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지야[Fantasy夜]2부-R6"#9.D-day3"
법정이 아닌 그저 평범한 행복했던 일상에서 ‘신유정’으로 남고 싶다던 그녀의 바람대로
도쿠가와는 유정이 죽는 날까지 그녀가 있을 사형장이 위치한 동녘하늘을 바라만 보면서
면회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 조간신문으로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녀가 떠나버렸다.
찰나의 짧고도 짧은 미소 한번 보여주질 못한 채 떠나버렸다.
그녀는 이렇게 눈물로 썼을 편지 한 통만을 남겨놓았다.
그 편지를 읽으며 도쿠가와는 왜 그녀가 그렇게 자신을 모질게 죽음으로까지 내몰아야
했는지, 그리고 왜 경관을 살해했는지, 아니 살해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사연의 요결은 이랬다.
도쿠가와 아버지인 하데쓰 이에야스은 젊은 적 죽마고우의 약혼녀를 좋아했다.
그는 간계를 써 둘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친구의 여자를 가로챘다. 그것이 지금의 중령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런데 친구의 간계에 여자를 잃고 중앙 요직에서까지 쫓겨난 그 죽마고우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가 바로 죽은 경관 스즈키 하와가의 아버지인 고이지미 하와가였다.
두 사람은 각각 서로 다른 계통에서 최고가 되는 꿈을 함께 키운 단짝이었다.
하데쓰는 법관으로 고이지미는 군대에서 말이다.
둘 다 우수한 능력을 지녀 장래가 탄탄대로를 걷는 사이였다.
그런데 여자로 엇갈린 둘은 원수가 되어버렸고 고이지미는 중앙에서 쫓겨나 조선총독부에서
다시 하데쓰의 농간으로 외지 중 외지인 관동군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친구를 중국 땅까지 쫓아버리곤 비로소 편안히 발 뻗고 지낸 세월이 20여년이 흘렀다.
아들 도쿠가와가 법관 재판에 나가려는 무렵 만주벌판에 있어야할 과거 친구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친구를 건들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혈육이자 집안을 이을 외동아들을
똑같은 계책을 써 파멸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나 깨끗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애인 유정이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조사를 한 결과
조선 독립군이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걸로 그는 간계를 짰다.
그의 간계는 2가지로 나눠 어디로 향하든 딜레마에 빠지도록 했다.
1.유정의 정체를 폭로한다. 더불어 그녀의 정부가 이에야쓰가의 외동아들임을 하데스의
정적들에게 알린다. 권력이란 최고가 있으면 어떻게든 물어뜯으려는 이리떼가 존재하기
마련. 정적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반역죄란 죄목은 집안 하나 쯤 우습게 말아먹는데 충분한 무게를 지닌다.
2.알리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이용해 유정에게 그녀의 연인을 직접 죽이라 명한다.
과거 친구인 하데스는 오로지 도쿠가와 아들 하나만을 두었다. 그 이왼 손이 없었다.
즉 외동아들의 죽음은 이에야스가의 절맥을 의미함과 동시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과거 자신의 아픔으로 그대로 되갚아 줄 수 있었다.
첫 번째도 시원한 복수가 되겠지만 2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자신이 받은 긴 고통을
서서히 느끼도록 말려 죽이는 것도 그에겐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열쇠만 유정에게 쥐어 주고서 고이지미는 일본에 하찮은 경관으로 하루를
사는 못생긴 아들에게 일을 일임했다.
먼 이국땅인 관동군 고위급 장교로 있었기에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었다.
유정으로써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첫 번째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애인과 그 집안까지 송두리째 말아먹는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아니 더 나아가 조선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도 함께 처형될 것이다.
아무리 부모자식간의 연을 끊은 아버지라 할지라도 자신의 부모였다.
그녀는 솔직히 아버지보단 사랑하는 연인에게 드리워질 파국이 더욱 무서웠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애인을 잔인하게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의 정체를 묻어둔다 하였다. 그렇게 되면 애인 도쿠가와만 죽고 그 가문과 자신은
살 수 있었다.
여기서 각각의 선택에 따른 죽고 사는 생사가 극히 갈라져 나온다.
첫 번째를 선택하면 유정, 그녀 자신은 죽는다!
하지만 남자친구인 도쿠가와와 그의 가문은 몰락에서 끝이 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정계에 깊은 영향력이 있는 뼈대 있는 가문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를 선택하면 자신은 산다! 하지만 남자친구인 도쿠가와가 죽는다.
그것도 사랑하는 이의 손에 비참하게 죽는다.
그의 가문은 안전할 것이다.
다만 대를 이을 손이 죽어 몰락의 길을 걷겠으나 반역죄로 삼대가 멸문당하는 것보단 났다.
더불어 자신의 집도 안전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을 제쳐놓고서라도 일단 조국 독립에 누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그러려면 2번째 선택뿐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도쿠가와의 아낌없는 순정에 매번 눈물을 흘리며 뒤돌아서야 했다.
걸쳤던 아들이었다. 아들, 스즈키는 아버지로부터 간계의 모든 것을 넘겨받고 조용히
유정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녀의 미모에 눈깔이 뒤집히고 만 것이었다.
지나가는 암캐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의 추악한 그의 외모는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여자
속살 한번 보질 못한 처량한 신세를 면치 못하게 하였다.
오죽하면 돈 주고 뭐든지 하는 길거리 창녀들조차 스즈키의 추악한 외모를 보곤
도망을 가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유정은 하늘의 여신이요, 자신만의 천사 같았다.
그래서 선택권을 유정에게 맡겼던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자신의 독단으로 결정지어버렸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2번째!!
그녀의 애인이란 작자는 뒈져서 좋고 그녀는 그러므로써 도망자 신세가 될 테니 자신에게
당연히 올 거란 크나큰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몇 달이 흘러도 도통 2번째 선택을 종용하는 자신의 뜻에 한사코
미루기만 하는 그녀를 보곤 화가 치밀어 그냥 일본 내각 중앙정보부에 밀고를 하려했다.
그걸 뒤늦게 눈치 챈 유정은 그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찰서에 틀어박혀 도통 밖으로 나오질 않는 스즈키를 죽여 버릴 수 있는 장소나 시간이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권총을 몰래 소지해 한가한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를 살해하였고 그녀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로써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도쿠가와와 고이지미 뿐.
고이지미는 먼 중국 땅에서 또 다시 오기에는 너무도 멀고멀었다.
그래서 법정에서 연인이란 사실을 밝히려는 도쿠가와의 입을 그렇게도 처절하게
막으려 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죽게 될 몸.
혹시라도 아주 나중에 고이지미란 자가 뒤늦게 죽은 그녀마저 악용해 사랑하는 그에게
해를 끼칠까 싶어 후안마저 없앴던 것이었다.
참으로 애절한 그녀의 사랑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스즈키를 살해함에 따라 2번째 선택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반대가 되어
자신의 애인의 손에 자신이 죽게 된 비극적 결말을 맞이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정, 그녀는 그 어떤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었다.
자신 하나의 죽음으로써 모두가 평화를 되찾을 테니 말이다.
유정은 처음부터 독립군의 정체가 밝혀지는 첫 번째 선택을 염두해 두지 않고 있었다.
조국에 음지에서 혹독하게 살아가는 동지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방황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고이지미가 그녀의 정체를 이용해 그가 동경 내의 독립군 잔당을 처리할 욕심은
없었을까? 그는 이미 썩어빠진 일본 정계에 신물이 나 있었고 변방 군관신분으로 그런
중국본토 군벌 세력과 맞서는 그의 입장에서는 한 끼 식사거리도 안 되는 조무래기들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가장 괴롭게 했던 사실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이 파멸을 혹은 죽음 맞게 된다는 사실에 그녀는 하루하루가 찢어지고 문드러지는 고통
속에 진물이 흐르는 가슴앓이였다.
가장 근본적인 해악의 원인이 자신이란 사실에 그렇게 괴로워했었다.
그런데 그 근본이 되는 자신이 가장 좋은 건수로 걸려들어 죽게 될 수밖에 없었고,
법정에서 잔인한 신의 장난이었는지 아니면 마지막 가련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한 축복인지
모르겠지만 둘은 운명처럼 조우하게 되었다.
유정은 그 순간 그를 위해, 다음 세상에 태어나도 사랑하는 그를 위해 자신을 버렸다.
죽을 각오까지 한 그녀를 보내지 못하는 미련한 한 남자를 위해 그렇게도 차갑게 돌변했던
것이었다.
돌아서는 그 순간까지 처연한 미소,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빌었다.
눈물도 미소도 안녕이란 말 한마디도 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부르고 또 울었다.
생의 마지막이 될 그 법정에 서서 연인을 바라보면서......
슬픈 소쩍새가 되어 지난날의 아련함과 애잔함을 노래하고
못되게 떠나는 막되먹은 자신의 가련한 사랑을 용서해달라고
그러나 틀림없이 못난 사랑은 홀로 남아 자신을 쉬이 떠나보내지 못함을 알았고 이렇게
속삭였던 것이었다.
눈물이 돌고 돌아 12번이 흐르고 더 이상 마른 눈물도 안 나올 때쯤이면 저를 잊어주세요.
세상을 떠나는 그녀도 떠나보낸 그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12번의 눈물이 얼마나 긴 것이었는지를!
그녀를 떠나보낸 후 도쿠가와는 법학도의 꿈도 가문도 버리고 동경에서 자취를 감췄다.
*
*
중령은 살갑게 다가서는 윤수의 고운 얼굴선을 두 눈에 은은하게 담아보며 가슴 속
그녀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떠난 후, 난 당신이 활동하던 조선 독립군 동경 지하지부를
찾아가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투신하게 되었어. 그리고 스스로 삼별초 특수부대에
자원입대하여 그 누구도 하지 않으려했던 이곳 731부대로 오게 되었지. 그런데
여기서 당신의 환생과도 같은 여인을 만났어. 유정아? 듣고 있니? 참 기구한 팔자이지
않아? 너도 나도....여기 정신 못 차리는 불쌍한 여인도....‘
그러자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그의 쓸쓸한 속삭임에 메아리치듯이 아련하게~
‘미련한 사람. 왜 그렇게 바보 같아요.
내가 뭐라고...아무것도 잘해준 것이 없는 내가 뭐라고...
바보 같은 사람.
눈물이 많던 사람.
그래서 못난 사람.
그런 못난 사람을 사랑해버린 못난 내 사랑!‘
‘가끔씩은 누군가가 몹시도 보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런데 난 눈을 감고 있더라.
가끔씩은 지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런데 난 달리고 있더라.
어떤 날은 미치도록 누군가를 불러보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런데 난 입을 다물고 있더라.
어떤 날은 실컷 울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런데 난 웃고 있더라.
그런데 그 어느 날도 아닌 날인데도
자꾸 웃으면 웃어지고
슬퍼지면 울어지고
보고 싶으면 그리워지는 이유는 뭘까?
오늘이 그래.
때론 그리워도 해보고 설레어 보기도 해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웃기면 우스운 대로
살아가 보고 싶었어.
하지만 이젠 힘들 것 같아.
천기를 보니
곧 그것이 도래할 것 같아.
후후, 고마워. 유정아, 내 투정을 받아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