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주박 제7장 진짜 나
제7장 진짜 나
제31화
"타-카-시-씨, 늦었잖아요"
현관으로 마중나온 마리에의 평소와는 다른 웃는 얼굴.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늘상 당연하게 봐 왔던 미소에 당황하고 만다. 약간 상기되어 보이는 웃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마리에를 억지로 안고 난 이후로, 내내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마리에는 달랐다.
1월. 겨울방학 마지막 날. 올해 들어 처음, 그리고 마지막 과외 날이었다. 그 날 이후로, 마치 타카시를 경계하는 것처럼 항상 오버올(*주, 정비공들이 입는 작업복처럼 상하가 하나로 된 옷)만 입던 마리에가 오늘은 밝은 노란색의 때이른 봄 옷 원피스 차림이었다.
이 원피스, 분명... 맞다, 틀림없었다. 지난 봄에, 아버지 날 선물을 고르느라 같이 시내에 나갔을 때 입고 있던 옷이었다.
"왜, 멍하니 그러고 있어요?"
"아냐, 아무것도. 미안"
"타카시씨 오늘 이상하네"
손을 덥썩 잡더니 마리에가 후다닥 자기 방으로 잡아끈다. 너무 밝고 활기차서, 사토시가 여태까지 알고 지냈던 마리에 같지가 않았다.
오늘로 마지막이니까, 오늘 하루 쯤은... 그런 건가. 잡고 있는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오히려 마리에가 이별을 결심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자, 마지막 한 문제 남았어요"
샤프 펜을 쥐고 있던 오른 팔을 빙글빙글 돌려 보인다. 땋은 머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눈 앞에서 흔들렸다. 희미한 샴푸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안경도 더이상 쓰지 않고 두꺼운 수학 문제집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이이잉, 힌트, 힌트 좀 줘봐요"
그렇게 말하며 빙긋 미소를 지어보인다.
"별 수 없네, 여기, 이 공식을 적용해 봐"
"앗, 그렇네. 여~억시. 현역 대학생은 뭔가 다르네요"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얼마나 여성스럽고 매력적인지, 타카시가 알고 있던 마리에가 아닌 것 같았다.
"오케이, 다 풀었어요. 어때요?"
"정답"
펜을 내려놓더니 양팔을 위로 치켜들고 등을 크게 뒤로 젖히는 마리에. 탐스러운 젖가슴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만다. 요 세 달 사이에 마리에는 완전히 변해 버렸다. 타카쿠라와 마리에가 그동안 서로 쌓아온 시간이 눈에 훤히 보였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변모한 모습. 이제는 초조함이나 질투심조차도 들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외로움만 남아있을 뿐.
"그럼, 타카시씨, 차 마실래요?"
어머님의 검사입원으로,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마리에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의 권유였다.
"타카시씨 이거 좋아했죠? 안 먹을 거면 가져가구요"
"아, 고마워"
만쥬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럼, 커피? 차? 어떤 걸로 할래요?"
"아니, 됐어"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는 마리에의 귀여운 표정. 넋을 잃고 쳐다 보았다.
"응? 왜요? 타카시씨"
"아,아무 것도 아냐"
"뭐야~, 수상한데~"
수상한 건 마리에겠지. 어떻게 된거야, 갑자기.
할 말을 잃은 타카시의 어색한 침묵. 그러다 자기가 먼저 어색함을 못 견디고 입을 연다.
"지망 대학, 바꿨다면서?"
"응, T공대 추천으로. 선생님께서도 문제없을 거라고 하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타카시가 다니는 현지 대학을 지망했던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하긴 현내 톱을 달리는 명문학교에서 3년 내내 이과 수석을 지켜온 마리에라면 원서제출 시점에서 이미 합격 확정이긴 했다.
"그럼, 도쿄로 올라가겠네"
"그이가, 아, 료지씨네 집에서, 하숙이라든지, 돈 문제 같은 건 지원해 주시기로 하셨거든요. 좀 더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배워보고 싶기도 하고"
"그랬구나. 녀석하고, 잘 돼가고 있구나"
"뭐 그렇죠"
"콘택트 렌즈 낀거야?"
"응. 그이가 사줬어요. 이 쪽이 더 잘 어울린다면서. 머리 묶고 다니는 것도, 그만 두라고 하고"
"머리 풀고 다니니까, 꽤 어른스러워 보이네"
"그래요? 마리에, 예뻐보여요?"
"아, 무척"
"헤헤, 고마워요"
마리에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주다니. 소문하고는 달리, 타카쿠라라는 녀석, 나쁜 놈이 아니었나 보다. 사이도 좋아보이고. 그래. 그러니 나같은 녀석은...
"미안했다..."
"네? 뭐가요?"
"저기, 마리에를, 억지로..."
"아아, 괜찮아요, 이제. 타카시씨를 배신한 건 나니까. 신경쓰지 마요"
"하지만, 나, 마리에의 애인도 뭣도 아니었는데, 멋대로 화만 내고. 생각해 보면, 마리에가 누굴 좋아하든, 누굴 사귀든, 마리에 맘인데, 그런데, 나, 심한 짓을 해버렸어. 미안해"
"자꾸 신경쓰지 말라니까요, 정말. 게다가, 타카시씨랑 한 거, 그러니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어요"
얼굴이 빨개진다.
"아무튼, 마리에가 녀석하고 잘 돼간다니까, 안심했어"
순간, 또 침묵. 이번엔 마리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하고는 확연히 다른 음색으로.
"그런데, 타카시씨, 처음엔, 끔찍했어요"
"무슨, 그거, 무슨 뜻이야?"
"여름방학 막 시작했을 무렵에, 그저 호기심에, 나, 서점에서 도둑질을 해버렸어요. 그걸, 그이, 료지씨한테 들켜버렸어. 그래서, 소문나기 싫으면 시키는대로 하라고, 협박당해서, 나, 억지로, 음란한 짓, 당하게 된거에요"
"뭐?..."
"엄마한테는, 그림 모델 한다고 했었지만, 사실, 미술실에 불려가서, 매일같이 별별 일을 다 당했어요"
"그...런..."
"정말이지, 너무너무 싫어서, 매일같이, 죽고싶은 생각 뿐이었어요. 타카시씨한테 바치려고 했던, 내 처녀도, 강제로, 음란한 모습으로 빼앗겨버리고.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훨씬 더 부끄러운 짓, 잔뜩 당했어요"
담담하게 타카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 일을, 어째서, 얘기하지 않은거야..."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픈 엄마한테, 유명한 화가의 모델 아르바이트 한다고 기뻐하는 엄마한테, 그런 얘길 어떻게 해요"
"나한테라도, 털어 놨으면"
"뭐라고요? 대체, 타카시씨한테, 마리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 강간당했어요"라고? "음란한 짓 잔뜩 당했어요"라고? 그런 말을 했어야 돼요? 그런 말을 듣고도, 타카시씨는, 더럽혀진 마리에를 받아들여줄 수 있었겠어요?"
생각지도 못 했던 고백에,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타카시씨, 마리에, 별에별 일을 다 당했어요"
"학교 갈 땐, 절대, 속옷 같은 거 못 입게 했어요"
"입으로 할 땐, 한 방울도 남기면 안 됐어요. 전부 다 마셔야만 했어요"
"벌거벗은 채로, 개처럼 엎드려서, 교내를 산보한 적도 있어요"
"그의 집에 가서, 항문에 삽입당한 채로, 가버린 적도 있어요"
"수업은 언제나, 바이브레이터를 거기다 넣은 채로, 받아야만 했어요"
"그하고 있을 때는, 화장실도 못 가요. 늘 그가 보는 앞에서, 용변을 봐야 했어요"
"온몸을 꽁꽁 묶인 채로, 밤에 공원에서 스스로 하라고 명령받은 적도 있구요"
"제가 먼저 빌지 않으면 절대 안 넣어 주는 거에요"
"몇 시간도 넘게, 그의 몸을, 핥아야만 했던 적도 있어요"
"그러면서, 마리에, 점점, 몹시 느끼게 되어 버렸어요. 스스로, 부끄러운 짓을 당하고 싶다고, 그렇게 원하게 되어 버렸어요"
살짝 수줍어하는 미소를 띄면서 전부 털어 놓았다.
"그런 짓을 하는 그이가, 좋아요. 너무 좋아요. 료지씨를, 사랑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렇잖아, 그런 심한 짓을 당하면서, 좋아한다니, 말도 안 돼"
"아니, 그게, 료지씨의 애정 표현인걸요.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마리에를, 사랑한다고, 오직 그이만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줬는걸요. 나도,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고. 그래서, 그렇게 결정한 거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르겠다.
"마리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는거야? 그런 바보같은 말이 어딨어"
"알고 있어요"
요염하기 짝이 없는, 음란한 빛이 진하게 어린 눈동자. 마리에가 천천히 일어났다.
"료지씨는, 나 스스로도 깨닫지 못 했던, 진짜 나를, 깨닫게 해줬어요. 진짜 나를. 타카시씨한테도, 가르쳐 줄께요. 그러니까, 타카시씨, 눈 감아봐요"
"마리에, 왜 그러는거야..."
"괜찮으니까 눈 감아봐요, 제발. 진짜 내 모습을 가르쳐 줄테니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늘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허약한 느낌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마리에의 말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앉아있는 타카시의 등 뒤에서 마리에의 팔이 앞으로 뻗어나와 머리를 감싸 안았다. 손이 천천히 내려와, 뺨에서 목덜미, 가슴팍으로 기어 들어간다. 그리고 팔을 붙잡아 뒤로 돌리더니, 순간, 어느새 준비했는지, 철컥. 양 손목에 수갑을 채워 부엌 의자에 고정해 버렸다.
"마리에, 무슨 짓이야!"
당황해 벌떡 일어서려는 순간, 양 발목에도 재빨리 수갑을 채워 버린다.
"그만 둬, 마리에. 어쩔 셈이야"
"그러니까, 진짜 내 모습을, 가르쳐 준다니까요"
타카시의 뺨에 마리에가 뺨을 부벼대며 속삭인다.
"가르쳐...줄께요"
손에 쥐고 있던 리모콘으로 바로 정면에 놓인 비디오 데크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제32화
몇초 동안의 노이즈 화면이 지나가고, 교실이 화면에 비췄다. 타카시도 본 적이 있는 모교의 한 교실 풍경이었다. 운동장에서 한창 연습중인 야구부인지 축구부인지,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교탁 바로 앞에 선 교복 차림의 마리에가 손을 뒤로 돌리고 서 있었다.
"잘 봐요, 마리에를..."
귀에 입술이 닿았다.
"그만두지 못해?! 마...리에. 이런 짓을 하다니, 대체 어떻게 된거야! 난, 보기 싫어, 보고 싶지 않다구!"
"안 돼요. 료지씨가, 주인님께서,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라고 명령하셨어요. 타카시씨한테,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 나, 벌 받아야 돼요. 비디오, 만약 보여주지 못하면, 학교에서 벌거벗은 채로 책상에 묶어놓고, 주인님, 그냥 돌아가 버리신대요. 타카시씨 대신에, 반 친구들 모두한테, 진짜 내 모습을 보여줘 버린대. 마리에가 그런 벌을 받아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부탁해요, 잘 봐요"
귀에 혀가 닿았다. 화면 속에서 마리에가 미소짓고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될 치욕을, 그 열락을, 마치 애타게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듯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분명하게,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의 목소리인가. 마리에를, 그 순진했던 마리에를, 이렇게 바꿔놓은 타카쿠라의 목소리인가.
분노가 불끈 솟아오른다.
"네. 주인님"
교태가 넘치는, 달콤한 목소리. 교복 블레이저 코트에서 쓰윽 팔을 뽑는다. 리본을 풀고, 블라우스도 벗어 내던졌다. 새하얗고 풍만한 유방이 드러났다. 복숭아색의 유두는 벌써 꼿꼿이 서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커트를 발밑으로 벗어 떨어트리고, 곧바로 다시 손을 뒤로 돌렸다. 속옷은 전혀 입고 있지 않았다. 감색의 하이 삭스만 걸친, 모든 것을 다 드러낸 전라였다.
마리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핥듯이 마리에의 몸을 비춘다.
"제대로, 인사말은 준비해 왔어?"
꾸벅, 고개를 끄덕인다.
"말해봐.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 소중한 여자에게 손을 댄 남자에게. 마리에가 누구 것인지, 똑바로 가르쳐 줘"
수갑이 철그럭 소리를 냈다. 화면 안의 마리에가 가만히 타카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리에는 료지씨 것입니다. 입도, 가슴도, 거기도, 엉덩이도, 그 밖에 다른 곳도, 마리에의 몸은 전부, 주인님만의 것입니다. 음란한 짓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마리에를 봐 주세요. 부끄러운 짓을 당하고 그걸로 잔뜩 느끼는 마리에를, 봐 주세요. 마리에가 료지씨 거라는 증거, 진짜 내 모습을, 봐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옆에 놓인 철제 의자에 앉더니 천천히 양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렸다. M자 모양으로 활짝 벌린 가랑이 사이 중심부로 옅은 수풀이 클로즈 업 된다.
"뭐야, 벌써 흠뻑 젖었잖아. 교복을 벗기 전부터 적시고 있었던거야? 음란하긴, 마리에"
"하지만, 그건, 주인님께서, 마리에를, 이런 몸으로..."
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기가 하는 말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갖고 싶어?"
화면 중앙에 갑자기 남자가 손에 쥔 거무칙칙한 거대한 딜도가 나타났다.
"아아아, 갖고 싶어, 갖고 싶어요, 그거, 주세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리에는 주저하지 않고 오른손으로 그 딜도를 붙잡아 보지 안에 밀어넣어 버렸다.
"아, 아앙, 하아아앙"
눈부시게 새하얀 육체가 활처럼 크게 뒤로 젖혀졌다.
"그 장남감, 굉장히, 맘에 들었나 봐"
빈정거리는 말도 이제 더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마리에의 왼손이 조그만 몸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요염하게 움직여 정점에 위치한 유두를 이리저리 굴린다.
"하아, 하아, 아앙, 아아앙, 아앙, 하앙, 하앙, 아아아, 좋아, 좋아요, 하앙, 기분, 좋아요, 아앙"
손가락이 하복부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딜도로 마구 쑤셔대고 있는 질구 바로 위, 클리토리스를 비벼댄다.
"아아아아, 아앙, 몰라, 몰라, 안 돼, 아앙, 하아앙, 안 돼, 굉장해, 아앙"
신음소리가 한껏 높아져 갔다.
"뭐야, 벌써 가는거야?"
거짓말...일거야... 저게, 정말, 마리에라구? 믿을 수 없어. 겉모습만 똑같은, 속은 완전히 다른 딴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위화감에 사로 잡힌다.
"갈 때는, 확실하게, 스스로 말해"
"아앙, 네에, 네, 아앙, 하앙, 모,몰라, 이제, 가버려, 가버려요, 안 돼, 아아아아아, 가요, 가버려요오오오오"
교성이 부엌 가득히 울려 퍼졌다. 화면 속의 마리에가 손발을 축 늘어트리고 탈진해 온 몸으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냐, 절대로 아냐, 저건, 마리에가 아냐. 내가 좋아했던 마리에가 아냐.
꽉 움켜쥔 타카시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음은, 내 거를 빨아줄 차례야"
얼마 쉬지도 못 했는데, 곧장 다음 명령이 떨어진다. 비틀비틀 의자에서 내려와 네 발로 기어 카메라 쪽으로 다가간다.
"장소를 옮기자. 4층에, 늘 가던 곳으로, 이대로, 가는거야"
순간 움찔했지만 곧, "네, 알겠...습니다". 문 쪽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 네 발로 기어가는 마리에의 동그란 엉덩이가 화면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린다. 보지에 여전히 박혀있는 바이브레이터를 마치 꼬리처럼 휘저으면서 개처럼 기어간다.
"어이 어이, 보짓물을 질질 바닥에 흘리기나 하고, 창피하지도 않아?"
네 발로 납죽 엎드려 계단을 오른다. 출렁출렁, 허벅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유방을 뒤에서 카메라가 잡는다.
"만약 계단 위에 누군가 있다면, 마리에를 보고 무슨 표정을 지을라나"
타카쿠라의 그런 말에도 전혀 속도를 늦추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아 하아",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만 점점 더 높아져 간다.
이런, 이런 짓을 하면서, 느끼고 있는 거야?
화면을 통해 보짓물이 흘러넘쳐 허벅지를 흠뻑 적시고 있는 광경이 비춰진다.
마리에... 정말로 느끼고 있어...
계단을 올라 잠시 앞으로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서,설마..."
자기도 모르게 타카시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어디론가 들어갔다.
남보다 배는 더 부끄럼을 많이 타는 마리에가, 저런...
"자, 이쪽으로 돌아"
뒤돌아 본 얼굴은 이미 욕정의 색깔로 완연히 물들어 있었다.
저런 바보같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팔을 뒤로 돌리고 꿇어앉은 마리에의 뒤로 소변기가 줄지어 있었다.
"주인님, 어서, 빨리, 사까시하게, 해 주세요"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혀를 낼름낼름거린다. 분기탱천한 자지를 단숨에 입 안에 머금더니 곧장 머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츄릅츄릅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뺨을 움츠리고 있는 입술 사이로 페니스가 살짝살짝 보인다. 격렬하게, 또 천천히, 리듬을 바꿔가며 계속해서 반복하는 스트로크를 카메라가 위쪽에서 잡는다. 때때로 남자의 반응을 살피듯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 보는 마리에의 시선과 화면을 통해 서로 마주친다. 마치, 자신이 지금 사까시 서비스를 받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 잡히고 만다.
"아음, 하으읍"
이번엔 자지를 토해내더니 혀로 낼름낼름 핥기 시작했다. 자지 줄기를 따라 올라가 귀두 아래 쪽을 집중적으로 자극하다 요도구를 혀로 후비고 다시 불알 쪽으로 내려간다. 조막만한 얼굴을 온통 침으로 더럽혀가며 열심히 핥고 또 핥는다. 츄릅츄릅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풀어내린 머리카락이 뺨에, 이마에, 달라 붙는다. 손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입으로만 정성스럽게 자지를 물고 빨고 핥고 있었다. 타카쿠라가 사정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몇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까 계속 해도 상관없다는, 그런 각오가 느껴질 정도로 격렬하게.
"좋아, 마리에, 그렇게 하는거야"
처음으로 대면한,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흐트러진, 음란한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마리에의 모습에, 타카시의 심장이 급히 뛰기 시작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언제부턴가 화면을 잡아먹을 듯이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싫어하는 마음하고는 정반대로, 몸은, 남자의 그 부분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슬슬 쌀 것 같애, 알았지?"
절대로 페니스에서 입을 떼어 놓는 법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남자의 손이 마리에의 뒷머리를 감싸쥐더니 스스로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싸는 거야?... 마리에의 입 안에?... 내가 좋아했던 여자한테?...
흥분으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싼다!"
그 말을 신호로, 마리에는 타카쿠라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페니스를 뿌리 끝까지 깊숙히 목구멍 안으로 받아 들였다. 쩝쩝 빨아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윽고 사정을 마친 자지가 입 밖으로 빠져 나왔다.
"보여줘 봐"
클로즈 업된 마리에의 입 안. 넘쳐 흐를 정도로 정액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좋아, 이제 먹어도 돼"
그제서야 신이 나 꿀꺽꿀꺽 입 안에 든 액체를 삼키는 마리에를 그저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다. 눈을 돌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하아아, 주인님... 마리에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주인님의 정액,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 화장실 바닥에 큰 절을 하고 엎드리는 마리에의 하얀 등을 카메라가 비췄다.
"겨우 바이브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지?"
"네"
벌떡 일어나 얼른 손을 뒤로 돌리는 마리에.
"넣어줬으면 좋겠지? 네 음란한 거기에다"
"네"
타카쿠라가 마리에의 몸을 줄로 묶기 시작했다. 유방을 위 아래로 감싸듯 겹겹이 두르고, 꽉 조인다. "아아앙". 여전히 바이브가 박혀있는 가랑이 사이를 줄로 조이는 순간, 조그만 환성이 터져 나왔다. 마리에는 눈을 꼭 감고 얌전히 타카쿠라의 구속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은, 나 이외의 남자하고 한 벌이니까, 각오해"
"네, 주인님. 마리에, 견뎌내겠습니다". 목소리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리에가 타카쿠라가 건내 준 옷을 줄로 꽁꽁 묶인 몸 위에 걸쳐 입었다. 땀으로 흠뻑 젖어 어수선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정돈한다. 역광을 받아 그림자가 진 얼굴이 여자의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리에, 설마"
순간 뭔가를 깨달은 타카시가 뒤에 서 있는 마리에를 돌아 보았다.
"그 남자한테, 안부 전해 줘"
비디오는 거기서 끝났다.
"설마, 그 옷"
잘못 봤을 리가 없다. 화면 안에서 마리에가 입던 그 옷, 바로 이 노란 색 원피스였다.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마리에와, 같다...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
"그래요, 타카시씨. 비디오, 오늘 아침에 찍었어요. 헤헤, 조금 전까지, 마리에, 이렇게 음란한 짓 하고 있었어. 타카시씨한테, 보여주려고..."
요염한 미소를 띄우고 천천히 마리에가 다가왔다.
제33화
요염한 미소를 띄우고 천천히 마리에가 다가왔다. 의자에 묶여있는 타카시 앞에 서서, 천천히 버튼을 풀어 내린다. 쇄골이, 어깨가, 새하얀 피부가 조금씩 드러나더니, 마침내 몸을 꽁꽁 묶고 있는 굵은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
말하고는 반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꺼풀도 닫아지지 않는다.
꿈이야, 이건 분명, 악몽일거야. 꿈이라면, 깨어나게 해줘... 제발...
마리에가 옷을 전부 벗었다. 원피스를 곱게 접어 탁자 위에 올려 놓는 꼼꼼한 모습은 여전히 옛날 마리에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마리에는 지금 온 몸으로 음미한 분위기를 가득 내뿜고 있었다. 화면 속의 그 마리에였다. 줄로 꽁꽁 묶인 음란한 마리에가 지금 바로 눈 앞에 서 있었다. 타카시의 무릎에 마리에의 무릎이 와 부딪혔다.
"타카시씨, 이게, 진짜 나. 마리에의 진짜 모습이야. 몰랐죠?"
위 아래로 꼭 조여진 유방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과시라도 하듯 가슴을 쭉 펴고 양팔을 뒷머리로 올려 깍지를 낀다.
"어때요? 마리에, 예뻐요? 이런 마리에라도, 예뻐요?"
몸을 요염하게 비틀며 자신의 육체를 과시한다.
"...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마리에의 몸만 쳐다보는 타카시.
"어때요, 타카시씨"
"아, 아아..."
그걸 대답으로 받아들인 듯, 마리에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무릎을 꿇고 타카시의 바지에 손을 뻗었다.
"아, 마리에..."
바지 위로 불룩 텐트를 치고 있는 타카시의 자지를 옷 위로 쓰다듬는다.
"기뻐요. 타카시씨, 벌써 이렇게 됐네. 음란한 짓 하는 마리에 보면서, 흥분했군요. 기뻐요. 자, 이제 편하게 해 줄께요"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트렁크스를 아래로 젖힌다.
"굉~장해요, 이렇게나"
첨단으로부터 투명한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는 자지가 용수철처럼 밖으로 툭 튀어 나왔다.
"커~다래요"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단숨에 목구멍 깊숙히 삼켜 버린다.
"으읏, 으으으. 자,잠깐, 아, 잠깐만"
겨우 그걸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괘아아요, 가마 이써바요. 아~안뜩, 기분조케, 해주께요"
입에 문 채로,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 보며 말한다. 혀로 귀두 아래 부분을 집중적으로 핥으면서, 머리를 상하로 움직여 입술로 자지 전체를 빨아 올린다. 왼손으로는 남자의 시각적인 즐거움을 방해하지 않게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오른손으로 불알을 가볍게 주물러 준다. 침이 실처럼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리...에... 아, 아, 아, 안 된다구, 마리에, 더는, 윽"
스스로 한심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가 높게 떨려 나오고 만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쾌락. 정수리까지 관통하는 자극에 온몸이 저려온다.
"츄웁, 쮸우웁"
한층 더 강하게 빨아 올렸다.
"앗, 앗, 앗, 마리에, 마리에~~~"
철저히 교육받은 페라 테크닉을 종횡무진 구사하는 마리에의 서비스에,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해 있던 타카시는 채 몇 분도 버티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깊이 목구멍 속에 밀어 넣어 자극을 얻으려는 본능으로 엉덩이를 들썩이며 순식간에 폭발하고 만다.
"하아아..."
앞머리가 타카시의 하복부를 간지럽혔다. 마리에는 입 안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뜨거운 정액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목구멍 뒤로 넘겼다.
"후아아"
여전히 손으로 자지를 움켜쥐고 천천히 입술을 떼는 마리에. 그 사랑스러운 입술 가장자리로 정액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가득 쌓여 있었네, 하도 양이 많아서, 하마트면 흘릴 뻔 했어요. 엄~청, 찐득하네요. 이제 좀 편해졌나 모르겠네요"
해방감과 쾌감, 그리고 패배감을 동시에 느끼며, 타카시는 천정을 멍하니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그의 가슴에 마리에가 머리를 살포시 기대더니 양팔을 등 뒤로 둘러 꼭 껴안아 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타카시씨, 타카시씨..."
조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카시씨..."
가슴 속으로 파고들며 마리에가 부르고 있었다.
"...마리에"
"사토시씨. 딱 하나만, 부탁이 더 있는데, 들어 줄래요?"
이번엔, 대체, 뭐를. 이 이상, 더 뭘.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마리에. 이 이상, 나한테, 뭘 더 하려고. 대체 뭘 더.
"부탁이라니, 뭔데. 이제, 그만하자..."
"마리에를, 안아줘요. 제발, 부탁할께요, 마리에를, 안아줬으면 해요"
그 녀석이 시키는 대로, 꼭둑각시처럼 행동하는 마리에를. 나보고, 그렇게까지 굴욕적인 짓을. 좋아했던 여자가 몸도 마음도 전부 다 유린당한 다음에, 그 여자를 이제 와서, 안으라고?
"그것도, 그 녀석이 시킨거야? 명령받은 거야?"
무슨 말을 해야 되는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오는 대로 쏘아붙이고 만다.
"아냐 아냐, 그게 아니에요. 마리에가, 타카시씨한테 안기고 싶어서, 그래요..."
올려다 보는 마리에의 얼굴은 울고 있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 그 그리운, 순진한 눈에서 눈물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런, 이런 마리에, 싫겠죠? 이렇게, 더럽혀진 마리에 같은 건... 타카시씨, 싫은거죠?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 용서 같은 거, 구할 자격도 없겠죠. 이런, 잔인한 짓, 해 놓구선"
애타게 매달리는 것처럼,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넘쳤다.
"부탁이에요, 정말, 이렇게 빌께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타카시씨, 안아 줘요. 마리에를, 안아 줘요, 그리고, 그리고, 마리에를, 좋아했었다고, 말해 줘요. 제발, 듣고 싶어요. 타카시씨, 마리에, 마리에, 타카시씨, 좋아했어, 정말 좋아했어요. 말도 안 되는 부탁인 거,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마리에, 이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제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안기고 싶어요. 타카시씨를, 앞으로, 도쿄에 가서도, 누구하고 함께 하든, 절대... 잊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까... 안아 줘요..."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알았어"
"정말...요?"
오늘로, 마지막인가.
소꿉친구라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라고 결심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아마 내일부터는,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마리에는 타카시에게 아는 척도 안 할 것이다. 그저 단순한 타인이 된다. 이제서야 깨달았다. 초등학교 시절, 개한테 쫒기던 마리에를 구했던 일, 어머님께 부탁받아 중학생이었던 마리에를 도쿄에 있는 극장에 데리고 갔던 일, 가정교사를 하면서 고교생 마리에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내일이 되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모든 것이 추억으로 사라진다.
조금만 빨리 고백했더라면...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첫사랑과 이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안기고 싶어하는 마리에. 그 아픔을, 이렇게 마지막에 와서야 받아 줄 수 있다니...
"그래, 안아줄께. 마리에를, 안을께"
"타카시씨, 고마와요, 기뻐요, 타카시씨..."
눈물을 훔치며 수갑을 푼다.
"부끄러워요..."
침대에 걸터앉은 타카시로부터 등을 돌리고 새빨개진 얼굴로 부끄러워하면서 몸에 묶인 줄을 풀고, 바이브를 보지에서 천천히 뽑아내 바닥에 내려 놓는다. 그리고는 뒤로 돌자마자 타카시의 입술에 달라붙었다. 격렬하게 혀를 뒤엉켰다. 마리에의 몸을 타카시의 손이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 마리에도 타카시의 얼굴을, 팔을, 가슴을, 등을, 다리를, 심지어 발가락까지 입술과 혀로 정성스럽게 애무했다.
"타카시씨, 정말로 좋아했어요"
시트에 퍼진 긴 흑발을 쓰다듬으면서, "나도, 마리에 정말 좋아했어", 타카시도 대답했다.
"아아아아"
천천히 자지를 집어넣는다.
"기뻐요"
마리에의 뺨이 또다시 눈물로 젖는다.
"아앙, 아앙, 아아아, 아아앙, 하앙, 아아아, 타카...시...씨, 아아앙"
격렬하게 쑤셔박는다. 마리에는 양팔로 그의 등을 꼭 껴안고 그 거친 몸짓을 고스란히 받아 들였다. 수도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살을 섞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서로 확인하는 애틋했던 섹스가 그렇게 끝났다.
타카시를 배웅하고, 한동안 멍하니 그가 떠난 현관 철문을 바라보던 마리에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부엌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휴대폰 신호음이 갔다.
"여보세요, 마리에입니다. 네, 끝났어요. 네, 명령하신대로, 네.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지금 곧, 네, 출발하겠습니다"
제34화
마리에네 2DK짜리 집하고 비슷할 정도로 넓은 타카쿠라의 방, 쿠션을 품에 안고 자리에 앉는다. 침대에 앉아 내려다보는 타카쿠라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래? 기운이 없어 보이네"
푹 숙인 채로,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다. 아직도, 온몸에 타카시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타카신가 뭔가 하는 남자한테, 그 첫사랑 남자에게 안기고, 아직도 뭔가 아쉬운 게 남은거야?"
다시 고개를 가로 젓는다.
타카시씨하고는, 이제, 끝났어요.
"저기..."
"뭔데?"
나는, 료지씨를 선택했다. 스스로, 결정했다. 이제 더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마리에의 이기적인 부탁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옆으로 길게 째진 그의 눈을 바로 응시하고 말했다.
"료지씨, 마리에는 료지씨가, 좋습니다. 료지씨가, 제 전부입니다"
분명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손에 들고 있던 봉투에서 비디오 테잎을 꺼냈다. 학교에서 료지가 가했던 능욕장면을 담은 비디오가 아니라, 타카시와의 섹스를 찍은 테잎이였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타카시씨하고...". 그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몰카를 찍어 오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마리에는 물론,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아마, 제대로 찍혔을 거에요"
타카쿠라에게 건낸다.
"아, 그거, 마리에가 가져"
"네?..."
받은 테이프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고, 마리에의 손을 잡아 침대 옆으로 잡아 끌어 앉혔다.
"마리에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모습 같은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하긴, 찍어오라고 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쓴웃음을 짓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몸을 기댄다.
그랬구나, 료지씨는 자기가 그런 명령을 내리면 내가 그만 둘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내가 거부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런데도 마리에를...
새삼, 타카쿠라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만의 서툰 배려심을 확인한 것 같은 기분.
"료지씨, 좋아"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는 그의 손길이 너무 기분 좋다.
"하지만, 마리에"
"네"
"나, 아직 화 안 풀렸어"
"네?"
"너가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 안기고 싶다고 한 거"
"죄,죄송합니다"
확 자빠트려 양손을 위로, 침대에 꽉 누른다.
"그 남자하고 나하고, 어느 쪽이 더 좋았어?"
"료지씨요"
"마리에는 누구 꺼지?"
"료지씨요"
"증명할 수 있어?"
"네, 넷"
"내가 말하는 건, 뭐든지 들을 수 있어?"
"네, 뭐든지"
"따를 수 있어?"
"료지씨가 말하는 거라면, 마리에, 뭐든지 다 따르겠습니다"
손을 뗀다.
"목걸이 해. 지하실로 갈거야"
그 방의 기괴한 풍경도 이제 완전히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식으로 알몸이 되어 묶여 있어도, 이제는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천정의 도르레와 연결된 줄로 양 손목이 묶여 있었지만, 평소와는 달리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는 높이로 조정되어 있었다. 이 방에서 벌써 수 십번도 넘게 타카쿠라와 섹스를 나누었다. 몇 번은 자기가 먼저 스스로 요구한 적도 있었다.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잠깐 그러고 있어"라는 말을 남기고 지하실을 나선 타카쿠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식으로...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금부터 자신에게 가해질 음란한 행위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몸이 쿡쿡 쑤셔 온다. 보지가 벌써부터 흥건하게 젖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 기다렸지"
"아, 료지씨"
두근두근, 기대감에 휩싸인다.
"자, 들어와"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어?"
생각지도 못했던 타카쿠라의 말에 음욕의 불길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만다.
"이 방에 오는 것도, 벌써 반 년 만이네"
미키는 아니었다. 180센티가 넘는 타카쿠라와 딱 어울리는 키의 늘씬한 여성이 타카쿠라 뒤에 서 있었다.
"싫어, 누구, 누구에요?"
마리에의 말을 들은 채도 않고, 두 사람이 지하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수치심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줄에 묶인 몸을 옆으로 비틀어 애써 다리를 꼬아 보지털을 가려본다.
"흐~음, 이 아이구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롱 헤어. 핀 힐에 무릎 길이 감색 타이트 스커트, 물색 스트라이프 셔츠 차림. 휘황찬란한 액세사리에 진한 메이크업. 성숙한 성인 여성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오고 있었다. 푹 숙이고 있던 마리에의 얼굴을 스윽 들어 올린다.
"어머, 무지 귀엽게 생긴 아이네. 료지, 이런 앨 대체 어디서 찾아낸거야?"
"반 친구"
타카쿠라도 태연스레 대답했다.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겠지만. 어때? 자기, 우리 사무소에 나와보지 않을래?"
천정에 매달린 마리에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몸매를 평가라도 하는 것 처럼 샅샅히 훑어 본다.
"어떤 여자일까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다 보고. 남편한테 거짓말까지 하고 달려온 보람이 있네요"
"신랑하고는, 여전한가?"
"네, 일중독이죠 뭐. 내일부터 또 어딘가 해외로 출장 간다던데. 근데 자기, 지금, 몇 살이야?"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애. 료지 말고, 그것도 같은 동성에게 전라를 노출하고 있는 마리에. 아랫 입술을 꼭 깨물고 간신히 부끄러움을 참아내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자기, 몇 살? 안 들려?"
"료지씨, 이 사람..."
조그맣게, 묻는다.
"아, 에리카라고 해. 도쿄에서 모델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지. 마리에는 빠른 생일이니까, 아직 열 일곱이야"
"어째서, 그런 사람이..."
싫어. 료지씨 말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부끄러운 모습, 보이고.
"마리에한테 벌을 주려고"
"뭐야, 그런 것 때문에 날 호출한거야? 나, 무지 바쁜 사람이거든?"
"어이, 에리카"
갑자기 타카쿠라의 목소리가 차가와졌다. 평소의 새디스트로 돌아와 있었다.
"이 년이, 내 노예 주제에,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게 된 거지?"
"앗..."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에리카라는 여성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셨다. 조금 전까지 자신감이 넘치던 태도가 일순간에 표변, 벌벌 떨며 얼른 타카쿠라의 발밑에 무릎을 꿇는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눈매가 욕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리에가 늘 그러듯, 재깍 팔을 등 뒤로 돌린다.
"알겠지? 이런 관계야"
"그래요. 자기보다 먼저, 내가 이 방에서, 료지, 아니 주인님께 봉사하고 있었어"
그런... 어째서, 료지씨, 그런 사람을...
나도, 버려지는 거야? 순간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마리에의 마음이 단단히 조여온다.
"미안해요, 료지씨. 이제, 다시는, 이기적인 부탁 안 할께요. 그러니까, 료지씨, 제발, 마리에를, 버리지 마세요. 뭐든지 시키는대로 다 할테니까. 이 사람보다, 뭐든, 얼마든지, 마리에를 괴롭혀도 좋으니까, 뭐든지 다 할테니까, 그니까"
묶여있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당장이라도, 타카쿠라에게 매달려 빌고 싶었다.
"안심해, 버리기는 누가 버린다고 그래. 단지, 오늘 벌 주는 걸 에리카한테 대신 시킬려고 하는 거야. 알았어? 마리에"
그 말을 신호로, 에리카가 천천히 마리에의 피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자기, 내 맘에 쏙 들어. 잔뜩, 괴롭혀 줄께"
유두를 입에 문다.
"아, 아, 아앙"
온몸에 전기가 흘렀다.
"마리에가 느끼는 모습, 느긋하게 구경해 볼까"
타카쿠라가 소파에 몸을 묻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앙, 하아아앙, 몰라, 그런, 그런거, 아앙, 싫어, 아앙, 아앙, 그만, 아앙"
침대 위에 새하얀 나신 두 개가 요염하게 뒤엉켜 있었다. 마리에의 보지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에리카의 손이 위로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는 유방을 살짝살짝 더듬는다. 닿을락 말락 미묘한 터치로 정점에 솟아있는 유두를 자극하는가 싶더니 다시 유방을 감싸 쥔다.
"아아아아, 그런 거, 싫어, 그만, 하앙, 하앙, 아, 아, 아, 아아앙, 몰라"
흠뻑 젖은 보지를 혀로 유린해온다. 타카쿠라하고는 전혀 다른, 부드러우면서도 세심한 자극을 계속해서 전해준다. 가장 예민한 마리에의 약점, 클리토리스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어 천천히 성감을 높여가는 애무였다.
왜, 어째서, 료지씨 이외의, 그것도, 여자한테, 어째서, 이렇게 느끼는 거야.
반년에 가까운 타카쿠라의 집요한 개발로 인해 탐욕스러워진 몸은, 민감해진 만큼, 그 이상의 열락을 바라게 되었다. 에리카의 집요한 애무가 조금씩 마리에의 이성을 마비시켜 간다.
"싫다느니 좋다느니 하면서도, 벌써, 이렇게 돼버린거야?"
시트까지 흥건하게 적신 보지물을 손에 묻혀 유방에 바른다.
"마리에쨩이라고 했지? 나도 해줄래? 그럼, 가게 해줄께"
에리카가 몸을 뒤집었다. 69자세였다.
"그럼, 해줘"
마리에가 머뭇머뭇 혀를 내밀었다. 눈앞에 놓인 보지를 입술로 살짝 빨아본다.
더이상은 안돼, 안돼, 가고 싶어, 더, 좀 더, 하고 싶어.
"아아아, 그렇지, 그거야"
에리카가 마리에의 클리토리스를 덮고 있던 껍질을 벗기더니 혀로 할짝 핥는다.
"몰라, 아앙, 거기, 거기, 좋아요, 몰라, 안돼, 너무 느껴버려"
두 여자의 날카로운 교성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마리에의 허벅지를 살살 간지럽히는 에리카의 머리카락 조차도 또 하나의 자극. 마리에가 자기도 모르게 에리카의 유방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리카도 흠뻑 젖은 마리에의 보지 속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아아아아아, 하아아아아아, 그런거어어, 하아앙, 몰라, 안돼, 괴,굉장해, 아앙"
손가락이 조금씩 안으로 파고 들어 올 때마다, 새로운 쾌감의 물결을 일으킨다. 마리에의 몸이 격렬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몰라, 이런 거 처음...이야. 몰라, 뭐야, 이거, 아아, 아, 나 망가져버릴 거 같애.
찔컥찔컥하는 물소리가 지하실을 울린다. 쾌감의 소용돌이에 그대로 휩쓸려가 버린다.
"아, 아, 아, 아, 하아, 아, 아"
환성조차도 제대로 터트릴 수가 없었다. 미지의 세계로 자꾸자꾸 끌려 올라간다.
"가, 가버려, 아, 아아... 하으윽, 가, 아,안돼"
페니스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온몸으로 쾌감이 느껴진다.
"아흐윽, 간다"
채 10분이나 지났을까. 마리에는 눈 앞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머, 벌써 가버린거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후후"
에리카가 고개를 들어 입술 주위에 묻은 보지물과 침을 혀로 낼름 핥아먹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마리에를 다시 덮쳤다.
"하읍, 아,안돼, 잠깐, 그만, 아, 아아아아아아"
계속해서 몸을 경련하며, 끝없는 절정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 한다. 그렇게 몇 시간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끝없이 밀려드는 쾌락에 빠져 몸부림쳐야만 했다.
"그럼 안녕, 마리에쨩. 정말 즐거웠어요. 도쿄에 올라오면, 꼭 우리 사무소에 놀러 와요. 자기라면 패션잡지 모델 아르바이트 같은 거, 언제든지 환영이니까.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녀의 인사말을 멍하니 들었다.
제35화
3학기가 시작되고, 교실은 또 마리에 이야기로 화제만발이었다. 개학식이 끝난 교실 안. 대입 시험을 앞두고 참고서에 파묻혀 있는 아이도 몇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복도 쪽 맨 앞자리에 앉은 마리에를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미소녀"의 등장으로 도저히 공부같은 걸 할 형편이 아니었다.
"야, 봤어?"
"봤어 봤어, 이치카와 맞지? 죽인다---, 정말 깜짝 놀랐어"
자신이 화제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이번엔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근소근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제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 추천 입학 원서를 제출하고 이미 사실상 진로를 마무리지은 마리에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문고판 소설을 읽고 있었다. 물론 더이상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다. 머리도 더이상 묶고 있지 않았고.
"이치카와가, 저렇게 예뻤었나?"
"안경 벗었다고, 저렇게 예뻐지다니. 그런 만화같은 일이, 정말로 일어나는구나"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왼손으로 살며시 쓸어 넘긴다. 그런 조그만 행동 하나하나에도, 여성적인 매력이 넘쳐 흐른다. 남학생들의 시선이 마리에에게 박혀 떠나질 못 한다. 온몸으로 여자의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나 말야, 졸업하기 전에 이치카와한테 고백해 볼까. 전부터 꽤, 관심있었는데"
"바---보. 이치카와는 타카쿠라하고 사귀잖아, 임마"
"하긴, 타카쿠라, 졸라 멋진 녀석이긴 하지"
어느새 화제가 여느때처럼 개학식 날 학교를 빠진 "그이"에게로 옮겨간다.
"애초에, 어째서 저런 평범한 여자애하고 사귀나 의아했었는데, 이치카와가 사실은 저렇게 예쁜 애라는 걸,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거야, 분명"
"그러게, 역시, 난 놈이라니까"
"그래도 말야, 좀 열 받는걸. 그림 그리는 재능에, 공부도 잘 하고, 타카쿠라, 그 녀석 도쿄에 있는 미대 간다며?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하고, 반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던 여자애를 꼬셔서 저렇게 퀸카로 만들어 사귀고"
"그래, 그 녀석이 이치카와를 저렇게 바꿨을 거야"
"결국, 우리같은 놈들은 여자 보는 눈이 없다는 거지, 뭐"
남학생 한 명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저기저기, 마리에" 멀리서 모여 있던 여자애 그룹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건 것을 계기로, 호기심 가득한 여자애들 무리가 우르르 마리에의 책상을 둘러 쌌다.
"왜, 요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컨택트 렌즈 한거야?"
"응. 그이가, 료지씨가 이쪽을 더 좋아해서. 그래서, 머리 묶는 것도 관뒀어"
"그랬구나, 어쩐지, 엄청 변했어, 몰라볼 정도로"
"그런...가?"
지금까지하고는 완전히 다른,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마치 다른 사람인 듯.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술엔 연한 핑크색 루즈를 바르고 있었다.
"변해도 어쩜 이렇게 변하니. 왠지 무지 귀여워졌지 뭐야. 깜짝 놀랐어"
"고마워"
"혹시 화장같은 것도 하니?"
"응. 나, 전에는 그런 거 할 줄 몰랐는데, 그이네 집에서 모델 메이크업 해주는 분을 소개받아서, 이런저런 여러가질 배웠어. 료지씨가 기뻐해줬으면 해서"
차분하게 정돈된 눈썹, 자연스러운 내츄럴 메이크업, 핑크색 루즈, 조막만한 얼굴에 동그랗고 귀여운 눈, 탐스러운 입술, 투명한 흰 피부, 숨겨져 있던 매력이 만개해 있었다. 물론 메이크업만으로 마리에가 이렇게까지 바뀐 건 아니었지만.
"와---, 좋겠다. 프로가 가르쳐 준 거야? 있잖아 마리에, 나도 좀 가르쳐주라"
"응, 좋아. 그럼 이번에 도쿄에 올라 갈 때, 요코도 같이 그 분 만날래? 료지씨한테 부탁해 둘께"
앞머리가 살짝 흔들린다.
"고마워---, 앗싸"
"와, 부럽다"
시끌시끌 떠드는 소리.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웃음소리. 주위를 둘러싼 여자애들 중심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 받고 있는 마리에를, 미키가 저 멀리서 차갑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마리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2월.
수험 시즌도 이제 피크를 맞이해 자유 출석이 된 3학년 교실 복도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방과후엔 더더욱 그렇고. 평일이 마치 휴일 같았다. 이미 도쿄의 대학에 진학이 결정된 마리에가 이젠 어깨 아래까지 자란 흑발을 찰랑이며 걷고 있었다.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 오랜만에, 좋아하는 독서 시간이 잔뜩 생겨 신이 났는지 가슴 한가득 책을 안고 있었다. "요새, 그 방에 마리에하고 가 본지 오래됐네". 황혼녘. 이제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가 되어버린 미술 준비실, 사랑하는 그이가 기다리는 그 장소로 향한다.
료지씨, 오늘도 집에 갈 때, 손 꼭 잡아줄라나.
학교에 나온 날은, 언제나 손을 꼭 잡은 채로 교문을 나선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고교생활을 진짜 연인사이로 보내는 두 사람. 둘 다 진로 걱정도 없고, 거의 매일같이 타카쿠라네 집에서 살을 섞고 있었다. 밧줄이나 바이브를 사용하는 고문 자체는 지금도 똑같이 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런 것도 기쁘게 받아 들이는 마리에. 능욕이 끝난 후에는 늘, 타카쿠라가 다정하게 껴안아 주었다. 침대 안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꼭 끌어안은 채로, 앞으로 있을 도쿄에서의 생활, 그림 그리는 일, 대학에서 할 공부, 책, 그 밖에 여러 다양한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리에에게 있어서 인생 처음으로 느끼는 행복으로 충만한 시간, 그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좀 늦었네. 화 났을라나.
계단을 한꺼번에 두 개씩 뛰어 오른다. 스커트 뒤를 손으로 누르고.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달려 올라간다.
"왜...그러는건데?"
미술 준비실 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멈칫했다.
"료지는..."
살짝 열린 문 틈새로 안을 들여다 본다. 여느 때처럼 창가에 기대어 서 있는 타카쿠라와 그 앞에 서 있는 금발 여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미키씨...? 무슨 일이지...?
이야기 소리가 중간중간 끊겨 들려온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이제... 알았어"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가녀리게 떨리는 미키의 목소리.
"...언제부터 눈치챈거야?..."
"응? 대답해줘"
"료지...를..."
"쭉..."
"...누구보다도..."
"이치카와... 그 애하고..."
어? 내 얘길 하고 있는거야?...
"절대로..."
도무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타카쿠라는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10분도 넘게 미키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연다.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분명히, 뭔가 거절하는 듯한 말.
"...용서 못해"
그렇게 내뱉고 휙 돌아서는 미키.
어머, 어쩌지?
몸을 숨길 새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고 나오는 미키와 딱 맞닥트려 버린다.
"아, 저기, 미키씨,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순간, 당황하는 표정을 짓던 미키가 곧바로 험악한 얼굴로 돌아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마리에를 노려보고는 옆을 지나쳐 갔다.
"저기, 료지씨, 무슨 일이에요?"
"신경쓸 거 없어. 예전부터, 미키하곤 가끔씩 이래"
곤란해하는 마리에를 보고 조금전까지하곤 전혀 다른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상냥하게, 여느때처럼, 마리에의 조그만 몸을 양팔로 꼭 껴안아 준다.
"료지씨, 아파요..."
료지의 몸으로부터 전해지는 따스함에 녹아들어간다. 미키하고 방금 있었던 일은, 아마 사소한 다툼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발장 앞에 선 미키가 휴대폰 단축번호를 누른다.
"아, 여보세요, 고토예요. 사토루 아저씨, 계시나요? 누구? 아, 캡틴이구나. 그럼, 좀 전해줘. 선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언제나처럼, 실컷 데리고 놀 수 있는 계집이야. 당연하지. 꼭 전해줘. 아, 그래. 내가 다시 전화할께. 암튼 부탁해, 너도 즐길 수 있을테니까, 알았지?"
-----------------------------------------------------
쯧쯧... 류지군(후속작인 "오니츠바키"캐릭터), 봤나? 모름지기 주인님이라고 불리우려면 이 정도 쯤은 듬직하게 표용력을 보여줬어야지. 그래도 옛 남자하고 무려 소꿉친구 시절부터 쌓아온 정이 얼만데, 여자가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여유를 줬어야지, 밑도 끝도 없이 찌질하게 몰아붙여대면 어떡하나. 그럴거면 아예 처음 계획대로 쿨하게 그저 장난감으로만 대하다 버리던가. 정말로 좋아했다면 노선을 확실히 해야했다구. 하긴, 자네가 료지님 수준에는 한참 모자란 덕분에 아마노는 불쌍한 타카시 짝이 안 나게 되긴 했지만.
그나저나 현실세계로 비유하자면 김태희급의 여신인 미키양은 전작에서고 후속작에서고 세컨드 처지를 벗어나질 못 하는구만요. 소꿉친구 료지는 어디서 굴러먹다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허접한 꼬맹이 뇬이 냅다 채가고, 10여년 뒤에 만난 스펙 쩌는 공돌이 킹카(?)는 5년씩이나 실컷 몸과 마음을 바쳐 공을 들여놨더니만, 심지어 자신의 연예계 커리어까지 송두리채 걸고 빼도 박도 못하게 스캔들까지 내놨는데 바로 그날, 딴넘하고 붙어먹느라 배신까지 하고 떠났던 옛 애인뇬이 돌아와 냅다 인터셉트... 흐흑, 지못미 미키상...
추천100 비추천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