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수와의 일(2)
2.시간은 흐르고
시간은 빠르다. 참으로 빠르다. 나는 자신의 시간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을 마치고 취업을 하고 나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세월과 함께 때를 따라 아이들이 태어났고 세월은 더욱 흘러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이었을 것이다. 나도 흐르는 세월만큼 나이를 먹어 어느덧 사십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형수도 어느덧 40대 중반에서 후반을 향해 가고 있는 때쯤으로 기억된다. 어느덧 세월이 이십년 이상 흐른 셈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부모님은 여전히 직장에 다니셨다. 그러나 형님들이 학업을 마치고 계속 취업을 함에 따라 가정의 형편도 어느 정도 나이지기도 했고 어머님이 연로하시기도 하셔서 어머님은 더 이상 직장에 다니시지 않게 되었다. 형님들은 결혼 후 일년 정도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다가 그 후 분가를 했다. 형님 세분이 모두 그러셨다. 오직 나만 객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럴 기회를 갖지 않았었다. 형님 세분이 다 분가하여 살다보니 한동안은 부모님 두 분만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활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의 장래를 치른 후 형제들과 어머님이 모인 자리에서 사후 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 결론은 아버님이 남기신 얼마간의 자산을 정리하여 새로이 집을 얻고 이 집에 큰형님께서 들어와 사시는 것으로 되었다. 물론 어머님을 모시는 조건이다. 형수도 이에 대해서는 별 반대가 없었던 듯하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어머님을 모셔봤었고, 어머님이 연로하심에 따라 누군가가 모셔야할 형편이 되었고, 부수적으로 약간이긴 하나 집을 구입하는 데에 지원이 따랐으니, 특별히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머님과 형님 내외와 조카는 새로 집을 얻어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 간 후로는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 결혼도 서울에서 했고 직장도 서울에서 얻었다. 이것은 처음에는 집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나 생활의 거점 자체가 서울이다 보니 처음의 생각은 거의 없어졌음에도 서울에서 사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집에는 명절이나 휴가나 기일이나 생신 등의 특별한 날에만 가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 말고는 회사의 업무 때문에 출장으로 어머님이 계신 근처로 갈 일이 한달에 한번 꼴로 있었고 그럴 때면 나는 가능한 집에 들러 잠이라도 자고 가는 습관이 있었다. 저녁이야 일 때문에 갔으니 업무와 관계된 사람과 함께하고 잠은 가능한 한 어머님이 계신 곳에서 자려고 노력했었다. 그것이 연로하신 어머님께 대한 최소한의 예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런 경우에 어머님을 뵙게 되면 어머님은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님은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다. 어머님은 나를 만나면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셨던 모양이다. 거의 매번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찾게 되면 주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하시곤 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다른 형님들에 대한 이야기와 일가친척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형님과 형수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듣게 되었다. 특히 형수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님은 자세하게 하시는 편이었다. 그것은 반쯤은 형수에 대한 원망이 포함된 것이기도 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으나 형수가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아마 조카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뒤 얼마인가 지나서였을 것이다. 형님이 분가를 하고 난 뒤, 형님은 출근하시고 조카도 등교를 하고나면 낮에는 형수 혼자 계셨을 것이니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직장 경험을 갖고 계신 어머님이 먼저 형수에게 일을 갖기를 권유하셨던 모양이다. 두 분이 같이 살게 되었으나 형수는 여전히 직장엘 다녔다. 그것은 아직은 어머님이 정정하시기 때문에 낮에 집에 여자 둘이서 하루 종일 지낸다는 것 자체가 두 분 모두에게 스트레스였을 것이므로 형수가 낮에는 직장에 다니다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했을 것이다. 형수는 특별한 기술이 없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직업을 얻는 것이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처음 몇몇 군데는 제조회사에 다니면서 주로 단순 노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이들을 그만두고 식당에 나가게 되었다. 일이 너무 단조롭고 일에 비해 돈이 적다는 것이 이유라고 들었다. 처음에는 식당에 나가 주로 주방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 주 임무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카페 같은 곳을 다니게 된 듯하다. 카페라고 해야 형수가 그 나이에 홀에 있지는 않았을 테고, 주방에서 손님이 주문하는 안주거리를 만들어 서빙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언젠가 내가 다른 형수로부터 명절 때 가족들끼리 모였을 때, 동서들끼리 그 동안의 근황을 묻는 과정에서 우연히 듣게 된 것을 전해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는 순간에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40대의 형수
가정적이었던 형수의 생활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형수의 소식이야 어머님으로부터 간간히 듣는 것이 전부였고 소식이라고 해도 어머님 입장에서의 불만스런 것이 주였으므로 내가 특별히 개인적으로 형수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것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은 정말 과거 속에 묻혀버렸고 나는 더 이상 형수에게서 여자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머님이나 형수들이나 다 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처지에서 가능한 한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순히 갖고 있었는데 그치지 않고, 가족 간에 오해가 생기면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내가 한 가지 이야기해두고 싶은 것은 우리 집은 전통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내가 철딱서니 없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고1때 형수와 키스를 시도한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과성의 일이었고 그 외의 나의 생활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는 나 뿐 아니라 어머님이나 형님도 다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처음 형수가 제조업체가 아닌 식당을 나가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을 때는 당연히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당에서 홀에서 심부름을 하는 것은 사십대의 아줌마들이 항상 할 수 있는 일로서 간주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형수가 출근하는 곳이 식당이 아니라 카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형수는 식당에서 제법 오랫동안 일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일터의 성격이 식당에서 카페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모양이다. 형수 입장에서야 어차피 일 나가는 것은 똑 같고 미리 이야기해본들 도움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형수가 카페의 주인과 합의한 내용을 번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등등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형수는 좀 사근사근한 편이니 식당일을 하면서 알게 된 누군가가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일도 식당보다는 편하고 보수도 많다는 점 등을 빠뜨리지 않고 강조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디 식당과 카페가 같은 곳인가? 말이 카페이지 실은 맥줏집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대여섯 평 정도 되는 홀에 테이블이 두세 개 있고 주방 정도가 있는 작은 맥줏집 말이다. 가끔 양주를 찾는 손님도 있는! 이러한 곳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명절 때 형수들끼리 모여서 그 동안의 안부를 묻는 중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처음 이를 알게 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됨에 따른 위험성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자들이 술집을 가 본적이 없으니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이러한 중에 언제부터인가 형수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것은 습관이 된 모양이다. 늦은 귀가 시에는 입에서 술 냄새가 폴폴 나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것이 형님과 어머님과의 분노를 자아내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형수와 이들과의 불화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디서 술을 마셨느냐? 또는 왜 이리 늦었느냐 ? 물으면 식당일을 마치고 아줌마들과 한잔! 또는 집에 다 와서 집 앞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등과 같은 이유를 달았다고 한다. 서로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보니 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들렸을 것이고 이는 서로의 신뢰를 더욱 약화시키는 상태를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하겠는가? 처음 얼마동안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타이르기도 하고 싸워보기도 하고 야단도 쳐 보지만 이런 일은 언제든 칼자루를 쥔 쪽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세상사이지 않은가?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의 칼자루를 쥔 쪽은 형수이다. 서로 살만큼 살았고, 상대방에게 서로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가정을 유지시키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않은가? 등과 같은 합리화의 구실을 양자는 재빨리 찾게 마련이고, 나아가 어느덧 현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님과 어머님의 가슴 속의 응어리와는 상관없이 형수의 늦은 퇴근과 음주는 일상적인 일로 굳어져 간 모양이다.
나 역시 내가 집에 가끔 들러 형수를 보게 되거나 명절 때 형수를 보게 되면 실제로 형수가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우선 형수의 외양이 전과는 달리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선 머리 모양과 색깔이 크게 바뀌었다. 지금이야 머리에 물을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때는 머리에 물을 들이는 것은 정숙하지 못한 여자들이나 하는 짓으로 평가 받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사십대 중반의 가정주부가 이렇게 하고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화젯거리가 될 수 있었다. 하물며 우리 집에 서랴! 당연히 집에서는 난리가 났겠으나 형수는 내몰 라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옷차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가끔 내가 보는 것이긴 하지만 도대체 그 옷차림이란 것이 나의 기준으로 볼 때 현숙한 가정주부와의 옷차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카페에 나가 주방 일을 본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엄연한 가정주부가 아닌가? 그것도 신랑도 있고 아이도 멀쩡하니 대학에 다니고 있는......거기다 형수의 술 실력도 날이 갈수록 늘어 가는 듯했다. 어느 날이든가? 명절 때 가족들끼리 모여 음복을 할 때, 형수는 정종을 한잔 마신 후 양주를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집안의 막내로서 서울에 떨어져 산다는 이유로 계속 나와 살다보니 부모님을 한번도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형님들께 미안한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명절 때면 양주나 전통소주와 함께 먹을거리를 좀 준비를 해 가는 습관이 있었고 이런 것을 형님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친척들이 다녀간 뒤에는 형님들이 각자의 처가를 가기 전에 형수들에게도 술을 한잔씩 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를 즐기기 위해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역할이기도 했다. 처음에 나는 형수의 제안을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양주를 따 한잔씩 돌렸다. 이때 형수는 그 뒤 몇 잔을 더 마신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는 그 일을 그렇게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형수가 술을 좀 많이 마신다는 생각은 했었으나 명절 때라 그럴 수 있고 형님으로서 손아래 동서들에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은 형수의 생활 태도에 대해 어머님으로부터 불평스러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반복됨에 따라 형수에 대한 우려의 시각으로 바뀌게 된다. 형수가 우리와 나누는 대화 중 우연히 튀어나오는 이야기들은 형수가 술을 다른 남자(주로 손님들이겠으나)와 자주 마시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황을 즐기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단서를 자주 제공했었다. 그것은 나이트는 어디가 참으로 좋다거나 술은 무엇이 감칠맛이 있다거나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였으나 이런 내용이 가정주부, 그것도 형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나의 경험이 갖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이런 것들은 가정주부가 경험 없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이거나 들은 이야기를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직 경험한 자만이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 속에 묻혀 본인이 의식을 하지 못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리라.
이런 의문 속에서 형수를 관찰하고 있을 때쯤 나는 형수가 식당이 아니라 카페를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정보가 계속되고 실제로 내가 느끼는 형수의 생활 또한 그럴 개연성이 크다고 인지하면서부터 나는 형수의 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의 관심은 내가 고1때 형수에게 가졌던 관심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때는 호기심 많은 소년이 성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갖는 막연한 관심이었으나 이제는 형님의 가정을 좀 건실하게 지키기 위해 있을지도 모르는 파국을 막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만큼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형수가 어떤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일상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형님들이 계심에도 굳이 내가 나서게 된 것은 다른 두형님은 형수와 나이가 비슷하여 나서서 알아본다는 것이 형수에게 매우 부담스러울 수 있고 또 형수와 그런 대화를 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다른 형님들에 비해 내가 비교적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굳힌 나는 집에 들르게 되면 넌지시 어머님께 형수의 동향에 대해 유도 질문을 하게 된다. 당연히 형수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계신 어머님은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면 매우 자세하고도 상세하게 최근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신다. 나는 이런 정보를 다 듣고 또 형수와도 기회를 만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언제부턴가 형수나 나나 이제는 몇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억도 하고 있지 않은 듯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나는 확실히 그러한 상태에 있었고 형수도 그러한 것으로 나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외견 상 형수와 나에게는 벽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오히려 주로 내가 분위기를 띄우는 편이니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형수들께 노래방이나 나이트를 가자고 제안을 하곤 했다. 그러면 대체로 다른 형수들이 반대를 한다. 그때도 형수는 가고 싶어 하는 눈치를 주곤 했으나 가족들의 행사를 한두 사람의 의견만으로 집행을 할 수는 없으므로 말만 꺼내고 실천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러던 어느 날 나는 형수가 어떤 곳에서 일하는 지 어느 동네에서 일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업무 상 혹시 거기로 갈 기회가 있으면 가도 되느냐고 묻는다. 나도 형수와 술 한 잔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고생하는 형수를 위해 술 한 잔을 사주고 싶다고 한다. 형수도 내가 출장 때문에 한달에 한번 꼴로 어머님이 계신 T시로 오는 줄은 알고 있다. 그리고 대개는 하루 정도 어머님 집에서 머물고 가는 것을 알고 있다. 형수는 자연스럽게 좋다고 그런다. 그러면서 형수가 일하는 가계는 적당하지 않으니 근처의 다른 집에서 마시자고 그런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기회를 만들려고 는 하지 말고 일을 먼저 보고 난 뒤 시간이 되거든 연락을 하라고 그런다. 그러나 오기 전에는 미리 연락을 하란다. 일찍 빠져 나오려면 미리 이야기도 하고 사전에 조종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정을 잘 이해한다. 나는 그러마고 그러면서 전호번호를 묻고 형수는 내게 가르쳐 준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어느 날 형수에게 전화를 한다. 물론 출장이 있어서 T시로 내려갈 일이 있는 하루 전이다. 내일 그곳에 갈 예정인데 일이 일직 끝날 것 같은데, 같이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나 할 수 있느냐고. 형수는 그러마면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내려오거든 전화를 하라고 하면서......
시간은 빠르다. 참으로 빠르다. 나는 자신의 시간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을 마치고 취업을 하고 나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세월과 함께 때를 따라 아이들이 태어났고 세월은 더욱 흘러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이었을 것이다. 나도 흐르는 세월만큼 나이를 먹어 어느덧 사십대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형수도 어느덧 40대 중반에서 후반을 향해 가고 있는 때쯤으로 기억된다. 어느덧 세월이 이십년 이상 흐른 셈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부모님은 여전히 직장에 다니셨다. 그러나 형님들이 학업을 마치고 계속 취업을 함에 따라 가정의 형편도 어느 정도 나이지기도 했고 어머님이 연로하시기도 하셔서 어머님은 더 이상 직장에 다니시지 않게 되었다. 형님들은 결혼 후 일년 정도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다가 그 후 분가를 했다. 형님 세분이 모두 그러셨다. 오직 나만 객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럴 기회를 갖지 않았었다. 형님 세분이 다 분가하여 살다보니 한동안은 부모님 두 분만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활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의 장래를 치른 후 형제들과 어머님이 모인 자리에서 사후 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 결론은 아버님이 남기신 얼마간의 자산을 정리하여 새로이 집을 얻고 이 집에 큰형님께서 들어와 사시는 것으로 되었다. 물론 어머님을 모시는 조건이다. 형수도 이에 대해서는 별 반대가 없었던 듯하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어머님을 모셔봤었고, 어머님이 연로하심에 따라 누군가가 모셔야할 형편이 되었고, 부수적으로 약간이긴 하나 집을 구입하는 데에 지원이 따랐으니, 특별히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머님과 형님 내외와 조카는 새로 집을 얻어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 간 후로는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다. 결혼도 서울에서 했고 직장도 서울에서 얻었다. 이것은 처음에는 집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었으나 생활의 거점 자체가 서울이다 보니 처음의 생각은 거의 없어졌음에도 서울에서 사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집에는 명절이나 휴가나 기일이나 생신 등의 특별한 날에만 가게 되었다. 이러한 경우 말고는 회사의 업무 때문에 출장으로 어머님이 계신 근처로 갈 일이 한달에 한번 꼴로 있었고 그럴 때면 나는 가능한 집에 들러 잠이라도 자고 가는 습관이 있었다. 저녁이야 일 때문에 갔으니 업무와 관계된 사람과 함께하고 잠은 가능한 한 어머님이 계신 곳에서 자려고 노력했었다. 그것이 연로하신 어머님께 대한 최소한의 예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런 경우에 어머님을 뵙게 되면 어머님은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님은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다. 어머님은 나를 만나면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셨던 모양이다. 거의 매번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찾게 되면 주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하시곤 했다.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다른 형님들에 대한 이야기와 일가친척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형님과 형수에 대한 이야기도 당연히 듣게 되었다. 특히 형수에 대한 이야기를 어머님은 자세하게 하시는 편이었다. 그것은 반쯤은 형수에 대한 원망이 포함된 것이기도 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으나 형수가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아마 조카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뒤 얼마인가 지나서였을 것이다. 형님이 분가를 하고 난 뒤, 형님은 출근하시고 조카도 등교를 하고나면 낮에는 형수 혼자 계셨을 것이니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직장 경험을 갖고 계신 어머님이 먼저 형수에게 일을 갖기를 권유하셨던 모양이다. 두 분이 같이 살게 되었으나 형수는 여전히 직장엘 다녔다. 그것은 아직은 어머님이 정정하시기 때문에 낮에 집에 여자 둘이서 하루 종일 지낸다는 것 자체가 두 분 모두에게 스트레스였을 것이므로 형수가 낮에는 직장에 다니다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했을 것이다. 형수는 특별한 기술이 없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직업을 얻는 것이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처음 몇몇 군데는 제조회사에 다니면서 주로 단순 노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이들을 그만두고 식당에 나가게 되었다. 일이 너무 단조롭고 일에 비해 돈이 적다는 것이 이유라고 들었다. 처음에는 식당에 나가 주로 주방 일을 거들어 주는 것이 주 임무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카페 같은 곳을 다니게 된 듯하다. 카페라고 해야 형수가 그 나이에 홀에 있지는 않았을 테고, 주방에서 손님이 주문하는 안주거리를 만들어 서빙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언젠가 내가 다른 형수로부터 명절 때 가족들끼리 모였을 때, 동서들끼리 그 동안의 근황을 묻는 과정에서 우연히 듣게 된 것을 전해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듣는 순간에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40대의 형수
가정적이었던 형수의 생활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형수의 소식이야 어머님으로부터 간간히 듣는 것이 전부였고 소식이라고 해도 어머님 입장에서의 불만스런 것이 주였으므로 내가 특별히 개인적으로 형수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것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은 정말 과거 속에 묻혀버렸고 나는 더 이상 형수에게서 여자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어머님이나 형수들이나 다 같이 나이가 들어가는 처지에서 가능한 한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면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단순히 갖고 있었는데 그치지 않고, 가족 간에 오해가 생기면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내가 한 가지 이야기해두고 싶은 것은 우리 집은 전통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내가 철딱서니 없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고1때 형수와 키스를 시도한 적은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과성의 일이었고 그 외의 나의 생활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이는 나 뿐 아니라 어머님이나 형님도 다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처음 형수가 제조업체가 아닌 식당을 나가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을 때는 당연히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당에서 홀에서 심부름을 하는 것은 사십대의 아줌마들이 항상 할 수 있는 일로서 간주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형수가 출근하는 곳이 식당이 아니라 카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형수는 식당에서 제법 오랫동안 일을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일터의 성격이 식당에서 카페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모양이다. 형수 입장에서야 어차피 일 나가는 것은 똑 같고 미리 이야기해본들 도움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형수가 카페의 주인과 합의한 내용을 번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등등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형수는 좀 사근사근한 편이니 식당일을 하면서 알게 된 누군가가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일도 식당보다는 편하고 보수도 많다는 점 등을 빠뜨리지 않고 강조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디 식당과 카페가 같은 곳인가? 말이 카페이지 실은 맥줏집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대여섯 평 정도 되는 홀에 테이블이 두세 개 있고 주방 정도가 있는 작은 맥줏집 말이다. 가끔 양주를 찾는 손님도 있는! 이러한 곳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명절 때 형수들끼리 모여서 그 동안의 안부를 묻는 중에 우연히 알게 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처음 이를 알게 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됨에 따른 위험성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자들이 술집을 가 본적이 없으니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이러한 중에 언제부터인가 형수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고 어느덧 그것은 습관이 된 모양이다. 늦은 귀가 시에는 입에서 술 냄새가 폴폴 나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것이 형님과 어머님과의 분노를 자아내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형수와 이들과의 불화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디서 술을 마셨느냐? 또는 왜 이리 늦었느냐 ? 물으면 식당일을 마치고 아줌마들과 한잔! 또는 집에 다 와서 집 앞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등과 같은 이유를 달았다고 한다. 서로 믿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보니 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들렸을 것이고 이는 서로의 신뢰를 더욱 약화시키는 상태를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하겠는가? 처음 얼마동안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을 타이르기도 하고 싸워보기도 하고 야단도 쳐 보지만 이런 일은 언제든 칼자루를 쥔 쪽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세상사이지 않은가?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의 칼자루를 쥔 쪽은 형수이다. 서로 살만큼 살았고, 상대방에게 서로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가정을 유지시키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않은가? 등과 같은 합리화의 구실을 양자는 재빨리 찾게 마련이고, 나아가 어느덧 현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님과 어머님의 가슴 속의 응어리와는 상관없이 형수의 늦은 퇴근과 음주는 일상적인 일로 굳어져 간 모양이다.
나 역시 내가 집에 가끔 들러 형수를 보게 되거나 명절 때 형수를 보게 되면 실제로 형수가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우선 형수의 외양이 전과는 달리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선 머리 모양과 색깔이 크게 바뀌었다. 지금이야 머리에 물을 들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 때는 머리에 물을 들이는 것은 정숙하지 못한 여자들이나 하는 짓으로 평가 받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사십대 중반의 가정주부가 이렇게 하고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화젯거리가 될 수 있었다. 하물며 우리 집에 서랴! 당연히 집에서는 난리가 났겠으나 형수는 내몰 라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옷차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가끔 내가 보는 것이긴 하지만 도대체 그 옷차림이란 것이 나의 기준으로 볼 때 현숙한 가정주부와의 옷차림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카페에 나가 주방 일을 본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엄연한 가정주부가 아닌가? 그것도 신랑도 있고 아이도 멀쩡하니 대학에 다니고 있는......거기다 형수의 술 실력도 날이 갈수록 늘어 가는 듯했다. 어느 날이든가? 명절 때 가족들끼리 모여 음복을 할 때, 형수는 정종을 한잔 마신 후 양주를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집안의 막내로서 서울에 떨어져 산다는 이유로 계속 나와 살다보니 부모님을 한번도 모시지 못하였으므로 형님들께 미안한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명절 때면 양주나 전통소주와 함께 먹을거리를 좀 준비를 해 가는 습관이 있었고 이런 것을 형님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친척들이 다녀간 뒤에는 형님들이 각자의 처가를 가기 전에 형수들에게도 술을 한잔씩 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대화를 즐기기 위해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나의 역할이기도 했다. 처음에 나는 형수의 제안을 오히려 반가워하면서 양주를 따 한잔씩 돌렸다. 이때 형수는 그 뒤 몇 잔을 더 마신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는 그 일을 그렇게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형수가 술을 좀 많이 마신다는 생각은 했었으나 명절 때라 그럴 수 있고 형님으로서 손아래 동서들에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은 형수의 생활 태도에 대해 어머님으로부터 불평스러운 이야기를 듣는 것이 반복됨에 따라 형수에 대한 우려의 시각으로 바뀌게 된다. 형수가 우리와 나누는 대화 중 우연히 튀어나오는 이야기들은 형수가 술을 다른 남자(주로 손님들이겠으나)와 자주 마시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황을 즐기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 단서를 자주 제공했었다. 그것은 나이트는 어디가 참으로 좋다거나 술은 무엇이 감칠맛이 있다거나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였으나 이런 내용이 가정주부, 그것도 형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다. 나의 경험이 갖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이런 것들은 가정주부가 경험 없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이거나 들은 이야기를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직 경험한 자만이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 속에 묻혀 본인이 의식을 하지 못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리라.
이런 의문 속에서 형수를 관찰하고 있을 때쯤 나는 형수가 식당이 아니라 카페를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정보가 계속되고 실제로 내가 느끼는 형수의 생활 또한 그럴 개연성이 크다고 인지하면서부터 나는 형수의 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의 관심은 내가 고1때 형수에게 가졌던 관심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때는 호기심 많은 소년이 성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갖는 막연한 관심이었으나 이제는 형님의 가정을 좀 건실하게 지키기 위해 있을지도 모르는 파국을 막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만큼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선 형수가 어떤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일상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형님들이 계심에도 굳이 내가 나서게 된 것은 다른 두형님은 형수와 나이가 비슷하여 나서서 알아본다는 것이 형수에게 매우 부담스러울 수 있고 또 형수와 그런 대화를 하는 것도 부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다른 형님들에 비해 내가 비교적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굳힌 나는 집에 들르게 되면 넌지시 어머님께 형수의 동향에 대해 유도 질문을 하게 된다. 당연히 형수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계신 어머님은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면 매우 자세하고도 상세하게 최근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신다. 나는 이런 정보를 다 듣고 또 형수와도 기회를 만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언제부턴가 형수나 나나 이제는 몇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억도 하고 있지 않은 듯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나는 확실히 그러한 상태에 있었고 형수도 그러한 것으로 나는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외견 상 형수와 나에게는 벽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오히려 주로 내가 분위기를 띄우는 편이니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형수들께 노래방이나 나이트를 가자고 제안을 하곤 했다. 그러면 대체로 다른 형수들이 반대를 한다. 그때도 형수는 가고 싶어 하는 눈치를 주곤 했으나 가족들의 행사를 한두 사람의 의견만으로 집행을 할 수는 없으므로 말만 꺼내고 실천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러던 어느 날 나는 형수가 어떤 곳에서 일하는 지 어느 동네에서 일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업무 상 혹시 거기로 갈 기회가 있으면 가도 되느냐고 묻는다. 나도 형수와 술 한 잔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고생하는 형수를 위해 술 한 잔을 사주고 싶다고 한다. 형수도 내가 출장 때문에 한달에 한번 꼴로 어머님이 계신 T시로 오는 줄은 알고 있다. 그리고 대개는 하루 정도 어머님 집에서 머물고 가는 것을 알고 있다. 형수는 자연스럽게 좋다고 그런다. 그러면서 형수가 일하는 가계는 적당하지 않으니 근처의 다른 집에서 마시자고 그런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기회를 만들려고 는 하지 말고 일을 먼저 보고 난 뒤 시간이 되거든 연락을 하라고 그런다. 그러나 오기 전에는 미리 연락을 하란다. 일찍 빠져 나오려면 미리 이야기도 하고 사전에 조종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정을 잘 이해한다. 나는 그러마고 그러면서 전호번호를 묻고 형수는 내게 가르쳐 준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어느 날 형수에게 전화를 한다. 물론 출장이 있어서 T시로 내려갈 일이 있는 하루 전이다. 내일 그곳에 갈 예정인데 일이 일직 끝날 것 같은데, 같이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나 할 수 있느냐고. 형수는 그러마면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내려오거든 전화를 하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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