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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거미여인의 정사[펀글]

거미여인의 정사 제 4 장 ◐ 흉가의 여인 1 ◑

보옥은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에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한밤중 이었다.
사방은 칠흙처럼 깜깜해 아무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에 섞인 빗소리가 쏴아 하고 유리창에 날아와 부서지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또 비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빗소리 외에는 사방이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보옥은 침대에 누운 채 야광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새벽 2시였다.

쨍그랑.

그때 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보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들어온 것이 틀림없어!)

보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2층 어디쯤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죽은 딸 윤미의 방이거나 남편의 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추 뇌리를 스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보옥음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그놈들인가?)

보옥은 숨소리까지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았다.
2층은 어느 사이에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넓고 큰 집에 그녀 혼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머깃속에 떠올랐다.
이 집에서라면 소리를 지르거나 구원을 요청해도 마을까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마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이었다.

보옥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정 아버지의 말대로 땅과 집을 팔고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사서 이사를 갈까
그랬다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 집과 땅은 남편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그리고 남편과 딸이 이 집에서 죽은 것이다.
물론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으나 이 집이 남편과 딸에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것 이라고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복수할 거야. 복수하고 말겠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도 복수 때문이었다.
보옥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복수를 하려고 결심하고 있는 자신이 이렇게 나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잠옷을 벗어 던지고 빠르게 소복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저고리를 걸친 다음 옷고름도 매지 않고 안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조용했다.
그녀는 벽을 더음어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휘익 불어 들어왔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이 기분 나쁘게 펄럭거렸다.
(창문을 열어놓았어...)

보옥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집안에 누군가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새 2층에서 피아노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피아노의 건반을 한 번 두드려 본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주방으로 달려가 부엌칼을 찾아 들었다.
폭풍의 밤에 짐승처럼 그녀의 가족들을 유린한 사내들이 또 다시 침입해 들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만약에 그들이 들어왔다면 부엌칼로 찔러야 했다.

그녀는 2층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 같기도 했고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기도 했다.
자꾸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래선 안 돼!)

그녀는 벽에 기대 서서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2 층을 행해 조심스럽게 걸어 올라갔다.

2층 거실도 조용했다.
어디 유리창이 깨졌는지 스산한 비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또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보옥은 재빨리 피아노가 놓여 있는 쪽을 쏘아보았다.

눈이었다.
어둠 속에서 파란 눈 두 개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놈의 고양이가!)

보옥은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도둑 고양이였다.
피아노 위에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나가!"

보옥은 악을 쓰듯이 소리를 질렀다.
도둑 고양이가 냐응 하고 소리를 지르며 피아노 위에서 풀쩍 뛰어내려 창문으로
달려갔다.

보옥은 주먹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비로소 2층 거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2층엔 아무도 없었다.
유리창은 거실 테라스 쪽으로 두장이 깨져 있었다.
(고양이 짓이 아니야!)

보옥은 창문 너머로 깜깜한 어둠 속을 노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안방으로 내려와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멀뚱멀뚱 눈을 뜨고 이것 저것을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도둑 고양이가 꺼림칙했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시체를 희롱한다고 했다.

어느 상가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젊은 여자가 죽어 염을 하게 되었는데 시체가 누워 있지 않고 자꾸 벌떡 일어나
염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넘어뜨리면 벌떡 일어나고 넘어뜨리면 또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무서워 시체에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지나던 스님 한 분이 그 얘기를 듣고 상가집에 들어왔다.

스님도 시체를 몇 번이나 쓰러뜨렸으나 시체는 그럴 때마다 오뚜 기마냥 벌떡
일어났다.
스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시체를 깔고 앉기도 하고 끌어안고 눕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체는 또 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인걸...)

스님은 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무릎을 탁 쳤다.

"문을 좀 열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스님이 가리키는 뒷문을 열었다.

"고얀 것! 한낱 축생이 어찌 감히 인간을 희롱하느냐? 썩 물러 가라!"

스님이 행랑채 지붕을 쳐다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스님의 호통에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고양이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새까만 도둑 고양이였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 있던 시체가 쿵 하고 나가자빠졌다.

대충 그런 얘기였다.
왜 그런 얘기가 생각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보옥은 눈을 감았다.
이제 좀 눈을 붙여야 했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알 수 없었다.
보옥은 문득 이마가 선뜻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창문 밖이었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우두커니 보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누, 누구야?"

그러나 보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힐끗 하더니 여자가 창문에서 사라졌다.

보옥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그녀는 여자가 창문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침대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거미여인의 정사 제 4 장 ◐ 흉가의 여인 2 ◑

이튿날 아침 보옥은 백석으로 남편의 묘를 찾아갔다.
그녀는 지난 밤을 뜬눈으로 새워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백석공원묘지 입구에서 국화꽃 두 묶음을 사서 남편과 딸의 무덤앞에 놓고
남편의 무덤을 향해 꿇어앉았다.

비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그녀는 남편의 무덤 앞에 엎드려 산사람에게 속삭이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또 눈믈이 주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간밤에 자신이 본 것이 귀신이라면 남편과 딸의 억울한 영혼도 자신을
도와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귀신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남편과 딸의 무덤을 찾아온 것도 그것이 귀신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였다.

보옥은 두 시간 남짓 남편과 딸의 무덤 앞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다.
남편과 딸과 함께 죽지 못한 것이 또 다시 후회되었으나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남편과 딸이 죽은 뒤에 그녀에게 가해져 오고 있는 무형의 압력을 그녀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보이지 않는 그것과 싸워야 했다.

물론 경찰의 힘을 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가정을 파멸시킨 적들을 처단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또 올께요.)

그녀는 남편의 무덤을 향해 속삭였다.
(잘 있어, 윤미야...)

윤미의 무덤엔 머리를 쓰다듬듯이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보옥은 백석 공원묘지 앞 큰 길까지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

비를 흠뻑 맞아 소복이 그녀의 몸에 감겼다.
그녀는 택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빈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30분 남짓을 기다리자 마침내 중형 택시 한 대가 그녀의 앞에 와서 섰다.

"서울 거여동까지 가시겠어요?"
"그러시죠."

택시 기사가 그녀의 몸을 힐끔 살피고 선선히 승낙했다.
소복이 몸에 감겨 그녀의 알몸이 그대로 내비칠 듯 드러나 보였다.

"땀내나는 수건이지만 좀 닦으시겠어요?"

택시 기사가 수건을 뒤로 넘겼다.
말과는 달리 깨끗한 수건이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수건으로 대충 빗물을 닦은 뒤 택시 기사에게 돌려주었다.
초로의 사내였다.

백석에서 거여동까지는 거반 두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남편의 시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원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시동생은 두 다리에 기브스를 한 채 병실에 누워 있었다.

"형수님!"

시동생이 그녀를 발견하고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거렸다.

"괜찮아요, 누워 있어요."

그녀는 재빨리 시동생을 제지했다.

"그런 일을 당하셨는데 찾아뵙지도 못하고..."

시동생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동안 자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속을 너무 많이 썩여 드렸죠. 사업을 한답시고...
형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신 분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말씀 마세요.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있어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봐 주고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제가 돌볼께요. 그래도 괜찮죠?"
"형수님이 돌봐 주시면 제가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빨리 완쾌하실 걱정이나 하세요."

그녀는 나약한 시동생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병원비도 밀려 있고..."
"제가 지급할께요.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늘 폐만 끼쳐서..."
"우리가 어디 남이에요?"

그녀는 사양하는 시동생의 손에 우선 병원에서 쓰라고 봉투 하나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시동생의 집을 찾아갔다.

집안은 여자가 없어서인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치워 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할머니, 수고하셨어요."

그녀는 할머니에게 수고비를 약간 건네 주었다.
할머니는 이웃에서 무슨 돈을 받느냐며 사양했으나 그녀는 억지로 떠맡겼다.

"아이들은 제가 데리고 갈께요."
"얘들 아버지가 뭐라고 할지..."

할머니가 난처해 하는 기색이 보였다.

"병원에서 만나고 오는 길예요. 제가 애들 큰엄마에요."
"예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아이들을 씻기고 시장에 나가 옷을 한 벌씩 사 입혔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짜장면을 사 먹인 뒤 친정으로 데리고 갔다.

"웬 애들이냐?"

어머니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당분간만 데리고 계세요."

그녀는 친정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는 사정은 설명하지 않았다.
밤이면 유리창이 깨지고 고양이가 나타나는 흉가 같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니가 키울 셈이냐?"

어머니는 그것만 물었다.

"시동생이 퇴원할 때까지 돌봐줄 거예요."
"언제쯤 퇴원하는데?"

"5, 6개월 걸린데요. 물리치료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럼 그 동안만 봐주면 되는 거냐?"

"한 달 정도만 어머니가 돌봐 주세요."
"왜 니가 돌보지 않고?"

"전 좀 할 일이 있어요."
"모르겠다. 너 알아서 해라."

"아이들이 예쁘죠?"
"내 자식만 하겠니?"

어머니도 아이들이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큰 애가 영옥이구 작은 애가 영준이에요."

영옥이는 여섯 살, 영준이는 이제 겨우 네 살이었다.
친정에서 돌아오자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거실의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그러나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거미여인의 정사 제 4 장 ◐ 흉가의 여인 3 ◑

이제 곧 밤이었다.
밤이 오면 누군가 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2층에서 왔다갔다하는
귀신놀이를 할 것이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황량한 가을비였다.
그녀는 서둘러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과도를 찾아 침대 머리맡에 놓았다.

어떻게 하든지 범인들을 잡아야 했다.
폭풍이 불던 밤 범인들이 던진 것으로 생각되는 빈 성냥갑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물론 경찰에 지문 조회를 의뢰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경찰을 개입시키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딸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그들에게 돌려 주어야 했다.

그들은 아직도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밤이었다.
그녀는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서 기다렸다.
그러자 서서히 공포가 밀려왔다.
시간은 몹시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정쯤에 얼핏 잠이 들었다.
그리고 무슨 소리인가 놀라서 눈을 떴고, 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하고
들렸다.
(와, 왔어!)

그녀는 재빨리 어둠 속을 더듬어 과도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침대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듯이 뛰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2층에서는 두 시간이 남짓 피아노 소리가 나고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다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날이 밝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윤미의 방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여기저기 흙 묻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나쁜 놈들!)

그녀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날 밤은 조용했다.
새벽에 비가 그친 탓이었다.

비는 1주일 후에 다시 왔다.
비가 오자 귀신놀이를 하는 자도 다시 나타났다.
(그래, 오늘은 네 정체를 밝히고 말겠어!)

보옥은 과도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거실 마룻바닥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아!)

보옥은 머리 끝이 곧추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핏자국이 2층 계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하나하나 걸어 올라갔다.
핏자국은 윤미의 방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윤미의 방문을 열었다.
윤미의 침대에 무엇이낙 조그만 물체가 시트로 덮여 있었다.

"누, 누구야?"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시트로 덮여 있는 물체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지 시트가 파르르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시트 속의 물체를 향해 과도를 내려찍었다.
그러자 피가 왈짝 솟구쳤다.
그녀는 황급히 시트를 벗겨냈다.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침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체는 뜻밖에 도둑 고양이었다.
(이럴 수가!)

그녀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뒤로 물러섰다.
끔찍했다.

다시 1주일이 지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는 오지 않았다.

보옥은 그 동안 백석 공원묘지를 두 번이나 더 다녀왔다.
공원묘지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녀의 눈에는 살기인지 광기인지 모를 섬뜩한 눈빛이
돌았다.
그 밖에는 집안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녀는 대개 남편의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 많았다.
남편의 서재는 거의 모두 약에 대한 책들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책들을 읽으며 미친 여자처럼 소리내어 웃고는 했다.

날씨가 쾌청했다.
바람은 제법 싸을한 냉기가 돌았다.
어느덧 만추였다.

농로 입구에서 택시를 내린 동보 제약 주식회사의 김순철은 드넓게 펼쳐진
황금들을 보면서 눈이 시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농로 양쪽의 논이 온통 황금빛이었다.
올해도 풍년인 모양이었다.
벌써 드문드문 벼 베기를 하는 곳도 있었다.

황금들 뒤에는 마을과 야산이었다.
야산도 울긋불긋 하는 곳도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군...)

그는 이재우의 집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으며 중얼거렸다.
죽은 이재우는 그의 동료 연구원이었다.
그러나 그가 일가족 집단 자살을 하여 자신과 딸은 죽고 부인만 살아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이재우는 비교적 성격도 원만했고 가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군사 시설 보호지역으로 묶여 있기는 해도 야산을 7천평이나 갖고
있었다.
현재 싯가로도 3천만원을 웃돈다는 땅이었다.
그것은 해제되기만 하면 이재우는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거미여인의 정사 제 4 장 ◐ 흉가의 여인 4 ◑

이재우의 집은 2층 양옥이었다.
사람이 둘이나 죽은 집이라 그런지 음침하고 조용해 보였다.

그는 대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벨을 길게 눌렀다.
그러자 그제서야 현관문이 열리고 소복을 입은 부인이 정원을 걸어나왔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이재우 부인의 소복 옷고름이 허술하게 매어져 희고 뽀얀 가슴이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이지?...)

이재우의 부인은 옷차림이 단정한 여자로 회사에 소문나 있었다.
옷차림 뿐만이 아니라 행실도 단정했고 용모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떻게...?"

부인이 의아한 듯이 그를 살폈다.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이재우군의 퇴직금 때문에..."
"네에"

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들어오라는 말도 없었다.
(변했어. 혹시 남자가 있나?...)

그는 양복 저고리 주머니에서 퇴직금 봉투를 꺼냈다.

"저 도장이 있어야 하는데..."
"도장?"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누구 도장이요?"

"물론 부인의 도장이지요..."

그는 또 눈쌀을찌푸렸다.
부인의 눈이 어쩐지 허공을 헤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찾아볼께요."

부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으나 그는 천천히 현관까지 따라 들어갔다.

집안은 뜻밖에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그릇들이 나뒹굴고, 거실의 가구가 쓰러져
있었다.
(이건 마치 격렬하게 부부 싸움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재우는 죽은 사람이었다.
죽은 사람과 부부 싸움을 할리는 없고, 제3의 인물이 있을 것 같았다.
이재우의 부인에게 내연의 사내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착잡한 기분으로 담배를 피우며 부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도 부인은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도장을 찾으러 가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는 공연히 화가 났다.
그러나 담배를 비벼 그고 부인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는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안방문을 두드려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일어났으나 꾹 눌러 참았다.

그는 회사를 대표해서 퇴직금을 전달하러 온 사람이었다.
미망인의 행실이 조금 예의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퇴직금을 전달해 주고
영수증에 도장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괜스레 동료 연구원의 미망인을 욕할 필요는 없었다.

부인은 20분이 얼추 지나서야 안방에서 나왔다.
뜻밖에 그녀는 물빛 시미즈 차림이었다.
얇고 투명한 그 옷자락은 여체의 속살이 그대로 내비쳤다.

"아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여체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무엇인가 섬뜩한 기분이 여자의 얼굴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부인은 배시시 웃었다.
요염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도, 도장은...?"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도장이요?"

부인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퇴직금을 받으려면 도장이 필요합니다.
퇴직금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도장을 찍어야 하니까요.
영수증은 회사 서식을 한 장..."
"제가 언제 회사를 그만뒀나요?"

"예?"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무, 무슨...?"
"전 돈 같은 건 바라지 않아요. 우리 딸하고 남편만 살려 주세요..."

"부인!"
"살려 주시는 거죠? 그럼 저를 다 가지세요."

부인이 갑자기 뜨거운 몸을 그의 가슴에 기대 왔다.
그는 엉겁결에 부인의 몸을 껴안았다.

"부인! 정신 차리십시오!"

그는 부인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부인의 눈은 초점이 갈라져 있었다.
(미쳤어!)

그는 다리에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부인은 시미즈의 어깨 끈을 벗으며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됩니다, 부인!"

시미즈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지며 스르르 벗겨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동료 미망인의 나신이었다.
순간적으로 부인의 나신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그는 그
욕망을 억제했다.

그리고 미쳐서 정신없이 달라붙는 부인을 뿌리치고 황급히 그 집을 나왔다.

거미여인의 정사 제 4 장 ◐ 흉가의 여인 5 ◑

대학생 김민우가 수선화와 옥잠화가 섞인 꽃을 한 묶음 들고 그 집을 찾아온 것은
그날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집주인 보옥은 상냥한 미소로 그를 거실로 인도했다.

민우는 집주인 보옥이 정신 이상자라는 걸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거실을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래도 보옥에게
예의를 다해 찾아온 용건을 얘기했다.

"제가 누군지 아시겠지요?"
"그럼요."

"어려운 일을 당하셨는데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보옥은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찰의 수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요?"
"..."

"제가 알기엔 경찰의 수사가 흐지부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서가 없어 수사에 도무지 진전이 없다는 겁니다."
"..."

"경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라도 범인을 잡겠다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전 폭풍이 불던 날 밤 윤미 어머니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때 모셔다 드리기만 했더라도...
실은 이래뵈두 제가 태권도 유단자입니다..."

민우는 그렇게 말을 하고 쑥스러워 머리를 긁었다.
공연히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보옥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일 것이다.

"이 마을엔 최근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윤미 어머니도 들어보신 일이 있겠지만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고, 사람 들이
죽고...모두 마을 앞의 느티나무가 벼락에 타 죽은 뒤부터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집과 땅을 팔고 떠나고 있습니다.
벌써 마을의 반이 예성개발회사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이 마을의 땅들이 대부분 군사 시설 보소지역으로 묶여 있는데두요."

보옥은 야릇하게 눈웃음을 치며 아까부터 옷고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쩐지 천박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는 보옥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 한 잔 드실래요?"

그때 보옥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차요. 주스 같은 거라도..."

"예, 한 잔 주시면..."
"잠깐만 기다리세요."

보옥이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보옥이 잠시 후에 들고 나온 것은 흰 우유였다.
민우는 보옥이 건네 주는 컵을 받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비웠다.

"고맙습니다."

민우는 보옥에게 컵을 되돌려 주었다.

"더 드릴까요?"

보옥이 생글거리고 웃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제가 예쁜가요?"

"예?"
"언젠가 그러셨지요? 윤미 어머니는 정말 미인이라고...?"

"그런 걸 다 기억하고 계시군요..."
"그럼 진심이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이상한데..."

민우는 갑자기 졸음이쏟아져 오는 것을 느끼며 하품을 길게 했다.

"졸리우세요?"
"예, 어제 잠을 늦게 잤더니...
그건 그렇구 윤미네도 그 개발회사에서 땅을 팔라고 하지 않던가요...?
아...졸려...왜 이러지...?"

민우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려고 했으나 스르르 눈이 감겨졌다.
잠결이었을 거였다.
잠결이 아니면 꿈결인지 모를 일이었다.

민우는 누군가에 의해 부축되어 침대로 옮겨졌다.
그리고는 한겹 한 겹 옷이 벗겨졌다.

그리고는 여자의 알몸이었다.
여자의 매끄러운 알몸이 민우의 몸을 칭칭 감았다.

민우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랐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보옥이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혹시 내가 마신 우유에 수면제를 탄 것이 아닐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윤미의 어머니 앞에서 잠이 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침대에 옮겨져 있는 것이다.

윤미 어머니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비록 잠이 들었어도 훤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갑자기 비감한 기분이 들었다.
정숙한 여자로 알고 있던 윤미 어머니의 창녀 같은 짓에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잠자는 윤미 어머니의 얼굴은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였다.
(순결한 총각의 동정을 훔쳐 가고도 저런 표정을 짓다니...!)

민우는 윤미 어머니의 눈부신 나신이 추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니가 탕녀처럼 굴었으니까 나도 너를 탕녀처럼 대해 주겠어!)

그는 생각이 단순했다.
그는 보복이라도 하듯이 보옥의 나신에 올라가 바짝 엎드렸다.
그녀를 거칠게 짓밟을 작정이었다.

민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여자에 대한 경험은 처음이었으나 보옥이 밑에서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백치 같았다.
눈을 뜨자 민우를 향해 배시시 웃기부터 했다.
마치 민우가 그녀의 남편이라도 되는지, 민우의 등에 팔을 감고 가뿐 숨을
몰아쉬고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민우는 이내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민우가 보옥의 정신 이상 상태를 알아차린 것은 이튿날 아침의 일이었다.

민우는 여자를 잘 몰랐다.
보옥이 그를 침대로 끌어들이고, 그를 남편이나 애인처럼 받아들인 것을 단순히
그녀가 음탕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이었다.
보옥은 의지를 상실한 정신 이상자였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민우는 가슴이 아팠다.
백치처럼 헤푸게 웃고 있는 보옥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보옥은 발작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몹시 난감했다.
발작은 하지 않고 있었으나 정신병 환자와 육체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를
한없는 자책감에 빠지게 했다.

보옥은 아직도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마치 나를 안아달라는 듯한 자세처럼 보였다.

민우는 오랬동안 골똘히 생각한 끝에 보옥을 욕실로 데리고 가 깨끗이 씻겨 주었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힌 뒤 침대에 앉혀 놓고 거실이며 집안을 대충 치웠다.

그 다음에 그는 보옥의 친정집으로 연락했다.
아무래도 보옥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보옥은 마침내 가족들에 의해 용인 정신병원에 입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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