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립파이터 마유 6
제6화 탄생
프라가록크씨가 찌른 단검은 섬뜩한 빛을 내뿜으며, 훤히 드러난 내 가슴을 목표로 날아왔다. 그리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프라가록크씨의 무시무시한 얼굴. 전부 다 천천히, 그리고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뭐,뭐야? 역시 숲 속의 수상한 저택에 사는 수수께끼의 노인은 예로부터 대대로 악인으로 정해져 있는 법, 그게 상식이다. 그만 깜빡했다. 아아, 죽기 직전엔 모든 게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는 옛말이 진짜였구나.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단검을 응시하면서 나는 절망으로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다시 돌이켜보면, 내 짧은 인생은 정말 하나도 좋은 일이 없었다. 추억이라곤 겨우 그이하고 나눈 첫키스 뿐이고. 최후가 고작 이런 이상한 노인의 손에 의해 죽는 거라니. 좀 더 오래 살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타카시군한테 처녀라도 줘버릴걸.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는데. 타카시군하고 첫경험을 하는 쪽이 이런 색골 할아범에게 희롱당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기분 좋았을텐데. 아, 근데 타카시군도 분명 동정이겠지? 동정하고 처녀는 잘 안된다고 그러던데. 경험이라면 프라가록크씨가 훨씬 풍부할라나. 아냐아냐, 그딴 것보다 더 소중한 건 사랑이야. 사랑. 사랑만 있으면 다 극복할 수 있는 법이지. 그나저나, 죽기 전엔 인생이 주마등처럼 주욱 흘러간다고 그러더만, 그렇지도 않네. 안돼. 억지로라도 돌이켜보자. 시치고산(성년의 날 어린이 버전) 때, 재수없게도 내 몫의 치토세아메(시치고산에 선물로 주는 사탕)이 똑 떨어져 버려서 엄청 울었었더랬지. 또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떤 남자애가 신발을 숨겨놓는 바람에 엉엉 울고 있는 걸 타카시군이 보고 도와줬었지. 그때부터였나보다. 타카시군을 좋아하게 된게. 그리고 또, 으---음, 또 뭐가 있더라.
근데, 이거 어째 너무 길지 않아?
라고 생각한 순간, 드디어(?) 단검이 내 가슴에 와 부딪혔다. 순간 눈부신 빛이 번쩍한다. 아, 이게 바로 죽음의 순간이로구나.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어머니. 타카시군, 정말로 좋아했어. 그리고 나는 돌 침대 위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이봐, 언제까지 자고 있을거야?"
프라가록크씨가 내 몸을 흔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 살인자다아아아"
"뭐라는거야. 누가 살인자라는거야"
"누구긴, 방금, 어라?"
단검이 꽂혀있는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상처에서 엄청난 양의 붉은 피가 콸콸 흐르고...있긴 개뿔. 상처 하나 없다.
"어라? 어라라라? 저기, 아까 분명히 칼에 찔렸는데!"
프라가록크씨 손에 아까 그 흉기가 여전히 들려 있었다.
"봐요! 그 칼! 아까 분명 그 칼로!"
프라가록크씨가 조용히 단검을 내밀었다. 조심조심 받아 살펴보자 분명히 진짜 단검이었다. 게다가 꽤 비싸 보이는. 칼날에 살짝 손을 대보니까 엄청 예리하다. 그렇지만 칼날 어디에도 피는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굉장하지? 이게 바로 자네가 얻은 능력이라네"
"에------"
죽인다. 이거 완전 죽여주는데. 단검으로 찔렸는데도 아무렇지 않다니. 아니, 아예 찔린 것 같지도 않잖아. 이거 진짜 끝내준다.
"정말 굉장해요. 이 능력만 있으면 몬스터 따위 껌이겠는데요. 고마워요 프라가록크씨. 아니다, 프라가록크 대선생님"
프라가록크씨를 와락 끌어 안는 나.
"그치만, 너무 심하잖아요, 갑자기 찌르다니. 진짜로 살해당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얼마나 무서웠는데"
"홋홋홋. 물론 진짜로 죽일 생각이었지. 이 힘은, 위험을 감지했을 때 자동으로 발동되는 거니까. 미리 찌른다고 알려줄거면 아무 효과도 없지"
"과연. 자동으로 발동되는 거라니 완전 편리한데요. 그치만 이렇게 날카로운 단검도 막아내다니 정말 굉장한 힘이네요"
"힘은, 그것 뿐만이 아냐. 모든 움직임이 전부 천천히 보였을 거야. 그것도 힘의 하나지"
"아, 맞아요. 그래서, 그렇게 한참을 생각할 시간이 있었던 거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바보같으니. 생각할 시간이 있었으면 피했어야 할거 아냐. 피할 시간이 넘치도록 있었을텐데"
선생님이 뽀각,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그런가. 피하면 되는거였구나. 앞으로는 명심하겠습니다"
얻어맞은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물론,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럼, 이걸로 전부 끝난 건가요?"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으음. 이 다음은 자네가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달렸지. 지금 힘으로도, 낮은 레벨의 몬스터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만, 격투기 기술을 기초만 익혀놔도 더욱 강해질테고, 아우라도 제대로 성장시키면 더욱 더 강력해질게야"
"알겠습니다. 그럼, 마을로 가서 도장이라도 입문해볼까. 그리고 몬스터를 팍팍 해치우면 아우라도 점점 더 강해지는거죠?"
"응? 물론 몬스터와 싸워서 경험이 쌓이면 싸움을 하는 요령이 늘고 전투에 익숙해지겠지만, 아우라는 그런 거하고는 상관없는데?"
선생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몬스터하고 싸우면 경험치가 오르는 거 아니었어요?"
"대체 경험치라는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우라는 부화시에 생기는 에너지로 성장하는 거라네"
"아, 그러고 보니까 그런 얘기 들어본 거 같애요. 그렇다는 얘긴..."
"그렇지. 자네 경우엔 성적 흥분으로"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런. 나, 아직 어린애라구요. 성적 흥분이라니 무슨 그런 챙피한...그럴 상대도 없고"
"어쩌긴, 스스로 위로하면 되지. 정 뭐하면 이 늙은이가 도와줘도 되고"
선생님이 능글능글 웃는다. 역시 색골 할아범. 스스로 위로한다는 얘긴 자위행위를 말하는 거겠지. 친구들이 그런 거 한다고 얘기하는 거 들은 적은 있지만, 나 한번도 해 본 적 없는데. 그치만 이 할아버지한테 당하느니 차라리 그냥 혼자 해결하는 게 나아. 어딜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는지는 아까 억지로 배운거나 마찬가지고.
"아뇨. 됐거든요.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해본 적은 없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혼자 그 짓만 하고 있어도 점점 강해진다는 얘기 아닌가. 그이상 편리할 게 없지. 홋홋홋"
선생님이 호탕하게 웃었다.
"근데요,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좀 전부터 부화라고 자꾸 그러시는데 그 마법의 핵이라는 거 대체 뭐예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조심조심 물어 보았다.
"오오, 그건 말이네, 마법충이라고 하는 생물의 알일세. 이게 바로 그 성충의 사진이지"
건네받은 사진 속에는, 수두룩빽빽 가느다란 털이 잔뜩 나있는 꼭 거머리같은 기분 나쁘게 생긴 생물이 클로즈업으로 찍혀 있었다.
"꺄아아아아아. 이런게 내 몸 안에? 빼줘. 빼줘. 제발 빼줘요오오"
혼비백산해 날뛰는 내 어깨를 붙잡으며 선생님이 말했다.
"이런이런, 진정해. 이건 확대 사진일 뿐이야. 실제로는 새끼손가락 끝에 묻은 때보다도 작은 크기야. 게다가 부화해서 몸 안에 부착된 뒤엔 죽은듯이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붙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치만 그치만, 이렇게 기분 나쁘게 생긴 게..."
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면 곤란하지. 자네 몸 안엔, 이거 말고도 세균이니 뭐니 온갖 것이 잔뜩 살고 있어. 그런 것들도 확대해서 보면 대개 비슷해. 게다가 이미 자네 몸하고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꺼낼 수도 없고"
선생님이 설득하듯 말했다.
"하아...알겠어요. 신경 안쓰도록 해볼께요..."
뭐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도 아니라니, 잊기로 하자. 그치만 사진은 보지 말 걸 그랬다. 꿈에 나타날 거 같애.
"그럼, 이걸로 끝난거죠. 죄송한데 제 옷 좀 돌려주실래요? 언제까지 알몸으로 있기도 뭐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건가?"
선생님이 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야? 나, 지금 뭐 잘못 말했어?
"처음부터 몇번이나 말했잖나. 몸 하나만 가지고 싸우는 직업이라고"
이 냥반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왠지 대화 핀트가 좀 어긋나는 거 같은데.
"아니, 그니까 이제 그만 옷을 입고 싶다고요"
"그-러-니-까, 몸 하나만 가지고, 랬잖나. 옷은 대체 무슨 옷을 입는다는거야?!"
"......"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귀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 아니, 이상해진 건 언어이해능력 쪽인가. 앞으로 쭉 알몸으로 지내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들은 것 같은데, 설마. 그런 바보같은 말이 어딨어.
"저기, 그러니까, 설마..."
"설마는 무슨 놈의 설마. 처음부터 말한 대로, 아무것도 몸에 걸치면 안된다니까. 몸을 가리면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우라의 발산을 방해해서 마법충이 죽게 돼. 그렇게 되면, 동화하고 있는 자네 역시도 죽게 되지"
"뭐,뭐라고요오오오오오오오"
사고 정지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모양이다. 나는 완전히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쭉 알몸으로 지내야 된다고? 옷을 입으면 죽는다니, 그런 극단적인 설정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겁니까아. 이건 뭔가 실수인 게 틀림없어. 아니 그래야만 해.
선생님은 그런 나를 놔두고 옆 방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종이 박스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말은 일단 그렇지만, 그게 또, 전혀 아무 것도 몸에 걸칠 수 없단 얘긴 아니니까"
"뭐,뭐에요. 무슨 그런 살벌한 장난을 다 치고 그래요. 선생님 심술쟁이"
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글찮아도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니까. 그럼 그렇지. 그런 짖궂은 장난으로 여자애를 놀리면서 좋아하는 타입이었어, 이 할아범. 나는 순간 기쁜 마음에, 약간만이라면 만지게 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홋홋홋. 마법충은 신체 중심에 있으니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면 별로 영향을 받지 않지. 자네 소지품 중에서 이거하고 이거 정도는 괜찮아"
선생님이 상자 안에서 꺼낸 것은, 가죽 로퍼와 감색 하이삭스, 그리고 머리카락을 묶는 고무밴드 하나였다.
"이 밖에 마력이 깃든 목걸이나 팔찌 같은 악세사리 정도라면 별 문제 없을거야. 뭔가 적당한 게 없나 창고를 한번 뒤져 보지. 분명히 예전에 모험자가 요금 대신 두고 간 게 있을거야. 아 그리고, 전라에 양말은 이 늙은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타일이니까, 꼭 부탁하네"
선생님이 하이삭스 양말을 내게 내밀며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나는 또다시 사고정지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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