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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13

제13장
막북(漠北), 대풍운의 시발점


쿠우우!
쇳소리가 실린 사나운 웃음소리와 함께 살인적인 대강풍(大强風)을 마치 물살처럼 둘로 가르며
나타난 여인!
그녀는 삼십대 후반의 나이로 보이는 중년여인이었는데 보통 사람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팔
척(八尺)의 엄청난 거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그 우람한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가슴을 가린 젖가리개와 비소만을 간신히
가린 조각 하나가 전부였다.
헌데 젖가리개와 한 조각의 옷은 금사(金砂)의 고리로 엮어 만든 황금연화신갑(黃金蓮環神甲)이
아닌가?
번쩍이는 황금빛 작은 고리 틈으로 은은히 비치는 진보라빛 유두와 거무스름하게 아른거리는 밀
림지대는 보는 이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갈라진 강풍 사이로 비쳐드는 태양빛 아래 찬연히 빛나는 여인의 구리빛 동체는 뱀처럼 꿈틀거리
는 근육질을 뒤덮여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와 어린아이 머리만한 두 개의 육봉, 대평야를 연상시키는 아랫배와 황금연환신갑
으로 가려진 비소 아래에 이어진 두 다리는 천주를 방불케 했다.
천년거목 같은 두 팔은 가슴 앞으로 모아져 족히 천 근은 나갈 법한 황금거도(黃金巨刀)를 움켜
쥐고 있다.
"호호호홋! 드디어 도왕세가(刀王世家) 천 년의 염원을 이루었다!"
오척 거도(巨刀)로 대자연을 압도하여 오연히 선 그녀는 너무도 감격했음인지 전신이 희열로 인
해 가늘게 떨렸다.
헌데, 그녀의 얼굴은 뭐라 표현하지 못할 요염함과 철혈(鐵血)의 두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
었다.
갸름한 얼굴에 날카롭게 솟은 코, 붉은 입술은 오만하게 닫혀 있고, 무엇보다도 천년거사(千年巨
蛇)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두 눈은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불타올랐다.
대자연의 섭리를 일도양단(一刀兩斷)해 버린 여인! 그녀가 비로소 거도를 내리며 외쳤다.
"천 년, 지난 천 년의 세월 동안 우리 도왕세가는 단 한 번도 제일인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철혈기와 함께 만년빙석같은 한(恨)이 서려 있었다.
"천하패자(天下覇者)는커녕 천왕팔가(天王八家) 중에서도 영원한 이류(二流)! 심지어는 혈왕마가
(血王魔家)에게 굴종을 강요당하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 허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
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나 철혈여제(鐵血女帝) 하수란(河水蘭)이 살아있는 한!"
불굴의 의지를 실어 맹세하는 중년여인의 시선은 짙푸른 창공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상공....!"
헌데 그런 그녀는 일순 처연한 신색이 되어 흘러가는 편운(片雲)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실종된 지 어언 이 년...! 그동안 신첩은 당신이 사랑하신 도왕세가(刀王世家)를 천년최강
으로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 경주했어요. 신첩은 반드시 당신의 꿈을 이루어 드릴 것입니다. 저는
이미 당신이 남기신 지상 최강의 도결, 대라굉극천멸목(大羅宏極天滅暴)을 십성까지 익혀 내었답
니다!"
파츠츠!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한 철혈기에 사위가 숨을 죽였다.

-철혈여제(鐵血女帝) 하수란(河水蘭)...

이것이 이 압도적인 위압감을 진 거녀(巨女)의 이름이었다. 달리 도후(刀后)라고 불리며 막북무림
(漠北武林)의 제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철의 여인!
이 년 전까지만 해도 막북무림을 지배하는 새북천도영(塞北天刀營)의 가주는 그녀 하수란의 남편
인 도황(刀皇) 막사강(莫査强)이란 인물이었다.
천년 래 도가(刀家) 사상 최강의 무호(武豪) 막사강!
하지만 그는 이 년 전 의문의 실종(失踪)을 당했다.
이에 도황 막사강에 못지 않았던 절정고수인 그의 아내 하수란이 새북천도영의 새로운 가주로 추
대되었다.
철혈여제(鐵血女帝)라는 별호에 부족함이 없이 철의 여황으로 막북에 군림해 온 여장부가 바로
그녀 도후 하수란인 것이다!

쿠우우!
도후 하수란의 도기에 갈라졌던 대강풍은 아직도 합쳐지지 않았다.
"이제 가리라! 천 년 간 아무도 익히지 못했던 대파굉극천멸폭! 그것을 죽음의 대강혹사풍 속에서
완벽하게 익힌 지금... 절대 이인자는 되지 않으리라!"
츠으!
하수란의 신형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호호호훗! 나 하수란의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조리 구천지옥으로 보내주리라!"
새파란 안광이 사위로 폭출되었다.
쿠쿠쿠쿠!
대강흑사풍이 굉음과 함께 서서히 합쳐지며 가공할 풍력이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했으나 하수란은
머리카락 하나 날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에 비례해서 극강의 강기를 푹출시키고 있었다.
대강풍은 그녀에게 휘몰아치다가 일 장 밖으로 퉁겨나가곤 했다.
"머잖아 천왕팔가는 사라질 것이다. 이제 일 년 후 환우천종좌(宇天宗座)를 선출하게 되면 나머지
칠가(七家)는 모두 우리 도왕세가(刀王世家)의 가신(家臣)으로 변하리라!"
츠읏!
대강흑사풍을 꿰뚫고 하수란의 신형이 까마득히 치솟았다.
"호호홋! 환우천종좌는 우리 도왕세가에서 차지하게 되리라! 나 하수란에 의해서...!"
쐐애애액!
하수란은 대강흑사풍과 함께 뒤섞여 파미파를 강타하고 있는 철혈지소(鐵血之笑)를 뒤로하고 섬
전처럼 사라졌다.


광음여시(光陰如矢)...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다. 시절(時節)은 사계(四季)의 옷으로 번갈아가며 치장을 했다.
그리고, 대혈륜천하(大血輪天下)는 억겁의 혈난을 안고 핏물 속에 잠겨들었다.
호천멸살천일지계가 시작된 지 이미 삼백 일째 대중원은 혈하(血河)에 잠긴 지 오래였고, 마침내
호천단혈맹의 붕괴도 시간문제가 되어 버렸다.


역풍(逆風)!
폭풍처럼 천하를 강타하는 혈각의 지옥풍에 거역하는 두 개의 역지옥풍(逆地獄風)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역풍...

십대악불(十大惡佛)...
십대천불(十大天佛)...

금라가사를 걸친 십 인(十人)의 성불(聖佛)과 묵혈승의를 걸친 열 명의 잔인승(殘忍僧),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세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홀연 천외에
서 일어나 교묘하게 혈각의 일을 방해한다는 사실 뿐이다.
십대천불!
그들의 대성령천광에 접한 마인들은 마력을 잃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갔다. 무인이 무공을 잃는
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이다. 십대천불은 혈각의 마인들에게는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였
다.
십대악불!
그들은 혈각의 괴인들조차 기절할 정도로 사(邪), 마(魔), 요(妖)의 사악한 마공에 달통한 요악한
마승들이었다.
마(魔), 사(邪), 요(妖)의 대부(代父)들이라고 알려진 지옥십대혈작들 중의 천마대작, 사천혈작, 염
후조차도 될 수 있으면 십대악불 앞에는 나서려 하지 않았다.

역지옥풍(逆地獄風) 그 두 번째...

지옥(地獄)의 사형집행인!
일명(一名) 야황(夜皇)! 밤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그는 암흑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무적이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혀 없는 신비, 그 자체였다. 이름도 나이도, 노인인지 청년인지, 심지어
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그는 지옥(地獄)을 사형(死刑)시키고 있었다.
암흑속에서 지옥혈불의 마인들에게 잔혹한 죽음의 흔적을 남기면서, 그가 출현한 것은 고작 일
년 전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그의 손에 죽어간 혈각의 요인들만 해도 무려 삼백여 명에 달해 어느덧 혈각의
척살대상 제일호가 된 지옥의 사형집행인(死刑執行人)!
그것이 혈각이 꾀하는 무림의 지옥화(地獄化)에 대한 두 번째 맞바람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야황(夜皇)이 혈혈단신으로 혈각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단독으로 혈각에 대항하려는 의지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저
옛날 혈왕마가(血王魔家)가 이룩한 암흑마련(暗黑魔聯)의 끔찍한 공포를 제거한 천왕동맹(天王同
盟)의 출현만을 고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피의 공포에 죽음으로 맞대응하는 단 한 명의 무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해내고 있었다. 지옥을 사형(死刑)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일도양단! 깨끗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의 예술을 그는 천하의 마인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추는 사형극은 중원무림의 관중들에게는 다시 없을 희극이었고, 반면 혈각을 비롯한
마도의 관객들에게는 혈루(血淚)를 흐르게 하는 공포극(恐怖劇)으로 자리잡았다.

혈각의 피의 지배에 대한 도전과 반격이 바야흐로 시작되는가?
전혀 예기치 못한 두 개의 맞바람에 혈각은 크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혈각의 뿌리가 뽑혀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껏 그 두 개의 맞바람이 넘어뜨린 것은 혈각의 중원지부에 불과한 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제 혈각에서 주목하면서 공포의 마인들이 등장한다. 그로부터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데...!


<탑리목분지...>

휘이잉!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강렬한 사풍(沙風)이 미친 듯이 대평원을 휩쓸고 있었다. 천지가 온통 황사
(黃沙)의 싯누런 색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휴유... 굉장한 사풍이로군!"
문득 광풍의 소용돌이를 뚫고 낭랑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탄성을 터뜨리는 사람은 회의(灰衣) 미청년이었다. 본래는 백색(白色)인 듯했으나 사풍과 함께 땀
에 절어 회의로 변한 옷을 입은 그는 바로 화우성이었다.
비록 치기와 고집이 어린 장난스런 미소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나 그동안 강호를 주유하며 쌓은
연륜 탓인지 그의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氣度)는 일 년 전과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대해의 잔잔함이랄까? 천하를 뒤엎을 듯한 대폭풍의 거력을 내재한 대해의 기도가 전신에 어려
있었다.
문득 화우성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좋군! 일 년 만에 세상을 보니 해왕별부(海王別府)에서의 지난 일 년은 정말 지겨웠어!"
해왕별부라니?

<금룡비해(金龍秘海)!>

그 외곽지대에는 해왕세가의 사람들도 접근을 꺼려하여 사해(死海)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항시 폭풍이 뭉쳐져 강기를 이룬 채 휘몰아치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은 자욱한 운무와
엄청난 벽력뢰음이 작렬하여 인간의 발길을 거부했다.
허나 화우성은 금룡천부에 정교하게 조각된 금룡의 용린이 하나의 가공할 진법을 나타내 주는 것
을 알아냈다. 그 진법을 이용하여 화우성은 마침내 사해에 숨겨져 있는 해왕별부(海王別府)로 진
입해 들어갔다.

-해룡왕(海龍王) 금룡해(金龍海)!

그는 바로 해왕세가의 초대가주인 인물이다.
화우성은 해왕별부에서 제일차 지옥대전을 일으켰던 사대천왕(四大天王)중 사해의 제왕인 해룡왕
의 천해신무(天海神武)를 접할 수 있었다.

-천해심결(天海心訣)...

사해의 모든 어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제령심결,

-진천파멸강(震天破滅剛)...

천해구룡편으로 펼치는 해룡왕 최후최강의 파멸천강으로, 아홉 마리 금룡이 대해를 가를 때 천지
가 궤멸되리라...

-대폭풍참(大暴風斬)...

대해최강의 장법으로 백 장 높이의 거대한 해일마저 산산이 박살낼 수 있다는 공포의 비기...

-천해질풍(天海疾風)...

대해 위를 평지처럼 날아갈 수 있다는 환상의 신법...

-금룡해심공(金龍海心功)...

이것은 일단 시전만 하면 물 속에서 물고기처럼 호흡이 가능하며, 자유자재로 행동할 수 있다는
천하제일의 수공(水功)이었다.

화우성은 해룡왕 금룡해조차 익히지 못했던 대해 최강의 무학들인 천해신무(天海神武)를 모두 완
벽하게 익혔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제까지 알고 있던 모든 무공을 최극상까지 익히고 종합하여
새로운 비기를 창조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해룡왕이 글을 통해서 천왕팔가(天王八家)에 뒤엉킨 고사를 비로소 확연히 알게 되
었다.

<지옥대전을 일으켰던 천왕팔가는 천일(千日)에 걸쳐 대혈겁의 쟁투를 벌였으나 승패는 나지 않
았다.
만약 끝까지 싸운다면 천왕팔가는 상잔(相殘)의 비극으로 인해 모두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천왕팔가의 종주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밖에 없었다.>

<사대천왕(四大天王)...>

검왕노조(劒王老祖)...
번뇌관음(煩惱觀音)...
도황(刀皇) 막사군(莫獅君)...
해룡왕(海龍王) 금룡해...

<사대천마(四大天魔)...>

혈신(血神)...
백의사야(白衣邪爺)...
신비혈독(神秘血禿)...
독조마군(毒爪魔君)...

결국 해룡왕의 유지에 따르면 이들 사대천왕과 사대천마등 팔 인은 한 자리에 모여 임시 휴전에
합의했다.
단, 천 년 후에 팔왕대종회(八王大宗會)를 열어 그 우승자에게 환우대천자(還宇大天子)라는 칭호
를 부여하며, 나머지 칠 인은 그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하는 조건을 전제로 한 휴전이었던 것이
다.

<후인이여. 대해의 힘을 영세무적으로 군림케 할수 있나니 팔왕대종회에 전력투구하라! 사해는
영원하리라.>

"팔왕대종회라... 그것은 이제 이 년밖에 남지 않았다!"
화우성은 사풍을 헤치고 빠르게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천왕팔가 중 천불세가(天佛世家)와 해왕세가의 무공은 이미 견식했다. 가히 영원히 군림할 수 있
을 가공무학들이었다. 그렇다면 천왕팔가 중 최강이라던 혈왕마가(血王魔家)와 제왕천가(帝王天
家)의 무공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생각에 잠긴 화우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 년 간 발전해 온 혈왕마가의 마공의 위력은 추측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막강할 것이다! 그들을
깨려면 그들보다 강해야 하는 것! 나는 지난 일 년 간 지독한 사해의 폭풍 속에서 그것을 목표로
나 자신과 싸워왔다!"
화우성의 눈에서 가공할 안광이 폭출되었다.
환상이었을까? 화우성의 전신에서 막강한 기도가 해일처럼 퍼져나가자 천지를 뒤엎을 듯하던 사
풍(沙風)의 기세가 주춤하더니 백 장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최소한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설사 하늘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허나, 지금 이 순간 화우성의 기도는 가히 파천황의 기세라 할 만했다.
"!"
문득 화우성의 눈가로 이채가 스쳤다.
"이 황량한 곳에서 고수들이 운집하다니...?"
화우성은 무엇인가 인기척을 느낀 듯 꺼지듯이 신형을 날렸다.


휘이이잉!
광풍사(狂風沙)를 헤치고 흐르는 팽팽한 살기... 그리고 장내는 피의 지옥도가 그려져 있었다.
모래로 뒤덮인 대평원을 혈사(血砂)로 만들며 나뒹굴고 있는 수백의 시신들의 중앙,
"....!"
휘이이이잉!
지옥유부를 보는 듯한 짙디짙은 묵의(墨衣)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장발을 사풍에 휘날리며 오연히
서 있는 미청년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우수에 들린 묵도는 지면을 향해 혈루(血淚)를 떨구고 있
다.
시커먼 검미가 유난히 돋보이는 창백한 안색의 미청년은 대략 삼십 세쯤 되었을까?
눈(眼)!
무(無)!
그의 동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칠정오욕도(七情五慾), 짐승의 야성적(野性
的)인 본능(本能)도 없다. 오로지 절대무심(絶對無心)! 그의 안색에는 아무런 감정도 표출되어 있
지 않았다.
스스스!
돌연 유령처럼 나타난 수백 개의 인영들이 그의 주위를 천라지망으로 감싸고 있는데도 그는 일말
의 흔들림도 없없다. 단지 스산한 미소만이 그의 입가를 맴돌다가 사라질 뿐이다.
문득,
화라라락!
흑의미청년 앞으로 비릿한 괴소와 함께 날아내리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크흐흐! 과연 본각의 제일척살대상(第一擲殺對象)으로서 부끄러움이 없군!"
그 자는 이 장이 넘는 장극(長戟)을 비꼈든 회포의 거한이었다.
회포거한이 나타남과 동시에 죽음의 내음을 풍기며 비릿한 괴음을 그림자처럼 짊어진 일백여 흑
영들이 서서히 미청년을 조여들었다.
"끼이이!"
"크으으!"
그것은 강시(疆屍)였다. 인성이라고는 바늘 끝 만큼도 없는 강시군단!
한 인물을 상대키 위해 일백 구에 달하는 마마혈전강시들이 출현하다니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그 뿐인가?

마극혈사신(魔戟血邪神) 고륭(高隆)...

신강(新疆)의 패주로 군림하는 신강혈사전의 부전주이며, 일명 신강의 사신이라 불리우는 대륙제
일극의 대가인 그가 혼자도 아니고 일백 구에 달하는 강시군단과 함께 상대하려는 이 흑의청년은
누구란 말인가?
"크흐흐! 지옥의 사형집행인이라고? 네놈에게 진정한 지옥의 위력을 보여주지!"
마극혈사신은 서서히 앞으로 다가서며 미청년을 향해 장극을 겨누었다.
지옥의 사형집행인-!
역지옥풍(逆地獄風)의 두 번째이자 혈각의 마인(魔人)들만을 골라 척살한다는 바로 그란 말인가?
"..."
흑의미청년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사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네놈들이 죽어서도 그렇게 건방질 수 있는지 보겠다! 쳐랏!"
흑의청년의 냉막무심한 표정에 이유도 없이 화가 난 마극혈사신이 대갈을 터뜨리자,
"끄으으!"
일백 강시들이 귀음(鬼音)을 토하며 기계적으로 덮쳐왔다.
쐐애애액!
강시들은 몹시 둔해 보였으나 일단 움직이자 섬전처럼 폭사했다.
콰우우우!
강시들이 펼친 대폭풍마강기에 의해 일백 장 이내의 지면이 지진을 만난 듯 쩍쩍 갈라지며 균열
을 일으켰다.
그러나 흑의미청년은 자신이 석상이라도 된다고 착각한 것일까? 그는 일백 강시가 무더기로 덤비
는 지금 이 순간조차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다만 그의 묵도(墨刀)가 보일 듯 말 듯 허공으로 치켜 들렸을 뿐이다.
패액!
순간 가공할 도강(刀剛)이 사막을 뒤덮었다.
카카캉!
그런데, 머리가 뽀개지는 듯한 쇳소리만 터졌을 뿐 잠시 주춤하던 강시들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흑의미청년을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
이 때만큼은 흑의미청년의 눈가에도 찰나지간적으로 가벼운 파랑이 일었으나 종래 아무런 말도
없었다.
마극혈사신은 흑의미청년의 무감각한 반응에 더욱 화가 치밀어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흐흐흐! 네놈을 잡기 위해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쳤다!"
일순 고륭의 시선이 주위에 흩어진 수백 구의 시체들을 훑었다.
"크흐흐! 저것들은 사실 네놈을 잡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지! 네놈을 진자로 염라대왕 앞에 보내줄
위대한 분들은 바로 마마혈강시들이시다! 크하핫! 쳐랏!"
콰콰콰!
강시들이 고륭의 명령과 거의 동시에 두 손을 일제히 쭉 뻗자 엄청난 혈강기(血剛氣)들이 푹풍처
럼 흑의미청년을 향해 덮쳤다.
순간, 최초로 흑의미청년의 입에서 싸늘한 폭갈이 벽력처럼 터졌다.
"일도가 날면 천하를 파멸시킨다! 천지파멸참(天地破滅斬)!"
츠파앗!
묵광천하(墨光天下)!
흑의미청년의 거대한 폭갈과 함께 엄청난 묵도강이 하늘에서 작렬하는 섬전인 양 일어났다.
콰콰콰앙!
"크윽!"
천지폭멸의 대파멸음이 대지를 뒤흔들자 하나의 흑영이 핏물을 한 사발이나 토하며 십여 장 밖으
로 퉁겨나가는 것이 아닌가?
쿠웅!
흑의미청년은 둔중한 굉음과 함께 지면에 내동댕이쳐졌으나 이내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러나 보라! 그의 전면에 산산조각난 채 나뒹굴고 있는 오십여 구의 마마혈전강시를! 도검(刀劍)
으로도 흠조차 낼 수 없다는 공포의 마물들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허억! 저럴 수가!"
경악성을 토하는 마극혈사신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역력히 일었으나 곧 사향(死香)이 진득하게
배인 괴소를 흩날리며 다가섰다.
"흐흐! 과연 본벌의 제일척살대상자로 오를 만하군. 지옥의 사형집행인! 허나!"
스윽!
마극혈사신 고륭이 언뜻 말을 끊으며 장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네놈을 본좌가 죽이면 이계급 특진하여 내성(內城)으로 승진할 수 있지!"
말과 함께 마극혈사신 고륭은 최후의 일전을 장식하려는 듯 천천히 신중하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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