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물] 그와 그녀의 비밀 15, 16, 17화.
15화. 소개팅 약속.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흘러갔다.
세키의 일상은 교토에서의 평소와 같았지만, 주변환경이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1.고등학교 진학시험을 준비해야하는 수험생이 된 것.
다행스럽게도 세키의 학업성취도는 남들에 비해 크게 뒤쳐진다거나 하는 문제가 없었기에
고입시험 준비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2. 사촌인 아오이가 세키가 있는 교토에서 살게 되었다.
돌연, 세키와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겠다며 외삼촌을 놀래키더니
도시생활에 익숙해져야한다며 서둘러 전학까지...
그 후에도 이런저런 잡음이 있었지만, 그녀는 세키네 집과 가까운 곳에서 자취생활을 하길 원했다.
여담이지만, 그녀는 시골에 있는 여자중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벗어나 또래의 도시남자들과 연애를 하고 싶어했다.
덕분에, 외숙모는 아오이의 집을 방문한다는 핑계가 생겨 2주에 한번꼴로 교토에 상경해서
세키와의 비밀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여전히 세키를 향해 일편단심이었지만, 항상 그를 배려해주었다.
그와의 비밀관계가 밝혀지게 된다면, 그가 곤란에 처할 거라는 것을 이해하였으므로
그녀의 행동은 언제나 신중했고, 때로는 참기 힘든 순간에도 그를 위해 인내할 줄 알았다.
그런 그녀의 배려 덕분에 세키 역시도 그녀를 소중하게 여겼다.
한참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였고, 원하면 여자를 건드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언제나 그를 위해 애써주는 그녀를 위해 애써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농염한 외숙모의 육체와 마음까지 빼앗아 가진 그에게 이맘때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계집애들은
관심을 갖기에는 수준이 떨어져보이기도 했다.
- 그녀(스미레)는 언제나 세키가 원하는 방향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서 움직이지만,
또래의 여자애들은 남자가 자신에게 뭔가를 해주기를 원하고, 매순간마다 변덕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
투드득 투드득.. 샤아아아아...
일요일 아침부터 여름을 알리는 여름비가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내리는 비가 그치면, 교토도 한여름의 기온이 찾아와 무척 더워지겠지..."
작년까지 연례행사처럼 여름철만 되면 고열로 앓아누웠었던 그였기에
올해에는 부디 아무런 탈도 나지 않기를 바라며,
세키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빗방울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띵동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문을 열어줄 사람이 있나 잠시 생각을 해보던 세키는 집안에 누나와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는 수 없이 직접 문을 열기 위해 움직였다.
누나는 보통 이런 일에 수고를 하지 않았다.
세키가 보기에 이럴 때 그녀는 무척 게을렀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남자친구를 사귀겠다며 아침부터 화장을 하고 이옷 저옷 입어보며
소개팅을 갈 때에는 평상시 그 게으른 누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부산을 떨지만...
철컥.
문을 열자, 뭔가를 잔뜩 든 채로 비에 쫄딱 젖어있는 낯익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아.. 황금같은 주말에 비라니..."
투덜거리며 신발장 앞에서 가볍게 긴 머리카락에 스며든 물기를 털어내는 소녀는
세키의 사촌인 키세야마 아오이-외숙모 스미레의 딸이며 세키와는 동갑이다.- 였다.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자,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에 스며들어있던 물방울들이 세키에게도 튀어나갔다.
"너, 우산은 어쩌고 이렇게 비를 맞으며 찾아왔냐?"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소녀는 가지고 있는 물건을 세키에게 전해주며 말했다.
"소나기도 아니고.. 이 정도 비에 불편하게 우산을 들고 다닐 수는 없잖아?"
외삼촌을 닮았는지 그녀는 활달하고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고, 사교성도 좋아 또래 친구들이 참 많았다.
물론 작년까지는 여자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주로 또래 여자애들과 친할 뿐, 이성 친구는 거의 없었지만...
"아.. 안 되겠다. 너무 많이 젖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목욕하고 가야겠다. 집안에 누구 있니?"
"시즈카 누나가 방에 있을거야."
"흐응~ 그래? 언니가 있으니 안심이야.. 아무도 없으면 혈기왕성한 사내가 몰래 훔쳐볼지 누가 알아? ㅋㅋㅋ"
아마도 세키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어디서 저런 기운이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참 신기할 정도로 그녀는 언변이 뛰어났다.
"보라고 해도 안 봐.. 어딜봐서 널 여자로 생각하겠냐?"
그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반격을 가하자,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가슴을 한데 모았다.
"어머? 이 가슴을 보고도 몰라?"
"....."
"아아... 아오이에게는 말빨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그가 GG를 선언하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비켜주자,
그녀는 신발을 벗고 곧바로 욕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꽝! 하며 욕실문이 세게 닫히더니 잠시후 "철커덕" 하는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안 본다. 안 봐."
세키는 그녀가 들을 수 있게 일부러 큰 소리를 내어 말한 후, 받은 물건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 때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열리더니,
빼꼼하니 욕실 문밖으로 얼굴만 내보인 그녀는
"세키! 다음 주에 약속한 거 잊지 않았겠지?" 라며 그의 반응을 확인한다.
"아아... 알고 있어. 점심 먹고 오후 1시에 <이노다 커피가게>에서 만나는 거지?"
"잊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구만~ 이걸로 안심이야~"
"너.. 그거 확인하려고 이 시간에 우리집에 찾아온 거냐?"
"물론... 주선자인 내가 꼼꼼히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전화로 확인하면 되잖아.."
"... 난 전화 같은 걸로 대화하는 거 별로라서...
그리고 엄마가 고모네 드시라고 싸준 음식도 전해줘야하기도 하고...
아참! 당분간은 엄마가 음식을 싸주지 못할거야, 요즘 몸이 안 좋으신가보더라구~ "
"많이 편찮으셔?"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
세키가 전해받은 물건이라는 것은 외숙모가 만든 음식이었다.
아오이가 이곳(교토)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된 후로, 그녀는 종종 음식을 만들어서
아오이에게 보내줬고, 가끔은 세키네 집에도 보내줬다.
"알았어.. 이 얘기는 나중에 더하기로 하고, 욕조에 물 가득 찼겠다. 얼른 씻고 나와."
"OK~"
.
.
.
갑작스러운 얘기지만, 다음 주 일요일에는 4대 4 소개팅 자리가 약속되어 있었다.
이런 자리에 나가는 게 별로 내키지 않던 세키였으나,
이 소개팅의 주선자를 아오이가 맡게 되면서 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며칠 전에 세키네 학급으로 찾아온 아오이는 - 같은 학년이었으나 교실이 달랐다 -
자신이 주선자 역할을 맡아 소개팅 자리를 계획했는데,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남자와 여자가 각각 1명씩
펑크를 내버렸다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왜 꼭 내가 나가야하는데?"
"그야 물론, 이 아오이님께서 부탁하시니까!"
"......."
"냐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어이~ 젊은이! 매사에 그렇게 진지하시면 빨리 늙는다구요~"
아오이는 금방 장난치다가도 세키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면,
금세 애교섞인 말투로 상황을 모면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녀석은 도대체..."
기가차고 어이가 없지만, 어찌된 일인지 짜증을 낼 수가 없어 당황스러운 세키였다.
아오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정색하며 얘기했다.
"교토에 전학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아는 남자애라고는 너 밖에 없잖아.
그리고 내 정보망에 의하면 세키 넌...."
"내가 뭐?"
"... 동년배 여학우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다는 믿지 못할 정보가 있어.
어이~ 정말이라구. 신뢰도 99%를 자랑하는 이 아오이님의 정보니까 기뻐해도 괜찮아~"
"....."
"어쨋든 이번 한번만 좀 도와줘.. 너 기억 안 나?
어렸을 때부터 여름철마다 우리집에 놀러와서 앓아누워버린 널 간호하느라 고생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당연히 외숙모지.."
"그리고 이 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아니되어요~ 단골 환자님."
"....."
결국 말빨에 밀린 세키는 그녀의 뜻대로 소개팅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펑크를 낸 남자4호 땜빵으로...
.
.
.
"그건 그렇고, 펑크를 낸 여자4호의 자리를 메꿔줄 사람은 구했냐?"
"물론이지! 내가 우리반 반장을 설득하는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면 까무라칠껄?"
"너네 반장이라면... 버지니아?"
"오.. 알고 있네? 평소에 여자에게는 관심없는 척 하더니만...역시 남자였어.. 짐승~~ ♡")
"......"
버지니아는 아오이네 반의 반장 이름인데,
이름에서 느껴지듯 그녀는 순수 일본인이 아닌 혼혈이었고, 그녀가 유명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더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외교관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미국의 한 대기업 회장님의 딸이었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사업을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것이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접할 법한 그녀의 출생의 비밀은 한참 호기심 많고 이야깃꺼리를 좋아하는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만큼 흥미로운 관심사였다.
더군다나 그녀의 이름부터 이국적이었고, 외모 또한 혼혈의 장점이 합쳐진 듯
또래 계집애들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성숙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머리도 좋고, 성격도 강단이 있어 학급의 반장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반장 자리가 어울리는 소녀였다.
이렇게 완벽한 조건들을 모두 갖춘 것 같은 그녀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녀의 낯가리는 성품 또한 학우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단순히 낯을 가린다기 보다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할까? 굳이 말하자면 대인 기피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녀의 배경이 범상치 않다보니, 훗날 그녀와 결혼을 한다면 대기업 이사장 자리 정도는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주위의 어른들의 가식어린 친절함 속에 자라왔고,
출세를 위해 그들의 자식들은 항상 그녀에게 친한 척 접근해왔었다고 한다.
이쯤되면 슬슬 감이 잡히겠지만,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필요이상으로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세키의 또래 학우들은 그녀를 가리켜 <하늘의 파이> -pie in the sky 일명 그림의 떡- 라고 말할 때도 있고,
<남자들의 로망>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자는 그들이 감히 건드려볼 수 없는 먼 곳의 그녀라는 의미였고,
후자는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과 집안 배경, 그리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하는 도도한 모습 등등이
매력있다는 의미로 붙인 말이었다.
"그런 그녀가 소개팅에 참석한다니..."
도대체 그녀(아오이)는 어떤 말로 그녀(버지니아)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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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키세야마 아오이.
1주일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소개팅 자리에 어울리도록 멋스럽게 옷을 빼입은 그를 보며, 가족들이 한마디씩 말을 덧붙인다.
"벌써 소개팅할 나이가 된 건가? 허허헛.. 세월 참 빠르군."
"그러게요.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더니..."
"중딩 주제에 소개팅이라니..쯧쯧쯧..."
순서대로 아버지(키세야마 타이세이), 어머니(키세야마 사아야키), 누나(키세야마 시즈카)의 말이다.
다른 말은 다 넘어갈만 했는데, <중딩> 이라는 말에 기분이 팍 상해버린 세키.
"너도 1년전까지는 중학생이였으면서..."
누나 시즈카도 1살을 더 먹고 올해부터 고교생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더니 딱 그짝이군. ㅡ,.ㅡ"
"뭐라고? ㅡㅡ^"
"험험.. 세키 너 소개팅 간다더니.. 이렇게 누나하고 말다툼하다가는 소개팅이고 뭐고 다 망칠지도 모른다?"
"그래.. 시즈카 너도 동생하고 그만 싸우고 엄마를 도와서 집안 일 좀 거들어주렴."
세키와 그의 누나의 말다툼이 점점 격심해질 것 같자, 부모님들이 나서서 화제를 돌리신다.
그와 그녀는 씩씩 거리며 아직도 아웅다웅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와 그녀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세키였기에, 그가 아플 때에는 그의 어머니와 누나도
그를 간병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사실을 세키 자신도 알고 있었다.
누나와의 다툼은 그저 건강해진 동생의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장난꾸러기 누나의 애교 정도?
다만, 이런 다툼도 자주 발생된다면 버릇이 되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
서로 간에 사용하는 언사는 신경써서 조심해야하겠지만...
약속시간 30분 전, 약속장소인 이노다 커피가게 안.
- 이노다 커피가게는 교토에서는 제법 유명한 커피가게여서 젊은 남녀들의 만남의 광장 같은 장소로
자주 애용되는 곳이다. -
여자애들과의 만남에서 이 정도 일찍 나가주는 게 매너이다.
물론 현실은 여자들이 원하는 남자의 매너일 뿐이고, 세키 주변의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약속시간에 딱 맞춰 들어오면 감사할 일이고, 시즈카 누나같은 경우 30분 지각 정도는 예사로운 일이다.
예상대로 남자 4인은 모두 30분 전에 안착. 그리고 여자 4인은 모두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때였다.
"다들 일찍 왔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자 4인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는데,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촌인 아오이였다.
"넌 왠일이냐?"
주선자는 보통 소개팅 장소를 잡고, 남녀 출연자들과 약속을 잡아주는 선에서 그 역할을 끝내는 게 보통이었다.
소개팅은 맞선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아닌 가벼운 만남을 모토로 한 데이팅 서비스였기에,
주선자가 가운데에 자리해서 멤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규칙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긴 하다.
"어라? 내가 아직 말 안 했나? 나도 여기 출연자 중 1명이야~"
"뭐라고!?"
여자 1명이 약속을 펑크내서 버지니아를 설득해서 멤버를 채웠다길래,
아오이 본인이 소개팅에 참여해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었다.
그녀는 입이 가벼운 편이라, 지금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자연스럽게 외숙모의 귀에 들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머릿 속에서 위험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외숙모에게 나에 대해 말할 거리가 없도록 오늘은 최대한 말을 아껴야겠는 걸..."
세키가 주변을 둘러보니, 그를 제외한 남자 3인의 얼굴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져있었다.
그녀가 방금 한 말(오늘 소개팅에 참여할 여자 4명 중 1명이라는 말) 때문에
늑대 세 마리가 그녀를 음흉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십중팔구 모르겠지만...)
그녀는 가게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여자 3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오이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애들 사이에서 그녀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외숙모를 닮아 미인이었고, 또래친구들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다보니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여성스러운 몸매를 갖추고 있었고, 남자들에게는 덜한 편이지만 유머감각과 애교도 수준급에
소개팅 주선자가 될 정도로 행동력도 있고, 인간관계도 뛰어나다.
사실, 사촌만 아니라면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외숙모의 딸이 아니라면-
사귀고 싶을 정도로 아오이는 괜찮은 여자였다.
아오이야말로 또래 남자애들의 선망의 대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버지니아의 경우 이국적인 외모와 집안 배경이 그녀를 돋보이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지만,
그녀의 도도해보이는 성격과 타인을 배려하는 게 부족한 말투나 행동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며,
집안 배경이 너무 좋다는 것 또한 서민 가정의 남자들에게는 접근하기 힘든 마이너스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요즘 드라마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예쁘고, 똑똑한데다 집이 재벌가인 콧대높은 귀족 아가씨 케릭터가 바로
버지니아라고 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그러고보니, 버지니아는 드라마에서 한 남자를 두고 여주인공과 연적관계를 형성하는 악역 혹은
남자 입장에서 여주인공과 자꾸 저울질을 하게 만드는 서브히로인 같은 이미지이고,
아오이는 그런 버지니아의 라이벌이자,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생활력 강하고 사교성 좋고 배려심 쩌는...
"......"
세키는 아오이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빌어먹을... 이제보니 내 사촌은 대단히 매력적인 녀석이었잖아...."
왜 몰랐을까?
눈앞에서 가게를 두리번두리번거리며 이따금 입을 벌린 채 "와.. 여기 정말 분위기있다~"를 외쳐대는
눈치없는 사촌 녀석이 실은 굉장히 매력적인 아가씨라는 걸 세키는 이제야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짝이군 그래..]
호응하듯 내면의 소리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말을 내뱉었다.
"진짜 pie in the sky 는 아오이였군..."
".... 응? 지금 뭐라고 했어?"
"...아냐..아무 말도.."
"......"
또래 남학우들은 버지니아를 그림의 떡이라며 가까이하기 어려워하지만,
세키 입장에서는 아오이야말로 가까이하기 어려운 그런 부류였다.
그는 지금도 아슬아슬하게 외숙모와 비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아오이마저도 끌어들이게 된다면, 외삼촌이 되었든 다른 누군가가 되었든 반드시 이 비밀 관계가
들어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세키는 가족관계와 친인척 관계는 물론 세상의 지탄을 받아
이곳을 떠나 이민을 가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갑자기 가게에 있는 손님들 사이에서 "우와아~", "와~ 예쁘다." 등등의 감탄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세키도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가게 입구쪽에서 이쪽으로 요정(요즘 같아서는 엘프녀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 쉬우려나?)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이쪽이야 버지니아~"
아오이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우와아..."
그 순간, 영화에서나 봄직한 엘프녀의 미소가 눈앞에서 보여지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하와이에서 화보를 찍고 온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심을 자극하는 차림세를 하고 있었는데, 윗쪽은 어깨선과 쇄골 라인이 드러나보이는 형태에
아랫쪽은 치맛자락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와도 하늘하늘 거릴 것 같은 푸른색 계통의 원피스를 입었고,
커다란 모자와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외숙모 때문에 눈이 높아질만큼 높아져 동년배 여자애들에게는 그다지 관심도 안 간다는 세키마저도
눈앞에 저 소녀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눈부셨다.
"그녀 정도의 TOP CLASS가 이런 애들 장난같은 소개팅에 무슨 이유로 참석했을까..."
세키가 그녀를 보며,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버지니아는 먼저 도착해있는 아오이를 발견하고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 옆에 앉았다.
"어라.. 두 사람이 서로 친구사이였었나..?"
전학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오이가 학교 내에서 유명인인 버지니아와 친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봤던 세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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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버지니아.
편견같지만, 자신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약속장소를 제시간에 맞춰 나오는 여자는 드물다.
그녀들은 자신의 미모에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약속 장소에서도 자신의 미모가 돋보이길 원하므로 약속의 중요도에 따라 화장에 공들이는 시간이 길다.
그녀들은 공통적으로 약속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정도의 시간을 계산해서 집을 나서는데,
대중교통의 정체 또는 오는 길에 생기는 여러 가지 변수들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어지기 일쑤가 되지만, 뛰거나 빨리 걷게 되면 땀 때문에 화장이 지워질 수 있고,
하이힐을 신었을 경우 발이 아프기 때문에 습관적인 지각을 하게 된다.
만약 미인이 지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1. 그녀가 대중교통이 아닌 택시를 탔으며, 약속장소 가까이에 택시가 멈춰설 수 있는 공간이 있다.
2. 그녀는 스스로를 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나, 꽤 털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3. 정말 드문 일이지만, 그날 컨디션이 좋아 화장을 일찍 끝내고 약속장소로 일찍 출발한다.
정도를 들 수 있다.
"과연 그녀들은??"
아참, 방금 전 지각을 하는 이유의 예시 중 빠진 게 하나 있었는데,
미인의 경우 약속장소에 일찍 나왔을 때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약속시간 25분 전에 도착한 아오이와 20분 전에 도착한 버지니아는 어떻게 된 걸까??
아오이야 본인이 미인인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맹한 녀석일테고
- 세키가 보기에 그녀는 외적인 것은 외숙모를 닮았지만,
눈치가 없고 근거없이 낙천적인 성격 같은 내적인 것은 외삼촌 판박이처럼 보인다.-
버지니아의 경우에는, 본인 성격 자체가 그러하지 않을까 짐작되었다.
세키를 포함한 가게 안의 남자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들로 깊은 생각에 잠겨들게 되었고,
버지니아는 아오이 옆에 앉아 둘이서 가게 인테리어와 주변 풍경에 대해 떠들어대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시간이 다 되었을 때에 나머지 두 명의 여자들도 합류.
"과연.."
약속시간에 모두 다 도착해있는 것은 매너의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실제로 그것이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에서 주선자인 아오이의 능력이 엿보였다.
제법 개념있는 애들을 보아 소개팅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자, 다들 오래 모였으니, 바로 자기 소개하고 파트너 뽑기에 들어갑니다."
모든 멤버들을 모은 주선자겸 여자1호인 아오이가 대표로 말을 꺼내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로
저마다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성까지 얘기하면 복잡해지니 간략하게 이름만 소개하자면,
남자 1호 쇼타.
여자 1호 아오이.
남자 2호 이오리.
여자 2호 니지.
남자 3호 타다요시.
여자 3호 이케.
남자 4호 세키.
여자 4호 버지니아.
파트너 뽑기로 넘어자면, 미리 만들어넣어둔 번호표를 뽑는 방식이었는데,
서로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끼리 파트너가 되는 규칙이었다.
뽑기 순서는 약속 장소에 일찍 온 순서대로 뽑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첫번째로 뽑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선택권이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모두들 아오이의 의견에 수긍하자, 본격적인 파트너 뽑기가 시작되었다.
세키가 뽑은 번호는 2번이었다.
여자쪽에서 2번을 뽑은 사람과 파트너가 된다는 뜻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번호표를 뽑고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여자애들쪽은 잘 모르겠지만, 남자애들쪽에서는 아오이 아니면 버지니아가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까?
외모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면, 성격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단연 버지니아쪽을 원할테고,
대화가 잘 통하고, 애교있고 유머러스한 애를 원한다면 아오이쪽을 원할 것이다.
"자 1번 뽑은 사람 누구?"
아오이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아무래도 아오이는 1번을 뽑은 것 같다.
남자 3호 타다요시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1번이 적힌 번호표를 내밀었다.
그러자, 짐작했던대로 아오이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1번이 적힌 번호표를 보여줬다.
첫번째 커플은 타다요시와 아오이였다.
"그럼 계속해서.. 2번 뽑은 사람?"
세키는 자기 차례라 생각하고 2번이 적힌 번호표를 내밀려고 하는데,
그보다 저쪽에서 먼저 2번이 적힌 번호표를 테이블에 꺼내놓았다.
"남자 2번은 누구니?"
버지니아였다.
[크크크큭.. 이거 정말 기대되는데....]
내면의 목소리를 포함한 남자 3인의 부러움이 섞인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세키도 2번이 적힌 번호표를 테이블에 꺼내놓았다.
순간 버지니아와 눈이 마주쳤다.
두근두근...
실로 오랫만에 세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히카리와 외숙모 스미레 외에 여자애 때문에 가슴이 뛰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세키가 긴장을 푸는 동안 3번, 4번 파트너가 맺어졌다.
"지금부터 각자 파트너와 함께 데이트를 즐깁니다.
뭘 하든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파트너끼리 오붓한 저녁식사까지는 하고 헤어지도록!!"
아오이의 설명과 함께 우리는 각자 파트너를 데리고 커피가게를 나왔다.
각자 흩어지기 전, 아오이는 버지니아와 어떤 말을 주고 받더니
세키에게 다가와 "잘해봐~"라며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너나 잘하세요~"
"흐흥.. 아까 가게 안에서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더니만~
밖에 나오니 좀 괜찮아졌나보네? 좋은 출발이구만~~ ㅎㅎ"
"......"
말빨로는 이녀석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세키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해버리자, 곁에서 구경하고 있던 버지니아가 아오이에게 다가가
"사촌사이라더니 사이가 좋네~" 라며 작게 중얼거리자, 아오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탓이지~"
아오이는 오늘도 자신이 세키를 말빨로 제압했다는 것에 만족했는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파트너인 타다요시에게 다가갔다.
"자.. 그럼 가볼까?"
세키가 버지니아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물끄럼이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른 커플들도 서로 손을 잡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세키의 손을 부여잡았다.
"어디로 갈건지 정했니?"
그녀의 말에 세키는 방금 전에 생각했던 데이트 코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광장에 가면 인디 밴드팀의 공연이 있을 거야.
거기서 같이 공연을 보다가 영화를 한 편 보고, 저녁을 먹을 계획인데 니 생각은 어때?"
"난 여기 지리를 잘 모르니까, 니가 정한대로 가는 게 좋겠어."
그녀는 평소에도 학교 수업이 끝나는 하교시간에는 고급외제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진짜 귀족 아가씨였다.
그러니 이곳 지리를 모른다는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좋아. 광장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으니까 좀 걸어야할 거야."
"알았어."
평소에 잘 걷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별 문제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우리 먼저 간다. 나중에 봐~"
아오이와 타다요시 커플이 먼저 작별인사를 꺼내며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세키는 멀어져가는 아오이의 뒷모습을 잠시잠깐 쳐다본 후에, 버지니아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자."
"응.."
그렇게 세키의 두번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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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
1~14화를 1부라고 한다면, 이 글은 2부의 시작부분입니다.
자극적이고, 야한 장면을 기대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조금 쉬어가는 내용이라 생각해주세요.
3부나 4부쯤에 주인공 뺨치는 능력을 지닌 케릭터가 나올 예정이니 , 그 때까지 연재중단이 되지 않는다면
꽤 야한 장면이 자주 나올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