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54
신주오협에 묻어가기로 한 덕분에 덕후 일행은 신도세가로 지체하지 않고 입성할 수 있었다. 금분세수를 앞 둔 천협을 만나기 위해 중원각지에 몰려온 인파들로 고도古都 개봉 거리는 왁자지껄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 신도세가에 입성했다면 덕후 일행은 중간 실무자를 찾아 은근히 뇌물을 찔러주거나 며칠을 기다렸다 들어서야 했을 것이다.
신주오협의 부모들이 하남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신주오협의 우두머리인 모진성이 부친의 성명을 언급하는 것으로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모진성은 높은 담장과 우뚝 솟은 전각 사이를 누비더니 일행을 사위가 한적한 별원으로 안내했다.
“여기는 귀빈貴賓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한 별저別邸입니다.”
덕후가 내원에 심어진 정원수들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감탄한다.
“일반적인 객실은 아니군요.”
“잘 보셨습니다. 하남에 쟁쟁한 무문武門의 식솔들이 잠깐 유할 때를 위한 곳이니까요.”
“과연, 중원무림의 기둥에 어울리는 별저군요. 이런 곳에 드나들 수 있다니, 세가내에 모 형의 지위가 어느 정도 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하, 허명만 많지요. 아직은 부모의 후광을 벗어나지 못한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모진성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겸양을 했다. 둘은 오는 동안 일행들 중에서 매우 친해졌다. 모진성은 관줄이 높은 덕후와 친해두면 장차 도움이 될 것 같았고, 덕후는 막후에서 신도세가를 주무르기 위한 패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유력자의 아들인 모진성과 미리 친해두면 여러모로 좋았다. 서로에게는 바람직한 윈-윈 교제라고 할 수 있겠다.
나머지 신주사협과 형욱 세휘는 그냥 그랬다. 세휘는 용모가 워낙 이질적인데다가 본인을 다짜고짜 악적으로 몰은 신주오협에게 앙금이 있었고, 단혼도 모드를 하고 있는 형욱은 무뚝뚝한 천성을 분위기처럼 두르고 있어 쉽게 말붙이기 어려웠다. 특히 일행을 공격했던 류산산은 몇 번 말을 붙이려다가 형국이 눈을 한번 치뜨자 겁을 먹고 백예궁의 뒤로 숨기까지 하였다.
“자, 오늘은 행장을 풀고 쉬시지요. 시비에게 일러 목욕과 석찬을 넣으라 하겠습니다. 내일은 제가 세가 내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모 형이 그래주신다면 고마울 따름이지요. 내일이 기대됩니다.”
덕후와 모진성은 둘은 허리를 약간 굽히며 포권으로 작별을 고했다. 모진성은 회랑 끝에 대기하고 있던 시비를 부르더니 덕후 일행을 안내하라고 일렀다. 후실 하나를 차지한 덕후는 시비에게 씻을 물과 석찬이 오는 시각을 묻고는 보내주었다. 그리고 세휘와 형욱 둘을 자리에 앉게 했다. 덕후는 스마일을 벗어던지고 야근에 잔뜩 시달린 사회인의 포즈가 되었다.
“두 사람, 나한테 불만이 있어?”
세휘는 흥, 하고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팩 돌렸고, 형욱은 눈을 깜빡이며 멀뚱히 있었다.
“가는 동안 알아서 친해져두라고 셋만 있을 때 누누이 말했잖는가? 형욱은 사교력이 좀 낮으니까 그렇다 치자. 세휘 너는 본 왕야가 커뮤니티를 쌓을 동안 뭐하고 있냐?”
“은근히 호희胡戱 취급하잖아요.”
흥, 흥 하고 콧방귀를 날린다. 덕후는 저 코에다 손가락을 찔러 평수를 확 늘려줄까 하다가 직전에 참았다.
“지금 우리가 놀러왔나?”
“일을 주시면 확실히 처리해요.”
“네 역할은 나대신 얼굴마담을 하는 거잖냐.”
“잘 하시던데요. 저보다 효과 있게 구슬리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시커먼 남자한테 친근하게 굴어야 하는데! 그 회화에 시간을 잡아먹을 바에 형욱과 엉덩이 맴매나 이것저것 어른의 놀이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안되겠어. 이 인간 어떻게 하지 않으면. 형욱과 세휘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맴매하겠다는 대상이 된 형욱은 얼굴이 뜨끈해졌다. 형욱이 조용히 발검하자 덕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옆의 화병을 들어 등은 벽에 댄 채 가슴 앞을 가렸다.
“이거 감정가가 수 백냥은 나가겠는데. 이런 문화 유산을 파괴하면 안 되겠지?”
형욱은 말없이 검격을 화병을 피해 날렸으나, 덕후가 가져다 대는 바람에 도로 회수하였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검과 미꾸라지처럼 피하는 둘을 두고 세휘는 딴 생각으로 빠졌다. 그녀가 보는 덕후는 모략이 필요한 경우를 빼놓고 인간적인 관계는 철저하게 담을 쌓으려하고 있었다. 아니 옅게 는 파도 깊이 파지는 않았다. 예외라면 마누라들과 양딸 정도?
그녀의 상념은 덕후의 도와달라는 외침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세휘는 한숨을 쉬며 둘 사이에 껴들었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세휘는 절정고수인 형욱이라면 알아서 회수할 것이라 믿었고, 덕후는 처음부터 방어 입장이었으니 신경쓸 필요는 없다 여겼다. 그녀의 짐작대로 형욱은 휘두르던 검을 도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 해. 굳이 여기서 결판낼 필요는 없잖아? 나중에 정식으로 대련을 신청하라고.”
눈치가 둔감한 형욱조차 파악을 수 있도록 정식으로, 에 악센트를 잔뜩 준 세휘는 이번에는 덕후에게는 어쩔수 없다는 음색으로 일렀다.
“공자님의 뜻은 알겠어요. 하지만 저들한테 대우받는 시점부터 틀리잖아요? 차라리 회의나 교섭 한정이라면 자신 있지만 밑바닥부터 친해지는 데는 힘들어요.”
그러나 여기서 꿈쩍하면 덕후가 아니다.
“답답하기는. 누가 밑바닥부터 친해지래? 미인계가 있잖아. 미인계.”
“저더러 여기저기 꼬리치는 여우년 짓을 하란 말인가요?”
세휘의 음색에 날이 섰다. 그러나 덕후는 형욱과 마누라들에게는 한없이 약해도 그녀에게만은 유독 흔들림이 없었다. 일말의 미안함조차 띄지 않는 표정에 세휘는 억울함마저 느꼈다.
“미인계가 얼마나 뒤끝이 많은데. 그리고 대상도 많아도 한 두 사람이 고작이라고요.”
“그런가, 너라면 가능할 줄 알았는데.”
“대체 절 뭘로 보는 거예요?”
울컥한 세휘가 쏘아붙이자 덕후는 한 숨 고를 여유를 가지고는 말했다.
“측근이지.”
“네?”
“볼 장 못 볼 장 다 본 사이란 뜻이네.”
그 말에 세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안면이 따끔해지는 감각에 화들짝 놀랐다. 형욱이 무의식중에 세휘에게 살기를 발출했기 때문이었다.
“아냐, 오해하지 마. 난 결백해! 공자도 뭐라고 말해요!”
“형욱 군. 그 날 말일세. 내가 전에 세휘를 두고 한 말을 기억하나?”
덕후는 후훗 웃으며 형욱을 다독였다. 형욱은 관심 없는 척 납검했다. 구함을 받은 세휘는 차라리 하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 옹이구멍에게다 하겠다고 공언한 인간에게 정상적인 해명을 기대한 자신이 바보다.
“측근이라 생각하시면 대접이라도 확실히 해주세요.”
“하고 있지 않는가? 영파에서 이국녀들을 긁어올 때도 군소리했던가?”
당시 영파는 교역항으로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당연히 중동과 서유럽의 여인들까지 흘러드는 경우가 있었다. 왕부에 감투를 쓸 때 세휘는 따로 부서를 마련하면서까지, 외국의 소녀들을 받아들여 교육했다. 같은 이계인 출신이라고는 하나, 세상에 별 위화감 없이 녹아든 덕후와 달리 금발벽안의 특징 때문에, 섞이지 못하고 부유해온 세휘는 알게 모르게 향수병 비슷한 것에 걸린 상태였던 것이라 집단을 만듬으로서 해소하고자 하였다. 소녀들은 타향만리에서 중원인들과 확연히 다른 그녀를 큰 언니처럼 따랐다.
“큿, 찬성했잖아요. 실제로도 도움이 되기 시작하고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세휘의 교육을 받은 그녀들은 왕부 내에 회계와 감사 전문 요원으로 쓰이고 있었다. 왕부라는 폐쇄된 공간에 있고, 외국인이라는 특성 때문에 뇌물이 먹히지 않아 비리가 개입될 요소가 없었다.
“예산이 허락하는 한도 한에서라고 조건을 달았을 텐데? 난 고작 한 번가서 서너 명 정도로 여겼지. 아예 정기적으로 나가서 백 명이 넘도록 데려올 줄은 몰랐는 걸.”
덕후는 놀리듯이 반박했지만, 더 자극하면 안 좋다고 여긴 듯 말투를 바꿨다.
“내가 널 먼저, 직접 버리는 일은 없을 거다. 좋아도 싫어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측근이니까 말이지.”
그것은 형욱도 모르는 태생적 비밀을 간직한 자의 본심이었고, 세휘는 그 점에서 인상을 살짝 쓰면서도 약간은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먼저, 직접이라는 뉘앙스로 보건데 조건만 충족하면 척을 질 수 있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무언가 파국이 있기 전까지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꽉 붙잡고 있어 내치지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덕후도 마음껏 심술을 부리는 것이고, 세휘도 대놓고 반발하는 것이다. 만약 가식 대결로 흐른다면 둘 다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쪽이 먼저 손을 썼으리라.
이 때 시녀가 씻을 물과 석찬이 준비되었다고 고하는 소리에 셋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신도 세가에서 할 일을 분감하고 맡은 바를 점검하는 것으로 그날 밤을 넘길 수 있었다.
다음 날, 정갈한 조찬을 들고 식후 차를 마시고 느긋하게 있노라니 모진성이 나머지 사협을 이끌고 찾아왔다. 덕후도 이미 나갈 채비를 마쳤기 때문에 시비에게 따로 차를 내오라할 것 없이, 세휘와 형욱을 데리고 따라나섰다.
모진성과 덕후가 앞장서며 신도세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행보를 주도했고, 나머지는 끼리끼리 주고받으며 뒤따랐다.
“낙양에도 이만한 규모가 신설되고 있단 말이지요?”
“하남 전체로 보면 개봉은 아무래도 치우친 편이니까요. 후보지로 정주가 있었습니다만, 성도省都 이다보니 꺼림칙해서....같은 고도古都인 낙양으로 정했습니다.”
“이전을 하려함입니까?”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진정한 하남맹으로 거듭나기 위한 사전준비랄까요.”
“과연, 대의를 생각하는군요.”
분위기를 타는 바람에 자기네 내정을 타인에게 너무 앞서 말했나, 살짝 후회를 하던 모진성은 덕후가 별 생각 없이 수긍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안도했다. 별 관심없는 척하지만 덕후의 머릿속은 팽팽히 돌아가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천하문에서 전해준 정보랑 모진성이 방금한 말이랑 대조해보니 딱 맞아떨어졌다.
“저야 무림인이 아니다보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주로서는 보통 결단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세가보다는 하남무림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니...”
“확정 사안은 아닙니다. 십 년 전부터 꾸준히 거론된 논의였고, 차근차근 준비해온 것에 불과하니까요.”
덕후는 이 말을 가신들의 압력으로 해석했다. 이전은 신도세가와 하남맹을 분리하는 일환일 것이다.
-어쩐다, 신도 세가의 차기 가주가 하남맹을 아우를 정도로 역량이 있느냐, 아님 하남무림 쪽에서 밀어주는 인물이 신도 세가를 하남의 중심축에서 변두리로 떨어뜨리느냐 인데....
신도 형욱과 끈이 닿아있는 덕후로서는 전자로 흐르는 게 좋았다. 혈연이 이어져있고, 세가 내 형욱의 입지를 어느 정도 조성해줌으로서, 하기에 따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반면에 후자라면 처음부터 작업을 걸어야 하니 성가셨다. 형욱이 신도 세가의 출신이라는 점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뇌 속은 어지러울 정도로 팽이치기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담소를 나누던 덕후는, 모진성이 중정中庭에 이르자 자세를 바로 하는 것을 깨닫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진성 뿐만 아니라 남은 사협들도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의 태도가 변한 것은 내원에서 중정에 모습을 드러낸 일곱 명 때문이었다. 초로에서 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하고 굳게 편 허리에는 그만큰 주변을 내리누르는 듯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저들이 하남의 실세들 같군.
“가주님을 뵙습니다.”
덕후의 짐작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모진성이 두 손을 맞잡고 읍을 하였다. 남은 신주오협도 마찬가지였고, 덕후가 먼저 솔선하자 세휘와 형욱도 마찬가지로 따라했다. 맨 앞에 있던선풍도골 풍의 노인이 반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예는 그만하면 됐다. 조금 일찍 왔구나.”
노인의 눈이 덕후 일행에 향하자 모진성은 재빨리 소개를 하였다.
“반갑네. 남양 모가장의 모 경혼이라고 하네.”
“무림에 몸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만, 어르신의 높으신 명성은 모 형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허허, 근래에 귀가 간지럽다니 이 아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구먼.”
변죽 좋은 덕후의 말에 당황하는 모진성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는지 모 경혼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덕후를 보던 경혼의 눈빛에 이채가 발해졌다.
“혹시 무공을 익혔는가?”
“친인이 금의위에 계신지라 몇 수는 배웠습니다.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 관뒀지요.”
덕후의 무공 사부는 우희선이다. 큰 마누라이며 금의위장도 수하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저 이들에게 자신의 빽이 생각보다 있는 정도라고 암시해주는 정도면 충분했다. 경혼이 보기에 덕후의 근골은 좋아 보이는데, 무공은 평범한 것으로 미루어 무림에 뜻이 없어보였다.
“자네만 괜찮다면 진성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게나.”
“이를 말씀입니까.”
“모 형만 눈도장을 찍으려하오?”
곁에 있던 40대의 파리한 안색의 중년인이 냉소를 지었다. 특이하게 눈의 띄는 묵의를 입고 있었는데 병색이 짙은 안면과 어울려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덕후는 그가 나서자 모 경혼의 안색이 순간적이나마 불쾌한 색을 띄었다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류 형은 섭섭한 말을 하는구려. 손주의 친구라기에 반가운 마음이 앞섰을 따름이지.”
“후후, 이利를 따르는데 어련하실까요.”
“허허, 오해라네. 허허.”
경혼은 못 당하겠다는 제스처로 상대편은 까칠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가로들 사이에 알력을 보여서는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잘 다듬어진 세 가닥 수염을 지닌 이가 나섰다.
“난 목무숭이라고 하네. 여기 이 분은 류 원종이라 하고 여기 류 위범이와는 질손 사이일세.”
숙부와 다르게 거구에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장비 형상처럼 수염이 고슴도치로 빡빡하고 약간 열어진 상의에는 가슴털이 억세보였다. 푸줏간에 데려다놓아도 도축꾼처럼 보여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덕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뒤에 있는 류산산에게로 향했다.
“류 낭자와...?”
“사촌이 되지!”
쇳종을 치는 것처럼 카랑한 음성이다. 류산산이 겁먹은 듯 백예궁의 뒤로 숨었다. 위범한테서 얼핏 서운한 기색을 읽은 덕후가 점수를 따기 위해 구라 깠다.
“과연, 기질이랄까, 닮은 것 같습니다.”
“호오?”
“악적을 처단하기 위해 소저가 가장 먼저 검을 휘둘렀습니다. 저 작은 몸집에 그런 담대한 용기가 어디 있을까 궁금하게 여겨왔던 차였는데 형장을 보니 알만하겠습니다.”
“흐흐, 그래도 수작은 안 돼.”
마음에 든다는 건지 아님 겁을 주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류원종은 못마땅하다는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만용을 부린게군. 딸이 신세를 졌네.”
류산산의 성미를 잘 아는지, 묻지도 않고 대강 전후를 짐작한 듯 했다. 비슷한 일이 전에도 있던 모양이다. 둘의 소개가 끝나자 목숭무는 남은 셋도 소개해주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인은 백삼동이라 했고, 경혼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장년인은 장야직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자루 창처럼 무림인보다는 군부의 인사처럼 엄격한 기세를 두른 이는 관일성이라고 하였다. 덕후는 신주오협이 하남에서 쟁쟁한 이름을 날렸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식들은 아직 별 볼일은 없어도, 윗대가 실세 중의 실세였기 때문이었다.
모진성이 덕후 다음에 유명한 신진고수인 단혼도를 소개할려는 찰나, 전문이 벌컥 열렸다.
“대공자님 납시오!”
“이공자님 납시오!”
경쟁하듯 호령하는 외침과 함께 두 무리의 무사들이 뛰어들었다. 잰걸음 수순이었지만 경신법을 알기에 뜀박질이나 다름없는 동작으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각 무리의 중심이 되는 두 청년이 느긋한 걸음으로 중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왼편, 장로들과 인접해 있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귀티 나는 화의 청년이 아는 체를 하였다. 말쑥한 차림새에 준수한 용모였다.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가주님을 뵙고 오시는 길입니까?”
“광협廣俠 공자님은 어언 행차시오?”
“가주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쓴 웃음을 짓는 광협은 반대편 무리를 의식하는 눈초리였다. 반대편에 있는 대공자 신협信俠은 광협은 물론 장로들을 아는 체 하지도 않았다. 그의 용모는 광협과 정반대였는데, 부동존처럼 성난 인상에 관자놀이에 푸른 핏줄이 꿈틀거렸고 턱은 이를 앙다문 것처럼 근육이 씰룩거렸다.
무언가 엄청 화난 일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덕후의 귓가에 형욱의 전음이 들려왔다.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평소 표정입니다.
덕후는 아연해졌다. 신협은 외지인인 덕후 일행을 잠깐 보았을 뿐, 그대로 중문으로 들어섰다. 무사들도 뒤를 따랐다. 광협 곁에 있던 무사가 다가오자 광협은 손을 들어 재지 하였다.
“한시라도 지체하기가 어려워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바쁜데 붙잡는 꼴이 되어 미안할 따름입니다.”
“다음에 차 한잔할 자리를 가졌으면 하는군요.”
그럼, 하고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신법을 발휘하여 유유자적한 자세로 중문 안으로 들어섰다. 말을 받던 모 경혼이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광협 공자는 예의를 아는군요.”
“일촌이라도 급한 일 같은데, 선후를 아는 것은 신협 공자님이지요.”
류원종이 반박을 하였다. 냉랭한 기류가 장로들 사이를 감돌았다. 모진성이 조심스럽게 청했다.
“저희는 아직 주 공자에게 장내를 다 소개하지 못했으니 마저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응? 허허, 그러게나.”
경혼이 깜빡했다는 듯 응하자 신주오협과 덕후 일행은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왔다. 그러나 아침과 같은 재미는 없었다. 모진성은 미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고, 다른 신주오협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덕분에 덕후가 원치 않는 오버 액션을 가미하며 일행을 이끌었고, 점심 때가 되자 자연스럽게 별원으로 돌아와 헤어졌다.
그날 밤.
고고한 달빛아래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장원을 도는 호위무사조차 새나 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미한 기척이 내원으로 향하고 있엇다. 어둠과 동화되어 한자루의 검을 든 채 야행의를 입고 전각과 전각 사이를 경신술로 날 듯 이동하는 이는 형욱이었다.
몇 차례 뛰어넘었을까, 형욱의 신형이 어느 전각의 추녀마루 위 기와에 일말의 잡음조차 내지 않고 엎어졌다. 형욱이 바라보는 끝에는 사방이 같은 전각으로 갇힌 연무장이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사물과 동화되고 있노라니 누군가 달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하얀 머리카락이 달빛을 밭아 은색으로 빛났고, 비단 장옷은 암청색으로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듯이 신령스럽게 보였다. 은미銀眉 아래 눈동자는 달빛을 응시하더니 형욱이 있는 방향을 주시했다.
“손을 쓰기 전에 나오너라.”
묵직한 음성에는 항거할 수 없는 기력이 담겨 있었다. 형욱은 몸을 일으켰다. 지붕을 박차고 형욱의 신형은 연무장 끄트머리에 착지했다. 깃털이 낙하한 것처럼 일체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상승의 부운공浮雲功 덕분이다.
“8년 만에 뵙습니다. 가주님.”
형욱을 알아본 가주, 신도 천협은 주름진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황혼을 바라보는 자신에게는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꼬마아이를 여인의 태가 나는 소녀로 바꾸기에는 빠른 세월이었다.
-우웅!
일순 형욱은 거력을 느꼈다. 검을 지니지 않았음에도 천협으로부터 무형의 검기가 발출되어 형욱의 전신을 사지백배로 찢는 것 같았다. 형욱은 검집에 손을 가져가며 대항할 기세를 끌어올렸다.
천협의 눈에 신광이 감돌았다. 낮에 왔던 두 후계자도 자신의 기도에 맞서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나 정체를 숨기고 온 어린 핏줄은 자신의 웅혼한 기세에 맞서 예리하게 도려내기라도 하듯 기세를 발출하고 있었다. 천협은 서서히 허점을 드러내보였다.
형욱이 그 빈틈을 노리고 공격하길 바랐지만 형욱은 오히려 뒤로 몸을 틀어 뺐다. 억지로 기세를 튼 덕분에, 천협의 기운이 망치처럼 명치를 가격해버리고 말았다. 형욱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쿨럭! 하고 반 사발의 검은 피를 게워냈다.
“왜 공격하지 않는 것이냐?”
“....가주께 어찌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천협의 자글자글한 입매에 주름이 졌다. 그러나 표정과 달리 어조는 엄준하기 이를데 없었다.
“검도에는 남녀노소가 없느니라. 너는 네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을 했어야 했다.”
“제 검도는 가주님의 검도와 같은 여유는 없습니다.”
소매로 입가를 훔치면서 진탕하는 내기를 다스리던 형욱은 가주의 등 뒤에 달려있는 현판을 힐끗 보았다. “검정중원劍定中原”. 천협의 일생의 목표이면서도 신도 세가가 이룩해야할 가훈이었다.
“오만하구나. 그만한 실력은 있는 게냐?”
“단혼도란 허명虛名이 있습니다.”
“그런 신진고수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약관의 나이에도 절정고수에 들었다고....”
천협은 놀랍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 정도면 나와 한바탕 어울릴만한 여력은 있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제 검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것입니다.”
형욱의 대답에 천협은 무언가 골몰하는 듯 하더니 무거운 탄식을 뱉어냈다.
“무림에 뜻을 둔 지 반백 년. 한 때는 구주팔황이 좁다고 누볐건만 마지막에는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가주님.....”
천협은 고개를 가만히 좌우로 저어 형욱의 위로를 차단했다.
“내 평생에 소원은 세 가지였다. 신도 가문을 무림제일가로 올려놓는 것, 천하제일에 어울리는 무공을 갖추는 것, 이 둘을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강호를 영도하기를 원했다. 내가 못하면 후대라도.”
형욱은 노익장을 과시했던 천협의 얼굴이 무척 피곤해보인다고 느꼈다.
“가주의 입장에서 물려줄 후대를 위해 이십 년 전부터 준비해왔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구세대를 발판으로 삼고 새로운 시대로 도약할만한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셋이 있었지만 서로 간에 기질이 하나같이 극단적이었지. 하나로 할 수 없다면 셋으로 나누어 협력케 하려했지만.....오늘 생각해보면 다 쓸데없는 짓이었던 것 같구나.”
독백하는 듯한 넋두리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욱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방금 세 가지로 밝히지 않았느냐?”
“그건 가주님 개인으로서 신도세가에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도세가에 가주님으로서 바라는 것입니까?”
형욱의 질문은 의외의 급소를 친 듯, 천협은 이제까지의 근엄함을 잊고 멍청하게 변해버렸다. 미혹을 발견한 듯, 자신 없는 어조였다.
“내가 곧 신도세가가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금분세수 같은 건하지 마시고, 목숨이 다하시는 순간까지 계속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은 나면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니냐? 죽을 운명을 지고 태어났기에 후사를 미리 준비하는 것 아니냐?”
“맞습니다. 그 사람이 새 가주님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곧 신도 세가가 아니겠습니까?”
“갈! 신도 세가는 개인 혼자 마음대로 좌우지 할 것 이 아니야. 만인을 이끄는 만큼 그에 합당한 자격이....”
선문답 같은 흐름에 호통을 치던 천협은 지금까지 대화에 모순을 깨닫고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흘렀다. 천협은 형욱의 질문에 자신을 돌아보았다. 천협이 깨어난 때는 이미 달이 서편으로 기울고 새벽이슬이 촉촉이 맺힐 무렵이었다.
“휴우....”
오랜 미망에서 깨어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천협의 노안에는 탈속함이 감돌았다. 항상 위엄에 깃든 신색을 유지하던 이전에 비하면 시골 촌로처럼 친근해보였다. 형욱은 그것이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제까지 부동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현기에 대한 공명 현상이었다.
“욕심이었군. 나만이 할 수 밖에 없던 것을, 내가 이루지 못했던 미래를 남들에게 그대로 강요했으니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새벽달을 보던 천협은 형욱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을 하였다. 가주로서가 아니라 친손녀에게 향하듯 온기가 담겨있는 듯 했다.
“세가로 돌아올 마음은 있느냐?”
“정은 팔 년 전에 다했습니다. 제가 세가에 못다 한 의무가 남아 있습니까?”
형욱은 담담히 되물었고, 천협은 한동안 고소를 머금었다.
“너를 쫓아낸 건 세가였지. 그것은 내 결정이었고.”
“저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가의, 아니 내게 이서 최선이라는 독단을 내린 것 뿐. 감사 받을 이유는 없지. 날이 밝는다. 외인이 가주의 연무장에 있기는 부적절하니 이만 물러가라.”
절을 하고 등을 돌리자, 천협의 음성이 어개를 타고 들려왔다.
“몇 번은 부질없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네가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로 태어나길 바란 적은 몇 번 있지만, 그렇다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등을 돌렸음에도 형욱은 천협의 모습을 눈 앞에 둔 것처럼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고 뿌리치듯 경신술을 발휘해 전각 위로 올랐다. 며칠 뒤에 금분세수 의식이 있을 것이고, 멀리서나마 마음 속으로 작별을 한 뒤에 왕부로 돌아가면 그만 일 것이다. 신임 가주와 관계는 주군이 알아서 할 문제이고.
그러나 형욱의 소박한 바램은 얼마 안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금분세수식 날 아침, 천협의 급서急逝가 전해진 것이다.
생존신고입니다. 시험 좆망해서....다시 마음잡고 공부하려고 합니다....만, 더 끌었다가는 감각이 사라질 것 같으니 앞으론 한 달에 1~2화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