미에겐 지금까지도 비밀이었다.
<후꾸이 씨도 오겠다고 했는데 거절했어. 오늘밤은 우리끼리 조용하게 마시고 싶어서.>
시루꼬는 손님은 예정대로 묘우미와 마사오 뿐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밝혔다.
곧 술상이 차려졌다.
시루꼬는 술을 차갑게 해서 내왔다.
맨 처음 대화의 화제는 학생 운동을 주제로 한 소설이었다.
시루꼬와 묘우미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겼다.
마사오가 소외된 여자들끼리의 논쟁은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다가
이번에는 운동가들의 연애 문제로 화제가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묘우미도 알고 있는 좌익 계열 운동권인 학생이 좋지 못한 여자 관계로 제명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람, 나한테도 추파를 던진 적이 있어.>
시루꼬는 눈살을 찌푸렸다.
<동거하던 요꼬가 내 친구인데 정말 뻔뻔스럽기도 하지. 남자가 여자를 꼬이는 데도 여러 수단이 있는데 그 사람의 경우는 혁명 이론이었어. 과격한
이론을 펼쳐서 여자를 멍하게 만든 다음, 그 틈을 이용하는 거야.>
묘우미가 물었다.
<그래서 꼬임에 넘어갔어?>
<중간까지는 넘어가는 척했지. 나는 그런 이론 따위에 정신을 놓을 만큼 순진하진 않아. 첫 남자도 그런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작이 눈이 빤
히 보이더군. 그가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더니 입을 맞추려고 했어.>
<그래서?>
<그냥 놔뒀지. 그 정도에서 몸을 빼면 재미 없잖아. 상당히 능숙한 키스이긴 했지만 어차피 내 쪽에서 남자를 놀리고 있는 것이라 이렇다 할 느낌은
없었어.>
<장소는?>
<이번에도 공원 잔디밭. 물론 시간은 밤이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키스 다음엔 여기겠지?>
시루꼬가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마사오를 봤다.
<키스하면서 손은 자연히 그 쪽으로 가겠죠. 그게 순서겠죠.>
<그런데 그 남자는 그렇지 않았어. 키스하면서 잔디 위에 나를 눕히고 다리를 더듬는 거야.>
<넌 어디까지 허용했는데?>
<손이 팬티에 닿았을 때까지. 손을 빼내고 몸을 일으켰어.>
마사오가 물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 사람과 즐기고 싶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던가요?>
<나 같은 바람둥이 여작 그만두었을 리가 없다 이거죠?>
시루꼬가 웃었다.
<꽤 기분이 고조되긴 했어요. 상당히 능숙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에 자신을 쉽게 내던지진 않아요. 애초부터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나
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럴 기분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일어섰어요. 그리고 그대로 공원을 나와서 입구에서 잠시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기에 그냥 와 버렸죠 뭐.>
<결국은 퇴짜를 놓은 거군요.>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난 내가 유혹하는 걸 좋아하지 당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시루꼬는 대담한 눈으로 마사오를 보았다.
<요컨대 마사오 씨처럼 유혹하지 않고 유혹을 즐기는 타입에 흥미가 있어요. 스스로 행동한다는 것이 즐거운 거죠.>
<나라고 해서 언제나 유혹당하지만은 않습니다. 그저 웬지 이쪽이 하기 전에 상대 쪽에서 먼저 유혹해 오는경우가 많아서일 뿐이죠. 그 후에 그 사람
만났을 때 표정이 어땠습니까?>
<천연덕스러웠어요. -그때 생리였었나?-라고 묻기에 -착각하지 마-라고 말해 줬어요. 그냥 그 뿐이예요. 그보다 마사오 씨.>
시루꼬는 정색을 했다.
<묘우미와 이런 사이가 된 뒤로 여자를 몇이나 더 알았어요?>
<묘우미 씨를 만나 뒤로는 새 여자를 사귈 인연이 다했나 봅니다.>
정작은 질문라고 있는 시루꼬도 포함되지만 그것은 묘우미 앞에서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과연 정말일까?>
<정말일 거야.>
묘우미가 그렇게 말했다.
묘우미는 마음 속으로 아마 기꾸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루꼬에겐 비밀이다.
마사오와 묘우미의 사이를 격하시켜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사람은 그럴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아.>
시루꼬가 제법 묘우미를 꾸짖는 투로 말했다.
<넌 지금 두 사람이 서로 신뢰하는 연인 사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애인이 아냐. 애인은 따로 있고 넌 심심풀이 상대일 뿐이야. 단순한 여자 친
구에 지나지 않는다구.>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처음부터 그렇게 약속하고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빨리 기요미즈 씨와 사귀어 보라는 거 아니겠어?>
묘우미는 마사오를 보았다.
<처음 듣는 이름이지?>
<예.>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시루꼬의 권유에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야. 이번에 <구름> 동인으로 들
어온 사람인데 웬지 자꾸 나한테 접근하고 싶어해.>
<웬지가 아니라구요. 그는 묘우미한테 완전히 빠져 있어요. 부잣집 아들인 데다 키가 크고 잘 생겼지. 그리고 성격도 좋지. 빨리 승낙하라고. 계속 망
설이면 내가 가로채 버린다.>
<제발 그러시지.>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사실을 얘기할까?>
시루꼬는 꽤 취해 있었다.
묘우미의 고루함에 화가 난 듯했다.
<말해도 될까요?>
마사오를 보는 시루꼬의 눈이 빛났다.
마사오는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여기서 혼자 나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사오는 수긍했다.
<좋을 대로.>
다음 순간, 마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말하겠어요. 묘우미 씨,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나온 시루꼬 씨와 함께 술을 마셨을 때의 일입니다.>
묘우미는 마사오 쪽을 보지 않고, 술이 담긴 잔을 들고 그것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날 밤, 이 방에서 시루꼬를 안았단 말이죠?>
마사오는 깜짝 놀랐다.
<이 방에서>라고 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단순한 의심이나 추측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잔을 옆으로 흔들면서 묘우미가 질문했다.
<그날 밤에만? 그 뒤에는?>
<그날 밤 이후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묘우미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루꼬를 보았다.
<나, 알고 있었어.>
<어떻게?>
<옆집 야마시타 씨에게 들었어. 그날 아침 일찍, 난 학교로 가지 않고 곧장 여기에 왔었어. 근처에서 출근하는 야마시타 씨와 마주쳤지. -남자가 있
으니 가지 말아요.-하는 거야. 그 사람이 말하는 인상 착의는 틀림없이 마사오 씨였어. 그래서 난 그대로 학교로 갔던 거야.> 시루꼬는 침착한 태도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문제는 간단하잖아. 너만 이 사람에게 정조를 지킬 이유는 없어. 자유로워지는 거야.>
지금까지 묘우미는 시루꼬와 마사오 사이의 일을 알고 있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날 점심 때 교내에서 만나 여관으로 갔을 때도 마사오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었다.
참을성 있게 잠자코 있었던 건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있었군요.>
마사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동안의 묘우미에 대한 자신의 연극을 생각하니 무척 낯뜨거웠다.
묘우미는 마사오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태도다.
<너한테 숨기려 했어?>
시루꼬의 눈과 귀를 의식한 친절이었다.
<모를 거라고 안심하면서도 시루꼬 씨가 말해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럼 나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전혀 없었어?>
<아니, 고민은 많이 했어요. 고백하는 것이 옳은 일이니까.>
묘우미는 술을 들이키고 나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나는 나에게 숨기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기뻤어. 나와의 관계를 단순한 유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솔직하게 말했더라
면 오히려 난 실망했을 거야. 말해 주지 않는 것을 난 애정의 표현으로 해석했어.>
시루꼬가 반론을 펼쳤다.
<이 사람은 너를 단순한 욕구 해소의 수단으로밖에 생가지 않아. 편리한 도구가 없어지는 게 두려웠던 거지. 지금 이 사람에겐 너 말고는 여자가 없
어. 고향에 애인이 있다지만 거긴 너무 멀지. 교활하게 널 이용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요.>
마사오는 강하게 부정했다.
<전 묘우미 씨가 두려웠습니다. -그런 나도 한 번- 하는 기분으로 다른 남자를 사귈까 봐 걱정되었습니다.>
<정말?>
묘우미는 몸을 마사오 쪽으로 돌렸다.
<내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면 안 돼?>
<안 된다고 말할 자격은 없지만, 싫습니다 매우.>
묘우미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어리석긴.>
시루꼬는 비웃었다.
묘우미는 다시 몸을 식탁 쪽으로 돌려 시루꼬를 응시했다.
<그보다 난 너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의문스러웠어. 왜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걸까? 곧바로 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애초에 그러기로
하고 그날 밤에 나 대신 마사오 씨를 만나러 간 거잖아?>
<그건, 네게서 이 사람을 훔쳤다는 비밀을 간직하고 싶었고, 이 사람이 네게 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협조한 거야.>
<그럼 좀전엔 왜 폭로하려 했던 거지?>
<고루한 너의 사고를 너무 고집했기 때문에 난 화가 났어. 기를 꺾어 놓고 싶었어. 그런데 네가 이미 알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그래.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묘우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시루꼬를 응시했다.
묘우미와 시루꼬 사이에 살얼음 위를 걷는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계속하다간 진짜로 심한 말타툼을 벌일지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시간도 묘우미가 말한 열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마사오는 묘우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섰다.
<이제 그만 마시고 슬슬 일어날까요?>
그러자 시루꼬가 반사적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벌써 가려구요? 오늘은 묘우미도 외박 허락을 받았을 텐데요?>
<예. 그래서 여관에 가려구요.>
<무슨 소리예요? 아깝잖아요. 그 돈이면 신간 서적 문고본을 열 권 이상도 살 수 있어요. 여기서 묵어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요. 잠자리를 두 개 만
들어 둘이서 함께 자면 되잖아요.>
묘우미가 마사오를 보았다.
<어떻게 하겠어?>
시루꼬의 권유에 따르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시루꼬에 대한 대항 의식 때문일 것이다.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옆에서 시루꼬가 거들었다.
<그렇게 하세요. 일부러 여관까지 갈 거 없잖아요. 우린 서로 조심해야 할 사이도 아니잖아요?>
마침내 마사오와 묘우미는 시루꼬의 권유를 받아들여 묵기로 했다.
마사오는 다시 앉으며 시루꼬의 눈에 묘한 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술자리를 치우고, 잠잘 준비를 시작한 건 열두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한쪽 구석으로 쫓겨난 마사오는 두 여자가 함께 방을 치우는 광경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다가 복도로 나왔다.
소변을 보고 방에 돌아오니 이불이 깔려 있었다.
시루꼬가 이인용 잠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리고 와서 주무세요.>
<예. 그럼.>
마사오는 셔츠와 바지를 벗어 옷장에 넣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묘우미가 재떨이와 담배를 머리맡에 갖다놓았다.
물도 가져왔다.
여느 때와 똑같은 태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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