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1부>
정숙의 아버지는 국문학과 대학교 교수였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두분 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장성을 지내었고, 증조 할아버지는 마을의 훈장이셨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전역 후 군 기관 에서 얻은 정보로 부동산 투자를 하여 엄청난 부를 이루었다.) 그러한 탓에 그녀의 집안은 엄청난 가부장적인 그리고 보수적인 가풍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가풍 속에서 정숙은 자연히 “남자는 하늘이요, 여자는 땅이다” 란 사고를 어릴 때부터 지니며 살아왔다. 할머니 와 어머니의 남편에 대한 헌신적인 모습을 보며 자라왔고, 그들로부터 항상 남자에게 순종하는 모습만을 강요 받은 결과였다. 항상 치마를 입었어야 했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쭉 스타킹을 신어야 했다. 혹시라도 바지를 입거나, 맨발로 다니는 날에는 심한 꾸지람을 들었어야 했으니까. 남편과 결혼 후 지금까지도 항상 남편에게 존칭을 써왔고, 집에서도 대부분 치마를 입고 항상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철들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실천해온 정숙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다.
유치원시절 허약한 몸 때문에 시작해 지금까지도 꾸준히 해온 수영은 그녀에게 건강 이외에도 같은 또래의 여자들보다 탄탄하고 날씬한 몸매를 선물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가지고 있었고 약간의 요붕증 이 있었다. 모든 약을 써보았지만 이 증상들은 좀처럼 낮질 않고 아직도 정숙을 괴롭히고 있다. 특히 긴장을 할때는 더욱더.
그녀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 (은진) 가 한 명 있다. 그녀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쭉 함께 해왔다. 부유한 동네이다 보니 당연히 친구 집도 부자였고, 시집도 종합병원을 하는 의사집안으로 가게 되었다. 다른 곳에는 욕심이 별로 없는 정숙이지만 은진에게는 항상 경쟁심과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은진의 남편 (경철) 때문이다. 정숙과 은진은 대학 연합 동아리에서 경철을 처음 만났는데 정숙은 처음부터 경철에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정숙의 성격으로선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가정교육으로도 남자는 여자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배웠으니까. 경철이 먼저 다가와 고백해주는 모습을 항상 기다렸었다. 하지만 경철이 고백한 사람은 정숙이 아닌 은진이었다. 은진의 170 cm 의 늘씬한 키와 발랄하고 애교 많은 모습이 경철을 사로잡은 것이다. 둘 다 매력 있는 얼굴이지만 정숙이 도회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면 은진은 온화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혼상대로 온화한 외모를 가진 은진을 선호 할 것이다.
은진이나 경철은 정숙의 경철에 대한 마음을 짐작도 못하고 있었기에 둘이 사귀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정숙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은진의 의리와 성격으로 봐선 만일 정숙이 경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아마 경철을 사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을 알기에 정숙은 은진을 미워할 수가 없었으며, 둘의 만남을 축복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성격 탓으로 돌리며….. 정숙은 경철에 대한 마음을 그 뒤로 접었지만 그 이후로는 은진이 보다 다른 모든 면에서 악착같이 이기고자 노력해왔었고, 특히 자식들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학창시절 은진은 항상 정숙보다 성적이 좋았다. 정숙은 은진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은진은 의대로 진학했고 정숙도 의대로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했다. 그러기에 정숙은 항상 은진의 자식보다 좀 더 낳은 교육과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자식들이 은진의 자식들보다 항상 앞서가기를 바랬다. 정숙은 자신의 아들들이 은진의 자식들보다 조금이나마 나쁜 성적을 받는 날이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정숙은 은진이보다 많은 돈을 자식한테 써야 마음이 평안하다. 나중 모든 면에 있어서 은진의 자식들한테 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어둠의 그늘은 남편의 사업에서 시작이 되었다. 잘나가던 남편의 사업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시가와 친정의 재산을 다 끌어 들였지만 늘어난 은행 빚과 시장위축으로 인해 사업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고, 직원들 봉급도 겨우겨우 주는 상황이었다. 아직 부도의 위기는 맞지 않았지만 너무도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집에 가져다 주는 돈도 원래의 3분의 일이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 버렸다. 정숙은 힘들어 하는 남편을 괜찮다고 위로했고, 항상 남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정숙도 너무나 힘이 들었다. 자신한테 돈을 쓰지 못하는 것은 상관없었으나, 자식들의 사교육비를 줄여야 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힘들어 하는 남편을 보며 절대 내색하지 않았으며 곧 경기가 풀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참아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6개월이 흘러갔다. 들어오는 돈은 늘기는커녕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미 시댁과 친정의 재산은 다 끌어다 썼으니 더 이상 끌어 올 때도 없다. 그 와중에 둘째의 성적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이제 곧 고3으로 진학하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고3에 가서는 걷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정숙은 민재를 불러다 놓고 훈계를 했다.
“민재야, 지금 곧 고 3이 되는데 성적이 이게 뭐니? 잠을 좀 줄이고 좀 더 노력을 해보렴.”
“……………………………”
“왜 말이 없니?”
“엄마, 지금 피곤하니까, 다음에 이야기 하죠.”
“민재야, 제발. 아버지 사업도 힘든데 너까지 이러지 마. 엄마도 너무 힘들어.”
“아버지 사업이 힘든 거 아니까 이렇게 참고 있는 거라구요.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계세요.”
“너 그게 무슨 말이니? 참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한테 이야기 해주렴”
“아이 그냥 됐어요”
“민재야, 너 엄마 숨 넘어 가는 것 보고 싶어? 말 좀 해봐”
민재는 한참을 뜸들인 후에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 은진이 이모 아들 경수가 지금 우리 반에서 1등 하고 있어요. 은진이 이모가 자랑 안 해요? 항상 내가 하던 1등을 그 놈이 하고 있다 구요. 저요, 전 지금 5등도 못해요. 다른 애들은 각과목 마다 족집게 과외선생 모셔다 놓고 공부하는데, 전 달랑 수학 과외 선생 한 명뿐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놈들 어떻게 따라잡아요? 누군 기분 안 더러운 줄 아세요? 경수 그놈이 날 볼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나쁜줄 아세요? 피나게 공부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 형편에 수학과외 선생도 힘든 거 아니까, 아무 말 안하고 있는 거예요. 아시겠으면 그냥 내버려둬요. 이래도 서울에 있는 중간 정도 학교는 갈 수 있을 거니까”
민재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뛰쳐나갔다. 정숙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민재가 불쌍해서 울었고, 자식을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 미안해서 울었고, 은진이 부러워서 울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첫사랑 경철을 빼앗긴 은진의 자식 경수에게 민재가 뒤쳐지는 게 너무나 원통하고 비참했다. 점점 잘 나가는 경철의 종합병원에 비해 위태위태 하기만 한 남편의 회사는 초라하기만 했다. 일 이년 전만 해도 경철의 병원은 남편의 회사에 비교도 되지 않았었는데….
대학졸업과 동시에 집에서 살림을 하였기에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애들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