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립파이터 마유 2
제2화 희망
뭐지?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방에 저런 소리가 나는 게 있었나? 모처럼 기분좋게 자고 있는데 신경쓰이게시리. 결국 내 뇌세포의 판단은 실로 정확해서, 무사히 꿈으로부터 빠져나오는데 성공한 것 같다. 뭐, 하긴 당연한 걸라나. 부조리한 상황을 타파하는 건 결국 꿈에서 깨는 방법 밖에 없을테니. 꿈 속에선 그렇게나 추웠지만 지금은 굉장히 따뜻하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엄마가 난방이라도 틀어준 걸라나. 엄마 땡큐.
그런데 저 타닥타닥거리는 소리가 왠지 신경쓰인다. 무슨 소리지? 신경은 쓰이지만 아직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다. 좀 더 자고 싶었다. 어쩌지. 일어날까 무시해버릴까. 결심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는데, 내 곁으로 다가오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내 얼굴을 들여다 보려고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엄마, 벌써 깨우러 온 거야? 자명종이 울린 기억도 없는데. 별 수 없지. 일어나야겠다. 깨우기 전에 먼저 일어나 주지.
내가 천천히 눈을 뜨며 눈앞에 있는 엄마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내려는 순간.
"누,누구?"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흰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였다. 누구야 이 사람? 어떻게 내 방에 있는 거야? 혹시 도둑?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흘러 내린다. 그렇게 큰 편이 아닌 내 가슴이 출렁하고 튀어 나왔다. 순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어? 나 왜 알몸이지?
"꺄아아아아아아아"
화들짝 놀라 이불을 턱까지 끌어 올리고 이불 아래로 내 몸을 더듬어 보았다. 어라? 나 아무 것도 안 입고 있어. 알몸이다. 나 혹시 이 할아버지한테 당한거야?
"여,여기서 뭘 하는거에요? 당신 누구에요?"
큰 소리로 외쳤다.
"홋홋홋. 기운이 넘치는 아가씨로구만"
할아버지가 상냥하게 웃는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옷자락이 길다란 로브 같은 옷을 걸친 희한한 외모의 할아버지였다. 그렇지만, 여자 아이의 방에 함부로 침입해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보나마나 나쁜 놈일게 뻔하다. 나는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가드를 단단히 굳혔다.
"다행히 정신이 들었군. 그대로 눈을 뜨지 못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당장, 따뜻한 걸 가져다 주지. 기다려요"
내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할아버지는 방을 나가 버렸다. 뭐야 저 사람? 혹시 우리 친척 할아버진가?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오질 않나. 어라라? ...내 방?
내 방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돌벽으로 둘러싸인 고풍스런 구조의 방이었다. 내가 부둥켜 안고 있는 이불도, 내가 누워 있는 침대도,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넓은 방은 아니었지만, 한쪽 벽면에 벽난로가 있어서, 모닥불이 신나게 자글자글 타오르고 있었다. 타닥타닥거리는 소리는 바로 요놈이었구나. 벽난로 앞에 내 세라복이 널어져 있었다. 게다가 잘 보면 그 옆에 내 팬티하고 브라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 저 할아버지가 옷을 벗긴거야? 타카시군한테도 보여준 적 없는 내 전부를? 얼굴이 후끈 달아 오른다. 미안, 타카시군. 그치만 불가항력이었고, 또 사고였으니까.
나는 서둘러 옷을 걸치려고 침대에서 알몸으로 기어내려왔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할아버지가 또 방 안으로 들어왔다.
"꺄악"
후다닥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홋홋홋. 아직, 일어나지 않는게 좋아. 자, 이거 먹어요"
할아버지가 스프 그릇하고 비슷하게 생긴 질그릇 하나를 내밀었다. 버섯 스프가 담긴 것 같았다. 나는 그릇하고 할아버지를 교대로 훔쳐 봤다.
"독 같은 건 안 들었으니까 안심하고 먹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하기도 힘들다. 나는 조심조심 그릇을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어!"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이거, 엄청 맛있어요"
"홋홋홋. 그거 다행이구만. 이 늙은이가 자랑하는 요리지. 몸에도 좋아"
할아버지가 즐거운 듯 웃음을 지었다.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스프를 한 입에 들이키고 그릇을 할아버지에게 돌려 주었다.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근데, 여긴 어디에요?"
조금 진정이 된 내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여기? 여긴 이 늙은이 집이지. 어제, 약초를 캐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있던 자네를 발견해서 말이야. 여기로 옮겼지. 조금만 더 늦었어도 동사하고 말았을게야"
역시,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어! 하긴 꿈 치고는 너무 리얼했다구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길을 잃었나봐요"
"음음. 이런 계절에 그런 곳에서 쓰러져 있는 건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뿐이니. 버려둘 순 없지"
할아버지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아, 저, 마유라고 해요. 중학생입니다"
"마유라. 그런데 중학생이라니 그건 또 뭔가?"
"중학생은, 에---그니까 학생이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뭐 그렇다고 아주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아, 학생인가. 이 늙은이는 프라가록크라고 하네. 지금은 은퇴한 조정사지"
프라가록크씨라고 하는구나. 그러고보면 영락없이 외국사람이네. 라는 얘기는 여기 외국?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이라 정말 다행이다.
"프라가록크씨, 일본어 잘 하시네요. 저, 영어는 영 자신이 없어서"
"홋홋홋. 이 늙은이는 일본어 같은 거 모른다네"
"에? 하지만 지금 말을..."
"여기에선, 누구나 타리어라고 하는 말로 얘기하지. 자네가 지금 하는 말도 타리어고"
이 사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그런 말 배운 적도 없는데.
"당장 이해가 가지는 않겠지만, 여긴 그런 세계라네"
으---음, 어쩌면 좀 위험한 사람일지도. 너무 깊이 파고드는 건 관두자.
"저기, 그래서 저,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제 휴대폰, 가방에 넣어 뒀는데 그만 잃어버려서..."
"전화? 전화는 또 뭐지? 하긴 어찌됐든 집에는 돌아갈 수 없지만"
"에?"
역시, 상냥한 척 굴고는 있지만 이 사람 날 감금할 속셈이구나! 소녀를 유괴해서는 몇 년이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거나 하는 그런 타입의 인간인거야?
"부,부탁이에요. 집에 돌려보내주세요"
나는 간절히 애원해 보았다.
"으---음, 돌아갈 수 있다면 돌려보내주고 싶지만, 그게 꽤 힘든 일이 되어놔서"
"어,어째서요"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니까"
프라가록크씨가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라니, 대체 여기가 어딘데요?"
나는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여기는, 마왕이 만든 세계라네"
마왕? 무슨 말을 하는거야 이 사람? 역시 그렇고 그런 의미로 위험한 사람이었구나. 비주얼적으로 봐도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사람하고는 엮이지 않는 편이 좋아.
"에---그니까, 마왕이고 뭐고 대체 무슨 얘긴지..."
"당장에 믿겨지진 않겠지. 여기 떨어진 사람들은 다들 그러니까. 그런데, 자네가 있던 세상에도 마법이 있나?"
"마법이요? 그건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얘기죠. 어릴 땐 마법 소녀 같은게 되고 싶긴 했지만"
"그런가. 그럼 이걸 한번 보게"
프라가록크씨가 손바닥을 위로 하고 손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갑자기, 손바닥 위로 소프트볼 만한 불 구슬이 나타났다.
"뭐,뭐에요 그건!?"
"만지면 위험해. 이거"
프라가록크씨가 손을 벽난로 쪽으로 휘둘렀다. 파지직하고 굉장한 소리가 나며 불 구슬이 공중을 날아 벽난로 안에서 폭발했다.
"이게 파이어 볼 마법일세"
"괴,굉장해요, 진짜 마법!?"
진짜 깜짝 놀랐다. 이건 완전 레알 진짜다. 마술 같은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암튼간에, 지구 멸망 따위의 말도 쉽사리 믿어버리는 타입의 인간이 바로 나지만, 이건 그런 거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홋홋홋. 별 거 아니네. 사실, 이 늙은이는 마력이 부족해서 마법사는 될 수 없었으니까"
"그럼, 정말로 여기는 마왕이 만든 세계인 거에요?"
"물론이지. 자세히 설명해 줄테니까 잘 들어요"
프라가록크씨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우주에는 서로 존재를 알 수는 없지만, 복수의 세계가 무한하게,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도, 초과학 문명이 발달한 세계도, 파충류로부터 진화한 생물이 지배하는 세계도, 그야말로 모든 가능성이 열린 수많은 세계가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바로 이해됐다. 이른바 패러렐 월드라는 개념이다. 나도 SF소설이라면 제법 읽어봤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의 이해는 빠른 편이다. 에헴, 의외로 독서를 좋아하는 타입이쥐, 또 내가.
그러나 어느 순간, 마왕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나타났다. 마왕은 스스로 세계 하나를 창조하고 거기 들어앉았다. 그런 다음, 다른 패러렐 월드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 세계로 끌려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곧 서로 손을 잡고 마을을 만들고 이 세계 위에서 새로운 생활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 년 이상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이게 연속 납치사건의 진상인듯 싶다. 나 역시도 그 피해자 중 한 명이고. 마법의 힘을 지닌 사람들이나,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한 덕분에, 이 세계도 꽤 발전해 있는 것 같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대도시도 있다고 한다. 인구도 계속 증가해 현재는 이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긴 했지만, 아직도 가끔 다른 세계로부터의 납치는 계속되고 있는 모양.
덧붙이자면, 프라가록크씨가 이런 숲에서 살고 있는 건 말 그대로 단순한 은둔이라고. 어딜 가나 이런 괴짜는 꼭 있지.
"과연.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납득은 가요"
"그래? 뭐 다른 질문은 없어?"
"마왕은, 따로 이름 같은 거 없나요?"
참으로 소박한 질문이다.
"...희한한 질문이로고. 이전에 이런저런 이름을 붙이자는 안이 있긴 했지만, 한참을 토론한 끝에, 어차피 마왕은 한 명 뿐이고, 마왕은 결국 마왕이잖냐는 결론이 나와서"
그건 좀 재미없지 않나. 뭔가 분위기 있는 이름이 있는 편이 폼도 더 나는데.
"그러면, 원래 왔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는 건가요..."
사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나같은 사람이 여기 많이 살고 있고, 아무도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 타카시군이나 부모님하고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건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있을걸. 벌써 몇몇은 돌아간 적도 있고"
"어? 그래요? 난 꼼짝없이, 평생 여기서 살아야 되나 걱정했어요"
갑작스런 희망에 얼굴이 절로 환해진다.
"으음. 여기가 마음에 들어 정착하는 사람도 많지만, 역시 원래 왔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여러가지로 연구해본 결과,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냈지"
"그래서요, 그래서요"
조급한 마음에 프라가록크씨를 닥달한다.
"하나는,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 마왕을 없애면 이 세계는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로 돌아가게 되지"
그건 딱 예상하고 있던 방법이로군요. 대략 그렇지 않을까 했답니다.
"그렇단 얘기는, 그 방법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 했다는 거네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 마왕 토벌은 그렇게 말하는 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고"
"그렇긴 하네요. 그렇게 간단히 쓰러트릴 수 있다면 마왕답지도 않고"
그것보다도, 내가 알고 싶은 건 좀 더 현실적인 방법.
"또 하나는요?"
"또 하나는, 크리스탈이라 불리는 보석을 100개 모아서, 신전에서 게이트를 여는 것"
"크리스탈? 게이트?"
계속해서 물었다.
"이 세계에선 여기저기서 던전이 생기곤 하지. 그 던전을 봉인하면 크리스탈 몇 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네. 모험자가 되어 온 세상의 던전을 찾아 다니며 크리스탈을 모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봉인이라니, 어떻게 하는데요?"
"던전에 서식하는 마물을 전부 퇴치하면 던전 중심부에 크리스탈이 나타나지. 그걸 꺼내면, 그 던전이 봉인되어 사라지게 되는 거고"
"마물하고 싸운다구요? 그런거 절대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확실히 보통 인간에겐 무리지. 그래서 이 늙은이처럼 조정사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거라네"
"조정사?"
"그래. 조정사. 조정사는,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폭시켜 마물과 싸울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지"
"그럼, 저도 프라가록크씨한테 부탁하면, 마물을 쓰러트릴 수 있어요?"
"쓰러트릴 수 있을지 어쩔지는, 결국 본인 나름이지. 하지만 그러기 위한 힘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네"
갑자기 눈앞에 희망의 빛이 한줄기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부탁드립니다. 저에게도 힘을 주세요. 저도 모험자가 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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