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쫑아-완결
제 목 : 11월, 떠날때는 뒤돌아보지 말 것.. 3 <제80회>
다시 두시간이 지나가자, H는 이번에는 경희의 집에 전화를 걸었
다. 아직도 귀가하지 않았다고 그녀의 여동생이 말해주었다.
또 한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H는 펑펑 내리고 있는 함박눈에 젖지 않기 위해서 공중전화박스
로 피신했다가, 경희가 오는지 보려고 밖으로 뛰어나오는 동작을
규칙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깊은밤의 추위로 온몸은
얼어붙고 있었다. 경희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이제 H는 경희를 단념하고 있었다. 그는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를 만나지 않으려 한다는 슬픈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
다. 또 그녀는 분명히 집에 있을거라는, 여동생에게 거짓말을 시킨
거라고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이때, 저만치에서 경희가 아파트촌 입구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
선 H는 반가웠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마음과는 달리 얼굴은 딱딱
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
라 있었다. 전혀 화장을 하지도 않았고, 옷차림도 간편한게 집안에
서 지낼 때의 꾸밈이 없는, 즉 나쁘게 말하자면 아무렇게나 하고
나온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그녀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또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나타났다는게, 그를 향하여 <
<빨리 꺼져버려>> 하고 모욕을 주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H는 무표정한 경희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머릿속이 텅비어버린
깡통처럼 할말이 없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가, 내앞에 서있는 이여자가 맞긴 맞
는걸까?>
H는 뭐라구 할말이 없었다. 경희도 말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먼저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건지도 몰랐다.
두사람은 먼저 자신이 말하게 되면, 엄청난 손해라도 입을까봐 그
러는 사람들처럼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연신 함
박눈이 둘의 머리칼을,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H는 무거운 침묵을 깼다.
"집에 들어가. 감기에 걸리겠어."
H는 자신이 생각해도, 냉기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뒤돌아서더니 경희에게 등을 보이며 성큼성
큼 두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떠나고 있었다.
<붙잡아. 아직도 날 사랑한다면...>
그러나 H의 등뒤로부터 어떠한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칼로 무수히 난도질을 당한 가슴처럼, 극심하게 고통스러
웠다.
<절대로,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겠어. 절대로.>
H는 몇걸음 더 걷다가 이내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돌아 보았다. 경희가 하염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서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지니고서.
아무도 없었다.
다만 깊은밤의 어둠과 내리는 함박눈뿐이었다.
H의 가슴으로 아픔은 비수가 되어 깊숙히 꽂혔다. 그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뒤돌아섰다.
H는 함박눈에 젖으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쫑아를 버린
대가로, 하늘의 처벌을 받은거라며 뼈저리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경희는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걸어서 승강기앞에 당도했다. 버튼을 누르자 스르르르 문
은 열렸다. 그안으로 그녀는 들어갔다. 승강기는 위로 올라갔다. 승
강기벽에 붙어있는 거울에는 화장을 안한 여자의 차가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냉혹했다.
그리고 나쁜 여자이기도 했다.
<헤어졌던 애인과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는걸,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요. 사랑했어요, 오빠.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의 순결을
드린거예요. 제가 싫어져서 떠난거라고 알고 있는게, 차라리 오빠에
게는 더 좋을거란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저를 용
서하세요.>
제 목 : 12월23일날, 섹스 그리고.. 1 <제81회>
쫑아도... 경희도... 떠났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H는 자기방 책상에 앉아 스탠드만 켜둔채,
새카맣게 죽어버린 모니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안
으로 자기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넌 어떡하다가 그리도 혼자가 된거니?>
H는 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또다른 자기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쁜말도 했다.
<넌 사랑을 할줄 모르는거야. 어쩌면 영원히 사랑이란걸 할 수 없
는 오직 한명의 남자인지도 몰라.>
갑자기 H는 자기자신이 불쌍하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는 경희
가 생각났다. 그는 서랍을 열었다. 조개껍데기를 연결하여 만든 목
걸이가 들어 있었다. 바다의 향기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거기에서
그는 제동을 걸었다.
얼른 냉정하게 서랍을 닫았다. 그는 경희와 헤어진 날로부터 자신
의 기억속에 살아서 숨을 쉬고있는 사랑의 추억을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그것도 새하얀 여백만 남게 깡그리 DELETE(삭제). 다행
스럽게도 그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H는 이번에는 쫑아가 생각났다. 그는 늘 쫑아를 새하얗게 잊었다
고, 아니 잊었다는것조차 까맣게 잊고 지내는듯하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날 때가 많았다. 그녀와 지내던 시절과 상황이나 분위기가 흡
사할 때, 이제는 신림동에 가야할 용건이 사라졌지만 어쩌다가 거
길 스쳐 지나가기라도 할 때, 때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때마다
H는 어떻게 쫑아가 지내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또 그는 조심
스럽게 그녀가 자기자신을 희미하게라도 기억하고 있는지도...
불현 듯, H는 소정이가 떠올랐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여름날이
지난후론 그녀와 오랫동안 만난적이 없었다. 언제나 늘 먼저 그를
찾던 그녀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고있는 그녀의 안부가
그는 몹시 궁금해졌다. 또 지금의 그는 자신의 우울함을 치유해줄
따뜻한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다. 그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면 소정이가 살고있는 집에 밤 10시쯤에 도착
할수 있었다. 잠깐 그는 미리 그녀에게 연락을 줄까 했다가 관두기
로 했다. 갑자기 그는 놀래줄 계획이 떠올랐기때문이었다.
밤 10시즈음해서 H는 소정이가 살고있는 다세대주택앞에 도착했
다. 그는 철문을 통과하여 서두르지않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차근차
근 올라갔다.
이윽고 현관문이 나타났다. H는 천천히 현관문을 당겼지만, 역시
예상한데로 열리지 않았다. 초인종은 없었기 때문에, 또 그는 소정
이를 불러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게 되면 놀래주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손으로 청동제 현관문을 두드렸다. 겨울밤
의 싸늘한 공기를 타고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때문에 그는
아래층에 살고있는, 주위 주택에 살고있는 동네 사람들이 창으로,
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힐끔거릴까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누구세요?"
현관문 반대편에서 반가운 소정이의 변함없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H는 일부러 대답을 안했다.
"누구세요?"
또다시 소정이는 묻고 있었다. H는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참아냈다.
얼마동안 조용해지자 H는 다시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소정이는 다시금 물었다. 여전히 H는 일부러 대답을 안했다.
잠시 조용하더니 요란하게 잠금쇠가 제껴지는 소리가 나면서 현
관문은 조심스럽게 빼꼼히 열렸다. 그런 문틈으로 소정이는 내다보
았다. H가 미소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그녀는 경계심을 풀
면서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는 약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왠일이세요?"
H는 즐겁게 말했다.
"찾아온 저를 계속해서 추운 바깥에 세워두실거예요."
그제서야 소정이는 길을 비켜주었다. 거기로 H는 따뜻한 온기를
품고있는 실내로 들어갔다. 그의 뒤로 그녀는 현관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집안은 예전과 비교해 변한게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드러
누워 있었는지, 그가 들어간 안방에 놓여있는 침대위는 헝클어져
있었다.
이윽고 따라 들어온 소정이는 곧바로 침대위로 올라가 누웠다.
제 목 : 12월23일날, 섹스 그리고.. 2 <제82회>
그녀는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자세로 원형 테이블에 꽂혀있던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자기자신을 바라보고있는 H와 시선을 맞추었
다. 테이블위에 놓여있는 귀여운 꽃병에는 싱싱한 장미가 한송이
꽂혀 있었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있는 소정이의 거리감을 느끼
게 만드는 행동처럼, 그녀는 과거의 열정적인 태도로 H를 대하지
않았다. 어딘가 사뭇 냉랭한게 그녀는 그때의(경희와 H가 함께한
광경을 신림동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차가운 미소를 그에게 보내
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울한 어떤 문제로 그녀는 유쾌하지 않은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날을 잘못 선택해서 찾아온건가!>
H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소정씨, 저를 그런 눈으로 보지마세요. 전 나쁜짓을 한것도 없고,
나쁜짓을 할 생각도 없어요."
소정이는 여전히 침대에 배를 깔고 누운 자세로 냉랭하게 대꾸했
다.
"과연 그럴까요?"
약간 H는 얼굴이 흐려졌다.
"어쩐지 소정씨는 찾아온 저를 환영하는 것 같진 않군요."
"솔직히 그래요."
"쫑아때문이군요?"
그러나 소정이는 H의 말에 아무런 대답없이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절 찾아오신거예요? 먼저 저를 찾은적은 한
번도 없는거로 알고 있는데요."
"그, 그랬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사랑따위를 하는 관계가 아니예요.
설마 부담없는 관계란걸 잊으신건 아니겠죠? 더구나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는 종희를(쫑아) 철저하게 즐기다가 단물이 빠져버린 껌
을 뱉듯 상처를 준 H가 곱게 보일 리가 없잖아요. 종희를 가슴 아
프게 한건, 저를 가슴 아프게 한거나 마찬가지예요. 종희에게 상처
를 준다면, 혼날 각오부터 해야 할거라는 저의 말을 우습게 들으셨
나봐요?"
"변명은 안하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여대생인 쫑아를 데리고 한
때를 즐기다가 싫증이 나서 걷어차버린 놈쯤으로 보일거란것도 알
아요. 하지만 절대,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다는것만큼은 소
정씨가 절 믿어줘야 해요."
"H와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는게 어딘가 우습게 느껴져요."
갑자기 소정이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H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왜? 왜? 왜? 왜죠? 왜 종희를 떠난거예요?"
"...소정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요. 그래요. 맞는 말이예요."
그렇게 소정이는 말하고나서 아까와는 달리 침대에 등을 붙이면
서 드러누웠다.
"밤새도록 의자에 앉아있을 생각이 아니라면 침대로 올라오세요."
H는 소정이의 뜻밖의 놀라운 제안에 약간 당황했다. 침대와는 거
리가 먼 그녀의 집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
자기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는 등받이 의자
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그는 차마 그녀곁에 누울 용기가 없
었다. 그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뭘 그렇게 남자답지 못하게 망설이고 있어요. 제가 생각나서 찾
아온게 아닌가요? 저의 몸위로 어서 올라오세요."
그렇게까지나 소정이가 말하고있는 상황에서 H는 아름다운 명령
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H는 자신이 입고있는 옷을 침대아래로 흘러내리게 했고, 소
정이의 거의 완벽한 육체를 가리고 있는 옷을 벗겨주었다. 그를 늘
감탄하게 만드는 그녀의 놀라운 아름다운 육체가 드러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는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점점 빨라지는 맥박으로,
그녀의 발가벗겨진 따뜻한 몸위로 올라갔다. 아늑한 휴식처, 그것이
었다. 그속으로 그는 힘껏 파고들었다. 그녀안으로 그는 깊숙히 파
묻혔다.
두사람은 시간과 경주하듯 오랫동안 끊임없이 가득 메우는 놀라
운 경험을 서로 나누었다. 몹시 흥분됨을 즐겼다. 둘은 한사코 떨어
질줄 모르고, 줄기차게 결합을 풀지않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H는 격렬하게 성행위를 하는 바람에 그만 그의 그것
이 소정이의 안에서 빠져버렸다. 얼른 그는 다시 그녀속으로 파묻
으려고 했다.
그러나 소정이는 거부하는 몸짓을 했다. 그래서 H는 내려와 침대
로 쓰러졌다.
얼마동안 두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섹스의 여운을 음미하면
서 지친 몸을 위하여 휴식시간을 가졌다.
침묵의 휴식시간을 끝낸 것은 소정이었다. 그녀는 H를 쳐다보고
말하는게 아닌 천정을 보고 말하는것이었다.
"그동안 종희가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H는 모를거예요. 가까이서
지켜보는 저도 무척 괴로웠어요. 몇번씩이나 죽을려고 하는걸 간신
히 말리기도 했어요. H는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종희는 모든 사실
을 전부 알고 있어요. 해외출장은 순전히 거짓말이라는것도, 저와
관계한것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여자와 만난다는것도... 모든걸 종
희에게 털어놓았어요. 다행히 종희는 진정한 친구답게 저를 용서해
주었어요."
H는 침대에 드러누워 옆으로 나란히 누워있는 소정이처럼, 천정
만 응시하면서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래서... 그래서 쫑아는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모든걸 알고 있
으면서도 한마디도 꺼내지않고... 화내거나 따지지도 않고...>
H는 소정이가 살고있는 다세대주택을 나와 걸으면서 마지막으로
말해준 그녀의 아픈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종희는 H와 헤어지고나서 얼마후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종희는 조그만 회사에 입사해서 다니다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 동료와 사귀었나봐요. 얼마전부터 양가 가족들의 허락을
받고 동거에 들어갔어요. 전 H를 사랑하지 않아요. H가 아니라 다
른 남자였다해도 사랑이란걸 할만큼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예요. 종
희에게 말했어요. 다시는 H를 만나지 않겠다구요. 다시는 저를 찾
아오지 마세요."
H는 싸늘한 겨울밤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새하얗게 내뿜으면서
발길을 재촉하였다.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소정이의 냉랭한 그말이 메아리처럼 H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에겐 아무것도 남은게 없었다. 단지 세여자는 흘
러간 과거였다.
제 목 : 에필로그.. 1 <제83회>
12월 31일이었다.
H는 예전과는 달리 혼자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득 다빈치 레
스토랑을 메우고 있는 손님들, 어두운 창밖의 거리를 내다보아도
사람들은 쌍쌍히, 또는 무리짓고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듯, 아무렇
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했지만 실상은 무척 외롭고 쓸쓸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남에게 들키기 싫어서 여유롭게, 아무렇지 않
게 가장한것뿐이었다. 그는 쫑아가 우연히 레스토랑에 나타나주길
가느다랗게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습을 나타내지않고 있었다.
H는 다빈치를 나왔다. 어둠이 깔리고, 오고가는 행인들로 북적대
는 거리를 걸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쫑아를 만나볼 용건으로 신림
동에 온거지만, 그녀를 불러낼수 없었다. 이제와서 그녀를 불러내어
(안나올 공산도 컷지만) 뭘 어쩌란 말인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
어 동거를 하고있는 그녀는 이미 그의 곁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또 쫑아는 크나큰 그의 잘못을 한마디도 꺼내지않고, 오히려 먼저
갈라서자고 말했던 그녀였다. 정말로 냉정함과는 거리가 먼 그녀였
다. 그녀는 분명히 그를 몹시도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그
는 떳떳하게 나설 수 있는 자신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
었다. 혼란스럽기도 했다.
<진정 쫑아를 사랑해서 원하는걸까? 경희가 떠나버린 빈 공간을
대신에 채워줄 수 있는 사람으로 쫑아를 원하는건 아닐까?>
H는 올해의 마지막 밤인 오늘을 즐기기 위해서 거니는 숱한 사람
들과 어깨를 부딪치면서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건물속으
로 들어가고 있는 목조 계단앞이었다. 지금은 단란주점으로 영업을
하고 있겠지만, 과거에는 파트너 레스토랑이 있던 자리였다. 쫑아와
바로 오늘인 12월 31일날에 처음으로 만났고, 즐겨 찾던 두사람의
추억이 살아있는 곳.
H는 뭔가에 홀린 듯이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주의깊게 밟으면
서 올라갔다. 그는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춰섰다. 옛날에 쫑
아와 지내던 시절의 그곳이 아니란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H는 허물어지듯 멈춰섰던 계단에 털부덕 주저앉았다. 그를 피해
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나 거리를 지나가며 힐끔거리는 행
인들의 시선들이 핥고 지나갔지만, 그닥 대수롭지않게 여겼다.
문득 H는 발아래 목조계단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구부러진 조
그만 녹슬은 못을 발견했다. 그는 그걸 집어들었다.
그리고 만지작거렸다.
H가 그러고 있을 때, 쫑아는 소정이와 함께 다빈치 레스토랑의
빈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었다. 주로 대화의 화제는 쫑아와 곧
결혼하게될 가까운 미래의 신랑과 현재의 동거생활에 대한 이야기
였다. 그러다가 소정이는 자신도 모르게 H에 대한 말을 입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외우기가 쉬워서 좋겠어. 오늘이 H를 처음으로 만난 날이 맞지?
"
그랬다가 소정이는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쫑아와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H에 관한 대화는 자제하는게 좋다는 것을 소
정이는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여태까지 입조심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쫑아는 종전과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그사람... 얘기는 내앞에선 꺼내지마."
"알았어, 알았어. 다음부턴 절대로 H의 얘기를 하지 않을게. 됐니
?"
"으응."
"아직도 H를 원망하고 있니?"
"소정아!"
"미안, 미안, 미안해."
"이미 지나간 일이야. 형은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야."
"네가 화낼까봐 그동안 숨기고 있었는데, 며칠전에 H가 우리집에
찾아온적이 있어."
"널 왜 찾아온건데?"
"걱정마. 일단은 찾아온 손님이라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는데, 다시
는 찾아오지 말라면서 그날로 떠나 보냈어. H가 그러더라."
"뭐라구 했는데?"
"종희야, 궁금하긴 궁금한가보구나."
"어서 말해봐."
"H는 너와 즐기다가 싫증이 나서 걷어찬건 아니라고 했어."
"사실 먼저 헤어지자구 한건 나야."
쫑아의 말에 약간 소정이는 놀랐다.
"그러니! 난 그런줄도 모르고 H를 너무 욕했잖아."
"헤어지자고 내가 먼저 말은 꺼냈지만 결과적으로 날 버린건 형이
야. 날 붙잡았다면, 며칠이 지난후에라도 날 붙잡았다면 형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줄 생각이었어."
"종희야, 너 진짜로 H를 사랑했구나."
"...이미 지나간 일이야."
제 목 : 에필로그.. 2 최종회 <제84회>
"사랑하니까 결혼하려는거고 동거하는거잖아."
"솔직히 난 그렇게 안보여서 어쩌나. H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자
넌 그에 대한 반발로 지금의 신랑될 사람하고 동거를 시작했고 결
혼을 서두르는거 아니니?"
쫑아는 바다 밑바닥같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말이 맞을지도 몰라. 난 형과 헤어지고나서 누군가가 몹시도
필요했어.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의욕도, 열의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한거구. 정말이야. 누군가가 절실히, 절실히..."
쫑아는 그랬다가 금방 말을 바꿨다.
"아니야. 헤어진 형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난 지금의 신랑될 사
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결혼하려는거잖아. 어떤 맹
추같은 여자가 사랑도 안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겠어, 안그래?"
"그렇겠지. 난 다만 좋은 친구로서 널 걱정해 주는거야. 그럴거라
고는 생각을 안하지만 혹시 지금까지도 H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
곧 결혼하게될 너희 신랑을 위해서라도 잊는게 좋을꺼야."
"그럴꺼야... 그럴꺼야..."
소정이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나서,
"그만 일어서야겠어. 친구들이 맥주집에서 우리를 눈이 빠지게 기
다리고 있겠어. 오늘 너희 신랑될 사람도 참석할거지?"
"물론이야. 다른 얘들은 몰라도 소정이 너만큼은 후한 점수를 줘
야해."
소정이는 쿠쿡거렸다.
"노력은 할게."
쫑아와 소정이는 다빈치 레스토랑을 나와 몹시 추운 12월 31일날
의 행인들로 북적대고 있는 밤거리로 합류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맥주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소정이와 나란히 맥주집으로 걸어
가고 있는 쫑아는 저절로 H가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쫑아는 자신
의 생일날에 지금 가고있는 그맥주집에서 H와 함께했던 먼 과거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름날을 무척이나 끔찍히 싫어하는 자
기자신의 생일날이, 태어난 계절이 7월이란게 엄청난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쫑아는 자신의 생활공간안으로 H가 많이 침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전에 나왔던 다빈치 레스토랑도 그랬다. 넓게 본다면
신림동 전부를 포함해서.
쫑아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다. H란 존재를 빼고나면 거의 3년
간의 그녀 인생은 무의미했다. 그녀는 인정하긴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H를 사랑한다는것도.
쫑아는 발길을 멈추고 있었다. 따라서 소정이도 멈추었다. 지금은
단란주점으로 변모한지 오래였지만 과거에 파트너 레스토랑이 있
던 자리로 올라가는 목조계단앞이었다. 재작년의 바로 오늘, H와
처음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두사람의 사랑이 시작된 파트
너 레스토랑.
"어쩜, 저럴수가!"
소정이가 놀란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종희야, 저것좀 봐."
어찌보면 냉정할정도로 쫑아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나도 보았어."
두여자가 보고있는 목조계단. 거기에는 무엇인가를 사용하여 긁어
댄 흔적들로 가득 남아 있었다. 둘은 목조계단 구석에 떨어져있는
구부러지고 녹슬은 조그만 한 개의 못을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그
걸 쫑아는 다가가 집어들었다. 못의 날카로운 끝에는 톱밥같은 나
무 찌꺼기들로 묻어 있었다.
목조계단 곳곳에는 못으로 긁어대어 선명하게 커다란 글씨들이
씌어 있었다.
소정씨와의 관계를 변명할 생각은 없어
너에게서 멀어진건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서부터야
경희라는 이름의 여자였어
여자가 아니고 여자였어라고 쓴 말뜻의 의미를 알겠어?
지금은 내곁에 없는 여자야
오늘은 우리가 처음으로 만났던 그날이야
신림동에 찾아온건 쫑아 널 너를
널 아직도 사랑해선지 아니면 경희라는 여자가 떠나버린 빈자리
를 대신해서 쫑아 너를 원하고 있는건지 어떤건지
하지만 아직도 널 사랑하는 맘은 변함이 없어
쫑아 네가 어떻게 변했던지 나에게는 넌 예전 그대로의 쫑아야
한가지는 약속할수 있어
널 다시는 떠나지 않겠어
날 다시 받아줄수 있다면
거기에서 쫑아는 읽는 것을 포기하고 손에 쥐고있던 못을 발아래
로 버리며 전철역으로 뛰었다. 등뒤에서 소정이가 부르고 있었다.
쫑아는 개의치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헤치면서 뛰었다. 너무나
급하게 달리는통에 그만 한쪽 발목이 삐끗거렸다.
그렇게 쫑아는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로 힘겹게 뛰어서 전철역에
당도했다. 그녀는 구입한 전철표를 개찰구에 꽂아넣었다. 곧바로 튕
겨져 올라온 전철표를 가지고 가야 한다는것도 잊은채 그녀는 서
둘러 빈손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마악 전철이 뒤꽁무니를 보이면서 어두컴컴한 터널속으로 사라지
고 있었다.
쫑아는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일순간에 온몸의 기운이 남김
없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주위로 사람들은 있었지만
붐비는건 아니었다. 약간 한가한 플랫폼의 풍경이었다. 벤치는, 두
개의 벤치를 등받이 부분끼리 서로 맞붙여 놓은것처럼 설치되어
있었는데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의 엉덩이를 붙일만한 공간은 남아 있
었다. 거기에 쫑아는 털부덕 주저앉았다. 두볼을 타고 뜨거운게 흘
러내렸다.
* * *
쫑아가 앉아있는 벤치와 맞붙어있는 반대편 벤치의 끄트머리에는
H가 엉덩이를 붙인채 구두끈을 풀어서 새롭게 고쳐 묶느라고 허리
를 크게 숙이고 있었다.
이윽고 H는 구두끈을 완벽하게 매듭을 짓고나자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그는 가느다란 한가닥 희망을 걸고 몇번씩이나 전철을 보
내면서 기다렸지만 쫑아는 오지않고 있었다.
<역시...!>
H는 못으로 긁어대어 목조계단에 써놓은 자신의 마음을 쫑아보고
보라는건, 그녀가 찾아오길 바라는건 어쩌면 너무나 황당한 희망인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황당한게 사실이었다. 그는 플랫폼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있는 전철을 보면서 미련없이 떠날 시간
이 찾아왔다는 것을 싫었지만 인정하고 있었다.
H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벤치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일어서고 있
었다. 그는 딱 한사람만은 일어나지않고 벤치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전철에 올라탔다. 그
는 전철안으로 깊숙히 들어가지 않았다. 문가에 섰다. 그는 방심하
는 얼굴로 무심코 벤치를 보았다. 한사람만이 벤치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시선이 끌렸는지도 몰랐다.
퍼뜩 H는 벤치에 앉아있는 유일한 한사람이 쫑아라는걸 깨달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를 두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얼른 H는 쫑아를 불렀다.
"쫑아야."
그제서야 쫑아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전철로 시선을 주었
다. 전철 문가에 서있는 H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
을 훔치고나서 다시 자세히 보았다. 분명히 H였다.
"형!"
쫑아는 벤치에서 일어나 H에게 다가갔다. 불운하게도 전철문은
냉정하게 닫혀지면서 두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전철은 플랫폼
을 떠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쫑아는 한손바닥을 펼쳐 전철문에 붙어있는 창에 밀착시켰다.
그러자 전철안에 타고있던 H도 그녀의 손이 밀착되어있는 창에
역시 손바닥을 펼쳐서 밀착시켰다.
두사람의 손은 함께했다. 손과 손사이로 유리가 가로막고 있었지
만 서로의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느낄수 있었다. 둘은 입술마저 포
개었다.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따위는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유리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입맞춤은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H는 손가락으로 유리에 글씨를 썼다. 쫑아는 알아들었다는 신호
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녀를 플랫폼에 남겨둔채 전철은 그를 실
고 떠나갔다.
십분도 안되어 신림동에서 H와 쫑아는 다시 재회했다.
두사람은 뜨겁게 포옹했다.
그리고 길게 키스를 나누었다.
H와 쫑아는 나란히 친숙한 길을 따라 들어가 딸기여관으로 들어
갔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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