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바라기 (1)
1)
“ 민아...아침은?”
“ 됐어...나 갈게...늦었어...”
“ 미, 민아...”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주방이라고 해봐야 거창하게 식탁이 놓여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좁은 싱크대와 키 작은 냉장고만으로도 꽉 차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기도 힘든 아주 협소한,
엄마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서 가방을 대충 쥐고 나서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늘 좀 늦을 거야...”
“ 그, 그래? 잠깐만...”
“ 왜 그래? 늦었다니까...씨~”
“ 미, 미안해...”
팔을 잡는 엄마에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러자 엄마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마치 죄라도 진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가뜩이나 가냘프고 작은 엄마의 새하얀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피로와 곤혹스러움이
민의 가슴을 칼로 긋는 것 같은 예리한 통증을 주면서 짜증이 커지는 것은,
어쩌면 미안함 때문에 그 반동으로 더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거칠게 말을 뱉게 되곤 한다.
“ 됐어...알았으니까...뭣 땜에 그러는데?”
“ 으, 응....이거...”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하려 애를 쓰며 묻자
엄마가 부스럭거리더니 앞치마에서 뭔가를 꺼내서 민의 주머니에다 넣었다.
바지주머니를 통해서 느껴지는 얇고도 바삭거리는 느낌....돈인가?
“ 이걸 왜?”
“ 민아...미안해...엄마가 맛있는 거라도 해줘야 하는데....휴~
생일 축하해...친구들하고 저녁에 뭐라도 사먹으렴....정말...미안해....”
“ .......”
울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는지 눈가가 촉촉해지는 엄마의 모습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와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도 뭔가가 쏟아질 것만 같았으니까...
왜 그렇게 죄를 진 것처럼 눈치를 보는 건데?
식당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생일상을 못 차려주는 게 그렇게나 미안해할 일이야?
차라리 나더러 버릇이 없다고 꾸중은 못할망정....
민은 답답해져 오는 마음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 어쩌면 못 들어올지도 몰라....”
“ 미, 민아...”
“ 애들이 저녁 때 생일축하를 해준다고 했어...”
“ 그, 그래...? 알았어...”
무뚝뚝하게 일방적으로 첫 외박을 통보하는 자식에게도 눈치를 보면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는 엄마...
민은 다시 한번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에 돌아서서 집을 나섰다.
“ 민아...미안해...이 못난 엄마가...흑흑....”
정윤은 새벽부터 일어나 끓여놓았던 냄비 속의 미역국과 밥솥의 새하얀 찰밥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행복했던 가정이었다.
아니, 행복했다고 믿었었다.
듬직했던 남편과 공부를 썩 잘하지는 않지만 대신에 늘 쾌활하고 엄마를 챙기던 자상한 아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한번에 무너져버렸다.
원래 별로 말이 없어서 조금은 무심하게도 느껴지던 남편이
조금 변한 것 같으면서도 설마 했던 건 부모님께서 사고로 돌아가시면서부터였다.
중소업체를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똑똑하고 믿을 만한 사윗감이라면서
당신의 직원이던 남편을 소개시켜주었을 때가 여대 2학년이었다.
무남독녀인 정윤이었기에 애초부터 사업을 물려줄 데릴사윗감으로 남편을 점 찍었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고학을 하면서 명문대를 나올 만큼 머리가 좋으면서도 강한 생활력을 높이 산 것이었다.
그리고 주변의 가까운 친인척이 없는 남편이 당신의 딸만을 위하리라는 계산도 있으셨다.
정윤은 그런 부모님의 마음과 함께 나이차는 좀 있지만 든든하게 보이는 남편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 나이 때면 이런저런 남자에 대한 환상이나 사랑을 꿈꿀 만도 하련만 여리디 여린 성격 탓에 모든 걸 수긍했다.
몇 번의 만남 이후에 남편이 자연스럽게 집을 출입하면서 두 사람은 비공식적으로나마 약혼자로 모두가 인정했다.
그래서인지 생일을 축하해준다면서 남편이 자신의 공간으로 이끌어
그날 밤 순결을 바치고 외박을 하게 되었을 때도 부모님은 그냥 묵인해주셨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주말이면 남편이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는 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에 임신을 하고서는 중퇴와 함께 허겁지겁 결혼식을 올리게 된 건....
그렇다고 그걸 한번도 후회해 본적은 없었다.
민이라는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얻었기에...
하지만 이런 지경이 되고 나자 뒤늦게야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아주 냉혹했다.
아무런 재주도 없는, 더군다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뭔가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대학중퇴가 최종학력일 뿐인 나이 40의 유부녀가 세상을 헤쳐나갈 방법은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그나마 어렵게라도 식당의 홀에서 일을 하게 된 건 천만다행이었다.
월세이지만 이렇게라도 반 지하 단칸방에서 꾸려갈 수가 있으니까....
단지...아들에게 너무나 미안할 뿐이었다.
“ 휴~ 내가 이래서는 안되지...”
넘어가지 않는 밥술을 미역국에다 말아서 넘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모래를 씹는 게 나을까?
매끄러운 국물로 잔뜩 젖어 든 밥알인데도 마치 돌덩이를 삼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가뜩이나 허약한 체질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지를 못한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힘을 내야 했다.
정윤은 혹시라도 체할까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 하~ 엄마....”
쫓기듯이 집에서 멀어지던 발걸음이 뚝 멈춰졌다.
아직도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전날 일부러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꾸어 둔 걸까?
손이라도 베일 것처럼 구김살 하나 안 보이는 빳빳한 여러 장의 지폐가 주머니에서 딸려 나왔다.
아마 바쁜 와중에도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은행을 다녀오는 엄마의 모습이 잡힐 듯이 떠올랐다.
민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고서 그것이 마치 엄마라도 되는 양
혹시라도 구겨질까 가방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노트 사이에다 집어넣었다.
이걸 모으려고 엄마는 그 흔하디 흔한 싸구려 로션마저도 아껴 발랐을 게 분명했다.
“ 바보같이...바보...흑...”
민은 아무도 없는 골목길로 숨어들어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시멘트 벽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고, 사랑한다고 말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막상 엄마를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불퉁하게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넓은 아파트에서 가정부를 두던 생활이 갑자기 구질구질한 단칸방 살림으로 변한 것이나,
사고 싶은 것에 구애를 받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늘 쓰는 입장에 있던 게,
이제는 오히려 자신이 기존의 친구들을 먼저 피하게 된 것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많이 힘들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다지 미련도 없었다.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소문이 난 탓일까?
자연스럽게 멀어진 친구들에 대한 배신감도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처음엔 원망도 많았지만 결국엔 사람을 제대로 못 본 자신의 잘못이었다.
덕분에 정말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을 깨닫게 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까지 느껴졌다.
그런데도 엄마에게 자꾸만 그렇게 대하게 되는 건 숨이 막힐듯한 답답함이 원인이었다.
어린 자신이 보기에도 착하다 못해서 바보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우리 엄마....
그것이 이유였다.
어릴 때부터 천사처럼만 느껴졌던 웃음이 너무나 예쁜 엄마...
그런 엄마에게서 웃음을 뺏어 가버린 그 남자...
아버지라는 사람을 원망조차 못하는 바보 같은 여자....
자신이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 정도의 세상물정도 모를까?
외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엄마의 재산을, 심지어 회사의 결재대금까지 모두 챙겨서,
비서라는 여자와 함께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살던 집으로 쳐들어와
남겨진 모자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모든 걸 알 수가 있었다.
그 오랜 세월을 살을 맞대고 살면서도 위선의 얼굴도 못 알아챈 엄마의 순진함에,
그리고 남겨진 빚에 순순히 모든 걸 포기해버린 나약함에도 화가 났지만 그나마 그건 참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혹시나 자신이 두고두고 아버지를 원망하게 될까
오히려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변명까지 해주는 데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정? 무슨 사정?
사정이 있다는 사람이 엄마의 앞으로 상속된 유산을 몽땅 가로챈 것도 모자라
회사의 공금까지 챙겨서 여자와 외국으로 도망을 간다는 건가?
그리고 일년이 다 되어가도록 소식 한번이 없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외국의 휴양지에서 그 남자를 봤다는 소문도 들렸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어릴 때부터 정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키웠다던 엄마가,
그나마 외할아버지께 신세를 졌다던 몇 분들의 도움으로 겨우 보증금을 마련해,
지금의 단칸방으로 옮긴지 얼마 만에 기운을 차리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건 뜻밖이었다.
어쩌면 자퇴를 고민한 자신의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챈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다행인 건 살던 집까지 다 넘겨준 후에는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은 채권자들이었다.
아버지라는 남자가 사채라도 쓰지 않은 건 작은 양심이었을까?
아니다.
민이 보기엔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그 남자가 아니라 사업을 하면서도 인심을 잃지 않았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이 정도로 끝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어떤 희망이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냥 겨우 버텨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 ...빼먹진 말아야겠지....”
민은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동정을 받는 듯한 눈길과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까지 느껴지는 그런 시선이 싫었지만 학교는 가야 했다.
갑자기 미친 듯이 공부를 한다고 해서 자신이 장학생이 될 가능성은 복권에 당첨될 확률만큼도 없었다.
여건이 좋을 때도 못한 걸 지금에 와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냥 평범한 머리에 중간 정도의 성적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친구들이 많았던 것 빼고는 너무나 평균적인 고등학생이었던 자신이다.
그나마 대학진학의 가능성마저 없어진 지금, 성적도 성적이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더 큰,
고3이라지만 당연히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서일까?
담임선생님이나 심지어 다른 선생님들도, 학교에 쫘~할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으니, 대충 시간만 때우는 걸 묵인했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걸 간섭하기엔 왠지 심적으로 불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이 특별히 분위기를 흐린다거나 그러는 건 아니었으니...
그냥 멍하게 앉아 하루하루를 보내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자리를 지키는 건, 종종 야자를 빼먹고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자신만 바라보고서 간신히 버텨나가는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바라는 대로 최소한 졸업장만은 딸 것이었다.
“ 민아~”
“ 응? 지민아...”
이제는 의례히 형식적이 되어버린 자신의 핑계를 적당히 받아주면서
야자를 빼준 담임선생님 덕분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자신처럼 가방을 챙겨서 나가는 아이들이 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입장이 달랐다.
그 애들은 학원을 가기 위해서 빠지는 것이었다.
우르르 급하게 서두는 애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혼자 무인도에 뚝 떨어진 것 같은 쓸쓸함을 느끼는 민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뽀얀 얼굴에 단발머리, 그리고 까만 눈망울이 예쁜 보조개 웃음과 함께 들어왔다.
지민이었다.
“ 어디가?”
“ 으, 응...그냥....”
“ 치~ 너 또 걔들 만나러 가는 거지?”
민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지민의 말이 맞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자신의 생일축하를 위해 만나는 것이었다.
“ 넌 학원에 가는 거야?”
“ 피~ 할 말이 없으니까...”
민이 슬그머니 말을 돌리자 지민이 입술을 삐죽이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두근두근....
지민에게서 늘 맡아지는 향긋한 냄새와 함께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가슴이 뛰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지민은 어릴 때부터 이웃이어서 같이 자랐다.
하지만 왜인지는 이유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자신은 지민을 많이 울렸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져 버렸다.
이사를 하면서 까맣게 잊었다가 고등학교에 입학해 다시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릴 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민의 얼굴을 보면
분명히 그때도 무척이나 예쁘고 귀여웠을 텐데 왜 그렇게 괴롭혔을까?
재회와 함께 그때의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민은 반가움과 설렘에도 그냥 아는 척만 하고 말았었다.
그러자 지민 역시 그냥 학교에서 마주칠 때만 가볍게 인사를 하는 정도로 대했다.
그러던 것이 급격하게 가까워진 게 민의 처치가 바뀌면서 주변의 많던 친구가 다 떨어져 나가고서였다.
그전과는 달리 갑자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지민에 처음에는 계속 피하다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자격지심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되기 전에 다가왔더라면 정말로 기뻐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에서는 동정심이나 장난으로 밖에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비마저 오는 밤길을 울면서 집까지 따라온 지민의 진심을 깨닫는 건 그리 힘들지가 않았다.
결국 민은 그날 집 앞 골목길에서 난생 처음으로 키스란 걸 해봤다.
비에 젖어 차갑고 매끄러운 피부와는 달리 너무나 연약하면서도 따스한 입술...
복사꽃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은 말랑말랑한 입술을 정신 없이 비비다가
자신도 모르게 혀를 그 사이로 밀어 넣자 놀랍게도 순순하게 받아들였다.
여자의 혀라는 것이 그렇게나 말랑거리면서도 느낌이 좋다는 걸 알고는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 순간에는 머리를 타고서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도 소름이 돋아 오슬오슬 추운 것도 잊어버렸다.
서로가 서툴기에 이빨끼리 부딪치는 촌극도 전혀 우습지가 않았다.
정신 없이 서로의 혀를 빨아들이는 속에서
민은 자신의 가슴 속 여기저기에 난 생채기에 조금씩 새살이 돋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연인 이라기에는 뭔가 조금 어설프지만
그래도 남들이 안보는 곳에서 종종 키스를 하는 달콤한 사이가 되었다.
엄마가 따스함과 함께 아픔을 주는 존재라면 지민은 눈이 부시게 밝은 햇살이었다.
하지만 볕에는 그림자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모범생에다 은근히 러브레터도 많이 받는 지민의 옆에 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자 어둡게만 보였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가 있을까?
자신의 환경이 변하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에서 지민의 부모님이 아신다면?
물론 지민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면서 꿈만 같다고 늘 말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지민아..너?”
“ 왜~에?”
민은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서 버스에 올라탄 자신을 따라 덜렁 승차해버린 지민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지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너..학원에 가는 버스가 아니잖아?”
“ 학원? 나 오늘 땡땡이를 칠 건데?”
“ 지민아?”
“ 생일 축하해...민아....”
학교에서 멀어진 탓일까?
팔짱을 꼭 껴오는 지민의 뭉클한 젖가슴이 느껴지는 것과 함께 민은 깜짝 놀랐다.
“ 어, 어떻게 알았어?”
“ 치~ 바보...내가 남자친구의 생일도 모를까 봐?”
“ 그, 그래도...내 생일을 이야기한적이 없는데...”
“ 웅~ 이건 정말로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인데....”
갑자기 지민이 귓가에다 소곤거렸다.
입술을 바짝 갖다 댄 지민의 향긋한 숨결이 따스하게 스치자 자신도 모르게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지민과 둘만 있게 되면 늘 그랬다.
그런 민이 늘 어색해하면서 숨기려 할 때마다 지민도 모른 척 외면을 해주곤 했었다.
여기저기서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하기야 왜 그렇지 않을까?
한눈에 봐도 고등학생인 걸 알 수가 있는 애들 둘이서 팔짱을 낄 때부터
어른들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가 않았을 텐데 이런 묘한 자세까지 취했으니...
그래도 민은 어깨에다 힘을 주면서 기가 죽지 않으려 애를 썼다.
우리는 떳떳했다.
지민을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가 사랑하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행동일 뿐이라 되뇌고만 있었다.
“ 나...어릴 때부터 네 생일을 알고 있었어....”
“ 지, 지민아?”
“ 늘 네 생일선물을 준비했는데...한번도 초대를 안 해준 거 있지?
흥~ 뭐...그때야...수지 고 계집애만 좋아했으니까....”
“ 미, 미안해..난 전혀 몰랐어...”
지금 지민에게서 듣기 전에는 이름마저 기억을 못했던 여자아이였다.
새삼 지민에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아마 지민은 그때마다 방에서 몰래 울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차마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분명히 그랬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버스 안만 아니라면 지민을 껴안고 키스를 했을 것이었다.
민은 그런 간절함을 참기 위해서 자신의 팔짱을 낀 지민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런 마음을 안다는 듯이 지민이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 너 혹시 그러면 지금....”
“ 응...아무래도 네가 걔들이랑 생일파티를 할 것 같아서 따라가려고....”
“ 파티는 무슨? 그냥...모여서 노는 거지...뭐...핑계 삼아서...”
“ 어쨌던.....”
야무지게 대답을 하는 지민에 민은 말문이 막혔다.
“ 지민아...애들하고 미리 약속을 한 거라서 도중에 빠져 나오기가 힘들어...”
“ 응..알아..걱정하지마....”
“ 하지만...너...걔들...불편하잖아?”
“ 괜찮아...너도 있는데 뭘?”
말은 돌려서 했지만 불편한 게 아니라 싫어했다.
그리고 조금 무서워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주 공포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민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건 많이 줄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물과 기름 같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기야 자신도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지민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었다.
학교를 중퇴한 아이들....
사람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어떤 틀을 만들어두고서 거기에 맞추어 평가를 한다.
옷차림, 걸음걸이, 말 하나까지도 이미 마이너스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다.
“ ...지민아...아마 애들이 모이면...술을 마실 거야...그러니까...넌...”
“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 지, 지민아...”
“ 피~ 걱정하지마...나도 마셔본 적이 있어...”
“ 뭐? 네가? 언제?”
“ 왜? 너는 되고 나는 안돼?”
“ 아, 그건 아니지만....”
민은 상상도 못했던 말에 놀랐다가 얼굴을 붉혔다.
왠지 자신이 옹졸하게 느껴져 창피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쥐자 아팠던지 지민의 아미가 살짝 휘어졌다.
“ 미, 미안해...지민아...아파?”
“ 아니...괜찮아....흐응~ 그렇게나 궁금해?”
“ 그거야....”
“ 호호...친구 생일날 걔 집에서 샴페인을 먹었지...”
“ 난 또~...”
“ 왜? 남자애랑 먹었을까 봐?”
“ 아, 아니야....”
민은 내심 찔끔했다.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그리고 그러면서 더한 상상도 했었다.
부정하려 해도 그 애들과 어울리면서 그런 쪽으로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었다.
물론 자신은 그 자리에서 마지막에는 늘 빠졌지만 여자애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결국에는 혼숙을 하는 모습을 자주 봤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구태여 그런 애들의 행동을 욕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단지 그냥 자신은 내키지 않았기에 자리를 피했던 것뿐이었다.
뭐..결론적으로 지민과 가까워지면서 그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만....
“ 너...그러면 집에는 어쩌려고?”
이렇게까지 나오는데야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침엔 홧김에 엄마에게 외박을 한다고는 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늦더라도 지민을 집에다 바래다주는 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술 냄새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 으, 응...아빠는 늘 일찍 주무시니까...”
“ 그러면...엄마는?”
“ 헤헤...엄마는 괜찮아...무조건 내편이니까...사실 오늘 내가 학원 땡땡이를 치는 것도 엄마는 알아..”
“ 뭐?”
“ 웅~ 늦을 거라고 했어...그러니깐 넌 아무 걱정도 마...”
“ 지민아...”
“ 그 이야기는 그만....이젠 됐지?”
“ 그, 그래....”
민은 놀라면서도 문득 지민이 부러웠다.
자신도 이렇게 되지만 않았다면 지민처럼 엄마와 저런 사이일 텐데...
엄마도 언제나 자신의 편이었다.
공부에 대해서도 한번도 뭔가를 무리하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을 믿어주고 자랑스러워했는데...
민은 갑자기 아침에 그러고 나온 게 떠오르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핸드폰을 없애버린 지가 오래라는 걸 깨닫고 울적해졌다.
그렇다고 지민에게 빌려서 하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 어? 다 왔어...내리자...”
“ 응...”
민은 잠시 들었던 우울함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지민의 손을 쥔 채로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 지민아, 절대로 무리는 하지마...알았지?...늦어도 내가 바래다 줄 테니까...”
“ 응...알았어....”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안도감에서일까?
민은 버스에서 내려서 걷다가 골목길로 접어들자 지민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지민도 자연스럽게 안겨오면서 머리를 기댔다.
이런 모습이 드문 일이 아닌데도 다른 날보다 더 흥분이 되는 가슴을 달래면서 걸음을 옮겼다.
전봇대 위의 가로등이 뭔가를 소곤거리는 것만 같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더욱 당겨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