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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주박 제10장 졸업 (최종화) & 번외편

제10장  졸업









제46화 최종회





졸업식이 끝난 체육관 밖 여기저기에 서로 이별을 아쉬워하며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미키 선배, 가끔씩 동아리방에 들려 주세요"

"그래, 그럴께"

댄스부 부장을 맡고 있던 미키를 꽃다발을 한아름 안은 후배들이 둘러싼다. 뻥 뚫린 것 같은 텅 빈 마음을 다잡고, 마치 기계적인 사무 일을 하는 것처럼, 일일히 부장으로서 인사말을 건낸다. 각각의 부원들에게 맞춰 아쉬운 이별의 말을 전한다. 자기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누구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전혀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졸업식 내내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정렬하고 앉아있는 학생들 사이로, 미키네 반 두 자리만, 텅 빈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타카쿠라, 그리고 마리에의 자리. 그것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은회 시작합니다---. 3학년은 각자 반으로 돌아가 기다려 주십시오"

2학년 실행위원이 큰 소리로 안내를 하며 눈앞으로 달려 지나갔다. 웅성웅성대는 인파가 조금씩 현관으로 밀려 들어간다.

"선배, 저희들하고 함께 사진 찍어요"

카메라를 보고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이대로 그냥, 졸업할 수는 없었다.

"자, 치---즈"

건내주어야 할 것들이, 전해주어야 할 말들이, 미키에겐 잔뜩 남아 있었다.

"카피해서 미키 선배한테도 보내 드릴께요"

"나도 내년엔, 꼭, 선배가 가는 S여대, 목표로 할거에요"

"대학 가서도, 댄스, 계속 하실거죠?"

갑자기, 여학생들 사이에서 커다란 환성이 울렸다. 우르르 교문 쪽으로 달려간다.

"앗, 타카쿠라 선배다!"

미키 옆에 있던 1학년이 선망의 눈빛으로 그쪽을 쳐다 본다. 타카쿠라가 마리에의 허리를 감싸 안아 부축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교복 차림의 두 사람이 교문을 막 지나 학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잠깐, 이것 좀, 들어 줄래?"

다 안고 있기 힘들 정도로 수북한 꽃다발을, 차기 부장의 품 안에 덥썩 안겨주고는 후배들 사이를 빠져 나갔다.

"늦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말하고는 정반대로, 미키의 얼굴에 안도의 색이, 안심한 표정이 떠오른다.

"미안"

"아, 미안해요. 미키씨, 제가..."

타카쿠라의 교복을 잡고 몸을 기대면서, 여전히 불편한 듯 왼발을 질질 끌며 걷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귀 바로 아래에서 싹둑 잘라낸 숏컷 머리. 전에 쓰던 안경에, 화장도 전혀 하지 않았다. 오랜 입원 생활 탓인지, 그렇잖아도 흰 피부가 투명하리만큼 새하얗다.

"상처, 아직도 많이 아파?"

"아뇨, 괜찮아요"

고토와 타카쿠라의 이름을 대는 것 만으로, 지역 종합병원에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수술과 입원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주었다. 심지어 경찰도, 미키 조부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별다른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학교에도, 마리에의 집에도, 응급 수술이라는 말로 일단 얼버무렸다. 사후 처리는 미키가 "사토루 아저씨"와 함께 모두 진행했다.

"무리하는 거 아니지?"

미키가 내미는 오른손을 마리에의 조그만 손이 살며시 움켜쥔다.

"미키씨, 병문안, 매일같이, 고마워요"

올려다 보며 빙긋 미소짓는 마리에에게, 미키가 환한 미소로 답했다. 수술 다음날, 병실에서, 자기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울면서 사죄하는 미키의 손을, 마리에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마주잡고 놓지 않았다. 어렸을 때, 미키가 타카쿠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매일같이, 문병을 온 미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만 맞잡고 있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듯이. 아무런 말도 주고 받지 않으면서,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카쿠라가 그런 두 사람을 쭉 바라보고 있었다.

"맞다맞다, 마리에한테 돌려줄 게 있었는데"

"네?..."

주머니에서 진주 목걸이를 꺼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마리에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목걸이, 사실, 내가 받고 싶었는데"

짖궂은 표정을 지으며, 슬쩍 타카쿠라를 흘겨 보았다.

"미안"

"됐네요, 료지, 농담이야, 농담"

두 사람의 이야기에 마리에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거, 어? 이 목걸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요?"

"어, 라니 마리에, 너, 료지한테 아무 말도 듣지 못 한거야?"

"하아..."

의아해하는 마리에. 타카쿠라가 "어떻게 말해. 그런 얘길"이라며 외면한다.

그런 세 사람을, 따뜻한 봄 햇살이 감싸고 있었다.

"이 진주 목걸이, 이거말야, 료지 어머니 유품이야"

순간 말문이 막힌다.

"소중히 간직해. 내 몫까지"

미키가 진주목걸이를 쥐고 있는 마리에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뭔가 소중한 것을 맡기는 것처럼.

"고,고맙,습니다... 미키씨, 료지씨, 그런... 소중한 걸... 나한테...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어머, 마리에, 또 우는거야? 울지 마"

타카쿠라가 손수건을 꺼내 마리에의 뺨을 닦아 주었다. 미키가 웃으면서 말했다.

"결혼한다며, 마리에. 료지랑"

"어떻게, 그걸..."

"아, 내가 말했어"

"마리에, 축하해"

마리에의 얼굴이 순식간에, 귓볼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도쿄에서 같이 살거야. 미키도, 놀러 와"

"당연하지. 매일같이 찾아가서, 신혼 생활, 제대로 방해해주지"

"못 됐다, 정말, 미키씨" 고개를 숙인 채로, 마리에가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댄다. 서로 환하게 웃는, 모든 주박으로부터 해방된 세 사람.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학교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세 사람을 보고, 같은 반 남자애 한 명이 쭈볏거리며 말을 걸었다.

"저기, 이제 곧, 교실에서 사은회 할건데... 저기 고토씨랑, 이치카와씨, 타카쿠라군, 어떻게 할래? 참가, 할 수 있으면, 해 줬으면 좋겠는데. 저기, 마지막 반 모임이고"

"료지씨, 어떻게 할래요?"

올려다 보며 묻는 마리에에게, 주저없이 타카쿠라가 "물론 가야지, 마리에"라고 대답했다.

"응. 미키씨도 가요"

"그럼,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께"

반 남자애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마리에와 미키는 여전히 손을 맞잡고 있는 채 그대로였다.

"미키, 미안하지만, 마리에 좀 부탁해. 택시 돌려보내고 올테니까"

"맡겨 주시지요"

"료지씨, 그럼, 교실서 봐요"

교문 앞에서 "약혼자"를 전송하고, 마리에는 교복 주머니에서 학생 수첩을 꺼냈다. 겉표지를 넘기고 한 페이지에 시선을 떨어트린다.

나는, 이 사람하고, 앞으로 쭉, 함께 살아간다...

마리에의 시선이 닿은 페이지엔, 관람차 앞에서 손을 꼭 마주 잡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처음으로 서로의 몸이 닿은 어린 커플들 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수줍게 미소짓고 있는 두 사람이 거기 있었다.





(끝)



































번외편  Lust and Lovers









* 1





"상처, 아직도 아파?"

"응, 약간..."

봄방학. 대학 진학까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또, 그 별장에 놀러와 있었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는 마리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거울에, 머리를 감아 올린 자신의 얼굴 뒤로, 뒤에서 꼭 껴안고 있는 사랑스러운 타카쿠라의 얼굴이 비친다. 온천 요양. 한 달 내내, 병원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3월말 퇴원 후에도 쭉 집에서 요양하느라 바깥 출입을 못 한 마리에로서는, 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조심해서, 할께"

그렇게 말하고, 타카쿠라는 왼손에 보디 소프를 가득 묻혀, 희고 가냘픈 등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료지씨는, 늘 다정하네요"

기억난다. 퇴원하자마자, 타카쿠라는 마리에의 집에 방문해 "마리에씨를 제게 주십시오". 정식으로 청혼했을 때가. 병약한 몸으로, 외출용의 기모노로 한껏 멋을 부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손님을 맞은 어머니 유이. 식탁 위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깊이 머리를 숙이는 타카쿠라를 보고, 평소의 작업복이 아닌 영 익숙치 않은 양복을 차려 입고 있던 아버지는 딱 한마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딸을,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만 조용히 건냈다.

아버지...

식탁 위에 놓인 주름 투성이의 거친 손가락과,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고,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깊은 애정이 절절히 느껴져, 마리에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 식은 올리지 않기로 했다. 도쿄에서 함께 살면서 통학한다. 타카쿠라의 아버지가 귀국하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상견례를 갖기로 했다. 결혼신고는 마리에 쪽 친척분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바로 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일들이 순식간에 정해져 갔다.

"와---, 나한테도 형이 생겼다". 한껏 까불며 떠드는 남동생 켄스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며, 거실에서 함께 하던 비디오 게임에 푹 빠져 순진하게 소리높여 웃던 타카쿠라의 모습이 생각났다. "켄스케, 얼마나 좋을까, 멋지고 상냥한 형이 생겨서". 유이의 말에 수줍게 웃던 타카쿠라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웃는 얼굴이, 아마, 진짜 료지씨... 그리고, 미키씨가 그렇게나 보고 싶어하던, 웃는 얼굴...

마음의 상처가, 쿡쿡, 아파왔다.

"이봐, 마리에? 마리에!"

"앗, 네"

"저기 말야, 골든 위크에 미키가, 셋이서 어디론가 놀러 가자고 하는데, 어쩌지?"

"물론, 오케이"

"그래"

타카쿠라의 얼굴에 순간 안심한 듯한 표정이 지나가는 걸, 거울 너머로 날카롭게 캐치한다. 아마 미키에 대한 죄책감이 아직도, 무겁게 남아있을테지. 조금씩, 천천히, 시간을 들여 셋이서 녹여가면 된다. 서두를 것도, 당황해 할 것도 없다. 이제, 우리를 속박하는 저주는 사라지고 없으니까...

타카쿠라의 손바닥이 전해주는, 기분좋은 따뜻함에 몸을 맡긴다. 등을 타카쿠라의 가슴에 살며시 기댔다.

"저기요, 료지씨"

"응, 왜?"

"응큼하긴"

뒤에서 돌아나온 손이 마리에의 탐스러운 유방을 씻는다...기 보다는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복숭아색의 돌기를 굴리고 있었다.

"바보. 씻겨주고 있는 거잖아"

"거짓말쟁이..."

미소를 머금은 시선을 피해 앞으로 돌아와, 이번엔 거품이 잔뜩 묻은 손을 종아리로 가져간다. 상냥하고 따뜻하게 마리에의 온몸에 거품을 묻히고, 구석구석까지 샤워기로 씻어낸다.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는 마리에의 어깨에 올린 손을, 타카쿠라는 잠시도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료지씨도 참, 살 다 익어버리겠어요"

"미안 미안"

"있잖아요, 욕실에서 나가면, 말이죠"

"뭔데"

"안아줄래요?..."





달빛이 타카쿠라의 조각같은 얼굴을 비춘다. 그 눈에 감돌던 깊은 그림자는,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료지씨, 사랑해요"라고 속삭이는 마리에. 천천히 입술을 가져간다. 이마에, 눈꺼풀에, 코에, 턱에, 귓볼에, 새가 지저귀듯 살짝살짝 키스하고, 윗입술에도 아랫입술에도 입을 맞춘다.

료지씨...

갑자기 또르륵, 눈물이 넘쳐 흘렀다.

"마리에!?"

뺨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는 타카쿠라.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 닦고 또 닦는다.

"미안...해요"

"무슨 말이야, 마리에"

"미안..."

커다란 어깨 위로 이마를 떨군다. 바르르 떨고 있는 그 조그만 몸을 꼭 껴안아주는 타카쿠라.

"사과할 것, 아무 것도 없어"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으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든다.

"미안해요, 료지씨한테 심한 짓, 해서... 료지씨 앞에서, 마리에, 그런 짓... 해서... 미안해요"

연인이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연인 앞에서 보여버린 치태. 연인 이외의 남자와 살을 섞으며 한없이 흐트러졌던 음란한 자태. 두 사람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

"하지만"

"마리에 잘못이 아냐. 마리에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내가 잘못한 거야. 미키도, 마리에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니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애원하는 듯한 눈동자.

"료지씨 이외의 사람하고는, 싫은데, 그런데도, 느껴 버렸어요..."

침대 위에 앉아 서로 마주 본다. 만월이 마리에의 얼굴을 한층 더 창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리에는 료지씨만의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하고, 너무 좋아서, 느껴 버리고, 몇번이나 가버리고, 미쳐버리는 거 아닐까 무서울 정도로 느끼고, 왜, 어째서, 마리에의 몸, 료지씨 이외의 사람하고도, 느껴버리는거야? 어째서... 이렇게 더럽혀진 마리에,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한 마리에, 그런데도 료지씨는 용서해주고, 너무나 상냥하게 대해주고, 그 정도로, 줄곧, 나같은 이런 여자... 이제, 료지씨에게 사랑받을 자격 따위, 없는데... 그런데도, 료지씨는... 마리에를... 기뻐서, 너무 기뻐서, 하지만, 어째야 좋을지, 어떻게 해야 료지씨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

타카쿠라가 있는 힘껏 마리에를 껴안으며 말했다.

"전에 말했지, 나는, 마리에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고. 어떤 마리에라도, 사랑하고 있다고. 지금, 여기에 있는 마리에의, 그 모든 것을 사랑해. 그게 다야. 마리에가 이렇게, 내 품 안에 있어만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

입을 맞추며 살며시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입술에서부터 시작해 목덜미, 쇄골로 혀가 기어내려 간다. 유방을 감싸 쥐고, 허벅지를 어루만진다. 하나 하나, 마리에의 몸에 남은 능욕의 상처를 지워 없애가듯이.

"아...응, 으음"

유두를 입에 문다. 유두를 연주한다. 매끄러운 살결을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진다. 달콤하고 애틋한, 따뜻한 유열이 퍼져 나간다. "아...앙, 료...지...씨... 아앙..."

입술에 닿은 타카쿠라의 손가락을 혀로 휘감는다.

"아, 아아앙---, 하아, 아아앙"

꼭 닫혀진 허벅지 사이로 혀가 기어들어 간다.

"아, 아, 아, 아앙"

흘러 넘친다. 휩싸여 간다.

"앗, 아윽"

"미안, 아팠어?"

왼쪽 옆구리의, 총상 자국에 타카쿠라의 입술이 살며시 와 닿는다.

"아니에요... 깜짝 놀랐을 뿐이에요..."

달빛이 새하얀 여체 위에 남은 타액의 자취를 반짝반짝 비추고 있었다.

"료지씨..."

시트를 꽉 움켜쥐고, 자신의 몸을 바치고 있었다. 마리에의 조그만 얼굴 위로 타카쿠라가 돌아와 "느끼고 있어?". 꾸벅 끄덕이며, "굉장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흠뻑 젖은 보지에 자지를 가져가며, "사랑해"

"이런... 이런 마리에라도... 좋아요?"

"당연하지"

"기뻐요..."

시트 위로, 다시 눈물이 흘러 넘친다.

"죽을 때까지, 마리에는 내 여자니까"

"기뻐요, 아, 아앙, 하으음"

안으로 꽂아 넣는다. 아직 채 상처가 낫지 않은 마리에의 몸을 배려하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확인하듯, 서로 연결된다.

"료지씨, 료지씨..."

"마리에..."

몇번이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서로의 손을 꼭 마주 잡고, 서로 요구했다.

"료지씨, 가, 가요"

"마리에"

수도 없이, 깊은 절정을 느끼고, 기분 좋은 잠에 빠져 든다.









* 2





"어서 와요..."

현관으로 마중을 나온 마리에는,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타카쿠라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누구, 와 있어?!"

예정보다 하루 빨리 귀국해,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고 곧장 맨션 자택으로 돌아왔는데, 오토 락 인터폰을 마리에가 받을 때까지 10번도 넘게 눌러야만 했던 것이다. 문을 열어 주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 붉게 상기된 뺨, 티셔츠 위로 도드라지게 불거져 올라온 젖꼭지. 그 모습을 보고 초조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일찍, 돌아왔네요"

"누가, 와 있냐고 묻고 있잖아"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다. 타카쿠라는 슈트 케이스를 집어 던지고 침실로 곧장 내달렸다.

"어머, 료지. 벌써 돌아온 거야?"

침대 위에 시트를 뒤집어 쓰고 엎드려 누워 무료한 듯 잡지를 넘기면서, 미키가 쳐다 보지도 않고 인사를 건낸다.

"너, 어째서..."

순간, 남자라도 끌어들인 거 아닌가 의심했던 타카쿠라가 힘이 쭉 빠지는지 침대 맡에 털썩 주저 앉았다.

"뭐야, 미키 너였어?..."

자신의 억측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지, 타카쿠라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미키는 "뭐야, 설마 마리에가 바람이라고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거야? 바보냐 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라고 질렸다는 듯이 툴툴댔다.

"누가 팔불출 아니랄까봐, 질투는. 아~ 싫다 싫어, 보란듯이 말야"

타카쿠라가 어느새 옆에 와 앉은 마리에의 팔을 잡아 자기 무릎 위에 앉힌다.

"미키, 너, 마리에한테 무슨 짓 한거야?"

"별로,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페이지를 뒤적인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가 아니잖아. 얘기해 봐, 마리에, 심한 짓이라도 당한거야?"

남편의 추궁에 마리에는 무릎 위에 걸터 앉은 채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미키, 똑바로 말해"

"그러니까,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했잖아. 무슨 짓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했-지-"

쓴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킨다. 덮고 있던 시트를 걷어내자, 드러난 미키의 흰 피부 위로 선명하게 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타카쿠라가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마리에, 진짜야?..."

"...미안해요"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버린다.

"언제부터...였어?"

"...최근"

"최근이라고 하면, 언젠지 알 수가 없잖아"

마리에의 턱에 손을 대 얼굴을 들어 올린다. 일주일 만에 보는 아직 어린 아내의 얼굴은, 아마도 방금 전까지 하고 있었을 행위의 음란한 그림자를 진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도쿄에서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첫번째 가을. 물론,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고 있으니까 늘 함께 붙어 다니지는 못 했지만, 두 사람 사이가 더 깊어졌으면 깊어졌지, 멀어질 기미는 조금도 안 보였다. 그렇게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름 이후로, 타카쿠라의 개인전이나 초대전이 잇따라,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지긴 했지만, 서로 만날 수 없는 만큼, 그만큼 더 서로 보고싶어 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리에, 너..."

시선을 피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마리에 대신에 "무슨 말을 하는거야, 아까부터. 마리에를 이렇게 만든 건 료지 너잖아. 정말이지, 자기 일에만 푹 빠져서 말야. 같이 산지 얼마나 됐다고 매일같이 외롭게 만든 게 누군데. 그러니까 내가 대신해서, 이렇게, 마리에랑, 둘이서 이런거 저런거 하고 놀았던 것 뿐이라구". 그렇게 말하며, 마리에의 가느다란 팔을 휙 잡아채 껴안아 버린다.

"야, 미키"

"료지는, 거기서 지켜보고나 있어. 마리에를 내버려 둔 벌이야. 계속, 하자. 응? 마리에, 계속, 해줬으면 좋겠어"

"잠깐 기다려..."

"료지씨, 마리에, 료지씨 좋아해요. 하지만, 미키씨도 좋아"

미소를 지으며 마리에가 미키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두 미녀의 팔이 서로의 머리를, 등을, 얼싸 안는다. 타카쿠라는 그저 멍하니 두 사람의 미녀가 서로 뒤엉키는 모습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하긴, 상관없나"

이게, 세 사람 사이에 있는, 잃어버린 뭔가를 채워갈 수만 있다면.

청초하고 사랑스러운 마리에와, 화려하고 세련된 미키. 입술과 입술 사이로 혀가 격렬하게 뒤엉킨다. 전혀 다른 타입의 두 미소녀가 나누는 진한 키스. 침이 흘러 넘친다. 두 사람의 꿈틀거리는 뺨만 봐도, 그 안에서 서로 얼마나 격렬하게 혀를 휘감아대고 있을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탐내고 있었다.

"아, 아, 아앙, 하아앙"

마리에의 흰 손이 미키의 가슴을 터트릴 것처럼 거칠게 주무르며, 가느다란 손가락 끝으로 집요하게 유두를 굴리기 시작했다. 미키의 입에서 조금씩 달콤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닿을락 말락 미묘한 터치로 등을 더듬어 내려간다. 그럴 때마다, 꿈틀꿈틀, 미키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미키, 혀 내밀어 봐"

마리에의 말투가 갑자기 싹 바뀌었다. 슬쩍 곁눈질로 타카쿠라를 훔쳐보더니, 미키가 시키는대로 혀를 내민다.

"더"

한층 더 길게 혀를 내민다. 거기에 마리에가 입술을 오무리고 달라붙더니, 츄웁츄웁 소리를 내 빨아 올린다. 양손으로 뺨을 감싸면서. 미키가 눈을 꼭 감고, 마리에보다 훨씬 풍만한 가슴을 스스로 꽉 움켜 쥐었다.

"아앙, 아, 마리에, 아앙"

오후의 햇살이 서로 뒤엉켜 있는 두 미녀의 살결을 비춘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다. 이번엔 미키의 얼굴을 위로 들어 올리며 명령한다.

"입을 열어"

"네"

주저없이 명령에 따른다. 그런 미키의 얼굴을 만족스레 내려다 보며, 쥬르륵. 마리에가 미키의 벌어진 입 안으로 침을 떨어트린다.

"아앙, 우웁, 꿀꺽, 꿀꺽"

차례차례로 마리에의 침을, 미키가 맛있게 삼켜 간다. 주도권은 분명히 마리에가 잡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몰아붙여 흥분시켜 간다. 마리에가 처음으로 보여준 가학적인 일면을 타카쿠라는 그저, 놀란 눈으로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착하네, 미키. 맛있니?"

"네... 맛있어요, 맛있습니다"

요염한 눈동자의 마리에와 흐물흐물 녹아내린 눈동자의 미키가 서로 응시한다.

"더 해줬으면 좋겠니? 기분좋게 해줄까?"

곧바로, "해,해줘... 마리에, 제발"

애원하는 미키. 타카쿠라로서는 처음 보는 미키의 일면이었다.

"그럼, 똑바로 부탁해야지. 언제나처럼"

흠칫흠칫, 미키가 자세를 다시 바로 잡는다.

"미키, 어머, 료지씨가 보고 있잖아. 료지씨한테도 잘 들리게 큰 소리로 말해야지. 알았니?"

미키가 꾸벅, 끄덕인다. 양발을 M자 모양으로 벌리고, 마리에를 향해, 그리고 그 뒤의 타카쿠라를 향해, 완전히 푹 젖어버린 보지를 손가락으로 활짝 벌려 보였다.

"저..., 저기, 미키를, 좀 더 느끼게, 해주세요... 음란한 미키에게, 좀 더 잔뜩, 해, 해주세요..."

"틀렸잖아"

타카쿠라 앞이라 당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대사를 바꿔버린 미키를 향해, 가차없이 질책하는 마리에. 다른 사람을 꾸짖는 즐거움에 푹 빠진 것 같았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부탁해야지. 못 하겠으면, 이걸로 끝내고"

"아, 아아아, 안돼..."

애타게 매달리는 목소리. 그리고는, "...미키는, 음란하고 부끄러운 짓을 정말로 좋아하는 미키는... 마리에의... 저기... 저기... 마리에의, 마리에의 애완동물입니다, 뭐든 시키는대로 다 하는. 그러니까, 미키를, 좀 더 음란하고 부끄러운, 그런 아이로 만들어, 만들어 주세요"

고등학교에서는 물론이고, 부하로 부리는 야쿠자 무리 앞에서도 여왕님처럼 굴던, 타카쿠라가 알고 있던 미키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과 추잡한 말이었다.





"아, 아앙, 몰라 몰라, 안돼, 아앙아앙, 좋아, 몰라, 안돼 안돼, 마리에, 아아앙..."

침대 위에 네 발로 엎드린 미키는 타카쿠라 따위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칠칠치 못하게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지금은 밤색으로 되돌린 긴 머리카락을 헝크러트리면서, 투명하리만큼 새하얀 등을 물결처럼 꿈틀거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시트를 꽉 움켜쥔 손이 시트에 깊은 주름을 새기고 있었다.

"아, 아, 아, 좋아, 너무 좋아, 괴,굉장해, 아앙, 안돼---"

한편 마리에는 그런 미키를 뒤에서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왼손은 쭉 빼밀고 있는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직,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오른손 손가락 하나뿐. 쉬지 않고 보지물을 질질 흘려대는 질구에 꽂아 넣은 집게 손가락 하나로 미키를 자유자재로 조종하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자극하면 느끼는지, 미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

"어때? 기분 좋니?"

"네, 그래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이렇게 하면, 더 느껴지지?"

엄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꾹 누르고 세게 비벼댄다.

"아아아앙, 앗, 아, 아, 음아아아"

팔꿈치가 무너져 내렸다. 아름다운 얼굴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땀이며 침으로 범벅이 되어, 눈물까지 쏟아내고 있던 미키가 갑자기 정수리까지 저려오는 자극에,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긴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어지럽게 흩어진다.

"미키..."

타카쿠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에리카의 사무소에 소속되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빼어난 용모 덕분에 패션 잡지에도 종종 실려, 모델로서도 주목받기 시작하고 있는 미키가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자신을 향해 엉덩이를 곧추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옆에는 냉정하게 초미형의 여체를 가지고 노는 마리에까지.

"어머, 료지씨 표정 좀 봐. 그렇게나 느껴 버리고. 부끄럽지도 않니?"

무엇보다도, 어느 틈에, 거기까지, 그 자존심 강한 미키를 조교해낸 마리에가, 믿겨지질 않는다.

"안돼, 안돼..., 료,료지, 보지 마... 안돼"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 하고 더듬거린다. 두 여자의 관계가 180도 역전되어 있었다.

"사실은, 봐 줬으면 하는 주제에"

"그런... 그런거, 하으윽, 아아아앙... 마리에, 아앙, 심술부리지 말고"

도망치려고 하는 여체를, 마리에가 잘록한 허리를 왼손으로 꽉 잡아 누른다. 오른손 중지를 쑤욱, 뿌리 끝까지, 항문 안으로 집어 넣는다.

"미키, 넌 나하고 료지씨 애완동물이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들 허락 없이, 남자하고 만나거나 하면 절대 안 돼. 애인같은 거 만들다니, 어림도 없지. 알았어?"

"네..."

겨우 손가락 세 개로 만들어내는 열락에 집어 삼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더 커다란 쾌락이 늘 기다리고 있었다. 미키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럼, 상을, 줄께. 가게, 해 줄께. 자, 가도록 해, 미키. 료지씨 앞에서. 료지씨한테 가는 모습, 보여줘"

격렬하게 쑤셔댄다. 교묘하게 엄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굴리면서.

"아아아아아, 아앙, 몰라---, 아, 아, 안돼, 가버려, 아앙, 가 가, 간다------..."





티셔츠 차림의 마리에의 가슴에, 마치 어린애처럼 안겨 있는 미키가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조그맣게 어깨를 들썩이며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절정의 여운을 맛보고 있었다. 마리에가 그런 미키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타카쿠라까지도 이 이상할 정도의 따뜻함에 취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바로 미키의 본래 모습, 진짜 미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늘, 주위 사람들을 깔보고,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며 강한 척 해오던 미키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드러내고,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마리에가, 그 미키의 얼어붙어 있던 마음을 녹이고 있었다. 마리에의 존재가, 그 잃어버렸던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다. 시계 바늘을, 그 무렵으로 되돌린다. 이 기적적인 만남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에..."

마리에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인다. 미키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다. 짖궂은 표정으로 타카쿠라를 바라보며, 마리에가 말했다.

"미키씨가 말이죠, 료지씨한테 안기고 싶다네요"









* 3





"료지..."

매끄러운 미키의 살결을 쓰다듬고 있던 손이 이마를 덮고 있는 밤색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어루만져준다.

"정말 괜찮아?..."

부드러운 질문에, 타카쿠라의 단단한 몸 아래에 누워 몸을 맡기고 있던 미키가 "응, 응"이라고 크게, 아이처럼 몇번이나 대답한다.

"아, 하으으, 아으으음..."

등을 뒤로 크게 젖히며 신음소리를 토해낸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건가"라고 고민하는 타카쿠라의 목에, 가느다란 팔을 두르고 매달린다.

"료지..., 머,멈추지 마...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하으으음"

쭉 뻗은 다리가 또, 시트에 새로운 주름을 새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친구를 안는다. 그 모습을, 마리에는 베드사이드에 앉아 조용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 료지, 마침내... 료지하고..."

미키의 보지 깊숙히 자지를 박아 넣은 타카쿠라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료지와 하나가 됐어... 료지에게 안겼어... 마침내, 료지하고..."

미키의 투명한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키... 고마워. 앞으로 영원히, 나는... 미키 옆에 있을거야... 사랑해...". 귓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기뻐..."

동그랗고 예쁜 눈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눈물이 또르륵 흘러 내렸다.

"거짓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거짓말 아냐". 따뜻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다정하게 웃는다.

"아..., 웃었다... 료지, 나한테..., 옛날처럼... 그 때랑, 똑같애... 정말정말, 만나고 싶었어, 료지..."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 넘친다.

"미키..."

타카쿠라가 새하얀 여체를 세게 끌어 안았다.

마리에가 살그머니, 침실 밖으로 나간다. 부엌으로 가 커피 메이커에서 커피를 내려, 컵을 들고 거실을 지나 베란다로 나가 초가을의 높고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벌써, 1년이나 지났네..."

타카쿠라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온, 바로 그 날. 도서실에서 "모델이 돼줘"라고 강요당한, 바로 그 날. 악몽이 시작된, 바로 그 날 이후로 벌어진 여러가지 사건들을 떠올렸다. 강제로 몸을 빼앗기고 상처입어, 죽고싶을만큼 괴로워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그저 마음을 닫고 계속되는 능욕의 폭풍우에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그 얼굴이 떠오른다. 가차없이 능욕당하던 자신의 모습. 그런 기억조차도 지금에 와서는 그립다는 생각마저 든다.

"료지씨..."

어느덧 깨닫게 된, 그의 서투른 다정함. 날카로움 뒤에 숨어 있던, 깊은 슬픔. 조금씩, 마음이 열려갔다.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치유되지 못한 상처. 단단히 붙잡힌 주박 안에서, 발버둥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어지럽게 뒤엉켜버린 주박 안에서, 서로 상처입히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 불과 1년 전의 사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이걸로, 다 잘 될거야..."

도쿄에서의 생활은 의외로 평온했다. 여러가지 일로 바쁜 타카쿠라와 조금이라도 더 많이 시간을 보내려고, 써클같은 데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찮아도 여학생이 적은 캠퍼스 안에서, 찰랑찰랑 휘날리는 흑발의 청초하고 귀여운 용모는 단연 눈에 띄어, 고교시절하고는 달리, 말을 걸어오거나 고백해오는 일이 꽤 자주 있었다. 이미 결혼했다고 말했을 때의, 한결같이 놀라는 표정이 우스웠다. 강의는 아직까지는 교양과목이 많은 탓인지, 별로 자극적이지 않았다. 막연히, 애초에 지망했던 물리학이 아닌, 유전자 관련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지..."

타카쿠라가 집에 없을 때는 항상,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미키가 찾아왔다. 사람을 깔보고 허세 부리던 무렵의 날선 태도는 사라지고, 이제는 마치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던 것처럼 다가왔다. 패션, 학교, 아르바이트 모델 일 등, 미키는 늘 이야기 거리가 풍부했다. 틈만 나면 긴자로 쇼핑하러 나가고,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고, 그렇게 늘 둘이서 붙어 다녔다. 마리에 입장에선 낯설고 두려운 대도시의 거리를 안내해 주는 최고의 가이드였다. 그리고, 마리에가 모르는 미키와 타카쿠라의 추억을 들었다. 속으로 담아두기만 했던 괴로움이나 슬픔을 미키는 모두 털어 놓았고, 또 마리에는 그걸 전부 들어 주었다.

"분명, 괜찮을거야..."

모든 것이 끝났다. 타카쿠라도, 미키도, 이젠 어둠 속에 있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고, 여름의 자취와도 같은 구름이 하늘을 흘러간다. 도심의 고층 맨션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 아랫쪽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카사카 고세 역 오른편, 쭉 이어지는 거리의 끝자락,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바다가 석양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굉장히, 분위기 좋은 가게네요"

도코노마(*주, 일본식 방 한쪽 벽면에 장식용으로 한 층 높게 바닥을 올린 것)위에 자연스럽게 놓여진, 연한 복숭아색의 애처로와보이는 국화꽃에 정신이 팔린 마리에에게, 아직 서른이 채 안 되어 보이는 기모노 차림의 젊은 여주인이 "감사합니다". 깊숙히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타카쿠라의 아버지가 주목하고 있던 젊은 요리사가 독립을 해 바로 얼마 전에 가게를 냈다고 한다. 카구라자카 뒷골목에 위치한, 가게 이름도 씌여있지 않은, 그저 포렴만 쳐진 식당. 그 안쪽 별실에서 타카쿠라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료지 도련님은 맥주로 하실건가요?"

"예. 마리에는... 아직 어린애니까 오렌지 쥬스가 좋으려나"

농담을 하며 놀리는 타카쿠라를 보고, "너무해---. 마리에도 맥주 주세요". 입술을 삐죽거린다.

"무리하지 마. 그것보다 너, 지금 무지 이상한 얼굴 하고 있는 거 알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타카쿠라를 보고 여주인이 놀라,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츠에씨, 마리에는 우롱차로"

"...아, 네. 바로 내오겠습니다. 오늘은 좋은 생선이 들어왔으니까, 회로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그대로, 마리에를 빤히 쳐다 보았다.

"저기..., 왜..."

당황해서 목을 움츠리는 마리에에게, "정말, 사랑스러운 아가씨네요... 료지 도련님하고 참 잘 어울려요". 미소를 짓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정말 맛있다..."

"그래? 다행이네"

바삐 움직이던 젓가락이 천천히 멈춘다.

"...아빠 엄마한테도, 먹여주고 싶은데..."

조그맣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담번엔 부모님도 모시고 올까? 물론, 켄스케도"

"정말!?"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마리에를 보고 타카쿠라도 미소를 짓는다.

산해진미를 맛보며,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갑자기 타카쿠라가 "...미안했다"라고 말하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뭐야, 갑자기, 콜록"

새우 꼬리를 입에서 뱉어내며 마리에가 황급히 우롱차에 손을 뻗는다.

"미키 일 말야"

"아, ...미키씨, 말이구나. 다행이죠. 콜록 콜록, ...굉장히 기뻐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하며 물을 삼키고, 가슴을 톡톡 두드린다.

"싫지는 않았어?"

"아니. 미키씨였으니까... 약간은 질투했지만"

"고마워, 마리에"

"고맙긴요, 난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늘, 내가 없을 때, 미키하고 함께 있었어?"

"그거야, 미키씨는, 마리에의 소중한 친구니까. 딱 한 명 뿐이지만"

"한 명 뿐이라니, 마리에 너, 고등학교 때, 늘 애들하고 같이 다녔잖아"

"그랬나..., 같이, 다니긴 했죠. 반에서는, 있잖아요, 혼자 있으면 겉돌게 되니까. 그러니까, 같이 다니긴 했죠. 하지만 속에 있는 말은, 하나도 못 했어요. 다들, 이런저런 속마음은, 말 안해요. 그저 웃고 떠들기만 할 뿐이지. 그건 그것대로 편하긴 하지만... 그런데, 미키씨는 뭐든지 다 얘기해요. 여러가지 일들을. 내가 모르는 것들, 몰랐던 것들을. 나도, 그래서, 미키씨한테는 뭐든 얘기해요. 료지씨 없을 때, 미키씨하고 싸운 적도, 있는걸요"

타카쿠라는 그저 가만히, 마리에가 스스로 꺼내는 이야기에, 그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 게다가, 지금은 고등학교 때랑은 달라요. 대학에서는 내가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여기저기 연구실에 얼굴을 내밀기도 하고. 학부는 다르지만, 친하게 지내는 아이도 있고. ...물론, 여자아이. 료지씨,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걱정이라니, 그런 걸 내가 왜 해"

"쳇, 뭐야"

개구장이처럼 웃어 보인다.

"정말이지, 마리에, 강하구나..."

"아닐걸요, 아마, 정말 강한 건, ...미키씨라고 생각해요". 곧바로 대꾸한다. 시선을 피하며 밥공기를 손에 들고, "늘, 항상,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료지씨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료지씨도, 눈치챘잖아요, 미키씨가 료지씨 이외의 남자가 다가오는 것, 늘 피하고 있었다는 거... 남자랑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 조차도, 속으론 엄청 무서워하는 거...". 말을 이어갔다.

"...아"

"그치만, 분명 이제는, 이걸로..., 괜찮아, 질거에요..."

"그럴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마리에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은행을 젓가락으로 집어 예쁘장한 입술로 가져간다.

"마리에도, 강해질거에요. 미키씨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될래요... 이제부터,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와도, 절대로 자신의 의지를 꺾거나 하지 않는, 그런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분명 마리에라면, 그렇게 될거야"

"료지씨 덕분이에요. 료지씨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게 됐어요. 고마워요, 료지씨"

"그건 이쪽이 할 대사인걸. 나도, 미키도, 마리에 덕분에 구원받았으니까"

"헤헤, 어쩐지, 부끄러워지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니까... 료지씨랑 미키씨하고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렇게 됐다라, 나야말로 놀랐어. 설마 마리에가, 그..., 미키를, 마리에가..."

"그~거야, 미키씨한텐 무지 심한 짓 당했으니까, 그, 복수. ...라는 건, 농담.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렸어. 괜찮죠? 료지씨, 미키씨랑이니까"

"괜찮긴 한데... 마리에, 그럼 또, 미키하고?"

타카쿠라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거야, 미키씨 엄청 예쁘니까"

그 말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타카쿠라 옆에 바짝 붙어 앉는다. 어깨에 팔을 두르고, "료지씨, 질투하기 없기". 타카쿠라의 남자다운 얼굴에 쪽하고 입을 맞추는 조그만 얼굴을, 타카쿠라의 큼지막한 손이 감쌌다.

"마리에..."

"료지씨, 앞으로, 쭈---욱 함께니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나도"

입술이 가까와진다.

"도련님, 맛은... 아!"

갑자기, 드르륵 소리를 내며 안쪽 문이 열렸다.

"어머나, 이런..."

꼭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뻘쭘해서 머리를 긁적이는 요리사 옆에서, 여주인이 키득키득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저씨, 기척이라도, 하고 문을 열지 그래요"

"아니,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그 그게, 미안해요. 이런 실례를"

여주인처럼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타카쿠라의 뒤로, 등 뒤에 숨은 마리에가 귓볼까지 빨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별 수 없죠. 조심하세요, 앞으론"

"아..., 네..., 그게 정말로..., 뭐야, 너, 왜 그래?"

여주인이 눈치를 준다.

"뭐하는 거에요?"

"아니, 료지 도련님이, 이렇게 즐겁게 웃는 모습, 처음인 거...앗!"

"당신 정말..."

요리사를 꽉 꼬집어버리는 여주인에게, 타카쿠라의 등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민 마리에가 말했다.

"료지씨, 늘 이렇게 웃어요"





(끝)





그리고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나, 이어지는 또 하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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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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