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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椿 오니츠바키 3-10 (제3부 최종화)


제10화


그 집은 시간이 멈춰 있었다. 계속 비워져 있던 집 특유의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싱크대에 널부러져 있는 더러운 컵과 그릇, 먼지가 가득 쌓여 최근 아무도 사용한 흔적이 없는 책상. 이 집에서 보낸 즐거운 시간, 따뜻한 온기, 그 모든게 풍화되어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는... 이제, 내가 있을 장소가... 아냐..."
커튼이 쳐진 실내가 어두컴컴했지만, 유카는 불을 켜지 않고 옷장을 열었다. 아래서부터 홀수번째 서랍엔 아마노, 짝수번째 서랍엔 유카의 옷이 수납되어 있었다. 계절이 지난 봄 여름 옷은 이미 예전에 자신의 집에 옮겨다 놓았다. 당장 입을 스웨터라든가 속옷따위를-물론 속옷착용은 금지였고 지금도 입고 있지 않았지만- 보스톤백이나 봉투에 담아 안아들고 도망치듯 곧장 현관으로. 칫솔도, 밥공기도, 슬리퍼도, 일용품 종류도 전부 정리했다. 이 집에 이제 내 물건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네... 잊은 물건이 없나 잠시 뒤돌아 보았다. 그 순간, 가슴 속이 날카롭게 아려와 시선을 발밑으로 떨구었다.
"그런거... 가져갈 자격이... 있을 리 없잖아..."
사이 좋은 소꿉친구에서 연인으로, 쭉 소중하게 가꾸어 온 두 사람의 추억만을 남기고 복도로 나와 문을 닫고 열쇠를 잠궜다. 이걸 떼어내면, 그러면, 나는..., 그때부터, 나는... 유카는 키홀더에서 여벌열쇠를 떼어내며 "이젠 안녕...". 그렇게 중얼거리고 문 옆의 우편함 안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딸그락... 슬픈 소리가 울렸다.
"눈물도... 나오질 않네..."
마음을 닫는다... 두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연인의 집을 등지고 유카는 걷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유카에요... 네... 지금부터... 네... 잠깐 집에 들렸다가, 그리고나서... 네... 저녁식사 재료, 사가지고... 아... 그래요?... 알았어요... 네... 네... 류지군 말대로 할께요... 네... 짐만 갖다두고 바로... 알았어요... 바로 갈께요..."



"연구실에 돌아가면 자료 정리하고, 그걸로 올해는 끝내요"
"네..."
"정말 수고 많았어요, 정말 애썼어요. 아마노군, 내년엔 드디어, 당신의 연구성과를 계기로 한 프로젝트가 시작돼요.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이 구하고 싶다고 한 사람들을 위해서, 점점 더 힘들어지겠지만 힘내요. 기대하고 있으니까"
"네. 열심히 하... 앗!"
"왜 그래요!?"
황혼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 가로수길, 정문에서 이학부 연구동을 향해 걷고 있었다. 올해의 마지막 협의를 끝내고 프로젝트도 당분간 중단. 연초부터 정식으로 출범해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아마노의 시선을 따라 마리에의 눈도 뒤쫒아 움직였다. 서로 바짝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 걸어가던 사람의 그림자가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이, 바보카즈야. 변함없이 재수없는 낯짝이네"
이것 보라는듯이 유카의 가느다란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아마노 앞에 멈추어 섰다. 유카는 얼굴을 돌려 숙인채로 긴 머리카락을 방패삼아 아마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후드가 달린 다운 쟈켓에 맨다리를 그대로 드러낸 미니스커트, 핀힐 쇼트부츠. 진한 향수냄새. 류지의 취향에 철저히 따른 스타일이었다.
"어이, 안녕하슈?"
류지는 싸가지없는 말투로 아무렇게나 툭툭 내뱉으며 입가를 비뚤이고 마리에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전에, 우리 어디서 봤던가? 헤헤, 아! 이녀석, 내 애인이라우. 야, 유카, 너도 똑바로 인사해야지. "전 애인"의 소중한 선생님이잖아"
"...류지군의 ...애인인 ...모리사키 ...유카 ...입니다 ...안녕하세요..."
류지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아래를 쳐다보며 조금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인사하는 유카의 인형같은 모습에 마리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제 막 보강이 끝나서말야, 지금부터 "애인"하고 밥먹으러 갈건데. 바보카즈야도 같이 갈래? 아니지, 어차피 연구하느라 바쁘겠지? 방해하면 실례지. 나하고는 다르게 영리한 녀석이니까, 네 머리속엔 항상 연구, 연구뿐이지. 다른 건 아무래도 좋은 녀석이니까. 멋져, 아주 멋져요. 존경스러워요. 아무튼,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고해 그럼"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떠는 아마노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류지는 "뭐, 하긴 그 연구 덕분에 말야, 이녀석이 너하고 사귀고 있을 때에도 매일매일 이렇게 거리낌없이 실컷 따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내 집에 들어와 살고 있어. 이녀석 신음소리가 장난이 아니라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니까. 침대가 꺼져라 아침까지 내내 박아대느라 완전 수면부족이야"라고 쉬지않고 지껄였다.
"오늘 아침에도 안아달라고 얼마나 시끄럽게 졸라대던지. 일어나자마자 한 발 진하게 박아줬는데, 아앙 아앙, 어찌나 숨넘어갈듯이 난리를 쳐대는지, 지가 막 엉덩이를 흔들어대질 않나. 조수까지 뿜어대면서 한번 갔는데도 좀더 좀더, 또 해달라고 보채지 뭐야. 도대체가 지치지도 않아요. 뭐 결국, 꼭두새벽부터 대체 몇번을 갔는지"
"어머나..."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아마노를 깔보고 매도하는 재미에 흠뻑 빠진 류지의 말을 끊고, 마리에가 유카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흐~음, 요샌 이런 패션이 다 유행인가 보네. 취향도 참 후지긴"
"뭐라고?"
검게 반짝이는 가죽 목걸이에 달린 작은 자물쇠를 톡톡 건드리며 "...이런 거 달아놓지 않으면 겨우 애인 한명조차도 잡아두지 못한다는 걸까나. 도망가버릴까봐 불안해서 그러나? 하여튼, 요새 남자애들 참 형편없네..." 마리에의 도발에 류지가 "당신, 당신말야, 전부터 당신, 굉장히 거슬리는 거 알아?", 바로 걸려들었다.
마리에는 여유만만한 태도로 "어머나 신기하기도 해라. 나도, 당신같이 여자 마음도 모르고 까부는 남자 아이는 너무 너무 싫은데". 씨익 미소까지 지어보인다.
"까,까불고 있어, 썅!"
마리에에게 확 달려나가려고 하는 류지의 팔을 유카가 힘껏 잡아 말렸다.
"류지군..."
"야, 유카, 이거 안 놔?"
"류지군, 지금 안 가면... 시간, 늦어버려요... 빨리, 가요..."
여전히 조금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말투였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어쩔 수 없지. 어이, 유카, 정문에 가서 택시 잡아놔"
"...네. 알았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멀어져가는 유카를 바라보던 류지는 잠시 마리에를 쏘아보더니 곧이어 아마노에게 시선을 돌리고 "바보카즈야, 오늘 저녁 7시, 가부키쵸에 있는 쿠로바라 스낵바로 와. 저 계집, 나한테서 떨어질 수 없게 차분히 시간을 들여 제대로 교육시켰거든. 그 성과를 보여 줄께. 아직도 저 계집 단념 못했지? 그렇다면 안 오고는 못 배기겠네" 귓속말로 속삭이고는 쭈글쭈글한 코트 주머니에 종이조각 하나를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마리에를 향해 "당신말야, 선생, 말 조심하는 편이 좋을거야. 자기 몸이 소중하다면 말이지". 양아치같은 협박을 지껄이고는 두 명에게서 멀어져갔다.
"뭐라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네. 오늘은 이걸로 끝내죠"
기가 막힌 얼굴을 한 마리에도, 그렇게 말하고는 내내 말이 없는 아마노를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유카의 잔향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아마노만 그 자리에 남겨졌다.



"사츠키!?"
자물쇠가 잠긴 연구실 문 앞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있던 사츠키가 얼굴을 들었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선생님"
"뭐 하는거야? 이런 곳에서? 계속 기다린 거야?"
마리에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매달려 애원하는 표정으로, "선생님... 도와주세요... 제발... 선배를... 도와주세요...". 사츠키답지 않은 가냘픈 목소리였다.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요"
서둘러 난방을 켜고 사츠키를 소파에 앉힌 마리에는 맞은 편 자리에 마주보고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츠키였다.
"타카쿠라선생님, 부탁드릴께요, 아마노선배를, 모리사키선배를 도와주세요"
안절부절 어쩔줄 몰라하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아마노선배에게 힘이 되어 주세요, 이대로는 모리사키선배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그래요..., 이대로는 확실히 곤란할 것 같네"
마리에는 바로 조금 전에 만났던 유카의 무표정하고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한 얼굴, 빛이 사라진 텅 빈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몰려서는... 마음이 무너지기 직전일지도 몰라...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너무 늦어버릴지도...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뭐가요?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나요? 선생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없나요? 나 이젠, 어쩌면 좋아..."
무릎 위로 꽉 쥔 사츠키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그녀를, 그 사카키사와라는 남자애한테서 힘으로 떼어놓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선생님!"
사츠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두 사람이 어떻게 되든 말든? 두 사람이 너무 불쌍해요". 마리에에게 쏟아낸 비난의 말,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사츠키 자신을 난도질해 버렸다. 불쌍하다니... 내가 할 말이 아니잖아... 내가 저질렀잖아... 돌이킬 수 없는 짓을...
"그래요! 알았습니다. 애초에 내가 잘못한거니까, 제가 알아서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이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잔뜩 흥분한 사츠키를 말리듯 말했다.
"사츠키, 기다려봐요..."
"이제, 기다릴 여유같은 거 없어요"
"나도 말이죠, 금방이라도 어떻게든 해 주고 싶지만, 그렇지만, 그러면 안돼. 억지로 떼어놔 봐야, 소용없어. 그래가지고는 아무 해결도 안 나요. 그렇게 해서는 두 사람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런...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일단 앉아봐요..."
커피를 한 입 마시고, 조금 침착함을 되찾은 사츠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카키사와라는 남자애의 목적, 아마도... 그녀를 아마노에게서 뺏으려고 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자기는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마노군을 괴롭히는 것? 아마노군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아 유린하는 걸로 아마노군을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단순히 그녀를 빼앗는 걸로 끝이 아닐거야. 아마노군 앞에서 빼앗은 그녀를 마음대로 취급하는 모습을 과시하면서 더욱 더 괴롭힌다... 그러니까, 그녀의 고통도 끝나지가 않는다..."
"그,그런..."
"사카키사와라는 아이, 어째서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해?"
사츠키가 고개를 숙인채로 가로저었다.
"아마도, 아마노군에 대한... 원한... 같은 거 아닐까?"
"네? 원한이요!? 원한이라니, 무슨? 선배같은 사람이 남에게 그렇게 원한살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요?..."
"둘 사이의 과거, 뭔가가 있을거야. 사카키사와라는 아이가 아마노군을 심하게 원망할 만한 일이... 아마노군으로서는, 사카키사와라는 아이에게 함부로 거스를 수 없는... 그런 뭔가가, 분명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 뭔가가 어떤건지 알아내기 전엔, 무엇보다도 아마노군이 그 뭔가를 직시하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누구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겠지요... 분명 아무런 소득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모리사키선배를... 나는..."
이번엔 마리에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류지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그 때문에... 그딴 거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모리사키선배를... 내가... 함정에 빠트리는 걸... 내가... 도운거야?..."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오열을 터트리기 시작한 사츠키 옆으로 마리에가 다가갔다.
"미안... 해요... 선배... 미안해요... 나... 나..."
"알았어요. 내가 어떻게든 해 볼께요. 나한테 맡겨. 사츠키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꼭 연락할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조그만 사츠키의 몸을 살며시 감싸안았다.



"여긴 뜨내기 손님, 안 받아"
입장을 거절하는 추레한 스낵의 문 안쪽은 검은 천으로 나뉜 전화박스 정도 크기의 공간 몇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허리 높이의 조그만 구멍으로부터 "안 들려? 뜨내기 손님은 안 받는다니까". 서슬퍼런 목소리에 아마노는 당황해하며 주머니에서 종이조각을 꺼내 안으로 들이밀었다. 오후 7시 개막, 요금 5만엔 선불, 비밀 엄수. 그렇게 쓰여진 티켓.
"네가 류지가 말한 그 친구냐?..., 그럼 할인해서 2만엔이다"
황급히 돈을 지불하면,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무섭게 생긴 남자가 검은 천을 걷어 올렸다.
"여기다..."
어둑어둑한 점내에는 벌써 30, 아니 50명 가까운 남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좁은 가게는 시끌시끌한 열기로 가득차 서로 술을 권하며 이제나 저제나 쇼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스석은 이미 꽉 들어차 있었고, 좌석이 없는 남자들은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거나 벽에 기대거나 하고 있었다.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선 남자는 카운터 바로 앞의 예약석 플레이트가 놓인 둥근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가 네 자리야. 특등석이라구. 아주 제대로 즐길 수 있을거다" 이녀석이 누구길래.. 아마노를 위아래로 한차례 훑어보더니 캔맥주 하나를 건냈다.
"저.. 이제부터 뭐가 시작되는 겁니까?"
"뭐야, 류지가 아무 말 안했어? 하긴 뭐, 보면 알아"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운터 반대 편에 스폿라이트가 비치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충분히 즐겨주십시오!". 손님들로부터 일제히 환성이 울려퍼졌다.
"무슨..."
박수소리에, 킬킬대는 웃음소리에, 기대로 가득 찬 환성으로 가득 찬 점내에서 오직 아마노만이 말을 잃었다. 믿을 수 없었다. 스폿라이트 안에 떠오른 것은 전혀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의 간호사복을 입은 여성.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아이마스크로 눈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틀림없이 유카였다. 긴 머리카락을 목덜미 부근에서 하나로 묶고 있었다. 너스 캡을 쓰고 있는 유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간호사복은 일부러 작은 사이즈를 입고 있어서인지 아름다운 바디라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음란하고 외설적인 요염함이 온몸에 감돌고 있었다. 몸 앞으로, 검은색 가죽 팔찌를 찬 양손으로 그로테스크한 남근완구를 꼭 쥐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조심 발밑을 살피며 카운터 앞 중앙까지 걸어 나왔다.
"지난 번 테니스웨어 차림도 좋았지만, 간호사 차림도 죽이는데!"
"끝내주게 야한 몸매야~ 저 쫙 달라붙는 옷 좀 보라구!"
남자들이 품평하듯 간호사복 코스프레를 한 유카의 몸을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핥듯이 주시했다.
"어이~ 다음엔 루즈삭스에 미니스커트 세라복으로 부탁해!"
"아냐아냐, 차이나 드레스! 새빨간 차이나 드레스로 해줘!"
손님들끼리 다음 리퀘스트로 들끓었다.
유카의 등 뒤에는 류지가 있었다. 손에 든 쇠사슬이 유카의 목걸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가볍게 잡아당기자 철크럭하는 소리가 울리며 유카가 걸음을 멈추었다. 류지의 손을 잡고 카운터에 앉았다. 객석의 남자들 눈높이와 앉아있는 유카의 무릎높이가 정확히 일치했다. 점내는 순간, 기대로 조용해지고, 아마노 옆에 앉은 남자가 꿀꺽 침을 삼켰다.
유카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는 뜨거운 한숨이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개막 전에 이미 몇 차례 류지의 손가락으로 절정에 올라 흥분이 고조된 상태였다. 쇠사슬을 손에 쥔 채로 류지가 카운터 안쪽으로 돌아나와 유카의 귓가에 대고 뭔가 속삭였다. 유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다리를 열었다.
"오오오~"
팽팽하게 긴장된 미각을 카운터 위에서 정면에서 보면 M자 모양으로 크게 벌렸다. 속옷은 물론 입지 않고 있었다. 핑크색 천이 위로 말려올라가 허벅지가 전부 드러났다. 객석 중앙에 진을 친 남자들이 몸을 들이밀며 완전히 드러난 보지를 눈을 부라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류지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짓고 때때로 아마노를 바라보며 만족스레 객석을 둘러 보았다.
"끝내준다... 이녀석, 만지지도 않았는데 벌써 흠뻑 젖었어..."
"하아아..."
손님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에 유카의 신체가 민감하게 반응해 흘러넘친 애액이 카운터 위로 늘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 언제나처럼 시작해"
류지의 말을 신호로, "연인"의 자위 쇼가 막을 열었다.
"아앙.. 하아앙.. 하으윽... 아아, 좋아.. 하아앙.. 아흑.. 하앙.. 좋아"
"그렇게 기분좋아?"
객석에서 터져나온 야유에, "...좋아.. 아앙.. 기분좋아요..." 신음소리를 흘리며 유카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남들한테 보여지면서 자위하는 게 그렇게 기분 좋아?"
"못 참겠어요.. 굉장한 걸요... 아아, 하윽! 좋아요..."
오른손으로 바이브를 넣었다 뺐다 할때마다 찔컥찔컥 축축한 음란한 소리가 좁은 점내에 울려퍼지고, 왼손으로는 간호사복의 단추를 풀러 아름다운 유방을 꺼내 물컹물컹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어이, 손님들이 잔뜩 보고 있어, 네가 음란하게 느끼고 있는 모습을"
"싫어.. 하아앙.. 흐읍.. 말하지 마.. 아앙... 좋아.. 안돼... 느껴버려.. 보여지고 있는데.. 느껴버려.. 안되는데... 하아앙.. 아아아.."
"어디가 어떻게 느껴지는지 제대로 설명해"
"..아아... 네,네에... 아아.. 거기.. 뜨겁게 달아올라서.. 멈출수가 없어.. 손이 멈춰지지가 않아.. 하아아.. 보여진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저리고.. 하아아.. 좋아... 이런거.. 이런거.. 굉장해.. 이제.. 이젠.. 못 참겠어.. 벌써.. 와.. 와버려... 아.. 하으윽!"
"어이, 평소처럼 그거, 해봐"
손님의 리퀘스트에 응해 유카는 "아아.. 그건.. 부끄러운데.. 부끄러운데..". 달콤한 음색으로 중얼거리며 보지 안을 바이브로 쑤셔대는 오른손의 움직임은 그대로, 유두를 찝어 비벼대던 손가락을 떼더니 탐스러운 유방을 아래쪽에서 쥐고 위로 들어올렸다. 얇고 사랑스러운 입술 사이로 혀를 길게 내밀어 자신의 젖꼭지를 핥기 시작했다. 이마에 희미하게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할짝할짝 유두를 열심히 혀로 핥던 유카가 "아아앙!.. 하아아아앙...". 갑자기 염성의 옥타브가 높아졌다. 이,이런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 모두에게 보여지면서, 느껴... 보드라운 피부를 핥듯이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이 유카의 마음을 애무하며 찌릿찌릿한 전류로 이성을 마비시켜 갔다. 치욕의 노출 자위에 피학의 불길이 단숨에 타올라 오른손의 쑤셔대는 움직임도 점점 더 격렬해졌다.
"하아아아앙!"
꿈틀꿈틀, 또 꿈틀꿈틀, 상반신을 수차례 경련하며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고개를 떨어트리자 긴 머리카락이 젖가슴 위로 흘러내려 예민해진 젖꼭지를 살살 간지럽힌다.
"죽이네... 저 년, 지가 지 빨통을 빨면서 가버렸어..."
조용해진 점내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운터 위에 옆으로 쓰러진 유카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조금씩 호흡을 정돈하고 있었다.
"저런 미인이 이런 짓을... 믿기지가 않는걸..."
양복차림의 샐러리맨 같아보이는 손님이 "이봐, 너 처음부터 이거 보러왔지? 좀 빨리빨리 가르쳐달라구, 친구잖아 우리들. 혼자만 좋은 구경하면 좋냐?", 옆에 앉은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그게 처음엔 말야, 엄청 싫어하고 있었어, 울고불고 하는 그녀를 점원하고 억지로 붙잡고는 강제로 가게 했다니까. 정말이지 죽이는 광경이었지. 무슨 약속을 깨려고 했다고 그 "벌"로 하는 거라고 그랬지 아마? 그리고는 한달도 안돼서 이렇게 바뀐거야... 저 여자, 꽤나 조교된거 같애, 저 남자한테"
"저 남자?"
"저기 여자 뒤에 있는 남자. 저기, 쇠사슬 쥐고 있는 젊은 남자 말이야. 저 여자, 저 남자 노예야"
"...이야~ 노예라구? 진짜?"
"진짜인거 같애. 저번에는 저 남자 발가락을 하나하나 정성껏 빨더라니까. 저 여자가 카운터 위에 알몸으로 웅크리고 앉아서 발가락 빨던 모습만으로도, 나, 5만엔은 완전 거저라고 생각했다니까"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하아... 좋겠다. 나도, 저렇게 죽이는 여자 노예 하나 있었으면"
"무리야 임마, 네 주제에"
류지가 쇠사슬을 쥔 채로 카운터 위로 올라갔다.
"야, 드디어 실전이야. 시작한다"
"언제까지 자고있을거야? 모두들, 학수고대하고 있잖아"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유카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카운터 위에서 쇠사슬이 철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갖고 싶어... 갖고 싶어... 갖고 싶어요..."
류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쇠사슬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유카가 엎드려 기면서 "갖고 싶어..."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간호사복은 완전히 흐트러져, 훤히 드러난 유방이나 허벅지가 뜨겁게 달아올라 옅은 복숭아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점내는 후끈 달아올라 사우나탕에 들어온 것처럼 뜨거워져, 손님들의 얼굴에도 유카의 매끄러운 피부에도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아이마스크로 가리고 있어서 본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드러난 얼굴만으로도 틀림없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임이 분명한 젊은 여성의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느껴 몸부림치는 치태에 손님들 모두가 정신을 빠앗기고 있었다.
"뭐가 갖고 싶은데?... 똑바로 말해봐"
"자지입니다..."
손으로 더듬더듬 찾은 류지의 다리 사이에서 커다랗게 솟아오른 자지를 꺼냈다.
"이거, 이게 갖고 싶어요... 자지... 넣고 싶어요..."
넋을 잃고 녹아내리는듯한 교성으로, "자지, 넣고싶어..."라고 매달렸다.
류지는 악의로 가득찬 미소를 띄우고 "그래? 그렇게 넣고 싶으면, 여기 있는 손님들 앞에서 맹세해라... 그 남자, 네 그이..., 전부 잊고, 버리고..., 몸도 마음도 내 여자가 되겠다고..."
"뭐!? 저 여자, 애인이 따로 있어?". 객석이 술렁거렸다.
"어이 어이, 지 여자가 이렇게 조교되고 있는 거, 그이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니, 이야~, 불쌍해서 어떡하냐"
손님들 입장에선, 류지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따위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 비싼 돈을 지불한 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한 최고의 연출이었다. 아름다운 여자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배덕적인 말을 읖조리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로 장내는 흥분으로 터질듯 했다.
"여기 있는 손님들이 증인이야. 갖고 싶으면 맹세해. 내 여자라고, 조금 전에 알려준 대로, 한 글자도 빼먹지 말고 맹세해 봐"
그러면서 류지는 유카의 귓가에 대고 "사실 잘 알고 있잖아, 너 스스로 배신하고 또 배신해서... 그런 네가 돌아갈 곳은 이미 나 밖에 없다는 걸". 급소를 찔렀다.
"아아..."
유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눈꼽만큼도 주저하지 않았다. 류지의 두툼한 가슴팍에 기대 아이마스크를 한 얼굴을 들어올려 류지의 뺨을 양손으로 사랑스러운듯 감싸고, 수많은 손님들이 가슴조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분명하게 천천히 맹세했다.
"잊겠습니다... 전부, 그이를, 잊겠습니다... 버리겠습니다... 전부 다, 버리겠습니다... 내 모든 것, 몸도 마음도 전부 다,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 전용의 여자가 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당신이 내 전부입니다... 나는, 당신만을 위한 여자입니다..."
"좋아좋아..., 잘 했어"
류지는 상냥하고 다정하게 찰랑찰랑한 흑발을 어루만졌다.
만족스럽게 "넣게 해줄께. 오늘은 상으로, 네가 너무나 좋아하는 내 정액을 안에다 잔뜩 싸 줄께"라고 말했다.
"아아아아아... 들어와, 들어오고 있어..., 뜨겁고.. 단단해..., 이걸 갖고 싶었어..."
그 자리에 있던 50명 가까운 남자들이, 이 지나치리만큼 음란하고 아름다운, 장렬할 정도로 추잡한, 요염한 육체가 저속해져가는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다. 모두들 숨을 멈춘 채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사람도 없었다.
"망가져버려.. 이상해져버려.. 죽을 거 같애....!!!"
대면좌위로 류지 무릎 위에 앉아 질척질척하게 젖은 보지로 커다란 자지를 깊숙히 삼켜 단단히 조이면서 조그만 히프를 상하좌우로 음란하게 흔들고 있었다.
"봐요, 보세요... 음란한 나를, 부끄러운 나를, 모두들 봐요....!!!"
팔을 류지의 등에 돌려 힘껏 껴안고 류지의 입술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류지가 당황할 정도로 깊숙히 혀를 집어넣고 격렬하게 입 안 곳곳을 휘저었다. 가끔씩 류지의 입 밖으로 나온 유카의 혀는 류지의 타액을 듬뿍 머금고 있었고 유카는 그때마다 맛있게 류지의 침을 삼켰다.
"필요없어.. 이제 아무것도 필요없어.. 이거, 이거만 있으면.. 자지만 있으면 다른건 아무것도 필요없어..."
손님들을 기쁘게 하는 대사도 철저히 가르쳐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단정치 못한 말이 차례로 입에서 터져나오고, 그런 식으로 확실히 몸도 마음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쾌락의 늪에 잠겨갔다. 류지의 손이 비비고 잡아당기는 유방이나 뜨거운 자지에 꿰뚫린 보지에서 마약과도 같은 육열의 불길이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가-가-가-가-가---, 가버려!!... 이제 안돼... 나 죽어버릴거 같애!!...."
주름투성이가 된 간호사복이 땀과 타액으로 흠뻑 젖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갑자기 몸이 거세게 경련하더니 등이 활처럼 뒤로 크게 젖혀지고 시선이 공중으로 향했다. 발가락을 한껏 오무리고 밀려드는 쾌락의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갔다.
"싼다! 잔뜩 안에다 싸줄께! 자궁으로 맛보라구"
반라로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유카의 리듬에 맞춰 류지가 아래에서 밀어올리는 움직임을 격렬하게 더했다.
"히이.. 히익.. 히이익! 하으.. 하아악! 날아가.. 하아아.. 아아.. 하늘로 날아갈거 같애.. 하으으으윽!!"
"그래 그래! 임신해라, 임신시켜주마!"
류지의 등에 손톱을 세우고 미친듯이 매달렸다. 민감한 클리토리스를 부벼대는 상하운동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부터 너스 캡이 벗겨져 카운터 아래로 떨어졌다. 땀방울을 이리저리 흩날리며 미쳐 날뛰고 있었다.
"임신시켜줘, 아기, 하아앙! 아기 갖게 해줘! 가,간다! 가! 하으윽! 하윽!"
비명을 지르며 절정에 달하면, 실이 끊어진 꼭둑각시처럼 풀썩 카운터 위로 엎어졌다. 황홀감에 젖어 몸 안을 가득 채운 충족감으로 행복한 표정마저 띄운채 의식을 잃고 쓰러진 유카의 보지에서 하얀 정액이 거품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제나 밝고 적극적이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고집불통, 하지만 사실은 외로움을 많이 타고 응석부리기 좋아하는, 아마노가 알고 있던 유카는 거기 없었다. 거기 있는 것은 열락에 미친 한 마리의 발정난 암캐에 지나지 않았다.
나비넥타이를 맨 점원에게 안겨 유카가 백스테이지로 사라지자, 한 중년남자가 류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저 여자하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하게 해줘. 도,돈이라면 얼마든지 낼께. 부,부탁해"
류지는 "장난하지 마. 저녀석은 내 여자야. 다른 놈이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게 할 거 같애? 왜, 구경만 하는 걸로는 돈이 아까워?"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이런 죽이는 여자가 실제로 하는 모습, 어디서도 못 보지..."
"알았으면, 냉큼 꺼져. 오늘은 이걸로 끝이야"
폐점 후, 이젠 완전히 열기가 식은 점내 박스석에 무서운 인상의 남자, 류지, 유카 세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유카는 등이 훤히 드러난 진한 주홍색의 미니 원피스 드레스로 갈아 입고 맨발에 옷과 같은 색깔의 하이힐에 금발찌를 하고 있었다. 투명하리만큼 새하얀 긴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상체는 류지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고 있었다. 목걸이에 연결된 쇠사슬은 여전히 류지가 잡고 있었다. 유카에 대한 소유권을 과시라도 하듯,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쇼가 굉장히 평판이 좋아서, 매상이 배로 늘었어. 오늘도 손님 엄청나게 많이 들었고. 정말이지 다 류지 덕분이야. 고마워"
"아니오, 마스터한테는 옛날에 신세진 것도 많으니까요"
"그런 말 들을 정도로 잘해주지도 못했는데. 뭐, 일단 건배하자, 건배"
두 사람이 비운 글라스에 곧바로 유카가 익숙한 몸짓으로 맥주를 따랐다. 술자리에서의 "매너"까지 확실히 교육받고 있었다.
"어이, 고마워. 자네도 사양하지 말고 마시지 그래"
유카가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글라스를 입에 대었다. 맛같은 건 전혀 모르지만.
남자가 조용히 바지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류지 앞에 두었다.
"얼마 안돼서 미안하군, 류지, 네 몫하고, 네 애인 몫이야. 넣어 둬"
류지가 바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만, 받을 수 없어요. 마스터의 마음만 받을께요"
"왜 그래? 류지, 너 최근에 아르바이트할 시간도 부족하다면서, 돈 필요하다고 했잖아"
고개를 갸웃하는 남자에게 류지가 봉투를 되돌려 주었다.
"나, 유카의 몸을 팔아서 돈벌이할 생각은 없어요. 사람들한테 보여지면서 섹스하면 이녀석이 좋아하니까, 아무튼 플레이의 일환같은 거에요. 우리도 즐거웠으니까, 그걸로 충분해요"
"...그래? 뭐, 굳이 그렇다면야. 쇼는 그럼 계속 부탁해. 아 그렇지, 아가씨, 우리 가게에서 일하지 않을래? 아가씨가 딱 카운터에 서 있기만 해도 손님 엄청나게 몰릴텐데. 아르바이트 급료는 원하는대로 주지"
"에..."
류지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남자의 부탁을 단번에 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류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승낙할 수도 없고, 물론 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대답하기 곤란해진 유카가 류지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마스터, 좀 봐줘요. 유카는 내 여자라구요"
남자의 제안을 강하게 거절하고 맥주를 단숨에 비우는 류지에게, 남자가 "류지 너... 진짜로 반하기라도 한거냐?". 무서운 인상이 누그러지더니 쓴 웃음을 지었다.
"아!!"
갑자기 안색이 변한 류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농담한 거야, 임마"
그대로 황급히 가게를 나서는 류지.
"어이, 류지, 어디 가냐?"
"도시락이요, 배가 갑자기 고파서 편의점에 좀 갔다 올께요"
"...저 자식"
좀 당황했었는지 곤란해하며 머리를 긁는 남자의 빈 글라스를 유카가 자연스럽게 채운다.
"아, 고맙네. 그러고보니 자네하고 이렇게 둘이서만 얘기하는 건 처음이군. 항상 류지하고 함께 있었으니까. 그래, 그런거였군. 류지가 그렇게 둥글둥글해진 것도, 다 자네 덕분이었나. 그 류지를 자네가 변화시킨거였어..."
자신의 말에 스스로 납득한 것처럼 "그래, 그래, 그런거였어...". 남자가 몇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네도 참 어처구니없는 남자한테 찍혔구만... 저녀석, 지가 반한 여자한테 애인이 있든말든 신경도 안 쓸 놈이지. 갖고 싶은게 있으면 힘으로라도 뺏는 놈이니"
류지군이 나를!? 설마... 그런 바보같은 말이 어디 있어... 갑자기 떠오른 의문도 머지않아 금새 흐릿하게 안개가 낀 머리속에서 사라져 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래...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유카는 가만히 거품이 이는 글라스를 바라보았다.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 뭐든지 물어봐"
"류지군을 오래전부터 알고 계신거에요?"
"그렇지"
술이 꽤 올랐는지, 남자는 완전히 기분이 풀어져 말이 많아졌다.
"저녀석, 열 네살 때, 이 가게 위에 2층 방에서 반년 정도 살았었지. 어디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하더라구. 뭐 지낼 곳도 없고, 공갈, 절도, 도박, 뭐 이런저런 푼돈을 모아서 여기저기 전전하고. 그 무렵에 저녀석, 무슨 미친개가 따로 없었지. 우리같은 사람들도 섬칫할 만큼 살벌한 눈을 하고 있었어. 상대가 몇 명이든지, 그게 야쿠자건 뭐건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철저하게 때려눕혔으니까. 그러니 금새 조직 눈에 띌 수 밖에 없었지. 그렇게해서 나하고 여기 건물에서 같이 지내게 된거지. 아무튼 그땐 인간이라면 죄다 증오하는 그런 느낌이었어... 그 무렵엔 솔직히 나도 무서워서 저녀석하고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었으니까. 그러다 어느날 조직의 물건을 옮기다 경찰한테 체포되서 그 후로는 볼 수가 없었지. 그런데..."
남자가 유카쪽으로 몸을 돌렸다.
"올해 여름 거의 끝자락이 다 되서, 갑자기 저녀석이 여기 나타난 거야. 5년만이었지. 얼마나 놀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완전히 분위기가 변했지. 말도 잘 하고, 게다가 W대 학생이라고 하더라구. W대라면 엄청 대단한 일류대라던데. 기겁할 정도로 놀랐다니까. 그리고는 일주일에 한 두번씩 여기 와서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라든지, 수업이라든지,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면서 떠들어대고. 그리고 항상 말하는 거야. 굉장히 좋은 여자가 있대. 그 여자 얘기를 할 때면 아마 저녀석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굉장히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어.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 그게 자네, 바로 자네였어"
믿을 수가 없어서 유카가 뭔가 되물으려고 했을 때, 남자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평소의 위압적인 말투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말야, 자네 애인... 쭈글쭈글한 코트를 입고, 되게 성실하게 생긴 놈이지?"
유카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드리우고, 표정이 굳어졌다.
"입다물고 있을까도 했지만,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을것 같아서. 아까 가게에 왔었어. 류지 친구라니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랬나... 하긴... 일일히 알려줄 필요도 없겠지만, 그 애인은 어서 잊는게 좋아. 그 편이 그 애인한테도, 자네한테도, 차라리 나을테니까"
"나같은 여자가... 애인은 무슨... 그런거 없어요"
남자가 유심히 유카의 표정을 살피지만,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유카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마스터, 오댕 사 왔어". 류지가 돌아왔다.
"오오, 고마워. 그럼, 새로 술병 하나 더 딸까?"
"...아,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유카가 도망치듯 카운터 안쪽으로 달려갔다.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한참 살펴보고 있던 마리에가 열린 문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 거기 좀 앉아 있을래요?". 상냥한 음색으로 맞았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 연말이라 이학부 연구동에도 여기를 제외하면 불이 켜져있는 방은 하나도 없었다. 과연 제아무리 씩씩한 마리에라고 해도, 어른의 색향과 소녀의 귀여움을 겸비한 아름다운 얼굴이 지나친 피로로 힘든 기색이 완연했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요. 곧 끝나니까"
애용하는 안경을 벗어 던지고 소파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 아마노는 어깨가 축 쳐져 소파에 힘없이 찌그러져 있었다.
"아마노군..."
마리에는 백의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고 블라우스와 감색 스커트 차림으로 아마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마노군, 돌아올거라고 생각했어... 나한테 와 주었네... 날, 필요로 해 주었네요..."
아마노의 어깨에 팔을 돌려 꼭 껴안았다. 마리에의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선생님... 나..."
살며시 머리를 가슴쪽으로 끌어당겨 따뜻함을 전해주려는듯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이제, 나... 안돼... 유카를...". 아마노가 스러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가 왜 그래요. 그런 약한 소리나 하구"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아마노의 턱을 들어올렸다. 망연자실. 절망에 빠져 기력도 전부 사라져버린 여윈 얼굴을 응시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얘기해 줄래요?..."
이렇게 될 때까지, 그렇게까지 하면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되는거야?... 어째서 그러는거야... 당신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거야?... 가만히 아마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모른 척 했어... 벌...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어서... 유,유카까지... 희생당하고... 더이상... 나... 살아있을... 이젠... 읍, 으읍!?"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아마노의 입술을 마리에의 입술이 덮쳐 막았다.
"서... 선생님!?"
"됐어요, 이야기는 있다가, 집에 가서 듣기로 해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아마노의 귓가에 대고 "지금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당장은, 힘든 일 전부 잊게 해줄께... 자, 눈 감아요..."라고 속삭였다. 료지에게 들키면 혼나겠네... 벌 받겠지? 풀코스 확정으로... 그런 고민을 하면서 마리에가 또 입을 맞췄다. 뭐, 어쩌겠어?... 아마노군, 위로해 줄께요... "그 때", 난 아무것도 해 줄수가 없었지... 마리에의 마음 속에서 첫사랑의 얼굴이 아마노와 겹쳐졌다. 그래요, 이번엔 내가 꼭 힘이 되어줄께요... 긴 머리카락이 사르르 아마노의 어깨 위로 흘러넘쳐 희미한 샴푸 향기가 감돌았다. 수염으로 까끌까끌한 뺨을 마음껏 어루만지고 혀를 입 안으로 집어넣으면서 소파 위로  두 사람의 몸이 천천히 쓰러졌다.



"저기, 저기, 그거말야, 들었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친숙한 써클 후배의 목소리였다.
"모리사키선배, 그동안 계속 양다리 걸치다가 글쎄, 여태까지 교제하고 있었던 그이를 뻥 차버리고 지금은 사카키사와군하고 동거중이래"
유카는 류지의 연내 마지막 보강 수업때문에 캠퍼스에 와 있었다. 지금 강의가 한창이라 어디 특별히 있을 곳도 없고, 그래서 학생식당에 앉아 잡지를 넘기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참이었다. 트레이드마크였던 포니테일을 하고 있지 않은 탓도 있고, 게다가 류지가 명령한 대로 오늘 아침에 흑발을 라이트 브라운으로 염색한 탓도 있어서 후배들은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성이 이 뒷담화의 당사자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들었어, 들었어. 근데말야, 모리사키선배, 사카키사와군하고 교제한 뒤로 완전히 사람이 변해버렸어. 전에 둘이서 걸어가는 거 봤는데, 진짜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에다가 악세사리도 잔뜩 붙이고. 너무 변해버려서 깜짝 놀랐지 뭐야"
"그렇게 성실해 보이던 선배도, 남자 하나로 싹 변해버리는구나. 아.. 어쩐지 좀 싫어진다"
"대체 사카키사와 어디가 그렇게 좋은거야? 뭐, 확실히 근사하게 생기긴 했지만, 소문이 장난아니던데. 여자애 막 데리고 놀다가 금새 차버린다든지. 엄청 심한 짓도 막 한다던데... 역시 남자보는 눈은 제대로 길러놓지 않으면 큰일난다, 뭐 이런 교훈인가?"
"아하하하! 맞아, 맞아. 전 애인도 참 안됐지 뭐야"
"그러게. 나, 그 사람 참 괜찮던데, 뭐랄까, 상냥해 보이고, 성실할 것 같고, 바람같은 거 절대 안 피우고 엄청 소중히 해줄거 같잖아"
"분명히 그럴지도. 근데, 전 그이, 완전 불쌍했다니까"
"어? 뭐!? 만난 적 있어?"
"전에 써클 부실에서, 모리사키선배 찾아왔었거든. 있잖아, 양다리 걸치고 나서부터 전혀 연습도 안 나오고 출석도 안하고 그랬잖아. 그런데 그이는 아무것도 몰랐나봐. 자기 애인이 양다리 걸치고 있는것도, 써클에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것도. 세상에, 그때, 얼마나 놀라하던지"
"모리사키선배, 그런 사람이었구나... 나, 그 사람, 진짜 동경했었는데 완전 실망이야"
"겉모습만 꾸미고 있었던거야, 그 선배. 맨날 사람좋은 얼굴로 청순한 척 하고, 아주 팔방미인이 따로 없었다니까, 설치고 다니는게"
무책임한 소문이 사람의 마음을 가차없이 후벼판다.
"그게 다가 아니래, 모리사키선배. 신쥬쿠에서 호스테스 한다더라"
"지인짜!?". 다른 네 명이 과장되게 비명을 지르며 놀란다.
"진짜인거 같아, 3학년에 아츠시선배가 목격했대. 이런저런 풍속점이 잔뜩 몰려있는 빌딩에 출입하더래"
"와... 끝장이다 끝장, 왠일이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얘, 저기 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학생식당 입구로 들어서는 류지를 발견하고 후배들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 어머, 이쪽으로 오잖아?..."
"어이, 유카"
"에!?"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던, 갈색 머리의 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일어서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후배들이 모두 절규했다. 긴 속눈썹에 진한 메이크업, 몸에 딱 달라붙는 얇은 스웨터, 쭉 뻗은 각선미를 강조하는 타이트 미니에 9cm 하이힐. 학생식당에 앉아있던 학생들의 시선을 일순간에 잡아끄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미모의 여성. 바로 유카 본인이었다.
"기다리게 했군"
"아니에요, 괜찮아요"
유카는 마치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 류지에게 기대 걷기 시작했다.
여기도, ...이제, 어디에도... 내가 있을 장소는... 없는거야... 이젠 안녕...
"...저기"
정문으로 향하는 가로수길, 갑자기 유카가 멈춰서며 말했다.
"...나에겐, 이제 류지군밖에 없어"
"그래? ...그럼, 지금 여기서 나한테 키스해 봐"
평소보다 사람이 적다고는 해도, 누구를 만날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유카는 류지의 목에 팔을 돌리고 류지 앞에 매달렸다. 길게 뻗은 겨울의 그림자가 하나가 된다.



나(*주, 俺, 여기서 나는 남자, 즉 류지입니다)는,
이제 더이상 외톨이가,
아...,
냐.

--------------------------------------------------
갑자기 시간이 여유가 생겨, 후닥닥 달렸습니다.
이걸로 3부도 끝났군요.
이제 4부 몇 편하고 에필로그만 남았습니다.
이제 슬슬 마리에 누님이 마각(?)을 드러내나 싶었더니... 난데없이 아마노같은 찌질이랑 키스라니요!!! 말도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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