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여인21
태욱이 아침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 금한과 어머니 독소소는 무엇인가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다. 금한은 태욱이 바깥에서 온 것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독소소가 가볍게 옆구리를 찌르자 무난하게 표정을 지웠다.
"아들아, 약간 다른 일이 생겨서 우린 지금부터 바로 들어가야하겠구나."
태욱은 아버지의 말에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되물어보진 않았다. 이 시대의 가부장이라는 것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대들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한다고 말하면 아들과 아내는 절대로 따라야만했다.
"아버님, 어머님, 그럼 오랫동안 강녕하십시오."
태욱은 바로 큰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금한은 조금 못미더운듯 아쉬운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장포를 펄럭이며 경신법을 펼쳐 바로 날아올랐다. 제자리에서 한번 뛰어 이미 지붕의 기와를 밟고는 새처럼 훨훨 날아올랐다. 어머니 독소소의 그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아버지 금한 역시 대단한 고수였다. 상재와 무공을 모두 가진 능력자였지만 독소소가 너무 큰 산이라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어머.. 저이도 참..."
독소소는 바로 가버린 금한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나무랐지만 솔직히 무척이나 급한 일이 생기긴 하였다. 그리고 그걸 태욱에겐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어쩔수 없었다.
"욱아. 내 긴히 소연에게 부탁을 해놓았단다. 윌사쿠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안전하기 위해서 동생을 불러들였으니, 이곳에서 기다린 뒤에 같이 다니거라. 그럼 욱아, 조만간 보자꾸나."
앞서 나간 금한을 쫒기 위해서 독소소 역시 경신법을 발휘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담과 벽을 박차고 지붕 위로 오른 금한과 다르게 독소소의 신형은 마치 등 뒤에 줄이 메달린 것처럼 수직으로 치솟았다.
그렇게 허공으로 3장 높이만큼 치솟으며 쌍장을 내지르니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아름다울 정도로 가볍게 떠올라 태욱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금한과는 비교조차도 불가능할 정도의 경신법이었다.
"아 어머니의 무위가 한층 더 높아지셨구나."
비록 무공을 익히지 못하였지만 태욱은 공부는 열심히 하였기에 방금 평친 어머니의 수법이 능공허도의 초입부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본디 여성무인은 그 체질상 아이를 낳게되면 무공의 발전이 꺽이고 힘들어지는 법인데, 어머니 독소소의 무공은 매일 같이 늘어만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태욱은 자신만만하게 미소짓던 윌사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부모님들이 급하게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은 바로 윌사쿠와 태욱이 꾸민 일이었다. 왜냐 하면...
서주악귀 독소연을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태욱은 귀신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가 노릴 두 번째 대상으로 자신의 이모인 독소연으로 정했던 것이다.
독소소에게 태욱은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킬 정도로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이었다. 하지만 남편과의 애정과 사랑 역시 무거웠다. 그리고 그것을 서주독가의 가문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애초에 독소소는 지금도 귀한 약과 용하다는 의술을 계속해서 받고 있는대도 아이라곤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내심 태욱이 자신이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자식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양 쪽으로 일이 발생하면, 서주의 악귀나찰이라 불리울 정도로 같이 붙어다녔던 동생을 불러들일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아니, 반드시 불러들이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독소소의 아직 처녀시절 무림행과 연관이 깊었다. 서주독가같은 거대 세가가 아니더라도 현시대에서 여자에게 연애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부모가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하는게 아주 당연했고 세가같은 거대한 가문에선 아예 의무였다.
하지만 독소소는 그것을 거부했기에 그녀는 아버지 독기의 허락하에 가문의 비기 없이 무림행을 시작하였다. 비록 비기는 배우지 못하지만 그녀가 먹은 영약과 배운 무공은 서주독가의 것이었기에 받은 것 이상 가문을 위해서 돌려줄 것을 명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무척이나 험난했다. 독소소의 미모가 높았던 만큼, 온갖 수작질은 물론이요, 음약과 일반인을 이용한 산공독 살포, 함정은 인간의 상상이 이렇게까지 대단했던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독소소는 이겨냈다.
그리고 그 위업에 독소소의 두 살 어린 동생 소연이가 영향을 받았다. 본디 여자형제들은 동성애자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가까워지던가 아니면 철천지원수가 되던가, 둘 중 하나가 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소연은 전자였다. 그것은 소소가 여자이기 전에 인간으로서도 강했기에 가능했다.
서주독가는 독을 다루기 때문에 천성적으로 편협하고 끝이 깊고 긴, 한마디로 꼬장꼬장한 가문이었는데 독소소는 거기에서 유일하게 예외적이었다. 소소는 언제나 혈족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모두 독기의 자식이지만, 소연은 같은 어머니를 둔 유일한 자매였다. 어릴 적부터 의외로 이런 곳엔 무관심한 어머니대신 그녀가 소연을 챙겼고 소연 역시 소소를 잘 따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연 역시 소소처럼 자유를 쟁취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것은 독소소가 여자로 두기에 아까울 정도의 천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사받지 않고 깨우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소연은 결국 스스로 경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비기를 배우기 위한 준비를 하던 혈족과 비교하면 시작점에서부터 차이가났다.
무림세가에서 무공은 말그대로 목숨과도 같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소연은 뒤쳐질뻔했지만 소소가 홀로 수련을 하면서도 비기를 배우는 소연을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만약 남자동생이었다면 비기를 배우면서도 소소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에 엄청난 열등감과 모욕감을 받았을지 몰랐다. 하지만 서로에게 깊은 친분이 있었기에, 그리고 같은 여성이었기에 그런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소연과 소소는 얼마 후 함께 다니기 시작하였다. 소연 역시 독가의 여식답게 비정하고 독랄하기 짝이 없었기에 손속에 전혀 정이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마두와 서주독가의 임무를 둘은 해쳐나갔다.
사이가 틀어질 수 있는 일이 빈번했지만 그 때마다 소소는 자신의 그릇을 증명했고 소연은 소소에게 빠져들었다. 그렇게 3년을 쉬지 않고 돌아다녀 마침내 서주 제일의 악마라는 뜻에서 도저히 정파의 무림인 같지 않는 별호 서주악귀나찰이 붙었을 때 소소는 자유를 소연은 가문 내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함께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가를 나온지 15년의 세월이 지나서도 소연과 소소는 끈끈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연재 소연의 나이는 서른셋,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장성한 자식을 놓고 잘하면 손주도 볼 수 있을 나이였지만 무림세가의 여식으로서는 한창인 나이였다.
아이를 가지게되면 태아 역시 살아있기에 자연스럽게 기를 가지게 되고, 한 몸에 두 개의 기가 흐르니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배는 커녕 수배의 노력이 필요한게 당연했다. 왜냐하면 아이의 기는 전혀 통제되지 않고 흘러가기에 그것을 일일이 이끌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본체, 즉 어미는 아이의 기를 순환시키면서 내부에서부터 가문의 핵심적인 내공을 쌓게 할 수 있는데, 이 방법에 자신의 기는 물론 몸이 축이 났다.
그래서 강한 아이를 위해서, 정확히는 강한 남아를 위해서 어미의 무공이 높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림의 여식은 거의 최절정기라고 생각될 때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서주독가는 수많은 실험의 결과로 잉태한 아이가 남아인지 여아인지 구분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소연과 소소는 태어난 뒤부터 내공을 쌓았다.
당연하지만, 태아의 성별구분은 정무맹이 비밀스럽게 자랑하는 모순된, 서비스였다. 무림인이라면 자신의 자식이, 특히 남아가 강하게 태어나는 것을 바라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막상 영약과 임산부의 몸을 축내면서 낳은 자식이 여아면... 그야말로 낭패였기에 알고있다면 검사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소연은 주기적으로 소소를 만나면서 서로의 무공을 봐주고 소연의 막힌 부분을 소소가 뚫어주면서 지금도 무공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기에 아직도 정확한 혼처가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젊은데다가 무공실력이 높기까지하니, 주변에 적정기의 자식을 가진 세가나 유력자들이 몸이 달아있을 정도로 독소연의 가치가 높았다. 하지만 독기는 그런 독소연의 가치가 좀 더 올라가길 바랬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혼처를 정하지 않았다.
가문내에서 독기나 한 배분 위의 혈족이 아니면 흔들리지 않을 지위를 구축한 소연, 혼처 역시 정해지지 않았기에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본디 소소는 몇 일 동안 은퇴식을 하고 아들의 일을 충분히 준비한 뒤 남편에게 가려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일은 무척이나 큰일이었기에 그럴 준비가 전부 붕 떠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금가장은 금한이 무척이나 돈이 많았기에 잔뜩 돈지랄을 해두었었다. 건축가를 통해 유명한 술법사와 역술가를 불러 오행과 음양조화를 맞춰 지었기에 잡귀는 물론 진법마저도 발동 시킬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곳에서 소연이 올 때까지 나가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던 것이다.
본디 금가장에는 총관과 하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새벽부터 일찍 다 내보냈는지 아무도 없었다. 이 집에는 오직 태욱과 윌사쿠 두명 뿐이었다.
"아무도 없구나."
"예 그렇습니다. 태욱님. 자 그럼 우리는 소연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볼까요."
"그런데... 소연 이모가 그렇게 쉽게 넘어올까?"
태욱은 윌사쿠에게 동조하긴 했지만 소연이모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소연이모는 아직도 서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두의 목을 신나게 따고 있었다. 주점 같은 곳에서 오늘은 어떤 마두를 해치웠고 어젠 어떤 고개의 산적들을 모조리 송장으로 만들었다는 무용담이 아직도 식지 않는 여걸이었다.
게다가... 윌사쿠와 정하긴 했지만 소연이모는 2살차이나는 언니인 소소와 너무 닮아있었다. 다행히 소소는 결혼하여 머리를 틀어올렸기에 처녀라서 머리를 내리고 있는 소연과 확실히 분간이가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와 닮아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후후후.. 태욱님. 아직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서투르시군요. 걱정 마시고 제게 맡겨주십시요. 그리고 남상아를 불러 가까이 두십시요."
"남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