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 18
올렸었는데 중간이 짤려서 다시 올립니다
제가 미리 알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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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천보공녀(天寶公女) 금교교(金嬌嬌)
호북(湖北)의 무창성(武昌省) 밖 야산(野山), 야산의 가운데를 뚫는 관도에는 인적이 없었다.
두두두두!
뽀얀 황진을 일으키며 관도를 질주해 오는 황금갑주를 걸친 위풍당당한 기세로 달리는 수십 필의
기마대 사이로 한 대의 마차가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지극히 화려무비한 화거(花車)였다. 사각엔 주먹만한 용안주가 길을 밝히고, 마차의 골결은 황금
이었고 사면을 가린 휘장은 한 뼘에 일천 냥이 나간다는 취라능금단이었으며, 촘촘히 박혀 사군
자를 그리고 있는 묵화(墨畵)는 수천 개의 흑진주였다. 가히 굴러가는 보물성(寶物城)이랄까?
두두두!
황금기마대는 사사천병마살진(四四天兵馬殺陣)을 형성하며 사위를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이곳만 넘으면 무창(武昌)... 크악!"
선두에서 달리던 인물이 돌연 처절한 비명성을 내지르며 말 위에서 고꾸라졌다.
"적이닷!"
"소공녀를 보호해랏!"
채채챙!
오십여 고수들은 일시에 창검를 뽑아들며 화거를 에워쌌다.
"크으으!"
"끄르륵!"
돌연 호위군사들은 목줄기를 움켜쥐며 괴로운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것도 잠시,
푸시시시식!
비명도 소리도 없었다. 무엇인가 타는 듯한 매케한 내음과 함께 벌어진 끔찍한 참상, 오십 삼 인
의 호위군사들은 자취도 없이 녹아들며 종내에는 한줌의 혈수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독! 그것은 가공할 천잔부시혈독에 의한 참살의 현상이었다.
장내로 한 줄기 연기처럼 날아내리는 한 줄기 녹영(綠影)이 있다.
"흐흐흣... 천보공녀(天寶公女)... 금백만(金百萬)도 이 계집의 목숨 값이면 충분히 본 벌에 거금을
회사하겠지?"
녹포노인은 육십이 넘었을까한 녹광을 분출시키고 있는 그의 몰골은 도저히 인간의 상이 아니었
다.
녹발(綠髮)에 푸르스름한 피부에 눈동자마저도 녹광에 이글거리는 녹포인의 주위 일 장은 시커멓
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녹라독종지체(綠羅毒宗之體)에 이른 독문(毒門)의 고수만이 나타낼 수 있다
는 기현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흐흐흐... 계집애야! 냉큼 나와서 본좌를 맞거라!"
마차 안은 조용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파파팟!
폭발하며 비산하는 가공할 흑광이 있는데 그것은 마차의 휘장에 박혀 사군자를 이루고 있던 수천
개의 흑진주였다.
묵광천하(墨光天下)! 장내의 십여 장 이내는 휘황한 묵광의 그물로 뒤덮이고 말았다.
"녠! 계집! 이따위 장난감으로 살황마독강!"
푸스스스스!
녹포노인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두 손을 뻗자 전신에서 안개같이 녹무(綠霧)가 분출되고 사위
를 가득 메운 흑광은 자취도 없이 녹아 들어갔다.
파지직!
그와 동시에 화려한 마차는 두 쪽으로 갈라져 부숴지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한 소녀가 있었다.
아아! 일천 개의 보석이 빛을 발하듯 장내는 일순간 휘황한 칠채보기(七彩寶氣)에 휩싸인다.
소녀는 십오륙 세쯤 됐을까? 능라금비단으로 차려입은 궁장은 수천 개의 청보석을 박아 빛나고
형형색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새하얀 교수(嬌手)는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혀 있다.
산호와 취옥을 가미시킨 귀걸이는 파르르 떨리고 백여 개의 진주로 꿰인 새하얀 목걸이와 그것보
다 더욱 새하얀 목덜미의 우아한 곡선, 웃음을 머금은 소녀의 입술은 시리도록 붉다. 지금 그녀의
한 쌍 서늘한 봉목 위로 떠오른 것은 짙은 분노였다.
녹포괴인은 일순 눈이 부심을 느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
고는 간특한 흉소를 흘리며 소녀에게로 다가들었다.
"흐흐... 과연 천하제일부라는 취라황금성의 보물인 천보공녀로군!"
녹포괴인의 입가로 만족한 웃음이 흘렀다.
취라황금성(翠羅黃金城)!
이것이 진정 사실이란 말인가?
천하에 지하상계(地下商界)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밀무역(密貿易), 밀주매매(密酒賣買), 병기제조판매(兵器製造販賣), 인신매매(人身賣買), 도박장(賭
博場), 매춘행위(賣春行爲) 등과 마약거래(痲藥去來), 춘궁기의 곡식류(穀食類)의 매점매석(買占賣
惜) 행위,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 황금이 생기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황금충
(黃金蟲)들이었다.
천왕팔가 중 신비혈가의 죽음의 장삿꾼들조차 고개를 젖고 마는 진정한 지하상계(地下商界)의 대
부(代父)인 신화의 주인공이 바로 취라황금성이었던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자연스레 형성되어 온 지하상계... 그 지하상계의 모든 황금줄을 틀어쥐고 있는 천
하제일부 금천대황야(金天大皇爺) 금적산(金積山)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상귀(小商鬼)
가 있었다.
취라공주(翠羅公主) 천보공녀(天寶公女) 금교교(金嬌嬌)!
바로 그녀였다.
당년 십육 세의 소녀, 그녀의 별호가 말해주듯 이 소녀의 몸은 하늘의 보석, 값을 매길 수 없는
천보였으니 천보공녀 금교교를 얻음은 곧 천하를 취함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금, 그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기에 말이다.
천보공녀 금교교는 암습이 실패하자 의외인 듯 아미를 찌푸리다 곧 무표정한 신색으로 품 안에서
하나의 금갑을 꺼내 녹포괴인에게 던졌다.
"구룡천황주(九龍天皇珠)... 그것이면 너의 십대 후예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구룡천황주! 이것이..."
녹포괴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취라황금성에만 있다는 무가지보... 이것 한 알이면 중원의 일성 아니 천하의 십삼분지 일을 살
수 있거늘...)
그의 눈가로 언뜻 탐욕의 열광이 일렁였다.
"흐흐흐... 물론 이것만으로도 크지! 허나..."
스윽!
그의 눈은 천보공녀 금교교의 전신을 훑어가고 있었다.
"네년을 잡아먹으면 천하를 가질 수 있거늘, 비린내 하나 나지 않겠구나! 한 입에 삼켜도 말이
다."
천보공녀 금교교의 교구가 나뭇잎같이 흔들렸다.
"감히 네놈이!"
전신에 흐르는 오만함조차 황홀한 여인, 녹포괴인은 충열된 눈을 희번뜩이며 손을 비쾌하게 뻗었
다.
"흐흐... 어디 네년이 그 오만만큼이나 아름다운지 보겠다!"
찌이익!
"아악! 이 치한!"
소녀의 몸을 가리고 능라금의가 찢겨지고 금교교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나신을 움츠렸다.
백설을 연상시키듯 그녀의 피부는 실핏줄까지 투영될 정도로 맑았다.
"크흐흐... 본좌! 살황마독존이 본 중에서 최상품이로다! 네년만 있으면 본좌는 천하를 발아래 둘
수 있으니... 크하하핫!"
슷!
살황마독존은 솔개가 병아리를 덮치듯 날아올랐다.
헌데, 이 녹포괴인이 바로 저 지옥십대혈작 중의 독혈작 살황마황독존이란 말인가?
"비, 비켜!"
천보공녀 금교교는 공포로 옥용을 새파랗게 질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흐흐... 아프지 않게 귀여워해 주마! 너를 취하고 취라황금성의 힘을 얻어 환우천자로 군림할 것
이고 너는 대황후로서 본좌의 제일첩이 될 것이다!"
살황마독존은 대야심을 품고 있는 효웅이었던가? 단순히 혈각에 예속된 마인이기에는 그의 지금
행동은 어패가 있었다.
"으음!"
천보공녀 금교교는 수치심과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크흐흐... 꿀꺽!"
활짝 열려진 뽀얀 나신을 바라보는 살황마독존은 절로 탐욕의 침음성을 터뜨리며 황급히 자신의
옷자락을 찢듯이 벗어던졌다. 채 피어나지 않은 꽃이 이대로 무참히 낙화(落花)하려는가?
살황마독존의 손이 마악 여인의 봉곳한 젖가슴을 이지러뜨리려는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
다.
"크크녠... 꿈도 야무지군!"
한 소리 지극히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울리고 한 줄기 가공할 지강(指剛)이 살황마독존의 배심
으로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헉! 웬놈이 !"
살황마독존은 뜻밖의 공격에 흠칫하더니 이내 신형을 퉁겨올리며 가공할 독강(毒강)을 발출시켰
다.
콰자작!
"으음!"
"크녠... 제법이로군! 인간같지도 않은 괴물 같은 놈이!"
휘익!
신형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살황마독존의 앞으로 날아내리는 인영은 붉었다. 핏물에 담근
듯한 적포에 혈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붉디붉은 적면, 거기에 수초처럼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적
발에 적미, 눈가로는 타는 듯한 금광이 뇌전같이 강렬하다.
"허억! 천마대불종!"
나타난 인물을 일별한 살황마독존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천마대불종(天魔大佛宗)!
일명(一名) 지옥의 학살자!
제삼의 역지옥풍이라 불리는 혈각의 마인(魔人)들에겐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 그 천마대불종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천마대불종으로 변신한 화우성은 스산한 마소를 터뜨리며 살황마독존에게 다가갔다.
(크! 감히 밥이 되려는 순간에 저런 괴물 같은 놈 때문에...!)
살황마독존의 눈가로 가공할 살광이 일었다.
"흐흐... 독종독인과 싸움을 붙여놓고 저 계집을..."
그의 입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며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은 빛살같이 뒤로 퉁겨져 나갔다.
"녠! 감히 본좌 앞에서 도망을 가려고 하다니..."
화우성은 조소를 떠올리며 살황마독존을 펼쳐갔다.
"끼이이!"
푸스스슷!
사위의 수림이 일시에 녹아내리며 가공할 독강이 화우성의 전신으로 강타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
가?
"크하핫... 귀여운 나의 수하들아! 저 인간같지 않은 노물을 녹여 버려랏!"
살황마독존은 득의의 광소를 흘리며 폭갈을 터뜨렸다.
하나, 둘, 일백... 사방을 메우며 짓쳐드는 이백 구의 녹인(綠人)들이 있었다.
"으음... 독문에서조차 제련이 금지된 녹령독종독인(綠靈毒宗毒人)!"
화우성은 안색을 굳히며 신형을 멈춰세웠다. 그의 눈가로는 신비로운 이채가 스쳤다.
(저것은 독종의 성역인 독왕세가에만 있다고 알려졌거늘 그렇다면 살황독존은 독종의 후예란 말
인가?)
화우성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녹령독종독인의 전신은 금강불괴요 한 구 만으로도 황하의 모든 물고기들을 독사시킬 수 있다는
전설의 독물로 흐느적거리며 화우성의 주위를 압박해 들고 있었다.
"흐흐흐... 독종강시만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본좌는 녹령독종독인을 제련하였다. 그것은 독종강시
일천구와 맞먹는 소중한 보물들이지... 그것들과 놀다가 죽어라... 노부는 저 계집과 운우의 낙을
즐길 터이니..."
살황마독존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신형을 돌렸고 천보공녀 금교교는 여인의 신비로운 비소를
부그럽게 열어젖힌 채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흐흐... 귀여운 것!"
살황마독존은 일순 전신이 뿌듯해짐을 느끼며 욕화에 휩싸였으나 모든 일은 일간의 마음대로 되
지만은 않았다.
(후후...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모조리 한꺼번에 태워 주마!)
파츠츠!
화우성의 쭉 뻗은 쌍수에는 새파란 뇌광(雷光)이 일렁이고 있었다.
"끼이이!"
푸시시시!
방원 오십 장 이내는 이미 단 한 그루의 나무도, 풀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커멓게 그슬린 사이로 다가드는 녹령독종독인들, 시퍼런 귀화(鬼火)를 일렁이는 초점없는 동공,
전신을 온톤 녹광(綠光)으로 물들인 채 독혈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끼끽!"
선두의 독인 하나가 기성을 질렀다.
휘르르르!
실로 엄청난 독강의 폭풍이 장내를 휩쓸었고 그것은 화우성의 전신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하자 쌍
수를 천공으로 끌어올리며 적면(赤面)을 씰룩였다.
"마물들..내세에서는 좋은 인간이 되거라! 천뢰마강(天雷魔剛)!"
콰콰콰쾅!
터져나오는 벽력성이 대지를 뒤흔들며 타오르는 수백 개의 불꽃의 낙뢰가 유성처럼 꽂혀내린다.
"끼아아!"
기름에 불이 붙듯 녹령독종독인들은 가공할 화염의 불꽃에 휩싸이며 꿈틀거렸다.
푸시식!
그것도 잠시 뿐 장내는 매케한 독향이 날렸고, 지면으로 한줌의 독수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후후... 나의 몸에는 나조차도 감당 못할 천뢰기(天雷氣)가 있다. 뇌정마찰의 뇌공으로도 감당치
못할 정도로 가공할 독은 내겐 무용지물이지... 아무리 가공할 절독이라도..."
화우성은 태워버린 녹령독종독인의 잔해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헉! 저럴 수가! 녹령독종독인 이백 구를 한꺼번에..."
살황마독존은 또다시 욕화가 사그러지고 말았다. 느긋하게 여체를 감상하고 막 시식을 하려던 찰
나에 그는 못 볼 광경을 목도한 것이었다.
"인, 인간도 아니다! 무신(武神)이다!"
중풍에 걸린 듯 와들와들 떨리는 그의 몰골은 가여울 정도였다.
(내가 상대할 수 없다.)
직감적으로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 몸은 그의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같지도 않은 괴물,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그의 경공은 매우 빨라 평소에 그런 속력을 냈다면 그는 천하제일비(天下第一飛)가 되었을 정도
였다.
"녠!"
화우성은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머금으며 시선을 돌렸다.
천보공녀 금교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빤히 화우성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자신의 나신
을 가릴 생각도 않고 있었다.
"험! 아까는 곧 죽을 듯이 반항하더니만 왜 옷을 안 입느냐?"
화우성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며 힐책하였으나 금교교는 그의 말에 배시시 웃으며 짤랑한 옥음
을 날렸다.
"호호... 다 보았지요?"
"무얼?"
화우성은 의혹의 빛을 떠올리며 반문하다 이내 두 눈을 감고 말았다.
"나의 가슴과 모든 것을 다 보았지 않아요?"
벗은 나신을 드러낸 여인이 오히려 당당하지 않은가?
"어떻할 거예요?"
"규중 규수의 모든 것을 훔쳐보았으니 책임지실 거냐구요? 왜 말을 못하죠? 내가 보기 싫은가
요?"
도무지 정신이 없을 정도로 연속적으로 쏘아붙이는 금교교의 말에 화우성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끄응! 도대체 너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화우성은 한참만에야 정신을 추스리며 물음을 던졌다.
"흥! 젊은 사람이 노친네 흉내를 내봐야 소용없어요!"
금교교는 콧방귀를 흥흥 날리며 나풀나풀 걸어왔다.
출렁이는 젖가슴의 물결, 보일 듯 말 듯한 밀림지대, 새하얀 옥주는 햇살 속에 눈부시게 반광되었
다.
(도대체 이 여인은 요녀인가, 성녀인가?)
화우성은 일순간 이성의 가치 기준을 잃고 있다가 금교교의 말에 또다시 혼비백산하고야 말았다.
화우성의 코 앞까지 다가온 금교교는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소녀는 취라황금성의 소성주인 천보공녀 금교교예요."
"취라황금성? 천보공녀 금교교?"
화우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서는 취라황금성도 천보공녀 금교교의 이름도 알 수 없었고, 눈앞
의 이 소녀가 얼만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화우성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소녀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만은 천하제일임을 자부할 수 있어요."
".....?"
"골동품의 진가를 가리는 감별능력이죠!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소녀는 그것을 한 번 보면 몇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를 감별할 수 있어요!"
"처녀가 백주대로에서 발가벗고 있는 것 만큼 흥미롭지는 못하군!"
화우성의 힐문에 금교교는 새하얗게 눈을 흘겼다.
"당신이 일평생 보실 것인데요, 뭘!"
"당신? 일평생 봐?"
화우성은 눈을 휘둥그래 뜨며 새삼스레 금교교의 눈을 주시했다.
"글쎄... 나같은 늙은이야 그대같은 절세미녀를 얻는 것은 좋지만 윽!"
말을 잇던 화우성은 일순 비명을 질렀다. 금교교의 매운 교수가 그의 허리를 무차별 꼬집었던 것
이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능청을 떨면 못써요!"
그녀의 짤랑한 옥음에 화우성은 일순 흠칫하며 안색을 굳혔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나의 원래 신분을?)
그의 생각은 짐작한 듯 금교교는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인간의 몸도 골동품과 마찬가지예요. 변하는 거죠... 세월(歲月)이 가면서 색깔(色)도 재질(才質)
도 변해요. 인간의 몸도 예외는 아니에요! 당신은 천마대불종으로 변신하고 있지만 그는 이백 년
전의 인물이에요."
화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금교교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의 피부는 도저히 이백 살 이상이나 먹은 노물의 피부가 아니에요."
그녀는 화우성의 얼굴과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탄력성... 비록 주름을 만들었지만 싱싱한 생명마저 죽이지는 못했어요!"
"내가 젊은 사람이라고 치자! 단지 그것만으로 나를 택했단 말인가?"
금교교는 신비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무공은 녹령독종독인을 일수에 박살낼 정도로 막강해요! 오죽하면 지옥십대혈작 중의 독
혈작인 살황마독존이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도망갔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
에요. 나쁜 놈들만 골라 죽이는 것을 보면 알죠!"
"허... 이런!"
화우성은 조리정연한 금교교의 말에 할 말을 잃고 그윽한 눈길로 올려다 보았다.
"사실 아버님은 소녀를 시집보내려 해요. 그렇지만 신산귀상제(神算鬼商帝) 악비(岳飛)! 그 자는
싫어요."
"신산귀상제 악비라..."
화우성은 남의 이야기를 듣듯 무관심하게 중얼거렸다.
"악비는 취라황금성의 총감찰사(總監察使)예요. 서른 살밖에 안된 젊은 사람이지만 능력은 아버님
도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라면 괜찮을 듯도 싶은데?"
금교교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흥! 그런 돈귀신과 살다간 내가 돈독에 올라 죽을 거예요! 그는 돈밖에 모르는 냉혈한(冷血漢)이
에요. 나는 때려죽여도 그런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
"소녀는 아버님께 일 년의 기한을 얻었어요. 악비보다 뛰어난 인물을 신랑감으로 데려오면 그와
의 결혼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구요."
금교교는 간절한 눈길로 화우성의 얼굴을 주시했다.
"당신은 소녀의 모든 것을 보셨어요!"
"그것은 억지요.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었소?"
그러나, 금교교는 그런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거두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시집도 갈 수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 끝에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당신이 계속 그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생각?"
"그래요! 천마대불종은 이십도 안 된 약관의 미청년이라고 소문낼 거예요. 뿐인 줄 아세요?"
화우성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금교교를 바라보았다.
"취라황금성의 모든 금력을 동원해서라도 고수들을 초빙해 당신을 잡아다 소녀의 방에 꽁꽁 묶어
둘 거예요!"
금교교는 확신하듯 말 끝을 맺으며 화우성을 흘겨보았다.
(이런 제기랄, 오늘은 뭔가 홀려도 단단히 홀렸군!)
화우성은 내심 몹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는 눈 앞의 이 당돌한 여인이 조금도 밉지가 않았으니
뭔가 이제껏 만났던 여인들과는 남다른 싱싱한 매력이 담겨 있는 듯도 했다.
(일단은 달래는 수밖에! 빨리 동정호로 가서 단리 누님과 의논할 일도 있고 하니...)
화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금교교의 나신을 가려주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낭자의 말대로 할 터이니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의 말에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당신과 함께 아버님께 가겠어요."
그녀의 교태섞인 앙탈해 화우성은 일순 안색을 싸늘하게 굳혔다.
"낭자가 진정 나를 낭군으로 선택했다면 나의 말을 따르시오! 싫다면 나는 떠나겠소!"
그의 차가운 일언에 일순 금교교의 옥용이 핼쓱하게 일변했다.
"아, 알았어요! 그대신 꼭 오셔야 해요? 취라황금성은 대파산(大巴山)의 황금곡(黃金谷)에 있어
요!"
"녠! 알겠소. 꼭 가리다!"
화우성은 금방 울 듯한 금교교의 교구를 안아들며 실소를 머금었다.
"일단은 무창(武昌)까지 데려다 주겠소."
"알았어요! 거기엔 본성의 지부가 있으니까요, 아참!"
말을 잇던 금교교는 생각난 듯 봉목을 치뜨며 화우성의 얼굴을 문질렀다.
"이 징그러운 가면을 벗고 당신의 참모습을 보여 주세요! 다음에 만날 때도 이런 모습은 아니시
겠죠?"
"후후... 알겠소!"
스스스!
일순, 화우성의 얼굴이 꿈틀거리며 변하기 시작하고 적발은 윤기 흐르는 흑발로 되돌아오고 금광
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타나는 유현하면서도 패기가 넘치는 붕안, 본색을 찾은 미안은 밝은 햇살
아래 확연히 돋보인다.
"아!"
일순, 금교교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정말 멋있는 남자예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화우성은 놀란 토끼눈같이 휘둥그래 떠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금교교의 봉목을 바라보며 싱
그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역시 먼저대로 흉측한 얼굴로 다녀요."
"으음?"
"이런 멋진 얼굴을 보면 어떤 여자라도 당신을 한 번 보면 상사병에 걸려 미칠 테니까요."
"원 실없는 소린..."
화우성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신형을 떠올렸다.
휘익!
"당신 바람둥이죠?"
"하하하!"
번갯불같이 사라져가는 남녀 뒤로 꼬치꼬치 캐묻는 특유의 암코양이 소리와 호탕한 대소가 장내
를 울렸다.
우연히 만난 남녀의 운명은?
칙칙한 암흑 속에 한줄기 유등한 귀기스런 혈루(血淚)가 흐르고 있는 밀실 안에는 삼인(三人)이
정좌해 있었다.
이남일녀로 그들은 서찰이 수북이 쌓여 있는 핏빛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말이 없었다.
백의노인의 머리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 했고 간간히 번득이는 안광 속으로 호수처럼 잔잔
한 심유함이 차갑게 일렁이며 회색(灰色)의 동공은 무엇인지 모를 곤혹감에 젖어 있었다.
뇌천작(腦天爵) 쌍뇌사혼자(雙腦邪魂子) 북궁기(北宮奇)!
정도의 파멸계책인 호천멸살천일지계를 만든 악마(惡魔)의 뇌가 그로 지옥십대혈작 중 서열 육
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도사상 초유의 천뇌를 지닌 인물이었다.
사도(邪道)의 사뇌양성소(邪腦養成所)라 일컬어지는 사뇌천혈각(邪雷天血閣)의 각주(閣主)이며 쌍
뇌에 담겨져 있는 삼만 육천 종의 귀계(鬼計) 혈책(血策) 중 일절만 쓴다 해도 천하를 혈세할 수
있다는 공포의 혈뇌를 소유하고 있는 혈각의 총군사이기도 하다.
구 척은 됨직한 장대한 체구를 지닌 그의 얼굴은 복면에 가려져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핏빛으로 물든 혈광(血光)을 폭출시키는 그의 눈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다.
혈의복면인의 눈에 투영되고 있는 빛은 심장마저도 얼려버릴 듯한 한(恨)의 기운과 눈앞에 보이
는 모든 것을 찢어죽일 듯한 피의 환상만이 일렁이는 괴인이었다.
신비혈작(神秘血爵) 신비대야(神秘大爺)!
지옥십대혈작에 서열은 비록 구 위이나 천마대작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알려진 신비으로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그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다.
천음후 천음서시 소옥령!
자색의 궁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여인은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으로 가슴엔 한 개의 슬(瑟)이 소
중하게 안겨 있다.
전설의 음문(音門)인 천음문(天音門)의 마지막 후예인 음공의 최강인으로 마라천황술로 펼치는 천
붕멸살음폭강은 천하최강의 음강이었다.
조그만 동산 하나쯤은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무적음공의 소유자 천음서시 소옥령은 신비대
야 만큼이나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이들 삼인(三人)들 중 일인(一人)만으로 천하를 떨어울릴 그들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이윽고 신비대야는 표정이 사그러진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장내의 침묵을 깨뜨렸다.
"으음! 이 상태로라면 이미 호천단혈맹은 붕괴되었군!"
"동감이에요! 거기에 나머지 칠대혈작이 본벌의 반대세력들을 척멸하고 있으니 이제 중원은 본벌
의 천하가 되었어요!"
천음후 천음서시 소옥령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천하군림(天下君臨)의 시작이오... 변황과 막북, 남해, 동해... 우리들의 적은 먼곳에
있는 그들이오!"
"아니야!"
문득, 뇌천작 쌍뇌사혼자 북궁기가 머리를 저었는데 심유한 동공에는 곤혹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
다.
"이상해. 이렇게 쉽게 무너질 호천단혈맹이 아닌데..."
그는 큰 머리를 흔들었다.
"더우기 그들의 수뇌진(首腦陣)이 잡혔다는 말은 없었다. 혜천성녀 단리운혜와 철사자 담운룡...
그들은 최후 사천공격 중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승리에 도취해 간과한 사실을 북궁기는 날카롭게 지적해내고 있었다.
"정작 싸움은 이제부터라 생각했거늘 나는 그들을 궤멸시키는 데 일천 일의 시한을 잡았다!"
천정을 올려다보는 그의 동공으로 수많은 상념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호천멸살지계를 펼친 지 칠백 일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그런 그를 바라보며 천음서시 소옥령은 별걱정 다한다는 투로 가볍게 입술을 열었다.
"육좌께선 호천단혈맹을 너무 강하게 보았어요."
그녀는 손을 들어 입술을 가리며 나직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런 허수아비들을 소녀의 일천천음학살무회군(一千天音虐殺舞姬軍)과 신비대야의 일만
신비혈야군단을 투입하려 하셨으니!"
그녀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연신 까르르 웃는데 가히 지옥십대혈작이라는 공포의 대명사를 떠올
릴 수 없는 순진무구한 해맑은 웃음이었다.
하나 북궁기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을 뿐 일언의 대꾸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은
탁자 위에 놓여진 몇 개의 서찰을 집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날아든 전서였다.
<호북평정!
본벌 거부하던 호북무림의 대혈벌정무맹(大血閥正武盟) 박살냈음... 포로 팔백육십... 본 천살각 피
해는 사상자 팔십오, 마마혈전강시 일백구 전원무사...
천살도객(天殺屠客...>
<크녠! 육제! 본좌는 일천사사천혈강시로 신강(新疆)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천을 죽이고 삼천을
포로로 잡았다. 십일(十日) 후 돌아가겠다.
겁황혈사제(겁荒血邪帝...>
북궁기의 손안에 있는 서신들은 모두 중원 전역에서 날아든 피의 혈첩이었다.
툭!
그는 더 볼것도 없다는 듯 서신들을 탁자 위로 던지며 의자에 깊숙이 신형을 묻었다.
"으음! 이럴 리가 없거늘 뭔가 이상하게 흐르는군!"
그는 눈을 내리감으며 중얼거렸다.
"녠! 애초부터 호천단혈맹정도는 본벌의 적수가 아니었소! 육좌는 너무 그들을 강하게 의식했소!"
신비대야의 냉오한 말에도 북궁기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삼백 일 전만 해도 호천단혈맹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그런 그들이 그 때부터 쉽게 무너지고
있다! 아무런 저항도 않은 채...)
북궁기는 한 가지 의혹을 풀고자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나, 현실은 호천단혈맹의 확실한 몰살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푸드득!
북궁기는 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들자 상념을 깨며 소옥령이 건네주는 전서를 펴보았다.
"으음! 기어코 또 일을 저지르는군!"
그의 눈가로 언뜻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초급보!
본벌의 인물들만 죽이던 천마대불종이 무창 근교에 나타났음! 취라황금성의 소공녀인 천보공녀
(天寶公女) 금교교를 납치할 찰나 천마대불종에게 빼앗김... 본종은 수치스러운 일이나 패퇴했으
며, 이백 구의 녹령독종독인이 그의 일장에 한 줌 혈수로...
살황마독존(薩荒魔毒尊) 서(書)>
전서는 지옥십대혈작 중 서열 칠 위 독혈작 살황마독존이 보내온 것이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군!"
북궁기는 전서를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천하를 정리하려고 하는 이 때에 그가 나타나 방해하다니, 더욱이 천보공녀를 납치하려 했던 사
실이 알려지면 취라황금성과도 편치 않겠군!"
생각을 굴리던 그는 서신을 올려 두 사람을 직시했다.
"아무래도 두 분이 가주셔야겠소이다! 천마대불종을 죽이든가 끌어들이든가는 두 분의 재량에 맡
기겠소!"
그의 말에 천음서시 소옥령은 반짝 이채를 발하며 입을 열었다.
"천마대불종이란 자가 신비대공과 소녀가 합세해야 할만큼 막강한가요?"
약간은 자존심이 상한 듯한 날카로운 교음에 북궁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백 년 전 그의 적수는 없었소! 이백 년이 지난 그의 무공은 더욱 막강한 경지에 올라
있을 터..."
"알겠어요, 육좌!"
소옥령은 조용히 교구를 일으켰다.
"그자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보겠어요. 가볼까요, 신비대공?"
신비혈작 신비대야는 묵묵히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소옥령은 북궁기를 일별하고는 실내를 빠져나갔다.
스윽!
흡사, 안개가 햇살에 밀려나가듯 그들은 사라지고 장내는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우연인가? 중원의 일을 마무리지으려는 순간에 그가 나타나다니... 그가 이끄는 악마사원(惡魔寺
院)과 천불사(天佛寺)의 잠력은 천불세가와 맞먹는다고 알려진 거대한 세력..."
문득, 북궁기의 입가로 사악한 마소(魔笑)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흐흐흐! 천마대불종... 구좌와 십후에 죽을 정도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그가 생각보다 막강하다
면 끌어들여야 한다!"
슥!
그는 천천히 신형을 일으켜 실내를 걸었다.
"흐흐흐! 잘하면 뜻밖에 막강한 힘을 얻겠군! 지옥삼혈관문(地獄三血關門)이 기대되는군."
사악한 죽음의 미소가 장내를 암울하게 채운다.
그 사소(死笑)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 지옥삼혈관문(地獄三血關門)이란?
동정호(洞庭湖)...
중원오대호 중 하나인 중원최대의 호수(湖水)로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수면으로 형형색색의
가선(佳船)들이 노닐고 풍광에 취한 묵객들의 시송이 흐드러진다.
편월(片月)의 잔광(殘光)이 비치는 속에서, 아름다은 가호와 주위에 기화요초들이 만발한 채 어둠
에 싸인 화원이 드러났다.
제가 미리 알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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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천보공녀(天寶公女) 금교교(金嬌嬌)
호북(湖北)의 무창성(武昌省) 밖 야산(野山), 야산의 가운데를 뚫는 관도에는 인적이 없었다.
두두두두!
뽀얀 황진을 일으키며 관도를 질주해 오는 황금갑주를 걸친 위풍당당한 기세로 달리는 수십 필의
기마대 사이로 한 대의 마차가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지극히 화려무비한 화거(花車)였다. 사각엔 주먹만한 용안주가 길을 밝히고, 마차의 골결은 황금
이었고 사면을 가린 휘장은 한 뼘에 일천 냥이 나간다는 취라능금단이었으며, 촘촘히 박혀 사군
자를 그리고 있는 묵화(墨畵)는 수천 개의 흑진주였다. 가히 굴러가는 보물성(寶物城)이랄까?
두두두!
황금기마대는 사사천병마살진(四四天兵馬殺陣)을 형성하며 사위를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이곳만 넘으면 무창(武昌)... 크악!"
선두에서 달리던 인물이 돌연 처절한 비명성을 내지르며 말 위에서 고꾸라졌다.
"적이닷!"
"소공녀를 보호해랏!"
채채챙!
오십여 고수들은 일시에 창검를 뽑아들며 화거를 에워쌌다.
"크으으!"
"끄르륵!"
돌연 호위군사들은 목줄기를 움켜쥐며 괴로운 신음성을 내질렀다.
그것도 잠시,
푸시시시식!
비명도 소리도 없었다. 무엇인가 타는 듯한 매케한 내음과 함께 벌어진 끔찍한 참상, 오십 삼 인
의 호위군사들은 자취도 없이 녹아들며 종내에는 한줌의 혈수로 화하고 말았던 것이다.
독! 그것은 가공할 천잔부시혈독에 의한 참살의 현상이었다.
장내로 한 줄기 연기처럼 날아내리는 한 줄기 녹영(綠影)이 있다.
"흐흐흣... 천보공녀(天寶公女)... 금백만(金百萬)도 이 계집의 목숨 값이면 충분히 본 벌에 거금을
회사하겠지?"
녹포노인은 육십이 넘었을까한 녹광을 분출시키고 있는 그의 몰골은 도저히 인간의 상이 아니었
다.
녹발(綠髮)에 푸르스름한 피부에 눈동자마저도 녹광에 이글거리는 녹포인의 주위 일 장은 시커멓
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녹라독종지체(綠羅毒宗之體)에 이른 독문(毒門)의 고수만이 나타낼 수 있다
는 기현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흐흐흐... 계집애야! 냉큼 나와서 본좌를 맞거라!"
마차 안은 조용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파파팟!
폭발하며 비산하는 가공할 흑광이 있는데 그것은 마차의 휘장에 박혀 사군자를 이루고 있던 수천
개의 흑진주였다.
묵광천하(墨光天下)! 장내의 십여 장 이내는 휘황한 묵광의 그물로 뒤덮이고 말았다.
"녠! 계집! 이따위 장난감으로 살황마독강!"
푸스스스스!
녹포노인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두 손을 뻗자 전신에서 안개같이 녹무(綠霧)가 분출되고 사위
를 가득 메운 흑광은 자취도 없이 녹아 들어갔다.
파지직!
그와 동시에 화려한 마차는 두 쪽으로 갈라져 부숴지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한 소녀가 있었다.
아아! 일천 개의 보석이 빛을 발하듯 장내는 일순간 휘황한 칠채보기(七彩寶氣)에 휩싸인다.
소녀는 십오륙 세쯤 됐을까? 능라금비단으로 차려입은 궁장은 수천 개의 청보석을 박아 빛나고
형형색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새하얀 교수(嬌手)는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혀 있다.
산호와 취옥을 가미시킨 귀걸이는 파르르 떨리고 백여 개의 진주로 꿰인 새하얀 목걸이와 그것보
다 더욱 새하얀 목덜미의 우아한 곡선, 웃음을 머금은 소녀의 입술은 시리도록 붉다. 지금 그녀의
한 쌍 서늘한 봉목 위로 떠오른 것은 짙은 분노였다.
녹포괴인은 일순 눈이 부심을 느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
고는 간특한 흉소를 흘리며 소녀에게로 다가들었다.
"흐흐... 과연 천하제일부라는 취라황금성의 보물인 천보공녀로군!"
녹포괴인의 입가로 만족한 웃음이 흘렀다.
취라황금성(翠羅黃金城)!
이것이 진정 사실이란 말인가?
천하에 지하상계(地下商界)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안다.
밀무역(密貿易), 밀주매매(密酒賣買), 병기제조판매(兵器製造販賣), 인신매매(人身賣買), 도박장(賭
博場), 매춘행위(賣春行爲) 등과 마약거래(痲藥去來), 춘궁기의 곡식류(穀食類)의 매점매석(買占賣
惜) 행위,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 황금이 생기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황금충
(黃金蟲)들이었다.
천왕팔가 중 신비혈가의 죽음의 장삿꾼들조차 고개를 젖고 마는 진정한 지하상계(地下商界)의 대
부(代父)인 신화의 주인공이 바로 취라황금성이었던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자연스레 형성되어 온 지하상계... 그 지하상계의 모든 황금줄을 틀어쥐고 있는 천
하제일부 금천대황야(金天大皇爺) 금적산(金積山)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상귀(小商鬼)
가 있었다.
취라공주(翠羅公主) 천보공녀(天寶公女) 금교교(金嬌嬌)!
바로 그녀였다.
당년 십육 세의 소녀, 그녀의 별호가 말해주듯 이 소녀의 몸은 하늘의 보석, 값을 매길 수 없는
천보였으니 천보공녀 금교교를 얻음은 곧 천하를 취함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금, 그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기에 말이다.
천보공녀 금교교는 암습이 실패하자 의외인 듯 아미를 찌푸리다 곧 무표정한 신색으로 품 안에서
하나의 금갑을 꺼내 녹포괴인에게 던졌다.
"구룡천황주(九龍天皇珠)... 그것이면 너의 십대 후예까지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구룡천황주! 이것이..."
녹포괴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취라황금성에만 있다는 무가지보... 이것 한 알이면 중원의 일성 아니 천하의 십삼분지 일을 살
수 있거늘...)
그의 눈가로 언뜻 탐욕의 열광이 일렁였다.
"흐흐흐... 물론 이것만으로도 크지! 허나..."
스윽!
그의 눈은 천보공녀 금교교의 전신을 훑어가고 있었다.
"네년을 잡아먹으면 천하를 가질 수 있거늘, 비린내 하나 나지 않겠구나! 한 입에 삼켜도 말이
다."
천보공녀 금교교의 교구가 나뭇잎같이 흔들렸다.
"감히 네놈이!"
전신에 흐르는 오만함조차 황홀한 여인, 녹포괴인은 충열된 눈을 희번뜩이며 손을 비쾌하게 뻗었
다.
"흐흐... 어디 네년이 그 오만만큼이나 아름다운지 보겠다!"
찌이익!
"아악! 이 치한!"
소녀의 몸을 가리고 능라금의가 찢겨지고 금교교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나신을 움츠렸다.
백설을 연상시키듯 그녀의 피부는 실핏줄까지 투영될 정도로 맑았다.
"크흐흐... 본좌! 살황마독존이 본 중에서 최상품이로다! 네년만 있으면 본좌는 천하를 발아래 둘
수 있으니... 크하하핫!"
슷!
살황마독존은 솔개가 병아리를 덮치듯 날아올랐다.
헌데, 이 녹포괴인이 바로 저 지옥십대혈작 중의 독혈작 살황마황독존이란 말인가?
"비, 비켜!"
천보공녀 금교교는 공포로 옥용을 새파랗게 질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흐흐... 아프지 않게 귀여워해 주마! 너를 취하고 취라황금성의 힘을 얻어 환우천자로 군림할 것
이고 너는 대황후로서 본좌의 제일첩이 될 것이다!"
살황마독존은 대야심을 품고 있는 효웅이었던가? 단순히 혈각에 예속된 마인이기에는 그의 지금
행동은 어패가 있었다.
"으음!"
천보공녀 금교교는 수치심과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크흐흐... 꿀꺽!"
활짝 열려진 뽀얀 나신을 바라보는 살황마독존은 절로 탐욕의 침음성을 터뜨리며 황급히 자신의
옷자락을 찢듯이 벗어던졌다. 채 피어나지 않은 꽃이 이대로 무참히 낙화(落花)하려는가?
살황마독존의 손이 마악 여인의 봉곳한 젖가슴을 이지러뜨리려는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
다.
"크크녠... 꿈도 야무지군!"
한 소리 지극히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가 울리고 한 줄기 가공할 지강(指剛)이 살황마독존의 배심
으로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헉! 웬놈이 !"
살황마독존은 뜻밖의 공격에 흠칫하더니 이내 신형을 퉁겨올리며 가공할 독강(毒강)을 발출시켰
다.
콰자작!
"으음!"
"크녠... 제법이로군! 인간같지도 않은 괴물 같은 놈이!"
휘익!
신형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살황마독존의 앞으로 날아내리는 인영은 붉었다. 핏물에 담근
듯한 적포에 혈인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붉디붉은 적면, 거기에 수초처럼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적
발에 적미, 눈가로는 타는 듯한 금광이 뇌전같이 강렬하다.
"허억! 천마대불종!"
나타난 인물을 일별한 살황마독존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천마대불종(天魔大佛宗)!
일명(一名) 지옥의 학살자!
제삼의 역지옥풍이라 불리는 혈각의 마인(魔人)들에겐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 그 천마대불종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천마대불종으로 변신한 화우성은 스산한 마소를 터뜨리며 살황마독존에게 다가갔다.
(크! 감히 밥이 되려는 순간에 저런 괴물 같은 놈 때문에...!)
살황마독존의 눈가로 가공할 살광이 일었다.
"흐흐... 독종독인과 싸움을 붙여놓고 저 계집을..."
그의 입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며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은 빛살같이 뒤로 퉁겨져 나갔다.
"녠! 감히 본좌 앞에서 도망을 가려고 하다니..."
화우성은 조소를 떠올리며 살황마독존을 펼쳐갔다.
"끼이이!"
푸스스슷!
사위의 수림이 일시에 녹아내리며 가공할 독강이 화우성의 전신으로 강타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
가?
"크하핫... 귀여운 나의 수하들아! 저 인간같지 않은 노물을 녹여 버려랏!"
살황마독존은 득의의 광소를 흘리며 폭갈을 터뜨렸다.
하나, 둘, 일백... 사방을 메우며 짓쳐드는 이백 구의 녹인(綠人)들이 있었다.
"으음... 독문에서조차 제련이 금지된 녹령독종독인(綠靈毒宗毒人)!"
화우성은 안색을 굳히며 신형을 멈춰세웠다. 그의 눈가로는 신비로운 이채가 스쳤다.
(저것은 독종의 성역인 독왕세가에만 있다고 알려졌거늘 그렇다면 살황독존은 독종의 후예란 말
인가?)
화우성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녹령독종독인의 전신은 금강불괴요 한 구 만으로도 황하의 모든 물고기들을 독사시킬 수 있다는
전설의 독물로 흐느적거리며 화우성의 주위를 압박해 들고 있었다.
"흐흐흐... 독종강시만이 있다고 알려졌으나 본좌는 녹령독종독인을 제련하였다. 그것은 독종강시
일천구와 맞먹는 소중한 보물들이지... 그것들과 놀다가 죽어라... 노부는 저 계집과 운우의 낙을
즐길 터이니..."
살황마독존은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신형을 돌렸고 천보공녀 금교교는 여인의 신비로운 비소를
부그럽게 열어젖힌 채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흐흐... 귀여운 것!"
살황마독존은 일순 전신이 뿌듯해짐을 느끼며 욕화에 휩싸였으나 모든 일은 일간의 마음대로 되
지만은 않았다.
(후후...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모조리 한꺼번에 태워 주마!)
파츠츠!
화우성의 쭉 뻗은 쌍수에는 새파란 뇌광(雷光)이 일렁이고 있었다.
"끼이이!"
푸시시시!
방원 오십 장 이내는 이미 단 한 그루의 나무도, 풀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커멓게 그슬린 사이로 다가드는 녹령독종독인들, 시퍼런 귀화(鬼火)를 일렁이는 초점없는 동공,
전신을 온톤 녹광(綠光)으로 물들인 채 독혈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은 진정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끼끽!"
선두의 독인 하나가 기성을 질렀다.
휘르르르!
실로 엄청난 독강의 폭풍이 장내를 휩쓸었고 그것은 화우성의 전신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하자 쌍
수를 천공으로 끌어올리며 적면(赤面)을 씰룩였다.
"마물들..내세에서는 좋은 인간이 되거라! 천뢰마강(天雷魔剛)!"
콰콰콰쾅!
터져나오는 벽력성이 대지를 뒤흔들며 타오르는 수백 개의 불꽃의 낙뢰가 유성처럼 꽂혀내린다.
"끼아아!"
기름에 불이 붙듯 녹령독종독인들은 가공할 화염의 불꽃에 휩싸이며 꿈틀거렸다.
푸시식!
그것도 잠시 뿐 장내는 매케한 독향이 날렸고, 지면으로 한줌의 독수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후후... 나의 몸에는 나조차도 감당 못할 천뢰기(天雷氣)가 있다. 뇌정마찰의 뇌공으로도 감당치
못할 정도로 가공할 독은 내겐 무용지물이지... 아무리 가공할 절독이라도..."
화우성은 태워버린 녹령독종독인의 잔해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헉! 저럴 수가! 녹령독종독인 이백 구를 한꺼번에..."
살황마독존은 또다시 욕화가 사그러지고 말았다. 느긋하게 여체를 감상하고 막 시식을 하려던 찰
나에 그는 못 볼 광경을 목도한 것이었다.
"인, 인간도 아니다! 무신(武神)이다!"
중풍에 걸린 듯 와들와들 떨리는 그의 몰골은 가여울 정도였다.
(내가 상대할 수 없다.)
직감적으로 그의 뇌리를 스쳐가는 생각, 몸은 그의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같지도 않은 괴물,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그의 경공은 매우 빨라 평소에 그런 속력을 냈다면 그는 천하제일비(天下第一飛)가 되었을 정도
였다.
"녠!"
화우성은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머금으며 시선을 돌렸다.
천보공녀 금교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듯 빤히 화우성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자신의 나신
을 가릴 생각도 않고 있었다.
"험! 아까는 곧 죽을 듯이 반항하더니만 왜 옷을 안 입느냐?"
화우성은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며 힐책하였으나 금교교는 그의 말에 배시시 웃으며 짤랑한 옥음
을 날렸다.
"호호... 다 보았지요?"
"무얼?"
화우성은 의혹의 빛을 떠올리며 반문하다 이내 두 눈을 감고 말았다.
"나의 가슴과 모든 것을 다 보았지 않아요?"
벗은 나신을 드러낸 여인이 오히려 당당하지 않은가?
"어떻할 거예요?"
"규중 규수의 모든 것을 훔쳐보았으니 책임지실 거냐구요? 왜 말을 못하죠? 내가 보기 싫은가
요?"
도무지 정신이 없을 정도로 연속적으로 쏘아붙이는 금교교의 말에 화우성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끄응! 도대체 너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화우성은 한참만에야 정신을 추스리며 물음을 던졌다.
"흥! 젊은 사람이 노친네 흉내를 내봐야 소용없어요!"
금교교는 콧방귀를 흥흥 날리며 나풀나풀 걸어왔다.
출렁이는 젖가슴의 물결, 보일 듯 말 듯한 밀림지대, 새하얀 옥주는 햇살 속에 눈부시게 반광되었
다.
(도대체 이 여인은 요녀인가, 성녀인가?)
화우성은 일순간 이성의 가치 기준을 잃고 있다가 금교교의 말에 또다시 혼비백산하고야 말았다.
화우성의 코 앞까지 다가온 금교교는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소녀는 취라황금성의 소성주인 천보공녀 금교교예요."
"취라황금성? 천보공녀 금교교?"
화우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서는 취라황금성도 천보공녀 금교교의 이름도 알 수 없었고, 눈앞
의 이 소녀가 얼만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화우성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소녀는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만은 천하제일임을 자부할 수 있어요."
".....?"
"골동품의 진가를 가리는 감별능력이죠!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소녀는 그것을 한 번 보면 몇
년 전에 만들어졌는지를 감별할 수 있어요!"
"처녀가 백주대로에서 발가벗고 있는 것 만큼 흥미롭지는 못하군!"
화우성의 힐문에 금교교는 새하얗게 눈을 흘겼다.
"당신이 일평생 보실 것인데요, 뭘!"
"당신? 일평생 봐?"
화우성은 눈을 휘둥그래 뜨며 새삼스레 금교교의 눈을 주시했다.
"글쎄... 나같은 늙은이야 그대같은 절세미녀를 얻는 것은 좋지만 윽!"
말을 잇던 화우성은 일순 비명을 질렀다. 금교교의 매운 교수가 그의 허리를 무차별 꼬집었던 것
이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능청을 떨면 못써요!"
그녀의 짤랑한 옥음에 화우성은 일순 흠칫하며 안색을 굳혔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나의 원래 신분을?)
그의 생각은 짐작한 듯 금교교는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나풀거렸다.
"인간의 몸도 골동품과 마찬가지예요. 변하는 거죠... 세월(歲月)이 가면서 색깔(色)도 재질(才質)
도 변해요. 인간의 몸도 예외는 아니에요! 당신은 천마대불종으로 변신하고 있지만 그는 이백 년
전의 인물이에요."
화우성은 자신도 모르게 금교교의 말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신의 피부는 도저히 이백 살 이상이나 먹은 노물의 피부가 아니에요."
그녀는 화우성의 얼굴과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이 탄력성... 비록 주름을 만들었지만 싱싱한 생명마저 죽이지는 못했어요!"
"내가 젊은 사람이라고 치자! 단지 그것만으로 나를 택했단 말인가?"
금교교는 신비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무공은 녹령독종독인을 일수에 박살낼 정도로 막강해요! 오죽하면 지옥십대혈작 중의 독
혈작인 살황마독존이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도망갔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
에요. 나쁜 놈들만 골라 죽이는 것을 보면 알죠!"
"허... 이런!"
화우성은 조리정연한 금교교의 말에 할 말을 잃고 그윽한 눈길로 올려다 보았다.
"사실 아버님은 소녀를 시집보내려 해요. 그렇지만 신산귀상제(神算鬼商帝) 악비(岳飛)! 그 자는
싫어요."
"신산귀상제 악비라..."
화우성은 남의 이야기를 듣듯 무관심하게 중얼거렸다.
"악비는 취라황금성의 총감찰사(總監察使)예요. 서른 살밖에 안된 젊은 사람이지만 능력은 아버님
도 감탄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라면 괜찮을 듯도 싶은데?"
금교교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흥! 그런 돈귀신과 살다간 내가 돈독에 올라 죽을 거예요! 그는 돈밖에 모르는 냉혈한(冷血漢)이
에요. 나는 때려죽여도 그런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어요!"
".....!"
"소녀는 아버님께 일 년의 기한을 얻었어요. 악비보다 뛰어난 인물을 신랑감으로 데려오면 그와
의 결혼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구요."
금교교는 간절한 눈길로 화우성의 얼굴을 주시했다.
"당신은 소녀의 모든 것을 보셨어요!"
"그것은 억지요.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었소?"
그러나, 금교교는 그런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거두어 주시지 않으면 나는 시집도 갈 수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말 끝에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당신이 계속 그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어요."
"생각?"
"그래요! 천마대불종은 이십도 안 된 약관의 미청년이라고 소문낼 거예요. 뿐인 줄 아세요?"
화우성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금교교를 바라보았다.
"취라황금성의 모든 금력을 동원해서라도 고수들을 초빙해 당신을 잡아다 소녀의 방에 꽁꽁 묶어
둘 거예요!"
금교교는 확신하듯 말 끝을 맺으며 화우성을 흘겨보았다.
(이런 제기랄, 오늘은 뭔가 홀려도 단단히 홀렸군!)
화우성은 내심 몹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는 눈 앞의 이 당돌한 여인이 조금도 밉지가 않았으니
뭔가 이제껏 만났던 여인들과는 남다른 싱싱한 매력이 담겨 있는 듯도 했다.
(일단은 달래는 수밖에! 빨리 동정호로 가서 단리 누님과 의논할 일도 있고 하니...)
화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금교교의 나신을 가려주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낭자의 말대로 할 터이니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의 말에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당신과 함께 아버님께 가겠어요."
그녀의 교태섞인 앙탈해 화우성은 일순 안색을 싸늘하게 굳혔다.
"낭자가 진정 나를 낭군으로 선택했다면 나의 말을 따르시오! 싫다면 나는 떠나겠소!"
그의 차가운 일언에 일순 금교교의 옥용이 핼쓱하게 일변했다.
"아, 알았어요! 그대신 꼭 오셔야 해요? 취라황금성은 대파산(大巴山)의 황금곡(黃金谷)에 있어
요!"
"녠! 알겠소. 꼭 가리다!"
화우성은 금방 울 듯한 금교교의 교구를 안아들며 실소를 머금었다.
"일단은 무창(武昌)까지 데려다 주겠소."
"알았어요! 거기엔 본성의 지부가 있으니까요, 아참!"
말을 잇던 금교교는 생각난 듯 봉목을 치뜨며 화우성의 얼굴을 문질렀다.
"이 징그러운 가면을 벗고 당신의 참모습을 보여 주세요! 다음에 만날 때도 이런 모습은 아니시
겠죠?"
"후후... 알겠소!"
스스스!
일순, 화우성의 얼굴이 꿈틀거리며 변하기 시작하고 적발은 윤기 흐르는 흑발로 되돌아오고 금광
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타나는 유현하면서도 패기가 넘치는 붕안, 본색을 찾은 미안은 밝은 햇살
아래 확연히 돋보인다.
"아!"
일순, 금교교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정말 멋있는 남자예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화우성은 놀란 토끼눈같이 휘둥그래 떠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금교교의 봉목을 바라보며 싱
그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당신은 역시 먼저대로 흉측한 얼굴로 다녀요."
"으음?"
"이런 멋진 얼굴을 보면 어떤 여자라도 당신을 한 번 보면 상사병에 걸려 미칠 테니까요."
"원 실없는 소린..."
화우성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신형을 떠올렸다.
휘익!
"당신 바람둥이죠?"
"하하하!"
번갯불같이 사라져가는 남녀 뒤로 꼬치꼬치 캐묻는 특유의 암코양이 소리와 호탕한 대소가 장내
를 울렸다.
우연히 만난 남녀의 운명은?
칙칙한 암흑 속에 한줄기 유등한 귀기스런 혈루(血淚)가 흐르고 있는 밀실 안에는 삼인(三人)이
정좌해 있었다.
이남일녀로 그들은 서찰이 수북이 쌓여 있는 핏빛 탁자를 사이에 둔 채 말이 없었다.
백의노인의 머리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 했고 간간히 번득이는 안광 속으로 호수처럼 잔잔
한 심유함이 차갑게 일렁이며 회색(灰色)의 동공은 무엇인지 모를 곤혹감에 젖어 있었다.
뇌천작(腦天爵) 쌍뇌사혼자(雙腦邪魂子) 북궁기(北宮奇)!
정도의 파멸계책인 호천멸살천일지계를 만든 악마(惡魔)의 뇌가 그로 지옥십대혈작 중 서열 육
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도사상 초유의 천뇌를 지닌 인물이었다.
사도(邪道)의 사뇌양성소(邪腦養成所)라 일컬어지는 사뇌천혈각(邪雷天血閣)의 각주(閣主)이며 쌍
뇌에 담겨져 있는 삼만 육천 종의 귀계(鬼計) 혈책(血策) 중 일절만 쓴다 해도 천하를 혈세할 수
있다는 공포의 혈뇌를 소유하고 있는 혈각의 총군사이기도 하다.
구 척은 됨직한 장대한 체구를 지닌 그의 얼굴은 복면에 가려져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핏빛으로 물든 혈광(血光)을 폭출시키는 그의 눈은 섬뜩할 정도로 차갑다.
혈의복면인의 눈에 투영되고 있는 빛은 심장마저도 얼려버릴 듯한 한(恨)의 기운과 눈앞에 보이
는 모든 것을 찢어죽일 듯한 피의 환상만이 일렁이는 괴인이었다.
신비혈작(神秘血爵) 신비대야(神秘大爺)!
지옥십대혈작에 서열은 비록 구 위이나 천마대작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알려진 신비으로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그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는다.
천음후 천음서시 소옥령!
자색의 궁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여인은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으로 가슴엔 한 개의 슬(瑟)이 소
중하게 안겨 있다.
전설의 음문(音門)인 천음문(天音門)의 마지막 후예인 음공의 최강인으로 마라천황술로 펼치는 천
붕멸살음폭강은 천하최강의 음강이었다.
조그만 동산 하나쯤은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무적음공의 소유자 천음서시 소옥령은 신비대
야 만큼이나 신비로운 여인이었다.
이들 삼인(三人)들 중 일인(一人)만으로 천하를 떨어울릴 그들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이윽고 신비대야는 표정이 사그러진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장내의 침묵을 깨뜨렸다.
"으음! 이 상태로라면 이미 호천단혈맹은 붕괴되었군!"
"동감이에요! 거기에 나머지 칠대혈작이 본벌의 반대세력들을 척멸하고 있으니 이제 중원은 본벌
의 천하가 되었어요!"
천음후 천음서시 소옥령은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천하군림(天下君臨)의 시작이오... 변황과 막북, 남해, 동해... 우리들의 적은 먼곳에
있는 그들이오!"
"아니야!"
문득, 뇌천작 쌍뇌사혼자 북궁기가 머리를 저었는데 심유한 동공에는 곤혹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
다.
"이상해. 이렇게 쉽게 무너질 호천단혈맹이 아닌데..."
그는 큰 머리를 흔들었다.
"더우기 그들의 수뇌진(首腦陣)이 잡혔다는 말은 없었다. 혜천성녀 단리운혜와 철사자 담운룡...
그들은 최후 사천공격 중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 다른 사람들은 승리에 도취해 간과한 사실을 북궁기는 날카롭게 지적해내고 있었다.
"정작 싸움은 이제부터라 생각했거늘 나는 그들을 궤멸시키는 데 일천 일의 시한을 잡았다!"
천정을 올려다보는 그의 동공으로 수많은 상념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호천멸살지계를 펼친 지 칠백 일밖에 지나지 않았거늘..."
그런 그를 바라보며 천음서시 소옥령은 별걱정 다한다는 투로 가볍게 입술을 열었다.
"육좌께선 호천단혈맹을 너무 강하게 보았어요."
그녀는 손을 들어 입술을 가리며 나직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런 허수아비들을 소녀의 일천천음학살무회군(一千天音虐殺舞姬軍)과 신비대야의 일만
신비혈야군단을 투입하려 하셨으니!"
그녀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연신 까르르 웃는데 가히 지옥십대혈작이라는 공포의 대명사를 떠올
릴 수 없는 순진무구한 해맑은 웃음이었다.
하나 북궁기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을 뿐 일언의 대꾸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은
탁자 위에 놓여진 몇 개의 서찰을 집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날아든 전서였다.
<호북평정!
본벌 거부하던 호북무림의 대혈벌정무맹(大血閥正武盟) 박살냈음... 포로 팔백육십... 본 천살각 피
해는 사상자 팔십오, 마마혈전강시 일백구 전원무사...
천살도객(天殺屠客...>
<크녠! 육제! 본좌는 일천사사천혈강시로 신강(新疆)을 완전히 장악했다. 일천을 죽이고 삼천을
포로로 잡았다. 십일(十日) 후 돌아가겠다.
겁황혈사제(겁荒血邪帝...>
북궁기의 손안에 있는 서신들은 모두 중원 전역에서 날아든 피의 혈첩이었다.
툭!
그는 더 볼것도 없다는 듯 서신들을 탁자 위로 던지며 의자에 깊숙이 신형을 묻었다.
"으음! 이럴 리가 없거늘 뭔가 이상하게 흐르는군!"
그는 눈을 내리감으며 중얼거렸다.
"녠! 애초부터 호천단혈맹정도는 본벌의 적수가 아니었소! 육좌는 너무 그들을 강하게 의식했소!"
신비대야의 냉오한 말에도 북궁기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삼백 일 전만 해도 호천단혈맹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그런 그들이 그 때부터 쉽게 무너지고
있다! 아무런 저항도 않은 채...)
북궁기는 한 가지 의혹을 풀고자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나, 현실은 호천단혈맹의 확실한 몰살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푸드득!
북궁기는 한 마리의 전서구가 날아들자 상념을 깨며 소옥령이 건네주는 전서를 펴보았다.
"으음! 기어코 또 일을 저지르는군!"
그의 눈가로 언뜻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초급보!
본벌의 인물들만 죽이던 천마대불종이 무창 근교에 나타났음! 취라황금성의 소공녀인 천보공녀
(天寶公女) 금교교를 납치할 찰나 천마대불종에게 빼앗김... 본종은 수치스러운 일이나 패퇴했으
며, 이백 구의 녹령독종독인이 그의 일장에 한 줌 혈수로...
살황마독존(薩荒魔毒尊) 서(書)>
전서는 지옥십대혈작 중 서열 칠 위 독혈작 살황마독존이 보내온 것이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군!"
북궁기는 전서를 내려놓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천하를 정리하려고 하는 이 때에 그가 나타나 방해하다니, 더욱이 천보공녀를 납치하려 했던 사
실이 알려지면 취라황금성과도 편치 않겠군!"
생각을 굴리던 그는 서신을 올려 두 사람을 직시했다.
"아무래도 두 분이 가주셔야겠소이다! 천마대불종을 죽이든가 끌어들이든가는 두 분의 재량에 맡
기겠소!"
그의 말에 천음서시 소옥령은 반짝 이채를 발하며 입을 열었다.
"천마대불종이란 자가 신비대공과 소녀가 합세해야 할만큼 막강한가요?"
약간은 자존심이 상한 듯한 날카로운 교음에 북궁기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백 년 전 그의 적수는 없었소! 이백 년이 지난 그의 무공은 더욱 막강한 경지에 올라
있을 터..."
"알겠어요, 육좌!"
소옥령은 조용히 교구를 일으켰다.
"그자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보겠어요. 가볼까요, 신비대공?"
신비혈작 신비대야는 묵묵히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소옥령은 북궁기를 일별하고는 실내를 빠져나갔다.
스윽!
흡사, 안개가 햇살에 밀려나가듯 그들은 사라지고 장내는 깊은 정적이 감돌았다.
"우연인가? 중원의 일을 마무리지으려는 순간에 그가 나타나다니... 그가 이끄는 악마사원(惡魔寺
院)과 천불사(天佛寺)의 잠력은 천불세가와 맞먹는다고 알려진 거대한 세력..."
문득, 북궁기의 입가로 사악한 마소(魔笑)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흐흐흐! 천마대불종... 구좌와 십후에 죽을 정도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그가 생각보다 막강하다
면 끌어들여야 한다!"
슥!
그는 천천히 신형을 일으켜 실내를 걸었다.
"흐흐흐! 잘하면 뜻밖에 막강한 힘을 얻겠군! 지옥삼혈관문(地獄三血關門)이 기대되는군."
사악한 죽음의 미소가 장내를 암울하게 채운다.
그 사소(死笑)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 지옥삼혈관문(地獄三血關門)이란?
동정호(洞庭湖)...
중원오대호 중 하나인 중원최대의 호수(湖水)로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수면으로 형형색색의
가선(佳船)들이 노닐고 풍광에 취한 묵객들의 시송이 흐드러진다.
편월(片月)의 잔광(殘光)이 비치는 속에서, 아름다은 가호와 주위에 기화요초들이 만발한 채 어둠
에 싸인 화원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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