鬼椿 오니츠바키 번외편 / 그녀의 미소는 어디에
번외편 / 그녀의 미소는 어디에
"카~즈야, 기다렸지---?"
참고서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바로 눈 앞에 유카가 흰 입김을 내뿜으면서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함박눈이 쏟아져내릴 것같은 날씨,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도 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유카는 세라복 위에 더플코트와 머플러를 껴입고 조그만 얼굴을 귀엽게 갸웃거리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육계소녀(*주, 미연시 고정출연 기믹이죠. 활발하고 운동 좋아하는 여자아이)답지 않게 추위를 남보다 배는 더 타서, 학교밖에서는 항상 두껍게 껴입는다. 곧죽어도 자기가 추위에 약하다고 인정하는 법이 없지만, 이렇게 뻔히 티가 나서야 어디.
"미안, 추운데 기다리게 해서"
"아아, 아무렇지도 않아. 나도 조금 전에야 왔는데 뭐"
약속 시간에서 15분이 늦었다. 유카는 평소 약속에 늦는 법이 없었다. 이렇게 지각하는 건 드문데.
"화 안났어?"
"아니, 하나도"
"다행이다"
커다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그 웃는 얼굴이 못 견디게 눈부셨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조금 새침스러운 예쁘장한 미소와는 전혀 다르다. 유카가 나에게만 보여주는 무방비한, 애교섞인 귀여운 미소였다.
"자, 추우니까 빨리 가자. 오늘중으로 문제집 끝내기로 하쟎았어?"
"그래, 그래, 그랬었었더랬지"
서류봉투에 참고서를 집어넣고 도서관 입구로 향했다. 계단을 오르는 내 얼굴을 유카가 옆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늦었는지 신경 안 쓰여?"
이번엔 어떤 함정인게냐? 경험상, 유카가 짖궂게 이야기를 걸어올 때는 결말이 그닥 좋지가 않다. 속아넘어가서 놀림당하던지, 웃음거리가 되던지, 뭐 둘 다 그게 그거지만. 이럴땐, 슬쩍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게 최선이다.
"뭐 그닥. 어차피 동아리에서 시누이처럼 이런저런 설교나 늘어놨겠지. 농구부, 이제 은퇴했으니까 조금쯤 얌전히 뒤로 물러나는게 좋지 않을까? 후배들도, 이런 시끄러운 선배가 있으면 연습에 집중이 안 될거라고 보는데 난"
"흐~음, 그런가... 나야 뭐 아무래도 괜찮지만. 근데 말이지, 늘상 후배들한테서 동아리에 가끔이라도 들려달라고 부탁받거든 나. 정말이지, 카즈야는 말하는데 세심함이 부족해. 한 개도 안 상냥하고. 그니까 인기가 없는거라구"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되는거지...?"
이녀석, 다른 뭔가 꿍꿍이가...
"그건 그렇고, 사실은, 사사키군이 할 말이 있다고 불러냈었다아---"
"사사키라면, 2학년의...!?"
한 학년 아래의 야구부 에이스. 우리 학교가 야구강호는 아니긴 하지만, 꽤 진지하게 야구에 열심인 녀석으로, 그럭저럭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저기, 교제해 달라고 고백받았어"
유카가 고백받는 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고백받을 때마다 어째서인지 시시콜콜 전부 나에게 보고한다. ...자랑질엔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얘기.
"불쌍한 녀석. 그녀석, 야구도 열심이고 좋은 녀석 같던데. 이걸로 또 한 명, 유카에게 차인 녀석 리스트에 올라가는건가..."
유카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나도 꽤,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어.. 에?!"
계단을 후다닥 뛰어 올라가더니 뒤돌아 보면서 말한다.
"아직 대답은 안 했어. 사사키군한테는,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거든. ...근데, 카즈야. 어떻게 생각해? 나, 그 애하고 사귀어도 괜찮을까?"
그렇게 말하며 유카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휘익,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 모르겠어"
조그만 목소리로 유카가 내 앞에 노트를 내밀었다.
"전에도 가르쳐 줬잖아. 이럴땐, 이 공식을 써야지"
"그런거였어? 고마워. 정말이지, 카즈야, 공부"만큼"은 잘 하니까 도움이 되네"
"만큼"... 이라는 단어를 미묘하게 강조하는군... 유카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숫자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유카가 농구부를 은퇴하고 나서, 예비학교(*주, 予備校-예비학교. 일본에서 상급 학교(특히 대학교)의 입학 시험 준비를 위한 지도를 하는 교육 시설. 현재는 각종 학교의 하나로 지정됨)수업이 없는 날이면 항상 이렇게 둘이서 도서관에 나와 공부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카의 전속 과외선생님이랄까. 여러가지 이유로 의학부 진학을 포기하고, 나는 생명과학 분야로 진출하는 쪽을 선택했다. W대를 지망하게 되자, 그것을 안 유카도 같은 대학을 목표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릴 적부터 오기로 똘똘 뭉친 녀석이었으니까. 그치만, 단순히 지기 싫어서만은... 아니지... 않았을지도...
"자 이제, 마지막 한 문제..."
붉은 리본으로 묶은 포니테일의 길고 찰랑찰랑한 흑발이 왼쪽 어깨에서 팔로 부드러운 라인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다. 곧게 뻗은 콧날, 맑은 눈동자에 긴 속눈썹, 얇고 아름다운 입술. 초등학교 2학년 때 유카의 옆집으로 이사오고 난 이후로 매일 봐왔던, 이제는 익숙해진 소꿉친구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 그 애하고 사귀어도 괜찮을까?"
만약, 이렇게 같이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면... 이렇게 유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나 말고 다른 남자라면...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안쪽이 쿡쿡 쑤셨다. 유카가 누군가하고 사귄다... 그딴 건 생각도 못 했었다. 유카가 나말고 다른 남자에게 저 무방비한, 애교섞인 귀여운 미소를 보인다... 고...?
"...있잖아, 유카, 저기, 말이야... 아까 이야기말인데..."
조그맣게 말을 걸었다.
"뭐야? 모처럼 집중하고 있었는데"
"아, 미안"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풀 수 있으니까, 쫌만 조용히 해"
"미안, 근데... 아, 미안"
"뭐~언데?"
"유카, 정말로... 그녀석하고, ...사귈 생각이야?"
"그러니까, 어떻게 할까, 생각중이야"
"어떻게 할까..라..."
"카즈야, 신경쓰여? 내가?"
"벼,별로.. 그런거 아냐"
"...흐음, 그러면, 내가 사사키군하고 사귀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그렇지 않아, 그럴리가 없잖아!"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생각이 그대로 말로 나와버렸다.
"죄송한데요, 좀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안경을 쓴 여고생이 짜증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문제도 다 풀었고---, 카즈야, 가자"
"어이, 유카!"
유카는 혼자 먼저 짐을 챙기더니 쪼르르 출구로 나가버린다.
"으으으... 추버라"
"어이, 유카, 기다려"
어깨를 잡는 내 손을 유카가 바로 뿌리쳐버렸다.
"뭐야, 하지마, 무슨 짓이야"
"좀 기다려보라니까"
가로등이 비치는 어슴푸레한 길을 유카가 잰걸음으로 앞서 걷는다. 코트 소매자락을 잡아 멈춰 세웠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유카, 진짜로 그녀석하고..."
"그만해, 나 신경 안쓰인다며? 상관없잖아, 카즈야하고 상관없는 일이잖아"
"상관없어.. 하지만... 아니, 상관있어"
"뭐야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내가 누구랑 사귀든 그건 내 자유잖아"
"그렇긴하지만..."
유카의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유카가 휙 몸을 돌렸다. 그래.. 유카가 누구하고 사귀든 그건 유카 마음이지.. 확실히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하지만, 유카가 누군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그러면...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래, 하지만..."
더 이상 이을 말이 없다. 그렇게 한참 말이 없는 나에게 유카가 물었다.
"근데, 카즈야... 아까 한 말, 그거... 진심?"
"어떤...?"
"내가 사사키군하고 사귀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 해? 아니라고 생각해? 어느 쪽이야?"
"...그건"
가로등이 유카의 포니테일을, 숙이고 있는 목덜미의 솜털을 비추고 있었다.
"카즈야의... 대답이 듣고싶어..."
유카하고는 항상 함께였다. 그게 당연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유카가 없는 일상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쭉... 이대로...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대답해 줘..."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말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싫어... 유카가 그녀석하고 사귀다니, 난, 싫어"
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욱... 우욱.. 욱.. 후욱..."
"유,유카"
우는거야!?
당황해서 유카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우웁... 쿠욱, 쿡쿡쿡... 재밌어--- 카즈야, 진지해져버려서는. 목소리, 떨렸어, 아하하하~"
유카는 마음껏, 웃고 있었다.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입을 크게 벌리고 배꼽이 빠져라 웃기 시작했다.
"하아...!?"
"카즈야, 너무 재미있어. 크크큭, 내가 사시키군하고 사귈리 없잖아, 그 자리에서 딱잘라 거절했어, 당연한거 아냐? 카즈야는, 그것도... 아아, 재미있어.. 웃음이 멈추질 않아"
"뭐야, 뭐냐구"
당했다. 속았다.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결국은 언제나처럼 유카의 장난에 놀아난거잖아... 한심하기는... 이걸로 유카는 당분간 날 놀려먹기에 적당한 소재를 건진 셈이다. 무릎에 손을 짚어 힘이 빠져 주저앉을 것만 같은 몸을 지탱했다.
"도대체, 카즈야, 오늘 카즈야가 먹을 저녁식사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유카"
"그렇지? 카즈야 방 청소도 빨래도, 매일 아침 깨워주는 것도, 누- 구- 에요?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커다란 아기께서 계신데, 한가하게 그이같은 거 만들 여유가 있을 리가 없잖아? 카즈야,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데다, 대학간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나도 함께 가 주는 거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아아, 어쩌다가.. 카즈야같은 아이가 옆집에 살게 된 죄로다가... 히잉~ 난 왜 이렇게 불행할까나, 모처럼 멋진 남자애한테 고백받았는데 말이야"
"...네에, 네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폐를 끼쳐서"
솔직히... 마음이 놓였다.
두껍게 드리운 구름 사이로 보이는 별을 보면서, 나란히 걸었다. 유카는 아직도, 잊을만하면, 아까의 일을 생각해내고 킥킥거린다.
"...그래도, 기뻤어"
"응? 유카, 방금 뭐라고 했어?"
"아, 별로.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며 계속 손에 입김을 불고 있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저런, 장갑, 어떻게 된거야?"
"헤헤, 교실에 놓고 왔나봐"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왼쪽 털 장갑을 벗어 유카에게 건냈다.
"이거 껴. 한 쪽이라도 끼면 덜 추울거야"
"고마워. 하지만 카즈야가 춥잖아"
참고서를 넣은 서류봉투를 오른 손으로 바꿔들고 맨손이 된 왼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러면 괜찮아. 유카도 오른 손은 주머니에 넣으면 되잖아"
"그런가? 역시, 카즈야, 머리만큼은 참 좋아. 얼굴은 평범하지만"
또 시작이다... 유카는 꼭 한 마디가 많다. 일일히 대꾸해봐야 끝이 없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간다. 왼 손에 내 장갑을 낀 유카가 오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자기 코트 주머니가 아니라, 내 코트 주머니에...
"유카!?"
"진짜네, 진짜 따뜻하다... 미안, 내 손은 차갑지?"
내 손을 차가운 유카의 손이 꼬옥 감싸 잡아왔다.
"에.. 아.. 응,응.. 헤에.. 아무렇지도 않아"
"뭐야, 카즈야, 어라라, 혹시 쑥스러운거야!?"
그렇게 말하는 유카야말로, 코에서 귓볼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쑥스러워하고 있는 게 누군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그 대신, 주머니 안에서,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보니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유카하고 손을 잡은게...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일지도 모른다...
"자, 카즈야, 빨리 가자"
"아아, 그런데 유카, 오늘 저녁밥은 뭐야?"
"오무라이스"
시시콜콜한 화제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면서, 굉장히 오랫만에 유카와 손을 잡고 걸었다. 쑥스러운 것을 서로 숨기려고 그랬는지, 평소보다 둘 다 말이 많았다. 전해지는 따스함이 기분좋았다. 쭉 이러고 있었으면...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기뻤어"
유카, 들었어. 못 들었을 리가 있겠니. 수험이 끝나면, 그때는... 확실히 내 마음을 전할거야... 봄부터 함께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더이상 소꿉친구같은 게 아니고...
유카, 좋아해...
지금은 아직,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단 한 줄도 야한 장면은 엄씀니다 -.-;;
3부 들어가기 전에, 유카가 암캐化되기 전의, 순수한 소녀 시절에 대한 단상이랄까요.
매우 순애물스러운, 그래서 더욱 본편과의 갭모에가 충만해지는, 그런 짧은 에피소드입니다.
이번엔 아마노의 1인칭 시점이네요. 얼마 전의 류지 시점 외전과 대비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