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쫑아-12
제 목 : 10월은 호텔에서.. 2 <제77회>
H는 맨윗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고속으로 올라가는 승
강기속에서 경희는 앞으로의 계획에 관하여 H에게 캐물었다. 그가
대답을 회피하자,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게, 자신이 실행하려는 계획에 관하여 확신할수 없었기 때문
이었다. 그녀는 불안한 심리를 대변하듯, 자신의 어깨 아래로 흘러
내린 머리칼을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H는 과거에 산악동아리에서 처음으로 암벽등반에 도전했을때도
그랬고, 아르바이트로 고공 유리창닦기를 할 때도(암벽등반의 경험
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늘 들었던 소리가 절대 아래를 내려다보
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선배는 농담처럼 말했었다. 선두로 암벽을
오르면서 망치질을 하고있는 녀석의 냄새나는 엉덩이나 노려보며
뒤따라 올라가는게 암벽등반이라고. 유리창닦기 용역 팀장은 약간
다르긴 했지만, 유리창만 열심히 닦으라고 했었다. 특히 호텔같은
곳에서 유리창을 닦다보면, 가끔은 신나는 구경을 할수 있다고도
했었다.(H는 아르바이트 기간내내 그런 행운은 없었다) 팀장은 지
금의 마누라도 사무용 빌딩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창밖에서 유리
창을 닦으면서 만난거라며 믿기지않는 자랑을 하기도 했었다.
<선배나 용역 팀장이 말했듯이 절대 아래를 내려다볼 필요는 없
어. 묵묵히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거야.>
H는 그렇게 생각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고속으로 올라가고
있는 승강기속에서 경희와 단둘만이 있는 지금이 그랬다. 그는 천
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게 치밀어 올라왔다.
그녀는 말없이 그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
었다.
두사람은 입술을 포갰다.
이윽고 부드러운 시간은 끝나면서, 격정적인 키스로 뜨거워졌다.
H는 경희를 <<쿵>> 소리가 나게 승강기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때
문이었는지, 아니면 승강기가 몹시 낡아서 그랬는진 몰라도 <<끼
기기긱>> 하고 강철과 강철끼리 힘겹게 맞물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들 머리위에서 나면서 1, 2초동안 승강기는 정지했다. 그랬다가
승강기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H나 경희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턱아래 그녀의 목
젖을 강하게 흡입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목덜미를 더듬어 올라가
귓볼을 건들였다. 또 그러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녀의 단추가 풀려
진 가슴을 헤치고 부드럽게 더듬어 내려가고 있었다.
"하아~"
경희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H의 한손은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적당히 살찐 그녀의 히프를 어루만지
다가 앞으로 이동하여 보드라운 팬티밖에서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다정한 손길로 매만져주었다. 잠깐동안이었다. 촉촉한 물기가 H의
손가락끝으로 기분좋게 스며들었다.
승강기문이 스르르르 열렸다. 호텔 맨윗층이었다.
이미 H와 경희는 잔뜩 욕정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번쩍 그
녀를 안아들었다. 승강기에서 내린 그는 가볍게 그녀를 안아들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쿵쾅거리는 발자국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윽고 낡고 퇴색되어진 작은 철문이 나타났다. 행운의 여신은 너
그러웠다. 다행히 철문은 열려 있었다. 철제 접이식 의자가 열려진
철문을 떠받치듯 세워져 있었다. 더구나 의자에는 담요가 놓여져
있었다. 오래전에 유리창닦기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왔을 때, 보아두
었던 희미한 H의 기억과 일치하고 있었다.
H는 경희를 안아든채, 의자에 놓여있는 담요를 집어들고서 철문
을 나서자 머리칼이 태극기처럼 휘날릴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호텔 옥상에 나와 있었다. 혹시라도 항공기가 호텔 건물과 충
돌할까봐 옥상의 끄트머리마다 설치되어있는 충돌 방지등이 밤의
어둠속에서 빨갛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물론 호텔과 충돌할만큼 낮
은 비행 고도로 날아다닐 멍청한 조종사는 없겠지만.
H가 경희를 안아들고 서있는 주변으로 수많은 자갈들이 깔려 있
었다. 그는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울퉁불퉁하고, 미끌거리는 자갈
밭을 지나 호텔 옥상의 한가운데로 향하였다. 거기에는 시멘트로
네모지게 만들어진 헬리콥터 발착장이 있었다. 어둠속에서도 새하
얗게 빛나고 있었다. 정중앙에는 커다랗게 <> 가 그려져 있었
다. 헬리콥터 발착장에 다가갈수록 거센 바람은 점차 잠잠해졌다.
거기에 H는 안아들고있던, 경희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담요를 깔았다. 당연히 경희는 당혹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
었다.
"오빠, 설마 여기서...?"
H는 말없이 씨익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런 그를 보
고있는 경희는 주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동안이었다. 그녀의 브
래지어를 제끼고, 그가 입안으로 강하게 젖꼭지를 빨아들이자 비명
소리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그는 마주 서있는 상태에서 집요하게
계속해서 젖꼭지를 탐닉하자, 그녀는 두다리에 힘이 풀린 듯 무너
지고 있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헬리콥터 발착장에 깔아놓은 담요로
쓰러졌다. H는 경희와 사랑을 나누려는 호텔 옥상이 안심할 수 있
는 장소가 아니란걸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그는 어
느정도 그녀의 아래가 진입해 들어가기 쉽게 젖어들자, 치마를 치
켜올리고 팬티만 벗긴 다음에 그대로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빠르
게 성교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경희는 H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면
서, 비명소리같은 신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야외에서, 밤하늘을
배경으로 초고층 호텔 옥상에서의 섹스는 표현할길이 없는 숨막히
는 고감도 오르가즘이었다.
경희는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고 있었다.
"다시는... 다시는 섹스를 하지 말아요..."
"알았어... 알았어..."
H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갑작스럽게 휘몰아쳐오는 거센 바람도, 고속으로 회전하는 날개
소리도 두사람에게는 아득히 먼 곳의 일로만 여겨졌다. 모든 것을
잊고 격렬하게 뒤엉켜있는 그들 머리위로 강렬한 불빛을 비추면서
헬리콥터가 떠있었고, 철문을 통과하여 호텔 옥상으로 들어선 사람
들중의 한사람은 지글거리는 소음을 내고있는 워키토키로 상공에
떠있는 헬리콥터 승무원과 교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나 H와 경희는 아무것도 모른채, 뜨거운 사랑만 나누고 있었
다.
* * *
그럴 수밖에 없었다.
H와 경희는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왔다.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호텔로부터 멀리 떠나고만 싶었다. 두사람은 좀전에 벌어졌던
사건을 생각만해도 끔찍했다. 아직도 등뒤에서 사람들의 묘한 시선
들이, 묘한 웃음들이 따라오고 있는것만 같아 저절로 둘의 발걸음
은 빨라지고 있었다.
얼마 못가서 H와 경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웃음을 터뜨렸
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화난 얼굴이었다. 그는 자꾸만 더 크게 깔깔
깔거렸다. 자신도 왜 웃음이 터져나오는지 그이유를 몰랐다. 한참동
안 그가 웃고 있자, 결국엔 그녀마저도 웃지 않을수 없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깔깔거렸다. 서로의 웃고있는 얼굴을 보고 있
자니 더 웃음이 튀어 나왔다. 웃음을 멈출수 없었다.
얼마후에 H와 경희는 남들에게 미친 커플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라도 진정해야 했다.
두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경희였다.
"즐겁긴 했지만, 오빠의 기상천외한 데이트는 호텔에서의 망신을
끝으로 사양할래요."
"알았어.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꺼야."
"물론 그러셔야죠."
"나도 반성하고 있으니까 너무 혼내진 말아줘."
경희는 쿠쿡거렸다.
"아무튼 오빠 덕분에 오늘밤은 즐거웠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H는 경희의 기분이 몹시 유쾌하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넌지시 그녀에게 물었다.
"전번에 왜 울었던거야?"
"네? 울다뇨?"
경희는 방심한 표정이었다. H의 느닷없는 질문에 그녀는 개념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관에서 지낼 때... 그때..."
그제서야 경희는 H가 뭘 알고 싶은지 알수 있었다.
"왜 그런 질문을...?"
H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경희를 보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것뿐이야."
"......"
잠시후에 H는 또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태도로,
"아직도 헤어진 의대생인가하는 사람을 못잊고 있는거야?"
"...아녜요."
경희는 잠깐 사이를 띄었다가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보는거예요?"
"그냥 궁금해서."
"...만약 제가 오빠곁을 떠난다면 어쩔거예요?"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잘알잖아. 우리는 절대로 그런 불행한
일은 없을거야. 안그래?"
"네에."
제 목 : 11월, 떠날때는 뒤돌아보지 말 것.. 1 <제78회>
<<네>> 라고 경희는 대답했을거라며, H는 어렴풋하게 그날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녀는 갑자기 그만 만나자며 일방적으
로 통보했다. 그녀의 얼굴로 미안하다는 감정이 순간적으로 지나갔
다. H는 그녀의 낭패스런 말을 듣자마자, 패스트푸드점에서 먹고있
던 햄버거, 콜라, 치킨이 입밖으로 튀어나올뻔 했다. 경희는 마치
발작적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겨 H를 쏴 죽이고나서 시체가 되어
버린 그에게,
"미안해."
하는것과 다름 없었다.
전망좋은 창밖으로 부드럽게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로 오고가는 광경이 흐르고 있었다.
H는 창밖으로 오고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행복한 표정에서, 이제
는 딱딱한 표정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경희
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속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여성스럽게 햄버거를 한입 베어물고, 빨대로 조용
히 콜라를 빨아먹고, 예쁘게 냅킨으로 싼 치킨을 한입 베어물고, 역
시 콜라를 빨아먹는 자연스런 행동들이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문득 H는 경희가 낯설게 느껴졌다. 또 어떤 면에서는(더 많은 경
우를 포함할수도 있다) 남자보다 여자가 더 냉혹할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 있었다. 참혹하리만치 여성 테러리스트가 무자비
하다는, 여성의 자기 파괴율이(자살율) 훨씬 더 강하다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여기저기 다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깔깔거림
과 행복이 H를 더욱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는 딱딱해진 표정을
애써 기분좋다는 표정으로 만들면서,
"농담이지? 그렇지? 농담이라고 말해봐. 그렇다고 말해 보라구."
경희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저의 진심이예요. 우리 그만 만나요."
거기에서 H는 가볍게 깔깔거렸다. 하지만 뭐랄까. 무언가 빠져버
린 공허한 웃음.
"경희야, 너는 날 웃기는데 성공했어. 농담은 그만하면 됐어."
"오빠."
경희는 정색을 하며 선언하듯 말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우리는 끝났어요. 제마음은 오빠곁에서 떠
났어요."
"지금 나 슬퍼해야 되는거니?"
"제가 말했을거예요. 전 나쁜 여자라구요. 오빠는 잘못한게 없어요.
저란 나쁜 계집얘 때문에 슬퍼할 필요는 없어요."
"이유가 뭐야? 이유만이라도 알고싶어."
"제가 오빠곁에 머물면 머물수록, 오빠에게 해롭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는거라고 생각하세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마음을 되돌릴수 없겠어?"
"많이 생각했어요. 많이..."
"그래도 내가 붙잡는다면... 끝까지 사랑한다면...?"
"...오빠가 제곁에 남겠다면, 친구는 괜찮아요."
거기에서 H는 참을수 없었다. 그렇지만 간신히 억누르면서,
"친구에서 사랑으로 발전될수도 있어. 하지만 연인사이에서 친구
사이로 된다는게 얼마나 크나큰 고통인줄이나 알아. 결국은 어느
한쪽이 큰 상처를 받게 돼. 난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를 하느니 차
라리 영원히 안보는 쪽을 택하겠어."
H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동안 경희와 눈을 맞추다가 그대로
패스트푸드점을 빠져 나왔다. 그는 그녀가 붙잡을걸 기대했다. 그녀
가 잘못했다고,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길 바랬다.
H는 뒤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
듯 하늘에서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게 다른 이들에
게는 하늘의 축복이라며 기뻐하겠지만, 그에게는 하얀 눈물방울로
보였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져있는 얼굴로 전철역을 향하여 발걸음
을 내딛었다.
<친구라도 좋아.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도 좋아. 가끔, 아주 가끔씩
이라도 경희 널 만날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 하지만 언젠가는
생기게 될,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널 차마 눈뜨고 볼 자신
감이 없어 떠나는거야. 솔직히 행복하라고 말해줄만큼 가슴이 넓은
남자도 못돼. 불행이 없기만을 바래.>
H는 집에 도착하여 자기방으로 들어갔을때도 여전히 딱딱한 얼굴
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이 들어올수 없도록 방문을 잠구었다.
그는 이부자리를 펴고 거기에 쓰러졌다. 베개를 베고있는 그의 얼
굴위로 차가운게 주르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제 목 : 11월, 떠날때는 뒤돌아보지 말 것.. 2 <제79회>
다음날, H는 회사에 간신히 출근할수 있었다.
그는 오전내내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일감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는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고있는 답답함
과 사무실 직원들의 눈총때문에 자주 휴게실을 들락거리곤 했다.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아프다는 핑
계로 조퇴를 하고 말았다.
H는 곧장 집으로 귀가했다. 그는 자기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부
자리를 펴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는 아프다는 핑계와는 달리 정말
로 몸살과도 같은 열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H가 앓아 눕자, 가족들은 몹시 걱정을 했다. 그들은 그가
극도로 지치고 피곤해서 그런걸거라며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가
족들은 식사시간이 찾아올때마다 밥을 묽게 끓여 만든 죽을 억지
로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H는 한수저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경희란 존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삼일째가 되던 날.
H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족들은 깜
짝 놀랐다. 그는 사우나로 땀을 빼고난 뒤에 찾아오는 개운함과도
같은 기분으로 온몸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그는 냉장고부터 뒤져
닥치는데로 입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간 그는 일단 방광안에 들어있는 물을 좌변기
에 버리고나서 입안이 개운하게 칫솔질을 했다. 곧 그일을 끝마치
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샤워를 했다. 아직은 어둠이 깔리지 않은
오후시간이었다.
H는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가족들을 놔두고 집을 나섰다. 싸
늘한 공기가 옷밖으로 드러난 그의 피부를 찔러댔다. 그날처럼 함
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H는 딱딱한 얼굴로 걸어갔다. 냉철한 비장미마저 엿보였다. 그는
단호히 결심하고 있었다. 확실히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마음이 편안할수 있기에.
H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슈퍼마켓앞에 도착했을때도 여전히
함박눈은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오히려 점점 더 함박눈은 밤
하늘을 뒤덮듯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그가 집을 나설때와는 달리
온세상은 흰눈과 어둠에 파묻혀 있었다. 버스정류장이 보였고, 우중
충하게 서있는 회색 육교가 보였으며 도로 건너편으로는 상가건물
이, 그뒤론 우뚝 서있는 아파트촌이 보였다. 그당시에 비가 내린 것
만 빼곤, 모든게 변함없었다. 아니, 또 한가지 틀려진게 있었다. 그
때는 H와 경희의 사랑이 뜨거웠지만, 지금은...
H는 경희를 바래다 준적이 있는 그녀의 아파트를 향하여 걷기 시
작했다. 그는 기분좋은 목적으로 온게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우울
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H는 경희와 만나서 어쩔거냐며 되돌아 갈
까하고 망설여졌다. 동시에 다른 마음 저편에서는 혹시 그녀 또한
그동안 많은 고민을 하던중에 그가 나타나자 못이기는 척하면서
반길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생각도 들었다. 또 동시에 차갑게 대할
지도 모른다는 안좋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H는 한가닥 좋은 기대감에 조심스럽게 매달리고 싶었다.
그는 그런 가느다란 좋은 예감을 품고서, 도착한 아파트촌 입구에
기다랗게 늘어서 있는 공중전화박스로 들어갔다. 그는 경희에게 삐
삐로 음성녹음을 했다.
그리고 이젠 그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십분이 경과된 시점부터 H는 팔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보기 시작했
다. 경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몹시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
다.
<아마 경희는 시내에서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노닥거리느라고 늦
는걸거야.>
두시간이 경과했을 때, H는 다시 공중전화로 경희에게 삐삐를 여
러차례 했다. 그는 아파트촌안을 기웃거리면서, 그녀가 빨리 나타나
길 기다렸다. 얼룩무늬 군복을 갖춘 군인만이 아파트촌을 나오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시 두시간이 지나가자, H는 이번에는 경희의 집에 전화를 걸었
다. 아직도 귀가하지 않았다고 그녀의 여동생이 말해주었다.
또 한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H는 펑펑 내리고 있는 함박눈에 젖지 않기 위해서 공중전화박스
로 피신했다가, 경희가 오는지 보려고 밖으로 뛰어나오는 동작을
규칙적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11월, 깊은밤의 추위로 온몸은
얼어붙고 있었다. 경희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이제 H는 경희를 단념하고 있었다. 그는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를 만나지 않으려 한다는 슬픈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
다. 또 그녀는 분명히 집에 있을거라는, 여동생에게 거짓말을 시킨
거라고 직감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이때, 저만치에서 경희가 아파트촌 입구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
선 H는 반가웠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마음과는 달리 얼굴은 딱딱
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
라 있었다. 전혀 화장을 하지도 않았고, 옷차림도 간편한게 집안에
서 지낼 때의 꾸밈이 없는, 즉 나쁘게 말하자면 아무렇게나 하고
나온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그녀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또 그런 모습으로 그녀는 나타났다는게, 그를 향하여 <
<빨리 꺼져버려>> 하고 모욕을 주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H는 무표정한 경희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머릿속이 텅비어버린
깡통처럼 할말이 없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가, 내앞에 서있는 이여자가 맞긴 맞
는걸까?>
H는 뭐라구 할말이 없었다. 경희도 말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먼저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건지도 몰랐다.
두사람은 먼저 자신이 말하게 되면, 엄청난 손해라도 입을까봐 그
러는 사람들처럼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연신 함
박눈이 둘의 머리칼을,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H는 무거운 침묵을 깼다.
"집에 들어가. 감기에 걸리겠어."
H는 자신이 생각해도, 냉기가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뒤돌아서더니 경희에게 등을 보이며 성큼성
큼 두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떠나고 있었다.
<붙잡아. 아직도 날 사랑한다면...>
그러나 H의 등뒤로부터 어떠한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칼로 무수히 난도질을 당한 가슴처럼, 극심하게 고통스러
웠다.
<절대로,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겠어. 절대로.>
H는 몇걸음 더 걷다가 이내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돌아 보았다. 경희가 하염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서있을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지니고서.
아무도 없었다.
다만 깊은밤의 어둠과 내리는 함박눈뿐이었다.
H의 가슴으로 아픔은 비수가 되어 깊숙히 꽂혔다. 그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뒤돌아섰다.
H는 함박눈에 젖으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쫑아를 버린
대가로, 하늘의 처벌을 받은거라며 뼈저리게 생각하고 있었다.
* * *
경희는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걸어서 승강기앞에 당도했다. 버튼을 누르자 스르르르 문
은 열렸다. 그안으로 그녀는 들어갔다. 승강기는 위로 올라갔다. 승
강기벽에 붙어있는 거울에는 화장을 안한 여자의 차가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냉혹했다.
그리고 나쁜 여자이기도 했다.
<헤어졌던 애인과 다시금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는걸,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요. 사랑했어요, 오빠. 그래서 마지막으로 저의 순결을
드린거예요. 제가 싫어져서 떠난거라고 알고 있는게, 차라리 오빠에
게는 더 좋을거란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저를 용
서하세요.>
추천112 비추천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