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나의 장모님... (4)
*** 영국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바람에 몇일 자리를 비워서 글이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술은 흔히 사람을 조금은 흐트러지게 하고 또 조금은 감성적이 되게 하는 효력이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영미는 나를 부르면서도 ’씨’ 라고도 했다가, ‘오빠’ 라고도 했다가, ‘아저씨’ 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그건 술 때문이었다.
“있잖아요... 우리 엄마 매력적이지요?”
입술 끝에 미소를 걸친 채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어보는 영미의 얼굴에서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엄마... 대단히 멋있는 여자예요... 그리고 똑똑하고...”
문득 그녀의 자조적인 표현 속에 어떤 갈등이 숨어있음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영미가 직접 얘기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알아 낼 수가 없었다.
단지 느낀 것은 영미가 서둘러서 날 보자고 한데에는 뭔가 사연이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 그녀는 그것을 나에게 얘기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궁금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을 뒤늦게 앎으로 해서 갖게 되는 또 다른 슬픔을 느끼기도 싫었다.
술을 한 병 다 비울 때 즈음에는 영미도 많이 취했고 나도 많이 취했다.
‘謨事 在人이요 成事 在天이라’ 고 했다. 이제는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 어떻게 되든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라는 생각을 하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고 여유가 생기는 듯 했다.
“성수씨... 한 잔 더 하고 싶은데요...”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을 때 그녀가 불쑥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래 어짜피 나도 그 정도의 술은 오히려 더 정신이 맑아지니, 한잔 더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둘은 젊은 사람들답게 호텔에 있는 나이트를 찾아 들었다, 그곳에는 술이 있었고, 음악과 춤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호텔을 나서면서 시간이 2시를 넘었다는 것을 알았고, 난 서둘러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송 여사... 아니 송 혜진이 있는 그 모녀의 집.
지점장은 내가 이틀씩 결근을 해도 아무런 질책이 없었다.
상황이 거의 확실해 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먼저 만나자고 했던 영미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 헤어지고 나자 더욱 의구심이 일었고 문득 언젠가 송 여사와 함께 만난 적이 있던 송 여사의 친구 김 정림이라는 여자가 생각났다. 송 여사가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사채 업을 할 때 만나서 10년이 넘게 친구처럼 지내는 사채 업자였다.
“김 여사님?”
어렵사리 그녀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해서 통화가 되었다. 저녁때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자 무엇 때문에 내가 그녀를 만나기로 했는지에 대한 의미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송 여사에 대한 주변 얘기들을 들으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떤 얘기를 어떻게 듣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또 왜 알려고 하느냐 하는 것도 불분명했다. 머리 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그녀가 잘 아는 식당인 듯 내가 조금 늦게 도착을 하자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종업들이 날 확인하자 마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안내를 했고, 조명이 은은한 방안에 그녀는 조용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손가락 끝에 두드러지게 발라져 있는 보라색의 메니큐어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걸쳐있는 하얀 담배는 그녀의 짙은 보라색 투피스와 어울려 강한 자극으로 비추어졌다.
사람을 상대로 돈을 만지는 사람들의 특유의 부드러움과 현란함 속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김 정림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흔히들 저녁 식사로 사람들을 만나면, 밥 보다는 역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송 여사보다 1살인가가 많은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송 여사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얼굴의 주름살도 제법 눈에 보였고, 몸도 전반적으로 중년의 살집이 있는 그런 몸매였다.
“송 여사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요?”
그녀는 내가 자기를 왜 만나자고 하는 지 이유도 모른 채 저녁 약속을 받아주었었다.
“네... 적지않게 벌었습니다”
얘기를 시작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지만, 어짜피 자리를 만든 이유는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였다.
“송 여사, 대단한 여자지요”
그렇게 우리는 얘기를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서 송 여사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었고, 그녀의 재산 형성과정의 이야기도 상당히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시련의 과정을 겪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김 대리님. 송 여사하고 좀 특별한 관계지요?”
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어떤 말을 준비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숨기고 싶다기 보다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으나, 왠지 그 이야기를 피해가면 어떤 사실에 접근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네... 몇 개월 됐습니다”
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조금씩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송 여사가 다른 얘기 없었어요?......”
“사실은 내가 일찍 김 대리님한테 얘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송 여사와 김 대리님 같은 관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었다.
가슴 한 켠에 ‘혹시나...’ 하는 의문으로만 남아 있던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재밌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어이가 없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눈물이 흐르려고 했지만, 울 수가 없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내 어리석음에... 내 치기에... 내 멍청한 순진함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난 웃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군요... 세상이라는 게 그런 것이군요...”
그렇게 참았는데, 마지막으로 웃음을 멈추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김 대리님...”
“얼마나 술을 마셔야, 머리 속이 하얗게 되지요?”
그녀는 차마 내 모습을 보기가 민망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로 암갈색의 위스키가 찰랑거리고 있는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이성을 찾아갔다.
이건 배신도 아니다. 서로 사랑하다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기에는 내 방자한 청춘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김 여사님... 오늘 저 좀 망가져도 되겠습니까?”
난 왠지 짐짓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것은 술을 먹으면서도 머리 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정신은 점점 맑아져 갔다.
“그런데요... 김 여사님, 난 송 여사... 아니 혜진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짐짓 떠보기 위해서라도 얘기를 해보자 생각했지만, 실상 말을 하고 보니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기는 그런 믿음없이 어찌 여행도 같이 다니고 밤을 새워가며 섹스를 하고 하겠는가...
“어떤 모습의 송 여사를 사랑하는 건가요?”
김 여사는 한참동안을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문득 뜬금없이 질문을 해왔다.
‘어떤 모습이라......’
“답니다. 다. 모든 면을 사랑합니다”
치기의 한계를 벗어나 오기였다. 사랑의 배반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그렇게 술을 마셨고, 꽤 거나하게 마셨다고 느껴질 때쯤이 되어서야 내 가슴에 있던 모든 생각을 그녀에게 토해내듯 얘기했고, 그녀는 조용히 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다음날 회사에서는 내부 감사가 이루어졌고, 그 정신 없는 와중에 어떻게 일주일이 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영미에게서 다시 전화를 받은 것은 그 주의 토요일 오후였다.
거리에는 은행나무잎이 깔리듯 떨어져있어 마치 도로를 노란 물감으로 채색한 듯 보였고, 차가 달리면서 바람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바람에 두둥실 떠올라 멀리 날라갔다 가라앉곤 했다.
“잘 지냈니?”
내가 담담하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영미는 다소 의외라는 듯 ‘네에’라고 말하면서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좌절의 풍랑 속에서 허덕이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걱정 많이 했어요...”
영미는 그렇게 솔직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줄 곳 영미는 내 기색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짜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니가 염려해줄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어”
왠지 영미의 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기에 내가 오히려 더 머쓱해졌다.
갑자기 두 번째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술을 마시면서 영미는 내내 뭔가를 얘기하려고 했었고, 난 그 의미를 김 여사를 만나서 알았지만, 영미는 아직도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영미야, 너 내가 어머니한테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나?”
영미는 무척 놀라는 표정이었다.
기만을 한 것은 송 여사였지, 영미가 아니었다.
“영미야... 우리 오늘 한잔 하자”
난 영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영미를 데리고 차를 미사리로 몰았다.
휘황한 불빛 속에 즐비한 카페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이미 무대에서 사라진 쟁쟁했던 그때 그 가수들의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추억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
영미는 많은 얘기를 했다.
“성수씨... 나 앞으로 성수씨라고 부를래요”
‘앞으로’라고 했다.
“영미... 난 니 어머니랑 실상이야 어쨌든 연인 사이였어. 지금은 아니겠지만...”
나도 영미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 이후의 복잡한 상황은 이미 내 이성의 범주밖에 있었다.
“난 상관없어요. 성수씨만 날 용서해주고 이해해 주면...”
“어머니의 죄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있는 거니?”
난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영미는 대답할 의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 자격은 있는 거지요?’ 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린 그렇게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영미와 난 금방 서로에게 적응해 갔다. 난 영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도 다 익숙했고, 영미도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을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해한다고 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내가 의원면직이라는 불명예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백수로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고, 서로에게 남자와 여자로서 각자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어머니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망설임없이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왔고, 내 손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성수씨. 우리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말아요”
내가 그녀에게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영미야. 난 오히려 니가 나와 니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염려를 하지 않기를 바래”
그건 사실이었다. 어짜피 우리네 정서에서는 영미랑 내가 가족을 이루고 살기 어려운 형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미는 여자로서 이미 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불륜의 관계에서 강한 자극을 느끼는 것이 현실인가 보다.
난 영미와의 관계에서 영미가 가지는 묘한 경쟁의식의 촉각이 자기의 어머니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영미 자신의 자유스런 감정의 흐름을 주체하기 어렵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그저 영미와의 데이트와 독서로 소일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준 것은 김 정림 여사였다. 그녀는 몇 개월 푹 쉬고 나서 같이 일하자는 조건을 제시하며, 내 정신적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을 배려해 주었고, 내가 짧은 기간 안에 몸과 마음을 추스리게 된 데에는 그녀의 도움이 적쟎이 컸다.
그녀는 자기 사무실을 옮긴다는 이유를 들어 내 방을 만들어 주었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녀의 그런 배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성수씨, 난 이쪽에서는 00억 정도만 굴려볼 생각 이예요”
그녀는 사채와 부동산이 주 종목이었기에, 주식과 채권에 대한 투자를 전적으로 나에게 일임하게 되었고, 난 그녀의 완벽에 가까운 지원을 등에 업고 좋은 시스템을 갖춘 작은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초기에 투입되는 돈이 크질 않았기에, 큰 물량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더욱이 이제는 철저하게 정석에 입각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했기 때문에 투자의 방향 설정이 다소 보수적이 되었다.
운이 따랐고, 또 우리 팀의 실력은 다소 발군이라 할 수 있었다.
투자의 원칙은 심플했다. ‘손실의 최소화’ 그것이었다.
코스닥의 마지막 불꽃 활황에서 우리는 몇 배의 수익을 거두어 들였고, 상승의 끝자락 직후에 우리는 미련 없이 모든 투자금을 회수해 버렸다.
김 여사는 모든 일의 진행을 나에게 맡겨둔 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고, 단지 내 건강과 개인 생활에서의 어려움이 없는 지만을 체크하는 노련한 사람 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성수씨. 이것 받아요”
그녀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키홀더를 내밀었다.
“새 차하고, 아파트 열쇠예요. 책상에 서류가 있어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보라색 입술이 싫지 않았다.
난 서투르게 어색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호흡을 잘 맞추는 편이었다.
그녀와 같이 일을 한 이후에 난 그녀와 송 여사가 서로 상당히 경쟁적인 위치에 양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의 한 팔이 되서 일을 하면서 송 여사와 그녀의 관계를 알고 난 이후에는 영미를 만날 때마다 약간씩 죄를 짓는 기분이 든 것은 내 자신도 어쩌면 송 여사를 향해 마음의 칼을 뽑아 들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송 여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내가 김 여사와 일을 시작한지 한 6개월쯤 뒤의 일이었다.
술은 흔히 사람을 조금은 흐트러지게 하고 또 조금은 감성적이 되게 하는 효력이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영미는 나를 부르면서도 ’씨’ 라고도 했다가, ‘오빠’ 라고도 했다가, ‘아저씨’ 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다. 그건 술 때문이었다.
“있잖아요... 우리 엄마 매력적이지요?”
입술 끝에 미소를 걸친 채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어보는 영미의 얼굴에서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엄마... 대단히 멋있는 여자예요... 그리고 똑똑하고...”
문득 그녀의 자조적인 표현 속에 어떤 갈등이 숨어있음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는 영미가 직접 얘기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알아 낼 수가 없었다.
단지 느낀 것은 영미가 서둘러서 날 보자고 한데에는 뭔가 사연이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 그녀는 그것을 나에게 얘기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궁금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사실을 뒤늦게 앎으로 해서 갖게 되는 또 다른 슬픔을 느끼기도 싫었다.
술을 한 병 다 비울 때 즈음에는 영미도 많이 취했고 나도 많이 취했다.
‘謨事 在人이요 成事 在天이라’ 고 했다. 이제는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 어떻게 되든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라는 생각을 하자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고 여유가 생기는 듯 했다.
“성수씨... 한 잔 더 하고 싶은데요...”
택시를 잡으려고 서있을 때 그녀가 불쑥 내뱉은 한마디였다. 그래 어짜피 나도 그 정도의 술은 오히려 더 정신이 맑아지니, 한잔 더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둘은 젊은 사람들답게 호텔에 있는 나이트를 찾아 들었다, 그곳에는 술이 있었고, 음악과 춤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호텔을 나서면서 시간이 2시를 넘었다는 것을 알았고, 난 서둘러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송 여사... 아니 송 혜진이 있는 그 모녀의 집.
지점장은 내가 이틀씩 결근을 해도 아무런 질책이 없었다.
상황이 거의 확실해 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먼저 만나자고 했던 영미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 헤어지고 나자 더욱 의구심이 일었고 문득 언젠가 송 여사와 함께 만난 적이 있던 송 여사의 친구 김 정림이라는 여자가 생각났다. 송 여사가 서울에 올라오자 마자, 사채 업을 할 때 만나서 10년이 넘게 친구처럼 지내는 사채 업자였다.
“김 여사님?”
어렵사리 그녀의 명함을 찾아 전화를 해서 통화가 되었다. 저녁때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자 무엇 때문에 내가 그녀를 만나기로 했는지에 대한 의미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송 여사에 대한 주변 얘기들을 들으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떤 얘기를 어떻게 듣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또 왜 알려고 하느냐 하는 것도 불분명했다. 머리 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그녀가 잘 아는 식당인 듯 내가 조금 늦게 도착을 하자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종업들이 날 확인하자 마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안내를 했고, 조명이 은은한 방안에 그녀는 조용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는데, 손가락 끝에 두드러지게 발라져 있는 보라색의 메니큐어와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걸쳐있는 하얀 담배는 그녀의 짙은 보라색 투피스와 어울려 강한 자극으로 비추어졌다.
사람을 상대로 돈을 만지는 사람들의 특유의 부드러움과 현란함 속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김 정림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흔히들 저녁 식사로 사람들을 만나면, 밥 보다는 역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송 여사보다 1살인가가 많은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송 여사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얼굴의 주름살도 제법 눈에 보였고, 몸도 전반적으로 중년의 살집이 있는 그런 몸매였다.
“송 여사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요?”
그녀는 내가 자기를 왜 만나자고 하는 지 이유도 모른 채 저녁 약속을 받아주었었다.
“네... 적지않게 벌었습니다”
얘기를 시작하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지만, 어짜피 자리를 만든 이유는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 였다.
“송 여사, 대단한 여자지요”
그렇게 우리는 얘기를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서 송 여사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었고, 그녀의 재산 형성과정의 이야기도 상당히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시련의 과정을 겪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김 대리님. 송 여사하고 좀 특별한 관계지요?”
그녀의 눈빛이 빛났다. 어떤 말을 준비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숨기고 싶다기 보다는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으나, 왠지 그 이야기를 피해가면 어떤 사실에 접근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네... 몇 개월 됐습니다”
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조금씩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송 여사가 다른 얘기 없었어요?......”
“사실은 내가 일찍 김 대리님한테 얘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송 여사와 김 대리님 같은 관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요”
더 이상 들을 이유가 없었다.
가슴 한 켠에 ‘혹시나...’ 하는 의문으로만 남아 있던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재밌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어이가 없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눈물이 흐르려고 했지만, 울 수가 없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내 어리석음에... 내 치기에... 내 멍청한 순진함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난 웃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렇군요... 세상이라는 게 그런 것이군요...”
그렇게 참았는데, 마지막으로 웃음을 멈추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김 대리님...”
“얼마나 술을 마셔야, 머리 속이 하얗게 되지요?”
그녀는 차마 내 모습을 보기가 민망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로 암갈색의 위스키가 찰랑거리고 있는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이성을 찾아갔다.
이건 배신도 아니다. 서로 사랑하다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기에는 내 방자한 청춘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김 여사님... 오늘 저 좀 망가져도 되겠습니까?”
난 왠지 짐짓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상한 것은 술을 먹으면서도 머리 속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정신은 점점 맑아져 갔다.
“그런데요... 김 여사님, 난 송 여사... 아니 혜진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짐짓 떠보기 위해서라도 얘기를 해보자 생각했지만, 실상 말을 하고 보니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기는 그런 믿음없이 어찌 여행도 같이 다니고 밤을 새워가며 섹스를 하고 하겠는가...
“어떤 모습의 송 여사를 사랑하는 건가요?”
김 여사는 한참동안을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문득 뜬금없이 질문을 해왔다.
‘어떤 모습이라......’
“답니다. 다. 모든 면을 사랑합니다”
치기의 한계를 벗어나 오기였다. 사랑의 배반에 대한 강한 부정이었다.
그렇게 술을 마셨고, 꽤 거나하게 마셨다고 느껴질 때쯤이 되어서야 내 가슴에 있던 모든 생각을 그녀에게 토해내듯 얘기했고, 그녀는 조용히 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 다음날 회사에서는 내부 감사가 이루어졌고, 그 정신 없는 와중에 어떻게 일주일이 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영미에게서 다시 전화를 받은 것은 그 주의 토요일 오후였다.
거리에는 은행나무잎이 깔리듯 떨어져있어 마치 도로를 노란 물감으로 채색한 듯 보였고, 차가 달리면서 바람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바람에 두둥실 떠올라 멀리 날라갔다 가라앉곤 했다.
“잘 지냈니?”
내가 담담하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영미는 다소 의외라는 듯 ‘네에’라고 말하면서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좌절의 풍랑 속에서 허덕이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걱정 많이 했어요...”
영미는 그렇게 솔직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줄 곳 영미는 내 기색을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진짜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니가 염려해줄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어”
왠지 영미의 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기에 내가 오히려 더 머쓱해졌다.
갑자기 두 번째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술을 마시면서 영미는 내내 뭔가를 얘기하려고 했었고, 난 그 의미를 김 여사를 만나서 알았지만, 영미는 아직도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영미야, 너 내가 어머니한테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나?”
영미는 무척 놀라는 표정이었다.
기만을 한 것은 송 여사였지, 영미가 아니었다.
“영미야... 우리 오늘 한잔 하자”
난 영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영미를 데리고 차를 미사리로 몰았다.
휘황한 불빛 속에 즐비한 카페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이미 무대에서 사라진 쟁쟁했던 그때 그 가수들의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는 추억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
영미는 많은 얘기를 했다.
“성수씨... 나 앞으로 성수씨라고 부를래요”
‘앞으로’라고 했다.
“영미... 난 니 어머니랑 실상이야 어쨌든 연인 사이였어. 지금은 아니겠지만...”
나도 영미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 이후의 복잡한 상황은 이미 내 이성의 범주밖에 있었다.
“난 상관없어요. 성수씨만 날 용서해주고 이해해 주면...”
“어머니의 죄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있는 거니?”
난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영미는 대답할 의미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 자격은 있는 거지요?’ 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린 그렇게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영미와 난 금방 서로에게 적응해 갔다. 난 영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도 다 익숙했고, 영미도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을 쉽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이해한다고 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내가 의원면직이라는 불명예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백수로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더욱 자주 만나게 되었고, 서로에게 남자와 여자로서 각자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어머니의 연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망설임없이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왔고, 내 손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성수씨. 우리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은 하지 말아요”
내가 그녀에게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영미야. 난 오히려 니가 나와 니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염려를 하지 않기를 바래”
그건 사실이었다. 어짜피 우리네 정서에서는 영미랑 내가 가족을 이루고 살기 어려운 형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미는 여자로서 이미 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불륜의 관계에서 강한 자극을 느끼는 것이 현실인가 보다.
난 영미와의 관계에서 영미가 가지는 묘한 경쟁의식의 촉각이 자기의 어머니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영미 자신의 자유스런 감정의 흐름을 주체하기 어렵다는 것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 그저 영미와의 데이트와 독서로 소일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준 것은 김 정림 여사였다. 그녀는 몇 개월 푹 쉬고 나서 같이 일하자는 조건을 제시하며, 내 정신적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을 배려해 주었고, 내가 짧은 기간 안에 몸과 마음을 추스리게 된 데에는 그녀의 도움이 적쟎이 컸다.
그녀는 자기 사무실을 옮긴다는 이유를 들어 내 방을 만들어 주었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녀의 그런 배려에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성수씨, 난 이쪽에서는 00억 정도만 굴려볼 생각 이예요”
그녀는 사채와 부동산이 주 종목이었기에, 주식과 채권에 대한 투자를 전적으로 나에게 일임하게 되었고, 난 그녀의 완벽에 가까운 지원을 등에 업고 좋은 시스템을 갖춘 작은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초기에 투입되는 돈이 크질 않았기에, 큰 물량에 손을 댈 수가 없었고, 더욱이 이제는 철저하게 정석에 입각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했기 때문에 투자의 방향 설정이 다소 보수적이 되었다.
운이 따랐고, 또 우리 팀의 실력은 다소 발군이라 할 수 있었다.
투자의 원칙은 심플했다. ‘손실의 최소화’ 그것이었다.
코스닥의 마지막 불꽃 활황에서 우리는 몇 배의 수익을 거두어 들였고, 상승의 끝자락 직후에 우리는 미련 없이 모든 투자금을 회수해 버렸다.
김 여사는 모든 일의 진행을 나에게 맡겨둔 채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고, 단지 내 건강과 개인 생활에서의 어려움이 없는 지만을 체크하는 노련한 사람 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성수씨. 이것 받아요”
그녀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키홀더를 내밀었다.
“새 차하고, 아파트 열쇠예요. 책상에 서류가 있어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보라색 입술이 싫지 않았다.
난 서투르게 어색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호흡을 잘 맞추는 편이었다.
그녀와 같이 일을 한 이후에 난 그녀와 송 여사가 서로 상당히 경쟁적인 위치에 양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의 한 팔이 되서 일을 하면서 송 여사와 그녀의 관계를 알고 난 이후에는 영미를 만날 때마다 약간씩 죄를 짓는 기분이 든 것은 내 자신도 어쩌면 송 여사를 향해 마음의 칼을 뽑아 들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송 여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내가 김 여사와 일을 시작한지 한 6개월쯤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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