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1.
나의 엄마 1.
이것은 무척 오래 전 일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대부분은 1960년대 초, 영등포
구 봉천동(당시는 관악구가 아니었다)의 모습을 상상조
차 못할 것이다.
가난하던 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
여 살던 곳이 바로 봉천동이었다.
산동네로 올라가는 길목에 봉천극장이라는 싸구려 극장
이 있었고, 길 건너 작은 시장 주변에는 매미집이라고
불리는 작부집들이 모여 있었다.
그 많던 작부집의 하나에 내가 살았다.
지금부터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여지껏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나의 진짜 옛 이야
기이다.
어렸을 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내가 국민학
교 육 학년 때 집을 나갔다.
나는 그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술에 취한 그 남자가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고 있을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는 방 한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소리도 못 내며 울
고 있었다.
더 이상 집 던질 것조차 없었던지 남자는 내가 베고 있
던 벼게를 집어들고는 그것으로 이젠 엄마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벼게가 터지며 안에 들어 있던 쌀겨가 터져
나와 온 방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잔뜩 웅크리고 반항조차 못하는 엄마에게 그 남자는 더
화를 내고 있었다.
남자는 갑자기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옷을 벗기려
하였다.
엄마는 반항했다.
그러나 그 남자의 힘에 엄마의 웃옷이 찢기며 엄마의
흰 살이 들어 났다.
엄마의 흰 가슴에는 이미 벌건 손찌검이 생겨 있었다.
엄마는 바닥에 쓰려져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나에게 밖으로 나가
라고 손짓했다.
나는 방밖으로 기어 나갔다.
방밖은 바로 부엌이었다.
찬 부엌 바닥에 웅크린 나에게 엄마의 비명과 그 남자
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순간, 부뚜막 위에 아무렇게
나 던져져 있던 시커먼 식칼이 눈에 들어왔다.
벽을 향해 기어간 나는 그것을 쥐고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방문을 밀어 제쳤다. 그리고 허리춤을 풀고
엄마 몸 위에 올라탄 그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엄마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무작정 달려들던 나는 급한 나머지 제 풀에 넘
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남자의 발길이 나의
가슴을 때렸다.
가슴이 막혀 숨을 쉴 수 없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시 그 남자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고1 때였다.
광주에서 그 남자가 교통사고로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죽어간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나는 다 부서져 얼굴도 알아 볼 수 없는 그 남자 앞에
서 한번도 울지 않았다.
그에 대해 좋은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언제 그가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되려 즐거웠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의식조차 없는 그
의 몸을 얼싸안으며 실성한 듯 우는 엄마가 가엽다는
생각보다는 밉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엄마는 둘이 살던 작은 집을 처분하고 광주까지 내려가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했으나 아버지는 한번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다.
집까지 날린 우리는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영등포구 봉천동이었다.
엄마는 조그만 가게를 세 얻어 구멍가게를 하고, 나는
가게 뒷골방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끝까지 남겨준 시련이었다.
달동네에서 구멍가게가 잘 될 리 없었다.
하루 종일 장사한 것보다 저녁 이후에 동네 사람 대상
으로 술 한두병 파는 것이 더 매상이 컸다.
가게 안에 작은 테이블을 놓아 술 마신 동네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가 혼
자 사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동네 아저씨들, 세탁소 주
인이나 쌀집 주인 같은 사람이 자주 들렀다.
나 같이 다 큰아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잘 믿기지
않았던 것은 엄마가 너무 젊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엄마는 동네 건달이던 아버지를 알게
되어 나를 갖게 되었고, 집에서 쫒겨나다시피 아버지와
서울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엄마를 처음 보는 나
의 친구들도 엄마를 큰 누나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다 그래서였다..
가게를 처음 차리고는 엄마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가게
일을 열심히 도왔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가게에 나와 있는 것을 싫어했다.
점차 엄마가 내가 가게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나의 공부를 위해서만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아무래도 술집 여자 주변에 바로 그녀의
아들이 있다는 것은 엄마에게나 손님에게나 그리 유쾌
한 일이 못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차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기 싫었다. 어떤 때는 공원 벤치에 쭈구리
고 자는 일도 있었다.
친구 집에서 잔 적은 많지 않았다.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정상적
이지 못한 나의 다리는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했
기 때문이었다.
저녁 때는 동네 도서관에서 공부한답시고 시간을 보내
다가 통행금지 직전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11시가 넘으면 취객은 거의 없었다.
엄마는 점차 술을 많이 마시는 듯 했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이미 술에 취해 자리도 펴지 못
하고 골방에 쓰러져 있곤 했다.
집에 들어온 나는 이불을 펴고 엄마를 끌어다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이불 한 쪽 구석
에서 엄마 몸에서 나는 술 냄새를 피해 웅크려 잠들었
다.
그렇게 첫 해 겨울이 지나가면서 엄마 몸에서 나는 술
에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엄마도 처음에는 내 앞에서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그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져 갔
다.
엄마의 몸을 엄마의 몸으로서가 아니라 여자의 몸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이다.
이것은 무척 오래 전 일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대부분은 1960년대 초, 영등포
구 봉천동(당시는 관악구가 아니었다)의 모습을 상상조
차 못할 것이다.
가난하던 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
여 살던 곳이 바로 봉천동이었다.
산동네로 올라가는 길목에 봉천극장이라는 싸구려 극장
이 있었고, 길 건너 작은 시장 주변에는 매미집이라고
불리는 작부집들이 모여 있었다.
그 많던 작부집의 하나에 내가 살았다.
지금부터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여지껏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나의 진짜 옛 이야
기이다.
어렸을 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사람은 내가 국민학
교 육 학년 때 집을 나갔다.
나는 그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술에 취한 그 남자가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고 있을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는 방 한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소리도 못 내며 울
고 있었다.
더 이상 집 던질 것조차 없었던지 남자는 내가 베고 있
던 벼게를 집어들고는 그것으로 이젠 엄마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벼게가 터지며 안에 들어 있던 쌀겨가 터져
나와 온 방을 자욱하게 만들었다.
잔뜩 웅크리고 반항조차 못하는 엄마에게 그 남자는 더
화를 내고 있었다.
남자는 갑자기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옷을 벗기려
하였다.
엄마는 반항했다.
그러나 그 남자의 힘에 엄마의 웃옷이 찢기며 엄마의
흰 살이 들어 났다.
엄마의 흰 가슴에는 이미 벌건 손찌검이 생겨 있었다.
엄마는 바닥에 쓰려져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남자의 몸 아래 깔려 나에게 밖으로 나가
라고 손짓했다.
나는 방밖으로 기어 나갔다.
방밖은 바로 부엌이었다.
찬 부엌 바닥에 웅크린 나에게 엄마의 비명과 그 남자
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순간, 부뚜막 위에 아무렇게
나 던져져 있던 시커먼 식칼이 눈에 들어왔다.
벽을 향해 기어간 나는 그것을 쥐고 방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방문을 밀어 제쳤다. 그리고 허리춤을 풀고
엄마 몸 위에 올라탄 그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엄마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무작정 달려들던 나는 급한 나머지 제 풀에 넘
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남자의 발길이 나의
가슴을 때렸다.
가슴이 막혀 숨을 쉴 수 없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시 그 남자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고1 때였다.
광주에서 그 남자가 교통사고로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죽어간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
나는 다 부서져 얼굴도 알아 볼 수 없는 그 남자 앞에
서 한번도 울지 않았다.
그에 대해 좋은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언제 그가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되려 즐거웠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의식조차 없는 그
의 몸을 얼싸안으며 실성한 듯 우는 엄마가 가엽다는
생각보다는 밉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엄마는 둘이 살던 작은 집을 처분하고 광주까지 내려가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했으나 아버지는 한번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다.
집까지 날린 우리는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영등포구 봉천동이었다.
엄마는 조그만 가게를 세 얻어 구멍가게를 하고, 나는
가게 뒷골방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끝까지 남겨준 시련이었다.
달동네에서 구멍가게가 잘 될 리 없었다.
하루 종일 장사한 것보다 저녁 이후에 동네 사람 대상
으로 술 한두병 파는 것이 더 매상이 컸다.
가게 안에 작은 테이블을 놓아 술 마신 동네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가 혼
자 사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동네 아저씨들, 세탁소 주
인이나 쌀집 주인 같은 사람이 자주 들렀다.
나 같이 다 큰아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잘 믿기지
않았던 것은 엄마가 너무 젊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엄마는 동네 건달이던 아버지를 알게
되어 나를 갖게 되었고, 집에서 쫒겨나다시피 아버지와
서울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엄마를 처음 보는 나
의 친구들도 엄마를 큰 누나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다 그래서였다..
가게를 처음 차리고는 엄마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가게
일을 열심히 도왔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가게에 나와 있는 것을 싫어했다.
점차 엄마가 내가 가게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가
나의 공부를 위해서만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아무래도 술집 여자 주변에 바로 그녀의
아들이 있다는 것은 엄마에게나 손님에게나 그리 유쾌
한 일이 못됐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차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기 싫었다. 어떤 때는 공원 벤치에 쭈구리
고 자는 일도 있었다.
친구 집에서 잔 적은 많지 않았다.
친구가 별로 없었다.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정상적
이지 못한 나의 다리는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했
기 때문이었다.
저녁 때는 동네 도서관에서 공부한답시고 시간을 보내
다가 통행금지 직전에 집에 들어오곤 했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11시가 넘으면 취객은 거의 없었다.
엄마는 점차 술을 많이 마시는 듯 했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이미 술에 취해 자리도 펴지 못
하고 골방에 쓰러져 있곤 했다.
집에 들어온 나는 이불을 펴고 엄마를 끌어다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이불 한 쪽 구석
에서 엄마 몸에서 나는 술 냄새를 피해 웅크려 잠들었
다.
그렇게 첫 해 겨울이 지나가면서 엄마 몸에서 나는 술
에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엄마도 처음에는 내 앞에서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그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져 갔
다.
엄마의 몸을 엄마의 몸으로서가 아니라 여자의 몸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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