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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椿 오니츠바키 4-2


제2화


역 구내에서 밖으로 나오자 얼어붙을 것만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가죽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셔터를 내린 상점가 거리를 지나 아르바이트 장소인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류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녀오세요..."
가냘픈 목소리로 배웅하며 왼손에 잡지를 들고 침대에 힘없이 걸터앉던, 잔뜩 웅크린 등, 여윈 뺨, 텅 빈 눈동자,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방에 혼자 남겨두고 온 유카의 모습이 떠올라 걸음을 멈추었다.
"결근한 직원이 많아 일손이 부족하네. 오전만이라도 좋으니까 좀 나와주겠나". 이른 아침, 아르바이트 가게의 점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가지 마! 가지 마! 아무데도 안 간다고 그랬잖아!"
간절하게 애원하며 매달리는 유카를 간신히 달래고 집을 나섰다. 혼자 외출한 건 며칠만에 처음이었다.
"아르바이트같은 거 안 해도 돼! 응? 얼마나 필요해? 돈이라면 내가 낸다고 했잖아!"
아파트 건너편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으러 갈 때조차도 유카는 꼭 달라붙어 따라 나왔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류지가 방 안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촉각을 곤두 세웠다. 함께 있는 동안 계속, 잠시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천정만 바라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미친듯이 화를 내거나 TV에 몇시간씩 파묻혀 있기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옷 안으로 류지의 손을 잡아 끌어 섹스를 요구해오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연말부터 계속 조그만 집 안에 갇혀 단둘이 지냈다.
그 온천여행 이후로 유카가 불안정해진 건 류지도 알고 있었다.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느낀 적 없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격통. 잠시라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단둘이 그렇게 지내는 걸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구실로 반쯤은 도망치듯 집을 빠져 나왔다.
"류지..."
아르바이트 가게의 직원전용 출입구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 류지를, "오랜만이네". 익숙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왜 그래? 원하던 대로 모리사키선배를 손에 넣은 것 치고는... 신통찮은 얼굴을 하고 있네"
"더 이상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경고했을텐데..., 사츠키"
등 뒤에 풀오버(*주, 단추나 지퍼로 여미지 않고 머리부터 뒤집어 써 입는 옷의 총칭)에 청바지차림의 사츠키가 서 있었다. 류지에 대한 공포를 꾹 참고 애써 용기를 내 류지를 노려본다.
"이제 그만 멈춰. 지금이라면 아직...,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이딴 짓 그만해. 모리사키선배에게 하는 심한 짓, 이제 그만 둬... 류지도 사실은..."
"입 닥쳐라"
"아마노선배하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하지만 모리사키선배를 말려 들게 하다니, 그런게 어딨어. 이대로는, 모리사키선배 망가져버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하면, 차라리 선배대신에 내가..., 그러니까"
쾅, 난폭하게 철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사츠키의 말을 막았다.
"입 닥치라고 했지". 초조해진 류지가 다가와 사츠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너같은 게 뭘 안다고 까불어. 내가 굶주리고, 추워서 덜덜 떨고, 그 남자한테 학대당하고,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동안 쭉 그녀석은, 카즈야는 아무 고통도 모르고 편하게 살아왔어. 왜 그런 행복은 카즈야만 누린거지? 나는 뭐지? 그러니까 이제 공평한 거잖아, 카즈야가 누리고 있는 건, 사실 내 몫이었을지도 몰라. 나에게는 카즈야로부터 모든걸 빼앗을 권리가 있어. 카즈야한테서 전부, 다 가져올거야"
"무,무슨 말을 하는거야? 류지, 무슨 말을 하는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도 몸이, 등의 상처가 아파. 이 상처는 평생 사라지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녀석에게도 평생동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아픔을 충분히 맛보게 해 줄거야. 녀석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결심했어. 아직 멀었어, 이 정도론 어림도 없어. 그래..., 이번엔 녀석의 연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볼까"
사츠키의 얼굴에 숨이 닿을만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광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며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저기, 진정해. 어떻게 하면, 류지의 아픔을... 달랠 수 있는 거야? 나, 뭐든 할께, 그러니까 같이 생각해보자. 이런 거 아무리 계속해봐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미움은 사라지지 않아. 나... 이제서야 깨달았어. 누군가를 상처입혀봤자 미움도 괴로움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복수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사츠키..., 이제와서 착한 아이 흉내내지 마. 너도 유카를 가지고 놀면서 즐겼잖아. 저런 착한 척하는 여자, 재수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날 도와준거 아냐? 너도 나하고 똑같아"
이렇게까지 증오로 가득찬 표정을 사람이 지을 수 있다니... 사츠키는, 난생 처음 보는 악마같은 얼굴의 류지를 입술을 꼭 깨물고 애써 공포를 억누르며 용기를 내 쏘아봤다.
"그런 거, 나도 잘 알고 있어! 내가 한 짓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무거운 죄라는 거, 류지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간신히 깨달았어. 그러니까 더이상 하지 않을거야. 평생 이 빚은 다 갚을거야. 제발..., 류지, 이제 그만해, 모리사키선배를 그만 놔줘. 이대로는..., 네가 당한 일을, 증오를, 네가 다시 반복하는 것 뿐이잖아!"
류지의 오른손이 사츠키의 조그만 얼굴을 후려 갈겼다. 분노로 가득한, 게다가 남자의 주먹에 얻어맞은 사츠키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흘리며 류지의 발밑으로 무너져 내렸다. 손으로 꼭 누르고있는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딴 자식하고 감히 날 비교해!"
분노로 몸을 크게 떠는 류지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츠키의 눈에 떠오른 감정은, 분노도 공포도 아닌, 하소연할 길 없는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류지에 대한 애처로움이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모리사키선배 사실은"
안전화발로 배를 걷어차인 사츠키의 조그만 몸이 아스팔트 위를 굴렀다. 난생 처음 느끼는 고통으로 호흡조차 할 수 없었다.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이게 마지막 경고야. 알았어? 내 일에 방해하지 마. 다음번엔 진짜 죽여버릴거야"
섬뜩한 협박의 말을 남기고 가게 안으로 사라지는 류지. 그러나,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지친 모습으로 문에 몸을 기대고, "그딴 자식하고... 감히 날 비교해...". 힘없이 중얼거렸다.
혼자 남겨진 사츠키는 아픔을 참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류지가 사라진 출입구를 응시했다. 타카쿠라선생님은 "나한테 맡겨"라고 말했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손을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같은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절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거야... 단단한 결의가 서린 눈으로 조용히 응시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유카의 모습이 역광을 받아 실루엣으로 떠올라 있었다.
"갔다 왔어. ...어!?"
왼손에 잡지를 꽉 쥐고 있었다.
"유카!?"
설마... 아침에 집을 나선 뒤로... 벽걸이 시계는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설마, 쭉 저 자세 그대로...
"유카". 당황해서 후다닥 달려와 어깨를 쥐고 흔드는 류지에게, "아...".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탁해진 눈동자에 희미하게 빛이 떠올랐다.
천천히 류지 쪽으로 몸을 돌리며 힘없이 말했다.
"...왜? 뭐 놓고 갔어? 아르바이트... 안 늦어?..."
"...지금, 끝나고 돌아온 거야. 벌써 오후 다 됐어"
"아, 그렇구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게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유카는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변함없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럼, 점심 식사 차릴께... 볶음밥 어때?"
류지를 바라보는 눈. 하지만 류지를 보고 있는게 아니었다. 밝은 미소도, 쾌활한 표정도, 화려한 몸짓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생기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 또 격통이 느껴졌다.
"...가끔씩은 밖에도 좀 나가볼까? 부모님 오늘 돌아오신댔지? 집에 가기 전에 우리, 나가서 점심 먹자"
"네... 알았습니다... 바로 준비할께요..."



1월 2일. 설날부터 쭉, 납빛 구름이 하늘에 낮게 깔려 있었다---.



"연초라서 그런가, 꽤나 사람으로 북적거리네"
"...그렇네요..."
"신년맞이 세일이라도 하나?"
"...그렇네요..."
"그런가..."
복주머니를 안고있는 쇼핑객들로 혼잡한 시내 백화점 옆을 따라 꼭 붙어서 걷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 사이좋은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류지에게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 걷는 유카는 계속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벌써 봄이라도 온건지 매장에 진열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색깔의 옷도, 정월을 맞아 가게 윈도우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도, 번화가 거리의 광경도,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갑자기 류지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런 거, 의외로 유카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품위있어 보이는 연한 노란색의 꽃무늬 롱 원피스가 쇼윈도 너머로 보였다. 유카는 "...그래요?" 대답은 했지만, 얼굴조차 들지 않고 류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옷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번 입어보는게 어때?"
"...입어..볼까요?"
"싫어?"
"아니요, 류지군이 입으라고 하면, 어떤 옷이라도 입을께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조그만 목소리로 공손히 대답했다.
"어머나, 정말, 예쁘네요"
탈의실의 커텐을 열고 나온 유카를 보고 매장 직원이 활짝 웃으며 수선을 떨었다.
"너무나 잘 어울려요"
봄에 어울리는 컬러의 세련된 꽃무늬 원피스는 진한 화장을 하고 있지만 유카가 본래 가지고 있던 청초하고 가련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유카는 아무런 표정없이 전혀 흥미 없다는 듯 가만히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선배...
순간, 처음 만났을 무렵의 상냥했던 유카의 모습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내게 처음으로 상냥함을 가르쳐 준 선배...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같은 모습을 한,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바란 건 고작 이런 거였나?...
"...그럼, 이 옷 주세요"
류지는 그렇게 말하며 가죽점퍼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를 꺼냈다. 구겨진 만엔권을 펴고있는 손을 유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아, 이거? 아까 아르바이트하고 받은 거야. 신경쓰지 마".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유카는 그저 "...그래요?",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대답할 뿐. 감정의 기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점원이 이상하다는 듯 두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후, 류지가 일방적으로 말을 걸면 유카가 짧게 맞장구를 칠 뿐인 썰렁한 점심식사 시간을 보냈다.
"가능한 한 빨리, 될 수 있으면 내일이라도 돌아올께요"
눈을 내리 깔고 그렇게 말하며 "LAURA ASHLEY" 쇼핑백을 어깨에 매고 떠나가는 유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인파 속으로 사라져 더이상 보이지 않는데도 류지는 그 자리에 내내 서서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떨려라, 너무 떨려"
"어이 어이, 진정해, 이제와서 암만 긴장해봤자 결과는 안 변한다구. 그렇게 허둥지둥하는 거, 전혀 유카답지 않아"
세라복에 더플코트를 껴입은 유카가 아마노 왼쪽 옆에서 폴짝폴짝 뛰듯이 걷고 있었다. 30미터 남짓 앞에 있는 게시판 주위에 모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는 한편에서는 친구에게 위로받고 있는 여자애의 모습도 보였다.
"모야~, 자긴 벌써 합격 결정됐다고 거들먹 거들먹, 여유만만인거야? 조금쯤 내 긴장을 풀어준다라든가, 격려해준다라든가, 뭐 그런 배려도 없는거야? 정말이지, 카즈야는 섬세하지가 못 하다니까"
"알았어, 그럼 이건 어때? ...유카, 1년 정도 재수생활 하는것도 그리 나쁘진...으악!"
유카의 주먹이 작렬해 아마노의 옆구리에 파고 들었다.
"아파라... 그렇다고... 진짜... 때리냐?..."
"카즈야가 재수없는 소릴 하니까 그렇지. 너무해!"
붉은 리본의 포니테일을 찬 바람에 나부끼면서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게시판으로 향하는 유카에게, "미안 미안, 기다려". 웃으면서 아마노가 뒤쫒아 갔다. W대 영문학부 합격자 발표 날. 아마노는 이미, 당연한 얘기지만, 이학부에 합격이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합격통지문에 입시 성적 상위자에게 수여되는 특별장학생 신청서류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친척이 없는 아마노에게는 최상의 희소식. 유카도, 유카의 부모님도,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하지만, 유카, 요즘엔 합격발표, 인터넷으로 편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굳이 일부러 이렇게 추운 날 직접 보러 나올 것까진 없잖아. 너, 추위도 많이 타고. 의외로 감기도 잘 걸리고"
"분위기야, 분위기. 일종의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이벤트같은 거잖아. 당연히 참가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유카는 아마노를 쳐다보며 능청스레 흰 입김을 내뿜었다.
"유카는 옛날부터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 행사라든가, 기념일이라든가, 크리스마스같은 계절 이벤트라든가, 무척 좋아했잖아. ...가만 있어봐, 뭐야, 하나도 긴장 안 했잖아?"
"뭐,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랄까". 그러니까,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 일 리가 없지. 고교 마지막 도대회에서 관동 대회 출장이 눈앞에서 좌절되었을 때에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라는 자부심, 충족감이 있었고, 물론 분함도 없진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안돼.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긴장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태평한 얼굴로 졸졸 따라오고 있는 소꿉친구는 분명 아무것도 모르고 있겠지만... 합격하면, 카즈야에게... 결의를 가슴에 품은 유카가 게시판을 쳐다보고 있는 아마노의 얼굴을 슬쩍 훔쳐 보았다.
"유카, 몇 번이야?"
"됐어, 직접 확인할거야"
물론 수험번호는 머리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호흡을 멈추고 천천히 얼굴을 들어올렸다. 조그만 숫자의 나열이 시야에 들어왔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크게 뛰고 있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
"어떻게 됐어...?"
조심스레 물어보는 아마노를 무시하고 유카는 반쯤 입을 벌린채로 게시판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유카?"
"있다..."
"어!?"
"있다... 있어..."
"합격? 합격한거야?"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으로 유카가 게시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하면 기쁨을 대폭발시켜 미친듯이 좋아하며 펄쩍펄쩍 날뛸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아마노의 예상을 깨고, 유카는 "다행이다...". 마음 속 깊이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다행이야...,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합격 축하해"
유카는 대답없이 아마노를 향해 몸을 돌려 "이걸로, 또 함께 있을 수 있겠네...". 간신히 평소의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맨션 근처의 공원 벤치, 아마노가 자판기에서 뽑아온 캔커피를 유카에게 건넸다.
"고마워. ...아, 왠지, 힘이 쭉 빠져버린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유카가 캔커피 뚜껑을 땄다.
"축하해. 하지만, 정말 W대 갈꺼야? 영문학부라면 F대 쪽이 더 낫지 않아? 유명한 교수도 많고"
"뭐야, 내가 거기 다니는 게 싫어? 함께 다니면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거야?"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아, 알았다. 내 눈을 피해서 여자애하고 맘껏 놀려고 그러는구나. 무리야 무리, 단념하시지요. 카즈야같이 평범하고 밋밋한 얼굴은 여자한테 인기 없어. 카즈야는 말야, 여자애가 재미있어하는 말도 못하고, 옷입는 센스도 꽝이고, 게다가"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충고 감사합니다"
평소 두 사람의 대화. 평소같으면 그렇게 끝났다. 꼭 한 마디가 많은 유카와 그런 유카의 말을 흘려듣고 마음에 두지 않는 아마노. 보통 그런 식의 같은 패턴이 늘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그럼, 넌 어때? 왜 W대에 지원한거야? 내가 있어서 그런거지? 내가 있으니까 W대에 지원한거지?"
"에? 무,무슨 소리야?"
"대학에 와서까지 나한테 달라붙으려고? 조금쯤은 내 기분도 좀 생각해보라구"
평소와는 다른 아마노의 날이 선 말투에 유카가 당황했다.
"자,잠깐만.. 카즈야!?"
"아아... 유카, 너, 혹시 나한테 반한 거 아냐? 그래, 유카, 그랬구나. 여지껏 눈치 못채서 미안"
조롱하는 말투에 무심코, "바,바보같은 말 하지 마!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거야? 그,그럴 리가...". 거기까지 말하고 말끝을 흐렸다.
"뭐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카의 얼굴을 들여다 보려는 듯, 아마노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선을 피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을게 뻔했다.
"...아.. 그런.. 아..냐.."
"...그래? 우리들, 어차피 그저그런 소꿉친구잖아"
모처럼, 겨우,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는데... 필사적이었다. 유카의 W대 지망의사에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기념수험 취급하며 일소에 붙였다. 한편 아마노는 의학부조차도 현역 합격이 틀림없을 거라고 다들 믿고 있었다. 같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 지금까지처럼 함께 학교를 다니고 싶어서,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평소엔 웃으며 넘어가 줬던 아마노가 왜 하필 오늘같은 날 저렇게까지 심하게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유카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차피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라든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보살펴 주는거야"같은, 뭐 그런 거겠지"
"당연.. 하잖아..."
받은만큼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는 말. 자기도 모르게 오기를 부리는 자신의 성격이, 솔직하지 못한 자신의 지기 싫어하는 천성이 원망스러웠다.
"그럼, W대에 오지 마, F대 가면 되겠네"
벤치 옆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거칠게 움켜쥐고 아마노가 일어섰다.
"기다려, 카즈야, 잠깐만"
"난 이제 싫어. 대학 가서도 지금까지하고 똑같다니 싫어, 유카와 소꿉친구일뿐인 관계, 이제 더는 싫어!"
당황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아마노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슬퍼런 아마노의 태도에 놀라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합격하면... 카즈야에게 제대로 고백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결심하고, 아마노를 불러 합격자발표를 보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용기를 쥐어짜 공원에 잠깐 들리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쩌지, 어쩌면 좋아...
"...미안. ...사과할께, 카즈야 험담한 거, 그러니까, 응?... 대학 가면, 카즈야 더이상 귀찮게 안 할께, 카즈야 하는 일 방해 안 할 테니까, 카즈야 옆에서 얼쩡거리는 일도 없을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 다른 학교 가라든가 하는... 그런 말 하지 마"
"그런 말이 아냐!"
"꺄악!"
갑자기 뒤돌아선 아마노가 양팔로 유카를 와락 감싸 안았다. 힘껏 유카의 몸을 껴안았다.
"난 유카를 좋아해"
...지금, 뭐라고 했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그러나 분명하게 아마노가 말했다.
"그동안 계속, 유카를 좋아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은 유카와 소꿉친구로 지낼 수 없어. 대학에 가면, 내 여자친구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나하고 사귀어 줄래?"
아마노가 하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무렵부터 쭉 아마노만을 봐 왔다. 언제나 함께 있었다. 함께 있는 것이 당연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분명히 자각했다. 나는 카즈야를 좋아해, 라고... 그 이후로 한결같이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희미한 기대를 가져본 적도 몇 번 있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쭉 숨겨 왔다. 지금의 좋은 관계가 깨질지도 모르는 모험을 하느니, 차라리 소꿉친구인 채로... 그런데 지금, 이렇게 껴안아 주면서 갑작스럽게 고백. 카즈야도 나를...!? 날 좋아하고 있었어...!? 둘 다 같은 마음이었다고...!? 좀처럼 믿겨지지가 않았다. 현실같지가 않았다. 올려다 보면, 얼굴이 새빨개진 아마노가 진지한 표정으로 "유카, 좋아해"라고 다시 한번 말했다.
말보다 먼저 눈물이 흘러 넘쳤다.
"카즈야..."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멈출줄 몰랐다.
서로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도, 좋아..., 카즈야, 너무너무 좋아..."라고,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유카는 아마노의 등에 팔을 돌려 힘껏 껴안았다. 정말 기분 좋다... 쭉 느끼고 싶어했던 아마노의 따뜻한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 들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 안에 안기는 행복을 유카는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따뜻해.. 참 따뜻해... 서로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마음을 서로에게 전한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것처럼 가루눈이 조용히 춤추듯 내렸다.
...언제부터 나는, 유카를 잃었던 거지?
"점심 준비 다 됐어, 빨리 안으로 들어 와. 요리는 자주 해보질 않아서 마리에하곤 달리 맛은 보증할 수 없지만. ...자기, 안 추워? 그런 곳에서"
베란다에서 멍하니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아마노에게 미키가 말을 걸었다.
"...바로 갈께요"



맨션 앞에 이삿짐 트럭이 서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려다 아마노의 집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카즈야가 집에 왔나...!?
뒷모습만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이제와서 무슨 염치로, 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켜 다리가 굳어져 버렸다. 안돼, 여기 있으면 안돼... 가야 해, 빨리 가야 해...
"포장은 전부 끝났냐? 빨리빨리 좀 해!"
현관으로부터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남자가 팔짱을 끼고 젊은 일꾼들에게 지시를 퍼붓고 있었다.
뭐야?, 뭘 하고 있는 거야?...
"집 크기에 비해선 짐이 적구만. 이 정도면 2톤 트럭 1대로도 충분하겠는데"
"저기... 뭘 하고 있는거죠?...".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응? 보고도 모르슈? 이사하잖수, 이사 준비"
"...이사!?"
갑자기 집 안에 들어온 젊은 여성을 보고 중년 남자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쭉 뻗은 늘씬한 다리며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뭐요, 아가씨는"
"...아, 저요, 옆집 사는 사람인데요... 이사라니, 정말... 입니까?"
"아아, 보시다시피"
집 안에는 둘둘 말린 골판지가 빽빽히 쌓여 있었다. 바로 얼마전까지, 두 사람 분의 식기가 줄지어 놓여있던 찬장도, 빽빽히 늘어선 난해한 생명공학 전문서적 사이에 유카의 애독서 몇 권이 꽂혀 있던 책장도, 전부 텅 비어 있었다. 살풍경한 부엌에는 테이블만 하나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 5일이 이사 날이니까 오늘은 포장하는 거유. ...것보다 아가씨, 아무리 옆집 산다지만 마음대로 이렇게 들어오면 곤란하지, 나가슈 얼른"
남자의 말 같은 건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유카는 "거짓말..., 이사라니, 거짓말... 나, 들은 적 없어, 그런 얘기..., 나, 아무 것도 듣지 못 했는데... 그런... 그런게, 어딨어...". 중얼거리면서 휘청휘청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젠, 카즈야를, 못 만나는거야...? 카즈야는, 이제, 떠나버린 거야...!?
"어디로, 어디로 이사가는 거에요?"
"미안하지만, 그런 질문엔 대답할 수 없수. 이 쪽도 규칙이란게 있으니까. 고객의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사항은 요새 특히나 조심스러워서"
"어디로 이사하는 거죠?..., 가르쳐 주세요..., 네?... 알려 줘요..., 가르쳐 주면, 나... 마음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이봐, 아가씨..."
남자는 유카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제정신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순간 멈칫했다.
"아가씨, 왜 그래...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런 짓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저기..., 아저씨, 잠깐 괜찮습니까?"
수상쩍어하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금발머리를 삐쭉삐쭉 세운 젊은 일꾼 쪽으로, 남자는 구원의 신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 뭐 뭐?"라고 대답하며 서둘러 유카의 옆에서 도망쳤다.
"쓰레기통에서 나온 건데요, 이거 어쩌죠?"
"필요없으니까 쓰레기통에 버렸겠지"
젊은 일꾼이 손바닥 위로 물색의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그건데요..."
"뭐야 이건?"
상자에는 유명 브랜드의 로고. 뚜껑을 열어봤다.
"응!? 이거... 야, 이거 진짜냐?..."
형광등 조명 아래에서 다이아몬드가 눈부시게 빛났다. 이미테이션 따위가 아니라는 것쯤, 보석같은 것하고 거리가 먼 중년남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하죠?"
"어쩌긴, 대체 이런 비싼 물건이 왜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거야?..."
당황한 나머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눈만 껌뻑이는 두 남자 사이로 쓰윽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다이아 반지를 집어 올렸다.
"이봐요, 참내, 마음대로 그렇게 가져가면 안 되지"
"...카즈야"
반지 안쪽에 "KtoY"라는 문자가 예쁘게 새겨져 있었다. 카즈야가, 이걸 내게...!? 아마노가 연인에게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서 샀을 반지. 유카가 연인에게 선물받을 것이었을 반지. 틀림없었다. 그게 어째서 여기에...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내 탓이야... 카즈야는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 반지 때문에... 바쁜 연구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열심히 돈을 모아서, 내게 선물하려고, 이 반지를 샀다. 이 반지를 고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새빨간 얼굴로 잔뜩 수줍어하면서 가게에 들어가, 카즈야니까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나를 위해서... 그런데... 내가 배신해버린 탓에..., 카즈야가 내 배신을 깨닫고는... 그래서 갈 곳을 잃고... 그렇게 버려졌겠지...
떨리는 손가락에서 다이아 반지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떼구르르 바닥을 굴러가는 반지.
"나...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유카는 반지가 어디로 굴러갔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훽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를 정신이 나간 것처럼 쓸어올려 움켜쥐고서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어이, 아가씨! 혹시 이 집..., 이 반지, 혹시... 아가씨 꺼?", 중년남자의 목소리도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다. 몽유병 환자처럼 비틀비틀, 자취를 감추었다.
"저, 그럼, 이거, 반지는 어쩌죠?"
"...저기 옆에 골판지 안에다가 적당히 넣어 둬. 오늘 작업은 이걸로 끝이다. 서둘러 마무리 해..."
응? 카즈야..., 나..., 어떻게 하면 좋아?... 이제와서, 어쩐다고 해도... 소용없겠지... 내가 카즈야를, 배신한다거나...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 없었을테니까...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와 버렸는지.. 그것은 여기가 지금 유카에게 있어서 유일한, 아마노와 닿을 수 있는 장소니까. 끊어져버리기 직전의 가느다란 실로 간신히 연결된 장소니까. 수도 없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집이 이제 사라져 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염치도 없었다. 그저 아주 조금만이라도 좋으니까, 그리운 온기를 먼 발치에서나마 아주 약간만이라도 느낄 수 있었으면... 살짝이라도 거기에 닿을 수 있었으면... 그냥 딱 그 만큼만이라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갈 곳을 잃고 거리를 헤매이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어느새 여기에 와 있었다.
저기, 불이 켜져 있어...!?
연구실의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있는거야...?
문 손잡이에 손을 대는 순간, "무슨 용무로?"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뒤돌아 보면, 언젠가 봤던 덥수룩한 머리의 대학원생이 복도에 서 있었다. 정월 연휴기간이라서인지 백의 차림이 아니었다.
"본가에 돌아가기 전에 잊은 게 없나 확인하러 왔을 뿐이라, 나 밖에 없어. 대체 이런 정월에 누가 있을거라고... 당신... 설마!?"
어슴푸레한 복도의 조명을 켜 유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대학원생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너, 카즈야의..."
가시돋힌 말투로 돌변했다. 부모의 원수와 마주친 것처럼, 격렬한 모멸감마저 띠고 쏘아보았다.
"뭐하러 온거야? 너, 여기 올 자격같은 건 없다는 거,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 아니면 뭐야, 카즈야가 일약 학계의 주목을 받으니까 이제와서 되돌리러 온거냐? 꼬리라도 쳐서 순진한 카즈야 다시 어떻게 해 볼 속셈이냐?"
"...그런..거... 나... 그런게..."
혀를 차며 대학원생이 "너 잠깐 따라와 봐. 좋은 거 보여주지". 유카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연구실로 끌고 들어갔다. 곧장 아마노의 책상으로 향했다.
"너, 무슨 속셈으로 카즈야와 사귄거야? 따로 남자도 있으면서 카즈야하고 어쩔 속셈이었던거야? 카즈야처럼 성실하고 사람 좋은 녀석을 잘도 아무렇지도 않게 갖고 놀았다 이거지"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대학원생이 아마노의 PC 전원을 켰다.
"본 적이 있어, 내 눈으로. 네가 키 큰 남자하고 팔짱을 끼고 호텔에 들어가는 거. 붉은 리본에 포니테일,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어때? 부정할 수 있어?"
"그,그건..."
부정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류지와는 이루 다 셀 수도 없을만큼 러브호텔에 출입했다. 하도 많이 드나들어서 언제 목격당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꽉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유카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대학원생은 난폭하게 유카의 손목을 뿌리쳤다.
"대체 뭐냐구, 그 옷차림은"
경멸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유카의 화려한 미니스커트를 훑어 보았다. "카즈야를 유혹해 볼 심산이었나 본데, ...유감이야. 카즈야는 이제 여기 안 와"라고 빈정거렸다.
"...여기, 안 와요!?"
"연초부터 카즈야의 연구와 논문을 기초로 한 커다란 프로젝트가 시작되니까. 당연히 녀석도 핵심 멤버의 일원으로 참가하기 때문에, 더 훌륭한 기자재가 갖춰진 대학으로 옮기게 됐지. 그러니까, 더이상 여기엔 안 와"
"그,그런..."
마지막 남아있던 가는 실이 끊어져 버렸다.
"카즈야한테는 해외의 유명 연구소로부터도 오퍼가 들어오고 있어. 학자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녀석은 이미 그런 존재야. 우리같은 놈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하물며 너같은 걸레가 함부로 가까이 할 입장이 아니라구"
컴퓨터의 OS가 기동되어 화면이 떴다. 디스플레이를 가리키며 대학원생은 한층 더 차가운 목소리로, "이거 보라구...". 유카가 숨을 집어 삼켰다.
"이 사진..., 이 사진은..., 이걸, 카즈야... 줄곧..."
유카의 사진이 바탕화면에 띄워져 있었다. 뺨을 서로 맞대며 어깨를 감싸안고 V사인을 하고있는, 새빨간 얼굴에 만면에 미소를 띄운 두 사람. 연인이 되고 얼마 안 됐을 때의 두 사람. 대학 입학식 직전, 더이상 소꿉친구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처음 데이트 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서로의 마음이 하나였음을 확인하고 기쁨에 젖은 아마노와 유카의 웃는 얼굴이 화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카즈야 애인이 양다리 걸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 무렵부터 녀석, 잔뜩 풀이 죽어가지고서는, 우리들이 걱정하는데도 "괜찮다"며 웃기만 하고, 무리해서 연기하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그런데도 녀석은 오직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나는 카즈야에게 그토록 잔인한 짓을, 미움받을 짓만 했는데... 그런데도 카즈야는 나를... 끝까지 나를... 그런데 나는 카즈야를... 상처만 입히고...
고개를 떨군 유카를 앞에 두고 대학원생이 "그래서... 바쁜 연구 사이사이에 항상..., 녀석은 항상 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어... 녀석이 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걸 보고 있었는지, 넌 알기나 해!!" 결국 분노를 폭발시켰다.
"꺼져! 당장 여기서 나가! 알았어? 두번다시 카즈야 근처에도 오지 마! 너같은 걸레가 자꾸 얼쩡대면 카즈야의 커리어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단말야! 알아들었으면 냉큼 꺼져! 당장 나가라구!"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카즈야가 떠나버렸어... 만날 수 없어... 이젠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없어...
유카가 휘청휘청 복도를 걸으며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카즈야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힘없이 중얼거렸다.
문이 소리없이 닫히는 걸 보고, 대학원생은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이며 휴대폰 단축번호를 눌렀다.
"...아, 타카쿠라선생님, 죄송합니다... 실은... 그렇습니다, 연구실에... 네... 왔습니다... 그래서 그만..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 죄송합니다..."



"저기, 미키씨. 선생님은? 오늘 아침부터 안 보이시던데..."
"본가에, 설이니까 당연히 본가에 갔지. 오늘 밤 늦게나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던데. 왜?"
침대 위에 엎드려누워 다리를 까닥거리며 잡지를 뒤적이는 미키는 오랜만에 느긋한 휴식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듯. "휴대폰은 받을테니까 한번 걸어보든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아, 나 잠깐 편의점에 좀 갔다 올께요"
"그건 안돼"
즉답. 화장을 하고 있지 않은 탓인지, TV에서 보던 것보다 약간 부드러운 느낌의 아름다운 얼굴로. 하지만 강경한 어조였다.
"에? 왜요? 잠깐 나갔다 오는 것 뿐인데"
"거짓말. 그녀한테 갈 생각이잖아"
"...아닙니다"
"뭐, 그렇다면야. 어쨌든 안돼요. 마리에가 명령했어요. 자기,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라고"
"무슨 간수라도 됩니까?"
분명 유카는 류지의 아파트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걸 보기좋게 간파당하고 한껏 빈정대는 아마노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미키는 담담하게, "하긴 내가 굳이 지키지 않아도, 특별한 잠금장치가 달려 있어서, 어차피 안에선 안 열려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잠시 후, 체념한 얼굴로 현관에서 돌아온 아마노가 힘없이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어라? 남자가 뭘 그런걸로 풀이 죽고 그래. 정말이지, 자긴 참 알기 쉽다니까. 괜찮아요. 자기 애인 문제라면 마리에가 확실하게 손을 써뒀으니까. 더이상은 심한 짓 안 당할 거야. 괜찮으니까, 마리에를 믿어요. 마리에만 믿고 있으면 아무 문제 없으니까. 반드시. 자기, 마리에가 "힘이 되어줄께"라고 했다며. 그럼 걱정할 필요 없어요"
"무슨...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선생님이 괜찮다고 말하면, 무조건 괜찮은 겁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선생님이 그랬으니까 믿으라구요? 그런... 미키씨는 그럼, 선생님이 "내일 지구가 멸망해"라고 하면, 믿습니까?"
"예, 믿어요"
미키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어이없을 만큼 쉽게 대답하며 또 페이지를 넘겼다. "어머, 이 가방 예쁘다. COACH 신상이네"라는 둥, 혼잣말까지 중얼거리고 있었다. 넓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빛이 미키의 순백 블라우스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집에서 보낸 며칠동안, 아마노는 마리에와 미키를 지켜보고, 두 사람이 단단한 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었다. 미키는 마리에에게 푹 빠져 전폭적으로 신뢰를 보내고, 마리에는 미키를 감싸안아 맘껏 응석을 받아주고 있었다. 주고 받는 말 하나하나, 마주 보는 시선 하나하나, 서로의 몸에 닿는 손길 하나하나까지, 서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뿐인. 그렇다고 서로 주고받고 하는 그런 이해관계가 아니라 그저 상대방의 존재가 서로에게 전부인. 그런 두 사람의 "순진무구", 그 자체인 인간관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그런 "순수"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지 아마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미키씨는 정말 그렇게까지 선생님을 믿습니까?"
단순하고 소박한 의문이었다. 아마노의 질문에 미키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마리에를 좋아하니까"라고, "게다가, 마리에도 내가 "좋아"라고 했으니까"라고, 기쁨에 겨워 대답했다.
"...좋아..하니까!? 겨우 그걸로?"
"그래요, 겨우 그걸로. 그러니까, 마리에의 모든 걸 믿을 수 있고, 마리에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내던질 수도 있어. 우스운가?"
"우스운건..., 아니지만..."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내는 미키의 스트레이트한 말이 지금의 아마노에게는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네. 하지만 진짜야, 진짜. 난 마리에를 좋아해, 내 모든 것은 너무나 좋아하는 마리에와 전부 함께야. ...잠깐 자기야, 뭐야, 뭘 그렇게 어두운 표정으로 고민하는 거야. 자기한테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잖아, 한결같이 줄곧 생각해온 사람이... 좋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런 마음, 그렇게 우스운 일도 아니라고 보는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요.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무조건 전부 믿는다니... 아무리 믿어봐도... 배..배신... 당할 뿐..이고. 결국 상처받고 마는데... 그럴바엔 차라리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
"에휴~"
미키가 커다란 눈과 사랑스러운 입술을 동그랗게 뜨고, 아마노의 잔뜩 풀이 죽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럼, 자기는 배신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거야? 상처입고 배신당하는 것쯤, 그럼 좀 어때? 나, 마리에한테 상처입는 것쯤 각오하고 있어, 배신당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누군가를 좋아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 하나도 괴롭지 않아. 게다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받아들여 주고 있으니까. 그 이상의 행복이 대체 어디 있겠어? 반대로, 나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건, 아무도 좋아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야..."
미키는 "옛날에, 죽어 있었을 무렵처럼"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덧붙였다.
"분명 자기 애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여자하고 남자는 생각하는 게 다를라나. 나, 남자는 료지 밖에 모르니까, 남자의 마음은 잘 모를지도..."
미키가 아마노의 표정을 살피려는 듯 목을 기울이고 낙담하고 있는 아마노를 응시했다.
"그렇지, 이번엔 내가 뭐 좀 물어봐도 돼? 쭉 신경쓰이는 게 하나 있는데"
잡지를 덮으며 미키가 몸을 일으켰다. 찰랑거리는 밤색 머리카락이 빛에 반짝이며 가슴 위로 흘러 내렸다.
"전에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 때, 사카뭐였더라, 그 남자애, 자긴 조금밖에 말 안 했지만, 사실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훨씬 오래 전부터 그 아이를 알고 있었던 거 맞지?"
아마노가 "그래요..., 알고 있었어요..."라고 대답하기까지 30분 남짓, 미키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미키씨는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간단하잖아요, 본 적도 없는 생판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녀를 빼앗아 가는 걸 잠자코 보고 있을 정도로, 아무리 사람이 좋다고 해도 자기가 그 정도까지 무골호인일 리가 없잖아. 원래대로라면, 자긴 칼로 찔러 죽여서라도 그녀를 지키려고 했을텐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분명 자기한테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까, 그 남자애한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부 다, 말해 줄께요"
아마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침대 위에 앉은 미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가 녀석, 류지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은 건, 아마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 무렵이었을 거에요. 한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려는데, 거실에서 어머니가 울면서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 아이 불쌍해서 어떻게 해요"라며 아버지한테 하소연하고 있었어요... 그 때는 어렸으니까, "그 아이"가 누굴 말하는건지 알지도 못했고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그걸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가을이었죠.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어머니 일기를 발견하고 그걸 읽게 됐어요... 그걸 읽고, 구체적인 일이 다 적혀있진 않았지만, 난... 모든 것을 다 알게 됐어요. "그 아이"가 누군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분명 어딘가 먼 곳에서 혼자 외롭게 살고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난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었죠. 누구한테 상담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미키씨, 그래서 나, 그걸 알고, 녀석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 거 같애요?"
눈을 치켜 뜨고 바라보는 아마노의 시선이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마키의 시선과 마주쳤다.
"나, 녀석이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죽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만약 아직 살아있다면, 그냥 죽어버려, 라고 바랬어요. 나 혼자만 행복한 삶을 살고, 하지만 녀석은 쭉 외톨이로... 분명히 날 원망하고 있을거야.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되면 분명히 날 원망할 게 틀림없어. 그래서 무서웠어요. 나와 녀석은 아주 조금밖에 다르지 않아. 그런데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나만 행복을 독점하고, 난 녀석에게 원망받아도 어쩔 수 없어. 무서웠어요. 나에겐 녀석에게 보상해 줄 방법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만약 녀석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앞으로의 인생을 녀석과 바꿔주는 정도 밖에 보상할 길이 없었으니까, 그게 무서웠어요... 난 그런 인간이에요. 녀석은 나한테 단 하나뿐인... 그런데도... 외면하고... 게다가 죽어버리라고... 죽어달라고... 바라는... 그런... 그리고,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나버렸어요. 녀석이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어쩔 수도 없는... 어쩔 수 없는 놈이에요, 나라는 놈... 경멸당해도 싸요... 게다가 유카에게 항상 그랬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연구를 하고 싶다고 늘 그랬지만, 사실은 전혀 달라요. 유카는 나같은 놈한테는 아까울 정도로 예쁘고, 오기 많고 억지도 잘 부리지만 늘 밝고 상냥하고, 옛날부터 유카 주위에는 사람들이 항상 많았어요.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굉장히 인기가 많아서, 수도 없이 남자애들한테 고백도 받고... 언젠가 나같은 놈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지는 않을까 언제나 두려웠어요. 그러니까, 뭐든지 좋으니까, 나한테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뭔가 하나라도 있으면, 유명해지면, 유카를 잡아 둘 수 있지 않을까하고. ...겨우 그런 이유때문이었어요. 사실은,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연구에 몰두한 이유는 고작 그런 거였다구요... 미키씨, 난 그런 인간입니다... 그런 비겁하고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흐음~..., 별로, 그리 형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랄까. 자기 그런 면 꽤 친근감이 드는 걸. 과연, 마리에가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가 있었네. 역시, 단순한 공부벌레가 아니었잖아"
놀라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대화라도 하듯 미키가 대답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말도 안되는 녀석이잖아요, 나"
"거짓말 아닌데. 왜냐구요? 안 그러면 그건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은 원래 그런 거에요. 제멋대로에, 약하고, 교활하고... 당연한 거잖아. 있잖아요,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성인군자같은 사람, 없어요, 보통은"
미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마노의 떨리는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렇게 허물을 감춰가면서 다들 살아가는 거야..."
"...미키씨가 그랬죠, 내가 녀석에게 유카를 희생양으로 바쳤다고. ...두 사람이 나 몰래... 숨어서 사귀고... 게다가, 유카는 뭐든지 녀석이 시키는대로...,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녀석도 유카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 마음 속 어딘가에서 유카를 던져주고 희생시켜서...". 떨리는 목소리로 참회하듯 털어 놓았다.
"그녀가 어떻게 했다라든가, 그 남자애가 어떻게 했다라든가, 그런게 문제가 아냐. 중요한 건 자기 마음이지..."
"나..., 나는..., 유카를..."
"알아요, 그녀를 좋아하는 거죠? 아무리 속여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어요... 뭐, 만약 다른 남자가 더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면 또 모를까, 그녀도 자기보다 다른 남자를 더 마음에 두고 있다면 말이지만. ...그녀를 좋아한다면, 아무리 괴로워도 그 마음만큼은 소중히 해야죠. 후회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알았죠? ...아무튼 지금은, 마리에를 믿어요, 네?". 미키가 산뜻하게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밖이 정말 추워졌어. 눈이 내리려고 그러나?"
스페어 키로 현관문을 열고 갑자기 유카가 밝은 목소리로 떠들며 집에 들어왔다.
"참 내, 그런 것만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잠깐만 한 눈 팔면 그런 것만 먹구. 어쩔 수 없다니깐~"
유카가 양손에 든 슈퍼마켓 비닐봉투를 싱크대에 올려놓고,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이건 압수"
좌식 탁자 위에 놓인 컵라면을 뺏아 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류지의 "유카!? 집에 돌아갔던 거 아니었어?"라고 하는 질문도 무시. "잠깐만 기다려. 금방 저녁식사 차려줄 테니까"라고 계속해서 밝게 떠들었다. 류지는 유카가 돌아온 것보다, 갑작스런 밝은 모습에 더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의 그늘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부모님 돌아오셨다며?"
"괜찮아 괜찮아, 그런 거 일일히 신경쓰지 마"
완전히 해가 떨어져 수명이 다 된 형광등이 비추는 집 안이 어슴푸레했다. 유카는 부엌의 갓없는 전구를 켰다.
"류지구~운, 오늘 저녁, 요세나베(*주, 寄せ鍋, 고기·생선·조개·버섯·채소·두부 등의 재료를 냄비에 넣어, 국물을 많이 하여 끓이면서 먹는 요리) 괜찮아? 여러가지 재료 잔뜩 사 왔어. 처음엔 다시마를 넣고, 중간에 김치도 넣고, 마지막엔 우동도 넣구, 사누키 우동. 아, 류지군, 김치 좋아했지?"
꽃무늬 원피스에 에이프런 차림으로 부엌에 선 유카는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 류지를 등지고 비닐봉투에서 재료를 꺼내 냄비를 불에 올리고 배추를 씻으며 능숙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짜자~안, 맥주도 사 왔다~. 대출혈이었다니까~. 물론 돈은 안 내도 돼, 내가 계산할께. 계속 류지 집에서 신세진 거 답례하는 거니까, 신경쓰지 마"
"어이, 유카. 정말 괜찮은거야? 나 좀 봐봐"
부엌에 온 류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유카는 "안~돼, 거기 앉아서 TV라도 보고 있어. 류지군은 아무것도 신경쓸 필요 없어. 앉아서 얌전히 기다려요, 금방 만들어 줄께"라면서 방으로 떠밀었다. 침대에 앉히고는, "...그리고, 류지군, 밥 먹고 나서, 응?... 하자, 잔뜩. 야한 짓, 잔뜩 해요. 언제나처럼, 엄청나게 기분좋게 해줄께... 류지군, 많이많이 안아줄께...". 요염한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아아. 알았어"
유카는 다시 부엌으로 가 부엌칼을 손에 들고 쑥갓을 자르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이니까"
조그맣게 중얼거린 그 말은, 물론, 류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픔도, 언젠가부터, 더 이상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등을 동그랗게 말고 이를 악물고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
"...정말, 하나 하나가 비위에 거슬리는 녀석같으니라구. 오늘도 밥은 없다"
지금, 등을 내리치고 있는 건, 뭘까?
평소의 몽둥이가 아닌 것 같았다. 벨트도, 빗자루도 아니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뜨거울 뿐. 등뼈가 삐걱거리고, 살이 타는 것 같았다.
"건방지게 학교는 무슨 학교야. 너같은 녀석따위가, 이 쓰레기같은 놈이, 이 쓰레기! 쓰레기가 뭔 놈의 학교를 간다고 지랄이냐구. 내가 가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그딴 데 갈 시간이 있으면 어디 가서 술이라도 훔쳐 오란 말이야"
그저께의 상처도 아직 채 아물지 않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런 날도 있는거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와 다르게 기분이 매우 안 좋은 것 같았다. 상처가 너무 아려서, 오늘은 목욕탕에 던져지지만 않으면 좋겠다.
참기 힘든 극심한 고통이 그나마 남은 사람이라는 현실감마저 빼앗는다.
"뭐라고 말 좀 해봐.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까 더 화가 치밀어 오르잖냐"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화를 내는 주제에.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어..., 학교 나오라고..."
"말대답하는거냐? 건방진 자식. 뭐야 그 눈은? 반항하는 거냐?"
이거봐, 역시 화내잖아. 위험해, 코피도 나온 것 같다. 다음에 바닥 깨끗이 안 닦아 놨다고 또 트집잡힐라.
"빌어먹을 놈, 이 개같은 자식, 집에 거두고 있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썅놈의 시키, 창녀 새끼 주제에"
야위어 뼈만 앙상한 등에 피가 흥건했다. 벽에도 바닥에도 핏방울이 여기저기 튀었다.
알몸으로 웅크리고 엎드린 소년을 광기에 사로잡힌 남자가 미친듯이 패고 있었다.
발밑에는 술병이 굴러다니고, 술냄새가 지독한 숨을 헐떡이며 생기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썅, 이렇게 패도 뒤지지도 않고"
남자가 옆구리를 세게 걷어차자 조그만 몸이 공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아아...흐으..."
희미한 신음소리가 소년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흰자위가 드러난 소년의 얼굴을 남자의 발이 가차없이 짓밟았다.
"...씨발, 왜 이렇게 꼭 닮았냐구. 하필이면 그 창녀하고 똑같이 생기고 지랄이야"
"아...파..."
"야 이 쓰레기 자식아, 제대로 맞았냐? 아퍼 죽겠어?"
이 자식, 좀 살살 팼더니만 개기기는. 하긴 개길려고 해도 어차피 그럴만한 체력도 없겠지. 벌써 3일째 아무것도 안 먹였으니까.
"임마, 여느때처럼 거기 엎드려서 똥구멍 내밀어. 그 창녀 대용으로 사용해 주마. 밥 먹고 싶으면, 뒤지고 싶지 않으면, 조금쯤은 쓸모가 있어야 될 거 아냐"
남자가 소년의 등 뒤에 무릎을 꿇었다.
"역겨운 피가 줄줄 흐르는구만. 더러운 매춘부 년의 피가 흘러. 씨발, 존나 더러워, 너, 다음에 젖은 쓰레기 내놓는 날에 버려야겠다"
마음은 벌써 오래전에 닫았다.
"으윽... 윽..."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참을 만 했다.
참을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에. 눈을 감고 떠올린다.
그 사람의 얼굴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의 얼굴을.
매력적인 커다란 눈에 긴 속눈썹, 쭉 뻗은 콧날에 얇고 사랑스러운 입술, 그리고 투명하리만큼 희고 부드러운 살결.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부신 미소. 사진이고 뭐고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떠올렸다.
엄마...
어딘가에서 살아 있는 걸까. 정말 살아 있을까. 만나고 싶은데. 만나고 싶다. 만약 만날 수 있다면, 꼭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왜 날 낳았어?"라고...
-버릴거면 차라리 낳지 말지-
-낳지 않는 편이 좋았을텐데-
끈질기다. 왜 이렇게 오래 하는거야. 아직도 하는 거야?
희미해지는 얼굴에 의식을 집중해 다시 애써 떠올린다.
매력적인 커다란 눈에 긴 속눈썹, 쭉 뻗은 콧날에 얇고 사랑스러운 입술, 그리고 투명하리만큼 희고 부드러운 살결.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부신 미소. 유카와 꼭 닮은 얼굴이 상냥하게 미소짓는다.
"류지"
"엄마..."
서로 뻗은 손가락이 막 닿으려고 하는 순간,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갑자기, 흉칙하게, 추잡스럽게, 비틀리고 비뚤어진다.
"류지군, 안아줘..."
"유카!!!"
벌떡 일어나 악몽에서 잠을 깼다. 류지의 스웨터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지옥과도 같았던, 아니, 정말로 지옥 그 자체였던 날들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직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꿈도, 희망도, 목적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나날들.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희망도 없고, 살아갈 기력도 없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런데도 질기게 목숨을 이어온 나날들. 공포와 절망만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옥같은 나날을 버티게 해준 단 하나의 조그만 소망. 어머니를 잃은 지금에 와서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을... 그것만 손에 넣으면, 그토록 바래왔던 그것만 손에 넣으면, 손에 넣기만 하면, 더 이상 악몽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빼앗아 손에 넣었는데, 무엇 하나, 변한게 없었다.
어두운 방 안, 옆자리를 더듬어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없어!?"
시트에 아직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어디...?"
가는 빛이 욕실 미닫이 문 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무슨 짓...!!"
욕조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유카가 뒤돌아 보았다. 경악으로 크게 떠진 눈동자에 류지가 비쳤다. 번개처럼 달려들어 꽉 붙들었다. 오른손 손목을 움켜쥐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내리 눌렀다.
"놔, 놓으란 말야, 이거 놔!"
"그만, 진정해, 유카, 진정해, 바보같은 짓 하지 마"
단단한 체구 아래 깔린 유카가 미친듯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꽉 부둥켜 안고 있는 팔 안에서 벗어나려고 발로 격렬하게 걷어차고, 자유로운 왼손으로 류지의 어깨를 마구 때려보지만 류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용서를 빌거야, 이렇게 해서라도 용서받을거야, 방해하지 마!"
"그만, 제발 그만해"
"부탁이야, 놔 줘, 제발"
"유카!"
"더이상 견딜 수가 없어.. 제발.. 부탁이야"
네가 당한 일을, 증오를, 네가 다시 반복하는 것 뿐이잖아!... 사츠키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제발! 그만 좀 해!!!"
흐느껴 울면서 몸부림치던 유카의 몸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제발... 죽게해줘..."
오른손에서 과일 나이프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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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치씬 하나도 없는 야설따위, 쳇-.-;;
그나마 하나 있는게 류지의 비역질 씬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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