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립파이터 마유 9
제9화 길드
마차는 아직 해가 높이 걸려 있을 무렵 시티 입구에 다다랐다.
조제프씨의 손이 오는 내내 내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그리 불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너무 오래 여자에 굶주려 있었던 탓이지, 뿌리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가 시티야.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마을이지"
조제프씨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확실히 큰 마을임엔 틀림없었지만, 생각했던 것 만큼은 아니었다. 우리 동네가 아마 더 클 것이다. 세계 최고라는 말을 하도 들어와서 그런지 머리 속으로 너무 거창한 곳을 상상해 버린 것 같다.
마을의 분위기는 얼핏 보기에 서부 영화에 나오는 마을하고 비슷했다. 그렇지만 잘 살펴보면 콘크리트 빌딩도 세워져 있고, 동양풍의 건물이나 유럽 교회 같은 건물도 여기저기 보인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평범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세계에 가져다 놔도 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건 아마도 이 곳에서 가장 위화감이 느껴지는 사람이 정작 나 자신이어서 그럴지도. 그러나 아무도 나를 특별히 주목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 마차 안에 타고 있어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뿐일라나.
마차가 큰 길로 들어서더니 교차로 모퉁이에 멈춰섰다.
"자, 여기서 왼쪽으로 100미터 쯤 가면, 모험자 길드가 있어. 거기 가면 자세한 얘길 들을 수 있을거야"
조제프씨는 우선 모험자 길드부터 찾아가라고 충고해 주었다. 모든 모험자들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네. 그럼 가볼께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조제프씨에게 인사를 하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 아무도 나를 주목하고 있지 않은 걸 확인하고 슬그머니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드디어, 거리를 알몸으로 걸어다녀야만 한다. 아---떨려.
"나야말로 고마웠어. 마유쨩 대딸 끝내줬어. 잘 지내!"
조제프씨가 큰 소리로 외치더니, 내게 손을 흔들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자,잠깐. 그런 창피한 말을..."
얼른 뒤돌아보자, 아줌마 한 분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문란한 여자애라고 생각하나봐. 나는 도망치듯 얼른 자리를 떴다.
빌딩 사이 골목에 숨어 주위를 살핀다. 행인이 꽤 많다. 나 말고도 또 알몸으로 다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나마 낫겠는데,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안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어깨를 툭 쳤다.
"꺄악!"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멀쑥한 신사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한 분 서 있었다.
"왜 그러고 있나?"
"저,저기, 모험자 길드를 찾고 있는데..."
"길드라면, 여기로 쭉 가면 바로 나와"
할아버지가 큰 길 쪽을 가리켰다.
"가,감사합니다"
할아버지가 내 몸을 위 아래로 쭉 훑어보더니,
"아가씨, 얼마야?"
"에?"
"내가 사지. 자네처럼 어린 여자애도 가끔씩 땡기긴 하니까"
아, 이 사람도 날 매춘부로 오해하고 있어.
"저기요. 그니까 저,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거든요"
급당황해서 얼른 부정하는 나.
"이런, 이거 실례했군. 왠지 묘하게 분위기가 요염해서 몸파는 여잔줄로만 알았지"
"정말 네버 절대로 그런 거 아니예요"
"으---음, 어린애 몸매인데도 남자를 유혹하는 에로스가 풍기는구만. 아주 제대로 눈이 호강했어. 고맙네"
할아버지는 내 알몸을 한참 구경하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깜짝이야. 요염하다는 말 처음 들었어. 나를 보고 불끈불끈하는 사람이, 선생님 말고도 꽤 있구나. 이거 위험한데. 이대로 여기 서 있다간 점점 더 귀찮은 일만 생길 것 같아서, 과감히 거리로 나서기로 했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길드가 있다고 하는 건물 앞으로 재빨리 향했다. 두꺼운 석조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간유리로 된 문에 금박문자로 모험자 길드라고 써 있었다.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타리어라고 하는 이 세계에서 쓰이는 문자. 희한하게도 전혀 모르는 문자가 저절로 읽혀진다. 섣불리 들어서기 힘든 포스를 마구 뿜어내는 건물. 안에 뭐가 있을지 짐작도 안 간다. 살짝 들여다만 볼까. 나는 묵직한 문짝을 슬그머니 밀고 틈새로 살짝 안을 들여다 보았다. 고스란히 드러난 맨엉덩이를 큰 길가 쪽으로 쭉 내민 민망한 포즈로.
그 때, 안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무섭게 생긴 수트 차림의 아저씨였다.
"저,저기, 저, 모험자 길드에..."
"여기가 길든데?"
"저, 모험자가 되고 싶어서요. 그..."
"네가?"
아저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문 틈새로 내 알몸을 슬쩍 살펴보더니
"뭐 괜찮겠지. 들어오게나"
문을 열고 나를 들어오게 했다.
건물 안은 마치 은행이나 증권회사 같았다. 칸막이로 나뉘어진 카운터 창구에 언니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게시판이 걸려 있었는데, 뭔가 복잡한 숫자가 잔뜩 표시되어 있었다.
"이 번호표 가지고, 기다리고 있어요"
아저씨가 번호표 하나를 건네 주었다. 17번인가.
로비에 주욱 늘어선 소파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갑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전사 같은 사람도 있고,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사람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전라는 나 하나 뿐이었다. 나는 구석에 놓인 빈 소파를 찾아 조용히 몸을 숨겼다.
그러자 곧 옆자리로 맨질맨질한 대머리에 가죽 점퍼를 걸친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다가와 앉았다.
"이야, 아가씨. 아가씨도 모험자 지망생이야?"
"아, 네"
"그럼, 나하고 함께 파티 짜자. 여러가지 가르쳐 줄께. 모험 이외에도. 왓핫핫"
남자가 내게 바짝 다가와 앉으며 내 어깨를 손으로 움켜 잡아온다. 뭐야, 무서워.
"무지 귀엽게 생겼네. 어디 한번 사이좋게 지내볼까?"
"자,잠깐, 하지 마요"
몸이 저절로 움츠려 든다.
"좋잖아. 빼기는. 아, 아파파파팟"
올려다 보니, 부츠에 노란 가죽으로 된 레오타드를 입은 엄청 섹시하게 생긴 예쁜 언니가 남자의 손을 훽 비틀어 잡아 올리고 있었다.
"아, 언니, 제 제발"
"이 애가 싫어하고 있잖아. 냉큼 꺼져!"
언니가 날카롭게 외치며 남자를 훽 밀쳐 버렸다.
"죄,죄송합니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부리나케 도망쳐 버렸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천만에. 저녀석은 한스라고 질이 안좋은 건달이야"
언니가 내 옆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나는, 마가레테. 창기사야"
"아, 저는, 마유예요. 격투가 지망생 비슷한..."
"딱 봐도 알겠네. 드문 일인걸. 너같은 어린 아이가, 스트립 파이터가 되다니"
"저, 잘 몰라서요. 속은 건 아니고요. 그 밖에 다른 건 못 한다고 그러고. 무지 창피하지만..."
"너 제법이구나. 나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거야"
얼굴이 빨개진다. 칭찬이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 여자애를 스트립 파이터로 만들다니, 누군진 몰라도 꽤 짖궂은 조정사를 만났네"
"아아, 그치만 그 분이 많이 도와 주셨는 걸요. 그 분 아니었음 저 벌써 죽어버렸을 지도 몰라요. 프라가록크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이에요"
"프라가록크? 그 프라가록크 말하는 거야?"
"그"라는 말 붙여봤자, 어차피 다른 프라가록크는 몰라요.
"프라가록크가 아직 살아 있었다니. 너, 의외로 굉장하구나. 전설의 조정사 프라가록크의 시술을 받았다니. 최강의 스탯으로 조정해주는 조정사로 유명해서 벼라별 모험자가 죄다 모여들었지만 어지간한 거물 아니면 상대도 안 했다던데. 벌써 몇 십년도 넘게 아무도 시술을 안 해줘서 진작에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살아 있었구나"
오---오. 제 머릿속의 이미지하고는 완전 정반댄데요. 그저 단순한 색골 할아범인줄로만 알았는데. 수염이나 외모 만큼은 꽤 폼이 나긴 했지만.
"너, 맘에 들었어. 네가 싸우는 거 꼭 보고 싶다. 모험 나갈 때 꼭 같이 파티 짜자"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마가레테씨가 내민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나눴다.
"17번 고객님---"
접수 창구 언니가 부른다.
"아, 나다. 다녀 올께요"
"갔다와. 힘내구"
나는 마가레테씨에게 손을 흔들며 카운터로 향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접수 창구 언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지 예쁘지만 왠지 좀 무서워 보인다.
"어디 보자, 너 모험자 지망생?"
"네. 그치만 잘 몰라서요"
"으---응. 그럼 설명해 줄테니까 잘 들어"
"부탁드립니다"
언니가 내게 들려준 설명은 대강 이렇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던전이 발생한다. 전에는 찾아낸 모험자가 선착순으로 제각각 던전을 탐색하곤 했는데, 그게 격렬한 쟁탈전으로 이어져 각종 상해 사건이나 트러블로 번지는 바람에 던전의 탐색권을 공평하게 할당해 주는 조직으로 생겨난 것이 이 길드란다.
게다가 던전의 평가를 개인이 직접 실사하는 것은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길드에서 전문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해 던전의 레벨 같은 것을 평가한다. 레벨은 그 던전에서 회수 가능한 크리스탈 갯수로 결정된다. 그 정보를 길드 멤버가 같이 공유함으로써 효율성 높은 던전 탐색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각각의 모험자는 던전을 탐색하러 갈 때마다 그 던전의 탐색권을 구입하게 된다. 길드는 그 수익으로 조사단의 비용 같은 것을 조달하고 있었다. 길드에 가입하려면 가입비와 등록금이 필요하고, 그 합계가 총 1500 골드. 탐색권은 레벨이나 입지 조건 등을 따져 대체로 5백에서 5만 골드 정도 한다고 한다. 탐색권의 구입 비용은 파티원이 갹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1골드의 가치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많은 돈인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가입비하고 등록금을 합쳐 1500 골드가 필요한데, 가져왔어?"
언니가 물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받은 8매의 금화를 꺼내 카운터에 올렸다.
"가지고 있는 건 이게 단데요..."
"엣?"
언니가 놀란 얼굴을 한다.
"이거, 못쓰는 돈이에요?"
"사용은 가능하지만, 이거 하나에 1골드 밖에 안 되는데"
에---, 터무니없이 모자라잖아. 이렇게 큼지막한 금화니까 하나에 못해도 100 골드 쯤은 할 줄 알았고만.
"이걸로는, 하룻밤 숙박료 밖에 안돼"
8골드로 하룻밤? 1골드 당 1000엔 정도 되는건가. 그렇다고 하는 얘기는, 1500골드면 150만엔? 그런 거액, 절대로 무리잖아. 기운이 쑥 빠져 버렸다.
"모두들 되게 부자네요...던전 탐색이 그렇게 고소득인가요?"
"탐색만으로는 돈벌이가 안돼. 다들 부업으로 돈을 모아. 아까 네가 얘기하고 있던 마가레테는 이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티크 오너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지. 크리스탈이 고가에 거래되는 건 맞지만, 자기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모으는 건데 그걸 팔 리도 만무하고"
"그런거예요? 몬스터를 쓰러트리면 골드를 떨구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니고요?"
"네가 온 세계에선 몬스터도 돈을 가지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여기선 안 그래"
"아뇨. 제가 온 세계서도 안 그래요..."
언니가 잠시 골똘히 뭔가 생각하더니
"너, 지낼 곳은 있는 거야?"
"아뇨. 도착한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아무것도..."
"좋아. 내가 알아봐 줄께. 있다가 30분 정도 있으면 일이 끝나니까, 이 건물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 꼴로 밖에 돌아다녀봤자 귀찮은 일만 잔뜩 생길테고"
"죄송합니다. 그럼 신세 좀 질께요..."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도와주려나 보다. 착한 사람을 만나 다행이다.
"난, 마리아야. 넌?"
"마유예요"
"마유. 그럼 30분 있다가 여기 뒤에서 봐. 꿍꿍이 같은 건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길드 건물을 빠져나와 뒤쪽으로 돌아갔다. 뒷골목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벌써 해도 기울어 꽤 어둑어둑했다. 혼자 뻘쭘하게 알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자니 완전 불안해진다.
왠지, 생각했던 것하고 많이 다르네. 나, 이제부터 어쩐다.
추천58 비추천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