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혼자떠나는 여행4
4-1. 멋진 여인과 달린 내륙 천리.
정확히 언제라고 발기힐 수 없는 사정이 있다.
9월초. 무작정 차를 몰아 떠났다.
마음 내키는 대로 달리다 보니 차가 무주읍에 와 있다.
무주 읍은 군청 소재지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치
규모가 작다. 차로 읍내를 두어 바퀴 돌아 봤지만
그럴듯한 (?) 건수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아 읍내에서 빠져
나왔다.
읍내를 빠져 나와 국도로 들어서는 어귀에 작은 가게가
있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어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에 여행 차림의 젊은 아가씨가 아이스 바를
빨고 앉아 있다. 첫 눈에 마음이 끌린다.
주스를 마시며 정탐을 해 본다. 혼자 여행길에 나선
여자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선다.
직장 여성 같기도 하고 여대생 같기도 한 인상이다.
조금 더 다시 자세히 관찰해 본다. 집을 나선지 최소한
이틀 이상은 된 것 같다.
여자가 집을 나선지 며칠이나 되는지 한 눈에 어떻게
알아내는 비결을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살짝
공개하겠다.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신발을 보면 안다.
여자가 레저성 여행을 떠날 때는 대개 운동화를 신고 또
출발 전에 새 운동화를 사 신고 나서지 않으면 깨끗이
빨아 신고 나선다.
여자는 여행에 나설 때 배낭 속에 갈아입을 셔츠나 팬티
브래지어 심지어는 더 비밀스러운 것까지 다 넣고
다니지만 신발을 예비로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가지고 다닐 수는 없고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고 또
가지고 다닐 생각을 하는 여자도 없다.
신발은 양말과 달라 여행 중에 빨아 신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신발이 더렵혀진 상태를 보면 여자가 집을 나선지
며칠이나 되는지 대개 알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신발 상태가 전혀 도움이 안될 때가
있다. 계속 차만 타거나 고운 길만 골라 코스를 정한
때다.
그럴 때도 알아내는 비결은 있다. 머리 상태나 화장
상태를 보면 알게 된다.
젊은 여자가 레저 여행을 하면서 미장원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
또 레저 여행을 떠나면서 휴대하는 화장품은 대개가
기초 화장품 정도다.
그래서 집을 나선지 오래 되면 될수록 머리도 얼굴도
깔끔한 맛이 줄어든다.
여자가 집을 나선지 며칠이 되느냐 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목적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인간은 자기 둥지를 떠나면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에 젖어 들게 된다.
임자가 있는 여자라면 외로움의 밀도는 임자를 떠나
있는 시간과 정비례한다.
여행이란 사람의 감정을 센티멘털 플러스 로맨틱으로
만든다.
거기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저녁때 가볍게 한 잔 하러
간 생맥주 집에서 본 쌍쌍들의 모습에서 자극을 받게 되고
객지 여관방에서는 초저녁부터 옆방에서 들려 오는 쌍쌍
파티의 효과음(?)에서 충격적인 자극을 싫도록 받아 몸도
마음도 젖을 대로 젖어 있다.
이 모든 농도 또한 집을 떠난 시간과 정비례한다.
집을 나선지 오래되면 될수록 자극이나 무드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져 있다.
그건 여행길에 나선 여자는 집을 나선(때로는 애인의
품속 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길면 길 수록 이쪽은 일이
쉬워(?) 진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여행길에서 여자를 보면 먼저 집을 나온지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는 정도의 관찰력이 있어야 헛수고를
면한다.
아이스 바 양이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건다.
"구천동으로 올라가면 그쪽에서 경상도로 가는 길이
있죠?"
아이스 바 양의 물음에 길은 개통됐지만 정기 노선
버스는 없다는 주인의 대답이다.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덕유산 국립공원을 넘어 가창으로 빠지는 길이
지도상에는 있지만 그 길이 비포장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확장 개통되었다는 가게 주인의 얘기에 귀가 번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이번에는 이 쪽이 끼어 들 차례다.
"나제 통문 입구 지내 구천동으로 해서 거창 가는 길이
포장됐다는 겁니까?"
"그래요. 겁나게 잘 닦아 놓았구먼 요"
그 길이 국도 37호선이고 나제 통문에서 거창까지
58키로 길은 지도상에도 나와 있지만 일부 구간이
비포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길이 완전 포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넘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무주 구천동으로 해서 덕유산 자락을 넘으니 경치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런 절경을 넘을 때 옆자리에 젊은 아가씨라도 앉아
말동무가 되어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아이스 바 양을 꼬셔 태우는 게
순서다. 아이스 바 양의 눈치를 보면서 주인에게 다시
묻는다.
"그 길로 들어서자면 리조터 입구로 해서 가야죠?"
번연히 알면서도 묻는 건 나는 지금부터 그 쪽으로 가요
하는 신호고 당신도 가지 않겠느냐는 미끼다.
아이스 바 양이 입질을 하기 전에 가게 주인이 협조를
하고 나선다.
"손님 그 길을 넘을 판이면 이 아가씨 좀 태워 가시오"
주인의 말에 나와 아가씨가 동시에 얼굴을 바라본다.
이쯤 되면 묵시적인 합의는 끝났다.
"그쪽으로 가시려면 내 차 타시지요?"
아이스 바 양에게 직접 권한다.
아이스 바 양이 약간 망설이는 척하다가 입을 연다.
"어디까지 가시는 데요....?"
"최종 목적지는 남쪽 바다지만 오늘은 힘들어 못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거창을 지나가니까 거기서 내려
드리지요"
거창서 내려 주겠다는 말에 악센트를 넣었다.
4-2. 그게 간접 키스라는 건
그때 가게 주인이 또 협조를 하고 나선다.
"보자 헌께 점잔은 분인디 타고 가면 좋구먼. 버스도
없는디 타고 가면 쓰겠구먼 뭘 그러요?"
주인의 그 말에 아이스 바 양은 타도되겠느냐는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띄운다.
차에 타면서 가방을 놓으려고 뒷 좌석을 보던 아이스 바
양이 의아한 표정이다.
카메라가 세대나 아무렇게나 동댕이쳐져 있고 잡지에다
보다 말고 던져 놓은 지도와 신문 과장 봉지에 햄버그
봉지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늘려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같은 차에 탔으니 서로 뭐라 불러야 할지 그것부터
알아두는 게 순서다.
아이스 바 양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여기서는 박현주
정도로 해 두는 게 아이스 바 양을 위해 좋을 것 같다.
가랑비가 내리는 덕유산 자락 길을 뚫고 달릴 때 두
사람은 서로 제법 말문이 열려 있었다.
"선생님. 사진 작가 세요?"
"작가는 작가지만...사진 작가는 아니요"
"그런데 웬 카메라는 저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세요?"
"한 대에는 슬라이드 필름. 또 한 대에는 보통 필름
나머지 한 대에는 고감도 필름 그래서 세대를 가지고
다니지....."
"사진 작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사진 작가도 아닌 사람이 왜 건방지게 사진 작가 흉내를
내느냐는 질문이다.
이럴 때 자기 변명과 선전 겸해 효과를 발휘하는 게
92년 이후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월간 자동차 생활과
교차로 같은 잡지다.
차를 잠시 세우고 사진을 찍는 사이 잡지를 집어
현주에게 주었다.
자동차 생활을 한참 보고서야 이해가 가는 모양이다. 또
경계심도 완전히 푼 것 같다.
초면의 아가씨를 차에 태웠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여자
가슴속에 본능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막연한 경계심을 푸는
일이다.
그런 경계심을 푸는 데는 작가라는 직업이 상당히
괜찮은 효과를 발휘한다.
현주를 위해 무주 구천동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타고 들어섰다.
"미스 박 내 사진 찍어 줄게!"
처음 만나 여자에게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하나의 작전이다.
사진을 찍는 사이 친근해 지고 사진을 보내준다는
구실로 여자의 주소를 알아 낼 수가 있다.
첫 만남에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해도 주소나 연락처나
연락처를 알아 놓으면 다음 기회를 노릴 수가 있다.
구천동에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경치들이 많다.
사진을 찍는 사이 상당히 친숙해졌다.
구천동 계곡에서 두 어 시간 노닥거린 다음 다시 차로
달린다.
무주 구천동 입구 유료 주차장 입구를 넘으면서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쏟아지고 피서철도 살짝 지난 평일이다. 도로는
거짓말처럼 한산하고 지나는 차도 뜸하다.
비가 잦았던 덕으로 계곡에는 물이 넉넉해 콸콸 쏟아져
흐르고 계곡 옆으로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며 쏟아져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짙은 안개까지 드리워져 있어 마치
구름 속을 달리는 기분이다.
운전하기에는 불편했지만 경치는 한마디로
천하절경이다.
현주는 경치에 취해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 있다.
무주에서 가창으로 연결되는 국도 37호선 정상인
신풍령(神風嶺)은 해발 천미터가 넘어선다.
신풍령 정상을 넘어서면 이제 경상도 땅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을 바라보니 안개 바다를 이루고
있다.
이런 경치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너무 너무 좋아요?. 선생님 차 타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미스 박 실망시키지 않아 다행이군"
신풍령 정상에서 경상도 쪽으로 내려서면서 신풍령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주변은 모두가 약수터고 휴게소에 약수를 바로
마실 수 있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현주가 플라스틱 바가지에 약수를 떠서 건너준다.
"미스 박 먼저 마셔요"
"선생님 먼저 드세요"
"아니야. 난 미스 박 다음에 마실 거야"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미스 박 입댄 자리에 내가 입 대고 마시려고!"
그게 간접 키스라는 건 현주가 모를 리가 없다.
반응을 보자는 목적이다.
"역시 여행기 그대로군요"
현주가 웃으면서 먼저 마신다.
"마시고 남은 물 버리지 말고 나 주어야해"
"안돼요!"
화난 표정은 아니다.
현주에게 빈 바가지를 받아 약수를 떠 마셔보니 속이
후련하다.
차는 또 다시 출발했다.
휴게소를 지나면서도 경치는 여전히 일품이다.
신풍령 휴게소를 출발해 산천 경치를 즐기며 40분쯤
가면 영성이란 마을이 나오면서 길이 갈라진다.
우회전을 하면 거창 읍이고 좌회전을 하면 함양이다.
함양에서 국도 24호선을 타고 남서(南西) 방향을 따르면
남원을 거쳐 지리산을 넘을 수 있고 국도 3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면 산청(山淸) 진주( 晋州)를 거쳐 남해
고속도로 진주 IC와 연결된다.
4-3. 자기가 그러자고 해서 난 몰라!
서울을 출발한 시간과 계산해 금산 무주를 지나면서
온갖 경치를 카메라에 담고 아가씨하고 노닥거리면
왔는데도 여들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국토가 좁은 건지 도로망이 잘되어 있는 덕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좋은 경치와 멋과 맛을 두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한사코 고속도로만 고집하니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영성 삼거리 시골 슈퍼 앞에 차를 세우고 캔 커피를
마시며
"여기서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거창까지 가신다고 하셨잖어요?"
"거창서 자기에는 너무 빨리 와 버렸어!"
"선생님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일단 함양으로 들어가 남원으로 거쳐 지리산을 넘어
볼까 하는 생각인데...지리산에 들어서기 전에 어디서
자야 할 것 같애. 미스 박은 어떡 할거요"
"지리산을 넘으면 어디예요?"
"구례로 들어서게 되요."
"거기서 서울로 가시는 건가요?"
"아니오. 구례서 섬진강을 끼고 장터로 유명한
화개(花開)를 지나 하동(河東)으로 해서 남해(南海)섬
끝까지 들어 갈 작정이요"
"며칠 걸리겠군요?"
"아니...3일 후에는 서울에 도착해야 돼요. 어때요.
미스 박도 다른 특정한 목적지가 없으면 나하고 같이 가
볼래요?"
"방해되지 않을까요?"
여자란 묘한 동물이다. 방해는 고사하고 은근히
유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해가 안될까요 하고
헛소리를 하니 말이다.
현주가 약간 망설이는 척한다.
그럴 때는 이쪽이 약간 적극적으로 권유해 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다.
여자는 어떤 결정을 할 때 반드시 명분을 찾기
때문이다.
자기도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서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자기가 그러자고 해서 그랬으니 난 몰라 하는
책임 전가를 할 명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버스도 언제 올지 모르고 거창 가 봐야 별것
없다구...웬만하면 나하고 같이 가요"
"어떡하지....?"
노도 아니고 예스도 아닌 상태에서 망설이는 척한다.
여자가 다음 액션에 대해 남자가 적극적으로
권유(강압도 상관없다)해 주기를 바랄 때 하는 말은
언제나 어떡하지라는 단어다.
이 때 적극적으로 권해야 한다.
"나하고 같이 가는 데는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먹고 마시는 건 내가 맡겠지만 ...미스 박이 자는 방
숙박료는 내가 못 낸다는 것.......그건 현주씨
몫이라구."
"어머....!호호호"
"남자 혼자 자면서 따로 자는 여자 방 값까지 내는
남자..너무 불쌍하다는 생각 해지 않았어요?"
현주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며 웃는다. 이쯤 되면
일은 끝났다.
"자. 타고 부지런히 가 봅시다"
자동차는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남원 쪽으로 향하는 국도
24호 위를 달렸다.
한동안 뜸하던 비가 함양 읍을 지나면서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니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선인 함양군
서상면을 지날 때부터는 장대비로 변한다.
전조등을 켰는데도 앞이 안 보인다.
영성 삼거리를 출발하면서 잡은 스케줄은 남원 시내로
들어가 1박하고 남원서 다시 북상해 인월(南原市引月面)로
와 산내면(南原市山內面)쪽 지리산 입구로 들어가 지리산
횡단 도로를 넘어 구례. 하동으로 가는 코스였다.
그러나 인월이 가까워지면서 코스 수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도 24호선을 타고 온 차가 계속 남쪽으로 가면
남원시로 들어서고 지리산 국립공원이라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을 하게 되면 남원군 산내면을 지나 달궁으로
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대같이 내리는 빗길을 뚫고 남원까지 가기보다는
언젠가 지나면서 보아 둔 달궁 부근에 있는 모텔에서
1박하고 바로 지리산을 넘는 쪽이 편하다는 결론이 났다.
"남원 시내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지리산 모텔에서 자고
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모텔이라는 말에 현주가 곁눈질을 한다.
현주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지리산 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현주가 말이 없다.
노고단 파크라는 이름의 모텔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밤
8시가 가까워 있었다.
1층에 있는 식당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먼저 온 사람이
세 쌍이나 있다.
모두가 폭우를 피해 들어 온 사람들인 모양이지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쌍쌍이다.
그 쌍들 모두가 아이 하나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어떤 커플들인지 대개는 짐작이 간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장대비 소리를 들으며 모텔
식당에 앉아 산채와 토종닭 찜을 안주로 지리산 (정확히는
함양) 명물이라는 국화주를 마시는 맛은 또 하나의
별미다.
기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5백년
전통(천년이라는 설도 있다)을 지녔다는 지리산 명주
국화주는 참으로 고약한 술이다.
알코올 성분이 16도 정도니 시중에서 파는 청주와
비슷하지만 술맛이 어찌나 단지 입에 거부감이 없어
여자에게 먹이기는 참으로 제격인 술이다.
첫 병도 다 마시기 전인데도 식당 주인은 자기들이 자야
할 시간이니 방으로 올라가 마시라고 권한다.
참으로 괜찮은 주문이다.
4-4. "원한다면 몸도 줄 수 있어요"
국화주를 한 병을 더 사 들고 모텔과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온돌하고 침대가 있는데 어떤 방으로 드릴까요?"
당연히 같은 방을 사용할 것이라는 걸 전제한 모텔
주인의 물음이다.
"방 여분 있지요?"
"휴가 철이 지나 방은 여유가 많습니다만...."
모텔 여주인이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말이다
"그럼 우선 아무 방이나 깨끗한 걸로 하나 주어요. 한
잔하고 잘 때는 방이 하나 더 필요할 테니까 준비해
주시고요"
잘 때는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말에 주인이 의외라는
눈을 하고 노골적으로 힐끔 쳐다본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주인의 눈이 아니라 동행한 아가씨가
안심(?)시키는 일이다.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사전 예고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나는 다른 방으로 가 잘 것이다 라는 뜻을
전하는 의사표시다.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말에 현주는 안심(?)을 했는지
자연스럽게 주인이 안내하는 방으로 함께 들어선다.
모텔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기 않게 방은 침대와 작은
테이블 하나에 의자가 넷 밖에 없는 대도 꽉 찰 만큼
좁다. 들고 온 술과 안주를 상에 놓고 마주 앉았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후드득거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여자와 앉아 술을 마시기에는 더 없이 좋은 무드다.
"현주씨는 집이 어디지.?"
"현주씨...?. 호 호 호"
"왜?"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씨하고 부르는 일 별
없거든요!"
"그럼 뭐라고 하지...?"
"자연스럽게...그냥 현주하고 부르세요"
"그래. 현주는 집이 서울인가?"
"지금 사는 곳은 성남이예요?"
"혼자 여행하는 취미가 있나 보군"
"학교 때는 가끔 혼자 다니는 일이 있었지만 졸업하고는
처음이예요"
"그럼 학교 졸업했다는 얘긴가?"
"제가 학생처럼 보이세요?"
"글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그럼 직장 다니나?!"
"직장....! 네.. 그런 셈이 예요"
"그런 셈이라니...?"
"네 직장 생활해요"
대답은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그럼 회사 친구들도 많을 텐데 현주가 다니는 직장
총각들은 모두가 수도승 같은 사람들인가? 휴가 때 동료
아가씨들 두고 자기들만 다녀오게"
"호 호. 같이 여행할 사람 찾으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남하고 같이 여행한다는 건 번거롭잖아요. 여행이란
홀가분해야 맛인데 서로 구속당하고 눈치보고 서로
양보해야 하고 선생님도 그래서 혼자 다니시는 것
같은데요"
잡지에 본 얘기다.
"그래!, 그런 점에서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군. 자. 마시자구"
"선생님...나 마음먹고 마시면 술 많이 마셔요"
그렇게 말해 놓고 현주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본다.
술에 강하니 술 먹여 엉뚱한 짓거리 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다. 맹랑한 친구다.
그러나 그 정도 못 받아넘길 나도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 아주머니 잠들기 전에 술 몇 병 더 달래
놓아야겠군"
술로 계속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다.
현주의 얼굴에 약간 당황하는 듯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역시 보통 똑똑한 아이는 아니다.
"이 술은 너무 단 것 같네요.....? "
"그럼 뭐가 좋을까? 맥주나 양주? 아니면 소주?"
"소주도 좋지만 어쩐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맥주로 하면 선생님께 너무 부담 드리는 것 아닐까요..?"
"매력적인 아가씨에게 맥주 몇 병 산 게 아깝거나
부담스러워 할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라구.?"
"난 매력하고 상관없는데요?"
"아니. 오랜만에 만난 매력적인 아가씨야"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듣기 싫지는 않네요"
"정말이야. 내가 현주에게 어느 정도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 증거를 보여 줄까?"
"증거요?"
"현주가 원한다면 몸도 줄 수 있어요!"
"어마!"
너무나 직설적인 말에 현주도 놀란 모양이다.
야한 얘기는 너무 오래 하면 역효과를 불러온다.
이쯤에서 화재를 돌려야 한다.
전술에서 말하는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러세요?"
"뭘..?"
"여자에게 후한 것 말예요"
"아니...젊고 매력적인 여자에게만 그래!"
"잡지 여행기 보니 그 말 여자만 만나면 하시는 소리
같던데요?"
"남의 말을 의심하는 건 죄가 돼요!"
"여자만 보면 거짓말하는 것도 죄가 되지 않을까요?"
말을 받아넘기는 품이 보통이 아니다.
"그럼 우리 맥주 거품으로 죄를 씻을까?"
교환 전화로 맥주 열병을 시켰다.
"그걸 누가 다 마셔요?"
"현주는 술이 세다면서?"
"하지만!"
현주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4-5. "그럼 빼앗는 형이신 가요?"
"걱정 말어!. 난 여자에게 술 강요하는 남자는 아니야!"
현주의 경계심을 풀자는 작전이다. 그러나 현주는
"남자들은 말은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예요?"
"그건 현주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어떤 목적을
자기고 여자에게 술을 권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 왜
그러는지 알어?"
"그만큼 자신 만만하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아니야!"
"그럼요?"
"술로 여자를 유혹하지 마라. 성공해도 맛이 간 상태다!
이제 내 철학이야!"
"정말 못 당하겠어요"
"그러니 안심해. 현주가 못 마시면 내가 마실 테니까!"
"선생님은 술 많이 드시는 나 봐요"
"자랑은 아니지만 세상에 태어나 나 보다 술 더 많이
마시는 사람 아직 못 만나 봤다구."
"선생님. 지금 벼락치고 있어요"
"벼락을 처도 무서울 것 없어. 지금 한 얘기 거짓말도
아니고 또 벼락 맞을 만큼 불순한 생각도 하고 있지
않으니까"
"어머? 전 그냥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예요!"
"그렇다면 도둑놈이 제 발에 저렸나?"
"뭔가를 훔칠 생각이라고 하고 계셨다는 얘기같이
들리네요"
갈수록 태산이다.
"아니! 난 어떤 경우에도 남의 것을 훔치지는 않아"
"그럼 빼앗는 형이신 가요?"
그래 놓고 또 다시 똑 바로 바라본다.
"강제로 빼앗는 건 강도나 할 짓이지! 나는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스스로 주도록 만드는 편이야."
"그런 사람이 더 악질이라던 데요?"
그때 여관 주인이 맥주 열병을 올린 큰 쟁반을 들고
들어 와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묻는다.
"방 하나 더 필요하시면 지금 말씀하시죠. 우리도 자야
할 시간이라"
"아!. 방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렇게 밤을 세우며 앉아
술 마실 테니까요"
거침없이 내 쏟는 말에 두 여인의 눈동자가 동시에
이쪽으로 향한다.
주인 아주머니의 눈은 이상한 인간도 다 있다는 빛이고
현주의 눈은 약간 낭패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여관 아주머니가 힐금 쳐다보며 나간다.
"자. 우리 이 밤을 위해 건배부터 하지! 폭우 내리는
지리산 밤을 위해서!"
"네. 선생님같이 좋은 분 만난 행운을 위해 들겠어요!"
"행운일지 불행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우선 말이라도
고맙군. 그런데 아까는 악질이라고 했잖아"
"그건 특정 상황에서 얘기가 아니라 일반론이예요."
국화주 두 병에 맥주를 여러 병 마셨는데 현주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말하는 걸로는 뭔가 쉽게 풀릴 것 같으면서도 상대에게
도무지 틈을 주지 않는 여자다.
젊은 여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무엇 하는
직장에 다니는지 물어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상황이니 일반론이나 하는 색 다른 말들을 많이
나오는 게 더 더욱 궁금하다.
"현주 다니는 직장이 무엇 하는 곳이지?"
"솔직히 말씀 드리면 별로 알려 드리고 싶지 않아요"
말해 놓고 어색하게 웃는다.
"아! 그래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난 뭐 건 강요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다른 뜻은 없고 제 직업 아시고 나면 실망하실 것
같아요!"
현주가 눈치를 본다. 다시 한 번 더 물으면 말하겠다는
표정으로!.
"실망하다니?. 나 직장 가지고 사람 값어치 다루는 그런
경박한 사람은 아니야"
"선생님 지금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아? 그러고 보니 직업 어쩌고 한 것 같군. 그리고 또
조금 전에는 직장 다니는 셈이라고 표현을 한 것 같은
기억이 나는군. 직업이라.....!?"
여자가 직업 어쩌고 하면 서비스업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박현주라는 여자는 아무래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자 같지는 않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런 여성치고는 몸 꾸밈새가 덜
세련되어있고 거기다 지성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긴다.
대체 현주가 말하는 자기 직업이란 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적당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신비한 여자라는
기분이 든다.
현주의 입에서는 깜짝 놀랄 소리가 나온다.
"선생님. 나 군인이예요"
"뭐? 군인?"
상상도 못하던 말에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역시 실망하셨죠?"
"그럼 여군이란 얘긴가?"
"네. 임관한지 3년 됐어요.!"
임관. 그렇다면 사관이란 얘기다.
그랬다. 박현주. 그녀는 대한민국 육군 중위였다.
"역시 실망하셨군요. 아무 말씀 없으신 걸 보니."
"내가 왜 실망 할거라는 생각을 하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군인이 된 여자에게는 이상한
편견 같은 게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한 현주는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마신다. 그런
다음
"선생님. 나 담배 한대 피면 버릇없다고 야단치실
거죠?"
현주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4-6. 전기를 끄고 침대에 눕혔다.
"나 그런 옹졸한 사람 아니라고 했지?. 담배를 피우면
아까부터 피지 그랬어!"
담배를 건네 주었다.
"내가 불 부쳐 줄게"
"아니예요!"
"남자와 같이 앉아 여자 스스로가 자기 담배에 불을
붙치는 게 아니예요. 또 여자 스스로 담배 불을 붙치도록
두는 것도 남자의 예의가 아니고!"
라이터를 켜 내밀며.
"어서!"
"선생님에게는 당할 수가 없군요"
현주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담배 문 입을 내민다.
"선생님!"
"얘기해요"
"선생님은 정말 이상한 분이예요"
"이상한 ..사람이라니?."
"왜. 처음 만난 분인데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
같은 느낌 주고 마음이 편하게 해 주는 그런 분 말예요"
"격식은 거북하고 서로 불편한 것 아니겠어?. 그래서 난
언제나 서로가 편하자는 주의야"
"사복 입고 만난 남자에게 스스로 군인이라는 신분을
밝힌 건 선생님이 처음이예요."
"현주가 나를 남자로 생각해 주니 기분 좋은데?"
"여자는 아니잖아요"
"현주의 뜻에 따라 우리는 지금부터 남자와 여자 사이가
되는 겁니다!"
"선생님은 사람 난처하게 만들어 놓는 걸 즐기는 취미가
있으신가 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에 난처하다는 구석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박 중위."
"어마 박 중위가 뭐예요. 갑자기...."
"우리 건배합시다"
"갑자기 건배는 또 왜요?"
"나 참으로 솔직히 말해 많은 여자를 만나고 겪어
봤지만 장교 아가씨와 밤을 같이 해 보기는 처음이 거든.
이런 행운에 건배를 안 하면 진짜 벼락 맞을 일
아니겠어.."
"호 호 호. 선생님하고만 있으면 화 낼 일도 슬플 일도
없겠어요. 고마워요 선생님! 우리 건배해요"
그러고 보니 현주란 아가씨는 어딘가 기품 같은 게
풍기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요령과 절도가 엿보인다
싶다.
이런 똑똑한 아가씨들이 군에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군대도 제법 세련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맥주 빈 병이 여섯 개가 되면서 서로 약간 취기가 돌기
시작한다.
"내가 현주 곁으로 가 앉으면 안될까?"
현주가 말이 없다.
"아니면 현주가 내 곁으로 올래?"
여전히 말이 없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현주가 보고만 있다. 현주 옆으로 가 나란히 앉는다.
"선생님 나 무술 해요"
"현주 허락없이 얻어맞을 짓을 하지 않을 거야"
현주가 웃기만 한다.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신다.
맥주가 또 두 병이 비어졌을 때 팔을 현주 어깨에
올렸다.
무술을 사용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 정도는 허락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많이 드시고 내일 운전하실 수 있으세요?"
현주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 때맞추어 해 준 질문이다.
"술보다는 잠이 문제야"
"그럼 주무세요"
"주인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방을 얻을 수 없잖아"
"난 여기 앉아 눈만 붙이면 돼요. 군인이라 그런 일에
익숙해 있어요"
"숙녀를 의자에 앉혀 놓고 혼자 침대에서 편하게 자는
건 남자의 도리가 아니야"
"하지만 내일 운전하시려면 주무셔야 하잖아요?"
"같이 자자!"
현주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옷 입은 채로!"
어서 말을 돌린다. 이것도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현주가 한동안 말이 없다.
현주 어깨에 올려진 팔에 힘을 약간 주었다.
현주 몸이 실려왔다.
"현주도 피곤하지! 침대로 가자!"
"옷 입은 그대로예요!"
현주가 다짐한다.
"말했지?. 난 여자가 싫다는 일 하지 않는다고!"
현주를 일으켰다. 현주가 따라 일어난다.
전기를 끄고 현주를 침대에 눕혔다.
아무런 저항없이 가만히 눕는다.
침대에 누우면서 팔을 현주의 머리 밑으로 뻗어 팔
베개를 해 주었다.
현주가 아무런 저항없이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른다.
현주가 내 팔을 베면서 두 사람의 몸이 자연스럽게
밀착되었다.
옷을 입었다고 하지만 방에 들어서면서 이미 점퍼들은
벗어 티셔츠뿐이다.
면 티셔츠를 통해 현주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 온다.
현주의 체온이 나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내 체온도
현주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서울을 떠날 때만해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건
상상조차 못했어요"
현주가 허공을 바라본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4-7. 바지가 몸을 떠나면서 현주의
"그게 인생살이라는 거야."
"인생살이?"
현주가 또 한번 중얼거린다.
"인간이란 말이야. 제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에
태어나지만 살다보면 서로 만나게 되고 만나서는 서로가
이해를 하면서 도우고 살아가게 마련이야"
"선생님처럼 생각하면서 살면 세상도 참 편할 것
같아요"
"어렵게 생각하면서 살 이유는 없어"
"남자와 여자는 다르잖겠어요?"
"다를 게 뭐가 있어.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은
아니야"
"알고 있어요"
다른 한 손으로 현주의 어깨를 잡아 내 쪽으로 끌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자세로 누웠다.
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밤의 어둠 속이다. 서로의
얼굴도 표정도 볼 수 없었지만 상대의 숨결이 닿을 만치
거리가 바짝 좁혀져 있었다.
여자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향기 속에 땀 냄새가 섞여
있다. 두 사람 모두 방에 들어와 씻지 않았다.
약간 땀 냄새가 섞인 체취에서 젊고 건강한 여자의
향기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남자의 피를 솟구치게 하는 만드는 향기다.
손이 저절로 티셔츠 가슴 위로 간다.
"선생님 약속 위반예요"
현주가 중얼거린다. 중얼거릴 뿐 항의나 항거는 하지
않는다.
"약속위반 아니야."
가슴 위에 올려진 손에 힘을 주면서 말한다.
"약속위반이요"
"우리는 아직 옷을 입은 그대로야"
현주가 말이 없다.
가슴 위에 올려진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현주의
탄력이 손으로 전해 온다.
"선생님 그러지 마세요"
현주의 음성 색깔이 조금전과는 달라져 있다. 말없이
계속 손만 움직인다.
현주의 숨결이 조금씩 흐트러져 간다.
"현주!"
대답이 없다.
분명히 잠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답이 없다.
"현주!"
두 번째도 대답이 없다.
"나 약속위반하고 싶어진다!"
여전히 말이 없다.
"하지만 약속은 지킬게!. 여자와 한 약속만은 반드시
지킨다는 게 내 철학이야!"
"선생님!"
현주가 파고들며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부른다.
"얘기해"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예요"
"그렇지만도 않아!"
"아니예요!. 좋은 분이예요."
"현주!"
"네?"
"나도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옷을 벗기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망을 일을 키는 평균적 보통 남자야. 다만
다른 남자와 방법이 다를 뿐이야"
"선생님은 여자가 그런 남자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난 위선자지! 하지만 현주에게만은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아"
"왜지요?"
"경멸받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니까!"
"놀리시는 것 싫어요"
현주의 목소리에서 싫다는 빛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손이 올려져 있는 가슴 위에 티 셔츠에
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9월이지만 아직도 더위는 남아 있고 거기다 좁은 방에서
마주 안고 있는 두 사람 몸에서 나온 열기로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는 증거다.
세 찬 비바람으로 창문을 열 수가 없다.
"현주. 덥지?"
현주가 말이 없다.
가슴 위에 있던 손을 내려 현주의 청바지 앞으로 가져
갔다.
현주의 몸에서 가벼운 긴장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말없이 청바지 지퍼 고리를 잡아 아래로 내린다.
현주의 몸에서 꿈틀하는 반응이 일어나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긴다.
현주는 여전히 죽은 듯이 가만있다.
바지가 안전히 몸을 떠나면서 현주의 아랫 도리에는
작은 천만 남았다. 현주는 여전히 죽은 듯이 가만있다.
"현주"
잠들지 않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너무 늦었다. 자자!"
현주를 꽉 끼어 앉으면서 말했다.
현주가 말없이 파고들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 산새들의 요란한 지저귐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현주는 어제 밤잠에 들 때의 복장 그대로 끼어 안긴 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작은 섬유로 허벅지 맨 안쪽만 살짝 가린 채 완전히
드러나 있는 현주의 하반신과 미끈한 두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남은 섬유를 벗기고 싶어지는 욕망이 솟구친다.
4-8. 팬티 속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팔을 엉덩이로 뻗어 팬티 속으로 가만히 손을
들이밀었다.
젊은 탄력이 손으로 전해 온다.
손바닥으로 두 개의 잘 발달된 두 개의 언덕을 천천히
쓸었다.
"응!"
현주의 입에서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온다.
잠에서 깨어나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깨어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자신의 몸에서 움직이고 있는
남자의 손을 의식한 것만은 틀림없다.
나쁜 짓 하던 아이가 어른에게 들켰을 때처럼 손을
엉덩이 위에 올린 채 꼼짝 할 수가 없다.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현주의 몸에서 긴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손으로
전해 온다.
현주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는 증거다.
비는 멎어 있었다. 비가 멎은 아침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방은 훤히 밝아 있다.
훤히 밝은 곳에서 여자를 벗긴다는 건 너무나 예의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아쉬움이
남는다.
손을 빼 티셔츠 속으로 넣는다.
현주의 탄력 있는 가슴 언덕이 거기 있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자동장치가 부착된 기계처럼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각으로 전해 오는 현주의 꼭지는 젖무덤 살 속에 반쯤
파고들어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있다.
이런 형은 숫처녀에 많다.
현주는 나이로 보아 숫처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적인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다.
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어 굴리듯이 가볍게 만진다.
그때부터 현주의 숨결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선생님. 그러지 마세요!"
현주가 눈을 감은 채 속삭인다.
"이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치 현주는 매력적이야!"
"하지만!"
"이 이상 넘어서지 않을게. 나 약속을 지키는 남자라는
것 알지."
"알아요."
"그럼 그냥 만지게만 해 주어!"
"하지만!"
"또 뭐가 있어!"
"이상해지려고 그래요!"
현주가 빨갛게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모기 만한 소리로
속삭인다.
"현주가 좋다면!"
그 말뜻을 현주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지금은 싫어요!"
현주가 가슴에 얼굴을 파 묻으며 속삭인다. 지금은
안되지만 나중에는 좋다는 뜻이다.
현주가 일단 승낙한 이상 서둘 이유는 없다.
"그래. 현주 결심 설 때까지 기다릴 게"
가슴에서 손을 빼 현주를 안았다.
"선생님!"
"응!"
"실망하실 거예요!"
"실망?"
"두렵고요!"
"소녀처럼 두렵긴!"
현주 정도의 나이면 당연히 남자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말이다.
"선생님이 실망하실 까 봐 두려워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지금 몇 시예요?"
"팔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둔 시계를 집었다"
"일곱 시 조금 지났어"
"더 주무셔야겠네요?"
"난 한번 깨어나면 다시 밤이 들지 않는 버릇이 있어"
"그럼 우리 출발해요"
현주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눈을 감은 그대로 차안에 안아다 놓을까?"
"선생님! 나 무거워요"
현주가 눈을 뜨고 생그리 웃는다. 웃는 얼굴이 소녀처럼
청순하다.
"현주."
"네?"
"현주를 밝은 곳에서 보고 싶어진다!"
현주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안돼요!"
소리는 났았지만 완강히 거부하는 목소리다.
"현주가 싫다면 도리 없지만!"
"죄송해요!"
"현주가 왜 죄송해?. 무리한 소리한 내가 잘못이지!"
"죄송해요!"
현주 또 한 번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내가 먼저 할까? 아니면 현주가 먼저 할래?"
"선생님 먼저 하세요"
"그럼 나 먼저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우리는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다.
비가 멎은 지리산이 안개에 쌓여 있는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다.
간밤에 그렇게 쏟아진 비로 지리산 골짝마다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려간다.
물소리가 온갖 산새들이 소리와 어우러져 대자연의
합창처럼 울러 퍼진다.
지리산을 수없이 넘었지만 이런 장관을 만나는 건
처음이다.
4-9.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지리산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멋있을 줄은
몰랐네요"
현주의 입에서도 감탄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지리산 경치가 언제나 이런 건 아니야. 큰비가 내린
다음이라 특별히 아름답고 멋있는 거라구. 나도 이런
지리산을 본 건 처음이니까"
"큰 행운이네요. 역시 무주에서 선생님 따라 나서길 잘
했다는 걸 날씨가 확인시켜 주려나 봐요"
"현주가 행운의 여신인 것 같애"
"자기 고집만 부렸는데도요?"
"현주 같은 젊고 똑똑하고 매력적인 아가씨라면 내가
참아야지!"
"선생님!"
"응!"
"내가 오래 오래 귀찮게 하면 어떡하시려고 그래요?"
"그건 내가 바라는 바야"
"나 정말 오래 오래 선생님 귀찮게 할지 몰라요"
"제발 좀 그래 주어"
"그 말씀 책임 지셔야해요"
"그럼!"
"기억해 둘게요"
다짐하듯 말한 현주가 창 밖을 바라보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른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
였어"
노사연의 만남이다.
반주없이 흥얼거리는 노래지만 수준 급이다.
노래를 부르는 현주의 모습은 티없는 소녀만 같다.
하룻밤 사이에 군인 티가 사라지고 어린애같이 변하니
여자란 참으로 신비한 동물이다.
이래서 옛사람들은 여자를 불러 여우라고 했던 걸까?
지리산 노고단이 가까워지면서 발 아래로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지리산을 넘을 때는 장마철이 제일이라고 한 어느 후배
등산쟁이 말을 새삼 공감하게 만든다.
노고단이 가까워지면서 차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별을
못할 회색 커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낮인데도 전조등을 켜야 하고 이따금씩 경음기를 울려
마주 오는 차에 이쪽 위치를 알려야 할 만치 코앞이 안
보인다.
운전을 하는 쪽은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지만 옆에
앉은 현주는 그저 경치에 취해 무아경에 빠진 채 계속
같은 노래만 흥얼거리고 앉았다.
심술 같은 장난 끼가 동한다.
"군인은 겁을 모르는 모양이지...?"
"겁이라니요.?"
"이 길옆은 천 미터 낭떠러지예요"
"거짓말이시죠?"
"여기는 지리산 정상이고 지리산 표고쯤을 알고 있을
텐데..."
"아! 정말 그렇네요"
"듣고 나니 무서워지는 모양이지?"
"선생님 운전 솜씨 믿어야죠."
현주는 태평스럽게 노래만 계속 흥얼거린다.
노고단 휴게소는 안개비에 쌓여 있었다.
노고단에서는 내리막길이다.
이런 기상 조건에서는 오를 때보다 내려 갈 때가 더
위험하다.
그런데도 천방지축 같은 녀석들이 있어 그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서도 추월을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일생에 한번 만나면 그것도 행운이다 싶은 절경을
만났으면 경치를 만끽하면서 천천히 갈 일이지 뭐가
그리도 급해 저 야단들인지 딱한 생각이 든다.
여행이 뭔지 모르고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서기만 하면
여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여행이란 오가는 길을 즐기는 것이지 어느 목적지를
정해 놓고 미친 것처럼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언제쯤이면 우리도 여유롭고 올 바른 여행 문화가
정착될지!?
지리산 관통 도로를 내려서면 구례읍(求禮邑)이다. 구례
읍내에는 맛있는 점심을 먹여 주는 동원식당이 있다.
동원식당은 구례읍에서도 상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집이다.
골목 안에 있어 찾는 게 조금은 번거롭지만 음식 맛
하나만은 과연 이 지역에서 최고다.
맛을 즐기고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물어
찾아가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지리산에서 나오는 각종 산나물도 정성껏 상에
올려놓았고 시장에서 사 온 것이 아닌 이 집에서 직접
담근 조선 된장으로 끓이는 된장국 맛이나 된장 찌개도
구수하지만 동원식당 별미는 뭐라고 해도 되지 고기
구이다.
간장과 고추장을 적당히 혼합한 양념장으로 구운 이 집
돼지고기 구이는 찬으로도 좋고 간단한 반주 안주로도
좋다.
동원식당 정식을 맛보자면 우선 구례 읍내 시가지로
들어가야 한다.
시가지에 하나 밖에 없는 로터리를 찾자 들어 거기서
구례 전화국이 어디냐 물어야 한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전화국이
있고 전화국에서 바라보면 한옥에 동원식당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 부근은 주차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것이 흠이지만
전화국 앞 주차장에 잠시 세우거나 골목길에 잠시 세워도
인삼이 좋아 나무라지 않는다. 이 지역을 지나는 길이
있으면 한번 들려 보라 권하고 싶다.
동원식당에서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고 또 길을 나섰다.
구례읍 우회도로 갈림길에서 국도17호를 타면 구례역
앞에서 북으로는 남원 가는 길이고 남으로는 순천으로
가게 된다.
읍내 갈림길에서 국도 19호선을 타고 동쪽으로 달리면
하동군 화개면을 지나 하동읍으로 들어가 남해 고속도로와
만나게 된다.
4-10. "여기서? 싫어요! 부끄러워요"
두 길 모두 경치가 좋지만 우리는 국도 19호선을
택하기로 했다.
국도 19호선은 섬진강을 끼고 달린다.
이 일대는 엄청나게 넓은 평야지대다.
참으로 풍요롭게 느껴진다..
더없이 넓은 들을 끼고 달리다 보니 저 만치에 검문소가
보인다.
피아골 입구 검문소다.
검문을 하던 전경 녀석이 차안을 들여다본다.
아버지와 딸 사이는 아닌 것 같은 남녀가 타고 있는 게
약간 심사가 틀어졌는지 현주에게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한다.
현주가 신분증을 내민다. 장교 신분증을 본 젊은 전경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현주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왜? 뭐가 잘못됐어요?"
"아!. 아닙니다. 안녕히 가십시요"
그럴 때의 현주는 영락없는 군인이다. 여자는 역시 변화
무상한 것인가 보다.
검문소에서 좌회전을 해 지리산으로 들어서면 피아골로
갈 수 있다.
우리는 피아골로 들어갔다.
피아골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손을 잡고 계곡을 따라
걷는다.
어제 쏟아진 폭우 영향인지 계곡에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사진 찍어 줄게"
"그래요"
현주가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계곡에 선다.
사진을 찍는 사이 이런 계곡에서 현주의 누드를 찍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사진을 찍고 바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현주!"
"네?"
"조금 추울지 모르지만 옷 벗고 물 속에 들어가 봐.
멋있는 사진 찍어 줄게"
현주는 처음 그 말 듯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한 순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여기서 벗어요? 부끄럽게! 싫어요!"
드디어 누드 사진을 찍자는 뜻을 알아들었다.
"새삼 뭐가 부끄러워?."
"그래도 싫어요!"
"군인이 무슨 부끄러움이 그렇게도 많아!"
"돌아 올 때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싫어요"
"이상한 친구구나!"
"우리 이제 내려가요"
더 있다가는 정말 벗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
내려가자고 한다.
다시 검문소 삼거리고 나오 좌회전을 한다.
검문소에서 10여 킬로쯤 가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섬진강이 우회전으로 해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왼쪽에
제법 큰 마을이 나선다.
10리 벚꽃 터널로 유명한 화개사(花開寺)가 있고
화개장터로 너무나 잘 알려진 하동군 화개면이다.
화개장은 한때 조선 10대 장의 하나로 손꼽혔을 만치
번창하던 시절이 있었다.
김동리 선생의 역마(驛馬)란 소설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 바로 화개장이다.
화개 장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고 왼쪽 길을 택하면
구례 곡성 남원으로 가게 되고 화개사 절 입구를 따라
오른편 길을 택해 계속가면 산청군 마천면(山淸群
馬川面)을 지나 뱀사골로 거쳐 남원군 산내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지리산 관통도로 달궁쪽 입구가 있는 바로 그
산내면이다.
"여기서 마천면으로 해 뱀사골을 지나면 어제 우리가
잤던 그 마을 입구 쪽이군요"
"60리라니까 이십 사 오 키로 정도겠지"
"그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하루 종일 돌아 왔군요"
"돌아갈 때는 그 길로 가보자!"
남원군 산내면과 화개장터가 있는 하동군 화개면 까지는
산길로 60리다.
남원군 산내면 사람들은 남원 장으로 가지 않고
화개장을 생활 필수품 공급처로 삼고 살아 왔다.
산내면은 남원 명물이라 불리는 남원 목기(木器)의
본산지다.
산내면에서 만든 남원 목기를 한 짐 지고 뱀사골을 지나
화개장에 와 팔고는 소금 새우젓 등 생활 필수품을 사
간다.
하나 재미있는 건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實相寺)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호남 사투리가 아닌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사실이다.
생활 근거지와 교역 근거지가 경상도다. 그래서 자연
그쪽 말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실상사 입구 마을에 사는 토박이들은 억양도
사투리도 경상도다.
구례 넓은 들에서 생산되는 곡식도 모두 배에 실려
화개나 하동 장터에서 거래된다.
이쪽에서 나오는 곡식은 다시 바다 배에 옮겨 남해안을
돌아 한양으로 실려 갔다.
하동 화개장은 전라도 사람에게도 경상도 사람들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물 교환 장소 구실을 한 것이다.
남해 고속도로가 생기고 호남 고속도로가 뚫리고
경전선(慶全腺) 철도가 개통되면서 물길을 이용한 교역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화개장도 남해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옛 번영을
영원히 잃고 말았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화개 장터로 잘 알려진 화개면 소재지는 좋게 말해
아담한 마을이고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초라한
마을이다.
이 지역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면 한번쯤은 들려
볼만하다.
화개 다음은 하동읍이다.
4-11. 희열감과 함께 성적인 오르가즘까지
화개에서 하동까지 70리 길을 오는 사이 지역 얘기를
듣던 현주가.
"우리 하동에서 하루 놀면 안 될까요?"
하고 흥미를 나타낸다.
하동을 여러 번 가 봤지만 하동에서 자 본 일은 없다는
생각 든다.
기왕에 바쁜 길도 아니라면 모처럼 하동에서 하루 밤을
지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동읍은 장터를 가운데로 하고 시가지가 형성돼 있다.
또 장터가 시가지 전체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엄청나게 높다.
한 도시 기능이 장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는 배치다.
하동읍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섬진강 변을 찾아
나섰다.
옛날에는 하동 명물 하면 김이 무명했지만 광양제철이
들어서면서 바다가 오염된 다음에는 그 유명한 하동 김도
멸종이 되고 오늘에 와서는 하동 명물 하면 제칩국 정도가
고작이다.
현주는 제칩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제칩은 강물과 바다 물이 섞이는 모래 바닥에서
서식하는 껍데기가 검은 작은 조개 종류로 낙동강 하구와
섬진강 하구에서 잡히는 것을 최고로 쳤다.
낙동강 제칩은 부산 사상 공단에서 마구잡이로 쏟아 낸
공장 폐수로 멸종되고 지금은 하동지역 섬진강에서만
유일하게 잡힌다.
제칩은 속 풀이용 국으로도 좋지만 삶은 알을
초고추장에 비벼 소주나 막걸리와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섬진강을 벗어나 시내로 나왔다.
시절이 좋아 보이는 여관이 있는 골목에 차를 세워 놓고
시내로 들어 가 한바퀴 돌아본다.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본 우리들은 영상가요가 설치된
술집을 찾아 들었다.
20대 직장인들을 의식한 듯 내부 장치가 젊은이들
취향인 그 영상가요 술집은 영상가요 시설이나 조명 내부
장치들이 대도시에 비해 빠지지 않았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상당히 많았고 대개가 젊은
직장인들이 였다.
광양쪽에서 근무하는 지방 젊은이들이 아니면 광양에서
쪽에서 놀러 온 사람들인 것 같다.
영상가요 술집에 들어 왔으니 당연히 노래판에 끼어 들
수밖에 없다.
현주가 만남을 부른다. 노래 솜씨는 준 프로 급이라고
해도 좋았다.
현주가 만남을 부르는 솜씨 하나는 노사연 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로 못 하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라고 발기힐 수 없는 사정이 있다.
9월초. 무작정 차를 몰아 떠났다.
마음 내키는 대로 달리다 보니 차가 무주읍에 와 있다.
무주 읍은 군청 소재지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치
규모가 작다. 차로 읍내를 두어 바퀴 돌아 봤지만
그럴듯한 (?) 건수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아 읍내에서 빠져
나왔다.
읍내를 빠져 나와 국도로 들어서는 어귀에 작은 가게가
있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어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에 여행 차림의 젊은 아가씨가 아이스 바를
빨고 앉아 있다. 첫 눈에 마음이 끌린다.
주스를 마시며 정탐을 해 본다. 혼자 여행길에 나선
여자에 틀림없다는 확신이 선다.
직장 여성 같기도 하고 여대생 같기도 한 인상이다.
조금 더 다시 자세히 관찰해 본다. 집을 나선지 최소한
이틀 이상은 된 것 같다.
여자가 집을 나선지 며칠이나 되는지 한 눈에 어떻게
알아내는 비결을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살짝
공개하겠다. 그건 의외로 간단하다. 신발을 보면 안다.
여자가 레저성 여행을 떠날 때는 대개 운동화를 신고 또
출발 전에 새 운동화를 사 신고 나서지 않으면 깨끗이
빨아 신고 나선다.
여자는 여행에 나설 때 배낭 속에 갈아입을 셔츠나 팬티
브래지어 심지어는 더 비밀스러운 것까지 다 넣고
다니지만 신발을 예비로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가지고 다닐 수는 없고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고 또
가지고 다닐 생각을 하는 여자도 없다.
신발은 양말과 달라 여행 중에 빨아 신을 수가 없다.
그래서 신발이 더렵혀진 상태를 보면 여자가 집을 나선지
며칠이나 되는지 대개 알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신발 상태가 전혀 도움이 안될 때가
있다. 계속 차만 타거나 고운 길만 골라 코스를 정한
때다.
그럴 때도 알아내는 비결은 있다. 머리 상태나 화장
상태를 보면 알게 된다.
젊은 여자가 레저 여행을 하면서 미장원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
또 레저 여행을 떠나면서 휴대하는 화장품은 대개가
기초 화장품 정도다.
그래서 집을 나선지 오래 되면 될수록 머리도 얼굴도
깔끔한 맛이 줄어든다.
여자가 집을 나선지 며칠이 되느냐 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목적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인간은 자기 둥지를 떠나면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에 젖어 들게 된다.
임자가 있는 여자라면 외로움의 밀도는 임자를 떠나
있는 시간과 정비례한다.
여행이란 사람의 감정을 센티멘털 플러스 로맨틱으로
만든다.
거기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저녁때 가볍게 한 잔 하러
간 생맥주 집에서 본 쌍쌍들의 모습에서 자극을 받게 되고
객지 여관방에서는 초저녁부터 옆방에서 들려 오는 쌍쌍
파티의 효과음(?)에서 충격적인 자극을 싫도록 받아 몸도
마음도 젖을 대로 젖어 있다.
이 모든 농도 또한 집을 떠난 시간과 정비례한다.
집을 나선지 오래되면 될수록 자극이나 무드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져 있다.
그건 여행길에 나선 여자는 집을 나선(때로는 애인의
품속 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길면 길 수록 이쪽은 일이
쉬워(?) 진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여행길에서 여자를 보면 먼저 집을 나온지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는 정도의 관찰력이 있어야 헛수고를
면한다.
아이스 바 양이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건다.
"구천동으로 올라가면 그쪽에서 경상도로 가는 길이
있죠?"
아이스 바 양의 물음에 길은 개통됐지만 정기 노선
버스는 없다는 주인의 대답이다.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뜨인다.
덕유산 국립공원을 넘어 가창으로 빠지는 길이
지도상에는 있지만 그 길이 비포장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확장 개통되었다는 가게 주인의 얘기에 귀가 번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이번에는 이 쪽이 끼어 들 차례다.
"나제 통문 입구 지내 구천동으로 해서 거창 가는 길이
포장됐다는 겁니까?"
"그래요. 겁나게 잘 닦아 놓았구먼 요"
그 길이 국도 37호선이고 나제 통문에서 거창까지
58키로 길은 지도상에도 나와 있지만 일부 구간이
비포장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 길이 완전 포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넘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무주 구천동으로 해서 덕유산 자락을 넘으니 경치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런 절경을 넘을 때 옆자리에 젊은 아가씨라도 앉아
말동무가 되어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아이스 바 양을 꼬셔 태우는 게
순서다. 아이스 바 양의 눈치를 보면서 주인에게 다시
묻는다.
"그 길로 들어서자면 리조터 입구로 해서 가야죠?"
번연히 알면서도 묻는 건 나는 지금부터 그 쪽으로 가요
하는 신호고 당신도 가지 않겠느냐는 미끼다.
아이스 바 양이 입질을 하기 전에 가게 주인이 협조를
하고 나선다.
"손님 그 길을 넘을 판이면 이 아가씨 좀 태워 가시오"
주인의 말에 나와 아가씨가 동시에 얼굴을 바라본다.
이쯤 되면 묵시적인 합의는 끝났다.
"그쪽으로 가시려면 내 차 타시지요?"
아이스 바 양에게 직접 권한다.
아이스 바 양이 약간 망설이는 척하다가 입을 연다.
"어디까지 가시는 데요....?"
"최종 목적지는 남쪽 바다지만 오늘은 힘들어 못 갈
때까지 가보는 겁니다. 거창을 지나가니까 거기서 내려
드리지요"
거창서 내려 주겠다는 말에 악센트를 넣었다.
4-2. 그게 간접 키스라는 건
그때 가게 주인이 또 협조를 하고 나선다.
"보자 헌께 점잔은 분인디 타고 가면 좋구먼. 버스도
없는디 타고 가면 쓰겠구먼 뭘 그러요?"
주인의 그 말에 아이스 바 양은 타도되겠느냐는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띄운다.
차에 타면서 가방을 놓으려고 뒷 좌석을 보던 아이스 바
양이 의아한 표정이다.
카메라가 세대나 아무렇게나 동댕이쳐져 있고 잡지에다
보다 말고 던져 놓은 지도와 신문 과장 봉지에 햄버그
봉지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늘려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같은 차에 탔으니 서로 뭐라 불러야 할지 그것부터
알아두는 게 순서다.
아이스 바 양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여기서는 박현주
정도로 해 두는 게 아이스 바 양을 위해 좋을 것 같다.
가랑비가 내리는 덕유산 자락 길을 뚫고 달릴 때 두
사람은 서로 제법 말문이 열려 있었다.
"선생님. 사진 작가 세요?"
"작가는 작가지만...사진 작가는 아니요"
"그런데 웬 카메라는 저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세요?"
"한 대에는 슬라이드 필름. 또 한 대에는 보통 필름
나머지 한 대에는 고감도 필름 그래서 세대를 가지고
다니지....."
"사진 작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사진 작가도 아닌 사람이 왜 건방지게 사진 작가 흉내를
내느냐는 질문이다.
이럴 때 자기 변명과 선전 겸해 효과를 발휘하는 게
92년 이후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월간 자동차 생활과
교차로 같은 잡지다.
차를 잠시 세우고 사진을 찍는 사이 잡지를 집어
현주에게 주었다.
자동차 생활을 한참 보고서야 이해가 가는 모양이다. 또
경계심도 완전히 푼 것 같다.
초면의 아가씨를 차에 태웠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여자
가슴속에 본능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막연한 경계심을 푸는
일이다.
그런 경계심을 푸는 데는 작가라는 직업이 상당히
괜찮은 효과를 발휘한다.
현주를 위해 무주 구천동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타고 들어섰다.
"미스 박 내 사진 찍어 줄게!"
처음 만나 여자에게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하나의 작전이다.
사진을 찍는 사이 친근해 지고 사진을 보내준다는
구실로 여자의 주소를 알아 낼 수가 있다.
첫 만남에서 일을 성사시키지 못해도 주소나 연락처나
연락처를 알아 놓으면 다음 기회를 노릴 수가 있다.
구천동에는 사진을 찍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경치들이 많다.
사진을 찍는 사이 상당히 친숙해졌다.
구천동 계곡에서 두 어 시간 노닥거린 다음 다시 차로
달린다.
무주 구천동 입구 유료 주차장 입구를 넘으면서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쏟아지고 피서철도 살짝 지난 평일이다. 도로는
거짓말처럼 한산하고 지나는 차도 뜸하다.
비가 잦았던 덕으로 계곡에는 물이 넉넉해 콸콸 쏟아져
흐르고 계곡 옆으로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며 쏟아져 계곡 속으로 들어간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짙은 안개까지 드리워져 있어 마치
구름 속을 달리는 기분이다.
운전하기에는 불편했지만 경치는 한마디로
천하절경이다.
현주는 경치에 취해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 있다.
무주에서 가창으로 연결되는 국도 37호선 정상인
신풍령(神風嶺)은 해발 천미터가 넘어선다.
신풍령 정상을 넘어서면 이제 경상도 땅이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을 바라보니 안개 바다를 이루고
있다.
이런 경치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너무 너무 좋아요?. 선생님 차 타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미스 박 실망시키지 않아 다행이군"
신풍령 정상에서 경상도 쪽으로 내려서면서 신풍령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주변은 모두가 약수터고 휴게소에 약수를 바로
마실 수 있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현주가 플라스틱 바가지에 약수를 떠서 건너준다.
"미스 박 먼저 마셔요"
"선생님 먼저 드세요"
"아니야. 난 미스 박 다음에 마실 거야"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미스 박 입댄 자리에 내가 입 대고 마시려고!"
그게 간접 키스라는 건 현주가 모를 리가 없다.
반응을 보자는 목적이다.
"역시 여행기 그대로군요"
현주가 웃으면서 먼저 마신다.
"마시고 남은 물 버리지 말고 나 주어야해"
"안돼요!"
화난 표정은 아니다.
현주에게 빈 바가지를 받아 약수를 떠 마셔보니 속이
후련하다.
차는 또 다시 출발했다.
휴게소를 지나면서도 경치는 여전히 일품이다.
신풍령 휴게소를 출발해 산천 경치를 즐기며 40분쯤
가면 영성이란 마을이 나오면서 길이 갈라진다.
우회전을 하면 거창 읍이고 좌회전을 하면 함양이다.
함양에서 국도 24호선을 타고 남서(南西) 방향을 따르면
남원을 거쳐 지리산을 넘을 수 있고 국도 3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면 산청(山淸) 진주( 晋州)를 거쳐 남해
고속도로 진주 IC와 연결된다.
4-3. 자기가 그러자고 해서 난 몰라!
서울을 출발한 시간과 계산해 금산 무주를 지나면서
온갖 경치를 카메라에 담고 아가씨하고 노닥거리면
왔는데도 여들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국토가 좁은 건지 도로망이 잘되어 있는 덕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좋은 경치와 멋과 맛을 두고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 한사코 고속도로만 고집하니 참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영성 삼거리 시골 슈퍼 앞에 차를 세우고 캔 커피를
마시며
"여기서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거창까지 가신다고 하셨잖어요?"
"거창서 자기에는 너무 빨리 와 버렸어!"
"선생님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일단 함양으로 들어가 남원으로 거쳐 지리산을 넘어
볼까 하는 생각인데...지리산에 들어서기 전에 어디서
자야 할 것 같애. 미스 박은 어떡 할거요"
"지리산을 넘으면 어디예요?"
"구례로 들어서게 되요."
"거기서 서울로 가시는 건가요?"
"아니오. 구례서 섬진강을 끼고 장터로 유명한
화개(花開)를 지나 하동(河東)으로 해서 남해(南海)섬
끝까지 들어 갈 작정이요"
"며칠 걸리겠군요?"
"아니...3일 후에는 서울에 도착해야 돼요. 어때요.
미스 박도 다른 특정한 목적지가 없으면 나하고 같이 가
볼래요?"
"방해되지 않을까요?"
여자란 묘한 동물이다. 방해는 고사하고 은근히
유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해가 안될까요 하고
헛소리를 하니 말이다.
현주가 약간 망설이는 척한다.
그럴 때는 이쪽이 약간 적극적으로 권유해 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다.
여자는 어떤 결정을 할 때 반드시 명분을 찾기
때문이다.
자기도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서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자기가 그러자고 해서 그랬으니 난 몰라 하는
책임 전가를 할 명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버스도 언제 올지 모르고 거창 가 봐야 별것
없다구...웬만하면 나하고 같이 가요"
"어떡하지....?"
노도 아니고 예스도 아닌 상태에서 망설이는 척한다.
여자가 다음 액션에 대해 남자가 적극적으로
권유(강압도 상관없다)해 주기를 바랄 때 하는 말은
언제나 어떡하지라는 단어다.
이 때 적극적으로 권해야 한다.
"나하고 같이 가는 데는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먹고 마시는 건 내가 맡겠지만 ...미스 박이 자는 방
숙박료는 내가 못 낸다는 것.......그건 현주씨
몫이라구."
"어머....!호호호"
"남자 혼자 자면서 따로 자는 여자 방 값까지 내는
남자..너무 불쌍하다는 생각 해지 않았어요?"
현주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며 웃는다. 이쯤 되면
일은 끝났다.
"자. 타고 부지런히 가 봅시다"
자동차는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남원 쪽으로 향하는 국도
24호 위를 달렸다.
한동안 뜸하던 비가 함양 읍을 지나면서 다시 내리기
시작하더니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선인 함양군
서상면을 지날 때부터는 장대비로 변한다.
전조등을 켰는데도 앞이 안 보인다.
영성 삼거리를 출발하면서 잡은 스케줄은 남원 시내로
들어가 1박하고 남원서 다시 북상해 인월(南原市引月面)로
와 산내면(南原市山內面)쪽 지리산 입구로 들어가 지리산
횡단 도로를 넘어 구례. 하동으로 가는 코스였다.
그러나 인월이 가까워지면서 코스 수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도 24호선을 타고 온 차가 계속 남쪽으로 가면
남원시로 들어서고 지리산 국립공원이라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을 하게 되면 남원군 산내면을 지나 달궁으로
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장대같이 내리는 빗길을 뚫고 남원까지 가기보다는
언젠가 지나면서 보아 둔 달궁 부근에 있는 모텔에서
1박하고 바로 지리산을 넘는 쪽이 편하다는 결론이 났다.
"남원 시내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지리산 모텔에서 자고
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모텔이라는 말에 현주가 곁눈질을 한다.
현주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지리산 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현주가 말이 없다.
노고단 파크라는 이름의 모텔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밤
8시가 가까워 있었다.
1층에 있는 식당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먼저 온 사람이
세 쌍이나 있다.
모두가 폭우를 피해 들어 온 사람들인 모양이지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쌍쌍이다.
그 쌍들 모두가 아이 하나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어떤 커플들인지 대개는 짐작이 간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장대비 소리를 들으며 모텔
식당에 앉아 산채와 토종닭 찜을 안주로 지리산 (정확히는
함양) 명물이라는 국화주를 마시는 맛은 또 하나의
별미다.
기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5백년
전통(천년이라는 설도 있다)을 지녔다는 지리산 명주
국화주는 참으로 고약한 술이다.
알코올 성분이 16도 정도니 시중에서 파는 청주와
비슷하지만 술맛이 어찌나 단지 입에 거부감이 없어
여자에게 먹이기는 참으로 제격인 술이다.
첫 병도 다 마시기 전인데도 식당 주인은 자기들이 자야
할 시간이니 방으로 올라가 마시라고 권한다.
참으로 괜찮은 주문이다.
4-4. "원한다면 몸도 줄 수 있어요"
국화주를 한 병을 더 사 들고 모텔과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온돌하고 침대가 있는데 어떤 방으로 드릴까요?"
당연히 같은 방을 사용할 것이라는 걸 전제한 모텔
주인의 물음이다.
"방 여분 있지요?"
"휴가 철이 지나 방은 여유가 많습니다만...."
모텔 여주인이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말이다
"그럼 우선 아무 방이나 깨끗한 걸로 하나 주어요. 한
잔하고 잘 때는 방이 하나 더 필요할 테니까 준비해
주시고요"
잘 때는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말에 주인이 의외라는
눈을 하고 노골적으로 힐끔 쳐다본다.
이럴 때 중요한 건 주인의 눈이 아니라 동행한 아가씨가
안심(?)시키는 일이다.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사전 예고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나는 다른 방으로 가 잘 것이다 라는 뜻을
전하는 의사표시다.
방이 하나 더 필요하다는 말에 현주는 안심(?)을 했는지
자연스럽게 주인이 안내하는 방으로 함께 들어선다.
모텔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기 않게 방은 침대와 작은
테이블 하나에 의자가 넷 밖에 없는 대도 꽉 찰 만큼
좁다. 들고 온 술과 안주를 상에 놓고 마주 앉았다.
창 밖으로는 여전히 후드득거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여자와 앉아 술을 마시기에는 더 없이 좋은 무드다.
"현주씨는 집이 어디지.?"
"현주씨...?. 호 호 호"
"왜?"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씨하고 부르는 일 별
없거든요!"
"그럼 뭐라고 하지...?"
"자연스럽게...그냥 현주하고 부르세요"
"그래. 현주는 집이 서울인가?"
"지금 사는 곳은 성남이예요?"
"혼자 여행하는 취미가 있나 보군"
"학교 때는 가끔 혼자 다니는 일이 있었지만 졸업하고는
처음이예요"
"그럼 학교 졸업했다는 얘긴가?"
"제가 학생처럼 보이세요?"
"글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그럼 직장 다니나?!"
"직장....! 네.. 그런 셈이 예요"
"그런 셈이라니...?"
"네 직장 생활해요"
대답은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그럼 회사 친구들도 많을 텐데 현주가 다니는 직장
총각들은 모두가 수도승 같은 사람들인가? 휴가 때 동료
아가씨들 두고 자기들만 다녀오게"
"호 호. 같이 여행할 사람 찾으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남하고 같이 여행한다는 건 번거롭잖아요. 여행이란
홀가분해야 맛인데 서로 구속당하고 눈치보고 서로
양보해야 하고 선생님도 그래서 혼자 다니시는 것
같은데요"
잡지에 본 얘기다.
"그래!, 그런 점에서 우리는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군. 자. 마시자구"
"선생님...나 마음먹고 마시면 술 많이 마셔요"
그렇게 말해 놓고 현주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본다.
술에 강하니 술 먹여 엉뚱한 짓거리 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다. 맹랑한 친구다.
그러나 그 정도 못 받아넘길 나도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 아주머니 잠들기 전에 술 몇 병 더 달래
놓아야겠군"
술로 계속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다.
현주의 얼굴에 약간 당황하는 듯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역시 보통 똑똑한 아이는 아니다.
"이 술은 너무 단 것 같네요.....? "
"그럼 뭐가 좋을까? 맥주나 양주? 아니면 소주?"
"소주도 좋지만 어쩐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맥주로 하면 선생님께 너무 부담 드리는 것 아닐까요..?"
"매력적인 아가씨에게 맥주 몇 병 산 게 아깝거나
부담스러워 할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라구.?"
"난 매력하고 상관없는데요?"
"아니. 오랜만에 만난 매력적인 아가씨야"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듣기 싫지는 않네요"
"정말이야. 내가 현주에게 어느 정도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 증거를 보여 줄까?"
"증거요?"
"현주가 원한다면 몸도 줄 수 있어요!"
"어마!"
너무나 직설적인 말에 현주도 놀란 모양이다.
야한 얘기는 너무 오래 하면 역효과를 불러온다.
이쯤에서 화재를 돌려야 한다.
전술에서 말하는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러세요?"
"뭘..?"
"여자에게 후한 것 말예요"
"아니...젊고 매력적인 여자에게만 그래!"
"잡지 여행기 보니 그 말 여자만 만나면 하시는 소리
같던데요?"
"남의 말을 의심하는 건 죄가 돼요!"
"여자만 보면 거짓말하는 것도 죄가 되지 않을까요?"
말을 받아넘기는 품이 보통이 아니다.
"그럼 우리 맥주 거품으로 죄를 씻을까?"
교환 전화로 맥주 열병을 시켰다.
"그걸 누가 다 마셔요?"
"현주는 술이 세다면서?"
"하지만!"
현주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4-5. "그럼 빼앗는 형이신 가요?"
"걱정 말어!. 난 여자에게 술 강요하는 남자는 아니야!"
현주의 경계심을 풀자는 작전이다. 그러나 현주는
"남자들은 말은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예요?"
"그건 현주 말이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어떤 목적을
자기고 여자에게 술을 권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 왜
그러는지 알어?"
"그만큼 자신 만만하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아니야!"
"그럼요?"
"술로 여자를 유혹하지 마라. 성공해도 맛이 간 상태다!
이제 내 철학이야!"
"정말 못 당하겠어요"
"그러니 안심해. 현주가 못 마시면 내가 마실 테니까!"
"선생님은 술 많이 드시는 나 봐요"
"자랑은 아니지만 세상에 태어나 나 보다 술 더 많이
마시는 사람 아직 못 만나 봤다구."
"선생님. 지금 벼락치고 있어요"
"벼락을 처도 무서울 것 없어. 지금 한 얘기 거짓말도
아니고 또 벼락 맞을 만큼 불순한 생각도 하고 있지
않으니까"
"어머? 전 그냥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예요!"
"그렇다면 도둑놈이 제 발에 저렸나?"
"뭔가를 훔칠 생각이라고 하고 계셨다는 얘기같이
들리네요"
갈수록 태산이다.
"아니! 난 어떤 경우에도 남의 것을 훔치지는 않아"
"그럼 빼앗는 형이신 가요?"
그래 놓고 또 다시 똑 바로 바라본다.
"강제로 빼앗는 건 강도나 할 짓이지! 나는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스스로 주도록 만드는 편이야."
"그런 사람이 더 악질이라던 데요?"
그때 여관 주인이 맥주 열병을 올린 큰 쟁반을 들고
들어 와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묻는다.
"방 하나 더 필요하시면 지금 말씀하시죠. 우리도 자야
할 시간이라"
"아!. 방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렇게 밤을 세우며 앉아
술 마실 테니까요"
거침없이 내 쏟는 말에 두 여인의 눈동자가 동시에
이쪽으로 향한다.
주인 아주머니의 눈은 이상한 인간도 다 있다는 빛이고
현주의 눈은 약간 낭패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여관 아주머니가 힐금 쳐다보며 나간다.
"자. 우리 이 밤을 위해 건배부터 하지! 폭우 내리는
지리산 밤을 위해서!"
"네. 선생님같이 좋은 분 만난 행운을 위해 들겠어요!"
"행운일지 불행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우선 말이라도
고맙군. 그런데 아까는 악질이라고 했잖아"
"그건 특정 상황에서 얘기가 아니라 일반론이예요."
국화주 두 병에 맥주를 여러 병 마셨는데 현주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말하는 걸로는 뭔가 쉽게 풀릴 것 같으면서도 상대에게
도무지 틈을 주지 않는 여자다.
젊은 여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무엇 하는
직장에 다니는지 물어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상황이니 일반론이나 하는 색 다른 말들을 많이
나오는 게 더 더욱 궁금하다.
"현주 다니는 직장이 무엇 하는 곳이지?"
"솔직히 말씀 드리면 별로 알려 드리고 싶지 않아요"
말해 놓고 어색하게 웃는다.
"아! 그래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난 뭐 건 강요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다른 뜻은 없고 제 직업 아시고 나면 실망하실 것
같아요!"
현주가 눈치를 본다. 다시 한 번 더 물으면 말하겠다는
표정으로!.
"실망하다니?. 나 직장 가지고 사람 값어치 다루는 그런
경박한 사람은 아니야"
"선생님 지금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아? 그러고 보니 직업 어쩌고 한 것 같군. 그리고 또
조금 전에는 직장 다니는 셈이라고 표현을 한 것 같은
기억이 나는군. 직업이라.....!?"
여자가 직업 어쩌고 하면 서비스업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박현주라는 여자는 아무래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자 같지는 않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런 여성치고는 몸 꾸밈새가 덜
세련되어있고 거기다 지성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긴다.
대체 현주가 말하는 자기 직업이란 게 뭘까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적당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생각하면 할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신비한 여자라는
기분이 든다.
현주의 입에서는 깜짝 놀랄 소리가 나온다.
"선생님. 나 군인이예요"
"뭐? 군인?"
상상도 못하던 말에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역시 실망하셨죠?"
"그럼 여군이란 얘긴가?"
"네. 임관한지 3년 됐어요.!"
임관. 그렇다면 사관이란 얘기다.
그랬다. 박현주. 그녀는 대한민국 육군 중위였다.
"역시 실망하셨군요. 아무 말씀 없으신 걸 보니."
"내가 왜 실망 할거라는 생각을 하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군인이 된 여자에게는 이상한
편견 같은 게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한 현주는 맥주 한 컵을 단숨에 마신다. 그런
다음
"선생님. 나 담배 한대 피면 버릇없다고 야단치실
거죠?"
현주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4-6. 전기를 끄고 침대에 눕혔다.
"나 그런 옹졸한 사람 아니라고 했지?. 담배를 피우면
아까부터 피지 그랬어!"
담배를 건네 주었다.
"내가 불 부쳐 줄게"
"아니예요!"
"남자와 같이 앉아 여자 스스로가 자기 담배에 불을
붙치는 게 아니예요. 또 여자 스스로 담배 불을 붙치도록
두는 것도 남자의 예의가 아니고!"
라이터를 켜 내밀며.
"어서!"
"선생님에게는 당할 수가 없군요"
현주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담배 문 입을 내민다.
"선생님!"
"얘기해요"
"선생님은 정말 이상한 분이예요"
"이상한 ..사람이라니?."
"왜. 처음 만난 분인데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
같은 느낌 주고 마음이 편하게 해 주는 그런 분 말예요"
"격식은 거북하고 서로 불편한 것 아니겠어?. 그래서 난
언제나 서로가 편하자는 주의야"
"사복 입고 만난 남자에게 스스로 군인이라는 신분을
밝힌 건 선생님이 처음이예요."
"현주가 나를 남자로 생각해 주니 기분 좋은데?"
"여자는 아니잖아요"
"현주의 뜻에 따라 우리는 지금부터 남자와 여자 사이가
되는 겁니다!"
"선생님은 사람 난처하게 만들어 놓는 걸 즐기는 취미가
있으신가 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에 난처하다는 구석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박 중위."
"어마 박 중위가 뭐예요. 갑자기...."
"우리 건배합시다"
"갑자기 건배는 또 왜요?"
"나 참으로 솔직히 말해 많은 여자를 만나고 겪어
봤지만 장교 아가씨와 밤을 같이 해 보기는 처음이 거든.
이런 행운에 건배를 안 하면 진짜 벼락 맞을 일
아니겠어.."
"호 호 호. 선생님하고만 있으면 화 낼 일도 슬플 일도
없겠어요. 고마워요 선생님! 우리 건배해요"
그러고 보니 현주란 아가씨는 어딘가 기품 같은 게
풍기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 요령과 절도가 엿보인다
싶다.
이런 똑똑한 아가씨들이 군에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군대도 제법 세련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맥주 빈 병이 여섯 개가 되면서 서로 약간 취기가 돌기
시작한다.
"내가 현주 곁으로 가 앉으면 안될까?"
현주가 말이 없다.
"아니면 현주가 내 곁으로 올래?"
여전히 말이 없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현주가 보고만 있다. 현주 옆으로 가 나란히 앉는다.
"선생님 나 무술 해요"
"현주 허락없이 얻어맞을 짓을 하지 않을 거야"
현주가 웃기만 한다.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신다.
맥주가 또 두 병이 비어졌을 때 팔을 현주 어깨에
올렸다.
무술을 사용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 정도는 허락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많이 드시고 내일 운전하실 수 있으세요?"
현주가 엉뚱한 질문을 한다. 때맞추어 해 준 질문이다.
"술보다는 잠이 문제야"
"그럼 주무세요"
"주인이 잠자리에 들었으니 방을 얻을 수 없잖아"
"난 여기 앉아 눈만 붙이면 돼요. 군인이라 그런 일에
익숙해 있어요"
"숙녀를 의자에 앉혀 놓고 혼자 침대에서 편하게 자는
건 남자의 도리가 아니야"
"하지만 내일 운전하시려면 주무셔야 하잖아요?"
"같이 자자!"
현주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옷 입은 채로!"
어서 말을 돌린다. 이것도 치고 빠지기 작전이다.
현주가 한동안 말이 없다.
현주 어깨에 올려진 팔에 힘을 약간 주었다.
현주 몸이 실려왔다.
"현주도 피곤하지! 침대로 가자!"
"옷 입은 그대로예요!"
현주가 다짐한다.
"말했지?. 난 여자가 싫다는 일 하지 않는다고!"
현주를 일으켰다. 현주가 따라 일어난다.
전기를 끄고 현주를 침대에 눕혔다.
아무런 저항없이 가만히 눕는다.
침대에 누우면서 팔을 현주의 머리 밑으로 뻗어 팔
베개를 해 주었다.
현주가 아무런 저항없이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른다.
현주가 내 팔을 베면서 두 사람의 몸이 자연스럽게
밀착되었다.
옷을 입었다고 하지만 방에 들어서면서 이미 점퍼들은
벗어 티셔츠뿐이다.
면 티셔츠를 통해 현주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 온다.
현주의 체온이 나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내 체온도
현주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서울을 떠날 때만해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건
상상조차 못했어요"
현주가 허공을 바라본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4-7. 바지가 몸을 떠나면서 현주의
"그게 인생살이라는 거야."
"인생살이?"
현주가 또 한번 중얼거린다.
"인간이란 말이야. 제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에
태어나지만 살다보면 서로 만나게 되고 만나서는 서로가
이해를 하면서 도우고 살아가게 마련이야"
"선생님처럼 생각하면서 살면 세상도 참 편할 것
같아요"
"어렵게 생각하면서 살 이유는 없어"
"남자와 여자는 다르잖겠어요?"
"다를 게 뭐가 있어.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은
아니야"
"알고 있어요"
다른 한 손으로 현주의 어깨를 잡아 내 쪽으로 끌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자세로 누웠다.
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밤의 어둠 속이다. 서로의
얼굴도 표정도 볼 수 없었지만 상대의 숨결이 닿을 만치
거리가 바짝 좁혀져 있었다.
여자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향기 속에 땀 냄새가 섞여
있다. 두 사람 모두 방에 들어와 씻지 않았다.
약간 땀 냄새가 섞인 체취에서 젊고 건강한 여자의
향기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남자의 피를 솟구치게 하는 만드는 향기다.
손이 저절로 티셔츠 가슴 위로 간다.
"선생님 약속 위반예요"
현주가 중얼거린다. 중얼거릴 뿐 항의나 항거는 하지
않는다.
"약속위반 아니야."
가슴 위에 올려진 손에 힘을 주면서 말한다.
"약속위반이요"
"우리는 아직 옷을 입은 그대로야"
현주가 말이 없다.
가슴 위에 올려진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현주의
탄력이 손으로 전해 온다.
"선생님 그러지 마세요"
현주의 음성 색깔이 조금전과는 달라져 있다. 말없이
계속 손만 움직인다.
현주의 숨결이 조금씩 흐트러져 간다.
"현주!"
대답이 없다.
분명히 잠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대답이 없다.
"현주!"
두 번째도 대답이 없다.
"나 약속위반하고 싶어진다!"
여전히 말이 없다.
"하지만 약속은 지킬게!. 여자와 한 약속만은 반드시
지킨다는 게 내 철학이야!"
"선생님!"
현주가 파고들며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부른다.
"얘기해"
"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예요"
"그렇지만도 않아!"
"아니예요!. 좋은 분이예요."
"현주!"
"네?"
"나도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옷을 벗기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망을 일을 키는 평균적 보통 남자야. 다만
다른 남자와 방법이 다를 뿐이야"
"선생님은 여자가 그런 남자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난 위선자지! 하지만 현주에게만은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아"
"왜지요?"
"경멸받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여자니까!"
"놀리시는 것 싫어요"
현주의 목소리에서 싫다는 빛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손이 올려져 있는 가슴 위에 티 셔츠에
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9월이지만 아직도 더위는 남아 있고 거기다 좁은 방에서
마주 안고 있는 두 사람 몸에서 나온 열기로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는 증거다.
세 찬 비바람으로 창문을 열 수가 없다.
"현주. 덥지?"
현주가 말이 없다.
가슴 위에 있던 손을 내려 현주의 청바지 앞으로 가져
갔다.
현주의 몸에서 가벼운 긴장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말없이 청바지 지퍼 고리를 잡아 아래로 내린다.
현주의 몸에서 꿈틀하는 반응이 일어나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긴다.
현주는 여전히 죽은 듯이 가만있다.
바지가 안전히 몸을 떠나면서 현주의 아랫 도리에는
작은 천만 남았다. 현주는 여전히 죽은 듯이 가만있다.
"현주"
잠들지 않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
"너무 늦었다. 자자!"
현주를 꽉 끼어 앉으면서 말했다.
현주가 말없이 파고들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잠이 들고 말았다
새벽 산새들의 요란한 지저귐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현주는 어제 밤잠에 들 때의 복장 그대로 끼어 안긴 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작은 섬유로 허벅지 맨 안쪽만 살짝 가린 채 완전히
드러나 있는 현주의 하반신과 미끈한 두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 남은 섬유를 벗기고 싶어지는 욕망이 솟구친다.
4-8. 팬티 속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팔을 엉덩이로 뻗어 팬티 속으로 가만히 손을
들이밀었다.
젊은 탄력이 손으로 전해 온다.
손바닥으로 두 개의 잘 발달된 두 개의 언덕을 천천히
쓸었다.
"응!"
현주의 입에서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온다.
잠에서 깨어나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깨어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자신의 몸에서 움직이고 있는
남자의 손을 의식한 것만은 틀림없다.
나쁜 짓 하던 아이가 어른에게 들켰을 때처럼 손을
엉덩이 위에 올린 채 꼼짝 할 수가 없다.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현주의 몸에서 긴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손으로
전해 온다.
현주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는 증거다.
비는 멎어 있었다. 비가 멎은 아침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방은 훤히 밝아 있다.
훤히 밝은 곳에서 여자를 벗긴다는 건 너무나 예의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아쉬움이
남는다.
손을 빼 티셔츠 속으로 넣는다.
현주의 탄력 있는 가슴 언덕이 거기 있었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자동장치가 부착된 기계처럼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각으로 전해 오는 현주의 꼭지는 젖무덤 살 속에 반쯤
파고들어 얼굴만 빠끔히 내밀고 있다.
이런 형은 숫처녀에 많다.
현주는 나이로 보아 숫처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적인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다.
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어 굴리듯이 가볍게 만진다.
그때부터 현주의 숨결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선생님. 그러지 마세요!"
현주가 눈을 감은 채 속삭인다.
"이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치 현주는 매력적이야!"
"하지만!"
"이 이상 넘어서지 않을게. 나 약속을 지키는 남자라는
것 알지."
"알아요."
"그럼 그냥 만지게만 해 주어!"
"하지만!"
"또 뭐가 있어!"
"이상해지려고 그래요!"
현주가 빨갛게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모기 만한 소리로
속삭인다.
"현주가 좋다면!"
그 말뜻을 현주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지금은 싫어요!"
현주가 가슴에 얼굴을 파 묻으며 속삭인다. 지금은
안되지만 나중에는 좋다는 뜻이다.
현주가 일단 승낙한 이상 서둘 이유는 없다.
"그래. 현주 결심 설 때까지 기다릴 게"
가슴에서 손을 빼 현주를 안았다.
"선생님!"
"응!"
"실망하실 거예요!"
"실망?"
"두렵고요!"
"소녀처럼 두렵긴!"
현주 정도의 나이면 당연히 남자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 말이다.
"선생님이 실망하실 까 봐 두려워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지금 몇 시예요?"
"팔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둔 시계를 집었다"
"일곱 시 조금 지났어"
"더 주무셔야겠네요?"
"난 한번 깨어나면 다시 밤이 들지 않는 버릇이 있어"
"그럼 우리 출발해요"
현주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눈을 감은 그대로 차안에 안아다 놓을까?"
"선생님! 나 무거워요"
현주가 눈을 뜨고 생그리 웃는다. 웃는 얼굴이 소녀처럼
청순하다.
"현주."
"네?"
"현주를 밝은 곳에서 보고 싶어진다!"
현주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안돼요!"
소리는 났았지만 완강히 거부하는 목소리다.
"현주가 싫다면 도리 없지만!"
"죄송해요!"
"현주가 왜 죄송해?. 무리한 소리한 내가 잘못이지!"
"죄송해요!"
현주 또 한 번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내가 먼저 할까? 아니면 현주가 먼저 할래?"
"선생님 먼저 하세요"
"그럼 나 먼저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우리는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했다.
비가 멎은 지리산이 안개에 쌓여 있는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다.
간밤에 그렇게 쏟아진 비로 지리산 골짝마다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려간다.
물소리가 온갖 산새들이 소리와 어우러져 대자연의
합창처럼 울러 퍼진다.
지리산을 수없이 넘었지만 이런 장관을 만나는 건
처음이다.
4-9.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지리산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멋있을 줄은
몰랐네요"
현주의 입에서도 감탄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지리산 경치가 언제나 이런 건 아니야. 큰비가 내린
다음이라 특별히 아름답고 멋있는 거라구. 나도 이런
지리산을 본 건 처음이니까"
"큰 행운이네요. 역시 무주에서 선생님 따라 나서길 잘
했다는 걸 날씨가 확인시켜 주려나 봐요"
"현주가 행운의 여신인 것 같애"
"자기 고집만 부렸는데도요?"
"현주 같은 젊고 똑똑하고 매력적인 아가씨라면 내가
참아야지!"
"선생님!"
"응!"
"내가 오래 오래 귀찮게 하면 어떡하시려고 그래요?"
"그건 내가 바라는 바야"
"나 정말 오래 오래 선생님 귀찮게 할지 몰라요"
"제발 좀 그래 주어"
"그 말씀 책임 지셔야해요"
"그럼!"
"기억해 둘게요"
다짐하듯 말한 현주가 창 밖을 바라보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른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
였어"
노사연의 만남이다.
반주없이 흥얼거리는 노래지만 수준 급이다.
노래를 부르는 현주의 모습은 티없는 소녀만 같다.
하룻밤 사이에 군인 티가 사라지고 어린애같이 변하니
여자란 참으로 신비한 동물이다.
이래서 옛사람들은 여자를 불러 여우라고 했던 걸까?
지리산 노고단이 가까워지면서 발 아래로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지리산을 넘을 때는 장마철이 제일이라고 한 어느 후배
등산쟁이 말을 새삼 공감하게 만든다.
노고단이 가까워지면서 차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별을
못할 회색 커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낮인데도 전조등을 켜야 하고 이따금씩 경음기를 울려
마주 오는 차에 이쪽 위치를 알려야 할 만치 코앞이 안
보인다.
운전을 하는 쪽은 등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지만 옆에
앉은 현주는 그저 경치에 취해 무아경에 빠진 채 계속
같은 노래만 흥얼거리고 앉았다.
심술 같은 장난 끼가 동한다.
"군인은 겁을 모르는 모양이지...?"
"겁이라니요.?"
"이 길옆은 천 미터 낭떠러지예요"
"거짓말이시죠?"
"여기는 지리산 정상이고 지리산 표고쯤을 알고 있을
텐데..."
"아! 정말 그렇네요"
"듣고 나니 무서워지는 모양이지?"
"선생님 운전 솜씨 믿어야죠."
현주는 태평스럽게 노래만 계속 흥얼거린다.
노고단 휴게소는 안개비에 쌓여 있었다.
노고단에서는 내리막길이다.
이런 기상 조건에서는 오를 때보다 내려 갈 때가 더
위험하다.
그런데도 천방지축 같은 녀석들이 있어 그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서도 추월을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일생에 한번 만나면 그것도 행운이다 싶은 절경을
만났으면 경치를 만끽하면서 천천히 갈 일이지 뭐가
그리도 급해 저 야단들인지 딱한 생각이 든다.
여행이 뭔지 모르고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서기만 하면
여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여행이란 오가는 길을 즐기는 것이지 어느 목적지를
정해 놓고 미친 것처럼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언제쯤이면 우리도 여유롭고 올 바른 여행 문화가
정착될지!?
지리산 관통 도로를 내려서면 구례읍(求禮邑)이다. 구례
읍내에는 맛있는 점심을 먹여 주는 동원식당이 있다.
동원식당은 구례읍에서도 상당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집이다.
골목 안에 있어 찾는 게 조금은 번거롭지만 음식 맛
하나만은 과연 이 지역에서 최고다.
맛을 즐기고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물어
찾아가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지리산에서 나오는 각종 산나물도 정성껏 상에
올려놓았고 시장에서 사 온 것이 아닌 이 집에서 직접
담근 조선 된장으로 끓이는 된장국 맛이나 된장 찌개도
구수하지만 동원식당 별미는 뭐라고 해도 되지 고기
구이다.
간장과 고추장을 적당히 혼합한 양념장으로 구운 이 집
돼지고기 구이는 찬으로도 좋고 간단한 반주 안주로도
좋다.
동원식당 정식을 맛보자면 우선 구례 읍내 시가지로
들어가야 한다.
시가지에 하나 밖에 없는 로터리를 찾자 들어 거기서
구례 전화국이 어디냐 물어야 한다.
시외버스 터미널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전화국이
있고 전화국에서 바라보면 한옥에 동원식당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 부근은 주차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것이 흠이지만
전화국 앞 주차장에 잠시 세우거나 골목길에 잠시 세워도
인삼이 좋아 나무라지 않는다. 이 지역을 지나는 길이
있으면 한번 들려 보라 권하고 싶다.
동원식당에서 늦은 아침겸 점심을 먹고 또 길을 나섰다.
구례읍 우회도로 갈림길에서 국도17호를 타면 구례역
앞에서 북으로는 남원 가는 길이고 남으로는 순천으로
가게 된다.
읍내 갈림길에서 국도 19호선을 타고 동쪽으로 달리면
하동군 화개면을 지나 하동읍으로 들어가 남해 고속도로와
만나게 된다.
4-10. "여기서? 싫어요! 부끄러워요"
두 길 모두 경치가 좋지만 우리는 국도 19호선을
택하기로 했다.
국도 19호선은 섬진강을 끼고 달린다.
이 일대는 엄청나게 넓은 평야지대다.
참으로 풍요롭게 느껴진다..
더없이 넓은 들을 끼고 달리다 보니 저 만치에 검문소가
보인다.
피아골 입구 검문소다.
검문을 하던 전경 녀석이 차안을 들여다본다.
아버지와 딸 사이는 아닌 것 같은 남녀가 타고 있는 게
약간 심사가 틀어졌는지 현주에게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한다.
현주가 신분증을 내민다. 장교 신분증을 본 젊은 전경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현주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왜? 뭐가 잘못됐어요?"
"아!. 아닙니다. 안녕히 가십시요"
그럴 때의 현주는 영락없는 군인이다. 여자는 역시 변화
무상한 것인가 보다.
검문소에서 좌회전을 해 지리산으로 들어서면 피아골로
갈 수 있다.
우리는 피아골로 들어갔다.
피아골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손을 잡고 계곡을 따라
걷는다.
어제 쏟아진 폭우 영향인지 계곡에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사진 찍어 줄게"
"그래요"
현주가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계곡에 선다.
사진을 찍는 사이 이런 계곡에서 현주의 누드를 찍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사진을 찍고 바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현주!"
"네?"
"조금 추울지 모르지만 옷 벗고 물 속에 들어가 봐.
멋있는 사진 찍어 줄게"
현주는 처음 그 말 듯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한 순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여기서 벗어요? 부끄럽게! 싫어요!"
드디어 누드 사진을 찍자는 뜻을 알아들었다.
"새삼 뭐가 부끄러워?."
"그래도 싫어요!"
"군인이 무슨 부끄러움이 그렇게도 많아!"
"돌아 올 때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싫어요"
"이상한 친구구나!"
"우리 이제 내려가요"
더 있다가는 정말 벗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
내려가자고 한다.
다시 검문소 삼거리고 나오 좌회전을 한다.
검문소에서 10여 킬로쯤 가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섬진강이 우회전으로 해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왼쪽에
제법 큰 마을이 나선다.
10리 벚꽃 터널로 유명한 화개사(花開寺)가 있고
화개장터로 너무나 잘 알려진 하동군 화개면이다.
화개장은 한때 조선 10대 장의 하나로 손꼽혔을 만치
번창하던 시절이 있었다.
김동리 선생의 역마(驛馬)란 소설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 바로 화개장이다.
화개 장터에서 지리산을 바라보고 왼쪽 길을 택하면
구례 곡성 남원으로 가게 되고 화개사 절 입구를 따라
오른편 길을 택해 계속가면 산청군 마천면(山淸群
馬川面)을 지나 뱀사골로 거쳐 남원군 산내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지리산 관통도로 달궁쪽 입구가 있는 바로 그
산내면이다.
"여기서 마천면으로 해 뱀사골을 지나면 어제 우리가
잤던 그 마을 입구 쪽이군요"
"60리라니까 이십 사 오 키로 정도겠지"
"그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하루 종일 돌아 왔군요"
"돌아갈 때는 그 길로 가보자!"
남원군 산내면과 화개장터가 있는 하동군 화개면 까지는
산길로 60리다.
남원군 산내면 사람들은 남원 장으로 가지 않고
화개장을 생활 필수품 공급처로 삼고 살아 왔다.
산내면은 남원 명물이라 불리는 남원 목기(木器)의
본산지다.
산내면에서 만든 남원 목기를 한 짐 지고 뱀사골을 지나
화개장에 와 팔고는 소금 새우젓 등 생활 필수품을 사
간다.
하나 재미있는 건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實相寺)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호남 사투리가 아닌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사실이다.
생활 근거지와 교역 근거지가 경상도다. 그래서 자연
그쪽 말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실상사 입구 마을에 사는 토박이들은 억양도
사투리도 경상도다.
구례 넓은 들에서 생산되는 곡식도 모두 배에 실려
화개나 하동 장터에서 거래된다.
이쪽에서 나오는 곡식은 다시 바다 배에 옮겨 남해안을
돌아 한양으로 실려 갔다.
하동 화개장은 전라도 사람에게도 경상도 사람들에게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물 교환 장소 구실을 한 것이다.
남해 고속도로가 생기고 호남 고속도로가 뚫리고
경전선(慶全腺) 철도가 개통되면서 물길을 이용한 교역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화개장도 남해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옛 번영을
영원히 잃고 말았으니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화개 장터로 잘 알려진 화개면 소재지는 좋게 말해
아담한 마을이고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초라한
마을이다.
이 지역을 지나는 걸음이 있으면 한번쯤은 들려
볼만하다.
화개 다음은 하동읍이다.
4-11. 희열감과 함께 성적인 오르가즘까지
화개에서 하동까지 70리 길을 오는 사이 지역 얘기를
듣던 현주가.
"우리 하동에서 하루 놀면 안 될까요?"
하고 흥미를 나타낸다.
하동을 여러 번 가 봤지만 하동에서 자 본 일은 없다는
생각 든다.
기왕에 바쁜 길도 아니라면 모처럼 하동에서 하루 밤을
지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동읍은 장터를 가운데로 하고 시가지가 형성돼 있다.
또 장터가 시가지 전체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엄청나게 높다.
한 도시 기능이 장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는 배치다.
하동읍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섬진강 변을 찾아
나섰다.
옛날에는 하동 명물 하면 김이 무명했지만 광양제철이
들어서면서 바다가 오염된 다음에는 그 유명한 하동 김도
멸종이 되고 오늘에 와서는 하동 명물 하면 제칩국 정도가
고작이다.
현주는 제칩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제칩은 강물과 바다 물이 섞이는 모래 바닥에서
서식하는 껍데기가 검은 작은 조개 종류로 낙동강 하구와
섬진강 하구에서 잡히는 것을 최고로 쳤다.
낙동강 제칩은 부산 사상 공단에서 마구잡이로 쏟아 낸
공장 폐수로 멸종되고 지금은 하동지역 섬진강에서만
유일하게 잡힌다.
제칩은 속 풀이용 국으로도 좋지만 삶은 알을
초고추장에 비벼 소주나 막걸리와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섬진강을 벗어나 시내로 나왔다.
시절이 좋아 보이는 여관이 있는 골목에 차를 세워 놓고
시내로 들어 가 한바퀴 돌아본다.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본 우리들은 영상가요가 설치된
술집을 찾아 들었다.
20대 직장인들을 의식한 듯 내부 장치가 젊은이들
취향인 그 영상가요 술집은 영상가요 시설이나 조명 내부
장치들이 대도시에 비해 빠지지 않았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상당히 많았고 대개가 젊은
직장인들이 였다.
광양쪽에서 근무하는 지방 젊은이들이 아니면 광양에서
쪽에서 놀러 온 사람들인 것 같다.
영상가요 술집에 들어 왔으니 당연히 노래판에 끼어 들
수밖에 없다.
현주가 만남을 부른다. 노래 솜씨는 준 프로 급이라고
해도 좋았다.
현주가 만남을 부르는 솜씨 하나는 노사연 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로 못 하지 않았다.
추천55 비추천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