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27
자신도 모르게 지현의 분노의 대상이 된 혜리로서는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당사자인 지현은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오늘 밤 무슨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혜리에게 ‘쓸데없이 체액을 사용해야 했다.’며 분노를 향하는 것은 120% 지현의 엉뚱한 화풀이였다.
하지만 혜리를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 지현으로서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현은 진짜로 진지하게 혜리를 향해서 어둠의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분노가 오늘 밤 혜리를 습격하게 되고 그 결과 혜리를 다시는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접어들게 된다.
잠시 후 지현은 회사로 돌아가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로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지현의 모습을 발견한 혜리가 접수 카운터 뒤에서 뛰어나와서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지현은 그걸 알아차리고서 발을 멈추고서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혜리는 조금 흥분했는지 뺨을 조금 붉게 물들인 채, [저기, 선배....오늘 밤 몇 시쯤.....?] 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난 정시에 퇴근이니까 6시에는 집에 있을 거야. 혜리는?]
그러자 혜리가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네. 다음 주 미팅이 있어서 7시 정도 퇴근을 할 것 같아요.] 라고 말을 했다.
[그럼 내가 집에 먼저 가서 준비를 해 놓고 있을 테니까 퇴근하고 나면 곧바로 우리 집으로 와. 이게 우리 집 주소와 약도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마.]
지현이 작은 메모지를 꺼내서 혜리에게 건네주었다.
혜리는 기쁜 얼굴로 그걸 받으면서, [네,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을게요! 와우, 여기가 선배 집이에요?] 라고 흥분에 찬 목소리로 메모를 확인한 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지현은 요염하게, 그리고 혜리를 귀엽게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후 자신의 부서로 돌아가고 있었다.
*********************************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오후의 일까지 빨리 해치운 준하는 자신의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는 지하 2층의 창고를 지나서 그 아래에 위치해 있는 최하층인 지하 3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 인터 빌딩의 최하층에는 각종 설비장치가 있는 기계실과 과거의 업무 자료들이 쌓여 있는 자료 창고가 설치되어 있었다.
현관 로비의 엘리베이터는 지하 2층까지 밖에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3층으로 가려면 계단이나 경비실의 정면에 있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사용 할 수밖에 없었다.
준하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간 후 오른쪽과 왼쪽 두 개의 문 중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는 왼쪽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많은 책장들이 어두운 방범용 등에 의해서 비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작은 책상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조금 강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준하는 그 책상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어이, 영감님, 살아 있어?]
준하가 그렇게 말하며 책상 앞으로 다가가자, [응? 준하잖아? 무슨 일이야?] 라고 60세 정도의 약간 뚱뚱한 남자가 안경을 내려놓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영감님! 이곳에 얼굴을 내미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너야말로, 내가 아직 임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
초로의 남자는 온화해 보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각박한 미소를 띠우며 준하에게 반격하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김 기춘, 회사 내력 편찬 실장의 직함을 지닌 원 인터내셔널의 임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회사내력 편찬실이라고 말해도 그 부서가 어디 있는지 원 인터내셔널의 직원 중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회사내력 편찬실이라는 것을 바로 이 책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김 기춘이라고 하는 남자는 준하의 좌천이 원인이 된 공립병원 유치 실패의 책임을 지고서 준하와 같이 좌천되어서 이 최하층에서 낡은 서류에 파묻혀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기춘은 70세에 175cm, 90kg의 체형에 얼핏 보기에 KFC할아버지를 닮은 부드러운 외모와 언행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두가 다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그 성격은 뱀처럼 집념이 강하고 간사한 성격에 뛰어난 두뇌,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철저한 합리주의자이자 냉혈한인 남자였다.
또한 회장일가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었는데도 50세 이전에 임원으로 승진한 뛰어난 수완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12년 전, 공립 병원 유치 실패의 책임자로 지목되어서 이 지하 3층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준하와는 공립병원 유치 프로젝트에서 알게 되었고 그 후로 꽤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만이 그 프로젝트 담당자 중 회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항상 온화하고 부드러운 언행과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준하와 단 둘이 있을 때만은 그 본성을 숨기지 않고 있었고 준하 역시 원래의 본성을 드러낸 채 두 사람은 12년 간 이상한 교류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기춘은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프로젝트 실패의 책임을 지고서 제일 먼저 회사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보원에게서 전무파 임원의 부정한 정보들을 증거로 가지고 있어서 그걸 방패로 삼아 아직도 임원 자격을 유지한 채 이 지하에 머물고 있었다.
즉 준하와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 원 인터내셔널에 머물고 있는 남자였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준하를 상대할 때에는 지금처럼 본성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준하는 아직까지 그걸 계속해서 이상하게 생각해 왔었다.
기춘은 철저한 합리주의자로 절대로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고 감정적인 판단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준하로서는 기춘의 그런 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랜만에 지하 3층을 방문해서 기춘을 본 순간 준하는 간신히 그 수수께끼를 풀 수가 있었다.
준하는 씩 미소를 지은 후,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지를 꺼내서, [영감님, 혹시 ‘신봉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라고 말하며 메모지를 펼쳐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기춘은 일체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신봉자? 뭐야? 너, 혹시 사이비 종교라도 가입한 거야?] 라고 책상 위의 메모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준하가 내려놓은 메모지에는 정삼각형 두 개가 서로 겹쳐 있는 헥사그램, 즉 ‘제물의 각인’이 그려져 있었다.
준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봉자라는 단어와 헥사그램을 보여주면서 기춘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춘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었고 목소리에도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대응이었지만 지금의 준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춘이 눈을 아래로 내려서 메모지를 바라보며 도형을 확인한 순간 기춘의 몸 주위에서 끈적거리는 검은 색의 안개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건 확인한 준하는 더욱 더 강하게 미소를 지으며, [뭐, 영감님. 모르고 있다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쓸데없는 장난이라고 생각하고서 들어줘요. 그리고 만약 뭐 흥미가 생긴다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라고 기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 전에 검은 색의 가죽 표지로 된 고서를 사용해서 ‘계약서’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계약서를 사용해서 ‘계약자’도 만들었고 그걸 사용해서 ‘신봉자’와 ‘제물’까지 손에 넣었어요.]
준하가 마치 토해내듯이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기춘의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준하의 눈을 정면에서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 표정과 시선에서는 조금의 정보도 얻어낼 수가 없었지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색의 안개는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침내 기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특별한 애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말은 믿기 어려운 걸. 네가 여자와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도 없어. 그리고 모두가 다 싫어하는 널 신봉하는 사람이 있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걸.]
기춘이 마치 자신의 말을 스스로 확인하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여전히 기춘의 언행과 표정은 조금 전과 하나도 차이가 없었지만 어두운 지하실의 어둠 전체가 이제는 세게 소용돌이치듯이 꿈틀대고 있는 것을 준하는 확실히 볼 수가 있었다.
- 젠장, 대단한 영감이네. 이 정도로 진한 어둠을 숨기고 있었다니.....그리고 내 말의 의미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있어. 그 조심성이 해고당하는 것을 막았겠지. 하지만 단순히 겁쟁이라면 당신과의 볼일은 이걸로 끝이야.
준하는 기춘에게 감탄을 하면서도 혹시 이걸로 단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준하는 기춘의 능력과 정보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그가 강한 욕망의 소유자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준하와 마찬가지로 회사의 집단 따돌림을 참아낼 정도로 강한 정신력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원 인터 내에서 준하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레벨을 지닌 남자는 김 기춘 한 명 뿐이었다.
하지만 준하는 기회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보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기회라는 것은 찾아오기도 어렵지만 매우 쉽게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준하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본능적인 육감으로 이런 기회를 잡지 못하는 남자는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준하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동안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준하는 판단을 내렸다.
- 젠장, 안 되겠군. 너무 늙어서 이제는 더 이상 용기가 없어진 것 같아.
준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설마, 네가? 아니, ‘역시’라는 말이 맞을지도....] 라고 기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안경을 벗은 후 고개를 숙여서 오른쪽 눈으로 양손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준하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오른쪽 눈의 안구에 손끝을 가지고 가서 뭔가를 벗긴 후 다시 오른쪽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걸로 만족하나?]
기춘이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 눈을 뜨자 준하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기춘의 오른쪽 눈동자에는 삼파 문양을 닮은 ‘어둠의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그 색깔은 진한 푸른색의 멍과 같은 색으로 동공이 아예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의안에 ‘어둠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공의 기능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준하는 그런 기춘의 눈동자를 자세히 바라보며, [역시, 영감님도 우리 집과 관련이 있었어.] 라고 조용히 말을 했다.
그러자 기춘이 다시 오른쪽 눈에 콘택트렌즈를 착용하며 말했다.
[젠장, 벌써 30년도 전의 이야기야. 당시의 사장님을 따라서 너희 집에 갔던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 난 거기서 세상의 축소판을 보았어. 인간의 아름다움, 유한함, 어리석음, 추악함, 그리고 업보의 깊이까지.....내가 지금의 성격으로 변하기까지 겨우 3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어. 하하하....]
기춘은 조용히 그렇게 말한 후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몇 분의 침묵이 흐른 후, [명수 영감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어.] 라고 말하자 기춘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연할지도....그 새끼는 언제나 그랬으니까....뭐, 나도 비슷한 종류였으니까 할 말은 없지만.....그 때문에 대만에게도 쓸데없는 간섭을 했지.]
준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눈을 크게 뜨면서, [무슨 말이야? 대만이라면, 우리 아버지 말이야?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라고 말하며 기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기춘은 한 손을 들어 올려서 준하를 막으며, [네 할아버지인 정 현무는 권력의 소용돌이 속 한 가운데에 있었어. 그 힘을 손에 넣은 너라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 거야.] 라고 조용히 말을 했다.
[권력이라고? 도대체 그게 뭐야? 나에게 그런 힘이 어디 있다는 거야? 내가 손에 넣은 것은 사람을 지배하는 계약일 뿐이야!]
그러자 기춘은 한손으로 이마를 붙잡으며 크게 한숨을 토해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 뭘 원할 거라고 생각해?]
[....................]
기춘이 준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욕망을 채우는 거야. 그것도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종류의 욕망을....그래, 그 저택, 악마의 저택에는 그게 있었어. 선택된 사람들이 모여서 욕망을 한계까지 채우는 거야. 마구 강간을 하고 부수어 버리는 거야. 그것을 욕망하고 즐기고 희롱하는 감각은 사람을 너무나 쉽게 광기로 물들게 만들었어. 한 번 욕망의 감미로움을 손에 넣은 사람들은 그걸 절대로 다시 포기할 수 없었어. 누구나 그 힘을 원했어. 그리고 그걸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힘을....바로 궁극의 ‘권력’을 말이야.]
마침내 말을 마친 기춘은 준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기춘이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댄 채 계속해서 말을 했다.
[넌 네가 손에 넣은 힘의 크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네 주위에 모여드는 망자들에게 먹히고 말 거야. 네 아버지인 대만이처럼 말이야.]
[아버지! 우리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야?]
기춘은 준하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책상 서랍으로 시선을 돌린 후 서랍을 열어서 오른손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서랍 속을 뒤진 후 책상 위로 오래된 칼라 사진 한 장을 던졌다.
준하의 눈앞에 던져진 사진은 처음 칼라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을 무렵 찍은 오래된 사진이었지만 그 속의 인물은 확실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준하의 눈빛이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건 어딘가의 사무실 안에서 찍은 사진으로 젊은 시절의 김 기춘과 웃고 있는 준하의 아버지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준하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웃는 표정에 망연자실하면서 사진에서 기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처음 왔을 때의 네 아버지야. 난 교육 담당이었어. 물론 그 무렵에는 나도 이미 이렇게 완성되어 있었지만....]
기춘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준하는 손에 든 아버지의 사진과 기춘을 넋이 나간 눈으로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기춘은 그런 준하를 보며 코웃음을 치면서 몸을 뒤로 젖히며 오른손을 뻗어서 준하에게서 사진을 억지로 빼앗은 후 다시 서랍 속으로 던져 넣었다.
[난 대만이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매우 기뻤어. 당연한 일이었지.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거였으니까 누구라도 그렇게 느꼈을 거야. 하지만 그게 바로 내 실수였어. 난 갑자기 해외 발령을 명령받아서 미국에 10년 동안 쫓겨나 있었어.]
처음에는 조용히 얘기를 시작한 기춘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완전히 격앙된 채 양손으로 책상을 강하게 때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잠시 후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 채 기춘은 숨을 가다듬으며 준하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넌 이미 태어나 있었어. 하지만 현무 씨는 완전히 잊혀져 있었고, 대만이는....대만이는 시체가 되어 있었어.]
기춘은 조용히 말을 한 후 크게 숨을 내쉬고서 다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미국에 가기 전에는 신출내기 임원이었던 명수 새끼가 전무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난....젠장....그 때에도 명수 새끼에게 감쪽같이 당하고 말았어. 내가 미국으로 가고 난 후 내 뒤를 명수 새끼가 이어 받았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어. 하지만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은 나도 알아낼 수가 없었어. 현무가 죽은 바로 그 날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방불명되고 말았으니까.... 공식적으로 모두 다 사망 선고를 받긴 했지만 그 사체는 어디에도 발견할 수가 없었어.]
기춘이 36전에 일어났던 수수께끼의 사건에 대해서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준하는 잠시 동안 기춘을 빤히 바라본 후, [조금 전 ‘감쪽같이 속았다.’ 라고 말하기 전에 ‘그 때에도’ 라고 말했지? 그 밖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기춘이 이번에는 책상 제일 아래의 서랍을 열어서 그 안에서 두꺼운 파일을 꺼내 책상 위로 던졌다.
[젠장, 이게 바로 12년 전의 진상이야. 증거는 최대한 긁어모을 수 있었지만 그걸 증명해줄 증인이 아무데도 남아 있지 않아. 모두 다 자살을 하거나 실종되어 버렸으니까.]
준하가 파일을 들어서 읽고 있는 동안 기춘이 계속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젠장, 그 증거는 모두 다 여기 서류 창고에 숨어 있었어. 여기에는 각 부서에서 흘러들어온 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이니까.....난 그 중에서 그 때의 프로젝트에 관련된 내용들을 모아서 분석하기 시작했어. 그러자 어디서 돈이 빠져 나와서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 누가 뭘 지시했고, 누가 어떤 일을 실행에 옮겼는지....모두 다 알아낼 수 있었어.]
파일을 읽으면서 준하의 화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젠장, 진짜야? 적자가 20억이 아니라 도중에까지는 원래 격정에 비해서 30억 가까이 수익을 얻고 있었어. 그렇다면 총 150억의 현금이 사라졌다는 거야. 그것도 50억씩 3개의 유령 회사로 흘러들어갔고, 그 유령 회사 모두에 명수의 입김이 서려 있었어.]
그러다가 준하의 손이 파일의 한부분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기춘이 그걸 알아차리고 물었다.
[응? 그런 곳에 뭔가가 있는 거야? 아, 거기는 근처 병원과의 교섭에 대한 내용들이야. 사실 실제 지불한 퇴거 비용과 장부에 적힌 금액이 많이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총 비용과 비교하자면 별로 신경 쓸 내용은 아니야.]
기춘이 다시 안경을 쓰고서 서류를 들여다보며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준하는 그 서류를 몇 번이나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아니, 여기 적힌 돈 때문이 아니야. 사실 내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여기에 적힌 내용이 아니라 적혀 있지 않는 내용들이야. 그게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그 항목의 제일 첫 페이지로 돌아온 후 준하는 자신의 추론을 확신하고 있었다.
[젠장, 역시 처음부터 그게 계획에 들어가 있었어. 아니 그게 바로 제일 중요한 계획이었어. 처음부터.]
준하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기춘이 준하의 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뭐가 제일 중요한 계획이었다는 거야? 내 추론으로 이 공립 병원 프로젝트는 명수의 비자금 조성과 날 실각시키기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어.]
그러자 준하가 고개를 흔들며,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었어, 영감님.....이건 모두 다 연결되어 있었어. 원래 신입이었던 날 그 프로젝트에 참여시킨 이유, 프로젝트가 망한 후에도 날 계속 회사에 남아 있게 한 이유도 전부 다....이 공립 병원 프로젝트는 명수에게 있어서는 일석 사조의 계획이었어.]
준하의 말에 기춘이 깜짝 놀란 순간 준하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까지 포함해서 기춘에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이 서류의 업무 지시 속에는 예전부터 이 지구에 위치해 있었던 고려 병원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 이 고려 병원의 존재를 프로젝트 당사자 중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아. 그런데도 고려 병원과 퇴거 교섭을 하거나 제휴 교섭의 지시는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원래 다른 지구에 건설하기로 했다가 이 지구로 바꾸어진 것은 오직 고려 병원이 이 지구에 있었기 때문이었어! 명수는 이 고려 병원을 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 지구로 공립병원의 위치를 변경한 거야.]
너무나 엉뚱한 준하의 말에 천하의 기춘도 깜짝 놀라고 있었다.
[어이, 어이, 그런 사소한 개인 병원을 망치기 위해서 몇 백억이 넘는 프로젝트를 이용한단 말이야?]
[아니. 이 병원은 예전부터 단골이 있었던 병원이야. 겉으로 봐서는 쇠퇴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고정 환자가 있기 때문에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었어. 그걸 병원의 장부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어. 이 병원을 망하게 만드는 방법은 근처에 질이 좋은 대형 병원이 들어오는 것뿐이야.]
얼마 전 우성을 시켜서 훔치게 만든 고려 병원의 장부를 떠올리며 준하가 분명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준하의 말에 기춘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만약 그렇다고 해도 왜 이런 병원을 망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거야?]
[이유는 틀림없이 있었어. 이 고려 병원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그건 바로 이 병원이 유리 일가의 주치의였다는 사실이야.]
[유리 일가? 명수의 비서인 최 유리를 말하는 거야?]
기춘이 머리를 갸우뚱하며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준하는 즉시 유리와 명수의 관계, 유리의 현재 사정, 여정에게 조사를 시켰던 고려 병원의 진료 기록들을 설명해주었다.
만일 준하와 기춘이 유리와 명수가 친척사이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 그 정보는 어둠 속에 쌓여 있었다.
준하의 설명에 기춘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아니, 명수 그 새끼라면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야. 그 녀석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래...맞아. 그 때문에 이 지구를 선택할 수도 있었어.] 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눈빛으로 준하를 바라보았다.
[그래, 알았어! 왜 널 그 프로젝트에 참여시켰는지......물론 넌 뛰어난 성적으로 회사를 입사했지만 너보다 성적이 더 좋은 애들은 10명도 넘었어. 그리고 신출내기인 널 그런 대대적인 프로젝트에 참가시킬 리가 없었는데......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완벽한 방법이었어. 이것으로 모든 게 다 연결되고 있어.]
그리고 준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저었다.
[명수 그 새끼.....완전히 미친놈이었어.]
그러자 기춘의 말에 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미치지 않으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지. 명수 새끼는 나에게 어둠의 문을 열게 만들기 위해서 그 프로젝트에 참가시켰어. 언젠가 내가 그 상자를 발견하고 그 책을 사용해서 그 새끼의 소망을 실현시켜줄 수 있도록 말이야. 그 때까지 명수는 날 우리 속에 감금해 놓았어. 그게 바로 명수 새끼의 계획이었어.]
준하가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그렇게 토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준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며, [후후후, 좋아! 네가 그렇게 비열하게 나온다면 나도 사양하지 않겠어. 충분히 보답을 해 주지!] 라고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외쳤다.
그런 준하를 바라보며 기춘이 씨익 웃으며, [어이, 나도 아직 이빨이 남아 있어. 회사의 밑바닥에서 이렇게 참고 살아왔어, 죽기 전에 그 보답을 해주고 싶어.] 라고 말을 했다.
[영감님, 그런 눈은 나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야. 그 눈의 문양이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어둠의 힘을 환히 볼 수 있는 나로서는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그러자 기춘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도 잘 알고 있어. 이 오른쪽 눈이 주인을 잃고서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을....내가 얻은 힘은 주인에게 연결될 때에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어. 그럼 해결책은 간단하잖아. 넌 내가 오래 전부터 인정했던 놈이고 내가 마음에 들어 했던 대만이의 아들이야. 난 아무 문제없이 네 밑으로 들어갈 수 있어. 네 ‘신봉자’가 되어 주지.]
기춘이 잘난 체 가슴을 뒤로 젖히면서 말을 했다.
[영감님....역시 대단한 걸. 뭐 영감님의 능력이야 두 말할 나위가 없긴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응? 뭐야? 그렇게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와 영감님의 관계는 지금과 동일한 걸로. 가령 주종 관계가 된다고 해도 나에게 솔직하게 쓴 소리를 해 주길 원해.]
그러자 기춘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젠장, 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어? 어둠의 계약에는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단서가 붙어. 그리고 ‘신봉자’와 ‘계약주’ 사이에는 ‘계약자’라는 중간 보스가 존재하지. 두 단계의 레벨 차이에도 너와 내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자고? 그게 나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 생각해 봤어?]
기춘이 곤란한 얼굴로 말하자, [어이, 영감, 싫어? 그럼 이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지. 내가 명수에게 잔뜩 복수를 하고 있을 동안 영감님은 여기 지하실에 박혀서 소문이나 듣고 있으라고.], 준하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국 기춘은 준하의 조건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한 때 원 인터내셔널의 최고 지략가라고 불렸던 남자가 준하의 부하가 되고 있었다.
******************************
이렇게 해서 12년 전의 진상을 알게 된 준하는 기춘마저 수중에 넣은 채 명수에 대한 엄청난 분노로 몸을 태우고 있었다.
- 반드시 모두 다 빼앗아가 주겠어!
준하는 결의를 날카로운 검으로 압축하면서 지하 2층의 업무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지하 3층에서 지하2층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제일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낸 준하는 창고 안으로 들어간 후 화장지를 몇 개 챙긴 후 구석에 있는 사무용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서서 화장지의 끝에 유성 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그건 유리에 대한 지시 사항이었다.
잠시 후 준하는 최상층의 플로어 문을 연 후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실 안의 모든 독실을 점검하며 화장지를 보충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준하는 간부 임원실의 문에 노크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가며, [화장실을 점검하러 왔습니다.] 라고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한 후 임원 전용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안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준하는 화장지를 교환한 후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준하는 전무실의 문에 노크를 한 후 똑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명수는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으므로 대기실에는 유리 혼자만 남아서 준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하는 즉시 유리를 보면서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고서 턱을 앞으로 밀었다.
‘입을 다물고 하던 일을 계속 해.’라는 신호였다.
실로 건방지고 차가운 신호였지만 준하를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뺨은 붉게 물든 채 눈은 축축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발정 상태에 들어가 있는 유리를 준하는 벌레를 씹은 얼굴로 바라본 후 고개를 숙인 채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두 개의 화장지 홀더를 새 것으로 교체했다.
잠시 후 준하는 화장실을 나와서 문 앞에 서서 유리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면서 한손으로 찢어낸 화장지를 흔들어서 신호를 보내 주었다.
유리는 곧바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화장지에 적힌 준하의 메모를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메모가 적힌 화장지를 변기 안으로 흘러 보내서 증거를 없애고 있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유리는 지시 사항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리며 이마에 주름을 짓고 있었다.
- 한 가지는 간단히 할 수 있는데, 나머지 하나가 문제야......
준하의 명령이 실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유리는 골치를 섞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알려주려고 해도 자신이 먼저 준하에게 접근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 유리의 휴대폰이 울렸다.
유리가 당황해하며 전화를 받자 상대는 바로 우성이었다.
유리는 곧바로 명수에게 액정 화면을 보여주며 귓속말로,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어 보았다.
명수가 알아서 하라고 턱을 들어 올리며 눈빛으로 지시를 내렸다.
유리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며 명수에게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우아하게 몸을 돌려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유리는 곧바로 휴대폰을 귀에 가져가며, [무슨 일이세요?] 라고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유리로서는 우성이 준하의 가까운 부하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존댓말을 한 셈이었지만, [아, 잠깐만. 나에게 존대를 하는 것을 혹시 명수가 듣게 되면 의심을 할 거야. 평소대로 건방진 말투로 해 줘. 그게 나도 편해.] 라고 전화기 너머로 우성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아. 알았어. 무슨 일이야?] 라고 유리가 예전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우성은 다음 주 초의 보고를 좀 연기해 달라고 말을 했다.
이번 주에는 준하와 너무 오래 행동을 했기 때문에 아직 보고서를 정리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유리는 알았다고 말한 후 대신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용건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주인님에게 지시를 받았는데, 인감도장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데이터는 무리에요. 데이터가 들어 있는 컴퓨터에는 접근할 수 있지만 로그인을 하려면 패스워드가 필요해요. 명수는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어요.]
[알았어. 그 내용을 준하님에게 보고해 주지. 또 다른 지시가 있으면 이쪽에서 연락할 거야.]
유리는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끊고서 후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절묘한 타이밍의 절묘한 전화였지만 그것 역시 준하의 의지, 아니 어둠의 존재가 행운의 수레바퀴를 작동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한 번 돌기 시작한 수레바퀴는 그 누구도 멈출 수가 없었다.
오직 종말만이 여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4-12.
지현은 시계를 확인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서 자신의 로커로 향했다.
로커의 문을 연 지현은 검은 가죽으로 된 핸드백을 손에 든 채 탈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보통 때처럼 전철을 탄 후 평소의 역에서 하차를 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마트의 주차장으로 가지 않고서 원래의 자기 아파트로 향하고 있었다.
지현이 아파트의 문을 열자 한산한 분위기가 방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최근 20일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아파트 안은 바닥에 희미하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지현은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그대로 마루 위로 올라가서 부엌으로 들어간 후 핸드백을 식탁 위에 정중하게 내려놓았다.
핸드백을 내려놓은 지현은 곧바로 몸을 뒤로 돌려서 재킷을 벗고 블라우스의 소매 단추를 풀어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서 재빨리 방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1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먼지가 깔끔하게 제거된 채 아파트 안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옷장 안에는 정장이나 외출복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현은 전혀 상관하지 않은 채 소품의 위치를 바꾸어서 혜리를 속이기로 했다.
청소가 끝나고 나자 지현은 냉장고 문을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식재료를 확인한 지현은 사온 와인을 꺼낸 후 핸드백에서 앰플과 주사기를 꺼냈다.
앰플의 내용물은 항우울제 약을 베이스로 한 최음제로 사고를 마비시키고 온몸을 뜨겁게 타오르게 만드는 기능이 있었다.
지현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었지만 보통 인간에게 주입되면 육체는 뜨거운 흥분 상태에 접어들었고 의식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지현은 그 앰플의 목 부분을 부러뜨린 후 이번에는 다른 용기를 꺼냈다.
용기는 지름 2센티에 길이 10센티의 원통 모양으로 그 안에는 끈적거리는 흰색의 액체가 반 정도 들어가 있었다.
그 용기를 바라본 지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저런 계집애에게 먹여주기에는 진짜로 아까운데.....하지만 이것도 주인님의 의지니까....] 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 흰색의 액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액체의 정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준하의 정액이었다.
지현은 용기의 뚜껑을 연 후 앰플의 내용물을 용기에 혼합시킨 후 다시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정액과 최음제가 뒤섞인 용기를 조심스럽게 흔들어대면서 내용물을 혼합시킨 후 그 액체를 주사기 속으로 빨아들였다.
그리고 와인의 코르크 속으로 바늘을 찔러 넣어서 내용물을 와인 속으로 주입시킨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냉장고 속으로 넣어 놓았다.
와인의 준비를 마치고 나자 지현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서 이번에는 바디와시를 확인해서 안이 1/4정도 차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갈색의 작은 병을 꺼냈다.
그 병은 박카스 병을 닮은 병으로 그 안에는 100ml의 액체가 들어가 있었다.
지현은 그 병을 빤히 바라보다가 씨익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 정도로는 부족할 거야. 역시 이걸로 하는 게 좋겠어.] 라고 중얼거리며 그 병을 다시 핸드백 안으로 넣어 놓고서 그것과 똑같은 다른 병을 꺼냈다.
조금 전의 병과의 차이점은 캡의 색깔만으로 조금 전은 마개가 붉은 색의 캡이었지만 지금 지현이 들고 있는 병은 검은 색의 캡으로 되어 있었다.
적색과 흑색의 차이는 바로 악의의 차이였다.
‘위험한 빨강’과 ‘악의의 검정’ 바로 그게 캡의 색깔을 결정짓고 있었다.
빨강색의 병에 들어 있던 것은 피부 흡수에 특화된 강력한 최음제의 희석액이었다.
그 최음제는 예전에 지현의 물레방아 고문으로 감전사했을 때 사용되었던 약으로 효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지만 효과가 조금 늦게 나타나는 특성이 있었다.
약이 발라진 부분에서 온몸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때문에 그 부분의 감도가 매우 강해지면서 뜨겁게 달아오르며 찌릿찌릿한 고통을 주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약이 발라지는 횟수에 의해서 그 효력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며 그 효과가 점점 몸에 쌓이게 되어 있었다.
충분히 여자를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약이었지만 지현은 사악한 미소를 띠우면서 그것보다 더욱 더 효과가 강력한 검은 색의 캡을 선택해서 바디와시 안에 혼합시키고 있었다.
[후후후. 기다려지는데....네가 이 약의 효과에 익숙해질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일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거야.]
지현은 요염한 미소를 더욱 더 사악하게 물들이며 최음제와 섞인 바디와시를 원래 자리에 놓아두었다.
마침내 욕실마저 준비를 마친 지현은 그대로 핸드백을 든 채 침실로 가서 침대의 옆에 핸드백의 지퍼를 연 채로 숨겨 놓았다.
방의 정면에서는 핸드백이 보이지 않았지만 침대에 누워서 손을 뻗으면 곧바로 닿을 수 있는 위치에 핸드백을 놓아둔 후 지현은 다시 현관으로 나왔다.
현관에 도착한 지현은 처음으로 하이힐을 벗고서 슬리퍼 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준하의 저택에서는 항상 하이힐이나 맨발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슬리퍼를 신는 습관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슬리퍼로 바꿔 신은 지현은 그래도 부엌으로 가서 에이프런을 목에 걸고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유효기간이 거의 다 되어 가는 것으로 적당하게 만들어볼까? 뭐, 그런 계집애에게 먹이는 거니까 적당히 만들면 될 거야.]
잠시 후 지현은 양배추와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콜드 스테이크, 카나페, 콩소메 스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2인분 요리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치며 부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현이 냄비 등을 씻어서 건조기에 넣은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인터폰 앞으로 가서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모니터에 긴장한 얼굴의 혜리가 나타나 있었다.
오토락을 해제하며, [어서 와, 생각보다 빨리 왔네.] 라고 인터폰에 대고서 말을 했다.
[아, 네. 바로 올라갈게요.]
몇 분 후 핸드백을 든 혜리가 현관문 앞에 서서 지현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와우, 지현 선배, 방이 상당히 깨끗하네요. 역시....게다가 센스가 매우 뛰어난데요.]
지현이 생긋 미소를 지으며, ‘이제 난 여기에 살지 않아. 게다가 이제 곧 너도 동거인이 될 거니까 기대해도 좋아.’라고 생각하며, [그래? 난 잘 모르겠는 걸. 특별히 깔끔하게 하고서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 라고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배고프지? 적당히 뭘 만들어 놓았으니까 저녁이나 먹자.]
[아! 벌써 만들었어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혜리가 사과를 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 젠장, 네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도 만들지 못해. 건방진 계집애.
지현은 실룩실룩 경련하는 뺨을 억지로 참으며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뭘. 대단한 게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맛이 없다면 남겨도 돼.]
지현이 혜리에게 의자를 빼 주면서 말을 했다.
원래 혜리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끼고 있던 지현이었지만 혜리의 밝고 사랑스러운 표정과 말에 더욱 더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은’ 기분이 치밀어 올라서 도저히 그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 안 돼! 이런 기분으로 이 애에게 손을 대면 틀림없이 완전히 부서 버리고 말 거야. 이 애는 주인님의 장난감 후보야. 확실히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 돼.
지현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냉장고로 걸어갔다.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와. 옷걸이는 거실에 있는 것을 사용하면 돼. 나도 와인을 준비한 후 갈아입을 거야. 긴장을 풀고 저녁을 먹자.]
지현이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혜리가 알았다고 말하며 핸드백을 들고서 거실로 걸어갔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지현은 거실을 피해 침실로 들어간 후 흰색의 핫팬츠에 라이트그린의 탱크톱이라는 매우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속옷을 아래위 둘 다 입고 있지 않았으므로 탱크톱을 앞으로 크게 튀어나오게 만드는 커다란 유방을 그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두까지 확실히 그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면 당연히 유두의 링까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지현은 링의 모습에 한순간 당황했지만 자신이 준하의 소유물이라는 증거인 그 링을 벗길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고 만일 원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을 그걸 벗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엌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자 핑크색의 러닝팬츠에 빨강과 흰색이 뒤섞인 티셔츠를 입고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는 혜리의 모습이 보였다.
티셔츠의 사이즈는 원래 사이즈보다 두 사이즈 정도 큰 편으로 그 안에서 가녀린 혜리의 육체가 춤을 추고 있었다.
- 젠장....이 애. 순진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자신을 보여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데....약삭빠른데...
지현은 그 광경을 본 순간 혜리가 평소 남자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자신의 매력을 제일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혜리는 혜리대로 지현의 매우 뛰어난 몸매에 완전히 정신이 빼앗겨 있었다.
날씬하고 긴 뛰어난 각선미의 다리가 거의 다 밖으로 드러나 있었으므로 그건 어설픈 알몸보다 더욱 더 요염하게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탱크톱을 크게 앞으로 밀어내고 있는 풍만한 젖가슴과 그 골짜기의 그림자는 모든 여성들의 동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커다란 유방으로 위해서 앞으로 크게 튀어나와 있는 탱크톱의 옷자락 아래로 매끄럽고 날씬한 복부와 세로로 길게 갈라져 있는 배꼽이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고 있었으므로 그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정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와우, 지현 선배....보통 때 그러고 있는 거예요?]
완전히 넋이 나간 혜리가 멍한 목소리로 물어오자, [왜? 이상해?] 라고 지현이 몸을 쭉 펴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 아니에요.....너무 멋져서.....만일 남자 주위에서 그러고 돌아다닌다면 그 남자는 미치고 말 거에요. 파괴력이 엄청난데요!]
혜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지현의 모습을 칭찬하며 말했다.
그러자 지현이 씨익 웃으며, [혜리도 매우 귀여워. 내가 남자였다면 바로 덮치고 말았을 거야.] 라고 칭찬을 했다.
그러자 혜리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이며, [그런....나 따위는...] 라고 작은 목소리로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 혜리의 모습에 지현은 알 수 없는 초조감을 느꼈지만 그녀의 옆으로 가볍게 다가가며, [후후. 이제 먹자. 차가워져 버리면 맛없는 요리가 더욱 더 맛이 없어져 버려.] 라고 농담을 던졌다.
잠시 후 지현은 미소를 지으며 와인에 손을 뻗어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와인을 개봉했다.
그러자 부엌 안에 붉은 와인의 달콤한 향기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지현은 즉시 혜리의 글라스에 1/5정도 와인을 따라주었다.
두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혜리는 즉시 지현의 뛰어난 요리 실력에 감탄을 하기 시작했고, 지현은 혜리의 글라스에 와인이 비는 즉시 와인을 다시 따라주고 있었다.
곧 혜리는 최음제와 술기운에 의해서 머리가 점점 몽롱해져가고 있었다.
- 후후후....빨갛게 달아오른 뺨과 말투로 봐서 이제 매우 취한 것 같은데....게다가 조금 전부터 4번째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어....이제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는 것 같은데....게다가 브라와 티셔츠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젖꼭지가 딱딱하게 발기해 있어.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은데.....와인도 이제 거의 다 비었고....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 같아.
지현이 혜리의 상태를 냉정하게 관찰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완전히 흥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 혜리에게 지현은 스윽 손을 뻗어서 그녀의 팔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와우, 혜리야. 땀이 굉장히 많아. 여기가 좀 더워?] 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혜리는 지현의 손이 닿은 순간 움찔 몸을 떨면서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로 지현을 바라보았다.
[아....아니에요....여긴 전혀 덥지 않아요.]
혜리가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지현은 조금 전부터 혜리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혜리를 힐끗힐끗 훔쳐보듯이 지현의 입술이나 유방, 손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혜리는 한 번도 자신에게 레즈비언의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지현의 성감대를 바라보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지현은 혜리의 상태를 완전히 파악한 채 ‘때가 무르익었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온몸이 땀투성인 걸. 먼저 욕실을 사용해. 욕조에 물을 받아 놓았으니까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어.]
지현이 혜리에게 장난을 치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권유를 했다.
혜리는 한순간 지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한 눈빛으로 지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아...네....그럼 먼저 쓸게요.]
마침내 지현의 말을 이해한 채 혜리는 확실히 낙담한 표정을 지은 채 지현이 가리키는 욕실로 향했다.
혜리로서는 지현 선배와의 즐거운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먼저 목욕을 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지현에게서 거절을 당한 기분이 들어서 낙담을 한 것이다.
- 아아...바보 같이....너무 많이 마셔 버렸어....혼자서 마구 까불면서 떠들어대다니....바보 같이....지현 선배가 나에게 질려 버렸을 거야....후우....
혜리는 완전히 낙담한 채 잘 돌지 않는 머리로 자기혐오에 빠져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속옷을 챙긴 후 욕실로 들어가서 탈의실에서 실내복을 벗고서 알몸이 되었다.
혜리의 알몸은 상당히 예뻤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새하얀 피부에 가녀린 팔다리, 허리도 가늘고 날씬했으며 약간 작은 편이었지만 위를 향해서 봉긋 솟아올라 있는 탄탄한 유방은 미유(아름다운 유방)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고 탄력적인 엉덩이는 팽팽하게 늘어나 있어서 강한 탄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있을 때에는 호리호리한 몸매 때문에 볼륨이 부족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여자로서의 성적 매력이 가득 담겨 있는 아름다운 몸이었다.
혜리가 완전히 낙담한 채로 욕실의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기분은 커다란 욕실의 사이즈를 본 순간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와아...큰데...역시 비싼 아파트는 달라....내 아파트 욕실은 발도 제대로 뻗을 수 없는데....좋다, 큰 욕실...]
그녀의 기분은 즉시 부러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혜리는 샤워기의 헤드로 손을 뻗은 후 수도꼭지를 돌려서 뜨거운 물로 온몸을 가볍게 적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샤워기의 부드러운 물줄기가 유방에 닿은 순간 혜리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아으으으윽.....]
혜리는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를 내면서 뜨거운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꼭 껴안고서, [아우우우웃.......뭐....뭐야? 온몸이....이상해....뜨거워...], 허리를 부들부들 꿈틀거리면서 자신의 몸의 변화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젖꼭지가 아플 정도로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고 허벅지 사이에서는 미끈거리는 애액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싫어어엇!....나...흥분하고 있어.....어째서?]
의문이 끓어올랐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리가 뿌옇게 흐려지며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혜리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샤워기의 헤드를 다시 걸어놓은 후 욕조로 향했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쉬면서 오른손으로 욕조를 붙잡은 채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가랑이 사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물 온도는 어때?]
바로 그 순간 뒤의 탈의실에서 지현의 말소리가 들려오자 혜리는 깜짝 놀라면서 왼손을 가랑이에서 떼어 놓고 있었다.
[아앗! 네....딱 적당해요.]
혜리는 당황해하며 대답을 한 후 재빨리 욕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풍덩 소리를 내며 욕조 속으로 들어간 혜리는 가슴이 크게 두근두근 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히익! 깜짝 놀랐어! 여기서 자위를 하고 있었다니! 여긴 지현 선배의 집이야....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
혜리는 양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더 혜리를 놀라게 하는 말이 탈의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알았어. 혜리야, 우리 같이 해.]
혜리가 놀라서 머리를 들어 올리며, 불투명한 유리문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문이 열리면서 알몸의 지현이 욕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혜리는 욕조 속에 몸을 깊이 파묻고서 넋이 나간 얼굴로 지현을 바라보았다.
[어머? 싫어?]
그러자 혜리는 고개를 격렬하게 좌우로 흔들면서, [아, 아니에요. 싫지 않아요.] 라고 당황해하며 대답을 했다.
지현은 신체의 앞부분을 타월로 숨긴 채 욕실 안으로 들어와서 혜리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타월의 옆으로 드러나 있는 지현의 피부는 예술 작품일 정도로 매끄러웠고 투명할 정도의 흰색을 띠고 있었다.
지현은 완전히 넋을 잃은 채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고 있는 혜리를 보며, [후훗, 그렇게 보지 마. 부끄럽단 말이야.] 라고 씨익 웃으며 말을 했다.
혜리가 당황해하며 시선을 돌리며, [아앗.....죄송해요....나도 모르게....하지만 매우 깨끗해요. 선배 피부는....] 지현의 알몸을 칭찬하고 있었다.
[후후...너도 예뻐....어머나, 혜리는 겉보기보다 매우 글래머인데.]
지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욕조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 그런? 하지만 지현 선배와 비교하면 저 따위는 전혀......]
혜리가 고개를 흔들면서 그렇게 말을 했지만 도저히 문장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바로 혜리의 눈앞에서 지현의 커다란 유방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혜리의 눈빛이 그걸 보면서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으므로....
[히잇! 선배? 그....그건?]
몇 초 후 혜리가 간신히 그렇게 중얼거리자 지현이 씨익 웃으며, [어....아...이거? 내 소중한 분이 이걸 좋아해.] 라고 말하며 양쪽 유방을 양손으로 아래에서 떠받치고서 위로 들어 올려서 젖꼭지와 그걸 관통하고 있는 링을 더욱 더 과시하듯이 보여주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혜리를 보며 지현은 더욱 더 강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스윽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도 달려 있어.]
지현은 털이 하나도 없는 치부와 클리토리스, 그리고 음핵을 세로로 관통하고 있는 링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지현의 하복부에는 계약서라는 글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다.
조금 전 탈의실 안에서 옷을 벗을 때 지현 자신도 알아차렸지만 아직 지현과 준하의 관계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으므로 준하가 그걸 보이지 않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혜리는 새하얗고 매끄러운 지현의 하복부는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며 눈을 더욱 더 크게 뜨면서 작게 숨을 삼키고 있었다.
[후후...놀랐어? 난 이런 여자야? 날 경멸해?]
지현이 아주 요염하게 미소를 지으며 혜리에게 조용히 물었다.
지현의 질문에 혜리를 머리를 격렬하게 흔들면 부인을 했지만 말이 나오질 않고 있었다.
지현이 그런 혜리를 보며 생긋 웃으며,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해 줘. 이 일은 혜리 밖에는 모르는 거야...] 라고 조용히 속삭이면서 욕조 속으로 한 발을 집어넣고 있었다.
혜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채,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고서 등을 앞으로 들어 올려서 욕조와 자신의 몸 사이로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지현이 재빨리 그 틈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현이 욕조 속으로 들어오자 혜리를 온몸을 움츠린 채 동그랗게 말아서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자 지현의 날씬한 긴 다리가 혜리의 몸을 사이에 둔 채 양쪽으로 쭉 뻗어왔다.
아직 혜리와 지현의 알몸은 서로 밀착되지는 않고 있었지만 거의 몇 mm 정도 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아서 밀착되기 바로 직전 상황이었다.
혜리의 팽팽한 긴장감이 피부 너머로 지현에게 전해져오자 지현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혜리야, 이런 식으로 목욕을 같이 하는 게 싫어?] 라고 상냥하게 물어왔다.
그러자 혜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힘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이제 혜리는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심장이 마치 터질 것처럼 쿵쿵거리고 있었고 온몸이 불에 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 전 양손으로 무릎을 껴안은 것은 아플 정도로 발기해 있던 젖꼭지가 이제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발
추천53 비추천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