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판타지] 세자르씨의 유쾌한 전원생활 7
11.
“마법사 알베르토 세르지오의 후원에 방문해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일행은 지금 자신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작은 요정같은 생명체가 등에 붙은 작은 날개를 윙윙거리면서 공중에 떠있었다.
아름다운 미녀를 손바닥 크기로 줄여놓은 듯한 그 생명체는 거대한 투기장의 문을 넘어 짧은 복도를 지나자마자 바로 도착한 이 장소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유적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말이 통할 듯한 상대를 만난 것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해서는 그 생명체를 쳐다보았다.
“넌 뭐냐?”
“전 이곳 후원을 담당하고 있는 안내원입니다.”
“그럼 여기는?”
“이곳은 알베르토 마법사의 연구소 안에 있는 정원입니다. 저택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간편하게 후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연구소 본 건물은 이 너머에 있나?”
“아닙니다. 연구소 본관은 이곳을 지나 좀 더 안으로 들어가셔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연구소까지 안내해 줄 수 있나?”
“주인님께서는 밤에는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내일 아침에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연구소까지 가는 데 또 다른 관문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있나?”
“그건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으음, 그럼 네 이름은?”
“이름은 없습니다. 그냥 안내원으로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 뒤로도 도미노는 그 요정 안내원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하면서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이 후원이라는 장소에 관한 것 이외에는 대답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해서 들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르가 옆에 있던 루이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저것도 키메라의 일종이라고 생각되는 데요. 실제론 요정이 저렇게 실체화해서 보일 수가 없거든요.”
확실히 안내원은 날개가 달려있고 크기만 작다 뿐이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젖가슴과 엉덩이하며, 미끈하게 빠진 다리와 그 다리사이 도끼자국, 그리고 그것을 가리는 수풀까지 여체의 모든 것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럼 말하는 건?”
“아마도 주인이 필요한 부분만 말할 수 있도록 미리 지정을 해 논 것 같아요. 그래도 저 정도로 생명체를 세세히 조종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만난 좀비들이나 동물형 키메라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술술 말을 풀어 놓으면서도 루이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그 안내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이곳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요정 안내원은 도미노의 질문에 웬만큼 대답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말을 남기고는 날개를 퍼덕이더니 온몸에서 금빛 요정가루를 뿌리면서 우아하게 저 멀리 공중 위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도미노는 두 손 들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세자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결국은 아침까지 얌전히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얘기군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어요.”
“그래도 주인 허락으로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게 어딥니까? 마침 병사들이 모두 지쳐있으니 말입니다.”
세자르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루 동안 2번이나 격전을 치룬 병사들은 모두 피로에 지친채로 절실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도미노나 다른 조장들도 다음 탐사를 위해선 그런 병사들의 상태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이자벨라에게서 무언의 동의를 받은 도미노는 일행을 야영하기 알맞은 곳으로 이동시키고 진영을 구축하도록 했다.
세자르도 용병들에게 전처럼 본진 외곽에 빙 둘러서 자리를 잡고는 각자가 야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지시를 내린 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다보았다.
사람 손길이 많이 닿은 듯이 질서정연하게 꾸며진 모습의 저택 앞뜰과는 달리 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마치 동네 뒤쪽 나지막한 언덕 같은 분위기였다. 전날에 본 것과 같이 호수를 향해 열려있는 천정을 통해선 막 해가 지려는 듯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잔잔히 흐르는 얕은 개천 주위로 초록빛 풀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주변 언덕과 풀밭 주위에 군데군데 심어져있는 나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쉬고 가라는 듯 크게 퍼져있는 나뭇가지들로 편안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좀 전까지 악몽 같았던 순간들과는 전혀 다른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병사들은 모두 이 시간을 만끽하려는 듯이 열심히 야영준비에 들어갔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나둘씩 막사가 머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여기저기서 모닥불 피우는 소리와 함께 연기들이 차례차례 열을 맞춰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얼마 뒤 세자르는 부하들이 일제히 저녁식사와 휴식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는 여기저기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병사들 사이를 지나 중앙막사로 향했다. 막사 안에는 지난번과 같이 마녀들을 비롯해 도미노와 지휘관급이 회의를 위해 모여 있었다. 그러나 마녀들 옆에 있던 브루노나 지난 번 회의에 참석했던 여러 조장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만큼 지금까지의 모험이 위험하고 힘들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도 그전의 깔끔했던 모습들과는 달리 모두 부셔지고 상한 갑옷차림에 상당히 피로에 찌든 표정들이었다.
“회색늑대단원들은 최소한의 경계인원만 빼고는 모두 야영에 들어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세자르씨.”
도미노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엔 기운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세자르를 대하는 도미노의 태도는 전과는 달리 상당히 존중해주는 느낌이 다분했다. 그건 첫인상과는 달리 위험한 상황에서 확실한 능력을 보여준 세자르에 대한 예우차원이었다. 이제야 동료로 인정하는 듯한 태도에 웃음이 나올 만도 했지만, 이런 대우를 수시로 받아온 세자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나저나 브루노씨가 사망한 것이 타격이 크겠군요.”
“그래서 말인데요. 그 루이란 젊은 친군 믿을 만합니까?”
“실력은 쓸 만합니다. 철들고서 지금까지 수많은 유적탐험에서 살아남았으니까요. 제가 보증합니다.”
“마법도 쓰던 것 같은데요.”
“그것도 탐험에 도움이 될 듯해서 배웠다고 하더군요. 평소 자기 소원이 대마법시대의 유명한 유적들을 모두 탐사해보는 거라면서요.”
“그거 잘됐군요. 적어도 이 유적탐사에서 발을 빼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요.”
“정반댑니다. 아마 우리가 지금 여기서 포기한다 말해도 홀로 끝까지 간다고 할 겁니다.”
“좋습니다. 당신의 판단을 믿도록 하죠. 그럼 브루노씨의 자리를 그 친구가 대신하도록 합시다. 브루노씨 제자에게 브루노씨의 짐을 그 친구에게 건네주고 도와주라고 얘기해 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루이에게 브루노씨의 자료를 살펴보라고 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도미노와 조장들은 삼분의 이정도로 줄어든 병사들의 배치나 병력운영방안 등을 상의했지만, 가장 중요한 유적에 대한 정보는 루이가 브루노의 자료를 확인해봐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거의 수박 겉핥기식으로 금방 끝났다. 세자르는 회의에서 결정한데로 막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브루노의 제자라는 사람을 데리고 용병단의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용병단의 리더급인 노만, 안톤, 매니와 루이가 한참 불이 달아오른 모닥불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세자르는 어정쩡하게 서있던 브루노의 제자를 옆자리에 부르고는 입을 열었다.
“편하게 앉아요. 여기는 노만. 저쪽에 덩치는 안톤. 선발대인 매니는 아시지요? 그리고 이쪽에 이 친구는 루이라 합니다. 이쪽은 브루노씨의 제자이신 길모어씨네.”
“그냥 편하게 길이라고 불러주십쇼.”
“길씨, 우선 스승의 일은 안됐소. 그렇게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겠소.”
“괜찮습니다. 그래도 아마 저승가시는 길은 여기보다 편안하셨을 겁니다.”
“그러실 겁니다. 한데, 문제는 지금 살아남은 사람들이죠. 모두 이 지옥같은 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브루노씨가 돌아가셨으니 어떻게 여기를 벗어나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저, 저따위는 별 도움이 안 되실 겁니다. 그간 학교에서 책만 읽었지, 실제 탐험은 처음이거든요.”
“예?”
“실은 제가 스승님 밑으로 들어간 게 스승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신 뒤라 그동안 쭉 옆에서 도와드리면서 연구하기만 했습니다. 때문에 이번 탐사는 제 일생에 처음 있는 기회여서 안 된다는 걸 억지로 ㅤㅉㅗㅈ아오다시피 한 겁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뻘게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는 대머리를 닦으며 고백하는 길의 모습에 세자르는 뒤통수를 제대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뒷머리가 뜨뜻해지는 느낌에도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한 표정으로 세자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이번 탐사에 대해 연구하거나 조사한 자료들은 가지고 계십니까?”
“그...... 그게 말이죠......”
“무슨?”
“스, 스승님은 탐사에 관한 중요한 정보는 항상 본인이 직접 챙기시는 스타일이시라......”
“그래서요?”
“중요한 내용은 늘 가지고 다니시던 수첩에 정리하셔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셨습니다.”
“그렇단 얘기는 이 유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이미 브루노씨 시신과 함께 곱게 다져져선 박살났다는 얘기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길의 대답에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 세자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혹 브루노씨가 가진 것 외에 다른 자료들은 없습니까?”
“제가 가진 건 스승님 도와드리면서 제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 밖에는 없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몰라 가져와봤거든요. 그게 어디 있더라......”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길은 허둥지둥 들고 왔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거의 온 짐을 사방에 펼쳐놓다시피 하면서 물건을 찾던 그는 마침내 그 안에서 찾은 책들을 잔뜩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건 스승님이 이 유적에 대해 조사하셨던 원본자료들을 모아서 필사해둔 것들입니다. 이걸 분석해 보면 스승님이 정리하신 내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길이 들고 있는 책의 분량은 두 손으로 받혀 들만큼 만만치 않았다. 세자르는 이젠 관자놀이가 당기는 걸 느끼면서 루이를 돌아다 봤다.
“루이! 지금부터 길씨와 함께 이 자료들 분석 좀 해봐!”
“지금 장난하십니까? 그 많은 걸 언제 들여다보라고요?”
“여기 이걸 볼 사람이 누가 있냐? 탐사대의 유일하게 남은 탐험가 루이씨가 확인해 볼 수밖에.”
“대장, 지금 저 죽이시려는 거죠? 이걸 다 보려면 날밤 세야 한다고요!”
“너 그 짓 많이 해봤잖냐? 잔말 말고 여기 길씨와 함께 잘 간추려 보라고!”
한참을 궁시랑 거리며 투덜거리는 루이를 윽박질러 길과 함께 모닥불 저편으로 쫓아 보낸 세자르는 다시 불 앞에 앉아 그제야 뒤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장작을 뒤집던 노만이 그런 세자르를 보면서 말을 건넸다.
“자네도 참 딱 하구만. 중간에서 고생이 많아.”
“그게 내 일이잖나. 힘들더라도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이 유적탐사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구만. 다른 탐사 때와는 너무 달라.”
“어쩌겠나. 이미 다 계약에 매인 몸인데. 하라는 대로 해야지.”
“그래도 이번 탐사는 너무 위험하다고. 우리는 유적탐사한다고 계약했지 언제 괴물들과 전쟁한다고 계약했나?”
“유적 내에서 생긴 일인데 당연히 ‘탐사 중 교전’이라고 할 걸세.”
“하기야, 윗사람들은 그렇게들 생각하시겠지. 아랫놈들이 모두 죽는다 해도 말이야. 그런데 난 이해를 못하겠네. 도대체 저 마녀들이 뭐 때문에 이 유적을 탐사하는 건가. 가질 건 다 가진 여자들이 자기네 병사들도 마구 죽어나가는 이런 위험한 장소를 직접 찾다니. 이상하지 않나.”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자네가 직접 물어보지 그러나?”
“물어본다고 순순히 알려주겠나? 그래서 말인데 혹 자네가 뭐 알고 있는 게 없는가?”
“회의에 들어가 봐도 무슨 목적인지는 전혀 말이 없네. 회의 내용은 모두 도미노씨가 주도를 하고, 여자들은 뒤에서 조용히 조종만 하는 편이라서 말이야.”
“그래도 뭐 약간이라도 들은 것 없나? 그 키 작은 금발머리하고도 따로 만났다면서?”
그 말에 세자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누, 누가 그런 소리를!”
“내가 다 봤다. 대장. 그 클로에란 여자 막사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데?”
갑자기 끼어든 매니의 말에 세자르는 할 말을 잃었다. 매니의 은신술이라면 그 정도 확인하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야! 그 여자가 불러서 간 거라고!”
“자네 태도를 보니 그 여자하고 갈 때까지 간 것 같군. 그런데도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고? 못 믿겠는데?”
“대장,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털어나 봐. 그 여자하고 어디까지 간 거며, 무슨 얘기를 한거야?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잖아.”
이젠 안톤까지 끼어들은 상황에 난감해진 세자르는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자네들이 맞아. 그 왕족 여자하곤 같이 한 번 했네. 이제 됐나? 길게 설명하진 않겠네. 하지만, 그건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즐겁지만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두게. 그리고 그 여자는 날 협박하고 회유하는 말만 늘어놓았지, 탐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그럴 분위기도 아니였다고.”
그 말에 다들 멍하니 쳐다보는 가운데 세자르는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세, 세자르! 우린 그런 뜻이 아니었네! 단지 사실을 알고 싶었던 것뿐이야! 너무 화내진 말아.”
“아니,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럼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건가?”
“갑자기 자네 생각대로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직접 만나 물어보고 오겠네.”
“자네, 그러지 말고......”
“대, 대장, 잠깐만 기다려......”
세자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노만들을 뿌리치고 야영지를 나섰다. 그리고는 그길로 진영 중심부에 있는 클로에의 막사로 향했다. 세자르는 걸어가는 동안 흥분했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반대로 목적을 알 수 없는 이 탐사에 대한 의문과 이 위험천만한 유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통에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하지만 혼자 고민해봤자 별다른 해답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세자르는 이내 그 고민을 접었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론 스트레스로 인한 욕구불만으로 속에 꽉 들어찬 꿀꿀한 마음은 어떻게든 풀 수가 없었다.
무작정 클로에의 막사로 걸어가는 세자르의 모습은 무모해 보였다. 일개 용병이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최고 권력자중 하나인 클로에에게 한번 하자고 무작정 들이댄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세자르 머릿속엔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란 계산이 있었다. 일단 여자가 자기 맘에 들어 정까지 통한 남자를 쉽게 내치진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클로에는 다시 사람을 보낸다고 했지 않았나. 게다가 세자르가 알기에 마녀들이 자신의 정부들을 갈아탈 때는 정치적이든 자신의 입장이든 뭔가 변화가 있을 때가 많았는데 두 사람은 아직 계속해서 유적탐사 중이었다. 적어도 이 탐사를 할 동안은 클로에가 계속 자신을 원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클로에의 막사 앞에서 세자르가 접하게 된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에 세자르를 안내했던 시종이 그를 알아보고는 클로에에게 세자르가 왔다고 고하러 막사에 들어갔지만, 돌아온 대답은 오늘은 힘들다는 것이었다. 시종은 공손한 태도로 마님이 지금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해서 그렇다고 세자르를 위로했지만, 세자르 입장에선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시종의 마중을 받으며 그곳을 떠난 세자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잠시 진영 주변을 거닐 기로 했다. 어차피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그는 평소 자신답지 않게 스트레스를 쓸 때 없는 욕정으로 풀려고 괜한 짓을 했다고 반성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근처 개천에 도착한 세자르는 잠시 주변의 아름답고 아늑한 풍경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그의 머리 위로는 호수 천정을 통해 구름 사이로 작은 별들이 밝게 빛나며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었고, 주변에 펼쳐진 잔디밭과 가까운 곳에 우산모양으로 퍼져있는 나무들은 은은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보기 좋게 물결치고 있었다. 그런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세자르는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던 세자르는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바람이? 지하에 바람이 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생각과 동시에 세자르는 얼른 칼을 뽑아 들어 전투태세를 잡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은 조용하기만 할 뿐 아무런 수상한 점을 찾기 힘들었다.
“오,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데?”
갑자기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자르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공중에 떠있는 빗자루 위에서 아이린이 섹시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세자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세자르 앞에서 아이린은 천천히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발이 땅에 닿을 정도로 내려온 빗자루에서 우아한 몸짓으로 일어선 아이린은 하늘거리는 망토와 하얀 블라우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정리하고는 얼굴에 특유의 장난끼있는 미소를 띄우면서 세자르에게 다가왔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대마법관님?”
“심심해서 이 후원 한 번 둘러보고 왔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 세자르씨는?”
“아, 그냥 머리 좀 식히려고 산책 중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좀 처량해 보이는데?”
“언제부터 저를 미행하셨습니까?”
“아까 클로에한테서 문전박대 당할 때부터. 당분간 걔 얼굴 보기 힘들걸.”
“무슨 말씀이신지?”
“걔 이런 유적이나 전쟁터에 직접 나와 본 게 처음이야. 맨 날 왕도에서 편하게 지내다가 실제로 피와 살이 터져나가는 이런 곳에 와보니 충격이 오죽하겠어? 게다가 아까 바로 코앞에서 브루노가 짓이겨지는 모습을 눈뜨고 고스라니 다 봤으니 지금쯤 쓰러진 채로 꼼짝 못하고 있을 거야.”
“그렇군요. 근데 아이린님은 무슨 일로 저를 따라다니신 겁니까?”
당돌하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질문하는 세자르의 태도에 아아린은 또다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당신, 지금 그리 바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랑 같이 차나 한잔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