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는 즐거움 완결편
48
필립과 쟈크린느가 잠자리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유치한 일이란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파티의 매력은 그들의 관계를 추정하는 데 있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평소, 그런 류의 일이라면 둘도 없는 친구인 내게 전혀 연막을 치지 않았던 쟈크린느도, 친구인 마르크에게 오히려 공모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던 필립도 이번에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물증이 없어 모두가 안달을 했다.
무성한 나무의 가지가 드리워진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작은 증거라도 잡아낼 요량으로 아무 것도 아닌 일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후텁지근한 칠월의 밤 하늘 아래서, 우리는 엄청나게 마셔댔다. 즐거운 대화가 좋은 위장술이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은밀한 심문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마주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언동은 흠뻑 취했을 때, 친구 사이라면 충분히 허용될 수 있는 농담 수준을 넘어서지 않고 있었다.
나머지 두 커플은, 그들 몰래, 눈길을 서로 주고받으며 당혹감을 표시했다. 만약 잠을 같이 잔게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언동에서 그 흔적이 드러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들 실망했고, 후식이 나올 때쯤 해서는 감시조차 약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아! 오늘 저녁에는 틀렸다. 훗날을 기약해야지.
밤이 되어도 가시지 않고 여전히 납덩이처럼 내리누르는 더위 속에서 우리들은 아이스크림을 파먹으며 흐느적거렸다.
내가 마르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저 위에 가서 잘까?"
저 위라는 것은 차로 한 사십오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전원 별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안돼. 내일 아침 첫비행기를 타야해."
그가 한숨지며 말했다.
별장에서 공항에 가게 되면, 여기서 가는 것보다 세배나 시간이 더 걸린다. 마르크는 꼭두새벽부터 설칠 걸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별장에서 시원하게 잠자리를 하는 일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쟈크린느, 넌?"
집들이 별로 들어서지 않은 별장지대에서 쟈크린느는 우리의 유일한 이웃이었다.
"안됐다, 얘! 나도,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해. 그냥 아파트에서 자야겠어. 그리고 오늘 저녁에도 좀 일찍 가봐야겠어,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였다! 쟈크린느는 열한시가 되어서야 일과를 시작하지 않던가! 그런데 저렇게 서두르는 게 심상치가 않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쟈크린느의 귀가선언에 귀를 쫑긋 세웠다.
길에 나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 헤어졌다. 쟈크린느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일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항상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난봉꾼 필립이 일어섰다. 이거야말로 정말 무언가가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십오분쯤 뒤에 가는게 어떨까? 그들도 숨돌릴 여유를 가져야하지 않겠어? 자 마지막으로 한 잔씩 듭시다. 우리의 예측이 빗나간다 하더라도 등나무 향기 아래 밤길을 다니는 것은 어쨌든 즐거운 일이야. 그리고, 또 비행기 운운하며 일을 망치려거든 자긴 따라오지 마!"
쟈크린느의 집 앞에 두 대의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끼어 타고 온 차의 시동을 껐다. 호기심이 일어 가만히 차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밤에. 이런 장소라면 난 잔디 위에서 섹스를 하고 싶은데."
호기심에 들뜬 우리들은 수족 인디언들처럼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소리가 날까봐 차문도 닫지 않은 채. 그러고 나서 우리 네 명은, 신발을 손에 들고 희미한 별빛 아래, 더듬더듬, 소리없이, 자갈길을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간간이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로 목표물을 인지하며 다가갈수록, 예상을 적중시킨 행복감에서 더 크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힘들여 참아야 했다.
정원에서는 현관의 외등이 정사 현장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하여 나무 뒤에 막 몸을 숨기는 순간, 잔디밭에 펴진 공기튜브 매트리스 위에서는 성희의 절정 부분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소리를 죽이고 숨어 있는 것은 형벌에 가까웠다. 다행히도 정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대단원의 막이 내리자마자,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덤불 숲 뒤에서 튀어나갔다. 박수를 치고, 브라보를 외치고, 앙콜을 연발하면서.
"오! 나쁜 놈들! 이 나쁜 놈들!"
필립이 땀에 뒤범벅이 된 몸으로 풀 위를 구르며 포복절도했다.
당혹감을 진정시키지 못해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든 쟈크린느는 몸 가릴 것을 찾아 헤맸다.
"말도 안돼! 이런 벌레만도 못한 놈들을 봤나!"
그들과 함께 잔디 위에 둘러앉아 우리는 그들의 연기를 심각하게 논평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필립, 넌 우리를 잘 알잖아. 우리를 믿어줘. 니 마누라한테는 아무 말도 않을 테니."
49
거의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이유를 알아내기 어려운 은총(恩寵)의 시절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원인 분석이 불가능하고, 빠져들면 영혼마저 질식해버리는 실총(失寵)의 시절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 사람들은, 보통, 만족감에 휩싸여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기만 할 뿐, 그렇게 된 경위는 전혀 따지려 하지 않는다. 어쨌든, 원인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후자의 경우에는 엄청나게 가혹한 시련이 따른다. 실총의 순간들이 분비해 내는 고통의 밑바닥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당신을 절망으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목발을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인위적이라 부자연스러울 지는 몰라도, 장애물을 뛰어넘고, 수렁을 건너뛰려면 목발이 필요하다. 절뚝거리는 모습이 볼썽사납긴 하겠지만, 그래도 목발이 있어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련의 길을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가 있다.
이런 내 생각에 당신들은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아주 잘 듣는 처방, 다시 말해 유효한 목발이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각자, 자기만의 비결이 있을 것이다. 단지 나는 내 비결만 이야기할 뿐, 그것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아니 전혀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우선 욕실에 들어간다. 수면제 나부랭이를 입에 털어 넣으려고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집에는 약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아스피린조차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내가 약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욕실에 들어가는 것은 완벽하게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다.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총동원 된다. 샴푸, 바디오일, 무스, 크림, 향유, 향수, 목욕수건, 가위, 쪽집게, 빗, 때미는 경석....
수증기에 휩싸인 작은 공간에서 반 시간 정도 즐겁게 목욕과 마사지를 하고나면 몸이 풀린다. 세면대와 목욕통 가장자리에 낀
때 찌꺼기를 보면 유쾌해진다. 마치 내 몸 속에서 나쁜 기질의 체액이 흘러나와 그렇게 앙금을 이루고 번들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친 김이다.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옷장에서 가장 야한 옷들만 꺼내 입어본다. 그것도 몇 번씩. 어느 것이 더 매력적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결정은 어렵지 않다. 발광 상태에서 홀려 사두었던, 속이 완전히 다 비치는 옷, 아랫 부분은 가랑이가 벌어지는 곳까지 파져 팬티를 입지 않으면 성기가 노출될 정도고, 윗 부분은 배꼽까지 파져 유방이 훤히 드러나는, 감히 밖에 입고 나가지는 못하고, 거울 앞에서만 입어보고 황홀해하던 옷이 항상 선택된다. 아마 당신들도 절망의 시절을 대비해 그런 옷들을 준비해 두었을 거다. 정말 잘 사두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이렇게 금세 얼굴이 피어나는 것을.
최후의 승리자는 항상 그 옷이다.
하지만 매번 그 옷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고를라치면 상황이 미묘해진다. 왜냐하면 환상에 사로잡혀 옷을 사긴 했지만 액세서리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이라면 이런 경우 면밀하지 못함을 자책하고 스스로의 뺨을 때리겠는가? 뭐라구? 끝까지 꿈 속을 헤매고 다닐 자신이 없다구? 그러면 서랍을 열어보거나, 경대 위의 보석함을 쏟아보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이 귀걸이 얼마나 멋진가! 어떻게 이런 것을 망각할 수가...? 그리고 이 핸드백! 만족한 당신은 미소를 띠며 핸드백 속에 소지품들을 주워 담을 것이다. 신용카드, 수표책, 크리넥스, 향수병, 담배, 라이타, 열쇠꾸러미... 핸드백이 뚱뚱해진다고 아우성을 치면, 찰칵 소리가 나게 백을 닫고 고리로 주둥이를 채운다.
자 이제는? 우리의 치료는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우선, 나는 차에 올라 잠시 생각에 잠긴다.
며칠 전부터, 식욕이 사라져버렸다. 식욕을 돋구기
위해서는 대단한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고급 레스토랑을 택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은 피한다. 계획의 일환이다.
무얼 먹을 건지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몬다. 맛있는 소스에 야채가 곁들여진 생선요리를 떠올리며 침을 삼킨다.
이 레스토랑은 혼자 와도 절대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 손님일 경우에는. 난 테이블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고, 내가 정한 테이블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여기 온 것은 저녁을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나의 환상을 반향시켜 다른 사람들의 머리에 전달되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무심코 자리를 잡는 사이 대화를 나누던 다른 고객들의 볼륨이 약간 낮아진다. 남자들은 느닷없이 등장한 야한 실루엣의 여자를 몰래 훔쳐보며 넋을 잃는다. 주위에는 술이 거나한 부르주아 사업가, 첨단 패션의 의상을 걸치고 우아함을 뽐내는 여자들 뿐이다. 은식기와 크리스탈 잔을 익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물을 만난 고기처럼 편안하게 식도락을 하고 있다. 나의 출현이 그들의 호기심을 끈다. 바로 내 앞의 테이블이 치워지자 더더욱.
갸르송이 주문을 받아가고, 내가 위스키로 목을 축이고 있는 동안, 모든 테이블의 손님들이 나의 틈입에 대해 소곤거린다. 내 거동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예절을 알고, 부인의 눈치를 읽을 줄 아는 남자들은 그 정도에서 그만 그친다. 혼자 온 남자들은 게임을 계속하며 기회를 엿본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을 남자는 거의 없다.
나의 출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재잘거림은 첫번째 요리가 나올 때쯤 해서 다시 시작된다. 틈입한 여자에게 계속 신경을 쓰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일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그들을 도발한다. 나의 도발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며 식사를 즐긴다. 이런 유치한 짓거리도 언젠가는 그만두게 되겠지?
후식이 나온다. 세
명의 남자가 여전히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내게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내가 시계를 본다. 일분쯤 지나 다시 시계를 본다. 초조해 하는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 시계보기를 계속 반복한다.
남자들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보같은 그들의 관심이 수그러든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그들은 이제 날 저주할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들이 마침내 자리를 뜨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들이 패배를 인정했다. 이제 내가 칼을 뽑아들 차례다. 그들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지배인을 불러 큰소리로 인근 호텔에 방을 하나 잡아 달라고 부탁한다. 먼저 나간 바보들은 식당 앞에서 시가를 피우며 잡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삼십분쯤 기다리게 해야지. 그것이 나의 평결이다. 이렇게 성공을 거둔 날 밤, 무엇하러 우리의 마음을 그다지도 읽어내지 못하는 이상한 짐승들 중 하나를 택해 시달림을 당할 것인가?
내가 차에 오르자 메츠 행 국도, 7킬로쯤에 자리잡은 북 호텔에 방을 잡아두었다고 지배인이 말했다 남자들은 유혹을 포기해 버린다. 그들이 사라진 주차장에는 담배꽁초만 수북했다.
기쁨에 들뜬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마지막 담배를 피워문다. 방문은 걸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난 늘 모험의 기회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필립과 쟈크린느가 잠자리를 함께 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이 유치한 일이란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파티의 매력은 그들의 관계를 추정하는 데 있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평소, 그런 류의 일이라면 둘도 없는 친구인 내게 전혀 연막을 치지 않았던 쟈크린느도, 친구인 마르크에게 오히려 공모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던 필립도 이번에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수상한 낌새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물증이 없어 모두가 안달을 했다.
무성한 나무의 가지가 드리워진 테라스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작은 증거라도 잡아낼 요량으로 아무 것도 아닌 일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후텁지근한 칠월의 밤 하늘 아래서, 우리는 엄청나게 마셔댔다. 즐거운 대화가 좋은 위장술이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은밀한 심문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마주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언동은 흠뻑 취했을 때, 친구 사이라면 충분히 허용될 수 있는 농담 수준을 넘어서지 않고 있었다.
나머지 두 커플은, 그들 몰래, 눈길을 서로 주고받으며 당혹감을 표시했다. 만약 잠을 같이 잔게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언동에서 그 흔적이 드러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들 실망했고, 후식이 나올 때쯤 해서는 감시조차 약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아! 오늘 저녁에는 틀렸다. 훗날을 기약해야지.
밤이 되어도 가시지 않고 여전히 납덩이처럼 내리누르는 더위 속에서 우리들은 아이스크림을 파먹으며 흐느적거렸다.
내가 마르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저 위에 가서 잘까?"
저 위라는 것은 차로 한 사십오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우리의 전원 별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안돼. 내일 아침 첫비행기를 타야해."
그가 한숨지며 말했다.
별장에서 공항에 가게 되면, 여기서 가는 것보다 세배나 시간이 더 걸린다. 마르크는 꼭두새벽부터 설칠 걸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별장에서 시원하게 잠자리를 하는 일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쟈크린느, 넌?"
집들이 별로 들어서지 않은 별장지대에서 쟈크린느는 우리의 유일한 이웃이었다.
"안됐다, 얘! 나도,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해. 그냥 아파트에서 자야겠어. 그리고 오늘 저녁에도 좀 일찍 가봐야겠어,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였다! 쟈크린느는 열한시가 되어서야 일과를 시작하지 않던가! 그런데 저렇게 서두르는 게 심상치가 않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쟈크린느의 귀가선언에 귀를 쫑긋 세웠다.
길에 나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 헤어졌다. 쟈크린느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일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항상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난봉꾼 필립이 일어섰다. 이거야말로 정말 무언가가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십오분쯤 뒤에 가는게 어떨까? 그들도 숨돌릴 여유를 가져야하지 않겠어? 자 마지막으로 한 잔씩 듭시다. 우리의 예측이 빗나간다 하더라도 등나무 향기 아래 밤길을 다니는 것은 어쨌든 즐거운 일이야. 그리고, 또 비행기 운운하며 일을 망치려거든 자긴 따라오지 마!"
쟈크린느의 집 앞에 두 대의 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끼어 타고 온 차의 시동을 껐다. 호기심이 일어 가만히 차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밤에. 이런 장소라면 난 잔디 위에서 섹스를 하고 싶은데."
호기심에 들뜬 우리들은 수족 인디언들처럼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소리가 날까봐 차문도 닫지 않은 채. 그러고 나서 우리 네 명은, 신발을 손에 들고 희미한 별빛 아래, 더듬더듬, 소리없이, 자갈길을 뒤뚱뒤뚱 걷기 시작했다. 간간이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로 목표물을 인지하며 다가갈수록, 예상을 적중시킨 행복감에서 더 크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힘들여 참아야 했다.
정원에서는 현관의 외등이 정사 현장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하여 나무 뒤에 막 몸을 숨기는 순간, 잔디밭에 펴진 공기튜브 매트리스 위에서는 성희의 절정 부분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소리를 죽이고 숨어 있는 것은 형벌에 가까웠다. 다행히도 정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대단원의 막이 내리자마자,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덤불 숲 뒤에서 튀어나갔다. 박수를 치고, 브라보를 외치고, 앙콜을 연발하면서.
"오! 나쁜 놈들! 이 나쁜 놈들!"
필립이 땀에 뒤범벅이 된 몸으로 풀 위를 구르며 포복절도했다.
당혹감을 진정시키지 못해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든 쟈크린느는 몸 가릴 것을 찾아 헤맸다.
"말도 안돼! 이런 벌레만도 못한 놈들을 봤나!"
그들과 함께 잔디 위에 둘러앉아 우리는 그들의 연기를 심각하게 논평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필립, 넌 우리를 잘 알잖아. 우리를 믿어줘. 니 마누라한테는 아무 말도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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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이유를 알아내기 어려운 은총(恩寵)의 시절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원인 분석이 불가능하고, 빠져들면 영혼마저 질식해버리는 실총(失寵)의 시절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 사람들은, 보통, 만족감에 휩싸여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기만 할 뿐, 그렇게 된 경위는 전혀 따지려 하지 않는다. 어쨌든, 원인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후자의 경우에는 엄청나게 가혹한 시련이 따른다. 실총의 순간들이 분비해 내는 고통의 밑바닥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당신을 절망으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목발을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인위적이라 부자연스러울 지는 몰라도, 장애물을 뛰어넘고, 수렁을 건너뛰려면 목발이 필요하다. 절뚝거리는 모습이 볼썽사납긴 하겠지만, 그래도 목발이 있어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련의 길을 그럭저럭 헤쳐나갈 수가 있다.
이런 내 생각에 당신들은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아주 잘 듣는 처방, 다시 말해 유효한 목발이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각자, 자기만의 비결이 있을 것이다. 단지 나는 내 비결만 이야기할 뿐, 그것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아니 전혀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우선 욕실에 들어간다. 수면제 나부랭이를 입에 털어 넣으려고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집에는 약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아스피린조차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내가 약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욕실에 들어가는 것은 완벽하게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다.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총동원 된다. 샴푸, 바디오일, 무스, 크림, 향유, 향수, 목욕수건, 가위, 쪽집게, 빗, 때미는 경석....
수증기에 휩싸인 작은 공간에서 반 시간 정도 즐겁게 목욕과 마사지를 하고나면 몸이 풀린다. 세면대와 목욕통 가장자리에 낀
때 찌꺼기를 보면 유쾌해진다. 마치 내 몸 속에서 나쁜 기질의 체액이 흘러나와 그렇게 앙금을 이루고 번들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친 김이다.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옷장에서 가장 야한 옷들만 꺼내 입어본다. 그것도 몇 번씩. 어느 것이 더 매력적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결정은 어렵지 않다. 발광 상태에서 홀려 사두었던, 속이 완전히 다 비치는 옷, 아랫 부분은 가랑이가 벌어지는 곳까지 파져 팬티를 입지 않으면 성기가 노출될 정도고, 윗 부분은 배꼽까지 파져 유방이 훤히 드러나는, 감히 밖에 입고 나가지는 못하고, 거울 앞에서만 입어보고 황홀해하던 옷이 항상 선택된다. 아마 당신들도 절망의 시절을 대비해 그런 옷들을 준비해 두었을 거다. 정말 잘 사두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 이렇게 금세 얼굴이 피어나는 것을.
최후의 승리자는 항상 그 옷이다.
하지만 매번 그 옷에 어울리는 액세서리를 고를라치면 상황이 미묘해진다. 왜냐하면 환상에 사로잡혀 옷을 사긴 했지만 액세서리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이라면 이런 경우 면밀하지 못함을 자책하고 스스로의 뺨을 때리겠는가? 뭐라구? 끝까지 꿈 속을 헤매고 다닐 자신이 없다구? 그러면 서랍을 열어보거나, 경대 위의 보석함을 쏟아보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이 귀걸이 얼마나 멋진가! 어떻게 이런 것을 망각할 수가...? 그리고 이 핸드백! 만족한 당신은 미소를 띠며 핸드백 속에 소지품들을 주워 담을 것이다. 신용카드, 수표책, 크리넥스, 향수병, 담배, 라이타, 열쇠꾸러미... 핸드백이 뚱뚱해진다고 아우성을 치면, 찰칵 소리가 나게 백을 닫고 고리로 주둥이를 채운다.
자 이제는? 우리의 치료는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우선, 나는 차에 올라 잠시 생각에 잠긴다.
며칠 전부터, 식욕이 사라져버렸다. 식욕을 돋구기
위해서는 대단한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고급 레스토랑을 택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은 피한다. 계획의 일환이다.
무얼 먹을 건지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몬다. 맛있는 소스에 야채가 곁들여진 생선요리를 떠올리며 침을 삼킨다.
이 레스토랑은 혼자 와도 절대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 손님일 경우에는. 난 테이블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고, 내가 정한 테이블은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여기 온 것은 저녁을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나의 환상을 반향시켜 다른 사람들의 머리에 전달되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무심코 자리를 잡는 사이 대화를 나누던 다른 고객들의 볼륨이 약간 낮아진다. 남자들은 느닷없이 등장한 야한 실루엣의 여자를 몰래 훔쳐보며 넋을 잃는다. 주위에는 술이 거나한 부르주아 사업가, 첨단 패션의 의상을 걸치고 우아함을 뽐내는 여자들 뿐이다. 은식기와 크리스탈 잔을 익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물을 만난 고기처럼 편안하게 식도락을 하고 있다. 나의 출현이 그들의 호기심을 끈다. 바로 내 앞의 테이블이 치워지자 더더욱.
갸르송이 주문을 받아가고, 내가 위스키로 목을 축이고 있는 동안, 모든 테이블의 손님들이 나의 틈입에 대해 소곤거린다. 내 거동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여러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예절을 알고, 부인의 눈치를 읽을 줄 아는 남자들은 그 정도에서 그만 그친다. 혼자 온 남자들은 게임을 계속하며 기회를 엿본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을 남자는 거의 없다.
나의 출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재잘거림은 첫번째 요리가 나올 때쯤 해서 다시 시작된다. 틈입한 여자에게 계속 신경을 쓰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일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그들을 도발한다. 나의 도발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며 식사를 즐긴다. 이런 유치한 짓거리도 언젠가는 그만두게 되겠지?
후식이 나온다. 세
명의 남자가 여전히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내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두 사람은 내게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내가 시계를 본다. 일분쯤 지나 다시 시계를 본다. 초조해 하는 모습을 가장하기 위해 시계보기를 계속 반복한다.
남자들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보같은 그들의 관심이 수그러든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그들은 이제 날 저주할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그들이 마침내 자리를 뜨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들이 패배를 인정했다. 이제 내가 칼을 뽑아들 차례다. 그들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나는 지배인을 불러 큰소리로 인근 호텔에 방을 하나 잡아 달라고 부탁한다. 먼저 나간 바보들은 식당 앞에서 시가를 피우며 잡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삼십분쯤 기다리게 해야지. 그것이 나의 평결이다. 이렇게 성공을 거둔 날 밤, 무엇하러 우리의 마음을 그다지도 읽어내지 못하는 이상한 짐승들 중 하나를 택해 시달림을 당할 것인가?
내가 차에 오르자 메츠 행 국도, 7킬로쯤에 자리잡은 북 호텔에 방을 잡아두었다고 지배인이 말했다 남자들은 유혹을 포기해 버린다. 그들이 사라진 주차장에는 담배꽁초만 수북했다.
기쁨에 들뜬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마지막 담배를 피워문다. 방문은 걸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난 늘 모험의 기회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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