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56
입술은 당장이라도 피가 나올 듯 깨물고, 두 눈은 성난 듯 부릅뜬 목불상과 견주듯이 정좌한 청년이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한 배 반은 커 보이는 거구와 노한 듯 압박감을 주는 외모와 달리 콧날과 턱에 이어진 거뭇한 수염은 아직 연한 부분이 있었다.
창문 밖의 정원은 풀 한포기 없이 자갈들로 바닥을 깔고 정원수 대신 기암奇巖들로 조성하였고 그가 앉아있는 전당과 안의 침실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후계자로 손꼽히는 광협의 거처라는 점에 제일 먼저 당혹하게 될 것이다.
“부동이란 정적이라, 허나 번뇌가 끊이지 않으니 고요를 찾을 수 없구나.”
광협은 탄식을 하고 부동명왕상이 안치된 문짝을 닫아걸었다. 하루에 한 번씩 대면하고 있지만 특별히 불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부동명왕상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불상처럼 평화와 안정과 달리 무기를 들고 분노하는 듯한 형상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외지 출신이라 경원하는 듯한 태도에 기죽기 싫었고, 보란 듯이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무공을 본격적으로 배울 때, 검가劍家에서 검을 잡은 게 아니라 소림파에서 유출된 부동명왕공을 본신절기로 삼았다.
다만 입문 후 수련에 실수를 하여 상단전이 꼬여버렸고, 그 여파로 항상 분노한 듯한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대성大成을 하게 되면 자연히 원상복귀 될 것이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벽에 막혀 전진이 없는 상태였다. 원인은 알고도 해결할 수 없다. 가독家督 승계에 망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도 천협이 살아있을 당시까지는.
“연금되기 싫으면 출가해야겠군.”
후계 지명도 못하고 급서하는 바람에 광협은 신도 세가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유일한 지지파인 류씨 숙질이 지지하고 있지만, 숙부 쪽은 까칠한 성격이라 교섭 상대를 긁어버리기 일쑤고 조카 쪽은 목에 핏대만 세워 상대방을 윽박질러 역효과만 내고 있었다. 그들을 제어하고 뒷받침하던 천협이 급사했으니 역할 상 광협으로 옮겨가기는 했는데, 젊음이 장점이라는 점만 빼고 천협 때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부족했다. 출신 성분을 걸고넘어질까 봐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점점 비관적이었다.
정원으로 나가볼까 하는데 시녀가 찾아와 방문첩을 공손히 내밀었다.
“무사 한 분이 공자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방명첩에는 경비조의 남 소락이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광협은 누군가 싶었으나 모처럼 찾아온 손님이라는 생각에 시녀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말수가 적어 제스처로 주인의 의사를 파악해야했기 때문에 시녀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손님을 객청에 안내하고 차를 끓이러 다실로 건너갔다. 차가 나올 시간을 가늠하며 광협은 의관을 정제한 다음 객청으로 건너갔다. 차를 홀짝이던 남 소락이 자리에 일어나 목례를 하였다.
원래 공자와 하급 무사의 차이라면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법도에 맞다. 광협은 자신의 권위가 이 정도까지 추락했는가 하는 불쾌함과 함께 상대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자신의 늘 성난 얼굴과 비교할 만큼 과하게 웃는 면상이었다.
흠, 하고 광협은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차가 식을 동안 둘은 일체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한쪽은 화난 얼굴이요, 다른 쪽은 미소 띤 얼굴이니 기이한 풍경이었다. 백기를 든 것은 용건이 있는 쪽이었다.
“공자께서는 방금 소인의 무례를 탓하지 않으신 겁니까?”
“가르침을 주려는 것인 줄 알았네.”
“제가 감히 공자님에게 훈수를 드릴 수 있는 겁니까?”
기웃하는 남소락에게 광협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처지가 얼마나 영락榮落지를.”
광대 가면과 같은 남소락의 표정이 위 아래로 한 차례 흔들거렸다. 그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더니 큰 절을 했다. 광협으로서는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절을 마친 남 소락은 광협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도로 앉았다.
“첫 인사는 무사가 아닌 세객說客으로 찾아온 것이옵고, 두 번째는 주공을 뵙는 예로 한 것입니다.”
“영문을 모르겠군.”
“현실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융중대를 재연하고자 함인가?”
융중대隆中對는 삼국연의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당시 부평초처럼 떠돌던 유비를 맞이한 제갈량이 천하삼분이라는 장구한 대책을 올린 고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남 소락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가 감히 삼고초려를 받을 만큼 대단한 존재이겠습니까? 다만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비책이 있습니다.”
비책이라는 소리에 광협은 귀가 솔깃해졌다. 예민해진 그의 귀에 낮지만, 충격적인 소리가 꽂혔다.
“공자께서는 가주님의 서거에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광협은 묵직한 신음을 흘렸다. 급서가 돌연한 감이 있지만 워낙 연치가 높은 편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개봉의 명의들을 불러 교차 확인까지 받았다. 독에 중독된 흔적은 없고 사인은 심장마비로 판명 났다.
“증거가 있느냐?”
“물증은 없사오나.....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는 게 세상 이치. 사주한 이는 있을 것 이옵니다.”
“차는 잘 마셨네.”
광협은 축객령을 내렸다. 이 자 역시 제 욕심을 위해 자신을 미혹케 하려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남 소락은 자리에 일어나지 않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공자께서는 정녕 신도 가를 버리시려 합니까?”
광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가 치밀자 전신에서 기세가 일어나 남 소락을 압박하였다. 남 소락은 전신을 누르는 무형의 압박에 숨쉬기가 답답해졌다. 단순한 일류 고수만으로 이런 압박감을 주기는 어렵지만, 하단전과 더불어 상단전도 연마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는 부동명왕공의 효용이었다. 남 소락은 웃는 얼굴에 이가 떨리면서도 끝까지 할 말을 다했다. 얄팍한 수작을 부리러 온 게 아니라 일척도건곤의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신도 가문을 위한다면, 공자님께서 의무를 다하고자 하신다면...세력을 모으셔야 합니다.”
“무슨 궤변을 하려는 가?”
차갑게 자르면서도 광협은 무의식중에 일으켰던 기세를 가라앉혔다. 가문을 위해 세력을 모아야한다는 모순에 흥미가 동했다. 자고로 내분은 지양해야할 것이 아니던가? 광협의 속내를 짐작한 듯 남 소락은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가중家中 사실 오래 전부터 분열되어 있습니다. 가주님이 살아있을 적에는 별 문제시 되지 않았으나 급서하셨으니 표면으로 나오는 것은 시간이 문제입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공자께서는 신협 공자께 머리를 숙일 수 있는지요?”
“불가不可. 그럴 생각도 없거니와 저쪽도 난색을 표하겠지.”
한 산에 두 호랑이가 동시에 살 수 없는 법이다.
“신협 공자께서 장로들의 열에 아홉의 지지를 받고 계십니다. 문무文武와 지용智勇을 갖추신 이상적인 후계자감이시죠.”
라이벌을 칭찬하는 소리에 광협은 처음에는 불쾌했으나 끝까지 참고 듣기로 했다.
“하지만 저의 밑에 것들 시선에서 보면.....귀인이 정이 없다고 할까요. 허례허식이 적잖게 있으십니다.”
“장로들을 신경 써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겁니다. 장로님들의 지지를 받는 만큼 신협 공자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베풀어야하지요. 하아, 정말이지 그 분은 저희로선 인의 장막 깊숙한 곳에 계시는 높으신 분이지요. 인사 한마디 하기 위해 찾아가면 여러 차례 절차를 거쳐야하는 데다가, 기름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잘 이야기하다가 딴 데로 빠진 남 소락은 짐짓 손바닥으로 눈썹 위를 가려 눈부시다는 시늉을 하였다. 희극적이라서 광협조차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반면 공자께서는 바로 소인을 만나주셨습니다.”
“나도 신협처럼 규모를 갖추게 된다면 응당 그리할 것이다.”
속지 않겠다는 듯 광협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맞습니다. 조직이란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절차가 복잡해지게 되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신다 해도 광협님은 신협님이 주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뭔가?”
“우리들이 장로들처럼 언젠가는 존귀해질 수 있다는 기회. 기존에 가진 부와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 새 가주님을 따라 신도 세가의 비상에 적극 동참할 수 있는 기회.”
인간은 겉 표정에 구애되고 속내를 다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광협은 남 소락의 진심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광협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 소락이 말한 기회는 자신에게 또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력을 모은 것과 의혹을 푸는 것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사주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간단한 일입니다. 급서한 이후가 자신 혹은 특정 집단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변수를 만들면 당황하여 제 2의, 제 3의 수단을 강구하겠지요.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 그 때 마각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수 요소. 시간을 끌기 위해서라면 대립각을 형성할 만큼 광협님이 세력을 갖추셔야합니다.”
남 소락은 남은 차를 입안에 훌훌 털어 식혔다.
“여기에는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광협 공자님을 지지하는 이들은 사정이야 어쨌든, 신협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의탁할 수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태반일 것입니다. 대결하지 않고 무난히 신협 공자에게 승계가 이어 진다 해도 뇌관만 뽑아낸 것일 뿐. 신도 가 뿐만 아니라 하남무림 전체의 불협화음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요. 만약 우리가 몰락한다면, 신협 공자와 장로들 입장에서는 반항의 싹들을 벌초하는 셈이니 아니 좋겠습니까?”
“이기든 지든 궁극으로는 신도가의 미래에는 도움이 된다?”
“네. 그 주체가 누구냐에 차이가 있을 뿐.”
광협은 고질증세만 아니라면 한바탕 웃고 싶었다. 상대방의 궤변적 발상이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터뜨릴 곳이 없어 속으로 끓어두었던 야심이 밖으로 통할 길을 찾은 것 같아 청량한 느낌에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인면수심人面獸心 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실력을 우선시해야겠지. 그게 무림인이니까.”
광협은 소락에게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고 시비를 불러 차뿐만 아니라 다과까지 내오도록 시켰다. 상이 나오고 시비가 물러가자 광협은 자세를 바로하고 청했다.
“불씨를 준 것은 감사하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가?”
“낙양으로 가십시오. 거기에 무림맹 건물이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긴 무주공산인데?”
무림맹 이전은 신도 세가와 분리하려는 일환으로, 천협 주변과 신도 세가의 그늘 밑에 세를 형성하는 장로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천도 정책이었다. 하급 무사나 중소 무가 출신, 그리고 장로 밑에 일부 자제들은 이 정책에 큰 기대감을 품었지만, 당연히 장로들 입장에서는 좋을 리가 없고 여러모로 무산시키기 위해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십패의 하나로 신도 가를 융성시키고 하남을 지배한 웅주雄主의 추진력은 대단하여 건물을 세우고 낙양 일대에 기반을 둔 신흥 장로 층인 류 원종을 끌어들여 광협을 지지하도록 했다.
“무주공산이라면 채우면 그만입니다. 가주께서 유언을 남기지 못한 바람에 신협 공자 측도 명분에서는 낙관할 게 못됩니다. 물론 아무 일도 없다면 순리에 따라 신협 공자를 지지하겠지만, 두 분이 다투시면 멀리서 관망할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어떻게든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 세를 불리셔야 합니다. 낙양에 있는 무림맹은 전 가주님이 특별히 애착을 가지신 곳이라 사람은 아직 없어도 비축한 물자는 풍부합니다. 온전히 차지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안 해도 일 년은 능히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광협은 개안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저했다.
“49제도 다 마무리되지 않았네.”
입관할 때까지 다 기다리고 나면 소용없다. 남 소락은 광협을 차분히 설득했다.
“그건 신협 공자님께 맡기십시오. 그분이 유체를 모실 동안 광협님은 전대 가주님의 의지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전대 가주님 성격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우는 꼴을 좋아 할까요, 아니면 생전에 못다 이룬 유지를 잇고 나중에 후하게 장례 지내는 것을 바라실까요.”
“자네 말이 옳네.”
광협은 언제 고민했냐는 듯 재고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은 번복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성미였다. 제안을 한 남 소락이 되려 놀랄 정도로, 짐을 최소한 정리하면서 류 원종 숙질을 불러 남소락을 소개하고, 빠르고 간결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류원종은 남 소락이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졌지만, 남 소락이 비상을 주거나 고독을 심으면 당장 복용하겠다는 결심을 내비쳤고, 광협의 지지로 극적으로 풀었다.
떠나는 명분은 남소락과 류원종이 머리를 맞댄 끝에 금방 만들어졌다. 낙양으로 떠날 인원은 서른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광협과 류 씨의 혈족들, 남 소락이 데려온 이들이 전부였다. 이들은 무공은 뛰어나지 않으나 저 나름대로 특기가 있어 도움이 될 만한 동지 열 명을 추려온 것이다. 그 안에는 형욱과 세휘가 분장을 하여 잠입해 있었다. 덕후는 신주오협과 신협에게 접근할 목적이 있었으므로 이번 여정에서는 빠진 상태였다.
이 계획을 짰을 때, 형욱은 덕후 곁에 떨어지는 것에 크게 난색을 표했지만, 덕후와 세휘의 설득으로 가까스로 마음을 돌렸다. 가주의 죽음만큼은 미심쩍은 부분을 씻어 내야하지 않겠는냐는 것이 골자였다. 대신 형욱은 자신의 애병을 덕후에게 맡겼다. 섹스 할 때조차 손에 놓지 않았던 검을 덕후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정표였다. 받아든 덕후로서는 정표치고는 좀 크고 무거워 떨떠름한 안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를 해야했다.
사흘 뒤, 새벽닭이 홰를 치기 시작하자 정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무리들이 머리 수 대로 말 고삐를 이끌고 개봉성문 서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협 무리들 모르게 조용히 빠져나가도 부족할 처지에 당당히 나간 것은 남 소락의 진언 때문이었다.
“우리가 출발하면 어차피 눈치 채고 따라붙을 터이니, 큰 소리 치기 위해서는 쥐새끼처럼 나가지 말고 정문으로 나가야합니다.”
광협 일행은 성문 밖까지는 무사히 빠져나갔다. 개봉은 신도세가의 터전이기 때문에 아문 소속의 관리들은 협조적이다 못해 아랫사람처럼 행동했다. 인적이 떨어진 곳까지 오자 다들 말에 올라타 달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다가닥하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가장 선두에 달려오던 이가 사자후를 토했다.
“멈추시오!”
말이 메아리치기 전에 쉰이 넘는 무인들이 반 마장 안쪽으로 접근했다. 얼굴을 확인하니 관일성과 장야직이었다. 장야직은 미행하다가 쫓아왔다는 것을 얼버무리려는지 말 속도를 점점 늦춰 3장 거리에서 완전히 멈춰 섰다. 그리고 짐짓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딜 급히 가십니까?”
“낙양으로.”
짧은 대답에 장야직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다시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주님의 49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상중에 일정을 조금 더 미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장야직의 언변은 사리에 그른 점이 없었다. 남 소락이 포권을 하며 대신 나섰다.
“소인은 공자님을 시중하는 남 모라고 하옵니다. 존경하는 장로님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장 야직은 하급 무사가 나서자 언짢은 기색이었으나 그 시급한 용무를 말해보라는 듯 궁금한 표정을 하여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입관식을 거치기 전에 낙양의 맹에 분향소를 꾸리기 위해서 입니다. 가주님은 생전에 하남 무림인의 덕망을 얻으신 분. 그리고 낙양 또한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신 지역이지요. 빈소를 그곳에 정하는 것은 본가가 개봉에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분향소는 낼 수 있지 않습니까?”
“여러 곳에 둘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공자님이 직접 주관하는 것과는 무게가 틀리지요.”
“굳이 광협 공자께서 갈 필요가 없지 않나? 다른 공자 분을 보내도 크게 어긋남은 없을 걸세.”
“오, 그렇다면 신협 공자님께서 대신 가주시겠습니까?”
“놈! 뚫린 입이라고 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장야직은 여유를 버리고 호통을 쳤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무사가 상주喪主를 바꾸라고 제안하는 모양새가 돼서 불쾌했다. 적반하장이라고 움츠러들기는커녕 남 소락이 언성을 높였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낙양은 가주님이 본가만큼이나 중요하게 취급한 곳! 세가를 벗어나 하남의 미래를 걸 만큼 말이지요! 아무 공자나 보내는 걸로 체면치례를 하려는 꼴을 보니 참으로 민망하외다!”
계속 웃는 얼굴로 하여, 노기가 전하는 박력은 없었다. 그러나 당하는 상대의 비위를 긁는데는 이보다 뛰어날 수 없었다. 도가 계통의 무공을 연마하여 수양이 깊다고 자부하던 장야직도 안색이 붉을락 해질 정도였다.
“더 말은 필요 없소. 작정하고 억지를 쓰고 있으니 일단 강제로 모시는 수 밖에!”
관일성이 창을 고쳐 쥐며 말에서 훌쩍 내렸다. 장야직도 그 소리에 사태를 파악하고 평정을 되찾았는지 따라온 이들에게 호통을 쳤다.
“공자님이 현혹되신 듯하다. 공자님만 생포하고 나머지들은 공자님을 꾀던 사특한 무리이니 다 없애라!”
장로의 명에 수하들은 하마하여 경신을 발휘해 순식간에 포위한 다음 병장기를 꺼냈다. 기마전투를 할 만큼 집단 마술馬術에 뛰어난 것이 아니고, 말이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은 광협 쪽도 마찬가지였던 듯 싶었다.
양편이 내지르는 기합과 살의로 관도는 흉흉해졌다. 일행 중 가장 호전적인 류 위범이 사자후를 터뜨리며 관일성을 향해 통나무만한 팔뚝을 과시하며 장권을 휘둘렀다. 상대가 무공에 일가를 이룬 인지라 사정을 보지 않고 진산절기인 맹호육합권을 전개한 것이다. 보통 사람의 손보다 한 배 반은 큰 양손은 거암도 산산조각 낼 위력을 담고 있었다.
관일성의 눈매가 좁혀지더니 창 끝이 배꽃처럼 분분한 섬영을 발하며 대적해갔다. 이화梨花창법으로 변화의 극을 추구하는 현란함을 장기로 하고 있었다. 숙부인 류원종도 공동파의 절기와 가전의 무공을 융합한 행운유수를 극성으로 전개하며 일척에 가까운 강선鋼扇을 꺼냈다. 대를 백련강으로 삼은 이 선은 끝을 뾰족하게 깎아 후려치기 뿐만 아니라 조공처럼 긁기와 비수처럼 찌르기도 가능했다. 류원종이 펼치는 현명혼원선은 그의 외모와 어울려 명호를 생사판관으로 올린 절기였다. 장야직도 질세라 장검을 뽑아 가장 자신있는 절기인 매화검으로 상대했다.
양편에서 고수라고 자신할 수 있는 이들이 발을 묶자 남은 것은 무사들의 싸움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숫자가 두 배는 많은 장로들의 세력이 우세한 것 같지만, 막상 격돌하고 나니 결과가 달랐다. 남 가락이 데려온 무사들 중에서 가장 말수가 적고 곱상한 소년이 나서더니 변수가 일어난 것이다.
“으아아악!”
“큭!”
가장 선두에 선 무사의 비파골을 검첨으로 찔러 부수고, 두 번, 세 번 째 로 달려오던 상대의 옆구리와 겨드랑이 밑을 거의 동시에 베어갔다. 그러자 수를 믿고 달려오던 무사들이 주춤해졌다. 소년이 네 번, 다섯 번째 상대를 짚단처럼 베어버렸을 때, 열세에 은근히 기가 꺾여있던 광협 측 무사들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에 기세를 올리며 돌진했다.
단 몇 수만에 전황을 뒤집어버리자 장야직은 당황했다. 그 틈을 놓칠 류 원종이 아니었다. 활짝 펼친 강선의 끝이 여러 곳에서 날리는 비수처럼 장야직의 상체 요혈을 노려왔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기를 깨달은 장야직은 살을 주고 뼈를 깎을 각오로 낙화구배洛花捄盃을 전개했다. 깡! 쿵! 하는 고막을 때리는 충돌음이 들리더니 각자 두어발짝 물러났다.
장야직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류 원종은 평소 피부색이 밀랍과 같아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초식만 아니라 공력까지 정면충돌한 셈이라 서로 진탕하는 내력을 다스리기 위해 서로 노려볼 뿐이었다.
장야직에 비해 관일성은 사정이 나았다. 연배가 윗줄이고 내공과 공력이 한수 위인지라 류 위범의 장권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류 위범은 관일성에 비하면 투쟁심과 혈기가 위였다. 상처를 입을수록 성난 범처럼 달려드니, 관일성도 당장 그를 어찌하지는 못하고 지구전으로 나아갔다. 사전에 이럴 것 같아서 많은 수하들을 데려왔으나, 고수 하나가 있을 줄은 예상 못했다.
“어느 방면에서 오신 고인이시오?”
몸은 류 위범을 상대하면서 이목을 나누어 물었다. 남소락이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소개했다.
“이 분은 단혼도라고 하오!”
강동을 위진한 단혼도의 명성에 중인들은 의혹과 함께 철렁한 심정이었다. 그가 꺾은 유명 고수로는 강 무제와 하 무태가 있었다.
“단혼도가 왜 광협 공자 편을 드는 건가? 천하문이 개입한다는 의미인가?”
“이 일은 천하문과 무관하오. 정말로 그럴 의사였으면 숭무단을 이끌고 왔을 터.”
“귀하의 행동이 문주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소?”
“빈객이니 언제든지 떠나도 상관없소.”
형욱은 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사전에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덕후가 문답을 복습시킨 터라 간결하게 상대의 항의를 막았다.
“일전에 남 무사에게 빚을 진 것이 있어 부득불 개입한 것이오. 나는 두 공자 사이의 일에는 관심 없소.”
동기까지 밝히자 장야직과 관일성은 그 원인인 남 소락에게 향했다. 두 고수의 형형한 눈빛을 대하자 남 소락은 등골이 축축해지고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억지로 어깨와 배에 힘을 주었다. 이럴 때 가면처럼 웃는 얼굴이 도움이 되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우리 사이가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피를 보는 것은 이롭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세를 점할 수 없음을 알자 장야직과 관일성은 무언의 합의를 보고 물러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수하들에게 사상자와 부상자를 수습하게 하고는 말에 올라 물러났다.
“조만간 볼 일이 있을 터. 그 때가서 오늘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르오.”
장로들이 물러나자 광협 일행은 한 시름을 놓았다. 극한의 긴장에 사로잡혔다 풀려나자 털썩 주저앉는 이도 있었다. 가까스로 내식을 조절한 류 원종은 피범벅을 한 류 위범을 부축했다. 류 산산도 울상이 되었으나 흉신악살 같은 모습에 겁을 먹고 감히 다가가지 못하여 발만 동동 굴렸다.
“괜찮다! 겉가죽만 상했을 뿐이야!”
금창약을 바른 부위가 쓰라릴 텐데도 큰 소리 치는 류 위범이었다. 류씨 숙질과 광협이 단혼도에게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하려하자 남 소락이 양팔을 벌려 말렸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가급적 늦춰달라는 당부 때문에 통성명은 따로 하는 편이 좋으리라 판단했다. 8년이라는 세월 때문에 형욱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낯익게 되고 정체를 추론할 위험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낙양에 가서 합시다. 언제 마음이 바뀌어 추격할지도 모릅니다.”
남 소락의 말에 형욱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떡였고, 현실을 깨달은 일행은 급히 전장을 정리했다. 다행히 형욱이 초반에 적의 기를 팍 죽여 놔 부상이 심한 자는 없었다. 대충 응급처지를 한 뒤에 말에 올라 낙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편 신도 세가로 돌아온 장야직과 관일창은 장로전으로 찾아가 수석 장로인 모 경진에게 광협이 낙양으로 빠져나간 일을 알렸다. 다 듣고 난 모 경진은 혀를 찼다.
“그예 일을 저질렀군. 얼마 전부터 수상쩍은 기미가 보여서 만일에 대비하라고 했는데, 결국은 놓치고 말았구려.”
무능을 책하는 것 같아 두 장로는 언짢음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모 경진은 모른 척 중얼거렸다.
“단혼도 라면 진성이가 데려온 공자의 호위가 아니던가?”
모 경진은 호위하고 있던 무사를 불러 진성을 데려오도록 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진성이 나타났다. 진성은 조부가 굳은 얼굴을 하자 덩달아 불안해졌다.
“네가 데려온 공자는 아직 있느냐?”
“네, 방금 차를 마시는 중이었습니다만.”
경진은 손자의 대답에 혼란스러웠다. 한 패라면 도주했을 텐데 그 자리에 눌러앉아있다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동행하던 이들은?”
“오늘은 안보였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네가 알 일은 아니다. 너는 그 공자라는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던 잘 기억해두었다가, 내가 물으면 빠짐없이 알려다오.”
진성은 그렇게 잘랐다. 직계 손자지만 수석 장로의 입장에서 볼 때 진성에게 거론할 사안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하남의 유력한 조문객들이 찾아와 자신을 비롯한 장로들도 총동원하여 대접하느라 정신없는데, 광협이 돌발적으로 빠져나가자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을 떠올리면 골치가 다 아팠다. 손자에게 마음 좋게 돌려 말할 형편이 아니었다. 진성은 일방적으로 질문을 차단당하고 감시하라는 명까지 받자 불만이 생겼으나 감히 겉으로 내색하지 못했다. 읍을 하고 물러서서 방금 덕후와 담소를 나누던 정자로 돌아왔다.
“무슨 일로 부르셨소?”
“...아무것도 아니오. 그냥 부르신 거요. 그보다 부탁할 게 있다는 건 뭐요?”
닳고 달은 인간이라면 능숙하게 관리할 텐데, 방금 전까지 격의 없이 굴던 사이에서 감시하는 입장이 되자 진성은 곤혹스러움을 아직 감추지 못했다. 덕분에 덕후는 내막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했다.
“모 형....그게....”
덕후는 머뭇하다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진성은 당황했다.
“무슨 곤란한 일이 있소?”
“내 호위가 볼 일이 있다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제 갈 길을 가버렸소.”
“허, 안 보인다니 그렇게 되었군요. 그런데 괘씸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주인을 버리고 가다니...”
할아버지한테 불려간 일이 그 때문이라 진성은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 탐문했다. 덕후는 기다렸다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원래 데리던 호위들은 도적들을 만나 떼죽음을 당해서 그 단혼도가 날 구해준 거요. 그래서 강제로 붙잡을 처지가 못 되오.”
진성이 이 일을 경진에게 알려 조사단을 파견해도 사실로 판명 날 것이다. 덕후는 천하문을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은 세휘를 통해 밀명을 받아 증거 조작을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상이 끝나면 돌아가야 하는데 당최 믿을만한 보표가 없고...단혼도 만한 고수를 돌아가는 길만큼 구해다 달라는 게 모 형에게 하는 내 부탁이오. 사례는 넉넉히 주리다.”
진성은 난감했다. 단혼도 같은 고수가 그렇게 흔한 게 아니었다. 장로급을 움직여 달라는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관부에 연락하는 건 어떻겠소?”
“세상에 믿을 놈들을 믿어야지. 산중대왕이 소리 지르면 꽁지가 빠져라 달아날 놈들이오. 그리고 나는 양껏 유람하러 온 거지, 관이랑 얽히면 강호에 나온 보람이 없지 않소. 사람 여럿 데리고 다니는 건 행동에 제약 받으니 싫고, 고수 한 명만 붙여주시오. 모 형이 힘들다면 조부님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소?”
덕후가 당장 소매를 잡을 듯이 징징대니 모 진성은 어쩌라고, 하고 뿌리치고 싶었다. 이제껏 만나오면서 지금만큼 강하게 떨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덕후의 변모에 대해 노회하게 의심하기보다는 젊은이 특유의 결벽적인 감정이 먼저 일어났다. 그나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할아버지의 엄명도 있고 이제까지 쌓아왔던 관계를 물 먹이고 싶지 않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이번 일을 잘 넘겨주면 득을 볼지. 속셈을 하는 데 덕후가 눈가를 훔치며 주문처럼 옹알거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청력을 돋우니 들리긴 했다.
“경진이 다 해주 실거야. 희망이 있잖아. 희망이. 10 시진 동안 희망 없이 살았지만...”
진성은 정나미가 떨어졌지만 자신의 사명과 이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확실히 당장은 어렵지만, 차차 수를 내겠소. 우린 친구가 아니오?”
“오오, 고맙소.”
덕후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얼굴로 연거푸 진성에게 감사를 표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이랬을까 하는 마음에 한심함을 금치 못해 진성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고개를 연신 조아리면서도 덕후가 입가에 썩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