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판타지] 세자르씨의 유쾌한 전원생활 5
회랑을 서서히 밝혀오는 햇빛에 하나 둘씩 잠이 깬 이자벨라 백작의 병사들과 회색늑대단원들은 살아있다는 것을 감사하듯이 아침식사를 열정적으로 든든하게 마치고는 얼마 뒤 모두 회랑 중앙에 있는 잔디밭에 집합했다. 다행히 밤새 아무 일이 없었는지 인원수는 변동이 없었다.
점검을 마친 일행은 전날과 똑같은 이동대형으로 브루노의 안내를 받아가며 들어온 정문의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긴 잔디밭을 지나 회랑의 반대쪽에 가까워지자 그곳에는 정문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역시 그만큼 커다란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왕도에 있는 궁전과 비교해도 될 만큼 넓고 커다란 그 저택은 역시 소피아 호수에 연결된 호수천정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그 외부를 장식하는 하얀 대리석벽을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위를 향해 치솟은 붉은색 지붕들과 건물 여기저기서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황금빛 장식들은 그 화려함을 더욱 치장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전날과 같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느라 진영을 갖춘 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천천히 내리막길을 내려가면서도 한편으론 사방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에 다들 넋을 놓고 있었다. 주변의 대리석 암벽들 사이를 빠져나와 길고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길 양쪽 푸르른 정원에는 길을 따라 검은색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흰색 대리석 조각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비록 오랜 세월동안 관리되지 않아 여기저기 색이 바라고 부셔지긴 했지만, 조각들은 화려했던 대마법시대를 상징하는 듯이 각자 특징 있는 자세를 잡은 여러 마법사들의 위엄 있는 모습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정원 양쪽에는 군데군데 나지막한 수풀들과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돌담, 조각, 오두막, 동그란 원형 분수들이 보기 좋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거기를 지나 정원에서 저택으로 올라가는 크고 넓은 흰 계단의 가운데와 계단 양 옆쪽으로는 접은 우산모양으로 위로 길쭉하게 솟은 나무들이 마치 커다란 울타리처럼 넓은 저택 외부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전날의 밀림 같았던 정원과는 달리 숨을 곳 없이 확 트인 뜰을 무사히 통과한 일행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곧바로 저택의 현관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현관을 중심으로 둥글게 방어진을 세우고는 다시 브루노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 커다란 저택의 현관문에는 어떤 마법주문이나 장치도 없었다. 브루노가 손잡이에 손을 대자, 그 큰문이 나지막이 열리는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뒤로 밀렸다.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모두 황당했지만, 만에 하나 안에 뭔가가 함정이 있지 않을까 모두 긴장하는 가운데 도미노가 신호를 보내자 매니가 이끄는 선발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는 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선발대는 차례대로 서로를 엄호하는 가운데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문 안쪽 홀을 확인했지만, 홀과 그 주변은 깨끗했다. 아무런 장치나 인기척 하나 없는 것을 확인한 매니가 수신호를 보내자 본대와 용병단은 세 여자를 에워싼 채 차례차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위를 찌를 듯이 높은 천장 덕에 입구 쪽 홀은 막힘없이 엄청나게 넓어보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그 안이 사람 없이 비어있었지 사방은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다. 하지만, 곳곳의 기둥과 벽에 붙어있는 섬세하게 세공되고 채색된 조각들과 전원풍경을 그린 화사한 벽화들, 높은 곳에 위치한 창문들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들이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들이고 있는 대리석 바닥들은 이 저택의 아름다움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브루노씨, 이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저택 어딘가에 아마 연구소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을 겁니다. 거기를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아무런 단서는 없는 겁니까?”
“기록에는 단지 저택과 연구소가 연결된다고 적혀있지 다른 설명은 없었습니다. 아무튼 건물 안 비밀스러운 곳이나 마법으로 보호되는 곳을 찾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브루노의 말에 도미노는 병사들을 나눠서 저택 안을 수색하게 했다. 하지만, 전차경기를 동시에 두세 경기를 열어도 될 만큼 엄청나게 넓은 저택 안을 전부 뒤져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택은 하나의 구조로 이뤄진 것 같은 겉보기와는 달리 여러 건물들이 ‘ㅃ’자와 ‘ㅁ’자 모양으로 연달아 연결된 복합 구조형태였다.
한동안 세 마녀, 브루노와 대책을 상의한 도미노는 최소한의 호위 병력을 뺀 나머지 병사들을 몇 명씩 조를 짜선 저택 전체를 구역별로 나누어 각 구역을 수색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병사들은 조장들이 지정하는 대로 각 층과 복도 안에서 또다시 여러 방향과 갈래로 나눠지는 저택의 통로를 하나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세자르도 다른 두 용병들과 편을 짜서 1층 왼쪽 건물의 중앙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방들을 하나하나 수색해갔다.
현관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알베르토의 저택 안은 웬만한 국가의 왕궁 이상의 규모와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방이 일반 농민들의 집정도로 크고 넓은데다가, 그 방마다 각자 독특하고 차별되게 꾸며져 있었다. 어떤 방은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거울들이 사방을 장식하고 있었고, 다른 방은 별의 별 크기와 디자인의 은식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가구들이 붉은 색 벨벳으로만 꾸며진 방도 있었다.
용병들은 각 방을 확인할 때마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들에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세자르는 그런 용병들을 다그치면서 각 방 구석구석을 뒤져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차례차례 방들을 수색하던 세자르 일행은 어느덧 복도 끝에 다다르게 됐다. 다른 복도들과 연결된 그곳에서 세자르는 역시 빈손으로 걸어오던 안톤 일행과 만날 수 있었다.
“여어, 대장도 허탕이야? 이쪽도 별건 없던데.”
“그래? 그런 거 치고는 주머니가 너무 두둑한 거 아냐?”
세자르는 일부러 태연한 척 노력하는 안톤의 바지 뒷주머니를 칼집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세자르의 추궁에 흠칫 놀라 당황하던 안톤은 곧 얼굴 전체에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정말, 대장은 못 속인다니까.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사실 저기 방들 중에 여자들 장신구와 보석들을 모아둔 곳이 있어서 약간 챙겼지. 어차피 너무 많아서 이 정도는 티도 안 나더라고.”
“이거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군. 수색은 제대로 한 거야?”
“물론이지. 방들은 전부 무슨 컬렉션들 뿐 이여서 비밀통로 같은 건 아무데도 없었어. 벽까지 다 확인해봤지.”
“음, 좀 골치 아프겠는데. 건물이 너무 넓어서 이 상태면 수색에만 하루 종일 걸리겠어.”
그 말대로 건물 수색은 쉽지 않았다. 비록 길을 가로막는 몬스터나 함정도 없고, 건물 자체도 텅 비어 있었지만, 이 넓은 저택 안에서 아무런 단서 없이 무작정 비밀 통로를 찾는다는 것은 마치 건초더미 속에서 바늘 찾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자르는 합류한 안톤 일행과 함께 복도 다른 편을 돌아 현관홀로 되돌아오면서 수색을 계속 했지만, 역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현관홀에는 이미 수색을 끝낸 몇몇 조들이 도착해있었다. 그런데 그들 너머로 서있는 도미노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로 봐서는 다른 조들도 별다른 성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세자르 일행도 그들과 합류해 똑같은 결과를 보고하자 도미노와 브루노는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모습이었다. 그 뒤를 이어 도착한 다른 조들도 모두 빈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자르와 용병들이 그 자리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깜짝 놀라 그쪽을 쳐다보자 길게 뻗은 복도 위로 한 남자가 겁에 질려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른 일행들처럼 이 건물 수색을 위해 흩어졌던 용병조들 중 한 명이었다. 투구와 칼, 방패도 없이 갑옷을 덜렁거리면서 미친 듯이 달리던 그는 일행을 발견하자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며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대, 대장! 큰일 났어요! 당,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해요!”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이, 이집은 저, 저주받은 집이 틀림없어요! 얼른 도망가요!”
“그러지 말고 진정 좀 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차근차근 설명해 봐. 뭔지 알아야 도망이라도 칠 것 아니야.”
같은 편이 모여 있는 것에 좀 진정이 된 모양인지 그는 숨을 돌리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속한 일행이 동쪽 건물에 들어섰을 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무작정 돌아다니기엔 건물 자체가 너무 넓었다. 게다가 건물이 여러 층을 이루고 있고, 각 층들 곳곳을 여러 계단들이 미로처럼 연결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 딱 좋아 가뜩이나 머리 굴리기에 약한 용병들에겐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수색을 하는 동안 그들은 이 복잡한 건물에서 종종 길을 잃어 다시 왔던 길을 돌아오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일행 중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일행은 다시 길을 잃은 곳까지 되돌아가며 찾아봤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주변을 좀 더 넓게 돌아다녔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들을 겁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것들은 바로 좀 전에 마주쳤던 다른 일행들의 무기들이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칼과 창, 방패들을 본 일행은 바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빼들고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서도 사라진 동료들의 모습이나 인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공포가 일행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일행은 서둘러 본진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미로같은 그곳에서 현관홀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당황한 그들은 왔던 길도 놓치기 일쑤였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그는 또다시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바로 좀 전까지 자신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 봐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 봐도 사라진 동료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공황에 빠진 그와 다른 동료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동료마저도 그의 곁에서 사라져버렸다.
아직까지 바들바들 팔을 떨고 있는 용병의 말에 사태의 심각성을 안 도미노는 곧바로 병사들에게 경계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클로에와 아이린, 브루노는 오히려 그 근처에 연구소로 통하는 통로가 있을 것이라며 기뻐했다. 세자르는 그 모습에 어의가 없었다. 동료들이 실종되는 상황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목적에 더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그는 속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따지고들 입장이 아니었기에 잠자코 그들의 결정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자벨라 백작과 도미노는 서두르지 않고 우선 흩어진 병력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건물 안팎을 샅샅이 수색하던 모든 병사들이 돌아왔지만, 인원점검에서 역시나 오른쪽 건물을 수색했던 병사들 중 몇 명이 비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병사들이 모두 집합한 것을 확인한 도미노는 이자벨라의 명령에 따라 부대를 경계대형으로 정렬한 후 천천히 오른쪽 건물로 이동시켰다.
집주인의 일종의 컬렉션 공간이었던 왼쪽 건물과는 달리 이쪽은 마치 커다란 미술관을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빛이 들어오는 높은 천정 아래 별다른 복도 없이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방들이 계속해서 다른 방들과 연결된 긴 회랑 안으론 다양한 조각들과 그림들이 계속해서 벽과 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건물 안은 저택 다른 곳들처럼 변함없이 조용했다. 그 적막감에 병사들은 더욱 긴장하면서 천천히 건물 내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모두 이 주변을 철저하게 수색한다. 단 지금 진영을 유지하고 절대 너무 벗어나지 마라.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도 모두 한꺼번에 이동한다.”
도미노의 명령에 병사들은 그 방 안을 꼼꼼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사라진 병사들이나 비밀통로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도미노는 계속해서 다음 방으로 병사들을 이동시켜 수색을 하게했다.
어떤 방들은 방 여기저기에 마치 살아있는 듯이 생동감이 넘치는 각종 인물들과 신화 속 신들, 드래곤 같은 영물들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조각들은 알몸에 가까운 차림으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남성의 근육진 몸이나 여성의 각진 곳 없이 둥글고 부드러운 몸매 같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그 예술성은 용병들이 보기에도 뛰어나 보였다.
각 방 사방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수수한 기법으로 표현된 풍경화부터 마치 살아있는 듯이 정교하게 그려진 여러 정물화와 인물화까지 다양한 종류와 기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 세자르 일행의 눈을 확 잡아 끈 것은 어느 한 방에서 발견한 거대한 크기의 그림이었다. 혼자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그 그림은 지금까지도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대마법시대의 유명한 전쟁인 ‘토렌토 전쟁’을 표현한 것으로 검은 구름이 뒤덮인 하늘 아래 그림 양쪽에서 각자의 세력을 확인 시키듯이 각자 검고 붉은 복장의 수만 대군이 중앙에서 만나 충돌하고 있었다. 그 위로는 그 시대 유명한 대 마법사들이 병사들 뒤에서, 혹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양 손으로 각종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림이 표현하는 전쟁의 규모와 박진감에 용병들은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림 속 수많은 인물 하나하나의 모습이 너무나도 섬세하게 표현된 데다가 그림 자체에서 느껴지는 힘과 뛰어난 구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토렌토 전장의 한복판에서 전쟁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한동안 넋을 놓고 그림을 쳐다보던 병사들은 조장들의 호통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간의 경험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조장들은 얼른 수색을 끝마쳐야 쉴 수 있다며 병사들을 다그쳐 다음 방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건물 구석구석을 뒤져봤음에도 뭔가 비밀통로같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간혹 좀 전에 용병이 말한 대로 여기저기서 주인 없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무기와 방패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 방 곳곳을 집중적으로 수색해 봤지만, 실종된 사람들이나 비밀통로 같은 것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성과 없이 몇 차례 건물을 빙글빙글 돌아 일행이 슬슬 탐사에 지겨워질 무렵, 누군가의 입에서 공포에 가득 찬 비명소리가 들렸다.
“앗, 홀리오! 이럴수가!”
그 소리에 주변에서 몰려든 병사들도 곧 상황을 알아채고는 얼굴에 공포가 물들기 시작했다. 그 병사가 가리킨 그림은 세자르도 좀 전에 보았던 ‘토렌토 전쟁’이었다. 그 그림은 아까전과 다른 것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병사가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살펴본 세자르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양군의 보병들이 충돌하고 있는 그곳에는 아까 전에 사라졌다는 병사의 모습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주변 병사들의 창에 가슴을 꽤 뚫린 채 피를 흘리면서 힘없이 무릎을 꿇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그림 속의 다른 인물들처럼 너무나도 생생해서 보는 이의 충격이 꽤 켰다.
곧 ‘토렌토 전쟁’을 살펴보던 다른 병사들의 입에서도 연달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 여기 장이 있다!”
“이런, 마리오!”
그들이 가리키는 부분에서도 실종된 다른 병사들이 각각 목이 짤리거나 온몸을 창검에 찔린 모습으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이 다들 공포에 질리면서도 호기심에 그림에 몰려 구경하고 있을 때, 이자벨라가 외쳤다.
“경계를 흩트리지 마라! 적은 이 안에 있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얼른 진영으로 돌아와 방어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그 중 몇 명은 아직 그림의 매력에 빠져있었는지 멍하니 제 자리에서 그림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곧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그림 속에서 공중에 떠있던 한 마법사가 그림 밖으로 상체를 쑥 내밀더니 병사들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림 앞에 서있던 병사들이 마법사의 손에서 나온 이상한 기운에 묶여서 그대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전쟁터 한가운데 떨어진 병사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방에서 달려드는 칼과 창에 찔려 피를 토하며 하나하나 쓰러져갔다.
그 말도 안 되는 장면에 모두 경악하고 있을 때, 갑자기 ‘토렌토 전쟁’ 반대쪽에 걸려있던 그림에서 날개달린 천사가 날아와 병사들을 습격했다. 동시에 사방에 걸린 그림들 속에서 각종 신화 속 인물들과 괴물들, 장군들과 병사들이 뛰쳐나와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문 옆쪽 그림에서 나온 사신의 커다란 낫에 목이 걸린 한 병사가 그대로 그림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오래된 피투성이 갑옷차림의 기사에게 몸을 찔린 다른 병사도 그대로 기사와 함께 그림 속으로 파묻혔다.
연달아 일어나는 충격적인 일들과 그림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격하는 적들은 모두 그림 속에서 나온 것을 확인시키듯이 앞뒤면만 있고 옆면은 없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병사들에게 공격을 당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또다시 원래 있던 그림 속에서 뛰어나왔다. 때문에 습격 받은 병사들은 각자 겁에 질려 거기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하면서 무작정 적들과 대치하거나 방어에 급급했다. 그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세자르는 저편에 있는 루이를 발견하고는 급히 그쪽으로 뛰어갔다.
“루이! 이것들은 뭐야? 죽질 않는데 없앨 방법이 없는 거냐?”
“이것들은 마법사의 경비병들이에요! 아마 입구를 보호하는 것 같은데 이런 종류들은 대게 유령이나 영혼들,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어딘가 가두고 조작해서 필요한 용도로 이용하곤 해요! 때문에 물리적 타격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아요!”
“그럼 저런 녀석들을 어떻게 가두고 다루는 거야?”
“그건......”
그런 질문에 루이가 답하기도 전에 순간 세자르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그는 전속력으로 벽 쪽으로 달려가더니 동료 용병을 공격하던 대머리 문필가가 나왔던 액자를 칼로 강하게 후려쳤다. 나무로 된 액자는 세자르의 일격에 박살이 나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에 타격을 받았는지 문필가는 마치 풍선에서 공기가 빠지는 듯한 비명소리를 남기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갔다.
“모두 액자를 공격해라! 적들은 모두 허상이다! 액자들을 부셔라!”
세자르의 모습과 명령에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변의 벽에 걸린 액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액자들이 산산이 부셔짐과 동시에 그들을 공격하던 그림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사라져갔다. 얼마 안 돼 그 방의 액자들은 ‘토렌토 전쟁’을 빼고는 하나도 남김없이 박살이 났다. 그 그림 속에는 또다시 방금 전 그림들 속에 끌려들어갔던 병사들이 그 그림 곳곳에서 적들에게 포위당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 장면에 흥분한 병사들은 그림에 달려들어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그 액자에는 방어마법이 걸려있었는지 그런 타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으아악!!!”
“저쪽에서 또 몰려온다!!!”
몇몇 병사들의 외침에 모든 병사들이 각각 소리 난 곳을 뒤돌아봤다. 그 방 양쪽 입구에 연결된 다른 방들에서 좀 전보다 더 많은 수의 그림괴물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세자르가 보기에 그것들을 상대하려면 병사들이 일일이 다른 방들의 액자들을 공격해야만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위험이 컸다. 가뜩이나 인원수가 부족한데 그림 부수려다가 오히려 그대로 그림 속으로 끌려들어갈 수도 있었다.
“안톤! 루이! 병사들과 입구를 막아!”
안톤은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한쪽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가구들과 긴 의자들을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그것이 어느새 입구까지 다가온 괴물들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입구 쪽에서 그림괴물들이 바글바글 몰려있을 때, 안톤이 창도끼의 도끼날 반대쪽에 붙어있는 해머로 입구 위 아치의 중앙돌을 후려쳤다. 견고해 보이던 그 돌은 몇 차례 더 해머로 두들겨 맞자 몇 개의 조각으로 부셔지며 박살이 났다. 그러자 아치가 무너지면서 괴물들을 깔아뭉개며 입구를 막아버렸다.
그 반대쪽 입구에서는 몇몇 병사들이 그림들을 막고 있는 동안 루이가 방어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모두 물러나! 윈드실드!”
짤막한 한 마디에 갑자기 입구 주변에서 바람이 일더니 곧 회오리를 일으키며 주변에 부셔진 액자들과 가구들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구 쪽을 틀어막았다. 유령들은 그 입구를 통과하려고 입구 쪽에 다가왔지만, 회오리에 휩쓸린 가구들에 세차게 얻어맞아 자신들의 그림 속으로 돌아가거나 그 회오리에 휩쓸려 돌다가 이곳저곳에 부딪히면서 사라지곤 했다.
“부하들이 퇴각로를 아주 확실하게 막아두었군요.”
“그래도 도망치다 죽는 것보단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게 더 나을 듯 한데요.”
“그건 우선 이곳을 빠져나간 뒤에 기뻐하기로 합시다. 자, 브루노씨.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도미노는 좀 전의 전투는 딴 동네 일인 것처럼 그림에서 좀 떨어진 채로 ‘토렌토 전쟁’을 살피고 있던 브루노를 쳐다봤다. 도미노의 말에 대구도 없이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던 브루노는 곧 얼굴에 미소를 띠우다가 금세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바로 이거였어. 자기 집 안인데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지.”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그럼요. 지금부터 비밀통로를 활짝 열어 보이겠습니다. 아이린 마법관님, 괜찮으시다면 여기에 라이팅 주문 하나만 걸어주시겠습니까?”
“어머, 웬일이야. 나한테 부탁을 다하고. 그러지,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아이린은 마치 대단히 선심 쓴다는 것처럼 브루노가 늘 손에 쥐고 다니는 값비싼 상아장식이 박힌 지팡이 끝에 잠시 손을 대더니 손목을 돌리면서 살짝 쓰다듬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그 끝에서 마치 대낮같이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브루노는 아이린에게 감사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도미노와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통로의 열쇠는 다들 짐작하시듯이 바로 이 그림입니다.”
“그래서요?”
“‘토렌토 전쟁’에 대해서 아십니까?”
“물론입니다. 대마법시대의 가장 유명한 전쟁인데 모를리가요. 대륙의 모든 국가가 두 편으로 나뉘어서 7년 넘게 싸운 마법대전을 끝낸 전쟁 아닙니까? 이 전쟁에서 웬만한 고위 마법사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대마법시대가 이때부터 종말을 맞이하기 시작했다고들 합니다만.”
“그럼 이 전쟁이 언제 시작하고 끝나는지도 기억하시겠군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마법세기 2045년 하짓날 새벽부터 시작해서 해가 질 때서야 결판이 난 걸로...... 아!”
“예. 그렇습니다. ‘토렌토 전쟁’은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환한 태양 아래서 모든 일이 벌어졌죠. 그렇기에 이 그림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틀린 게 됩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듯 설명하면서 브루노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그림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은 아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브루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브루노가 지팡이로 그림을 밝히면서 가까이 다가서는 동안 그림에선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그림 바로 앞까지 걸어간 브루노는 마치 전투에 승리한 전사처럼 천천히 손에 쥔 지팡이를 머리 위로 치켜들어 지팡이 끝을 그림 위쪽에 있는 하늘 중앙부에 가져갔다.
처음엔 그림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림 속 하늘을 가득 뒤덮던 구름들이 지팡이 끝에서 나오는 밝은 빛에 거짓말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다 개기까지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환하게 갠 하늘 한복판엔 태양이 높게 뜬 채로 그 아래 인물들을 보다 밝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쿠궁-!
병사들은 갑자기 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방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리는 금방 잠잠해 지면서 전에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사 알베르토 세르지오의 저택에 방문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후 연구소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모두 편안하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과 동시에 방 양쪽 입구가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이제야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이 또 다른 ‘움직이는 방’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곤 또다시 찾아온 잠시 동안의 정적에 모두가 안도감을 느끼면서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적어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지친 모습으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선 루이가 환한 미소와 함께 눈에 광채를 빛내면서 각종 수식과 메모, 도면들을 노트에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 모습에 ‘탐험가는 정말 별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 세자르는 곧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별종들이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브루노와 클로에, 아이린 이었다. 브루노와 아이린은 마치 놀러온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는 클로에를 상대로 이 대마법사 알베르토의 유적에 사용된 마법의 대단함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 참, 병사들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누구는 저렇게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게 대단하군.”
“지체 높으신 분들이야 우리가 무슨 고생을 하는지 생각이나 하겠나.”
“그래도 살아 돌아갈 궁리는 하고는 있겠지?”
“그건 저쪽에서 알아서 하지 않을까?”
노만은 세자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긴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두 여자완 달리 계속해서 침착,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자벨라가 도미노와 계속해서 뭔가를 진지하게 상의하고 있었다. 세자르가 보기엔 이 일행 중에서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저 둘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