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속에 잠들다 - 최종회
그날 이후 내 관사 생활은 마치 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게 흘러갔다.
대놓고 섹스를 자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육체를 알아버린 둘은 둘만의 비밀 속에서 불륜의 싹을 빠르게 키우고 있었다.
김 장군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보는 순간마다 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그녀는 나만큼 그렇게 안절부절 하지는 않았다.
여러 이유로 김 장군이 관사를 비우는 날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접근은 눈에 띄게 노골적이었지만, 하루 하루를 긴장 속에서 지내는 내 입장에서는 그런 그녀의 도발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에, 외면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그녀의 눈빛은 열정을 더해갔다.
그녀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여러 번 돌렸지만, 그러나 그녀의 그런 자제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린 더 큰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접근을 꺼려하자, 그녀는 그것이 관사 내에서의 거부라고 생각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외출 중에 노골적인 접촉이 있었고, 그것마저도 피하는 것은 내 젊은 혈기와 육욕의 유혹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럴 때면 그녀와 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로 차 안이나 아니면 외곽의 모텔 등을 이용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이러한 관계의 무모함과 허탈함에 쓰디쓴 뒷맛을 느끼기도 했고, 더욱이 김 장군의 보살핌에 대한 배신이라는 도덕적 자괴마저 들어 사모와의 관계가 더욱 더 힘겹게 느껴져 갔다.
그 사이 한번의 겨울과 또 한번의 여름이 지났다.
매 방학 때면 어김없이 두 남매가 내려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고, 여름이 지나면서 김 장군은 마침내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을 했다.
나도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다 진행되는 것만 같아 편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사모와의 관계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패턴이 나름대로 생겼고,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타성 같은 것도 붙어 무감각 해졌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이었다.
12월 24일 제대 명령을 받은 바로 그 날이었다.
국방부로 보직이 옮겨지게 된 김 장군이 나를 불렀다.
“최 병장! 그간 수고가 많았네. 특히 내 집사람의 수족이 되어 여러모로 힘 들었을 텐데, 잘 참고 임무를 잘 완수해 줘서 고맙네”
김 장군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장군님, 그건 부하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특히, 저도 장군님의 배려 덕분에 좋은 경험도 많이 했고, 배운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장군의 의사를 거역할 수는 없었고, 봉투를 받아 들자, 김 장군은 나중에 내가 제대를 하면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봉투에는 수표와 편지가 같이 들어 있었다.
그 이후 김 장군은 부대 원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전출을 했고, 난 나머지 군대 생활을 영내에서 말년 병장으로서 편하게 지내다가, 제대 휴가를 포함해서 일주일 먼저 제대를 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시외 버스 안에서, 장군이 건내준 봉투를 꺼내 열었다.
‘최 경수 병장, 그간의 최 병장의 노고에 감사 드리며, 더욱이 내 아내를 여러모로 아끼고…’
이건 충격이었다.
김 장군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 안으면 읽어 내려간 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김 장군의 성기능 불구와 젊은 아내에 대한 배려가 어우러져 자기는 묵인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리고 오히려 젊은 내가 왜곡된 성에 물들지 말아달라는, 그렇게 되면 자기가 도덕적인 죄를 짓는 것이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영란이를 친 동생이상으로 잘 보살펴주고, 공부도 많이 도와줘서 사의를 표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마음 속이 착잡해졌다.
과연 사랑과 섹스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나? 하는 의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흔히들 사람들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표현들을 한다.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에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하는 거라고도 얘기한다.
그렇다면, 정신적 사랑이 육체적 사랑보다 우선하는 것이란 얘기다.
정신적 사랑을 확인하고 더욱 견고히 하는 것으로의 육체적 사랑을 얘기하지만, 살면서 정신적 사랑 없이 육체적 사랑만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육체적 사랑은 동물적 유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감정과 욕망의 동물인 인간은 단지 말초적 즐거움으로의 육체적 사랑, 즉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정신적 사랑 없이 섹스로부터 시작된 정신적 사랑은 없는가?
아니다…
섹스로 시작해서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요 사랑이다.
그렇다면, 섹스는 단순히 정신적 사랑의 조미료가 아니라, 정신적 사랑을 유도하기도 하고 더욱 견고하게도 하는 수단이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실체가 아닌 것이요 어쩌면 하나의 실체의 다른 모습이요, 다른 표현은 아닌가?
정신적 사랑이 있기에 육체적 사랑이 합리화 되는 것인가?
육체적 사랑을 느끼고자 하는 대상과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이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혜경이 누나와 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연희씨와의 관계는?
그리고 김 교수와의 관계는?
더불어 그간의 여성들과의 그 모든 관계는 어떤 것인가?
난 한번도 돈으로 여자를 사 본적은 없었다.
물론 하루 밤 뜨내기 사랑으로 끝난 여성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들에게 있어서의 나의 존재는 또 어떤 것이었나?
그녀들은 나를 사랑했는가?
그저 그녀들도 육체적 환희만을 위해 나와 관계를 맺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게 육체적인 사랑이든 정신적인 사랑이든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종의 행복감 같은 것이 생기고 그러한 감정들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행복감이 정신의 일종인 이상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정도의 차이일 뿐, 확연히 구분되어 분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죤 스튜어트 밀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를 가슴에 담고 평생을 살았고, 결국은 친구가 죽고 나서 그녀와의 수 십년 간의 사랑을 실현시켰다고 한다.
그런 사랑은 또 무엇인가?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원했던 것이 그녀와의 섹스였을까?
아니면, 그저 함께 지낼 수 있는 그 모든 것이었을까?
그녀가 그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여성이었을까?
사랑과 결혼은 어떤 관계가 있나?
성인이 된 남녀가 사랑을 하면서 다다르는 결혼이라고 하는 관계의 실체는 또 무엇인가?
사랑하기에 결혼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중매를 통해 하는 결혼이나, 예전의 우리네 조상들이 서로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하는 결혼은 또 무엇인가?
결국 결혼이란 사회적인 결합과 결속의 의미가 크다는 얘긴가?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의 실체가 그저 사회적인 결속이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혼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점점 희석되고, 결혼을 한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을 불륜이랄 지 부도덕으로 치부하는 것은 더욱 더 타당성을 상실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결혼은 대외적으로는 사회적인 결속의 선언이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서로의 사랑에 대한 확인이요 선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한 사람들의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요 배반이 되는 셈인데…
서로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사랑이 식거나 사라졌고, 그 이후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배신이요 배반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누가 누구와 하든 지 다 가능한 것이요, 단지 그것이 어느 경우에는 그 경우에 맞는 인륜적 가치관으로 인정 받을 수 없을 뿐이지, 이미 존재하기에 현실이며 그래서 진실인 것이다.
내가 내 사랑을 지키지 못함은 결국 내 사랑의 부족이요 내 사랑의 허약함인 것이다.
내가 나약한 사랑으로 상대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소유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은 구속이 되고 속박이 되는…
김 장군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이미 내가 이해하는 속된 사랑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전율 같은 감동이 몰아쳐 왔다.
버스 안에서 난 김 장군의 장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사랑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지만, 난 김 장군의 행간의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진정한 사랑.
숭고한 사랑.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
난 그렇게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치기에 옆집 아줌마와, 그것도 격렬히 거부하는 아줌마와 우격다짐으로 섹스를 했고, 처음 이성에 눈이 뜨는 순진한 누나와 순수라는 허명을 앞자락에 드리우고 관계를 가졌고,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많은 여자들…
난 사랑이 그저 즐거운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사랑에는 슬픈 것도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런 슬픔 속에는 그것을 극복했을 때 어느 것보다 큰 전혀 다른 모습의 즐거움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이제서야 비로서 깨달았다.
멀리 차창으로 지난 시간들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픔과 고통도 있고, 즐거움과 환희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인가 눈이 내리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난 이미 눈이 제법 많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있음을 알았고…
나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결국 내가 주인공이 아니요, 내가 있던 없던 세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할 거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두를 것이 없었다.
세상이 날 위해 그저 버스의 한 귀퉁이 좌석을 내 주었듯이, 내 삶 속의 사랑도 세상이 나에게 배려해 준 것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리라…
---------------------- 끝 -------------------------
ps) 지금까지 별로 재밌지도 않은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랑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써볼려고 했는데, 필력이 짧아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좀 더 나은 글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대놓고 섹스를 자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육체를 알아버린 둘은 둘만의 비밀 속에서 불륜의 싹을 빠르게 키우고 있었다.
김 장군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보는 순간마다 난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그녀는 나만큼 그렇게 안절부절 하지는 않았다.
여러 이유로 김 장군이 관사를 비우는 날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의 접근은 눈에 띄게 노골적이었지만, 하루 하루를 긴장 속에서 지내는 내 입장에서는 그런 그녀의 도발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에, 외면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그녀의 눈빛은 열정을 더해갔다.
그녀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여러 번 돌렸지만, 그러나 그녀의 그런 자제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린 더 큰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접근을 꺼려하자, 그녀는 그것이 관사 내에서의 거부라고 생각했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외출 중에 노골적인 접촉이 있었고, 그것마저도 피하는 것은 내 젊은 혈기와 육욕의 유혹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럴 때면 그녀와 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로 차 안이나 아니면 외곽의 모텔 등을 이용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이러한 관계의 무모함과 허탈함에 쓰디쓴 뒷맛을 느끼기도 했고, 더욱이 김 장군의 보살핌에 대한 배신이라는 도덕적 자괴마저 들어 사모와의 관계가 더욱 더 힘겹게 느껴져 갔다.
그 사이 한번의 겨울과 또 한번의 여름이 지났다.
매 방학 때면 어김없이 두 남매가 내려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고, 여름이 지나면서 김 장군은 마침내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을 했다.
나도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다 진행되는 것만 같아 편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사모와의 관계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패턴이 나름대로 생겼고,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타성 같은 것도 붙어 무감각 해졌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이었다.
12월 24일 제대 명령을 받은 바로 그 날이었다.
국방부로 보직이 옮겨지게 된 김 장군이 나를 불렀다.
“최 병장! 그간 수고가 많았네. 특히 내 집사람의 수족이 되어 여러모로 힘 들었을 텐데, 잘 참고 임무를 잘 완수해 줘서 고맙네”
김 장군의 손에는 하얀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장군님, 그건 부하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특히, 저도 장군님의 배려 덕분에 좋은 경험도 많이 했고, 배운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장군의 의사를 거역할 수는 없었고, 봉투를 받아 들자, 김 장군은 나중에 내가 제대를 하면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봉투에는 수표와 편지가 같이 들어 있었다.
그 이후 김 장군은 부대 원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전출을 했고, 난 나머지 군대 생활을 영내에서 말년 병장으로서 편하게 지내다가, 제대 휴가를 포함해서 일주일 먼저 제대를 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시외 버스 안에서, 장군이 건내준 봉투를 꺼내 열었다.
‘최 경수 병장, 그간의 최 병장의 노고에 감사 드리며, 더욱이 내 아내를 여러모로 아끼고…’
이건 충격이었다.
김 장군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 안으면 읽어 내려간 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김 장군의 성기능 불구와 젊은 아내에 대한 배려가 어우러져 자기는 묵인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리고 오히려 젊은 내가 왜곡된 성에 물들지 말아달라는, 그렇게 되면 자기가 도덕적인 죄를 짓는 것이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영란이를 친 동생이상으로 잘 보살펴주고, 공부도 많이 도와줘서 사의를 표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마음 속이 착잡해졌다.
과연 사랑과 섹스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나? 하는 의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흔히들 사람들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표현들을 한다.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에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하는 거라고도 얘기한다.
그렇다면, 정신적 사랑이 육체적 사랑보다 우선하는 것이란 얘기다.
정신적 사랑을 확인하고 더욱 견고히 하는 것으로의 육체적 사랑을 얘기하지만, 살면서 정신적 사랑 없이 육체적 사랑만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육체적 사랑은 동물적 유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감정과 욕망의 동물인 인간은 단지 말초적 즐거움으로의 육체적 사랑, 즉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정신적 사랑 없이 섹스로부터 시작된 정신적 사랑은 없는가?
아니다…
섹스로 시작해서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요 사랑이다.
그렇다면, 섹스는 단순히 정신적 사랑의 조미료가 아니라, 정신적 사랑을 유도하기도 하고 더욱 견고하게도 하는 수단이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실체가 아닌 것이요 어쩌면 하나의 실체의 다른 모습이요, 다른 표현은 아닌가?
정신적 사랑이 있기에 육체적 사랑이 합리화 되는 것인가?
육체적 사랑을 느끼고자 하는 대상과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이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될 수도 있는 것은 아닌가?
혜경이 누나와 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연희씨와의 관계는?
그리고 김 교수와의 관계는?
더불어 그간의 여성들과의 그 모든 관계는 어떤 것인가?
난 한번도 돈으로 여자를 사 본적은 없었다.
물론 하루 밤 뜨내기 사랑으로 끝난 여성도 있었다. 그러면 그녀들에게 있어서의 나의 존재는 또 어떤 것이었나?
그녀들은 나를 사랑했는가?
그저 그녀들도 육체적 환희만을 위해 나와 관계를 맺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게 육체적인 사랑이든 정신적인 사랑이든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종의 행복감 같은 것이 생기고 그러한 감정들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행복감이 정신의 일종인 이상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정도의 차이일 뿐, 확연히 구분되어 분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철학자였던, 죤 스튜어트 밀은 친구의 아내를 사랑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를 가슴에 담고 평생을 살았고, 결국은 친구가 죽고 나서 그녀와의 수 십년 간의 사랑을 실현시켰다고 한다.
그런 사랑은 또 무엇인가?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원했던 것이 그녀와의 섹스였을까?
아니면, 그저 함께 지낼 수 있는 그 모든 것이었을까?
그녀가 그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여성이었을까?
사랑과 결혼은 어떤 관계가 있나?
성인이 된 남녀가 사랑을 하면서 다다르는 결혼이라고 하는 관계의 실체는 또 무엇인가?
사랑하기에 결혼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중매를 통해 하는 결혼이나, 예전의 우리네 조상들이 서로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하는 결혼은 또 무엇인가?
결국 결혼이란 사회적인 결합과 결속의 의미가 크다는 얘긴가?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의 실체가 그저 사회적인 결속이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혼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점점 희석되고, 결혼을 한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을 불륜이랄 지 부도덕으로 치부하는 것은 더욱 더 타당성을 상실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결혼은 대외적으로는 사회적인 결속의 선언이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서로의 사랑에 대한 확인이요 선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한 사람들의 자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요 배반이 되는 셈인데…
서로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사랑이 식거나 사라졌고, 그 이후에 다른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배신이요 배반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누가 누구와 하든 지 다 가능한 것이요, 단지 그것이 어느 경우에는 그 경우에 맞는 인륜적 가치관으로 인정 받을 수 없을 뿐이지, 이미 존재하기에 현실이며 그래서 진실인 것이다.
내가 내 사랑을 지키지 못함은 결국 내 사랑의 부족이요 내 사랑의 허약함인 것이다.
내가 나약한 사랑으로 상대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라, 소유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은 구속이 되고 속박이 되는…
김 장군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이미 내가 이해하는 속된 사랑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전율 같은 감동이 몰아쳐 왔다.
버스 안에서 난 김 장군의 장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사랑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지만, 난 김 장군의 행간의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다.
진정한 사랑.
숭고한 사랑.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
난 그렇게 사랑을 배우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치기에 옆집 아줌마와, 그것도 격렬히 거부하는 아줌마와 우격다짐으로 섹스를 했고, 처음 이성에 눈이 뜨는 순진한 누나와 순수라는 허명을 앞자락에 드리우고 관계를 가졌고,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외의 많은 여자들…
난 사랑이 그저 즐거운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사랑에는 슬픈 것도 있는 것임을, 그리고 그런 슬픔 속에는 그것을 극복했을 때 어느 것보다 큰 전혀 다른 모습의 즐거움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이제서야 비로서 깨달았다.
멀리 차창으로 지난 시간들이 스크린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픔과 고통도 있고, 즐거움과 환희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인가 눈이 내리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난 이미 눈이 제법 많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있음을 알았고…
나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결국 내가 주인공이 아니요, 내가 있던 없던 세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할 거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두를 것이 없었다.
세상이 날 위해 그저 버스의 한 귀퉁이 좌석을 내 주었듯이, 내 삶 속의 사랑도 세상이 나에게 배려해 준 것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리라…
---------------------- 끝 -------------------------
ps) 지금까지 별로 재밌지도 않은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랑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써볼려고 했는데, 필력이 짧아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좀 더 나은 글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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