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의 초상 1
* 젊은날의 초상 1*
70년대 말 항도 부산은 활기차고 생동감에 넘쳐 있었으며
밤이면 찬란한 네온싸인과 함께 인파가 넘처 흐르고 끝없이
드나드는 외항선들은 길게 뱃고동을 울리면서 수평선 저너머
로 사라져 갔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요 수출의 관문인 부산은
언제나 비릿한 바다의 해풍과 함께 오늘도 새벽잠에서 막 깨어
나고 있었다.
원래 경상도 사람들의 기질이 그렇지만 특히 부산은 항구도
시로써 어느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점이 많았다.
광복동이나 남포동의 번화가에는 이국풍이 물씬 풍겼고 낯설
은 외국인들에다 거칠기만 한 바다의 사나이들, 그리고 각종 음
지의 기생충들이 오늘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 중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밀수꾼들과 항구 특유의 주먹들
이 서성대는가 하면 팔도에서 모여드는 여행객들과 함께 밤의 불
나비들이 성시를 이루는 곳이 이곳 부산의 밤거리다.
<민석호>
이는 이제 18살의 고등학교 2학년생인 나의 이름이다. 나의 고향
은 밀양이며 중학교까지는 그곳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다니게 되었다. 아직도 나의 부모님은 밀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
으며 2남 1녀중 장남이다.
나의 아버지는 비록 가난한 농민이지만 장남인 나만은 부산에 가
서 학교를 다니게 하였고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는 사촌형 집에서
숙식을 하였지만 형이 서울로 이사를 하고부터 이집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고층빌딩이 많지만
70년대 말만 하여도 대청동 4거리에서 헌책방이 즐비하게 있는 보수
동 골목을 들어서면 북쪽을 향하여 가파른 오르막길이 여러군데 있다.
가뿐숨을 몰아쉬고 약 10분정도 올라가면 흔히들 말하는 달동네가 형
성되어있다.
석호의 자취방은 그곳에 있는데 말이 집이지 모두가 판자촌이다.
그래도 석호의 집은 목조건물이지만 2층으로 되어있었고 근처에서는
가장 큰집으로 치고 있었다.
비록 달동네지만 워낙 지대가 높다보니 밤이면 내려다보이는 부산항
의 야경이 그만이다. 더구나 크고작은 배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묵직한
뱃고동소리와 함께 쌍쌍으로 갈매기들이 날아 들었다.
나는 비록 어린나이였지만 그런 부산항이 좋았다. 그것은 영원한 추억
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랄때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도 하였고 소를 몰고 꼴도 베
어보기도 하였으며 논밭에 들어가 실지로 농사를 지어보았다.
그런 전원풍경이 싫은것은 아니였지만 지금 내가 내려다 보고 있는 항
구도시 부산의 야경만은 못하였다.
아무래도 시골생활이란 것이 배고프고 고달프고 더구나 부모님의 간섭
을 받아야 하는 반면, 지금의 부산생활은 자유스럽고 모두가 새로운 것들
이다. 특히 내륙의 어느곳에 박혀 있는 삭막한 도시보다 항구도시 특유의
낭만과 서정이 깃들어 있으며 이제 사춘기에 있는 나로서는 흥청거리고
거칠기만 한 환락의 도시 부산이 너무나 좋았다.
나는 어려운 생활의 환경에서 나를 부산까지 보내 고등학교에 다니게한
부모님이 무척 존경스러웠고 실지도 나도 청운의 꿈을 안고 이곳에 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도시의 탁한 공기에 오염돼가고 있으며 환락
의 도가니속에 빠져가고 있는 기분이다.
어린마음이지만 그래서는 안되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하여 보지만 자고나
면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였고 주위의 친구들과 어울려 환락가를 드나들게
되었으며 공부와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방에서 나와 집옆에 있는 언덕위에 앉아 멍한 시선을 부두쪽
에 주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한층 더 아름다와 보였고 이제 막 흥
청거리는 항구도시의 뜨거운 열기속으로 빨려가고 있었다.
아직도 날씨는 더웠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한지도 벌써 3주일이 지났고, 조금있으면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한달정도의 방학기간에 시골에 있으면서 나는 너무나 답답하고 지루하여
미칠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18살이지만 원래 순진하지만 조숙해보였고 더구나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쾌활한 편이었다.
밑으로 동생들이 둘이 있지만 아직 어린 중학생들이었고 동네친구들마저도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시골이란 방학때도 농사일이 바쁠수 밖에 없었고 그렇다보니 자
연히 만날기회가 없었다. 이유가 또 있다면 고향에 있는 친구들과는 어울리
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뭔가 시시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그들과 어울린다는 것이 어쩐지 창피하게
만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부산항구의 휘향 찬란한 불빛에서 뜨거운
열기와 알수 없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손에 잡힐것만
같고 나도 저 불빛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초초함
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청소년기의
특유한 설레임일 것이다.
사실 나는 시골에서만 자라 어려운 집안일들을 도와 가며 공부를 하여서인
지 지금까지 이성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사랑이 무엇이고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머리속에는 알 수없는 동정과 그리움, 또한 막연하게나마 이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이집에 처음왔을때 나는 몹시 당황하였으며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집주인은 남편과 사별한 모녀뿐이었고 나말고도 다른 사람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이제 32-3세가 조금 넘은듯 하였고(나중에 알았지만 나이
가 37세였으나 상당히 젊어 보일정도로 동안에 피부가 고왔다.) 그녀는 자기
집에 딸린 점포에서 비디오 대여점을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여도 비디오란것
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구나 달동네에 가까운 판자촌에서 그 영업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다만 점포세가 나가지 않았고 그곳에서 약 5분거리에는 그런대로 잘 사는
동네가 있었으며 머지않아 아파트가 들어선더는 것이 큰 위안이 되고 있었다.
가끔 빌려가는 비디오테이프는 모두가 옆 동네에서였다. 내용도 어린이물이
많았고 성인용이라야 지난날 히트했던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아래층에 있는 조그마한 점포에서 생활비는 나오는듯하였
으며 그녀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차경미라는 딸이 있었다.
그들 모녀는 2층에서 생활하였으며 석호와는 조그마한 마루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또한 아래층 점포옆에도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 역시 어떤 젊은
여자가 세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처음 이사와서 그녀가 아가씨인지 부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느즈막하게 일어나 곱게 단장을 하고서 비디오가게에 가서 놀기도
하고 또한 어떤때는 정말 멋입게 차려입고 시내에도 다녀오곤 하였다.
나인는 이제 25세가 될까말까한 정도였으며 눈썹이 짇고 피부가 고왔으며
특히 인상적인것은 바른쪽 귀밑에 까만점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까만머리하며 쭉뻗은 다리의 곡선미가 시선을 끌었고 균형잡
힌 몸매에서 풍기는 그녀의 매력은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도 하였다.
다음에 안 일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유은하였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다소 외로워 보였고 때로는 하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는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시간이 갈 수록 그녀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는일 없이 집에만 있는
그녀가 과연 아가씨인지 부인인지 알 수없었다. 이곳에 온지 두달이 돼가지만
아직까지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을 한번도 보지못한데서 오는 호기심이 날로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거니와 물어본다는 자체
가 무척 쑤스럽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하여 막 집을 나서서 계단을 몇 발자욱 옮겼을
때 그녀가 저 밑에서 반대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목욕을 하고 오는듯 하였느데 계절이 여름인지라 아주 얇은 옷
차림에 가슴이 거의 노출될 정도의 요염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내려가는 입장이고 그녀는 계단을 올라오는 입장이어서인지 모
르지만 젖은 머리에 너무나 눈부신 가슴의 살결과 윤곽이 뚜렷이 나타나 보이는
그녀의 유방이 금방 보일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 엷은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으며 처음으로 아는척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엉겹결에 머리를 깊숙히 보였지만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
가 신은 하얀 슬리퍼에는 발톱에 물이 들어 있었고 옆을 스치고 지나간 다음 나의
코에는 여자 특유의 냄새와 함께 향기로운 비누내음이 나의 후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아찔하였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성에 도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은 다음 일이었다.
이곳에 이사를 온 다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들을 제자리에 정리한 다음
책상을 문 있는대로 옮기고서 나의 조그마한 낡은 케비넷을 혼자서 반대쪽으로
밀다보니 이상하게도 그곳은 밑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케비넷은 어머니께서 국제시장에서 가셔서 큰 마음먹고 사주신거였다.
그 안에는 옷가지며 이불따위 그리고 벼개며 시골에서 가져온 쌀과 반찬거리
까지 다양하게 두는 곳이다.
바꿔말해서 혹시 남이보면 창피한 물건은 모두가 그곳에 넣어두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 조그마한 구멍을 들여다 보고서 깜짝놀랄 수 밖에
없었다.
워낙 낡은 목조건물인지라 그곳은 일부분이 썩어 있었으며 탁구공 정도의 구멍
이 나있었는데 그곳을 내려다 본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아닌 한숨과 함께 탄식이
쏟아졌다.
다행이 그때는 대낮이라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래층에 세들어 있는 그녀의
침대와 옷가지 그리고 화장대 앞에서 한참 부지런히 얼굴에 무엇인가를 바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자태는 나로 하여금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훤히 비치는 잠옷바람에 풍만한 히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제 막 벗어놓은듯한
그녀의 팬티가 선명하게도 침대위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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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올리려니 힘이 드네요.
님들의 고생을 알 수 있을것 같네요.
님들의 글만 훔쳐 읽기만 하고 손 안대고 코풀려니 미안해서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또한 회원 박탈도 무섭고 해서...)
실력(문장력, 타자등)이 부족하지만 짤리지지 않는 한 끝까지 젊은날을 회고하렵니다.
재미없지만 다음을 기다려 주세요(타자실력이 없어서 자주는 올리지 못하겠네요).
70년대 말 항도 부산은 활기차고 생동감에 넘쳐 있었으며
밤이면 찬란한 네온싸인과 함께 인파가 넘처 흐르고 끝없이
드나드는 외항선들은 길게 뱃고동을 울리면서 수평선 저너머
로 사라져 갔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요 수출의 관문인 부산은
언제나 비릿한 바다의 해풍과 함께 오늘도 새벽잠에서 막 깨어
나고 있었다.
원래 경상도 사람들의 기질이 그렇지만 특히 부산은 항구도
시로써 어느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점이 많았다.
광복동이나 남포동의 번화가에는 이국풍이 물씬 풍겼고 낯설
은 외국인들에다 거칠기만 한 바다의 사나이들, 그리고 각종 음
지의 기생충들이 오늘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 중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밀수꾼들과 항구 특유의 주먹들
이 서성대는가 하면 팔도에서 모여드는 여행객들과 함께 밤의 불
나비들이 성시를 이루는 곳이 이곳 부산의 밤거리다.
<민석호>
이는 이제 18살의 고등학교 2학년생인 나의 이름이다. 나의 고향
은 밀양이며 중학교까지는 그곳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다니게 되었다. 아직도 나의 부모님은 밀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
으며 2남 1녀중 장남이다.
나의 아버지는 비록 가난한 농민이지만 장남인 나만은 부산에 가
서 학교를 다니게 하였고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는 사촌형 집에서
숙식을 하였지만 형이 서울로 이사를 하고부터 이집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고층빌딩이 많지만
70년대 말만 하여도 대청동 4거리에서 헌책방이 즐비하게 있는 보수
동 골목을 들어서면 북쪽을 향하여 가파른 오르막길이 여러군데 있다.
가뿐숨을 몰아쉬고 약 10분정도 올라가면 흔히들 말하는 달동네가 형
성되어있다.
석호의 자취방은 그곳에 있는데 말이 집이지 모두가 판자촌이다.
그래도 석호의 집은 목조건물이지만 2층으로 되어있었고 근처에서는
가장 큰집으로 치고 있었다.
비록 달동네지만 워낙 지대가 높다보니 밤이면 내려다보이는 부산항
의 야경이 그만이다. 더구나 크고작은 배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묵직한
뱃고동소리와 함께 쌍쌍으로 갈매기들이 날아 들었다.
나는 비록 어린나이였지만 그런 부산항이 좋았다. 그것은 영원한 추억
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랄때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도 하였고 소를 몰고 꼴도 베
어보기도 하였으며 논밭에 들어가 실지로 농사를 지어보았다.
그런 전원풍경이 싫은것은 아니였지만 지금 내가 내려다 보고 있는 항
구도시 부산의 야경만은 못하였다.
아무래도 시골생활이란 것이 배고프고 고달프고 더구나 부모님의 간섭
을 받아야 하는 반면, 지금의 부산생활은 자유스럽고 모두가 새로운 것들
이다. 특히 내륙의 어느곳에 박혀 있는 삭막한 도시보다 항구도시 특유의
낭만과 서정이 깃들어 있으며 이제 사춘기에 있는 나로서는 흥청거리고
거칠기만 한 환락의 도시 부산이 너무나 좋았다.
나는 어려운 생활의 환경에서 나를 부산까지 보내 고등학교에 다니게한
부모님이 무척 존경스러웠고 실지도 나도 청운의 꿈을 안고 이곳에 온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도시의 탁한 공기에 오염돼가고 있으며 환락
의 도가니속에 빠져가고 있는 기분이다.
어린마음이지만 그래서는 안되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하여 보지만 자고나
면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였고 주위의 친구들과 어울려 환락가를 드나들게
되었으며 공부와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방에서 나와 집옆에 있는 언덕위에 앉아 멍한 시선을 부두쪽
에 주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한층 더 아름다와 보였고 이제 막 흥
청거리는 항구도시의 뜨거운 열기속으로 빨려가고 있었다.
아직도 날씨는 더웠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한지도 벌써 3주일이 지났고, 조금있으면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한달정도의 방학기간에 시골에 있으면서 나는 너무나 답답하고 지루하여
미칠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18살이지만 원래 순진하지만 조숙해보였고 더구나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쾌활한 편이었다.
밑으로 동생들이 둘이 있지만 아직 어린 중학생들이었고 동네친구들마저도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시골이란 방학때도 농사일이 바쁠수 밖에 없었고 그렇다보니 자
연히 만날기회가 없었다. 이유가 또 있다면 고향에 있는 친구들과는 어울리
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뭔가 시시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그들과 어울린다는 것이 어쩐지 창피하게
만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부산항구의 휘향 찬란한 불빛에서 뜨거운
열기와 알수 없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손에 잡힐것만
같고 나도 저 불빛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초초함
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청소년기의
특유한 설레임일 것이다.
사실 나는 시골에서만 자라 어려운 집안일들을 도와 가며 공부를 하여서인
지 지금까지 이성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였다.
사랑이 무엇이고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머리속에는 알 수없는 동정과 그리움, 또한 막연하게나마 이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이집에 처음왔을때 나는 몹시 당황하였으며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집주인은 남편과 사별한 모녀뿐이었고 나말고도 다른 사람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이제 32-3세가 조금 넘은듯 하였고(나중에 알았지만 나이
가 37세였으나 상당히 젊어 보일정도로 동안에 피부가 고왔다.) 그녀는 자기
집에 딸린 점포에서 비디오 대여점을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여도 비디오란것
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구나 달동네에 가까운 판자촌에서 그 영업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다만 점포세가 나가지 않았고 그곳에서 약 5분거리에는 그런대로 잘 사는
동네가 있었으며 머지않아 아파트가 들어선더는 것이 큰 위안이 되고 있었다.
가끔 빌려가는 비디오테이프는 모두가 옆 동네에서였다. 내용도 어린이물이
많았고 성인용이라야 지난날 히트했던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아래층에 있는 조그마한 점포에서 생활비는 나오는듯하였
으며 그녀에게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차경미라는 딸이 있었다.
그들 모녀는 2층에서 생활하였으며 석호와는 조그마한 마루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또한 아래층 점포옆에도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 역시 어떤 젊은
여자가 세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처음 이사와서 그녀가 아가씨인지 부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느즈막하게 일어나 곱게 단장을 하고서 비디오가게에 가서 놀기도
하고 또한 어떤때는 정말 멋입게 차려입고 시내에도 다녀오곤 하였다.
나인는 이제 25세가 될까말까한 정도였으며 눈썹이 짇고 피부가 고왔으며
특히 인상적인것은 바른쪽 귀밑에 까만점이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까만머리하며 쭉뻗은 다리의 곡선미가 시선을 끌었고 균형잡
힌 몸매에서 풍기는 그녀의 매력은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도 하였다.
다음에 안 일이지만 그녀의 이름은 유은하였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다소 외로워 보였고 때로는 하루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는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시간이 갈 수록 그녀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는일 없이 집에만 있는
그녀가 과연 아가씨인지 부인인지 알 수없었다. 이곳에 온지 두달이 돼가지만
아직까지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을 한번도 보지못한데서 오는 호기심이 날로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거니와 물어본다는 자체
가 무척 쑤스럽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하여 막 집을 나서서 계단을 몇 발자욱 옮겼을
때 그녀가 저 밑에서 반대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목욕을 하고 오는듯 하였느데 계절이 여름인지라 아주 얇은 옷
차림에 가슴이 거의 노출될 정도의 요염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내려가는 입장이고 그녀는 계단을 올라오는 입장이어서인지 모
르지만 젖은 머리에 너무나 눈부신 가슴의 살결과 윤곽이 뚜렷이 나타나 보이는
그녀의 유방이 금방 보일것만 같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 엷은 미소와 함께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으며 처음으로 아는척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엉겹결에 머리를 깊숙히 보였지만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
가 신은 하얀 슬리퍼에는 발톱에 물이 들어 있었고 옆을 스치고 지나간 다음 나의
코에는 여자 특유의 냄새와 함께 향기로운 비누내음이 나의 후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이 아찔하였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성에 도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은 다음 일이었다.
이곳에 이사를 온 다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들을 제자리에 정리한 다음
책상을 문 있는대로 옮기고서 나의 조그마한 낡은 케비넷을 혼자서 반대쪽으로
밀다보니 이상하게도 그곳은 밑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케비넷은 어머니께서 국제시장에서 가셔서 큰 마음먹고 사주신거였다.
그 안에는 옷가지며 이불따위 그리고 벼개며 시골에서 가져온 쌀과 반찬거리
까지 다양하게 두는 곳이다.
바꿔말해서 혹시 남이보면 창피한 물건은 모두가 그곳에 넣어두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 조그마한 구멍을 들여다 보고서 깜짝놀랄 수 밖에
없었다.
워낙 낡은 목조건물인지라 그곳은 일부분이 썩어 있었으며 탁구공 정도의 구멍
이 나있었는데 그곳을 내려다 본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아닌 한숨과 함께 탄식이
쏟아졌다.
다행이 그때는 대낮이라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래층에 세들어 있는 그녀의
침대와 옷가지 그리고 화장대 앞에서 한참 부지런히 얼굴에 무엇인가를 바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자태는 나로 하여금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훤히 비치는 잠옷바람에 풍만한 히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제 막 벗어놓은듯한
그녀의 팬티가 선명하게도 침대위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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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올리려니 힘이 드네요.
님들의 고생을 알 수 있을것 같네요.
님들의 글만 훔쳐 읽기만 하고 손 안대고 코풀려니 미안해서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또한 회원 박탈도 무섭고 해서...)
실력(문장력, 타자등)이 부족하지만 짤리지지 않는 한 끝까지 젊은날을 회고하렵니다.
재미없지만 다음을 기다려 주세요(타자실력이 없어서 자주는 올리지 못하겠네요).
추천57 비추천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