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2
제2장
설원(雪原)의 참극(慘劇)
수십 개의 아름드리 종유석에 떠받쳐진 인공(人工)이 가미된 동굴의 내부는 엄청나게 넓었다.
그 속에 자리해 있는 드넓은 대전(大殿)은 붉은 핏빛의 혈무(血霧)가 피어올라 흡사 지옥의 일부
를 연상케 했다.
암흑과 귀기가 뒤섞인 섬뜩한 핏빛 무지개 속에 세 개의 진홍빛 글자가 떠오른다.
<지옥혈(地獄血)>
지옥...! 정녕 이곳이 지옥의 마굴이란 말인가?
휘르르르!
짙은 혈무가 음산한 바람에 갈라지며 부분적으로나마 지하 대전의 형상이 일부 드러났다.
그러자 혈무가 흩어지는 사이로 하나의 혈지(血池)가 모습을 들어냈다. 대전의 한가운데는 핏물로
가득 찬 섬뜩한 빛깔의 호수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혈지 위로는 환상과도 같은 기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츠츠츠...!
핏빛 안개가 뿌옇게 일어나는 혈무 속에 수만 개의 번뜩이는 혈안(血眼)이 희번뜩거리고 있는 것
이다.
화라락!
갑자기 한 소리 파공음이 대전을 파고들었다.
"위대하신 혈신(血神)이시여."
뒤이어 한명의 청의노인이 혈지 앞에 이르러 그 앞에 오체북지하며 얼굴을 바닥에 묻었다.
"크크크! 어찌 되었느냐 일존(一尊)? 금사(金獅)의 건은?"
악령의 호곡성인가? 혈무 속에서 흘러나오는 공포스런 괴음은 듣는 이의 영혼마저도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사악함의 파동이었다.
"혈신이시여. 그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감히 본좌 앞에서 토를 달아?"
"혈신이시여, 노여움을 푸십시오."
청의노인은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이마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모른 채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의 안색은 완전히 밀납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말해 보라 일존!"
청의노인의 안색이 풀어졌다. 그의 노안(老顔)은 삶의 생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생사의 기
로에서 살아난 사람이 보이는 희색이었다.
"혈신께서 지시하신대로 제왕천가(帝王天家)의 화신인 금사일맥(金獅一脈)은 완전 초토화시켰습니
다. 하오나... 머리는 잘라 버렸지만, 송구스럽게도 그 뿌리는 제왕천가의 비밀 호위인 흑풍기사단
(黑風騎士團)의 호위를 받으며 천축(天竺)을 향해 도주 중에 있습니다."
"뭐라고?"
혈무 속에서 사나운 폭갈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 따위 실수를 해?"
번쩍!
혈무 속의 괴인은 분노성을 터뜨리는가 싶자 그의 혈안으로부터 한 줄기 뇌전이 작렬했다.
"크흑!"
콰당탕!
그 가공할 안광을 접한 청의노인은 피분수를 뿜으며 십여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본좌가 무리하는 것을 알면서도 금사궁을 전격적으로 공격한 것은 금사천존 능사한이 최근에 얻
은 아들놈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 막 태어난 핏덩이에 불과하지만 그놈은 전설로 전해오는 용왕
천인(龍王天人)의 운명을 타고난 놈이었단 말이다!"
"용....용왕천인(龍王天人)!"
청의노인의 강팍한 얼굴에서 하얗게 핏기가 사라졌다. 그런 그의 뇌리로 수천 년의 세월동안 무
림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던 불멸의 전설이 떠올랐던 것이다.
-용왕천인(龍王天人)!
그 존재는 달리 용왕천좌성(龍王天座星)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용왕천인의 전설은 아득한 상고시절, 황제(黃帝)와 싸우다가 탁록(托錄)에서 패해 죽은 치우(蚩尤)
라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연원(淵源)한다.
우주최강의 힘인 뇌기(雷氣)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무(武)로는 황제를 눌렀으나 지혜(智)에서
패배한 무신(武神) 치우! 그는 참형당하기 직전, 하늘에 대고 다음과 같이 절규했었다고 한다.
-언제고... 나 치우를 능가하는 힘과 황제를 누르는 지혜를 지닌 후인이 현세하리니, 하늘조차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그를 위하여 내가 죽노라! 용왕천인! 용왕천좌성을 위하여...
-용왕천좌성(龍王天座星>
그는 바로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다는 천인(天人)이다.
비록 과장된 전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용왕천인의 운명을 지닌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치우의 파천황적인 무위(武威)와
황제의 천혜(天慧)를 능가하는 전설의 초인이...!
"능사한의 아들 놈이 용왕천인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니..!"
청의노인의 온몸이 삽시에 흥건한 식은땀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 자의 귓전으로 혈신(血神)의 사
악으로 가득찬 음성이 이어졌다.
"본좌는 천기를 읽었다! 능가의 어린 놈이 장차 본좌의 대업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기에 죽이
라 한 것이었다."
우르르르!
대전이 지진을 만난 듯 굉렬하게 뒤흔들렸다.
청의노인은 사색이 된 채 더욱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고....고정하소서, 혈신이시여! 이미 최고의 추살자(追殺者)들인 십혈랑(十血狼)을 밀파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옥혈전단(地獄血殿團)의 일만(一萬) 살수들까지 풀었은즉, 조만간 삭초제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 일존! 허나.... 우리 혈왕마가(血王魔家)의 지옥율법은 잊지마라. 실패자에게는 죽음보다 더
한 지옥형(地獄刑)이 기다리고 있음을!"
"복명!"
청의노인은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화르르!
이어 그 자는 황급히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크크크! 무려 일천 년이다! 우리 혈왕마가(血王魔家)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군림하고자 천
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시운과 천운이 본가와 함께 하고 있나니.... 이제 용왕천인(龍王天人)의 운
명을 타고난 그 어린 놈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크하하핫!"
청의노인이 사라진 대전을 가공할 마기가 담긴 광소가 부셔 버릴 듯이 울려퍼졌다.
츠츠츠!
그와 아울러, 다시금 핏빛 혈무가 대전을 감쌌다.
헌데 혈왕마가(血王魔家)라니!
정녕 이곳이 바로 천왕팔가(天王八家) 중의 혈왕마가(血王魔家)란 말인가?
천 년 전, 인세에 지옥(地獄)을 재현했던 아수라(阿修羅)의 추종자들의 가문인 혈왕의 가문!
그들이 천년의 세월 속에서 장막을 벗어던지고 출현한 것인가?
아아! 눈에 보이는 듯하지 않은가? 타오르는 지옥겁화 속에 절규하는 무림천하가...!
휘이이!
엄청난 설풍이 강풍을 동반한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부신 백설뿐이었다.
끝없는 은세계가 펼쳐져 있는 이곳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험한 희마랍아산(喜馬拉雅山:大雪山)의
애불륵사봉(崖佛勒斯峯:聖母峯)이었다.
헌데
"헉! 헉!"
생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대악지(大惡地) 애불륵사봉의 눈덮인 산록을 거친 숨을 토하며
질주하는 홍영(紅影) 이 하나 있었다.
홍영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산발하여 설풍에 흩날리고 있었으며, 일신에 걸친 의복은 완전히
걸레조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찢겨져 있었다.
이 매서운 한풍과 눈발을 뚫고 이 천험의 절지(絶地)를 질주하는 인물은 놀랍게도 한 명 가녀린
여인이었다.
더구나 이 여인의 의복은 원래 홍의(紅衣)가 아니었다.
피(血)! 섬뜩한 선혈이 뒤범벅이 되어 여인의 백의는 적의(赤衣)로 바뀌어진 것이었다.
거미줄 같은 상흔은 여인의 희디 희고 매끄러운 우유살을 보기 흉하게 가르고 있었다.
"헉...헉! 이곳만 넘으면... 놈들도 쫓지 못한다. 천축(天竺)의 천축무림맹(天竺武林盟)의 영역이므로
이곳만 넘으면 된다. 그 때까지만 제발..."
여인의 탈진된 동공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공을 펼치고는 있지만 그녀의 걸음은 일반인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먼 길을 온 듯 그녀의 옥용은 창백하기조차 했다.
"제발! 신이시여... 소녀의 운명은 이미 버렸사옵니다. 이 분, 천년제일가(千年第一家)의 마지막 희
망인 우성(雨星) 공자님만이라도...!"
여인의 눈은 간절한 염원을 담은 채 자신의 가슴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은 소중한
보물을 안은 듯 힘있게 하나의 비단 강보를 휘감고 있었다.
그녀의 피로 물든 강보 안엔 아기가 보이고 있었다.
태어난 지 채 한 달도 안 됐을 어린 아기가 강보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살을 에일 듯한 매서운 한풍은 탐스런 아기의 볼을 퍼렇게 물들였다. 살아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파리한 아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아기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한없이 귀여우면서도 고집 서린 도톰한 입술과 선이 굵은 검미는 귀밑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
다.
"헉! 헉! 제발 이곳만이라도 벗어나야 하는데...!"
여인은 혼신의 힘을 끌어올려 다리를 움직였다.
그 때였다.
"킬킬킬! 이제야 오느냐?"
"계집! 감히 본좌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크크크! 지름길로 질러온 보람이 있었구나!"
화르르르! 스스스!
십인(十人)의 혈포인이 유령같이 나타나 여인을 가로막았다.
"흑...흑풍기사단(黑風騎士團)이 벌써 전멸했단 말인가?"
나타난 혈포인들을 본 여인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절망과 공포가 구름같이 그녀의 눈망울을
통해 투영되었다.
(하늘이시여...!)
여인의 고운 눈으로 한 줄기의 이슬이 흘러내렸다.
(십혈랑(十血狼)! 추적술과 살전(殺戰)에 능한 저들의 눈에 띄다니...,)
강보의 아기는 그녀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는 듯 깊게 잠들어 있었다. 여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안타까운 눈길로 강보속에 싸인 아기를 보듬어 안았다.
"크크크! 계집! 그 애송이를 내려놓고 죄를 빈다면 한 목숨은 살려주마!"
"흐흐! 네년이 바로 국화미인(菊花美人)이겠구나!"
열명의 혈의인, 십혈랑은 야수와도 같은 음탕한 눈으로 여인의 전신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이미 걸레조각같이 갈가리 찢겨진 백의 사이로 뽀얀 우유빛 살결이 드러나 있는 여인의 자태는
가히 눈의 요정같이 아름다왔다.
십팔구 세쯤 되었을까? 나이답지 않게 풍염한 그녀의 전신은 폭풍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떨렸다.
(결국 이곳까지 와서...)
여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소공(少公)! 소녀 추수월(秋水月)은 더 이상 소공을 지켜드릴 수 없군요.)
-국화미인(菊花美人) 추수월(秋水月)!
여인의 이름인가?
국화미인이란 별호는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뒤늦게 만개하는 한떨기
국화를 보는 듯했다. 나이는 불과 이십도 채 안 되보였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난숙하
기 이를 데 없었다.
가을날의 청명을 담은 듯한 서글서글한 봉목에는 짖 은 막내동생의 말썽을 자애로움으로 볼 수
있는 부드러움이 담겨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열명 혈의인들을 지켜보는 추수월의 눈매는 서늘하게 치켜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강보의 아기를 꽉 끌어안았다.
"삭초제근(削草制根)! 풀은 뿌리째 뽑아야 하지!"
"더구나 저놈은 우리의 일에 막대한 지장을 줄 우려가 있거든.."
십혈랑은 스산한 살소를 떠올리며 여인을 에워쌌다.
(평소라면 저들을 뿌리칠 수 있으련만, 기력이 쇄진한 틈을 타다니...)
추수월은 파리해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국화미인이란 외호가 말해 주듯 그녀는 무림에 속해 있는 무림인이긴 했지만 타인을 제압하거나
경쟁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의 한몸을 보호하기 위한 경공술 한 가지 만큼
은 확실하게 연성해 두고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공술을 지닌 그녀였다. 허나 지금 그녀의 몸은 일 마장도 날기 힘들 정
도로 기력이 탈진되어 있었다.
그때 십혈랑이라 자칭한 자들중 선두의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길게 검흔(劒痕)
이 얼굴 왼쪽에 그어져 음충맞게 웃을 때마다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추수월의 황홀하게 아름다운 몸매를 쳐어보며 비릿한 흉소를 흘렸다.
"본좌는 십혈랑의 대형(大兄)인 일혈랑(一血狼) 어르신이다. 사실 그깟 어린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것쯤은 대수로운 게 아니지."
그는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도 그냥 가기엔 수고가 많았단 말이야..."
그의 말에 추수월은 뭔가 작은 서광이 비쳐오는 것을 느꼈다.
"만일... 그대들이 소공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주겠다. 내 목숨이라도...!"
"킬킬! 네 목숨 따위야 우리에겐 관심도 없다. 하지만 네가 살아야 저 어린놈을 양육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말해라! 뭘 원하는지."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 네년이 본좌들을 즐겁게 해주면 우리는 그 어
린 놈을 못 본 척하고 그냥 가 주겠다."
"......"
추수월은 일순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좋...다! 가져라! 내 몸을...주마!"
추수월은 눈을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흐흐 잘 생각했다!"
일혈랑은 음험하게 웃으며 추수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순간 그 자는 거칠게 추수월을 눈바닥에 밀어 버렸다.
"흐윽!"
추수월은 강보에 쌓인 아기를 끌어안은 채 눈밭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촤악!
그녀가 어찌해 보기도 전에 일혈랑의 손은 그대로 추수월의 치마를 찢어발겼다. 치마가 찢기며
허연 여인의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고, 헝겊으로 가리운 은밀한 부위마저 고의끈이 떨구어지며
우거진 검은 밀림을 보였다.
"빨리...해라!"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추수월은 싸늘한 살기를 발하며 이를 갈았다.
"후후... 이건 어디까지나 네년이 원한 것이다."
말을 하는 중에도 그의 손은 길고 무성한 여인의 신비림을 쓸어가다가 이내 손가락 하나가 어디
론가 사라졌다.
"흐윽!"
추수월은 낮은 신음을 토하며 이를 악물었다.
적당히 벌어져 있는 허벅지의 사이로 사내는 천천히 하의를 까내리며 뒤에서 다가갔다.
추수월의 희멀건 허벅지를 일혈랑은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흉칙한 물건을 그
중심부의 균열로 밀어갔다.
거칠고도 깊숙이...!
(아파! 흐윽!)
추수월의 가녀린 교구가 작살에 찔린 물로기마냥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파과(破果)의 아
픔에 진저리를 쳤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메마른 살점을 헤집고 파고드는 흉칙한 사내의 실체,
추수월은 생살이 찢기는 처절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신음소리를 삼켰다.
(오...오냐! 언제고 썩어없어질 몸뚱이다! 마음대로 가져라... 하지만 내 기필코 네놈들을 처참하게
죽이고야 말리라...)
추수월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흐흐! 이젠 가슴을 한번 볼까?"
일혈랑은 자신의 검붉은 흉기를 추수월의 몸 안으로 일거에 뿌리까지 밀어넣고는 이번에는 그녀
의 앞가슴을 열어젖혔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튀어나오는 저 하얗고 탐스런 유방의 물결... 그것
을 일혈랑은 잔인하게 움켜쥐고는 그대로 입 안으로 가득 베어물었다.
육봉을 이빨로 짖깨물며 그 자는 맹렬하게 하체를 움직였다. 기가막히지 않은가? 멀쩡하게 눈을
뜬 채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자신의 유방을 입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여인의 심
정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분함과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으나 복수라는 단
어와 함께 여인은 통한을 삼켰다.
유방이 주물리고 깨물리면서 자신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폭풍같이 넘나드는 저 사내의 흉기는
정말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그녀의 하체는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사전에 애무동작도 없이 무조건 돌진하는 사내를 받아들
인 그녀에게 고통은 더욱 배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추수월은 사내의 행위가 급격히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안 돼!)
그녀는 자신을 유린하는 흉기가 급격히 달아오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고 내심 진저리를
쳤다.
사내의 더러운 분비물이 몸 안에 배설되는 것은 처녀를 빼앗기는 것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일이
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 가혹한 현실에서 달아날 힘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무엇인가 세찬 분출이 자신의 몸 안 깊숙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흐흐! 정말 보기드문 계집이군... 장백산(長白山)같은 곳에 있는 촌년들하곤 달라! 흐으...!..."
잠시 추수월을 짓누른 채 짐승같이 헐떡이며 분출의 쾌감을 음미하던 일혈랑은 추수월의 몸에서
떨어지며 만족한 듯 히죽거렸다.
무참히 벌어진 추수월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온 그 자의 하물은 여전히 거대하게 팽창된 채 붉은
앵혈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이제 추수월이 더 이상 처녀의 몸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추수월이 당할 수난은 그것이 시작일 뿐이었다.
"흐흐! 본좌는 뒤에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일혈랑이 추수월의 몸에서 일어나자 마자 이혈랑(二血狼)이 그 즉시 그녀에게 덮쳐들었다. 그 자
의 요구대로 추수월은 이번엔 짐승의 암컷같은 자세로 엎드려야만 했다.
엎드린 자신의 뒤로 이혈랑이 다가드는 것을 느끼며 추수월은 교구를 떨었다.
희멀건 엉덩이가 그대로 하늘을 향한 채 드러나 있고, 그 사이의 계곡에는 방금 전 일혈랑에게
당한 난행의 흔적이 흥건히 남아 있었다.
사내의 분비물에 섞인 선연한 앵혈이 그녀의 희디흰 허벅지를 타고 흘러 눈밭 위에 붉은 꽃무늬
를 그렸다.
사내의 손이 그런 추수월의 탄력 넘치는 탐스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흡사 잘익은 하얀 복숭아
(白桃)를 백 배는 증폭시켜 놓은 듯한 그것을 양손으로 잡으며 이혈랑은 무릎을 꿇었다.
"흐흐... 피부가 정말 끝내주는군..."
까칠한 사내의 하초(下草)의 감촉이 느껴지고 이어 일혈랑의 배설의 흔적이 역력한 추수월의 동
굴속으로 또 다른 사내의 거대한 흉기가 한 치 한 치 파고들었다.
(흐윽! 언제고 모조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다! 이 더러운 색마들!)
추수월은 뒤로부터 삽입되어 목구멍까지 치받히는 듯한 사내의 거대한 실체를 아랫배 그득 느끼
며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오옷! 정말 기가막힌 계집이로군? 헉!"
이혈랑은 그대로 추수월의 둔부를 굳게 잡고는 힘차게 자신의 하체를 밀어갔다.
"흐윽!"
추수월은 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렸다. 자신의 은밀한 동굴을 관통하여 목젖까지 치솟아 오르는
듯한 거대한 사내의 실체는 아픔 이전에 차라리 공포였다.
추수월의 허벅지를 타고 점점이 방울지는 붉은 앵혈이 애처로웠다. 짐승처럼 엎드린 채 뒤로부터
순결을 상실당하는 소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흐윽! 소공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치욕도 참을 수 있다!)
추수월은 이를 악물었다.
"아...!"
그러던 어는 순간 추수월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혈랑이 마침내 욕심을 채우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누워라 암캐!"
삼혈랑(三血狼)은 하의를 까내리며 말했다.
추수월은 그 자의 요구대로 누웠다. 유난히 뽀얗고 하얀 피부는 눈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발목은 가늘었다. 그것을 한손으로 잡아 위로 치켜올리자 희멀건 허벅지와 함께 여인의
은밀한 부위가 도발적으로 튀어올랐다. 그녀의 깊은 균열은 두 번에 걸친 능욕의 흔적으로 홍수
가 져 있었다.
그 흥건한 신비의 둔덕을 삼혈랑은 손가락으로 눌렀다.
흡사, 석류(石榴)가 익어 터지듯 갈라지며 드러나는 여인의 붉은 동굴.
삼혈랑은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대로 자신의 하체를 여인의 동굴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입에서는 짧은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흐윽!"
삼혈랑은 그런 그녀의 발목을 양손으로 잡아 든후 그대로 좌우로 활짝 벌렸다. 자신의 어깨 위로
여인의 발을 올려놓은 그는 그대로 손을 내뻗어 그녀의 유방을 움켜쥐었다.
또 한 번 격렬한 능욕이 여체에 가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삼혈랑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흉기를 여체에서 이탈시키고는 천천
히 신형을 일으켰다.
"흐흐... 역시 형님들이 미리 즐긴 곳보다는..."
곧이라도 폭발할 듯이 굵은 힘줄을 꿈틀거리며 팽창된 사내의 하물은 여인의 정절을 파괴시킨 피
의 흔적이 역력했다.
"아..."
추수월은 일순 안도의 긴 탄식을 흘렸다. 이제 끝났다는, 세 번째의 처절한 겁탈당하는 시간이 지
나갔다는 안도감의 표현일런지 몰랐다.
하지만 몸 안에서 욕정의 찌꺼기를 배출시키기 전까진 사내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삼혈랑은 그녀의 배를 타고 앉으며 탐스런 육질(肉質)의 봉우리를 움켜쥐었다.
"무, 무슨 짓을...?"
추수월은 또다른 공포에 몸을 떨었다. 자신의 유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가해지며 새하연 설
봉(雪峰)이 갈라져 깊은 계곡을 드러내는데 그 사이로 사내의 더럽혀진 불기둥이 진입하는 것이
아닌가?
두 개의 유방 사이에 파묻힌 사내의 하물은 끝만이 살짝 보일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삼혈랑은
하체를 격렬하게 왕복시켰다.
"허억!"
터질 듯한 유방의 살 속에서 조여지는 압박감은 사내에게 당연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흐윽..."
추수월은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으음...!"
삼혈랑은 몸을 경직시키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불기둥에서 거창한 폭발이 일
었다. 허연 액체가 폭포수처럼 뿜어지며 추수월의 가슴과 얼굴 위로 번져갔다.
"이...더러운!"
추수월은 질겁하며 고개를 외면하려 했으나 그녀는 고스란히 사내의 몸에서 뿜어지는 용암을 안
면에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능욕의 시간은 끝이 없었다. 아니 추수월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끝은 있었다.
열 번인가 스무 번인가? 한 번 그녀를 거쳐갔던 사내도 동료들의 행위를 지켜보다가 다시 회가
동하면 재차 그녀를 능욕한 탓에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악몽의 시간도 끝난 것이다. 열 명의 욕정에 굶주린 늑대들에게 당한 추수월은 필사적
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걸래쪽처럼 찢어진 옷을 얼기설기 몸에 걸쳤다. 그리고 그녀는 강보가 있는 곳으로 기어
갔다.
그런데...
"흐으... 정말 몸 한번 잘 풀었군..."
"후훗! 간만에 계집다운 계집을 품었어..."
십혈랑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동시에 검을 뽑아 내뻗는 것이 아닌가?
"잘가랏!"
"혈천비폭섬(血天飛爆閃)!"
십혈랑은 일제히 십방에서 검세를 내쳤다.
"비, 비겁한!"
추수월은 막 최후의 공력을 끌어올려 마주치려다가 그만 안색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십검(十劍)이 한꺼번에 쏘아져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십혈랑은 추수월을 노리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보 속의 어린아이만을
노리며 살초를 휘두른 것이다.
십방(十方)에서 짓쳐드는 십검은 추수월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소공을 필살시키려는 간악한 공세
였다.
국화미인 추수월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피한다면 어린 아기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퍼억!
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아기를 자신의 가슴 속으로 파묻은 직후 열 개의 검은 그녀의 전신을 파고
들었다.
이 숭고한 희생!
추수월은 자신의 몸으로 십혈랑의 공격을 막은 것이었다.
"이런 지독한 계집!"
십혈랑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런다고 무사할 줄 아느냐? 쳐랏!"
혈광천하(血光天下)! 사위가 일순 혈무로 뒤덮이며 전신에 고슴도치같이 열 개의 검을 꽂은 추수
월에게로 폭풍같이 밀어닥쳤다. 국화미인 추수월의 숭엄한 희생도 소용이 없단 말인가?
어느덧 혈광은 추수월의 옷깃에 닿을 정도로 짓쳐들고 있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 닥쳐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아미타불...악독한지고...이 성스런 대지에서 칼부림이라니..!"
한 소리 웅후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든 불호가 설원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설원의
대지 위로 휘황한 금륜강(金輪剛)이 폭풍처럼 휩쓸었다.
"어떤 놈이냐?"
"으윽!"
막 추수월을 격살시키려던 혈광은 백 장을 날아온 금륜강에 산산이 깨어지고 십혈랑은 경호성을
내지르며 신형을 돌렸다.
쐐애애애액!
일천 장 저편에서 금무(金霧)에 싸여 날아오는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순식간에 지척으로 날아내
렸다.
그 인물은 승인(僧人)이었다. 대략 필순 가량 쯤 되보이는 금의가사를 걸친 긴 금미(金眉)를 지닌
청수한 노승이었는데 얼굴의 윤곽을 보아하니 중원인이 아니고 천축의 인물인 듯했다.
"아미타불!"
금미의 천축국 노승은 장내로 내려서자 십혈랑은 본 체도 않고 황급히 추수월에게로 다가갔다.
"뉘...뉘시온지."
추수월은 흐릿해진 눈까풀을 치켜올리며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아미타불! 여시주야말로 누구신데 이런 곳에서... 으응?"
추수월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던 노승은 일순 그녀 옆에 누워 있는 강보 속의 아기를 발견하고
는 금미를 치켜올리며 두 눈에서 강렬한 기광을 발했다.
"오오! 천기(天機)에 귀인(貴人)이 성모봉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여 왔지만 실로 부처님의 뜻이로
다! 아미타불...!"
추위로 피부가 새파래진 아기를 바라보며 노승은 격동을 참지 못하는 듯 연신 불호를 외웠다.
헌데 그때, 마음의 긴장을 풀던 추수월은 눈을 흡뜨며 경호성을 터뜨렸다.
"스님! 조심하세요."
"땡초! 감히 본인들의 일을 방해하다니... 죽어랏!"
"혈천비망폭(血天飛網爆)!"
십혈랑은 독침(毒針), 비검(飛劍)을 노승의 전신으로 날리며 짓쳐들었던 것이다.
(늙은 중! 감히 본각(本閣)의 일에 관여하다니...)
(별것도 아닌 놈인데 괜히 겁먹었잖아? 혈각(血閣)의 십대추적살령(十大追跡殺靈)인 우리 십혈랑
어르신들의 일을 방해해?)
그 자들의 안면으로 잔혹한 미소가 흐른다.
십혈랑(十血狼)-
사실 그들의 출신은 보잘것 없었다. 지금은 열 마리 피의 늑대라는 섬뜩한 별호를 지닌 그들이었
지만 본래 그 자들의 원래 신분은 장백산(長白山)의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호중제왕(虎中帝王)이라는 장백대호(長白大虎)라도 잡는 호렵부(虎獵夫)라도 되느냐 하
면 그렇지도 못했다. 그저 덫이나 놓고 함정이나 파는 어줍잖은 얼치기 사냥꾼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에서 태아났고, 사냥꾼의 피를 이어받은 그들에겐 선천적으로 야성(野性)의 기질이 남아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후각과 밤에도 보이는 안력을 지닌 그들은 짐승 발자국을 손쉽게 찾아내
고, 그 짐승의 종류마저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든 그들의 인생에 전기가 마련된 것은 분명 하늘의 실수였다.
그들은 어느날 한 마리 숫곰에 쫓겨 숨어들어간 깊은 동굴 속에서 사백 년(四百年) 전에 흑도무
림을 주름잡던 천랑객(天狼客)이라는 거마의 무공비급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물론 그 자들은 자질이 일천하기 짝이 없는지라 천랑객의 마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천랑십팔해(天狼十八解)의 열여덟 개 초식 중 가장 쉬운 천랑십초(天狼十招)를 열 명이서 한 가지
씩만을 무려 사 년(四年)에 걸쳐 연성한 후 그들은 마음놓고 사냥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냥한 것은 동물이 아니었다. 장백대호나 설웅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을 뒤쫓다
가 그들이 사냥에 성공하는 순간, 사냥꾼을 사냥하여 사냥물을 노획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
동북무림(東北武林)의 패주는 장백파(長白派)였다.
장맥파의 장문인인 장백신옹(長白神翁) 나백(羅伯)이 우연히 그 자들의 만행을 목도하고, 응징을
한 후 장백산에서 추방시켜 버리고 말았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광명정대한 그의 마음은 훗날 엄청난 재앙이 되
었다.
고향에서 쫓겨난 자들은 우연히 살인청부집단(殺人請負集團)인 흑풍회(黑風會)의 회주(會主)인 흑
풍광마(黑風狂魔) 진광(陳匡)의 눈에 들었다.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특별한 능력, 신기할 정도의 추적술과 잔인한 그들의 심성을
높이 산 것이었다.
사실 흑풍회는 혈각(血閣)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집단의 하부조직이었다.
십혈랑은 탁월한 추적술을 바탕으로 암살 대상자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죽이고야 말았다.
그런 전과가 쌓이면서 상부의 눈에 들었고, 혈각에 특채된 지금엔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합공
진법술(合功陣法術)을 혈각에서 전수받아 거의 무적의 경지에 다다라 있는 상태였다.
십혈랑이 각자 연성했던 천랑객의 무공이 열 명의 손에서 펼쳐지며 이뤄내는 진법은 과거의 천랑
객 본인이 펼친 위력보다 두 배 이상이었다.
흑풍광마 진광도 지금 십혈랑의 합공을 받아내지는 못했고, 오히려 십혈랑의 눈치를 보고 있을
정도였다.
피리링! 파파팟!
십혈랑이 전력을 다해 발출한 암기들이 노승의 전신사혈로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승은 전혀
기척도 없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휘황하기까지 한 금광(金光)이 노승의 전신에서 번개처럼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한 소리 굉렬한 폭음과 함께 허공을 가득 메우며 짓쳐들던 암기들은 금광에 닿는 순간 한 줌의
가루로 흩날려 갔다.
"안 돼! 크아악!"
"무신(武神)의 경지. 크헉!..."
"으아악!"
십혈랑(十血狼)은 피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찬란한 금광이 사위로 뻗어나가 암기를 박살내
고 십혈랑은 창졸간에 피분수를 뿜으며 눈 속으로 쳐박혀 버리고 말았다.
실로 가공할 무위가 아닐 수 없었다.
금색가사의 노승이 누구기에 십혈랑 같은 고수를 일격에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추수월은 경악하고 말았다.
(십혈랑을 단 일수에 격살시키다니... 중원에선 절정에 드는 고수들이고 합공이라면 무적이라고 불
리는 저들을...)
"아미타불... 조금만 늦었더라도 천추의 한이 될 뻔했도다. 아미타불..."
노승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연신 불호를 되뇌이며 강보를 안아들었다.
그 때였다.
환상이었을까? 아기의 감겼던 눈이 떠지고... 수만 개의 폭죽이 터지듯 아기의 두 눈망울에서 휘
황한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음은...
오랫동안 굶은 듯 핼쓱해진 동안(童顔)과 파리하게 얼어 굳어진 근육을 보이고 있긴 했지만 그
무엇도 지금 아기의 모습을 보기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청룡(靑龍)의 분노인가? 아기의 두 눈은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듯 강렬함마저 담겨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피를 본 눈... 지난 열흘간 중원 십만 리를 횡단하여 그를 위해 죽어간 십만 원혼의
절규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는 듯했다. 인간에 대한 분노와 저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미타불... 천인(天人)의 노함은 인세의 종말을 가져올 뿐이거늘, 용왕천인성(龍王天人星)에 혈살
성(血殺星)이 침범했으니 이것도 부처님의 뜻인가? 아미타불..."
노승은 알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애석한 탄식을 흘렸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사색이 되어
가는 추수월을 돌아보았다.
"스...스님은 뉘신지요?"
추수월은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안타깝게 유지하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치명적인 십대사혈
에 가격당한 그녀가 이제껏 살아있다는 것도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미타불... 노납은 천축(天竺)에서 온 금령(金靈)이라 하오이다.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구
료, 여시주... 이 분 귀인은 노납이 책임질 터이니..."
국화미인 추수월! 십만 리 생사지로를 뚫고 오느라 탈진된 그녀는 십대사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설사 의선(醫仙)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노승은 안타깝지만
추수월의 꺼져가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었다.
"소공(少公)은 천년제일가문의 마지막 후손으로... 이름은 화우성(花雨星)...! 끝까지 모시지 못하
여... 죄송...!"
힘겹게 말을 잇던 추수월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미타불...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노승은 조용히 법문을 외우며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추수월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노승의 소맷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자 백설이 사방에서 날았다.
설총(雪塚)!
드넓은 대설원 속에 한 개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자신을 희생하고 한 어린 생명을 건진 갸륵한
여심이...
"아미타불... 언제나 이 혈겁이 종식될꼬..."
노승은 한숨을 내쉬며 신형을 날렸다.
휘이이이잉!
매서운 설풍(雪風)은 다시금 인간의 종적을 묻어 버릴 듯이 세차게 설원을 휘몰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분명 이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노승이 떠난 지 일 각도 안 돼서 하나의 인영이 장내로 나타났다.
북풍한설같이 차가운 냉기를 날리며 서 있는 인영은 한 명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사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하얀 백의에 구름같이 머리를 틀어올린 미부였다.
차가운 냉기가 흐르나 학같이 고귀한 기품을 지닌 여인은 곤혹스런 눈으로 사위를 주시하다가 일
순 가볍게 옥수(玉手)를 휘저었다.
휘르르르!
눈발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한 개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 있는 추수월의 시신이 나타났다.
벌거벗은 하체에는 무참히 난행을 당한 흔적이 역력하고 온몸은 열 개의 병기에 꿰뚫리어 피가
응결된 볼성사나운 자태였다.
"웬 아이가 이곳에서 죽어 있단 말인가? 감히 본궁의 영역에서 살상을 자행하다니! 음?"
싸늘한 살광을 뿜어내던 백의미부는 이채를 발하며 추수월에게로 다가갔다.
"이... 이럴 수가...!"
추수월의 맥문을 잡아보던 백의미부는 일순 격렬하게 교구를 떨었다.
"태음지신(太陰之身)! 이것이 실제로 인세에 존재하다니? 그것도 성모봉에서 죽은 시신으로..."
그러나, 백의미부의 눈은 추수월을 결코 죽은 자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호호! 비록 전신십대사혈이 뚫리고 경락과 세혈까지 끊기고 내공이 사라졌으나 성모봉의 빙정
(氷精)으로 인하여 다시금 소생하고 있다. 이제 유리빙궁(琉璃氷宮)의 꿈을 이루리라!"
백의미부는 추수월의 몸을 끌어안았다.
"호호호! 십 년 후... 천하는 복수당하리라... 천 년 전 천왕팔가로부터 당한 치욕과 이 아이에게
가한 혈한(血恨)이 동시에 보복당할 것이다! 유리빙궁의 일천 년 힘과 탄생될 복수빙화(復讐氷花)
에 의해..."
휘이이잉!
바람이 분다. 성모봉 전체를 날려 버릴 정도로 극맹한 빙풍(氷風)을 뚫고 두 여인이 사라져갔다.
어린 주인을 구하기 위해 희생의 길을 걸었던 국화미인 추수월과 그를 죽이기 위해 쫓던 지옥에
서 온 죽음의 추적자들...
금령이라는 노승...
천축무림맹!
유리빙궁!
기억하라!
일천 년 무림역사를 뒤바꿀 운명은 지상 최고(最高)의 대산(大山)인 성모봉으로부터 시작되었음
을...
세월은 유수라 했던가?
희마랍아산의 성모봉에서 참극이 벌어진 후 사계절이 바뀌길 열여덟 차례, 십팔 년이란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다.
물론 그 십팔 년이란 세월도 억겁의 대자연에 비하면 실로 수유의 시각이겠으나...!
번쩍!
한 줄기 새파란 뇌전(雷電)과 섬광(閃光)이 흑천을 두 쪽으로 가르며 사라졌다.
콰콰르릉!
이어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 엄청난 뇌성벽력이 대지를 뒤흔든다.
그 사이로 장대같이 쏟아져 내리는 폭우!
인세의 종말인가? 천지가 개벽하는가? 대황야(大荒野)는 뇌전이 작렬할 때마다 치부를 드러내며
광란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쐐애액!
대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뇌성을 꿰뚫고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선열한 벽력이 폭죽처럼 터지며
대지를 대낮같이 휘황하게 밝혔다.
그 사이로 비록 흐릿하지만 분명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형용할 수 없으리
만큼 가공할 속도로 대황야를 가로지르는 괴인영이 있었던 것이다.
휘황한 뇌전이 대지를 양단한다.
"벽력(霹靂)과 뇌전(雷電)! 나는 너희들이 좋다!"
벽력성과 광풍우 속을 꿰뚫으며 낭랑하게 퍼지는, 그러면서도 패기에 넘치는 사자후(獅子吼)가 있
었다.
꽝! 콰르르르르!
새파란 섬광이 천지를 휘황찬란하게 양광으로 물들일 때, 질주하던 괴인영은 그 자리에 우뚝 섰
다.
거칠 것 없는 광야의 한가운데 태산처럼 우뚝 선 채 미친 듯이 광란하는 벽력과 뇌전 사이로 괴
인영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괴인영(怪人影)은 뜻밖에도 십칠팔 세쯤 되었을까한 미청년이었다. 그는 중요한 부분만을 겨우 백
호피(白虎皮)로 가린, 거의 나신에 가까운 야성적인 미청년이었다.
귀밑까지 뻗어내린 강인한 선의 검미 아래로는 한 쌍의 눈이 찬란하게 타오른다. 일만 개 뇌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이 빛나는 동공, 그것은 강인한 패기와 뇌룡의 눈을 닮은 가공할 예기(銳氣)
가 서려 있었다.
또한, 번쩍이는 섬광에 드러난 미청년의 몸은 아직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잘 발달되어 있었다. 탄탄
한 근육질의 동체는 억수같은 비에 젖어 싱그러운 야성미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미청년은 작렬
하는 뇌전을 모조리 끌어안겠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려 하늘로 향했다.
"나는 벽력성(霹靂聲)이 좋다!"
그의 두 눈에는 강렬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콰르르릉!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벽력성이 마치 미청년의 몸에서 울려오듯 터지더니 현천(玄
天)을 찢어발기는 것이 아닌가?
"하하핫..."
미청년은 폭멸하는 섬광과 함께 황홀한 듯 호쾌한 대소를 터뜨리며 신형을 날렸다.
천지개벽의 광란에 휩싸인 대광야!
"저 뇌전의 강함과 대지를 가르는 패력(覇力)은 나 화우성(花雨星)의 가슴을 터뜨려 버릴 듯이 흥
분시킨다!"
벽력(霹靂)을 사랑하는 야성의 잠룡(潛龍)!
이 이야기는 뇌성벽력이 광란하는 천축의 오지인 천뢰대광야(天雷大廣野)로부터 시작된다. 벽력
(霹靂)을 유난히 좋아하는 어린 뇌룡(雷龍)으로부터...
설원(雪原)의 참극(慘劇)
수십 개의 아름드리 종유석에 떠받쳐진 인공(人工)이 가미된 동굴의 내부는 엄청나게 넓었다.
그 속에 자리해 있는 드넓은 대전(大殿)은 붉은 핏빛의 혈무(血霧)가 피어올라 흡사 지옥의 일부
를 연상케 했다.
암흑과 귀기가 뒤섞인 섬뜩한 핏빛 무지개 속에 세 개의 진홍빛 글자가 떠오른다.
<지옥혈(地獄血)>
지옥...! 정녕 이곳이 지옥의 마굴이란 말인가?
휘르르르!
짙은 혈무가 음산한 바람에 갈라지며 부분적으로나마 지하 대전의 형상이 일부 드러났다.
그러자 혈무가 흩어지는 사이로 하나의 혈지(血池)가 모습을 들어냈다. 대전의 한가운데는 핏물로
가득 찬 섬뜩한 빛깔의 호수가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혈지 위로는 환상과도 같은 기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츠츠츠...!
핏빛 안개가 뿌옇게 일어나는 혈무 속에 수만 개의 번뜩이는 혈안(血眼)이 희번뜩거리고 있는 것
이다.
화라락!
갑자기 한 소리 파공음이 대전을 파고들었다.
"위대하신 혈신(血神)이시여."
뒤이어 한명의 청의노인이 혈지 앞에 이르러 그 앞에 오체북지하며 얼굴을 바닥에 묻었다.
"크크크! 어찌 되었느냐 일존(一尊)? 금사(金獅)의 건은?"
악령의 호곡성인가? 혈무 속에서 흘러나오는 공포스런 괴음은 듣는 이의 영혼마저도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사악함의 파동이었다.
"혈신이시여. 그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감히 본좌 앞에서 토를 달아?"
"혈신이시여, 노여움을 푸십시오."
청의노인은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이마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모른 채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의 안색은 완전히 밀납같이 창백해져 있었다.
"말해 보라 일존!"
청의노인의 안색이 풀어졌다. 그의 노안(老顔)은 삶의 생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생사의 기
로에서 살아난 사람이 보이는 희색이었다.
"혈신께서 지시하신대로 제왕천가(帝王天家)의 화신인 금사일맥(金獅一脈)은 완전 초토화시켰습니
다. 하오나... 머리는 잘라 버렸지만, 송구스럽게도 그 뿌리는 제왕천가의 비밀 호위인 흑풍기사단
(黑風騎士團)의 호위를 받으며 천축(天竺)을 향해 도주 중에 있습니다."
"뭐라고?"
혈무 속에서 사나운 폭갈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 따위 실수를 해?"
번쩍!
혈무 속의 괴인은 분노성을 터뜨리는가 싶자 그의 혈안으로부터 한 줄기 뇌전이 작렬했다.
"크흑!"
콰당탕!
그 가공할 안광을 접한 청의노인은 피분수를 뿜으며 십여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본좌가 무리하는 것을 알면서도 금사궁을 전격적으로 공격한 것은 금사천존 능사한이 최근에 얻
은 아들놈 때문이었다. 비록 지금 막 태어난 핏덩이에 불과하지만 그놈은 전설로 전해오는 용왕
천인(龍王天人)의 운명을 타고난 놈이었단 말이다!"
"용....용왕천인(龍王天人)!"
청의노인의 강팍한 얼굴에서 하얗게 핏기가 사라졌다. 그런 그의 뇌리로 수천 년의 세월동안 무
림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던 불멸의 전설이 떠올랐던 것이다.
-용왕천인(龍王天人)!
그 존재는 달리 용왕천좌성(龍王天座星)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용왕천인의 전설은 아득한 상고시절, 황제(黃帝)와 싸우다가 탁록(托錄)에서 패해 죽은 치우(蚩尤)
라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연원(淵源)한다.
우주최강의 힘인 뇌기(雷氣)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 무(武)로는 황제를 눌렀으나 지혜(智)에서
패배한 무신(武神) 치우! 그는 참형당하기 직전, 하늘에 대고 다음과 같이 절규했었다고 한다.
-언제고... 나 치우를 능가하는 힘과 황제를 누르는 지혜를 지닌 후인이 현세하리니, 하늘조차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그를 위하여 내가 죽노라! 용왕천인! 용왕천좌성을 위하여...
-용왕천좌성(龍王天座星>
그는 바로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다는 천인(天人)이다.
비록 과장된 전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용왕천인의 운명을 지닌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치우의 파천황적인 무위(武威)와
황제의 천혜(天慧)를 능가하는 전설의 초인이...!
"능사한의 아들 놈이 용왕천인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니..!"
청의노인의 온몸이 삽시에 흥건한 식은땀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 자의 귓전으로 혈신(血神)의 사
악으로 가득찬 음성이 이어졌다.
"본좌는 천기를 읽었다! 능가의 어린 놈이 장차 본좌의 대업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이기에 죽이
라 한 것이었다."
우르르르!
대전이 지진을 만난 듯 굉렬하게 뒤흔들렸다.
청의노인은 사색이 된 채 더욱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고....고정하소서, 혈신이시여! 이미 최고의 추살자(追殺者)들인 십혈랑(十血狼)을 밀파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옥혈전단(地獄血殿團)의 일만(一萬) 살수들까지 풀었은즉, 조만간 삭초제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 일존! 허나.... 우리 혈왕마가(血王魔家)의 지옥율법은 잊지마라. 실패자에게는 죽음보다 더
한 지옥형(地獄刑)이 기다리고 있음을!"
"복명!"
청의노인은 피가 나도록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화르르!
이어 그 자는 황급히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크크크! 무려 일천 년이다! 우리 혈왕마가(血王魔家)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로 군림하고자 천
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시운과 천운이 본가와 함께 하고 있나니.... 이제 용왕천인(龍王天人)의 운
명을 타고난 그 어린 놈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크하하핫!"
청의노인이 사라진 대전을 가공할 마기가 담긴 광소가 부셔 버릴 듯이 울려퍼졌다.
츠츠츠!
그와 아울러, 다시금 핏빛 혈무가 대전을 감쌌다.
헌데 혈왕마가(血王魔家)라니!
정녕 이곳이 바로 천왕팔가(天王八家) 중의 혈왕마가(血王魔家)란 말인가?
천 년 전, 인세에 지옥(地獄)을 재현했던 아수라(阿修羅)의 추종자들의 가문인 혈왕의 가문!
그들이 천년의 세월 속에서 장막을 벗어던지고 출현한 것인가?
아아! 눈에 보이는 듯하지 않은가? 타오르는 지옥겁화 속에 절규하는 무림천하가...!
휘이이!
엄청난 설풍이 강풍을 동반한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부신 백설뿐이었다.
끝없는 은세계가 펼쳐져 있는 이곳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험한 희마랍아산(喜馬拉雅山:大雪山)의
애불륵사봉(崖佛勒斯峯:聖母峯)이었다.
헌데
"헉! 헉!"
생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대악지(大惡地) 애불륵사봉의 눈덮인 산록을 거친 숨을 토하며
질주하는 홍영(紅影) 이 하나 있었다.
홍영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은 산발하여 설풍에 흩날리고 있었으며, 일신에 걸친 의복은 완전히
걸레조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찢겨져 있었다.
이 매서운 한풍과 눈발을 뚫고 이 천험의 절지(絶地)를 질주하는 인물은 놀랍게도 한 명 가녀린
여인이었다.
더구나 이 여인의 의복은 원래 홍의(紅衣)가 아니었다.
피(血)! 섬뜩한 선혈이 뒤범벅이 되어 여인의 백의는 적의(赤衣)로 바뀌어진 것이었다.
거미줄 같은 상흔은 여인의 희디 희고 매끄러운 우유살을 보기 흉하게 가르고 있었다.
"헉...헉! 이곳만 넘으면... 놈들도 쫓지 못한다. 천축(天竺)의 천축무림맹(天竺武林盟)의 영역이므로
이곳만 넘으면 된다. 그 때까지만 제발..."
여인의 탈진된 동공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경공을 펼치고는 있지만 그녀의 걸음은 일반인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먼 길을 온 듯 그녀의 옥용은 창백하기조차 했다.
"제발! 신이시여... 소녀의 운명은 이미 버렸사옵니다. 이 분, 천년제일가(千年第一家)의 마지막 희
망인 우성(雨星) 공자님만이라도...!"
여인의 눈은 간절한 염원을 담은 채 자신의 가슴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은 소중한
보물을 안은 듯 힘있게 하나의 비단 강보를 휘감고 있었다.
그녀의 피로 물든 강보 안엔 아기가 보이고 있었다.
태어난 지 채 한 달도 안 됐을 어린 아기가 강보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살을 에일 듯한 매서운 한풍은 탐스런 아기의 볼을 퍼렇게 물들였다. 살아있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로 파리한 아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아기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한없이 귀여우면서도 고집 서린 도톰한 입술과 선이 굵은 검미는 귀밑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
다.
"헉! 헉! 제발 이곳만이라도 벗어나야 하는데...!"
여인은 혼신의 힘을 끌어올려 다리를 움직였다.
그 때였다.
"킬킬킬! 이제야 오느냐?"
"계집! 감히 본좌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크크크! 지름길로 질러온 보람이 있었구나!"
화르르르! 스스스!
십인(十人)의 혈포인이 유령같이 나타나 여인을 가로막았다.
"흑...흑풍기사단(黑風騎士團)이 벌써 전멸했단 말인가?"
나타난 혈포인들을 본 여인의 안색은 사색이 되었다. 절망과 공포가 구름같이 그녀의 눈망울을
통해 투영되었다.
(하늘이시여...!)
여인의 고운 눈으로 한 줄기의 이슬이 흘러내렸다.
(십혈랑(十血狼)! 추적술과 살전(殺戰)에 능한 저들의 눈에 띄다니...,)
강보의 아기는 그녀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는 듯 깊게 잠들어 있었다. 여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안타까운 눈길로 강보속에 싸인 아기를 보듬어 안았다.
"크크크! 계집! 그 애송이를 내려놓고 죄를 빈다면 한 목숨은 살려주마!"
"흐흐! 네년이 바로 국화미인(菊花美人)이겠구나!"
열명의 혈의인, 십혈랑은 야수와도 같은 음탕한 눈으로 여인의 전신을 탐욕스럽게 훑었다.
이미 걸레조각같이 갈가리 찢겨진 백의 사이로 뽀얀 우유빛 살결이 드러나 있는 여인의 자태는
가히 눈의 요정같이 아름다왔다.
십팔구 세쯤 되었을까? 나이답지 않게 풍염한 그녀의 전신은 폭풍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떨렸다.
(결국 이곳까지 와서...)
여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소공(少公)! 소녀 추수월(秋水月)은 더 이상 소공을 지켜드릴 수 없군요.)
-국화미인(菊花美人) 추수월(秋水月)!
여인의 이름인가?
국화미인이란 별호는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뒤늦게 만개하는 한떨기
국화를 보는 듯했다. 나이는 불과 이십도 채 안 되보였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난숙하
기 이를 데 없었다.
가을날의 청명을 담은 듯한 서글서글한 봉목에는 짖 은 막내동생의 말썽을 자애로움으로 볼 수
있는 부드러움이 담겨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열명 혈의인들을 지켜보는 추수월의 눈매는 서늘하게 치켜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강보의 아기를 꽉 끌어안았다.
"삭초제근(削草制根)! 풀은 뿌리째 뽑아야 하지!"
"더구나 저놈은 우리의 일에 막대한 지장을 줄 우려가 있거든.."
십혈랑은 스산한 살소를 떠올리며 여인을 에워쌌다.
(평소라면 저들을 뿌리칠 수 있으련만, 기력이 쇄진한 틈을 타다니...)
추수월은 파리해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국화미인이란 외호가 말해 주듯 그녀는 무림에 속해 있는 무림인이긴 했지만 타인을 제압하거나
경쟁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의 한몸을 보호하기 위한 경공술 한 가지 만큼
은 확실하게 연성해 두고 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공술을 지닌 그녀였다. 허나 지금 그녀의 몸은 일 마장도 날기 힘들 정
도로 기력이 탈진되어 있었다.
그때 십혈랑이라 자칭한 자들중 선두의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길게 검흔(劒痕)
이 얼굴 왼쪽에 그어져 음충맞게 웃을 때마다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추수월의 황홀하게 아름다운 몸매를 쳐어보며 비릿한 흉소를 흘렸다.
"본좌는 십혈랑의 대형(大兄)인 일혈랑(一血狼) 어르신이다. 사실 그깟 어린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것쯤은 대수로운 게 아니지."
그는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도 그냥 가기엔 수고가 많았단 말이야..."
그의 말에 추수월은 뭔가 작은 서광이 비쳐오는 것을 느꼈다.
"만일... 그대들이 소공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주겠다. 내 목숨이라도...!"
"킬킬! 네 목숨 따위야 우리에겐 관심도 없다. 하지만 네가 살아야 저 어린놈을 양육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말해라! 뭘 원하는지."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 네년이 본좌들을 즐겁게 해주면 우리는 그 어
린 놈을 못 본 척하고 그냥 가 주겠다."
"......"
추수월은 일순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좋...다! 가져라! 내 몸을...주마!"
추수월은 눈을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흐흐 잘 생각했다!"
일혈랑은 음험하게 웃으며 추수월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순간 그 자는 거칠게 추수월을 눈바닥에 밀어 버렸다.
"흐윽!"
추수월은 강보에 쌓인 아기를 끌어안은 채 눈밭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촤악!
그녀가 어찌해 보기도 전에 일혈랑의 손은 그대로 추수월의 치마를 찢어발겼다. 치마가 찢기며
허연 여인의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고, 헝겊으로 가리운 은밀한 부위마저 고의끈이 떨구어지며
우거진 검은 밀림을 보였다.
"빨리...해라!"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추수월은 싸늘한 살기를 발하며 이를 갈았다.
"후후... 이건 어디까지나 네년이 원한 것이다."
말을 하는 중에도 그의 손은 길고 무성한 여인의 신비림을 쓸어가다가 이내 손가락 하나가 어디
론가 사라졌다.
"흐윽!"
추수월은 낮은 신음을 토하며 이를 악물었다.
적당히 벌어져 있는 허벅지의 사이로 사내는 천천히 하의를 까내리며 뒤에서 다가갔다.
추수월의 희멀건 허벅지를 일혈랑은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의 흉칙한 물건을 그
중심부의 균열로 밀어갔다.
거칠고도 깊숙이...!
(아파! 흐윽!)
추수월의 가녀린 교구가 작살에 찔린 물로기마냥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파과(破果)의 아
픔에 진저리를 쳤다.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메마른 살점을 헤집고 파고드는 흉칙한 사내의 실체,
추수월은 생살이 찢기는 처절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신음소리를 삼켰다.
(오...오냐! 언제고 썩어없어질 몸뚱이다! 마음대로 가져라... 하지만 내 기필코 네놈들을 처참하게
죽이고야 말리라...)
추수월은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악물었다.
"흐흐! 이젠 가슴을 한번 볼까?"
일혈랑은 자신의 검붉은 흉기를 추수월의 몸 안으로 일거에 뿌리까지 밀어넣고는 이번에는 그녀
의 앞가슴을 열어젖혔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튀어나오는 저 하얗고 탐스런 유방의 물결... 그것
을 일혈랑은 잔인하게 움켜쥐고는 그대로 입 안으로 가득 베어물었다.
육봉을 이빨로 짖깨물며 그 자는 맹렬하게 하체를 움직였다. 기가막히지 않은가? 멀쩡하게 눈을
뜬 채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자신의 유방을 입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여인의 심
정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분함과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으나 복수라는 단
어와 함께 여인은 통한을 삼켰다.
유방이 주물리고 깨물리면서 자신의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폭풍같이 넘나드는 저 사내의 흉기는
정말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그녀의 하체는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사전에 애무동작도 없이 무조건 돌진하는 사내를 받아들
인 그녀에게 고통은 더욱 배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추수월은 사내의 행위가 급격히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안 돼!)
그녀는 자신을 유린하는 흉기가 급격히 달아오르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고 내심 진저리를
쳤다.
사내의 더러운 분비물이 몸 안에 배설되는 것은 처녀를 빼앗기는 것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일이
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 가혹한 현실에서 달아날 힘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무엇인가 세찬 분출이 자신의 몸 안 깊숙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진저리를
쳤다.
"흐흐! 정말 보기드문 계집이군... 장백산(長白山)같은 곳에 있는 촌년들하곤 달라! 흐으...!..."
잠시 추수월을 짓누른 채 짐승같이 헐떡이며 분출의 쾌감을 음미하던 일혈랑은 추수월의 몸에서
떨어지며 만족한 듯 히죽거렸다.
무참히 벌어진 추수월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온 그 자의 하물은 여전히 거대하게 팽창된 채 붉은
앵혈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이제 추수월이 더 이상 처녀의 몸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추수월이 당할 수난은 그것이 시작일 뿐이었다.
"흐흐! 본좌는 뒤에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일혈랑이 추수월의 몸에서 일어나자 마자 이혈랑(二血狼)이 그 즉시 그녀에게 덮쳐들었다. 그 자
의 요구대로 추수월은 이번엔 짐승의 암컷같은 자세로 엎드려야만 했다.
엎드린 자신의 뒤로 이혈랑이 다가드는 것을 느끼며 추수월은 교구를 떨었다.
희멀건 엉덩이가 그대로 하늘을 향한 채 드러나 있고, 그 사이의 계곡에는 방금 전 일혈랑에게
당한 난행의 흔적이 흥건히 남아 있었다.
사내의 분비물에 섞인 선연한 앵혈이 그녀의 희디흰 허벅지를 타고 흘러 눈밭 위에 붉은 꽃무늬
를 그렸다.
사내의 손이 그런 추수월의 탄력 넘치는 탐스런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흡사 잘익은 하얀 복숭아
(白桃)를 백 배는 증폭시켜 놓은 듯한 그것을 양손으로 잡으며 이혈랑은 무릎을 꿇었다.
"흐흐... 피부가 정말 끝내주는군..."
까칠한 사내의 하초(下草)의 감촉이 느껴지고 이어 일혈랑의 배설의 흔적이 역력한 추수월의 동
굴속으로 또 다른 사내의 거대한 흉기가 한 치 한 치 파고들었다.
(흐윽! 언제고 모조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릴 테다! 이 더러운 색마들!)
추수월은 뒤로부터 삽입되어 목구멍까지 치받히는 듯한 사내의 거대한 실체를 아랫배 그득 느끼
며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오옷! 정말 기가막힌 계집이로군? 헉!"
이혈랑은 그대로 추수월의 둔부를 굳게 잡고는 힘차게 자신의 하체를 밀어갔다.
"흐윽!"
추수월은 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렸다. 자신의 은밀한 동굴을 관통하여 목젖까지 치솟아 오르는
듯한 거대한 사내의 실체는 아픔 이전에 차라리 공포였다.
추수월의 허벅지를 타고 점점이 방울지는 붉은 앵혈이 애처로웠다. 짐승처럼 엎드린 채 뒤로부터
순결을 상실당하는 소녀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흐윽! 소공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치욕도 참을 수 있다!)
추수월은 이를 악물었다.
"아...!"
그러던 어는 순간 추수월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혈랑이 마침내 욕심을 채우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누워라 암캐!"
삼혈랑(三血狼)은 하의를 까내리며 말했다.
추수월은 그 자의 요구대로 누웠다. 유난히 뽀얗고 하얀 피부는 눈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발목은 가늘었다. 그것을 한손으로 잡아 위로 치켜올리자 희멀건 허벅지와 함께 여인의
은밀한 부위가 도발적으로 튀어올랐다. 그녀의 깊은 균열은 두 번에 걸친 능욕의 흔적으로 홍수
가 져 있었다.
그 흥건한 신비의 둔덕을 삼혈랑은 손가락으로 눌렀다.
흡사, 석류(石榴)가 익어 터지듯 갈라지며 드러나는 여인의 붉은 동굴.
삼혈랑은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대로 자신의 하체를 여인의 동굴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입에서는 짧은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흐윽!"
삼혈랑은 그런 그녀의 발목을 양손으로 잡아 든후 그대로 좌우로 활짝 벌렸다. 자신의 어깨 위로
여인의 발을 올려놓은 그는 그대로 손을 내뻗어 그녀의 유방을 움켜쥐었다.
또 한 번 격렬한 능욕이 여체에 가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삼혈랑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는 번들거리는 흉기를 여체에서 이탈시키고는 천천
히 신형을 일으켰다.
"흐흐... 역시 형님들이 미리 즐긴 곳보다는..."
곧이라도 폭발할 듯이 굵은 힘줄을 꿈틀거리며 팽창된 사내의 하물은 여인의 정절을 파괴시킨 피
의 흔적이 역력했다.
"아..."
추수월은 일순 안도의 긴 탄식을 흘렸다. 이제 끝났다는, 세 번째의 처절한 겁탈당하는 시간이 지
나갔다는 안도감의 표현일런지 몰랐다.
하지만 몸 안에서 욕정의 찌꺼기를 배출시키기 전까진 사내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삼혈랑은 그녀의 배를 타고 앉으며 탐스런 육질(肉質)의 봉우리를 움켜쥐었다.
"무, 무슨 짓을...?"
추수월은 또다른 공포에 몸을 떨었다. 자신의 유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가해지며 새하연 설
봉(雪峰)이 갈라져 깊은 계곡을 드러내는데 그 사이로 사내의 더럽혀진 불기둥이 진입하는 것이
아닌가?
두 개의 유방 사이에 파묻힌 사내의 하물은 끝만이 살짝 보일 정도였다. 그런 상태에서 삼혈랑은
하체를 격렬하게 왕복시켰다.
"허억!"
터질 듯한 유방의 살 속에서 조여지는 압박감은 사내에게 당연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흐윽..."
추수월은 수치심에 치를 떨었다.
"으음...!"
삼혈랑은 몸을 경직시키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불기둥에서 거창한 폭발이 일
었다. 허연 액체가 폭포수처럼 뿜어지며 추수월의 가슴과 얼굴 위로 번져갔다.
"이...더러운!"
추수월은 질겁하며 고개를 외면하려 했으나 그녀는 고스란히 사내의 몸에서 뿜어지는 용암을 안
면에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능욕의 시간은 끝이 없었다. 아니 추수월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끝은 있었다.
열 번인가 스무 번인가? 한 번 그녀를 거쳐갔던 사내도 동료들의 행위를 지켜보다가 다시 회가
동하면 재차 그녀를 능욕한 탓에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악몽의 시간도 끝난 것이다. 열 명의 욕정에 굶주린 늑대들에게 당한 추수월은 필사적
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걸래쪽처럼 찢어진 옷을 얼기설기 몸에 걸쳤다. 그리고 그녀는 강보가 있는 곳으로 기어
갔다.
그런데...
"흐으... 정말 몸 한번 잘 풀었군..."
"후훗! 간만에 계집다운 계집을 품었어..."
십혈랑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동시에 검을 뽑아 내뻗는 것이 아닌가?
"잘가랏!"
"혈천비폭섬(血天飛爆閃)!"
십혈랑은 일제히 십방에서 검세를 내쳤다.
"비, 비겁한!"
추수월은 막 최후의 공력을 끌어올려 마주치려다가 그만 안색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십검(十劍)이 한꺼번에 쏘아져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십혈랑은 추수월을 노리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보 속의 어린아이만을
노리며 살초를 휘두른 것이다.
십방(十方)에서 짓쳐드는 십검은 추수월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소공을 필살시키려는 간악한 공세
였다.
국화미인 추수월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피한다면 어린 아기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퍼억!
여인이 입술을 깨물며 아기를 자신의 가슴 속으로 파묻은 직후 열 개의 검은 그녀의 전신을 파고
들었다.
이 숭고한 희생!
추수월은 자신의 몸으로 십혈랑의 공격을 막은 것이었다.
"이런 지독한 계집!"
십혈랑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런다고 무사할 줄 아느냐? 쳐랏!"
혈광천하(血光天下)! 사위가 일순 혈무로 뒤덮이며 전신에 고슴도치같이 열 개의 검을 꽂은 추수
월에게로 폭풍같이 밀어닥쳤다. 국화미인 추수월의 숭엄한 희생도 소용이 없단 말인가?
어느덧 혈광은 추수월의 옷깃에 닿을 정도로 짓쳐들고 있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 닥쳐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아미타불...악독한지고...이 성스런 대지에서 칼부림이라니..!"
한 소리 웅후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든 불호가 설원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설원의
대지 위로 휘황한 금륜강(金輪剛)이 폭풍처럼 휩쓸었다.
"어떤 놈이냐?"
"으윽!"
막 추수월을 격살시키려던 혈광은 백 장을 날아온 금륜강에 산산이 깨어지고 십혈랑은 경호성을
내지르며 신형을 돌렸다.
쐐애애애액!
일천 장 저편에서 금무(金霧)에 싸여 날아오는 인영이 있었다. 인영은 순식간에 지척으로 날아내
렸다.
그 인물은 승인(僧人)이었다. 대략 필순 가량 쯤 되보이는 금의가사를 걸친 긴 금미(金眉)를 지닌
청수한 노승이었는데 얼굴의 윤곽을 보아하니 중원인이 아니고 천축의 인물인 듯했다.
"아미타불!"
금미의 천축국 노승은 장내로 내려서자 십혈랑은 본 체도 않고 황급히 추수월에게로 다가갔다.
"뉘...뉘시온지."
추수월은 흐릿해진 눈까풀을 치켜올리며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아미타불! 여시주야말로 누구신데 이런 곳에서... 으응?"
추수월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던 노승은 일순 그녀 옆에 누워 있는 강보 속의 아기를 발견하고
는 금미를 치켜올리며 두 눈에서 강렬한 기광을 발했다.
"오오! 천기(天機)에 귀인(貴人)이 성모봉에 나타날 것이라고 하여 왔지만 실로 부처님의 뜻이로
다! 아미타불...!"
추위로 피부가 새파래진 아기를 바라보며 노승은 격동을 참지 못하는 듯 연신 불호를 외웠다.
헌데 그때, 마음의 긴장을 풀던 추수월은 눈을 흡뜨며 경호성을 터뜨렸다.
"스님! 조심하세요."
"땡초! 감히 본인들의 일을 방해하다니... 죽어랏!"
"혈천비망폭(血天飛網爆)!"
십혈랑은 독침(毒針), 비검(飛劍)을 노승의 전신으로 날리며 짓쳐들었던 것이다.
(늙은 중! 감히 본각(本閣)의 일에 관여하다니...)
(별것도 아닌 놈인데 괜히 겁먹었잖아? 혈각(血閣)의 십대추적살령(十大追跡殺靈)인 우리 십혈랑
어르신들의 일을 방해해?)
그 자들의 안면으로 잔혹한 미소가 흐른다.
십혈랑(十血狼)-
사실 그들의 출신은 보잘것 없었다. 지금은 열 마리 피의 늑대라는 섬뜩한 별호를 지닌 그들이었
지만 본래 그 자들의 원래 신분은 장백산(長白山)의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호중제왕(虎中帝王)이라는 장백대호(長白大虎)라도 잡는 호렵부(虎獵夫)라도 되느냐 하
면 그렇지도 못했다. 그저 덫이나 놓고 함정이나 파는 어줍잖은 얼치기 사냥꾼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에서 태아났고, 사냥꾼의 피를 이어받은 그들에겐 선천적으로 야성(野性)의 기질이 남아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후각과 밤에도 보이는 안력을 지닌 그들은 짐승 발자국을 손쉽게 찾아내
고, 그 짐승의 종류마저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든 그들의 인생에 전기가 마련된 것은 분명 하늘의 실수였다.
그들은 어느날 한 마리 숫곰에 쫓겨 숨어들어간 깊은 동굴 속에서 사백 년(四百年) 전에 흑도무
림을 주름잡던 천랑객(天狼客)이라는 거마의 무공비급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물론 그 자들은 자질이 일천하기 짝이 없는지라 천랑객의 마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천랑십팔해(天狼十八解)의 열여덟 개 초식 중 가장 쉬운 천랑십초(天狼十招)를 열 명이서 한 가지
씩만을 무려 사 년(四年)에 걸쳐 연성한 후 그들은 마음놓고 사냥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냥한 것은 동물이 아니었다. 장백대호나 설웅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을 뒤쫓다
가 그들이 사냥에 성공하는 순간, 사냥꾼을 사냥하여 사냥물을 노획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
동북무림(東北武林)의 패주는 장백파(長白派)였다.
장맥파의 장문인인 장백신옹(長白神翁) 나백(羅伯)이 우연히 그 자들의 만행을 목도하고, 응징을
한 후 장백산에서 추방시켜 버리고 말았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광명정대한 그의 마음은 훗날 엄청난 재앙이 되
었다.
고향에서 쫓겨난 자들은 우연히 살인청부집단(殺人請負集團)인 흑풍회(黑風會)의 회주(會主)인 흑
풍광마(黑風狂魔) 진광(陳匡)의 눈에 들었다.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특별한 능력, 신기할 정도의 추적술과 잔인한 그들의 심성을
높이 산 것이었다.
사실 흑풍회는 혈각(血閣)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집단의 하부조직이었다.
십혈랑은 탁월한 추적술을 바탕으로 암살 대상자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죽이고야 말았다.
그런 전과가 쌓이면서 상부의 눈에 들었고, 혈각에 특채된 지금엔 그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합공
진법술(合功陣法術)을 혈각에서 전수받아 거의 무적의 경지에 다다라 있는 상태였다.
십혈랑이 각자 연성했던 천랑객의 무공이 열 명의 손에서 펼쳐지며 이뤄내는 진법은 과거의 천랑
객 본인이 펼친 위력보다 두 배 이상이었다.
흑풍광마 진광도 지금 십혈랑의 합공을 받아내지는 못했고, 오히려 십혈랑의 눈치를 보고 있을
정도였다.
피리링! 파파팟!
십혈랑이 전력을 다해 발출한 암기들이 노승의 전신사혈로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승은 전혀
기척도 없었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고오오오...!
휘황하기까지 한 금광(金光)이 노승의 전신에서 번개처럼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한 소리 굉렬한 폭음과 함께 허공을 가득 메우며 짓쳐들던 암기들은 금광에 닿는 순간 한 줌의
가루로 흩날려 갔다.
"안 돼! 크아악!"
"무신(武神)의 경지. 크헉!..."
"으아악!"
십혈랑(十血狼)은 피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찬란한 금광이 사위로 뻗어나가 암기를 박살내
고 십혈랑은 창졸간에 피분수를 뿜으며 눈 속으로 쳐박혀 버리고 말았다.
실로 가공할 무위가 아닐 수 없었다.
금색가사의 노승이 누구기에 십혈랑 같은 고수를 일격에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추수월은 경악하고 말았다.
(십혈랑을 단 일수에 격살시키다니... 중원에선 절정에 드는 고수들이고 합공이라면 무적이라고 불
리는 저들을...)
"아미타불... 조금만 늦었더라도 천추의 한이 될 뻔했도다. 아미타불..."
노승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연신 불호를 되뇌이며 강보를 안아들었다.
그 때였다.
환상이었을까? 아기의 감겼던 눈이 떠지고... 수만 개의 폭죽이 터지듯 아기의 두 눈망울에서 휘
황한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음은...
오랫동안 굶은 듯 핼쓱해진 동안(童顔)과 파리하게 얼어 굳어진 근육을 보이고 있긴 했지만 그
무엇도 지금 아기의 모습을 보기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청룡(靑龍)의 분노인가? 아기의 두 눈은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듯 강렬함마저 담겨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피를 본 눈... 지난 열흘간 중원 십만 리를 횡단하여 그를 위해 죽어간 십만 원혼의
절규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는 듯했다. 인간에 대한 분노와 저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미타불... 천인(天人)의 노함은 인세의 종말을 가져올 뿐이거늘, 용왕천인성(龍王天人星)에 혈살
성(血殺星)이 침범했으니 이것도 부처님의 뜻인가? 아미타불..."
노승은 알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애석한 탄식을 흘렸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사색이 되어
가는 추수월을 돌아보았다.
"스...스님은 뉘신지요?"
추수월은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안타깝게 유지하며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치명적인 십대사혈
에 가격당한 그녀가 이제껏 살아있다는 것도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미타불... 노납은 천축(天竺)에서 온 금령(金靈)이라 하오이다.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시구
료, 여시주... 이 분 귀인은 노납이 책임질 터이니..."
국화미인 추수월! 십만 리 생사지로를 뚫고 오느라 탈진된 그녀는 십대사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설사 의선(醫仙)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노승은 안타깝지만
추수월의 꺼져가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었다.
"소공(少公)은 천년제일가문의 마지막 후손으로... 이름은 화우성(花雨星)...! 끝까지 모시지 못하
여... 죄송...!"
힘겹게 말을 잇던 추수월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미타불...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노승은 조용히 법문을 외우며 눈을 부릅뜬 채 죽은 추수월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노승의 소맷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자 백설이 사방에서 날았다.
설총(雪塚)!
드넓은 대설원 속에 한 개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자신을 희생하고 한 어린 생명을 건진 갸륵한
여심이...
"아미타불... 언제나 이 혈겁이 종식될꼬..."
노승은 한숨을 내쉬며 신형을 날렸다.
휘이이이잉!
매서운 설풍(雪風)은 다시금 인간의 종적을 묻어 버릴 듯이 세차게 설원을 휘몰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분명 이곳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노승이 떠난 지 일 각도 안 돼서 하나의 인영이 장내로 나타났다.
북풍한설같이 차가운 냉기를 날리며 서 있는 인영은 한 명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사십대 중반쯤 되었을까? 하얀 백의에 구름같이 머리를 틀어올린 미부였다.
차가운 냉기가 흐르나 학같이 고귀한 기품을 지닌 여인은 곤혹스런 눈으로 사위를 주시하다가 일
순 가볍게 옥수(玉手)를 휘저었다.
휘르르르!
눈발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한 개의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 있는 추수월의 시신이 나타났다.
벌거벗은 하체에는 무참히 난행을 당한 흔적이 역력하고 온몸은 열 개의 병기에 꿰뚫리어 피가
응결된 볼성사나운 자태였다.
"웬 아이가 이곳에서 죽어 있단 말인가? 감히 본궁의 영역에서 살상을 자행하다니! 음?"
싸늘한 살광을 뿜어내던 백의미부는 이채를 발하며 추수월에게로 다가갔다.
"이... 이럴 수가...!"
추수월의 맥문을 잡아보던 백의미부는 일순 격렬하게 교구를 떨었다.
"태음지신(太陰之身)! 이것이 실제로 인세에 존재하다니? 그것도 성모봉에서 죽은 시신으로..."
그러나, 백의미부의 눈은 추수월을 결코 죽은 자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호호! 비록 전신십대사혈이 뚫리고 경락과 세혈까지 끊기고 내공이 사라졌으나 성모봉의 빙정
(氷精)으로 인하여 다시금 소생하고 있다. 이제 유리빙궁(琉璃氷宮)의 꿈을 이루리라!"
백의미부는 추수월의 몸을 끌어안았다.
"호호호! 십 년 후... 천하는 복수당하리라... 천 년 전 천왕팔가로부터 당한 치욕과 이 아이에게
가한 혈한(血恨)이 동시에 보복당할 것이다! 유리빙궁의 일천 년 힘과 탄생될 복수빙화(復讐氷花)
에 의해..."
휘이이잉!
바람이 분다. 성모봉 전체를 날려 버릴 정도로 극맹한 빙풍(氷風)을 뚫고 두 여인이 사라져갔다.
어린 주인을 구하기 위해 희생의 길을 걸었던 국화미인 추수월과 그를 죽이기 위해 쫓던 지옥에
서 온 죽음의 추적자들...
금령이라는 노승...
천축무림맹!
유리빙궁!
기억하라!
일천 년 무림역사를 뒤바꿀 운명은 지상 최고(最高)의 대산(大山)인 성모봉으로부터 시작되었음
을...
세월은 유수라 했던가?
희마랍아산의 성모봉에서 참극이 벌어진 후 사계절이 바뀌길 열여덟 차례, 십팔 년이란 시간은
살같이 흘러갔다.
물론 그 십팔 년이란 세월도 억겁의 대자연에 비하면 실로 수유의 시각이겠으나...!
번쩍!
한 줄기 새파란 뇌전(雷電)과 섬광(閃光)이 흑천을 두 쪽으로 가르며 사라졌다.
콰콰르릉!
이어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 엄청난 뇌성벽력이 대지를 뒤흔든다.
그 사이로 장대같이 쏟아져 내리는 폭우!
인세의 종말인가? 천지가 개벽하는가? 대황야(大荒野)는 뇌전이 작렬할 때마다 치부를 드러내며
광란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쐐애액!
대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뇌성을 꿰뚫고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선열한 벽력이 폭죽처럼 터지며
대지를 대낮같이 휘황하게 밝혔다.
그 사이로 비록 흐릿하지만 분명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형용할 수 없으리
만큼 가공할 속도로 대황야를 가로지르는 괴인영이 있었던 것이다.
휘황한 뇌전이 대지를 양단한다.
"벽력(霹靂)과 뇌전(雷電)! 나는 너희들이 좋다!"
벽력성과 광풍우 속을 꿰뚫으며 낭랑하게 퍼지는, 그러면서도 패기에 넘치는 사자후(獅子吼)가 있
었다.
꽝! 콰르르르르!
새파란 섬광이 천지를 휘황찬란하게 양광으로 물들일 때, 질주하던 괴인영은 그 자리에 우뚝 섰
다.
거칠 것 없는 광야의 한가운데 태산처럼 우뚝 선 채 미친 듯이 광란하는 벽력과 뇌전 사이로 괴
인영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괴인영(怪人影)은 뜻밖에도 십칠팔 세쯤 되었을까한 미청년이었다. 그는 중요한 부분만을 겨우 백
호피(白虎皮)로 가린, 거의 나신에 가까운 야성적인 미청년이었다.
귀밑까지 뻗어내린 강인한 선의 검미 아래로는 한 쌍의 눈이 찬란하게 타오른다. 일만 개 뇌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이 빛나는 동공, 그것은 강인한 패기와 뇌룡의 눈을 닮은 가공할 예기(銳氣)
가 서려 있었다.
또한, 번쩍이는 섬광에 드러난 미청년의 몸은 아직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잘 발달되어 있었다. 탄탄
한 근육질의 동체는 억수같은 비에 젖어 싱그러운 야성미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미청년은 작렬
하는 뇌전을 모조리 끌어안겠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려 하늘로 향했다.
"나는 벽력성(霹靂聲)이 좋다!"
그의 두 눈에는 강렬한 열기가 어려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콰르르릉!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벽력성이 마치 미청년의 몸에서 울려오듯 터지더니 현천(玄
天)을 찢어발기는 것이 아닌가?
"하하핫..."
미청년은 폭멸하는 섬광과 함께 황홀한 듯 호쾌한 대소를 터뜨리며 신형을 날렸다.
천지개벽의 광란에 휩싸인 대광야!
"저 뇌전의 강함과 대지를 가르는 패력(覇力)은 나 화우성(花雨星)의 가슴을 터뜨려 버릴 듯이 흥
분시킨다!"
벽력(霹靂)을 사랑하는 야성의 잠룡(潛龍)!
이 이야기는 뇌성벽력이 광란하는 천축의 오지인 천뢰대광야(天雷大廣野)로부터 시작된다. 벽력
(霹靂)을 유난히 좋아하는 어린 뇌룡(雷龍)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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