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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어느 멋진날 17부

17부


요즈음 들어 번화가에 자주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우글우글한 곳은 딱 질색인 내가 최근에 걸어만 다녀도 어깨가 부딪히기 십상인 이 거리에 종종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 이례적인 것이었다. 예림이 때문에, 유민이 때문에, 숙모 때문에..이렇게 내 주변에 있는 인물들에 의해 안하던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오늘도 그러했다. 나는 대낮부터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번화가에 나와 있었다. 여기저기 빵빵 울리는 크락션 소리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내 또래의 아이들, 그리고 수많은 커플들 사이에 나는 가만히 건물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처음엔 그냥 그렇게 서 있으려고 했다. 간간히 휴대폰의 액정을 통해 몇 시인지 확인하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서 있었다. 저마다 연인의 허리에 손을 두른 사람들 중, 나같은 사람이 또 존재할까? 하는 말도 안되는 의문을 가지면서, 다른 사람들의 얼굴표정을 살피는 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행동도 오래가지 못했다. 가만히 서있던 나를 건물뒤로 후다닥 숨게 만드는 사람들이 내 눈에 띄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이 곳에 있을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

말해봐야 입아픈 일이지만, 그들은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차에서 내려 시내에 있는 공영주차장을 빠져나온 그들은, 천천히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연신 웃고 있는 한 사람과, 그와 대조되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 사람이, 그렇게 인위적으로 딱 붙어서 걷고 있는 것이었다.

강한별의 치마는 조금더 짧아져 있었고, 구두의 굽은 반대로 조금 더 높아져 있었다. 가냘픈 허리의 곡선이 모두 다 드러나는 긴팔 티셔츠위로, 삼촌의 손이 살며시 올려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본 나는 내 원래 목적도 잊고는 반사적으로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저번보다 오늘이 훨씬 위험했다. 지금은 저번보다 더 밝았으며,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저번보다 더 가까웠다. 걸을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며, 엉덩이라인을 보여줄것만 같은 짧은 강한별의 치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제서야, 나는 그들이 언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지, 그 약속 주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뒤따르며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정도 만났고, 만남의 장소는 대담하게도 늘 이런 번화가 였다. 뭐..내가 모르는 사이에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갈 수도 있겠지만.

저번보다 그 둘의 표정을 살피기가 너무나 용이했다. 누가봐도 강한별의 얼굴은 그저 ‘업무’적인 얼굴이었고, 삼촌의 얼굴위로는 강한별이 이뻐 죽겠다는 듯한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게다가 저번과는 달리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걷는 내 귀로 그 둘이 나누는 대화가 고스란히 접수되고 있었다.

“뭐 먹으러 갈까? 아저씨가 뭐 사줘?”

“아무거나. 별로 안배고파요.”

“그냥 바로 모텔로 갈까?”

“그러셔도 되구요.저야 좋죠. 그러면 하루가 빨리 끝나니까.”

냉기가 풀풀 날리는 강한별의 대답에도, 삼촌은 조금의 자존심도 상하지 않는 듯 그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비위를 맞춰줄 뿐이었다. 피식 하고 미소가 나왔다. 그저 우스워서 웃는게 아니라, 어처구니 없음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마치 도자기 표면처럼 고왔던 숙모의 손이 식당일을 하면서 거칠어지는 것을 저 사람은 알고 있을까? 내가 그를 심판할 자격따윈 없지만, 나도 이 세상의 조화를 깨뜨리는 불순분자이지만, 적어도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의 부재에는 열불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넌 참 말도 톡톡 쏘게 하는 구나? 아저씨 만나는게 그렇게 싫어?”

“싫지만, 돈이 필요해서 만나는 거죠. 아시잖아요.”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던 삼촌에게 강한별은 그렇게 쏘아 붙이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히죽히죽 거리며 그녀를 달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비춰졌다. 숙모의 앞에서는 늘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막말을 했던 삼촌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형상이었다. 강한별을 안을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있는 듯했다.

“돈 없으면 아저씨 안만나줄거야?”

“당연하죠. 상호 거래가 성립이 안되는데..”

“음..열심히 벌어야겠네 그럼?”

빌어먹을. 열심히 저축해야 할 의미를 저딴곳에 두다니. 한심함과 답답함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제서야, 저번에 바에서 숙모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럼 숙모가 월급타면 삼촌이 다 가져다가 쓰나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내 돈에는 손 안대거든요.-

-그럼 식당에서 일하는 이유가..따로 있어요?-

-제 돈에 손을 대지 않는 대신..생활비를 주지 않으니까요. 가게에서 나온 돈은 다 어디로 가져가는지..마치 남남처럼 너는 니 돈 써라 이런 분위기에요.-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지금 욕을 하며 저 둘 사이를 파고들지 않는 것은 삼촌이 숙모의 월급을 착취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분명 저 둘 사이에 난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측은한 눈빛을 하고 나를 보았던 강한별은,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표정을 하고 걷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따윈 보이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유일한 내 주변사람인 강한별이 아예 다른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냥 모텔로 가요. 어차피 하고 싶어서 만나는 거고, 제가 돈받는건 하고 나서 받는 거니까.”

“그..그럴래 그럼?”

갑자기 방향을 휙하고 바꾼 강한별의 행동때문에, 나는 그만 기겁을 하며 옆에 있는 건물 안으로 쏙 하고 들어가 버렸다. 아무런 의견 제시도 하지 못하고 강한별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짧은 치마 밑으로 뻗은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삼촌의 뒷모습이 보였다. 오히려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삼촌이 저렇게 강한별에게 빠져있다면, 그를 끄집어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일 테니까. 강한별이 내 행동을 관찰하며 여우짓을 해왔듯이, 나도 한번쯤은 강한별을 이용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그도..한번쯤은 숙모와 같은 상실감을 느껴봐야 할테니까.

우우우웅..

“아차!”

휴대폰에서 느껴지는 진동. 급하게 그것을 주머니에서 꺼낸 나는 그제서야 오늘 시내에 나온 목적이 따로 있었음을 깨닫고야 말았다. 오늘은, 누나의 과외가 끝나고 같이 시내에서 밥을 먹기로 한 날이었던 것이다.




“어디갔다 오는거야?”

덕분에 나는 누나에게 이런저런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단아한 스커트에 보드라운 재질의 브라우스...같은 치마 차림임에도 방금 전 보았던 한별이와는 극과 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늘상 머리를 묶는 그녀가 어깨까지 머리를 늘어뜨리고는, 과일향기가 나는 향수냄새까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집 안이 아닌 밖에서 보는 그녀의 설레이는 모습을, 과외받는 녀석들이 매주 주기적으로 본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다.

“근데 갑자기 무슨일이야?”

“무슨 일은 뭐..그냥 매일 집에서 밥먹는 것보다 가끔 밖에서 먹으면 좋잖아.”

사실 밖에서 보는 것도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세상으로 부터 꽁꽁 닫혀있는 우리 집에서가 아닌,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섞여 있는 것은 은근히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절대 섞일수 없는 물과 기름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나가 되어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맞다. 나란히 걷고 있는 우리가 친남매라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은근히 예림이의 손을 잡아도, 그리고 이제는 손잡는 것쯤은 익숙해져 있는 듯한 예림이가 그 고운손에 힘을 주어 내 손에 깍지를 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냥 젊은 연인으로만 비춰질 뿐일 것이다. 사람들과 세상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적어도..우리가 친남매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나는 그러한 합리화로 하루하루를 예림이와 살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손은 잡고 있지만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을 받는 다는 점이었다. 분명 예림이의 머리속에도 그 날의 그 사건이 뇌리에 박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술의 힘을 빌렸기는 했지만, 그리고 예림이가 내 얼굴을 보지 않고 팔만 뻗어서 한 행위이긴 하지만, 그냥 별일 아닌 것으로 절대 넘길수 없는 대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먹고싶은 것이 있다며 나를 데려간 곳은 우습게도 오유민과 밥을 먹었던 바로 그 ‘일본식 분식집’이었다. 하하하. 이제는 예림이와 오유민이 헷갈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쌍둥이 처럼 닮은 것도 아닌데..역시나 생각과 상상의 힘은 무서웠다.

“사실..”

그리고 그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뽀얀 볼사이로 붉게 물들어 있는 입술을 천천히 떼며, 확실하게 나를 바라보지 못한 무거운 시선은 내 눈이 아닌 내 가슴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말하기 힘든 것인지, 눈 앞에 있는 물을 조금 마시며 뜸을 들였다.

“그 때의...일 말인데.”

아. 이번엔 그녀의 눈에 있던 내 시선이 뚝 하고 떨어졌다. 바보가 아닌이상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 지는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힘을 주어 선을 그어 버리려는 걸까?

“그냥..잊어 버리자. 사실 그 말하고 싶어서..밥먹자고 했어.”

적절한 단어를 쉴 새 없이 고른 듯, 예림이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오기 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선을 살짝 올리니, 얼굴이 붉어져 또 물을 마시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아까 손을 잡은 것은 뭘 의미하는 거지? 머리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집에서는 그런 대화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아는 모양이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 물정을 잘 모를지는 몰라도 그녀는 똑똑했다. 집이 아닌 밖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장소. 그녀는 나에게 둘 만의 공간안에서 벗어나 있음을 인식시켜 주려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했던 짓은 결코 보통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느껴보라는 일침이었다.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며,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예림이의 말은 나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 듯이 선을 지우며 나아가든지, 아니면 시치미를 뚝 떼고는 그 선의 너머로 돌아가 원래의 동생 자리를 지키든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분명 리스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 줄래?”

결국 강요를 하는 듯이 다시 한번 되묻는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불안한 듯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을 담아 나를 향했다. 그녀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나와 누나사이에 흘러간 일들은, ‘지금 부터 없었던 일’이라고 말로 규정지어 버리기엔 너무나 커다란 일들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맞다. 진짜 ‘모르는 척’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여긴 왜 왔어?”

“그냥..밥 먹었으니까 운동도 할겸..구경도 할겸.”

그녀가 가고 싶다던 곳은 시내에 있는 아웃렛 매장이었다. 내가 알기론 예전에는 꽤 장사가 되던 곳이라고 알고 있지만, 요새는 대형 백화점들에 밀려 유명무실한 곳이나 다름없었다. 간혹 가다 있는 점두행사나, 이월상품 특급세일 등등의 타이틀이 아니고는 좀처럼 장사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누나는 의식적으로 내 손을 잡고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밥을 먹을때 말을 하고 나니 이제는 손 잡는 것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가가려고 몸을 살짝 밀착하면, 그녀는 의식적으로 떨어지려 했다. 선을 그으려는 노력이 눈에 보였다.

1층이 지난 잡화 매장에서, 예림이는 모자나 향수따위의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며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 날의 일은 잊자라고 했으니 아마도 오늘 만남의 목적은 달성했을 텐데, 구태여 아이쇼핑을 빌미로 온 것을 보면 형식적인 겉치레가 틀림없었다. 곧바로 우리 둘만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때의 숨막히는 어색함을 참을 자신이 없는 탓이다.

그래도 꽤나 높은 층으로 되어 있는- 그나마 몇개의 층에는 회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지만- 건물임에도 사람은 정말 눈에 띄게 적었다. 점원들도 포기했는지 예림이가 상품에 관심을 보여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 어색함들도 싫었는지, 그녀는 챙이 원형으로 둘러져 있는 귀여운 모자를 하나 집어 들고는 자신의 머리에 써 보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

“어때? 어울려?”

생긋 웃을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가 예뻤다. 하얀 모자를 써도 명도가 낮아지지 않는 그녀의 하얀 얼굴도 예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그녀는 의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몇 개의 모자를 더 써보았다.

“근데..자주 쓰고 다니지 않을 것 같아.”

점원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그녀는 일부러 힘을 주어 말하고는 그 매장을 떠나버렸다. 이윽고 우리의 눈으로 ‘점포 정리 감사 세일’ 이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속옷 매장이었다.

예림이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멎었다. 마네킹들에 입혀져 있는 속옷들. 그리고 상품마다 50%세일 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 진 것을 보니, 어느정도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서오십시오 고객님. 저희 점포 정리 세일 중입니다. 둘러보세요.”

“이게 정말 다 반액이에요?”

“네. 저희가 점포를 빼게 되어서요. 세일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만간에 나갈 점포의 직원이 훨씬 친절했다. 예림이는 너무나 싼 가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나는 그녀의 등을 살짝 밀어 매장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그럼..좀 보고갈까?”

내 앞에서 속옷 고르는게 민망한 걸까? 아니면 민망한 척일수도 있다. 전혀 부끄럽지 않을 수준까지 되었다가, 그것을 다시 인위적으로 끌어 내리려니 어느 정도의 연기가 필요할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는 신이나서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미 그녀의 몸을 상상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나는 그녀가 속옷을 집어들때마다 상상속의 예림이의 알몸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입혀보고 있었다.

“봐봐. 내가 봐줄게.”

“어?으..응.”

이번엔 거절하지 못한 그녀가 괜시리 시선을 피하며 이것저것 속옷을 집어 들었다. 보라색, 핑크색, 연두색 등등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고, 그때마다 그녀의 시선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가슴에 대어봐야 알지.”

내 말에 예림이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내게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런 말한지 얼마나 되었다고..라며 나를 원망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속옷을 골라주는 것 정도는 친남매간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즉, ‘특별한’일이 아닌 ‘보통의’ 일인 것이다.

“난 이거 추천하는데.”

매대의 한쪽 구석에 있던 속옷을 꺼내들며 내가 입을 열었을때, 그 속옷의 모양을 본 예림이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갔다. 전체적으로 검정색의 톤이 들어가 있는 브레지어와 팬티 셋트. 하지만 문제는 그 검정색의 소재가 안쪽이 은은하게 비추는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야..야하잖아.”

“뭐 어때. 누구 보여주려고 속옷입는 것도 아닌데 뭘.”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 강한별과 자주 대화를 했더니..나는 이렇게 음흉하게 상대의 심중을 찌르는데 어느덧 익숙해져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속옷이 입혀지지 않은 니 몸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펀치를 날린 셈이었고, 그 펀치를 미처 피하지 못한 예림이는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어머..그거 예전에 세트로 5만 5천원에 판매하던 제품이에요. 이번기회 아니면 싸게 구입하시기 힘드실 건데..”

옆에서 들려오는 점원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예림이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그 속옷을 들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틀림없다. 아마도 나 처럼, 상상속에서 자신의 옷을 모두 벗긴후 저 속옷들을 입어보고 있는 것이겠지.

“그걸로 드릴까요?”

결국 점원의 독촉어린 말에 예림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점원은 예림이의 사이즈를 물어 포장되어 있는 새 제품을 꺼내어 주더니, 이윽고 그것을 쇼핑백에 담으려다가 잠시 주춤하며 말했다.

“아..고객님 이거 커플로 나온 상품이네요.”

“네?”

“두 분 커플이시죠? 이 상품이 원래 커플 속옷으로 나온거라..남성분 상품도 있는데..괜찮으시면 보여드릴까요?”

점원의 말에 예림이의 표정은 당혹스럽게 변해갔다. 커플 속옷이라..그런게 있구나. 예림이가 당황하는 사이 점원은 잽싸게 한쪽에 있는 남자속옷을 꺼내들었다. 그것과 같은 색상의 남자 트렁크 팬티였다.

“아..우리는 커플이..”

“주세요. 그거.”

뭐라고 하려던 그녀의 말을 단숨에 끊으며,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점원에게 내밀었다. 판매에 성공한 점원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 속으로 내 속옷까지 집어넣었고, 예림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쇼핑백을 들고 이번엔 내가 앞장서서 걸었다. 나를 뒤따르는 예림이의 발걸음에서 또각또각하는 구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산 속옷과 같은 색깔의 검정 구두였다.

“뭐라도 마시러 갈래?”

“으..응?”

내 제안에 예림이는 서먹하게 되물었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이 건물 10층에 꽤 괜찮은 커피숍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물었던 것이었는데, 예림이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가자. 시원한거 마시고 싶어.”

“응.”

결국 출구가 아닌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예림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태도에 대한 의문? 혹은 자신의 제안을 무시하고 있는 듯한 내 태도에 대한 원망? 아마도 둘 중에 하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오래된 건물인 것을 증명하는 듯한 오래된 엘레베이터가 스르르 열렸다. 역시나 우리외에는 아무도 타지 않았고, 이제는 층수까지 지워져 있는 엘레베이터 버튼들 사이에서 겨우겨우 10자를 찾아 눌렀다. 문이 닫혔을때엔 나와 예림이는 각각 엘레베이터의 양 구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 들이기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길을 걸어오고야 만 까닭이었다. 이제와 다시 돌아간다 해도, 이미 부모님 없는 세상에서 단 둘이 살아가야 하는 사이좋은 남매가 되기는 글러버렸다. 나를 보는 예림이의 시선, 그리고 내 마음속에 각인된 예림이의 존재감이 그 증거였다.

“어..?”

상념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들었을때, 당혹스런 표정으로 숫자판들을 응시하는 예림이의 모습이 보였다.

“왜그래?”

“이거..이상한데..”

“뭐가?”

“층수가..6에서 올라가지 않잖아.”

“뭐?”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던 나와 예림이는 동시에 문쪽으로 걸어나갔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출입문 위에 표시되는 층 수를 알리는 등은 6에서 7로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7층의 버튼을 꾹꾹 눌러보았지만, 불조차 들어오지 않았으며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왜이래..?”

그녀의 눈이 불안감으로 잔뜩 물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멈춘건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쉽게 보는 장면이지만, 내가 실제로 겪었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잠깐. 기다려봐.”

나는 버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때가 타 지워지지 않은, 평생 눌러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비상 버튼을 꾹 눌러보았다. 하지만 버튼 밑에 있는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고, 예림이의 얼굴은 더더욱 사색이 되었다.

“우리 갇힌거야? 어떡해?”

“아냐. 기다려봐. 괜찮아.”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애를 쓰며 다시금 버튼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몇번이고 꾹꾹 누르고 나서야, 스피커 너머로 둔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저기..저희 지금 엘레베이터에 있는데 이게 멈춘거 같거든요?”

-에? 멈췄다구요?-

“네. 지금 6층에 불이 들어오고 나서 전혀 변화가 없어요. 문도 안열리고.”

예림이는 간절함을 담아 나와 스피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스피커로는 몇 초간 침묵만이 흐르더니, 이윽고 귀찮은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확인 되었네요. 금방 처리해 드릴게요. 10분정도만 기다려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혹은 ‘괜찮으세요?’등의. 응당 나와야 하는 말들이 쏙 빠진 불친절한 태도에도 예림이는 너무나 감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여자니 이런 쪽에 있어서 겁이 많은 것은 오히려 당연하겠지. 나는 느긋하게 다시금 벽쪽에 기대어 섰고, 이번에 에림이는 내 반대편 벽이 아닌 내 옆에 붙어섰다.

“괜찮아. 10분이면 해결된다는 데 뭐. 무서워 하지마.”

“그래도..이거 떨어지면 어떡해?”

“바보. 그게 말이 돼?”

나는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분위기를 바꾸려는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불안감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있잖아. 누난 그런 생각 해본적 없어?”

“응? 무슨생각?”

“내가 타고 있던 엘레베이터가 만약에 추락한다면, 지면에 떨어지는 그 순간 힘껏 점프하면 다치지 않을수 있지 않나? 라는 생각말야.”

“뭐?풉..맞아..그런 생각 한적 있어.”

물론 여전히 내 옷자락을 꾹 움켜쥔 상태였지만, 그래도 피식 하고 웃는 그녀를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탁하기 그지 없는 엘레베이터, 좁은 사각의 방은 그야말로 적막함 그 자체였다. 물론 매장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소리가 은은히 세어 들어오고 있었지만.

어라?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돌려, 예림이가 내 옷자락을 움켜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또 공개된 세상의 시선속에서 그녀와의 둘만의 공간 안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이 세상은, 우연과 상상의 힘으로 돌아간다. 우연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얻으며, 상상을 통해 더 발전하고 진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독하게도 절묘한 우연 속에서, 상상력을 극도로 발휘한 채로 예림이와 단 둘이 이 공간에 있었다.

그녀의 몸도 움찔한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긴장감이 풀렸기 때문일까? 나와 단 둘이 있다는 것에 그제서야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저기 말야.”

이번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본능적으로 내가 무슨말을 꺼내려는지 직감한 것인지, 그녀의 몸이 또 한번 움찔 했다. 시선은 나를 향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구어 졌다.

“미안해. 누나가 말한대로 못할 거 같아.”

밖에서 무언가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매장 내에서 울리는 클래식 소리와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 옷자락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심장박동이 거세어 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도.

“너무..늦었나봐.”

“그래도 이건..”

“하나만 물어볼게.”

또다시 예림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달리는 심장박동 때문에 내 목소리도 떨리는 듯했다.

“나와 있었던 일들..정말 잊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

더 구체적으로, 더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내 한계는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만으로도 충분한지 예림이는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내 손끝이 이상하게 저려오기 시작했고, 문 밖에서 덜커덩 거리는 소리와 내 두근거리는 소리가 절묘하게 맞물리며 예림이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니..그런건..아냐.”

내가 들은 그녀의 목소리는 거기까지, 거기까지였다. 내 팔이 옆에 있는 그녀의 허리로 감기며 내 쪽으로 되돌아 왔다. 흠칫 하는 그녀의 몸이 내 몸과 완전히 밀착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그 이상 입을 열면 유치하기 그지 없는 말들이 내 입을 통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어서 일 것이다.

“야..너..”

부드럽고 향기로웠다. 내 가슴가득 안은 예림이의 촉감이 너무나 좋았다. 놀랐는지 헛숨을 집어삼킨 예림이의 숨결이 내 목 언저리로 돌아와서 간지럽혔다.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나는 한 쪽 팔마저 그녀의 몸에 둘러 포박하듯 끌어안았다.

“안돼..우리는..”

“몰라. 그런거.”

무서워서 그렇게 해버렸다. 한별이의 사촌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예림이가 ‘가족’ 이라는 말을 끄집어 내어 나를 방어할까봐 무서워서 그녀의 말을 뚝 하고 끊어 버렸다. 부드러운 머리결이 내 볼을 간지럽혔고, 손에 잡힌 그녀의 허리는 가녀리다 싶을 만큼 잘록했다.

순간, 그녀의 입술이 대 목 언저리에서 달싹 거리는게 느껴졌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반짝이는 입술이 열리고 나면,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그 알 수 없는 불안감때문에, 나는 그녀의 입술을 막아야 겠다는 발칙한 결심을 하고야 말았다.

“웁..!”

이번엔 그녀도 놀랐다. 내가 끌어 안았을 때보다 백배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그래..이건 정말 어찌보면 최고로 해선 안될 그런 행동이었다. 남매끼리 포옹은 하지만, 이렇게 키스는 하지 않을 테니까.

숨이 막혔다. 달짝지근한 그녀의 입술을 마음껏 비벼보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멜로 영화처럼 예림이의 눈이 스르르 감기지는 않았지만, 나를 밀어내려 발버둥 치는 손에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 둘의 입술이 층층이 포개어 졌다. 내 입술에 닿는 그 느낌이 짜릿해서, 나는 이대로 엘레베이터가 끝없이 밑으로 추락하는 듯한 착각을 받고 말았다.

“흡..읍..!”

그것은 반항이 아닌, 숨이 막혀 나오는 헛 숨이었다. 내 얼굴이 살짝 옆으로 틀어졌을때도 그녀는 굳어버린 동상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얼굴에 맞닿은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진 것은 그때쯤이었다.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쉴새 없이 그녀의 앞니에 부딪히던 내 혀가, 굳게 잠겼던 문이 빼꼼히 열린 틈을 타 스르르 침투했다는 것이었다. 달콤함, 그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몸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구석으로 내몰고 있었다. 이미 속옷매장에서 내 펀치를 받고 만 그녀는 이번이 결정타였는지 완벽하게 코너로 밀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보들보들했던 브라우스의 천은 내 손에 의해 조금씩 구김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 이런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내 손은 또 한번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주무르는 무례를 범하고 있었다. 코너에 몰린 누나는 옴짝달싹 못하며 그저 간간히 내 입술사이로 급박한 호흡을 집어 삼킬 뿐이었다.

정말이지 고삐풀린 망아지였다. 그녀가 실수로 열어주고 만 그 입술사이로, 내 혀는 집요하게 파고들며 입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예림이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엘레베이터의 귀퉁이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앞으로는 내 몸이 짓누르니 나갈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나는 도망갈 길 조차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취해버리고 말았다.

덜컹!

이윽고 엘레베이터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곧이어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 둘은 화들짝 놀라 서로에게 떨어졌고, 내 눈으로는 헝클어진 머리와 그것만큼 헝클어진 브라우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너..너..”

예림이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이려 애를 쓰는 듯했으나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잠시나마 내 키스를 허락했다는 점 하나때문에, 그녀가 화를 내야할 당위성의 무게가 줄어든 탓이었다.

“아이쿠..이거 죄송합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의 음성이 들어왔지만, 나는 그 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는 그저 예림이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아까처럼 내 가슴 언저리를 보는 것이 아닌,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망울이 조금씩 떨리어 가고 있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마치 어제의 일을 모르는 것처럼 지나가기엔 너무나 큰 일이 벌어진 하루였다. 그녀가 손을 뻗어 자위를 해 준 마당에 뭐가 대수냐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분명 키스는 그것이상의 파급효과가 있었다. 훌훌 털어버리기에는, 너무나 크게 각인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날밤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나는 누나대로, 나는 나대로 샤워를 하고 각자의 자리에 누웠다. 나도 그랬지만 분명 누나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런 말없이 뒤척이던 시간들이 한참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금 눈을 떴을때 그녀는 외출한 뒤였다.

자칫 잘못하면, 한 집에 살면서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명중 하나가 다른 한명의 생활패턴과 정반대로 행동해서, 집에서 잘 마주치지 못하도록 조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을때에, 공교롭게도 내 휴대폰으로 연락이 온것은 다름아닌 오유민이었다.

-선배 뭐해요? 결혼과 가족 과제 하려는데..같이 하실래요?-

그러고보니 오늘은 주말이었고, 덧붙여서 그녀와 내가 함께 듣는 결혼과 가족에 과제가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 과제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해서는 안되는 일, 서로에게 바라는 일을 각자 적어 2개 1세트의 레포트를 만들어 제출하는 일이었다. 지난번의 청첩장 과제를 모두 그녀에게 떠넘기고 숙모의 집에 갔던것이 생각이 난 나는, 이번에는 그냥 넘길 수 없어 내가 학교쪽으로 가겠다고 말해 주었다.

서둘러 일어나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면서도 힘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일어날 때 쯤에 늘 식사를 준비하던 앞치마 차림의 모습과, 내가 샤워를 할 때에 옷을 갈아입으며 내 심장을 뛰게 했던 예림이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가 막힌 우연과 타이밍으로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앞으로는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분명 예림이도 싫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렇게 암울하지 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이성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내 행동과 그녀의 행동은 분명 사회에 만연해 있는, 아주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는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용기를 내어 세상의 시선과 싸우려 할지, 아니면 그대로 굴복할 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를 믿고 안믿고의 차이일 수도 있었다.

너무나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샤워시간이 끝이나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춰진 내 모습이 무척이나 수척하게 느껴졌다. 젖어있는 머리결을 대충 말리고 나서, 나는 옷장을 열어 자주 입는 옷가지들 몇개를 꺼내들었다.

옷장안으로 내 옷들옆으로 나란히 걸린, 내 옷의 사이즈보다 절반은 작아보이는 귀여운 그녀의 외투들이 보였다. 그 옷에서 나는 향기 덕분에 눅눅한 남자냄새가 나던 내 옷도 덩달아 향긋해진 기분이었다. 틀림없다. 그녀와 같은 방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떨리는 것 자체가, 우리의 정상적인 남매사이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이다.

옷을 대충 걸쳐 입은 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아마도 레포트 작업이니, 저번처럼 학교근처에 있는 피씨방에서 하겠지. 마음 같아서는 예림이가 올 때까지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오유민에게 각자 해서 학교에서 만나서 내자고 말하기가 조금은 민망했다. 아직도 그녀의 두터운 책속에 끼워져 있을, 더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그 청첩장을 생각하니 내키지 않아도 가야만 할 것 같았다.

입주자가 많지 않은 우리 원룸 건물의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밖은 완연한 봄인데, 건물안은 매우 습하고 으스스했다. 나와 예림이만이 있는, 세상의 시선에서 차단된 그 곳을 향하는 통로는 이렇게 늘 눅눅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원룸 건물의 입고를 지나고 나서야,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듯이 햇빛이 내리쬐는 것이었다.

‘음..?’

무심결에 지나치려던 나는, 1층에 있는 우편함을 보고 우뚝 멈춰서 버렸다. 한동안 나도 예림이도 신경을 쓰지 못해서 인지 우리집의 호수가 적혀져 있는 철제 우편함에는 다량의 우편물들이 무질서 하게 꽂혀 있었다. 누나에게도 이야기 해준 적이 없으니, 그녀도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휴대폰 요금 통지서, 그리고 내 명의로 되어있는 누나의 휴대폰 통지서사이로, 근처 마트의 세일 광고 전단지나, 각종 세금 전단서따위가 손안 가득 잡혀왔다. 그것들을 다시 집 안에 넣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며 하나하나 발신지를 살펴보던 나는, 봉투부터 여느 우편물과는 사뭇 달라보이는 한 통의 서신을 보며 계단에 우뚝 하고 멈춰서 버렸다.

-인천.경기 지방병무청장-

발신자를 본 나는 선뜻 봉투를 개봉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내가 1년전 신체검사를 받았던 것이 생각이 났고, 그때에 현역 1급 판정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면제사유가 되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를 해보았지만 나보다 사회적 능력이 있는 누나가 내 부양가족으로 들어갈리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큰 돈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남긴 보험료가 있으니 기초 생활이 어려운 면제자로 분류될 확률 역시 희박한 것이었다.

등 뒤로 땀방울이 흐르고, 그것을 쥔 내 손이 차가워졌다. 편지를 개봉했을때에 ‘귀하는 입대할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글귀가 써져 있기를..하는, 한심하고도 말도 안되는 바람을 간절하게 하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한심했지만, 그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현역병 입영 통지서-

종이의 파란 부분이 마치 저승사자의 서슬퍼런 눈빛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왔다. 내 이름이 아니길 몇 번이고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김예영’이라는 세 글자는 오탈자 하나 없이 너무나 선명하게 통지서 위에 찍혀져 있었다.

우웅..우웅..

유민일까? 아니면 한별이? 숙모?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소리에도 전화를 받아 통화를 할 만큼의 침착함이 생겨나지 않는다. ‘육군 훈련소’라고 쓰여진 입영부대 옆에,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라는 주소가 보여지고 있었다. 진동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며 내가 전화를 받길 재촉하고 있었지만, 나는 두 발이 땅에 박혀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조금 시선을 내렸을 때에, 내가 언제 이 사회로 부터 "격리"되는 지를 예감할 수 있었다.

-입영일시 : 2009년 4월 20일 1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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