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 15
그렇게 전쟁을 치루는것과도 같은 밤을 보냈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 아무렇지도 않게 보통의 나날들과 다를바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고 현지 역시 별다른 변화없이 그런 세상에 섞여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현지가 어디까지 기억을 하고 있는지 그날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치우는 알 수 없었다. 치우의 우려와는 달리 그날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혼란스러움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모습보다야 이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 현지와 치우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치우가 먼저 현지에게 말을 건넬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그 날밤 치우에게 던져진 숙제가 너무도 많았다.
기묘하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기숙사 건물과 그 안에 있었던 남자들...
그리고 마지막에 스스로 자신도 현지라고 말하며 나타났던 정체모를 인물...
모든게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현지의 폭주에 관한 문제였다. 현지는 위기의 순간에 치우로서도 놀랄만한 힘을 끌어냈지만 그 힘은 엄청난 생기를 소모시키는 바람에 오히려 현지를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지가 봉인상태의 치우를 해방하는 주문을 생각해내지 못한 덕분에 치우가 봉인상태로 현지에게 있어 모든 생기를 소모해버린채 죽는 상황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만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도 치우가 봉인상태로 현지에게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치우가 보조해줄 수 있는 생기만큼만 생기를 소모할 것이라는 보장 역시 없었다.
생기를 흡수하는 현지가 아닌 현지가 현지의 내부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치우와 인간에게 적대감을 보인 이상 기대할 만한 것은 못되었다. 치우는 성황당의 수호령을 생각했다.
"우선은 그 녀석을 찿아가봐야겠어.."
치우가 일단 수호령을 만나보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지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현지야 』
책상 의자에 앉은 현지는 치우를 부르는 소리에 치우쪽을 돌아보지도 않은채 대답했다. 그 날밤 이후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역시 요 몇일동안과 같은 패턴이었다.
치우의 말에 책꽃이쪽으로 옮겨지던 현지의 손이 굳어진듯 멈춰섰다.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후에 현지의 입이 열렸다.
『그럼..... 』
하지만 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뜸을 들이며 쉽게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잠시동안의 정적이 이어지고나서야 현지가 말을 이었다.
『다시...... 오지 않는..... 거야..? 』
이번에는 치우쪽에서 대답을 쉽게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지가 질문하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치우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것이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치우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몇 일이 지나도록 그 날 일에 대해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는 현지를 보며 치우는 현지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것이라 생각했다. 이유야 어쨌든 원래 그곳에 간 목적이었던 현지의 친구는 현지 자신의 손에의해 소멸되어 버렸다. 그것까지 현지의 기억에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현지가 은경이란 아이를 귀도로 찌를때 흘리던 눈물을 치우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더구나 현지가 정신을 차렸을때에 현지는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비록 그 상황을 알 수는 없다고하더라도 자신이 더이상 처녀의 몸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데다 그 일들이 일반적인 상식선 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기에 그런 일들에 대해서 현지 나름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을 하고있던 치우였다.
하지만 현지에게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것이냐는 질문을 들었을때 문득 치우는 자신이 현지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치우가 없었다면 현지가 은경이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것이고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 역시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일이 이런식으로 되어버릴것이라고는 치우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어버렸고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한 현지로서는 치우 역시 무섭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지금까지 현지가 치우를 하나의 귀신정도로 치부하지 않고 마치 한 명의 인간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왔기에 그런 생각을 하지못하고 있었지만 현지의 질문을 듣는 순간 치우는 그런 생각이 들어왔다. 어차피 받아들이는 현지의 입장에서는 치우 역시 기숙사에서 자신을 공격한 것들과 별다를바 없는 존재라는 것....
『그랬으면.... 내가... 다시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렇다는 대답이 나와도 치우는 할 말이 없었다. 치우가 현지에게 온 이후로 현지에게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었던듯 싶었다. 하지만 현지가 치우와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한다고 해도 지금같은 상황에서 현지를 혼자 버려두고 등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약 현지가 그렇다는 대답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될때까지 현지의 앞에 직접적으로 모습을 내보이는 일은 피해야하겠지....
그리고....
상황이 나아져서 현지의 안전이 확보된다면 현지의 바램대로....
치우는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스러움과 미안한 감정과 함께 서운함과 아쉬움 그리고 걱정스러운 생각까지도 복잡하게 얽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어왔다. 어쩌면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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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긍정이라 했던가....
치우의 얼굴에 자조로운 웃음이 떠올랐다.
치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현지에게로 다가가 현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미안..해... 』
한 번...
돌아봐줘도 좋으련만...
현지는 그대로 굳어져 돌이라도 되어버린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무섭고 힘들었다는 이야기겠지....
아쉬움과 조금의 섭섭함...
그와 함께 치우는 현지의 방을 빠져나왔다.
방안에 홀로 남겨진 현지는 치우의 모습이 사라진 후 한참동안이나 아무것도 펼쳐져 있지 않은 책상위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없는듯 멍한 현지의 눈과는 달리 책상위에 놓여진 현지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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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방...
주위에는 보통은 보기 힘든 이상한 기구들이나 기묘한 문양이나 그림들이 걸려져 있어서인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음에도 어두운 느낌이 들어오는 방이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두통이라도 있는듯 한 손으로 마사지하듯 자신의 이마를 비벼대고 있었다.
『흐음.... 』
무엇인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지 남자의 입에서 얕으면서도 금방이라도 땅으로 꺼져들어갈듯이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낮은 신음을 흘려내는 남자의 앞에는 두개의 커다란 비닐백이 놓여져 있었고 반쯤 열린 비닐백의 지퍼안쪽으로 고대 무덤에서나 발견될법한 미이라와 같이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각각의 비닐백에 쌓여져 있었다.
『그 형사 계집은? 』
한참동안 이마를 문질러대며 생각에 잠겨있는듯 하던 남자가 말을 꺼내자 뒤쪽편에 대죄라도 지은듯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그..그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
대답을 듣고있던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상당히 화가 나있는 것을 꾹 참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음성은 차분했다.
『어떤 계집 하나가 십여년 이상 공들여 만들어놓은 그 곳에 들어왔다... 실성한듯이 보이던 그 계집하나가 이제 막 완성단계에 있는 사귀들을 반이상이나 없애버리고 남자 둘을 이렇게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그 계집도.. 애써 잡아온 형사계집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
『사... 사실.. 입니다...!! 』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듯한 말투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엎드려있던 남자는 사실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자신을 믿어달라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이해하기는 어려우나.. 사실이라고 치자... 』
지금껏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구의 미이라와도 같은 시체를 지나 고두하고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잃은건 사실이지.. 거기다 내 오른팔이자 네 상관이었던 자는 죽었다.. 하지만.. 너는 이렇게 살아돌아왔지... 그런데도... 』
차분하고 조용조용하게 말을하던 남자가 갑자기 근처에 진열되어 있던 일본도를 빠르게 뽑아들었다. 그렇게 칼집에서 뽑혀져 나온 일본도가 날카롭게 불빛을 반사하며 엎드려있는 남자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남자의 목을 파고들어갈듯이 남자의 목앞에서 멈춰선 날카로운 칼날에 엎드려있던 남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그에게 저항하거나 도망가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남자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 계집이 동료를 죽여버리는 상황에서 너 혼자만 살아왔음에도 넌 그 계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네가 살아있어야할 가치가 있는가??!! 』
『네..?? 』
생각해내라는 남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엎드려있던 남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반문했다.
『생각해 내란 말이다!!! 니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 뭐라도 네가 살아서 내게 전해야할 그 어떠한 것이든 생각해내란 말이다!!! 』
무척이나 화가 나있는 얼굴을 하고도 지금껏 차분하고 낮은 어조로 이야기하던 남자의 분노가 폭발해버린듯 실내가 쩌렁쩌렁하게 울릴만큼 크고 분노한 목소리가 남자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가 무엇이라도 생각해낼만한 시간을 주기라도하듯 잠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지만 남자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네 동료를 버리고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이로구나.. 』
엎드려있던 남자를 보고있는 남자의 눈이 순간 싸늘하게 식어버린듯한 느낌과 함께 남자의 목에 있던 일본도가 공중으로 높게 치켜올려졌다.
쐐애액....
날카로운 칼날이 대기를 가르며 내리쳐지는 순간....
엎드려있던 남자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혀.... 현지!!!! 』
순간 일직선으로 내리쳐지던 칼이 그 궤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다시 다급하게 들려오는 소리...
『현지!! 분명.. 현지라고 했습니다...!!! 』
남자는 무엇인가 기억해내려는듯 인상을 잔뜩 쓰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지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이고 있었다.
『현지...? 현지... 분명 들어봤던 이름인데.... 설마... 일전에 지후가 이야기했던.....??!! 』
엎드려있던 남자가 용수철이 튀어오르듯 벌떡 일어나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남자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지... 현지라... 넌 도대체 뭐하는 계집이기에 날 방해하고 나서는것이냐... 』