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는 즐거움 19,20
19. 새로움
순수한 사랑, 위대한 사랑이라는 그런 허울만 좋은 말을 나는 입에 담지 않는다. 모든 여성들이 한번쯤은 위대한 사랑을 꿈꾸며 열병을 앓는다. 그런데 아마 그런 경험은 일찍하면 일찍할수록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예방주사를 맞아서 얻는 면역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함께 죽을 용기가 없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진부한 얘기로 전락하고 만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리면, 인생이 끝나버리는 것 같다. 정말이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를 한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분명한 사실이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손수건에 눈물을 적시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허벅지 사이가 몹시 뜨거워진다. 그러면 싫든좋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추잡해 보이겠지만, 여자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항상 남근에 대한 욕망이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거기다가 약간의 유모어를 섞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항상 새로운 남자를 찾아 다니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나 같은 직장을 가진 남자는 절대로 다시 선택하지 않는다. 안경 쓴 남자도 한번이면 끝이고, 붉은 머리 남자도 한번이면 끝이다.... 어떤 식인지 아시겠죠?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순간이 온다. 내 나이에 양보를 않고 원칙만 고수하면 일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경찰 나부랭이의 품에 안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아무리 마음에 드는 남자를 구하기가 힘들다고 해도, 외팔이나 앉은뱅이는 곤란하다.
검은 피부의 살맛도 보고 싶고, 거칠은 외국 엑센트로 고막을 간지럽혀 보는 것도 싫지 않을 것 같아서 외국 대사관 주변을 서성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금방 단념하고 말았다.
지난 주에 나는 원칙이 깨지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 곁에서 자고 있
는 남자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로는 두번째다. 텔레비전 방송기자, 라디오 방송기자, 신문기자, 이 모두를 다 나는 각각 다른 직업으로 친다. 그런데 그는 신문기자로서만 두번째 남자다.
나는 점이나 흉터 따위의 하잘 것 없는 특징이라도 찾아내어 내 선택을 정당화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가 나를 속이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내 마음에 들었다. 왜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정말 늙어 가고 있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편을 드는 신이 존재함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결국 나는 내 원칙을 어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잘생긴 얼굴에 바보같은 농담도 잘하는 그 남자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내가 세운 원칙에 어긋나지 않은 남자였다. 내게 임질을 옯겨준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20. 작별
당신!
서로 말을 놓기로 한 그날 밤 이후로 우리는 한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 속에서 그대를 부를 때, 너라고 하지 못하고 항상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그날 밤 약속한 말놓기가 조금씩 숙성해 가던 우리 사이를 영원히 갈라 놓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 당신은 내 추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때의 설레이는 내 가슴 속에 새겨졌던 감미로운 꿈들 중 어느 하나 되새겨 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미칠 것만 같이 황홀했던 지난 시절을 시간의 베틀 위에 놓고 한 올 한 올, 안팎으로 어디 하나 빠짐없이 길쌈을 해봅니다. 올이 하나 만들어지면 또 한없이 생각에 잠깁니다. 율리시즈의 아내 페넬로페처럼 천을 짜다가, 다시 풀고, 또 짜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겁니다. 누가 내게 누구를 위한 길쌈이냐고 물어오면 나역시 페넬로페처럼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찬란하고도 초라한 나의 피륙은 끝내 미완으로 남아 아쉬움을 줍니다.
우리 둘, 어느 누구도 관습의 굴레에 얽매일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회했던 곳은 바로 그 관습의 높은 울타리 안이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불같이 행동한 걸로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착각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한번도 격식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는 악수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악수가 길어지면, 손바닥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전해져 왔고, 그러면 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그 때 만약 당신이 호텔이름과 호실을 귓속말로 전해주었더라면 나는 그날 밤 바로 당신 방에 쳐들어 갔을 겁니다. 미친 짓이라 해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과일 속에는 벌레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는 감히 당신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애간장을 녹일 정도는 아
니지만 당신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이 곳곳에 숨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오금이 저리도록 열망하던 부드러운 금발에 맑은 두 눈을 가진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상형으로 그리던 남성상과는 정반대인 당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집에 돌아오면서였습니다..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얼마나 내가 당신을 그렸는지를! 여러 달에 걸쳐 밤낮으로, 움푹 들어간 눈 속에서 반짝이는 당신의 눈동자, 솜사탕 같은 당신의 목소리, 그리고 부드럽기 이를데 없는 당신의 손길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 구석구석을 쉴새없이 어루만졌고, 그러면 나는 흥분으로 기진맥진하여 어쩔줄 몰랐습니다.
지난 여름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의 눈에는 내가 틀림없이 멍청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 때, 나의 무기력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당신 앞에 서자, 나는, 관자놀이의 핏줄이 쿵덕이기 시작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질문이라고 한 건 얼마나 바보같았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전문가답게 기계적이긴 했지만 충실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대답이 귀에는 들어왔지만, 머리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뒤, 그제서야 대답의 의미를 파악하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나자신을 얼마나 속으로 욕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 다행인 것은 그것이 당신과의 만남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된 우리들의 게임에서 당신은 한량없는 참을성을 보였습니다. 그런 느긋함에는 어떤 여자의 감정도 도발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많았습니다. 규칙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빈번한 상면이 오히려 내 신경을 병들게 했고, 신경과민으로 인한 불안과 초조가 내 마음 속에서 독초처럼 자라 진하게 향기를 피웠습니다.
당신이 남긴 언동의 편린이 거름이 되어 날이 갈수록 독초는
더 무성해졌습니다. 당신의 매력은 외관에 머물지만 않았습니다. 유모어 감각, 폭넓은 감수성, 점잖음, 품위있는 매너...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내 열정을 부풀게 했고, 잠자리에서 몸을 뒤틀게 만들었습니다.
저녁마다, 우리는 지친 몸으로 우리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채우지 못한 욕망의 노예가 된 나는 방문에 와닿는 가벼운 노크 소리나 전화 벨 소리가 나를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합니다. 헛된 꿈인 줄 알면서도 몇 시간씩 그렇게 신호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잠의 늪에 빠져들고 맙니다. 졸음이 당신 보다는 훨씬 더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몇 주일씩 상면을 못하고 떨어져 있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팽개쳐 두었던 메모들을 모아 작업을 했습니다. 우리는 짤막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때로는 당신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거나, 내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며 다음 만날 약속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예절바르고 섬세한 당신의 전언에 나는 한없는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전화로 속내 이야기를 길게 나누다 보니 내밀한 관계에 빠져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로 말을 하는 사람은 당신이었지만, 대화의 법칙이란 게 어디 그렇습니까, 나도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미묘한 대화방식 덕택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항상 당신은 당신을 닮은 그림엽서를 보내 주었습니다. 어찌 그런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정성으로 보내주신 그림엽서는 잘 모아 고이 간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석양의 지붕 위에서 노니는 모습을 담은 그림엽서를 우체통에서 발견했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하면 췌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욕망의 음습함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그것
도 직접적이지 못하고 농담조였죠. 아마 로날드 썰의 피크닉과 풀밭에서 뒹구는 두 마리의 고양이 얘기를 했을 겁니다.
종기가 곪기 시작했던가요? 나는 점점 미친 듯한 몽상에 아무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빠져들어 갔습니다. 몽상을 하게 만든 사람에게는 전혀 원망의 감정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이상한 친밀감을 느끼면서. 마치 그렇게 해서 용서라도 받고 싶은 것처럼.
공범의 미소가 차츰 한숨과 불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씀드릴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우리들의 관계를 그 정도의 선에서 유지시켜 준 당신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운명의 그날 밤까지 우리들의 관계는 다정한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 그 밤, 내 가슴은 찢어졌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에게도 비극적이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눈에 이슬이 맺히던 그날 밤, 나는 짐짓 명랑함을 과장했습니다. 마지막 공연이었었죠? 공연이 끝나고 열광한 관객들은 한번 꺼지면 영원히 다시 켜지지 않을 슬픈 조명 아래서 환호와 박수로 아쉬움을 표현했습니다.
정말 찬란한 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내 행복의 보석상자에서 패물을 꺼냈습니다. 나는 때때로 맑은 보석을 거울삼아 내 서글픈 추억들을 반추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마치 공연이 계속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대에 올라가는 순서대로 세심하게 정리되어 있던 소품들과 꽃다발 한복판에서 말없이 화장을 지우던 일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친구들이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회식자리에 대해서만 한마디 해 볼까하는데....
당신 부인은 그런 시끌벅적한 일들이 지겨워서 먼 나라로 피신해 있다고 했죠? 식사 중에 당신은 몇 번씩이나 시계를 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쯤 거기는 오후 늦은 시간일 겁니다. 아마 차를 한잔하러 나갔을지도 몰라요. 조금 더 있으면 저녁 먹으러 갈 것이고. 당신 부인이 저녁 식사하
러 나갔을 쯤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회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당신과 나만 남아 호텔까지 걸어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각자 향해야 할 길이 서로 달랐습니다. 호텔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든 우리는 엘리베이터 속에 몸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층에 복도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묵고 있었습니다. 나는 서둘러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아녜요, 제가 방까지 모셔다 드리죠."
당신이 말했습니다.
방까지는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끼워 돌리는데 당신이 말했습니다.
"오! 여기 계셨군요.지난 번에 로잔느에 와서 노래할 때 제가 묵었던 방이 바로 이 방입니다."
두번째로 인사를 하기 위해 내가 볼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 채지 못하고 당신은 아주 자연스런 동작으로 내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방안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잔 더 하실래요?"
내가 은근히 권했습니다.
문은 여전히 반쯤 열려 있었고, 당신은 내 권유를 뿌리쳤습니다. 기진맥진한 나는 침대 위에 외투를 던지고 돌아섰습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습니다. 외투 앞섶을 무심결에 풀어 헤친 채, 짙은 색상의 빨간 목도리를 목에 감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내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당신의 눈에서도 마침내 욕망의 불길이 일었습니다.
작은 동작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어떤 몸짓이라도 좋았습니다. 손가락으로 문을 밀고, 손을 내밀기만 하더라도.... 그런 장면을 나는 수없이 많이 연기했더랬습니다. 백가지 천가지 다른 방식으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손길이 내 블라우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당신의 숨결이 내 목을 감싸고, 당신의 입술이 내 살갗을 간지럽힘을
느낌니다.
하지만, 그날 밤, 당신은 너무 지나친 요구를 했습니다. 당신이 사로잡혀 있던 그 텅빈 느낌을 나로서는 도저히 채워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그러하던 대로, 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동작도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한없이 서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정숙하게 볼에 입을 맞추고 당신은 돌아섰습니다.
문이 닫히자, 나는 문에 기대서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순수한 사랑, 위대한 사랑이라는 그런 허울만 좋은 말을 나는 입에 담지 않는다. 모든 여성들이 한번쯤은 위대한 사랑을 꿈꾸며 열병을 앓는다. 그런데 아마 그런 경험은 일찍하면 일찍할수록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예방주사를 맞아서 얻는 면역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함께 죽을 용기가 없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진부한 얘기로 전락하고 만다. 대부분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리면, 인생이 끝나버리는 것 같다. 정말이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를 한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분명한 사실이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손수건에 눈물을 적시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허벅지 사이가 몹시 뜨거워진다. 그러면 싫든좋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추잡해 보이겠지만, 여자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항상 남근에 대한 욕망이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거기다가 약간의 유모어를 섞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항상 새로운 남자를 찾아 다니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나 같은 직장을 가진 남자는 절대로 다시 선택하지 않는다. 안경 쓴 남자도 한번이면 끝이고, 붉은 머리 남자도 한번이면 끝이다.... 어떤 식인지 아시겠죠?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순간이 온다. 내 나이에 양보를 않고 원칙만 고수하면 일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경찰 나부랭이의 품에 안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아무리 마음에 드는 남자를 구하기가 힘들다고 해도, 외팔이나 앉은뱅이는 곤란하다.
검은 피부의 살맛도 보고 싶고, 거칠은 외국 엑센트로 고막을 간지럽혀 보는 것도 싫지 않을 것 같아서 외국 대사관 주변을 서성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금방 단념하고 말았다.
지난 주에 나는 원칙이 깨지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내 곁에서 자고 있
는 남자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로는 두번째다. 텔레비전 방송기자, 라디오 방송기자, 신문기자, 이 모두를 다 나는 각각 다른 직업으로 친다. 그런데 그는 신문기자로서만 두번째 남자다.
나는 점이나 흉터 따위의 하잘 것 없는 특징이라도 찾아내어 내 선택을 정당화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가 나를 속이고 만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내 마음에 들었다. 왜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정말 늙어 가고 있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내 편을 드는 신이 존재함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결국 나는 내 원칙을 어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잘생긴 얼굴에 바보같은 농담도 잘하는 그 남자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내가 세운 원칙에 어긋나지 않은 남자였다. 내게 임질을 옯겨준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20. 작별
당신!
서로 말을 놓기로 한 그날 밤 이후로 우리는 한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 속에서 그대를 부를 때, 너라고 하지 못하고 항상 당신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그날 밤 약속한 말놓기가 조금씩 숙성해 가던 우리 사이를 영원히 갈라 놓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 당신은 내 추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때의 설레이는 내 가슴 속에 새겨졌던 감미로운 꿈들 중 어느 하나 되새겨 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미칠 것만 같이 황홀했던 지난 시절을 시간의 베틀 위에 놓고 한 올 한 올, 안팎으로 어디 하나 빠짐없이 길쌈을 해봅니다. 올이 하나 만들어지면 또 한없이 생각에 잠깁니다. 율리시즈의 아내 페넬로페처럼 천을 짜다가, 다시 풀고, 또 짜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겁니다. 누가 내게 누구를 위한 길쌈이냐고 물어오면 나역시 페넬로페처럼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찬란하고도 초라한 나의 피륙은 끝내 미완으로 남아 아쉬움을 줍니다.
우리 둘, 어느 누구도 관습의 굴레에 얽매일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회했던 곳은 바로 그 관습의 높은 울타리 안이었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불같이 행동한 걸로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착각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한번도 격식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는 악수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악수가 길어지면, 손바닥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전해져 왔고, 그러면 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그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그 때 만약 당신이 호텔이름과 호실을 귓속말로 전해주었더라면 나는 그날 밤 바로 당신 방에 쳐들어 갔을 겁니다. 미친 짓이라 해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과일 속에는 벌레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는 감히 당신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애간장을 녹일 정도는 아
니지만 당신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매력이 곳곳에 숨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가 오금이 저리도록 열망하던 부드러운 금발에 맑은 두 눈을 가진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상형으로 그리던 남성상과는 정반대인 당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집에 돌아오면서였습니다..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얼마나 내가 당신을 그렸는지를! 여러 달에 걸쳐 밤낮으로, 움푹 들어간 눈 속에서 반짝이는 당신의 눈동자, 솜사탕 같은 당신의 목소리, 그리고 부드럽기 이를데 없는 당신의 손길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 구석구석을 쉴새없이 어루만졌고, 그러면 나는 흥분으로 기진맥진하여 어쩔줄 몰랐습니다.
지난 여름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의 눈에는 내가 틀림없이 멍청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 때, 나의 무기력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당신 앞에 서자, 나는, 관자놀이의 핏줄이 쿵덕이기 시작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또 질문이라고 한 건 얼마나 바보같았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은 전문가답게 기계적이긴 했지만 충실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대답이 귀에는 들어왔지만, 머리에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뒤, 그제서야 대답의 의미를 파악하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나자신을 얼마나 속으로 욕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 다행인 것은 그것이 당신과의 만남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된 우리들의 게임에서 당신은 한량없는 참을성을 보였습니다. 그런 느긋함에는 어떤 여자의 감정도 도발되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많았습니다. 규칙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빈번한 상면이 오히려 내 신경을 병들게 했고, 신경과민으로 인한 불안과 초조가 내 마음 속에서 독초처럼 자라 진하게 향기를 피웠습니다.
당신이 남긴 언동의 편린이 거름이 되어 날이 갈수록 독초는
더 무성해졌습니다. 당신의 매력은 외관에 머물지만 않았습니다. 유모어 감각, 폭넓은 감수성, 점잖음, 품위있는 매너...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내 열정을 부풀게 했고, 잠자리에서 몸을 뒤틀게 만들었습니다.
저녁마다, 우리는 지친 몸으로 우리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채우지 못한 욕망의 노예가 된 나는 방문에 와닿는 가벼운 노크 소리나 전화 벨 소리가 나를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합니다. 헛된 꿈인 줄 알면서도 몇 시간씩 그렇게 신호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잠의 늪에 빠져들고 맙니다. 졸음이 당신 보다는 훨씬 더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몇 주일씩 상면을 못하고 떨어져 있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팽개쳐 두었던 메모들을 모아 작업을 했습니다. 우리는 짤막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때로는 당신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거나, 내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며 다음 만날 약속을 정하기도 했습니다. 예절바르고 섬세한 당신의 전언에 나는 한없는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전화로 속내 이야기를 길게 나누다 보니 내밀한 관계에 빠져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주로 말을 하는 사람은 당신이었지만, 대화의 법칙이란 게 어디 그렇습니까, 나도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미묘한 대화방식 덕택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항상 당신은 당신을 닮은 그림엽서를 보내 주었습니다. 어찌 그런 섬세한 마음 씀씀이가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정성으로 보내주신 그림엽서는 잘 모아 고이 간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석양의 지붕 위에서 노니는 모습을 담은 그림엽서를 우체통에서 발견했습니다. 더 이상 말을 하면 췌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욕망의 음습함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그것
도 직접적이지 못하고 농담조였죠. 아마 로날드 썰의 피크닉과 풀밭에서 뒹구는 두 마리의 고양이 얘기를 했을 겁니다.
종기가 곪기 시작했던가요? 나는 점점 미친 듯한 몽상에 아무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빠져들어 갔습니다. 몽상을 하게 만든 사람에게는 전혀 원망의 감정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이상한 친밀감을 느끼면서. 마치 그렇게 해서 용서라도 받고 싶은 것처럼.
공범의 미소가 차츰 한숨과 불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씀드릴 기회는 없었습니다만 우리들의 관계를 그 정도의 선에서 유지시켜 준 당신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운명의 그날 밤까지 우리들의 관계는 다정한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 그 밤, 내 가슴은 찢어졌고,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에게도 비극적이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눈에 이슬이 맺히던 그날 밤, 나는 짐짓 명랑함을 과장했습니다. 마지막 공연이었었죠? 공연이 끝나고 열광한 관객들은 한번 꺼지면 영원히 다시 켜지지 않을 슬픈 조명 아래서 환호와 박수로 아쉬움을 표현했습니다.
정말 찬란한 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내 행복의 보석상자에서 패물을 꺼냈습니다. 나는 때때로 맑은 보석을 거울삼아 내 서글픈 추억들을 반추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마치 공연이 계속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대에 올라가는 순서대로 세심하게 정리되어 있던 소품들과 꽃다발 한복판에서 말없이 화장을 지우던 일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친구들이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회식자리에 대해서만 한마디 해 볼까하는데....
당신 부인은 그런 시끌벅적한 일들이 지겨워서 먼 나라로 피신해 있다고 했죠? 식사 중에 당신은 몇 번씩이나 시계를 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쯤 거기는 오후 늦은 시간일 겁니다. 아마 차를 한잔하러 나갔을지도 몰라요. 조금 더 있으면 저녁 먹으러 갈 것이고. 당신 부인이 저녁 식사하
러 나갔을 쯤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회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당신과 나만 남아 호텔까지 걸어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각자 향해야 할 길이 서로 달랐습니다. 호텔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든 우리는 엘리베이터 속에 몸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층에 복도 이쪽 끝과 저쪽 끝에 묵고 있었습니다. 나는 서둘러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아녜요, 제가 방까지 모셔다 드리죠."
당신이 말했습니다.
방까지는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끼워 돌리는데 당신이 말했습니다.
"오! 여기 계셨군요.지난 번에 로잔느에 와서 노래할 때 제가 묵었던 방이 바로 이 방입니다."
두번째로 인사를 하기 위해 내가 볼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 채지 못하고 당신은 아주 자연스런 동작으로 내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방안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잔 더 하실래요?"
내가 은근히 권했습니다.
문은 여전히 반쯤 열려 있었고, 당신은 내 권유를 뿌리쳤습니다. 기진맥진한 나는 침대 위에 외투를 던지고 돌아섰습니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습니다. 외투 앞섶을 무심결에 풀어 헤친 채, 짙은 색상의 빨간 목도리를 목에 감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내 아랫도리 깊숙한 곳에서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당신의 눈에서도 마침내 욕망의 불길이 일었습니다.
작은 동작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어떤 몸짓이라도 좋았습니다. 손가락으로 문을 밀고, 손을 내밀기만 하더라도.... 그런 장면을 나는 수없이 많이 연기했더랬습니다. 백가지 천가지 다른 방식으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당신의 손길이 내 블라우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고, 당신의 숨결이 내 목을 감싸고, 당신의 입술이 내 살갗을 간지럽힘을
느낌니다.
하지만, 그날 밤, 당신은 너무 지나친 요구를 했습니다. 당신이 사로잡혀 있던 그 텅빈 느낌을 나로서는 도저히 채워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늘 그러하던 대로, 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동작도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한없이 서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정숙하게 볼에 입을 맞추고 당신은 돌아섰습니다.
문이 닫히자, 나는 문에 기대서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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