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椿 오니츠바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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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인연
디스플레이를 가득 메운 단백질 입체구조가 뿌옇게 보인다. 사츠키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쉰다. 창밖에는 투명한 겨울 하늘이 눈부시리만큼 푸르고, 항적운(*주, 飛行機雲- 비행운, 항적운. 차고 습한 대기 속을 나는 비행기의 자취를 따라 생기는 구름)이 한 줄기 길게 뻗어있었다.
"선생님, 여기 구조말인데요, 어떻습니까? 제대로 나온 건가요?"
"으음... 어쩐지 분자 결합이 부자연스러운데"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더니 마우스를 움직여 화상을 회전시키고 있던 아마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보기만 하고도 아는거에요?"
"감이야, 감. 설명하긴 힘들지만, 중요한 역할을 할 것같은 단백질의 경우엔, 이런식으로... 한눈에 알 수가 있지"
"우와... 역시 굉장하네요"
"내일이라도 괜찮으니까, 일단 한번 스크리닝(*주, スクリーニング, 선별 검사)해두는게 좋겠어"
"네. 알겠습니다"
디스플레이로 다시 시선을 돌린 사츠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보인다. 유전자 기능 설계학 연구실소속의 석사과정 2년차. 연구자세는 항상 냉정을 유지하고 물론 성적도 우수. 지금은 마리에의 사실상 비서역할까지 솜씨좋게 수행해내고 있었다.
"맞다. 그 실험말이야, 출장중에 결과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상 위에 데이터별로 정리해서 놓아두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사츠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아마노선생님, 차 가져왔습니다". 염기배열과 수치가 빽빽히 적힌 두꺼운 자료를 대강 훑어보고 있던 아마노의 책상 위에 막 우려낸 호우지 차(*주, ほうじ茶, 딱딱한 찻잎을 센 불에 쬐어 말린 것을 우려낸 엽차)를 올려놓았다. 그런 세심한 배려에도 실수가 없고, 이미 아마노에게도 빠트릴 수 없는 스탭중 한 명이었다.
"고마워. 사츠키, 냉장고 위에 카마모찌(*주, 鎌餅, 길쭉한 모양의 교토특산물 화과자)있는데 먹을래?"
"헤헤... 실은 살짝 기대하고 있었어요"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변함없이 쇼트컷. 하지만 조금은 어른스러워진 표정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아마노의 교토 출장 선물을 먹으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연구실에 초겨울의 온화한 햇빛이 낮게 비춰들어오고 있었다.
"아, 맞다! 아까 타카쿠라 교수님한테서 연락왔었는데"
"에에!? 또 교수회의 대리출석!? ...정말이지 좀 봐주셨음 좋겠는데. 머리 굳은 노인네들 사이에 끼어서 아주 죽을 맛이라구. 늘상 탁상공론뿐이야. 귀찮은 일은 모조리 나한테만 떠넘긴다니까, 그 사람은"
"조교수 된지도 2년째잖아요. 이제 슬슬 학내 업무에도 익숙해지셔야죠. 게다가 타카쿠라 교수님, 요즘 엄청나게 바쁘세요. 내가 관리하고 있는 교수님 스케쥴 한번 보실래요? 정말이지 용케 쓰러지지도 않고 그렇게 잘 버티시는거, 감탄할 지경이라구요. 아마노 선생님도 자기 연구만 신경쓰지 말고 조금쯤은 본받으세요. 책임이 많은 자리에 계시잖아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자료실에서 가져온 자료는 제대로 반납하세요. 자리 비우실 땐 휴대폰 꼭 챙기시구요. 같은 말을 몇번씩 반복하게 하지 말아 주실래요? 학회나 출장처에서는 그렇게나 빠릿빠릿하시면서, 왜 학내에선 이렇게 티미해지시는 거냐구요..."
학계에서 거듭 주목을 받아, 마리에의 기록마저 경신하고 아마노는 25세라는 나이로 T공대 사상 최연소로 조교수에 취임했다. 자신에게 놓여진 입장에는 여전히 익숙치 못했지만, 사츠키의 잔소리에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아마노는 쓴웃음을 지으며, "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사츠키한테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지. 그래서 교수회의는 언제야?"라고 물어보면서 수첩을 뒤져 스케쥴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런 전화가 아니었습니다만"
"어? 다른 일이었어?"
"교수회의가 아니고 신문사 취재, 귀찮으니까 대신 인터뷰해줘, 라고 연락받았어요"
"...사츠키, 어느 쪽이든 귀찮은 건 마찬가지라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아마노에게 "선생님, 그렇게 사츠키라고 이름만 부르는 것도 그만하세요. 정말이지 몇번을 말해야 고치실거에요?"라고 핀잔한다. 연구실 한쪽 구석에서 리포트용의 참고자료를 찾고 있던 학부 여학생들이 두 명의 대화를 듣고 킥킥거렸다.
"아마노 선생님~! 여기 논문집 2권 빌려갈께요~"
"아아, 반납은 리포트 제출시에 같이 해도 되요. ...그런데, 사츠.. 아니, 카와카미군, 그 취재라는 것은 언제?"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거 같은데요"
"에엣? 지금?"
"그래요. 그건 그렇고, 그보다, 선생님... 오늘 발매된 주간지 기사말인데요"
"아아, 그거. 그 얘긴 정말이지.. 아침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이야기를 잠시 멈추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솔직히, 나부터도 지하철 광고 보고 깜짝 놀랐어"
후루룩, 호우지 차를 홀짝인다.
지하철 광고의 표제는 "여배우 고토 미키, 갑작스런 휴식선언은 은퇴-결혼의 포석! 상대는 젊은 대학 조교수"라고 커다란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혼잣말처럼 "갑작스러운데다가, 당했다고나 할까, 속았다고나 할까"라고 하는 아마노의 말에, "속았다구요!?"라고 사츠키가 되묻는다. 곧바로 아마노가 "아냐, 아무것도 아냐"라며 말을 끊는다. 평소와 같은 옥신각신하는 대화. "어쨌든, ...정말로, 미키씨와 결혼하실 생각이에요?". 사츠키가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사츠키의 시선을 피하듯 아마노는 일부러 창 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어쩔거지?"
"에?"
사츠키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만약 정말로... 선생님이 그렇게 결정하신 거라면... 그건 그렇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어조는 "어쩔 수 없다고는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아"라고 하고있었다.
"제가, 뭐라고 얘기할 입장은 아니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아마노 선생님, 쭉... 계속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고개를 떨어트리고 더듬더듬 말을 잇는 사츠키를 아마노가 부드러운 눈길로 다정하게 바라봤다.
"기다린다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사츠키, 오늘, 예의 그 연하의 약혼자하고 식장 예비조사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괜찮아요. 내가 갈때까지 그 사람, 분명 몇 시간이라도 기다려 줄테니까"
"또 그런식으로 괴롭힌다. 빨리 가 봐"
질린듯이 고개를 내젓는 아마노. 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실례합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렸다.
"도착한 거 같네요. 저, 차 내올께요"
사츠키는 아마노의 시선을 피하며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제부입니까!?"
막 교환한 명함을 쳐다보고 아마노가 진기한 직함에 놀랐는지 큰 소리로 물었다.
"드문가봐요?"
"그쪽 회사의 과학부나 의료정보부 쪽하고는 종종 학회같은데서 만납니다만, 국제부는 처음입니다"
"저희 회사 사람들이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타카쿠라 선생님과 아마노 선생님의 연구는 해외 쪽에서 보다 높게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국제부가 취재해도 별로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까. 아, 타카쿠라 교수님께서 급한 용무로 응대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을 주고 받으면서 응접실 소파에 앉은 기자는, 대학졸업 후 2년간 미국에 유학을 떠났다가 입사 후 바로 워싱턴 지국에 배속되어 특파원 생활을 거친 뒤 최근에야 간신히 도쿄 본사로 돌아왔다고 자기 소개를 했다.
"워싱턴!? 국제정치의 중추 아닙니까? 대단하네요. 그럼 미국 대통령과 인터뷰같은 것도?"
"말도 안돼요. 미국의 기자클럽은 일본 이상으로 폐쇄적이라 그런 건 꿈도 못 꿔요. 일본의 미디어는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회견은 별실의 모니터로 보고, 끝나고 30분 정도 있으면 전문 릴리스가 나오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곤 매일같이 그걸 번역하는 것 뿐이에요. 취재라곤 하지만 나온 글만 읽는 게 전부여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금새 질려버렸어요"
그렇게 무탈한 잡담을 나누며 기자가 IC레코더나 노트, 카메라를 꺼냈다.
"차 드세요"
"카와카미군, 고마워"
"아, 이렇게까지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그럼 선생님,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사츠키를 내보내고 아마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해드리면 될까요?"
펜을 손에 쥐고 인터뷰 준비를 끝마친 기자가 아마노의 최신 논문 타이틀을 선뜻 언급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좀 난해하달지, 아니, 알기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랄까요". 우물거리는 아마노에게,"일단 이야기를 시작해 주시겠어요?"라고 재촉했다. 가끔씩 전문용어를 확인하면서도 기본적인 상식선에서 되묻거나 특정 부분은 꼼꼼히 체크하는 등, 제법 논문 내용을 미리 숙지해 왔는지 이쪽 일을 잘 이해하고 던지는 질문 뿐이었다. 30분 정도의 인터뷰로 연구 성과의 대략적인 개요는 설명이 끝났다.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하셨네요"
"선생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까 이쪽도 열심히 공부해 온 보람이 있네요. 자세한 부분은 이쪽의 선배로부터 단단히 지도 받았습니다"
그렇게는 말하지만 벼락치기 정도로 이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레벨의 연구가 아니었다.
"선생님 얼굴 사진, 찍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세요. 그렇다곤 하지만 사진은 영 낯설어서 어떤 표정을 해야 되는건지"
"그냥 그대로도 좋아요"
등을 꼿꼿이 세우고 D70(*주, 니콘제 DSLR, 이 소설이 씌여진 당시 막 출시되었던 니콘 DSLR 최초의 보급형 기종)를 들어 매뉴얼포커스로 맞추면서 "그건 그렇고요"라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늘 아침 발매된 주간지 기사에 대해서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그것도 취재중입니까?"
플래쉬가 터진다.
"취재 반, 개인적인 흥미 반이랄까요"
좀 전의 완벽했던 인터뷰 사전 준비에 감명받은 탓이었는지 아마노가 선선히 질문에 응했다.
"진짜로 결혼 하시는 겁니까?"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노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한번 플래쉬가 터졌다.
"예, 말씀하신 대로, 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미키와.. 그녀와 친한 사이인건 맞습니다. 하지만 결혼 예정은 없습니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그러니까, 그 주간지 기사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녀도 알고 있다, 라고 하는건 무슨 얘기입니까?"
"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 있다,라는 걸 그녀도 알면서 교제를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또 플래쉬가 터졌다.
"아주 소중한... 괜찮으시다면, 그.. 소중한 사람이 어떤 분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좋아요"
플래쉬.
"굉장한 미인으로 밝고 상냥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그렇지만 꽤나 고집이 세고 오기가 강해서, 금새 토라지고 화내고 아무튼 솔직하지 못하게 심술부리곤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칭찬으로 시작하시더니 어쩐지 마무리가 안 좋네요"
"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만나지 못한게 벌써 5년이 넘었지만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직도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플래쉬.
"그 사람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제가 멋진 남자로 성장하면, 만나러 와 주지 않을까요?"
파인더 너머로 기자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플래쉬도 터지지 않고, 들고 있던 카메라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멋져"
"첫눈에 반할 정도로?"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정장 바지 위로 물방울이 흘러넘쳐 떨어진다.
"반했어..."
"어서 와, 유카"
"다녀왔습니다..."
카메라가 내려가고, 눈물 범벅이 된 유카가 미소짓고 있었다.
"유카도 한동안 못본 사이에 엄청 예뻐졌네"
"이런 얼굴 하고 있는데?"
서로 마주보던 두 사람이 킥킥 웃었다. 아마노가 팔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서로 이끌리듯 다가가 두 사람의 몸이 살며시 닿는다. 아마노의 팔이 유카를 감싸 안았다.
"...백의에서 어쩐지 약 냄새가 나"
"그런가?"
"옛날하고 똑같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낀다.
"맞다. 카즈야..."
연구실이 땅거미에 물들어 가기 시작했을 무렵, 유카가 몸을 일으켜 가방 안에서 작게 접은 신문지 조각을 꺼냈다.
"그저께 석간, 읽었어?"
"미안. 최근 바빠서, 신문 읽을 여유도 없었네"
찰랑거리는 흑발이 목덜미 근처에서 하나로 묶여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회색톤의 심플한 정장 바지에 힐이 낮은 펌프스 차림으로, 메이크업은 변함없이 옅었다. 매력적인 커다란 눈에 긴 속눈썹, 늘씬한 콧날에 얇고 아름다운 입술, 그리고 투명하리만큼 희고 보드라운 피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강인한 마음이 밖으로도 배여나와 보인다. 학생시절에 다소 엿보이던 교태부리는 듯한 애교가 사라지고, 자신만만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이거 읽어봐"라며 유카가 신문지를 건냈다. 인물에게 초점을 맞춰 시대정신을 조명하는 스타일의 주말게재 기획 시리즈 기사로, 민간 아동복지시설에서 일하던 젊은 직원이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아이들의 슬픔이 연쇄되는 일이 없도록 자기나름대로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라는 주인공의 코멘트를 싣고 있었다. 거기에 실린 사진은 피해 아동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배려하며 아이들과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는 그 직원을 뒤에서 찍은 컷. 흰 색 캐시미어 머플러를 두른 청년의 옆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을 아낌없이 아이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녀석..."
아마노는 신문을 쥔 채로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우연히 사법 담당이 아는 변호사로부터 전해듣고 취재한 모양이야. 나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사를 읽곤 깜짝 놀랐어. 그래서, 아아, 모두들 자기 힘으로 제대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뭐랄까, 잘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이렇게 만나러 와 버린거야"
"그럼, 우리들도 나아갈까? 지금부터, 함께?"
"응. 카즈야만 좋다면, 그러고 싶어"
유카가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아마노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물이 오랜만에 눈 앞에 있었다.
"저기요, 마리에 선생님"
"왜? 사츠키?"
교수실 창가에 나란히 서 밖을 내다보는 마리에와 사츠키, 두 사람의 시선의 끝에, 팔짱을 끼고 사이좋게 가로수길을 걷는 두 남녀의 모습이 있었다.
"잘 됐지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다소 시간은 걸려도, 저 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된다고"
"정말 마음이 놓였어요. 다행이에요... 지금까지 못했던 것만큼, 많이 많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올해 크리스마스는 아마노군도 즐겁게 보낼 수 있겠네"
"네?"
"미키가 늘상 투덜댔거든. 아무리 꼬셔도 크리스마스만은 혼자 보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지게 되는 날이었을테니까"
스트레이트의 롱 헤어를 머리 위로 쓸어넘기며 마리에는 차분한 미소를 띠고 사츠키 옆에 가까이 다가갔다.
"결국, 아마노선배,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건, 모리사키선배하고만, 인거네요. ...미키씨, 너무 불쌍해요"
사츠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있는 마리에의 팔꿈치 부근의 백의자락을 살그머니 손에 쥐었다.
"왜?"
"왜냐니요? 미키씨, 5년동안이나 쭉 아마노선배 옆에 있어주었잖아요. 5년씩이나 함께 하면서, 지지해 주었었는데... 아마노선배와 모리사키선배, 다시 만나게 된건 좋지만,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지만 역시, 미키씨가 너무 불쌍해요"
"함께 했다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해서 아마노군한테 일방적으로 달라붙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나? 미키도 일본에선 안심하고 외출도 못 한다면서 아마노군의 해외출장에 멋대로 따라 나서곤 했다지? 아마노군도 참 미키같은 아이와 참을성있게 잘도 사귀었다니까"
"미키씨, 이젠 어쩌면 좋아..."
쓸쓸해 보이는 말투로 미키의 마음을 걱정하는 사츠키를 보고 마리에가 어이없다는 듯 "어쩌긴 뭘!? 별로 문제될 것도 없는걸? 분명히 지금까지처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데?"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모리사키 선배가 돌아왔는데, 그런 일을...?"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돌려 마리에의 표정을 본 사츠키가 그만 말문이 막힌다.
"선생님!!"
"유카씨도 우리 "동료"가 되어주면 아무 문제 없지 않나?"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마리에가 즐거워 어쩔줄 몰라 한다.
"...또"
사츠키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기며 질렸다는 듯이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또 못된 흉계라도 꾸밀 생각이라면 그만둬요".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라? 나만 나쁜 년인거야?"
"꺄아!! 자,잠깐.. 선생님! 이,이런 곳에서!"
마리에가 갑자기 사츠키의 조그만 몸을 세게 껴안았다. 아기고양이를 귀여워 하듯 쇼트컷을 어루만지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꼰다. 벌써 다른 손으로는 사츠키의 날씬한 등을 애무하기 시작한 마리에의 눈이 개구장이같이 천진난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츠키도 참, 요전번엔 그~렇게나 즐거워했으면서"
"그..그건 말이죠,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나..나는 진짜..진짜로, 그런 취미는 없다구요"
"사츠키가 "주인님~"하고 불러준거, 굉장히 기뻤어"
"그... 그 그 그 그러니까, 마,말이 헛나온거에요. 잊어버려주세요. 그건 잠시 헷갈려서랄까, 선생님께 감쪽같이 속았다랄까.. 머리속이 멍해져서 무심코.. 아앙.. 그만.. 떨어져.. 떨어져 주세요--"
바둥거리는 사츠키의 저항이 워낙 미약해서 진심으로 싫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빤히 들여다 보인다. 수도 없이 몸을 허락해 놓고서도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게 이렇게 저항하는 것 또한 사츠키의 매력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금새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도 어찌나 귀여운지"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 늘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두고 있었던 사츠키의 "그 시절" 안쓰럽던 모습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그건, 사츠키를 5년 동안 줄곧 걱정하며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마리에였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여느때처럼 밀어 넘어트리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팔에서 힘을 뺐다.
"음.. 방어가 꽤 단단해졌는걸?"
마리에의 팔을 뿌리치고 사츠키가 재빨리 방어자세를 취하며 뒤로 물러났다. 무릎길이의 소프트한 A라인 실루엣의 스커트, 옅은 크림색의 가벼운 니트 스웨터, 아미아게 롱 부츠(*주, 編み上げ, 전투화처럼 신발끈으로 묶는 부츠). 자연스럽게 품위있어 보이는 차림이 사츠키의 밝고 화려한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런데 참, 사츠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 데이트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앗! 까먹고 있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을텐데!"
당황해하며 보아(*주, ボア, 모피나 깃털로 만든 여자용 목도리)가 달린 흰색 코트를 서둘러 챙겨든다.
"그러면, 마리에선생님.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알았죠? 이젠 학교에선 그런 야한 짓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다른 장소에서라면 괜찮은 거지!?"
"선생님!!!"
"킥킥... 농담이야. 그이한테도 안부 전해줘요"
손을 흔드는 마리에에게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교수실을 나서면, 사츠키는 쏜살같이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일몰이 가까워진 시간, 땅거미가 길게 늘어진 캠퍼스. 정문으로 향하는 가로수길을 유카가 아마노의 팔에 매달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다.
"아휴~, 유카도 정말. 그렇게 들러붙지 마. 다들 쳐다보잖아"
말하고는 정반대로 아마노의 표정에 싫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 불빛이 꼭 붙어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아스팔트 위로 길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뭐 어때? 오랜만이기도 하고. 게다가..."
"게다가 뭐?"
유카가 눈을 치켜뜨고 약간 삐친듯한 표정으로 "그 주간지에 실린 사진말이야, 카즈야, 이렇게 미키씨하고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잖아. 나같은 거 까맣게 잊고, 쭉 미키씨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잖아?",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런거 아냐, 그건말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속았다랄까, 함정에 빠졌다랄까. 미키가 계획적으로 몰래 찍은 사진이라니까"라고 변명해 보지만, "흐~음, "미키"라.. 경칭 생략? 영화, TV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미인 여배우를 경칭 생략하고 막 이름을 부르고.. 인기폭발이시구나~"라고 반격당하고 만다. "미안, 그런데말이야, 그게 아니고, 그건말이지, 그게 그만...". 완전히 유카의 페이스에 휘말리고 만다.
"뭐가 아니라는 거?"
유카가 계속 놀려대자 아마노가 손사래를 친다. 예전하고 똑같은 두 사람. 달콤한 향기, 숨결, 몸에 닿는 따스함, 들려오는 목소리,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었다. 아마노도, 유카도, 그리워하던 관계를 금새 되찾을 수 있었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그런 사람이 지금, 바로 옆에 있다는 걸 실감한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서로 놀랄만큼 어이없이 쉽고 빠르게 이어지고 맞추어져 간다.
"저쪽에서도 신문을 통해 카즈야와 마리에선생님의 연구를 소개하는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어. 열심히 하는 모습, 정말 기뻤어. 제대로 카즈야를 항상 응원하고 있었으니까"
"고마워"
"하지만 정말 대단해, 카즈야. 지금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학자인걸. 멋져--, 정말 굉장해요"
"굉장하단 말 들어도, 잘 모르겠어, 실감도 안 나고. 굉장한 건, 마리에선생님 쪽이 학자로서 엄청나시지. 통찰력이라든지, 논리구성이라든지, 발상력이라든지, 그리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라든지, 함께 연구를 하고 있으면 절실히 느껴. 아아, 저런 사람을 보고 진짜 굉장하다고 하는거구나, 라고. 거기에 비하면 난 매일 고민만 할 뿐, 연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정말 이게 잘 하는 일일까, 그런 생각만 해. 아무래도 난 잘 모르겠는걸"
"몰라?"
"응. 유전자를 조작해도 괜찮은 건지.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짓이 아닐까, 하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거 사실은 신의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에.."
"흐~음, 어쩐지 어려운 이야기네"
"우왓!"
아마노 앞으로 가서 갑자기 확 부둥켜 안더니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저녁 먹고 나서, 같이 생각해 줄께"라고 말하는 유카.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던 아마노가 정문 앞에서 다른 사람의 이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그러자. 그렇게 해. 확실히 배도 고프고. 뭐 먹고 싶어?"
"물만두가 좋아!!!"
"좋았어, 오랜만에 신쥬쿠에나 가볼까?"
"마음대로. 어차피 카즈야가 계산할건데 뭐"
팔짱을 끼고 걷다가 문득 아마노가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맞다. 유카에게 줄 선물이 있어"
멍하니 바라보는 유카에게, 부스럭거리며 가죽으로 된 휴대용 가방을 뒤져 아마노가 꺼내보인 것은 물색의 조그만 상자였다.
"카..카즈야, 이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그 조그만 상자는 찌그러지고 닳아빠져 유명 브랜드의 로고도 거의 다 벗겨진 낡은 모습이었다.
"미안, 좀 더러워져 버렸네"
"...카즈야, 쭉... 이걸... 가지고... 있었어...?"
"전에 주려고 했던건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이번에 만나면 꼭 선물하겠다고 생각했거든. 항상 지니고 다니지 않았으면, 보라구, 유카니까,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도 모르고, 내가 알아서 챙길 수 밖에. 실제로, 오늘도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역시 늘 가지고 다니기 잘 했지 뭐야"
그렇게 말하면서 아마노는 유카의 왼손을 조심스럽게 잡아들고 망설임없이 반지를 끼웠다. 유카의 물기를 띤 눈동자가 잠시 자신의 약지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다이아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아마노와 시선을 맞추었다.
"고..고마워... 기뻐... 정말 너무 기뻐... 이런 나를... 카즈야는 쭉... 나한테는 과분해.. 과분해요.."
"무슨 말을 하는거야. 나야말로... 나, 이 반지를 두고 맹세했어. 두번다시는 소중한 사람의 웃는 얼굴을 잃게 하지 않겠다고,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런 다짐을 5년간 쭉 해왔어. 그러니까, 유카가 받아줬으면 좋겠어. 유명하게 되었다던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반지가 내 5년동안의 전부니까"
유카는 왼손에 낀 반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아마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서로의 숨결을 바로 곁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나, 카즈야와... 카즈야와 만나게 되서... 다행이야... 카즈야가 제일이야. 날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해 주는 사람..."
크리스마스 캐롤이 흐르는 인파로 북적이는 번화가 한복판에서 유카의 허리에 팔을 돌려 꼭 껴안고 아마노가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약속할께. 어떤 일이 있어도 유카 옆에 있을거야. 언제나 항상 유카와 함께 있을거야"
잃는 건 한 번으로 족해..., 가장 소중한 사람을... 모든 것을...
"유카, 사랑해"
"나도, 카즈야를 사랑해"
두 사람의 입술이 겹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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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같음 미키같은 여자하고 5년이나 부비대면 옛여자는 새까맣게 잊고말걸요-.-;; ...징헌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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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같음 미키같은 여자하고 5년이나 부비대면 옛여자는 새까맣게 잊고말걸요-.-;; ...징헌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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