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나온 김에 진짜 써보는 양판소 3
“숲의 요정이다!”
한진석의 외침을 되받은 목소리는 숲 한 귀퉁이를 무너뜨리며 나타났다.
‘크다!’
한진석의 감상.
‘저, 저거…“
마쉐리의 감상.
그것은 검이라 하기에는 너무 컸다… 가 아니라 몸이라 하기에는 너무 컸다. 온 몸에 검은 망토를 두른 자칭 숲의 요정은 햇빛을 단번에 가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한진석에게 말했다.
“그 고기. 안 먹는다고? 그렇다면 내가 먹지!”
“드, 드세요.”
너무 큰 덩치에 겁에 질린 한진석이 태도를 공손히 하며 고기를 건네주려 하자 숲의 요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먹지 않겠다!”
“으악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람. 기분이 상한 한진석이 볼 멘 소리로 불평하려 할 때 갑자기 마쉐리가 깨달았다는 듯 크게 경탄성을 발했다.
“아! 숲의 요정! 정말로 숲의 요정이로군!”
“그게 뭔데?”
양쪽에서 소리만 버럭버럭 질러 귀가 아픈 한진석은 차마 자칭 숲의 요정에게는 화를 못 내고 만만한 마쉐리만 알아 볼 수 있도록 슬쩍 인상을 쓰며 질문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무시를 한 건지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마쉐리는 한진석이 인상을 쓰거나 말거나 떠들어댔다.
“귀를 보니 알겠군! 요정 족이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는가? 그런데 고기를 달라고? 내가 알기로 요정 족은…”
‘아! 씹혔다.’
“마쉐리 저 떡대가 뭔데 그래?”
“냄새를 맡고 왔지!”
“요정 족은 원래 고기 못 먹잖아?”
‘또 씹혔다.’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것일 뿐! 나 숲의 요정 리빌은 고기를 먹는다. 그것도 아주 좋아하지!”
“그래… 니들 마음대로 떠들어라.”
두 번이나 껴들었음에도 소외돼 삐친 한진석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소드 마스터가 되는 순간 내 이것들을. 마쉐리 너는 17분할로 끝나지 않아.’ 따위의 정체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며 우울한 심경을 달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하하! 그런 사연이 있었군. 이제 보니 서로 비슷한 처지구만. 우리 이참에 친하게 지내세.”
“나 숲의 요정 리빌. 용맹한 난쟁이 전사 마쉐리를 알게 되어 기쁘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며 마쉐리와 숲의 요정은 화기애애한 것이 아닌가? 이것들아 주인공은 나야.
“다 끝났냐.”
“오오, 한진석! 이리로 오게. 숲의 요정 리빌이네. 정식으로 소개하지. 요정족의 일원일세.”
“반갑다. 한진석. 리빌이다. 앞으로 같이 동행하게 되어 기쁘다.”
“뭐?”
리빌의 말에 너무 놀란 한진석이 마쉐리의 멱살을 잡고 한 쪽 구석으로 끌고 가 신문했다.
“야. 변태. 이게 무슨 소리야. 설명해봐.”
“허허. 한진석. 이미 다 말했지 않은가?”
“뭘 다 말해? 같이 가기로 한 거? 그거? 내 동의도 없이 네 마음대로? 웃기지마! 저런 정체도 모르는 덩치가 동행하자고해서 넙죽 그러자고 할 만큼 내가 바본 줄 알아?”
“무슨 소린가? 정체를 모르다니? 요정 족이라고 말잖은가?”
“요정 족?”
마쉐리의 말에 한진석은 일순 숨이 막혀오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아까는 흥분해서 흘려들었는데 정말 중요한 정보가 한 가지 있었던 것이다. 마쉐리는 난쟁이. 자칭 숲의 요정은 요정 족. 정말 요정. 진짜 요정. 그것도 숲의 요정?
“거짓말!”
“진짜라니까 그러네. 저 긴 귀를 보면 알 수 있지.”
“귀?”
자칭 숲의 요정이 눈치 채지 못하게 둘이서만 조용히 사태를 해결하려는 것도 잊고 충격적인 진설에 이성을 잃은 한진석이 목뼈 두둑 거리는 소리를 내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헉! 진짜?”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길고 뾰족한 귀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정말 숲의 요정? 당신이? 진짜 요정? 리얼리?”
충격에 반쯤 넋이 나간 한지석이 그만 이개국어를 쓰고 말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알아들은 숲의 요정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햇빛을 받아 황금처럼 반짝이는 그의 금발이 고갯짓에 따라 보기 좋게 흔들거렸다.
“그렇다. 나는 요정이다.”
“안돼에에에에에에에에!”
“돼.”
요정이란다. 덩치가 산만 하고 망토바깥으로 삐어져 나온 팔뚝이 근육으로 뒤덮인 저 거한이 요정이란다. 얼마나 근육질이면 딱 봐도 담요같이 두터운 망토가 근육 모양 따라 울퉁불퉁할까! 얼마나 근육질인지 잘 그을린 적갈색의 피부 너머로 요동치는 근육의 결이 보일 정도였다!
한진석은 말을 잃었다. 이계로 오기 전 그가 꼭 애인 삼으리라 다짐한 이종족의 목록에는 분명히 요정이 있었다. 긴 귀, 하늘하늘한 몸매. 순한 눈망울. 그리고 쭉쭉 빵빵. 꼭 마지막 때문은 아니고, 어쨌든 한진석에게 이계에서 만날 요정은 적어도 이런 덩치는 아니었다. 남자는 더더욱 아니고.
고이 간직한 순정이 나빌레라, 사뿐히 즈려밟힌 연정에 격분한 한진석이 숲의 요정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식! 당장 사과해! 나의 요정 족은 이렇지 않아!”
“이게 무슨 짓인가, 한진석.”
마쉐리가 얼른 뜯어말리는 동안 리빌은 고기를 구워놓은 자리에 앉아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그보다. 고기가 다 타겠군. 자리에 앉지.”
세상 다 산 얼굴의 한진석이 마쉐리에게 이끌려 자리에 앉자 리빌이 시선은 고기에 고정시킨 채로 한진석에게 말했다.
“아까 말했지?
“뭘?”
무슨 소리인지 알 지 못한 한진석이 되물었지만 리빌은 대답대신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한진석. 아까 말했다.”
‘이게 진짜.’
울화가 치민 한진석이 발끈하자 이를 눈치 챈 마쉐리가 재빨리 설명했다.
“한진석. 요정 족은 고기를 먹지 않지만 여기 이 리빌은 고기를 먹는다네. 리빌의 말은 아까 한진석이 먹을 수 없다고 한 고기를 자기가 대신 먹겠다는 말이지.”
“뭐? 요정 족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근데 얜 왜 먹는데? 그러쿠나. 무서운 꾸믈 꾸었쿠나… 가 아니라 사실은 요정이 아닌 거지? 그렇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
한 가닥 희망을 잡은 한진석이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붙잡았지만 매몰찬 마쉐리는 냉큼 희망의 줄을 잘라버렸다.
“요정 맞네. 한진석.”
뭣이?
“그냥 특이한 요정이라고 생각하게. 그건 그렇고 어쩔 텐가. 한진석. 고기를 리빌에게 넘길 텐가?”
모르겠다. 이계는 혼돈의 카오스야. 될 대로 되라지.
체념한 한진석이 리빌에게 고기를 건네며 먹으라고 하자 그가 버럭 소리쳤다.
“먹지 않겠다!”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화를 내기에도 지친 한진석이 설명을 요구하며 마쉐리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요정 족에게 부탁을 할 때는 반대로 해야 하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를 테면 이런 거지. 예를 들어 누가 요정 족에게 죄를 짓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상황이라고 쳐보세. 부탁이 절실할수록 마음 약한 요정 족은 거절하기 어렵지. 그럼 요정 족은 이 사람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고 이 사람은 죄를 지었음에도 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갈 것 아닌가? 실제로 과거에는 요정 족의 이런 특성을 악용한 사례가 굉장히 많았다네. 이를 고심한 요정 족의 최고장로가 한 가지 율법을 제정했지.”
“그럼 그게.”
“보는 바와 같네. 그에게 부탁하려면 반대로 말해야 해.”
“이런 미친.”
마쉐리의 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2. 좋다.
3. 그럼 저흰 어떻게 되는 겁니까?
4. 죽을 것이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나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자기를 제외한 정상인이 한 명도 없었다. 나락이었다.
탈출구가 없고 구해줄 사람이 없다면 혼자서 그 일을 해야한다. 한진석은 독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소드 마스터가 되어, 돌아가 는 날 이계를 곡해해 혹세무민한 판소 작가들을 모조리 응징하리라!”
이날 한진석은 목표의식이 강해짐과 동시에 조금 삐뚤어진 부가목표도 얻었다.
“그래 나중 일은 그렇다 치고.
반대로 말해야 한다고? 얼마든지 그래주지. 리빌. 이 고기 안 먹을 거지?”
그러자 리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겠다!”
거침없이 고기를 뜯는 리빌을 지켜보며 한진석은 마쉐리에게 물었다.
“아까 요정은 고기 안 먹는다며? 그럼 이건 뭐야? 특이한 요정이라고 생각하라고? 이렇게 특이한 요정이 왜 하필 내 앞에…”
차마 잇지 못한 한진석의 뒷말은 그러니까 저거 요정 아니지? 이었지만 이번에는 리빌이 한진석을 두 번 죽였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다.”
틀렸어. 꿈도 희망도 없어. 현실은 시궁창이야. 요정이 어째서 근육이나 키우고 앉았는지 한진석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레골X스, 디드X트, 이X릴 이 사악한 거짓말쟁이 요정들아!”
마침내 정신을 놓은 한진석이 누가 들으면 큰일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가관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리빌이 입을 열었다.
“똑똑히 보게. 내가 동족을 떠난 이유가 이것이네.”
그러면서 망토를 벗었… 잠깐 벗지 마!
“오 마이 아이즈!”
두 눈이 타들어가는 고통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한진석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망토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변태야 옷 좀 입어!”
쩍 벌어진 가슴은 잔뜩 긴장되어 빵빵한 근육을 자랑했고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은 고랑마다 산맥 같은 근육이 쭉쭉 융기해 흡사 요철을 떠올리게 했다.
속옷이라고는 언제 떨어질까 지켜보기 두려운 나뭇잎 한 장 이 위태롭게 급소를 가리고 있을 뿐 망토를 젖힌 리빌은 사실상 전라였다.
이건 아니야. 빵빵하고 쭉쭉 한데 뭔가 잘못 됐어!
한진석이 저쪽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동안 리빌은 갖가지 자세로 근육을 자랑하며 말을 이었다.
“본래 우리 종족은 초식을 하네. 하지만 난 특별한 사정으로 종족의 금기인 육식을 하게 됐고 이처럼 강인한 육체를 얻게 된 것이지.”
마쉐리가 냉큼 끼어들었다.
“리빌이 무리를 떠나 떠돌게 된 이유도 사실 그것이지. 리빌은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려 하는 거야.”
“그 다음은 내가 설명해주지.”
본래 고기를 먹지 않는 요정 족. 그중에서도 자연을 지키며 숲의 모든 생명과 교감한다는 숲의 요정인 리빌이 고기를 먹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았다.
“소드 마스터와 싸우기 위해서이네.”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리빌을 돌아본 한진석.
“으악! 당장 망토 덮지 못해!”
“왜 그러나 한진석? 이 육체미의 정점을 음미하도록.”
한진석의 항의를 무시하고 리빌은 손수 어떤 근육을 보고 싶나, 이걸 원하나? 따위의 말을 덧붙이며 이리 꿈틀 저리 꿈틀 하는 것이었다.
흥분한 마쉐리.
“헉헉. 등짝. 등짝을 보자!”
더 흥분한 한진석.
“변태가 둘이나! 하나도 괴로운데 둘이나!”
한진석이 괴롭거나 말거나 리빌의 육체는 어느 틈에 바른 기름으로 매끄러웠고 햇빛을 받은 육체는 고대 영웅의 신상처럼 찬란했다.
“그걸 원하나! 정녕 그걸 원하나!”
“원해! 어서 빨리 등짝! 등짝을 보자. 감비노도 궁금해 하더라구!”
“여기서 감비노가 왜 나와!”
한진석은 절규했다.
“나 다시 돌아갈래!”
마쉐리가 소리 질렀다.
“등짝! 등짝!”
리빌은 말했다.
“그보다 이 몸을 봐줘.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