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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恐皇) 4부 <신들의 황혼> Part 5_36편

마왕이란, 단순히 거기 있는 것 만으로도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릴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팔라딘들이 고위 악마들을 상대할 때 자주 제기하는 [민원] 중의 하나는 [칼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잘 박히지 않는다]라는 점인데, 그 악마들 역시 자신들의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위 악마들을 소모품처럼 부리는 마왕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물론 소위 [천사]나 [신]들 역시 자신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신들의 경우 존재감의 단위가 다르지만).


슈발츠가 샥스를 상대할 때 그런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물론 당연하게도 그의 무기 덕분이다. 그리고 샥스를 쓰러뜨리고 그의 힘을 물려받은 지금에 와서는, 슈발츠 역시 [존재만으로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몬스터 클럽]의 일원이었다.


오르커스는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한번 죽었다가 되살아 난 적이 있는 그 언데드 마왕은 반쯤은 언데드였고, 부패한 썩은 영병의 기운을 사방으로 흩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로라는 드루이드의 위대한 주문을 불러일으켜 오르커스의 썩은 부패의 기운이 생명의 나무까지 번지는 것을 막았지만, 미봉책일 뿐이었다. 생명의 나무에 대한 그 마왕의 위협을 끝내려면 그 마왕을 쓰러뜨려 차원문 너머로 보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 그어어어... "


" 그르르르르... "


오르커스가 한번 아래로 눈길을 주자 마자, 방금 전까지 잿더미로 변해 있던 악마들이 재로부터 다시 일어났다. 어떤 마법으로도 죽은 악마를 되살릴수는 없었는데, 언데드의 [신]인 오르커스는 악마들조차 언데드로 되살려 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신적인 권능의 일부였다.


" 시작해야겠군. "


슈발츠의 신호에 맞추어 젤로나의 거상이 오르커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노예들은 언데드로 일어나고 있던 악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슈발츠 자신은, 일단 거상의 어께 위로 올라간 후 다시 오르커스의 머리 쪽을 향해 뛰어들어 칼을 휘둘렀다


" 크르르르르... "


[불쾌함]을 가득 실은 강력한 텔레파시가 슈발츠와 노예들의 정신으로 파고들었다. 마왕의 정신 간섭은 일반인이라면 즉사하거나 미쳐버렸을 정도의 강도였다. 하지만 슈발츠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이 장소로 부른 노예들은 모두 바깥 세상에서라면 혼자서도 일군을 상대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소위 [영웅급]의 존재다. 그녀들은 오르커스의 텔레파시를 정면으로 맞받아 버티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부우웅!...


거대한 도리깨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슈발츠의 코앞을 스쳐 지나 갔다. 간신히 그 일격을 피한 슈발츠가 오르커스의 어께 위에 올라타 진천을 휘둘러 거의 없을 것 같은 오르커스의 목을 베어내자, 피가 아닌 검고 끈적한 썩은 물이 솟구쳤다.


촤악!... 파스스슷...


슈발츠의 몸을 둘러싼 마법 방벽에 맞아 푸르게 불타오르는 그 썩은 물의 정체는 지극히 강력한 시독(尸毒)이었다. 슈발츠는 왼손의 용수를 다시 휘둘러 베어진 상처를 더 벌리려 했지만, 오르커스의 손이 휘둘러지며 슈발츠를 어께 위에서 떨어뜨리려 하는 바람에 두번째 공격 시도는 무산되었다.


" 타핫! "


제자리에서 뛰어 날아오른 후 한번 크게 공중에서 재주를 넘은 슈발츠는 다시 도리깨를 피하며 오르커스의 도리깨를 쥔 손 위에 올라타 두 칼을 동시에 휘둘렀다.


퍼버벅!... 촤아악!...


" 크르아아아아!!!... "


칼은 깊이 박히며 오르커스의 손가락 하나를 거의 잘라 놓았고, 그 마왕은 고통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아마도 둘 다겠지만)괴성을 지르며 그 멧돼지 머리의 입을 통해 슈발츠를 향해 강렬한 부패의 숨결을 뱉어 냈다. 피할 타이밍을 놓친 슈발츠는 그것을 정면으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 크윽!... "


슈발츠의 마법 방벽이 찢어지며 브레스의 썩은 기운이 슈발츠의 피부로 침투했다. 그가 주화를 일으켜 그것을 몰아내려는 찰나에, 이번엔 다시 날개를 붙잡혀서 땅바닥에 처박혔다.


콰직!... 우드드득!...


" 으으윽!... "


슈발츠의 두 날개를 한번에 틀어 쥔 오르커스는 슈발츠를 휘둘러 땅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그때 땅바닥에 처박히면서 그의 날개가 부러져 나갔다.


" 크으윽!!... "


그 위로 다시 부패의 브래스가 퍼부어져서 슈발츠의 전신이 끈적한 부패물로 뒤덮였지만, 그는 고통을 견뎌 내면서 다시 마법 장벽을 재생시키고, 주화를 일으켜 몸 안에 침투하려던 부패 역병을 몰아 냈다. 그리고 내리쳐지는 오르커스의 도리깨를 거의 종이 한장 차이로 피했다.


쿠웅!...


땅바닥에 내리쳐진 도리깨가 국지적인 지진을 일으키는 동안, 젤로나의 철 거인이 오르커스의 방패를 두 손으로 붙잡고 그 마왕의 균형을 깨트렸다. 슈발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날아 오르려 했지만, 부러진 날개가 재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휘청거리며 헛손질을 했을 뿐이었다. 마침 다시 철 거인을 방패로 밀어 붙인 오르커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슈발츠를 걷어 찼다.


" 크악!... "


거대한 돌기둥에 부딛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슈발츠는 일직선으로 수십미터를 날아가서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그 광경에 놀란 노예들이 전열을 흐트리려는 것을 본 슈발츠가 일갈했다.


"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긴다!! "


피투성이가 된 슈발츠는 일어서면서 자신의 신적인 영기를 불러일으켰다. 은은한 은빛의 반투명한 기운이 슈발츠를 감싸며, 아까와는 다른 [존재감]이 슈발츠의 주변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그것은 노예들이 상대하고 있던 언데드 악마들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게 할 만큼 강력했다.


" 이젠 내 차례군. "


입 안의 피를 뱉어낸 후, 슈발츠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 크르르아아아!!!.. "


슈발츠가 다시 오르커스와 맞붙었을 때, 그의 두자루칼의 예기는 수십미터까지 뻗치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슈발츠의 신적인 영기가 그 칼의 [위협 범위]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막 철거인을 밀어낸 오르커스가 도리깨를 휘둘렀지만, 진천에서 뻗어 나온 검은 예기가 그 도리깨를 맞받아서 쳐내며 그 마왕의 균형을 크게 무너뜨렸다.


" 내 차례라고... 했지! "


오르커스가 휘두른 스파이크가 가득한 방패를 피해 내면서, 슈발츠는 왼손의 용수를 휘둘렀다. 방패를 쥐고 있던 오르커스의 왼팔에 하얀 섬광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칼날에 베인 것 같이 오르커스의 왼팔에 깊은 상처가 나며 검은 영액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피하며 슈발츠는 오르커스의 왼쪽 발치로 스쳐 지나가며 이번엔 진천을 휘둘러 그 마왕의 발목에 깊이 베인 상처를 만들었다.


" 크어어어어!!! "


쿠웅!...


오르커스가 처음으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지진이라도 난 것 처럼 땅바닥이 들썩이면서 흙먼지가 안개 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슈발츠는 거기어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진 오르커스의 몸통 위로 뛰어 오른 슈발츠가 두 자루의 칼을 한데 휘둘러 오르커스의 가슴과 어께에 깊은 상처를 냈고, 그 마왕은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몸 위로 도리깨를 휘둘렀다. 물론 슈발츠는 그것을 간단히 피해 냈고, 마왕은 자기 도리깨에 맞았다.


퍼억!!!


" 크어억!!... "


자기 무기에 결정적인 일격을 맞은 오르커스가 일어나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며 몸을 뒤집으려 했으나, 슈발츠는 그 마왕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 죽어라! "


순식간에 오르커스 만큼이나 거대해진 슈발츠가 마왕의의 몸통 위로 올라 타 그 마왕을 누른 채로 두 자루의 칼을 역수(易手) 형태로 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칼날은 마왕의 가슴팍과 목줄기에 깊숙히 꽂혀 들어가고 있었다.


" 크어억!!!... 크르르르륵!... "


!....


오르커스의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진 후, 마왕의 거구가 미친듯이 요동쳤다. 그 마왕이 쓰러진 곳을 중심으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처럼 땅이 흔들리며 땅바닥이 갈라지고, 사방으로 부패와 죽음의 영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와 슈발츠의 노예들 조차도 한결같이 추풍낙엽처럼 날려 갔다. 젤로나의 철 거인까지 주춤거리고 물러 설 정도였다. 물론 폭심지(?)에 있던 슈발츠도 검을 뽑을 새도 없이 그 영기의 폭발에 휘말려 천정을 향해 날려 갔다.


.
.
.


심불이 겨우 정신을 차을 때,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전신을 저미는 듯한 고통이 몰려 왔다.


" 아으으...! "


한 악마의 몸통 아래 깔려 있었던 그녀의 온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두 다리는 부러졌으며, 한쪽 팔은 어께로부터 탈구되어 덜렁거리고 있었다. 탈구된 어께 관절을 맞추고, 부러진 뼈를 맞춘 후 품 속에서 치료 물약을 마시자, 불에 타는 듯한 느낌과 함게 부러진 뼈들이 아물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가 입은 다른 빈사의 상처들(주로 타박상과 찰과상)을 치료하기에는 그 물약의 효과가 모자랐다.


응급처치를 마친 심불은 이를 악물고 일어나서 슈발츠와 오르커스가 싸우던 곳을 눈으로 찾았다.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붉은 오르커스의 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 마왕의 압도적인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심불은 슈발츠가 승리했음을 알았지만, 그녀의 눈에 [주인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졌다. 그녀는 근처에 떨어진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려고 애썼지만 늑골 몆대가 부러진데다 내장도 상한 상태라 다리를 치료했어도 배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일어서기를 포기한 채 엉금엉금 기어서 오르커스 근처까지 기어 갔다. 아직도 썩은 기운을 강하게 풍겨내는 그 마왕의 악취가 코로 밀려들어오며 그녀는 격렬하게 토했다. 토사물에 피가 섞여 있었다.


" 우웨엑!... 우웩!... "


더이상 토할 것이 없어진 후로도 실로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수십미터를 기어간 심불의 기력이 거의 다할 무렵, 그녀는 겨우 오르커스의 머리 부분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슈발츠의 모습을 찾은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려는 순간, 등 뒤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느냐? 평소의 맵시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구나. "


귓전에 들리는 낮게 울리는 음성은 그녀의 [주인님]의 음성이었다. 심불은 기쁜 나머지 울기 시작했다. 곧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리는 슈발츠의 힘을 느끼며, 심불은 어린애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비늘 색이 검게 변한 것을 본 심불의 눈이 똥그래 지는 것을 보고 슈발츠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 주...주인님... 비늘이... "


" 아아,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더군. 하지만 원래 나는 드로우 였으니 말이다. 별로 어색하진 않아. 아무튼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자꾸나. "


" 아... 네네. "


슈발츠의 품에 안긴 채 리인 란소른이 만들어 낸 생명의 나무 내부로의 차원문을 다시 타고 나온 심불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언니 동생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네가 마지막이야, 심불~ "


두르나가 반가움과 기쁨으로 눈을 빛내며 농을 걸어왔다. 심불은 정말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반가운 큰언니의 얼굴을 보고도 간신히 웃을 수 있을 뿐이었다.


" 엿차... 이제 나도 좀 쉬어야겠다. "


슈발츠는 심불을 다른 노예들이 앉아서 쉬고 있는 곳 까지 옮기고 자신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른 노예들도 모두 빈사 상태였고, 그도 만신창이인것은 마찬가지였다. 궁성으로 돌아갈 힘도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저마다 모닥불 옆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채 잠을 청했다.


긴 하루였다.


.
.
.


천정에서 떨어져 내리며, 끌어올린 신적인 영기가 흩어진 슈발츠의 몸은 원래 크기로 돌아 왔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겨우 깃털 같은 낙하 주문을 발동할 수 있었다.


" 크윽... "


상처는 심각했다. 칼날도 퉁겨내는 강인한 비늘도 마왕이죽으며 터트린 무지막지한 영기의 폭발의 충격에서 그를 보호해주기엔 완전하지 못했다. 전신이 크고작은 타박상과 찰과상 투성이에, 그로써는 실로 드물게도 늑골이 부러져 있었다. 뱃속으로부터 올라오는 피를 한모금 뱉어낸 후, 슈발츠는 허리춤의 잡낭에서 치료마법이 걸린 롯드 하나를 꺼내어 그것의 마력을 몽땅 빨아당겼다.


슈슈슛...


주화의 힘이 돌아오면서 자가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 느껴졌다. 응급처치는 대충 그렇게 한 후, 슈발츠는 주변에 뒹굴고 있던 지팡이 하나를(그것은 젤로나의 것 같았다) 짚고 일어서서 오르커스의 거구 위로 올라탔다. 그 마왕의 거구는 작은 언덕과 비견되는 크기였던데다 똥배가 무지막지했기 때문에, 부상에 체력까지 고갈된 슈발츠에겐 가슴팍까지 가는 일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겨우 진천과 용수를 회수한 후, 슈발츠는 그자리에서 주저앉아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그리 한가할 수 없음을 곧 깨달았다. 오르커스가 누워 있던 돌바닥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줄줄 흘러 나가 바닥까지 검게 물들여 가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마왕이 가지고 있던 순수한 악과 죽음의 영기, 그리고 부패한 언데드의 기운이었다.


이대로라면 이 오염은 뒤쪽의 지하 광장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노예들에게까지 닿게 될 것이다. 자신은 괜찮을지 모르나 그의 노예들은 그래도 [평범한]여자들일 뿐이었다. 그녀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 시어릭도 바알을 쓰러뜨리고 이랬을까?... "


혼잣말을 한마디 한 후, 슈발츠는 진천을 짚고 일어나 오르커스의 거구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 땅 속으로 퍼져 나간 오르커스의 영기에 대해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마법 물품의 마력을 빨아들이듯 대지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언데드의 군주의 사악한 혼돈의 영기를 대지 그 자체로부터 빨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스스...


먹물이 번지듯 땅 위로 퍼져가던 검은 기운이 주춤하더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슈발츠는 그 발 끝 부터 천천히 검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염과 부패의 기운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잠식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슈발츠는 약간 두려워졌다. 그 옛날 언더다크에서 미친 마법사의 실험실에 갇힌 채 고문을 기다리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자기 의지로 하는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스스스스...


검은 기운이 무릎을 거쳐 허벅지로, 다시 허리춤으로 올라오면서, 대지에 남은 오르커스의 영기의 흔적은 점점 줄어들어갔고, 슈발츠의 마음 속의 사악한 충동 역시 점점 더 커져 갔다. 이윽고 가슴을 거쳐 그의 뿔 끝까지 검게 물들었을 무렵, 대지엔 더이상 검은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 ... "


영기의 흡수가 끝나고, 슈발츠는 눈을 떴다. 수은으로 이뤄진 구슬 같던 그의 눈은 이제 피처럼 붉은 광채가 번들거렸고, 그 시선 자체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을 풀풀 풍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몆번 머리를 흔든 후, 슈발츠는 무릎을 꿇었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사악한 충동의 속삭임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그의 육신을 점령하고 들어온 그 부패한 군주의 에센스가 그를 외부 뿐 아니라 내부로부터 변화시키려고 요동치는 중이었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 후아!... 젠장!... "


가까스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슈발츠는 아직 잡낭 안에 들어 있던 은빛의 금속 수통을 찾아 내었다(수통은 두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뚜껑을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한번에 들이켰다.


슈발츠가 마신 것은 알루스트리엘, 스톰, 심불로부터 추출한 에센스를 혼합해서 만든 미스트라 스폰의 영액이었다. 그 은빛으로 빛나는 신성의 힘을 가진 에센스는 슈발츠의 몸 속으로 즉시 흡수되어 이미 그의 몸 속으로 퍼져 가고 있는 오르커스의 에센스와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의 시원함 후, 슈발츠는 속이 격렬하게 불타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
.
.


다시 깨어났을 때, 슈발츠는 자신의 비늘이 둔탁한 검은 색을 띄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신의 자식들의 에센스를 마셨어도, 마왕의 영기를 거의 몽땅 흡수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쇄하긴 무리였다. 아니 사실 다 흡수하지도 못했다. 슈발츠는 아직 바닥에 쓰러진 노예들을 찾아 그녀들을 하나 하나 밖으로 옮겨 내기 시작했다.


처음 발견한 두르나와 알루시아를 옆구리에 낀 채로 설다네셀러의 광장으로 나왔을 때, 그는 하나의 큰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생명의 나무가, 그 찬란 광채를 더이상 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나무의 아이들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돌아 보니, 무너진 설다네셀러 광장 한가운데 하나의 푸른 형상이 서 있었다. 낮익은 그 얼굴은 슈발츠가 리인 란소른의 포탈을 탔을 때 찾아냈던 엘레심 여왕이었다. 일종의 텔레파시를 통해, 그는 자신이 오르커스의 오염된 영기를 다 흡수하지는 못했고, 그 때문에 나무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엘프들이 [자폭]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모든 나무의 아이들을 대신해, 대지와 숲에 보여준 당신의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설다네셀러의 종언을 보여준 후, 여왕의 환영은 슈발츠에게 예를 취해 보였다. 그 환영의 형상과 목소리는 점차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 자리에 다시 생명의 나무가 자랄때... 당신은 나무의 백성들 사이에서 영원한 친구로... 환영받을... 것... "


여왕의 환영은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사라졌다. 슈발츠는 잠시 묵묵히 서 있다가 두르나와 알루시아를 바닥에 내려 놓고 모닥불을 피웠다.


.
.
.


-후기-


이번 회에 대해서는, 발게 2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왠지 발더스 게이트 트릴로지를 마치고도 똥누고 밑을 닦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제가 설다네셀러에 대한 [정리]를 한 것입지요.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레니쿠스를 처음 저지했을 때 그 찌질이를 깔쌈(깔끔)하고 산케(상쾌)하게 도살해 돼지 먹이로 줬다면, 아니 적어도 영원히 탈출 못하게 봉인이라도 걸어서 초정리 광천수가 나온다는 지하 2000m 암반 아래 깊수키(깊숙히) 처박아버리기라도 했다면 바알스폰 사가 2탄의 모든 비극은 없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런 비극을 초래하도고 설다네셀러의 한마디 사과도 없이 엘프들은 당당하고 뻔뻔했습니다. 엘한 같은 놈은 외려 고라이온의 양자를 노비 부리듯이 부렸었지요. 여왕에 와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홀려 버릴 정도로 아름다우면 뭐합니까.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인 것을. 천벌을 받아야죠.


낙방이든, 어디든, 제가 주장하는 점은 늘 한결 같습니다.


[잘못했다면, 책임을 져라]


그러지 못하면 현실이든 가상이든 욕을 먹고 처벌 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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